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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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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미국은 200번째 생일을 축하했다. 200주년bicentennial 기념제는 애국심을 되살 리고 나라의 역사와 업적을 자랑스럽게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다(냉소주의자들은 이 축 제를 노다지 마케팅, ‘바이’센테니얼‘buy’centennial ‘셀’에브레이션‘sell’ebration이라고 이죽거렸지만).

같은 해 지미 카터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1974년 리처드 닉슨이 사임한 뒤 대통령 으로 취임한 제럴드 포드는 워터게이트 스캔들에 휘말린 닉슨을 사면해주었지만 자 신의 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민주당원으로 조지아 주지사였던 카터는 대선 후보 중 다크호스에 불과했지만 미국은 새로운 유형의 지도자, 즉 정직하면서 인정 많고 미국 출신에 닉슨 집권기의 특징인 정치적 책략에 물들지 않은 지도자를 갈구했다. 정부가 국민에게 신뢰를 잃었다는 것을 간파한 카터는 자신을 보통 사람들과 동질화시키면 서 미국의 이상주의, 상식과 도덕적 가치의 결합을 호소하며 국가를 치유하고자 했다.

카터 행정부하에 실행된 핵무기 파급을 억제하는 핵확산방지조약에 1977년 미국 과 소련을 포함한 15개 국가가 서명했다. 이듬해 카터는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 령과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 사이에서 중동평화협정을 중재했고, 1979년에는 레 오니트 브레주네프 소련 대통령과 무기 감축 동의안인 제2단계 전략무기제한협정

SALTⅡ에 서명했다. 카터는 특히 환경 문제에도 민감해 에너지부Department of Energy를 신

설하고 정화되지 않은 하수 오물의 해양 투기를 금지했으며, 노천 광산 채굴을 규제 했다. 아랍의 석유금수조치가 계속되자 에너지 절약을 장려하고 백악관의 실내 온도 를 낮출 것을 지시하는 등 솔선수범했다.

이런 성과가 있었지만 카터의 대통령직은 나라 안팎의 위기에 시달렸다. 국내적으 로는 석유금수조치로 인한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침체된 경제가 파탄 직전의 상황이 었다. 국제적으로는 미국이 오랫동안 지원했던 이란의 국왕이 1979년 초 퇴위를 강요 받았고, 투쟁적인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권력을 탈취했다. 이들은 그해 11월 테헤란 주재 미 대사관을 점거해 60여 명의 사람을 인질로 붙잡았다. 카터는 협상을 위해 끊 임없이 노력했지만 결국 인질 석방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12월 하순에 소련이 아 프가니스탄을 침공했고, 반소 운동이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하지만 모스크바에서 열

복원과 반응

미술과 사진 그리고 중간계 거리문화와 미술 공동체 뉴라이트와 시장의 힘 표현의 자유와 문화 전쟁

오피스 파크-노동과 휴식의 결합 포스트모던 건축-대중주의와 권력 포스트구조주의의 비평적 유산 노웨이브 시네마

펑크와 펑크-무언의 외침 인디영화의 부상

뉴 할리우드-위험한 도박 사업 에이즈-미술의 연대, 연대의 미술

1976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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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4 1976-1990 375 린 1980년 하계 올림픽을 보이콧한 것을 제외하면 미국은 무력해 보였다.

카터 행정부가 궁극적으로 무능했다면 그것은 카터 자신이 워싱턴의 아웃사이더 였기 때문인 듯하다. 카터는 수도에 정치적 연고가 없었던 데다 도덕적 신념이 강한 탓에 워싱턴 정계에서 성공하기 어려웠다. 결국 자신이 발의한 상당수의 법안을 통과 시키는 데 요구되는 충분한 지지기반을 의회에 조성할 수 없었다.

그러나 미술은 카터의 재임 기간 동안 번성했다. 상당 부분은 시끄러운 목소리를 내며 눈에 띄게 미술을 변호하던 부통령 부인 조앤 먼데일 덕이었다. 한 가지 주목할 만한 효과는 미술가들이 지역공동체와 의미 있는 관계를 맺으며 폭넓은 관객에게 다 가가려 했을 때, 이러한 공동체 단위에서의 예술 지원이 크게 늘어난 것이다.

1960년대 말의 어느 날, 스튜어트 브랜드라는 젊은 남자는 샌프란시스코의 자기 집 옥상에서 LSD에 잔뜩 취해 기분이 고조된 상태에서 하나의 계시를 받는 것을 경험했 다. 바로 우주에서 찍은 지구 사진이 우리가 살고 있는 행성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 놓을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우리는 왜 아직 지구 전체의 사진 을 보지 못했나?’라고 적힌 배지를 달고 캠페인을 시작했다. 그는 배지를 미항공우주 국NASA에 보냈고, 1967년 달 궤도 탐사선 루나 오비터 5호Lunar Orbiter 5는 바로 그런 이 미지들을 송신할 채비를 하고 있었다. 브랜드는 우주에서 촬영한 흑백 지구 사진 중 한 장을 1968년 처음 발간된 『지구 총도록』434 앞뒤 표지에 실었고, 이렇게 해서 생태 운동이 탄생하기에 이른다. 이 사진 덕분에 사람들은 갑자기 우리 행성에 대해 완전 히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다. 연약하고 소중하며,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답지만 고통 스러울 만큼 고독한, 우주를 표류하는 조그만 오아시스로.131

이는 사진의 힘을 보여주는, 다시 말해 어떻게 사진이 우리 자신과 세상에서의 우 리 위치에 대한 느낌을 변화시켰는 가에 대한 극적인 사례다(아울러 역설적이게도 테크 놀로지가 어떻게 반테크놀로지적 생태운동을 일으켰는지에 대한 예이기도 하다). 1970년대

초 우리는 처음으로 자궁에서 자라고 있는 태아의 사진435과 달 위를 걸은 최초의 사람 발자국436을 보았고, 텔레비전으로 워터게이트 청 문회를 시청했다. 뒤이어 컬러 폴라로이드 카메라, 인스터매틱Instamatic

카메라, 포르타팩 비디오카메라, 인텔 마이크로프로세서, CT 촬영 장 치, 케이블 TV가 생겨났다. 테크놀로지는 시각 세계를 넓히면서 우리 모두를 이미지 제작자로 바꿔 놓았다.

미술계에서 사진은 오랫동안 회화와 조각의 의붓자식처럼 여겨졌 다. 그러나 1970년대를 맞이한 테크놀로지 이미지의 세계는 사진을 특권적인 매체로서 열광받고 존중하게 만들었다. 더욱이 1970년대의 다원주의는 낡은 위계질서를 쇄신했을 뿐 아니라 새로운 미술 형식의 발명을 독려했 다. 앞서 보았듯이 사진은 개념미술의 주요소로 사용되었으며, 어스워크나 퍼포먼스 작품들을 기록하면서 미술에서 새로운 역할을 하고 있었다. 사진은 머지 않아 아방가 르드 실천의 중심부로 자리를 옮기면서 미술 창작에 있어 활발한 주류 매체로 부상하 게 된다.

434 지구 총도록 Whole Earth Catalog Portola Institute, 멘로 파크, 캘리포니아 1968

435

서독 가족계획 영화(헬가) West German Family- Planning Film(Helga) 1967

436 달 표면에 찍힌 우주비행사의 발자국.

<뉴욕타임스>

1969.7.21

미술과 사진

그리고 중간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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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7 스티븐 쇼어 무제(폴스 마켓)

Untitled(The Falls Market) 1974

크로모제닉 컬러 프린트 19.5×24.6cm 휘트니미술관, 뉴욕

438 윌리엄 에글스턴

미시시피의 민터 시티와 글렌도라 근처 (녹색 드레스의 여인)

Near Minter City and Glendora, Mississippi (Woman in Green Dress)

1969-70 다이 트랜스퍼 프린트 22.5×34.1cm 뉴욕 현대미술관

439 윌리엄 에글스턴 루이지애나 주 알지에 Algiers, Louisiana 1972년경 다이 트랜스퍼 프린트 42.7×27.9cm 뉴욕 현대미술관

440 로버트 애덤스

25번 고속도로를 따라,1968 Along Interstate 25, 1968 1968

젤라틴 실버 프린트 14.1×14.8cm 휘트니미술관, 뉴욕 441

리처드 미즈락 부점 나무 Boojum Tree 1976

스플리트 톤 실버 프린트 35.6×35.6cm 로버트 만 화랑, 뉴욕

442-45 루이스 발츠 요소 넘버 28, 29, 30, 31 Element numbers 28, 29, 30, 31 파크 시티에서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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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8 1976-1990 379

사진의 신지형도

순수사진Straight photography 혹은 전통적인 사진은 사진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몇몇 화

랑이 문을 열면서 점차 인정받게 되었고, 경매에서 가격이 상승세를 타는가 하면, 미 술 정기간행물들도 사진작가들의 작품에 관한 진지한 비평문을 싣기 시작했다. 1970 년대를 거치면서 순수사진이 거둔 또 하나 괄목할 만한 발전은, 이전에는 순수하지 않고 너무 상업적이라고 폄하받던 컬러사진이 순수미술의 적통을 잇는 매체로 인정 받은 점이다. 윌리엄 에글스턴, 스티븐 쇼어, 조엘 메이어로위츠는 자신감에 넘치는 야심찬 컬러사진을 통해 미국 거리의 토착적인 풍경들과 무계획적인 사실들의 패턴 을 탐사했다.437-439 변화하는 미국 풍경에 관한 이들의 관심은 상점가 건축, 고속도로 광고, 라스베이거스 번화가를 담은 건축가 로버트 벤투리의 습작에 필적한다.228 다른 사진작가들은 이와는 달리 미국의 풍경 변화를 더욱 냉소적인 시각으로 바라봤다. ‘신 지형학 사진New Topographics’(1975년 뉴욕 주 로체스터의 조지 이스트먼 하우스에서 열린 전시 의 명칭을 땄다)이라 불리는 이들 작품은 반유토피아적인 미국의 무표정한 이미지들로 구성되어 있다.440-445 로버트 애덤스, 루이스 발츠, 프랭크 골케, 리처드 미즈락과 독일 의 팀 베른트 베허, 힐라 베허는 공장 건물, 곡물 승강기, 산업단지, 건설 현장, 쓰레기 매립지 등지에 냉정한 시선을 던지며 환경의 잔해와 오염, 악화된 상태를 있는 그대 로 기록했다. 이들 작품이 보여준 생태학적인 감수성은 20세기에 인간이 환경에 난입 한 증거를 제시하면서, 미 서부 자연을 있는 그대로 담았던 19세기 기록사진들과 의 식적인 연관을 맺고 있다.

생태학적 인식의 표명이 1970년대 순수사진의 인기와 대중화에 기여하는 동안 사 진 매체의 잠재력은 다른 방향으로 확대되었다. 팝아트와 개념미술에서 사진을 전용

轉用하면서 사진의 혼성적 활용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연 것이다. 데이비드 호크니 의 벽화 규모의 콜라주 사진들부터 루카스 사마라스가 ‘오토폴라로이드Autopolaroids’ 연 작에서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이미지들을 찍은 뒤 꿈 같은 환상을 창조하기 위해 사진 현상 단계에서 교묘하게 조작하는 방식으로 작업한 자화상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형의 혼종이 이 시기에 번창했다. 끝으로 1980년대에 두각을 나타낸 신디 셔먼, 세 라 찰스워스, 안드레스 세라노의 대형 시바크롬Cibachrome 인화 작품은, 커다란 크기와 함께 유채에 기초한 시바크롬 인화 기법으로 탄생된 눈부신 포화 색채의 효과가 회화 와 조각에 필적했다.454.457.551

20세기 초 울워스Woolworth 빌딩이 완공된 이래 도시 스카이라인을 지배하는 인상적인 첨탑으로 위용을 자랑하던 미국의 기업 사옥들은 1970년대에 중요한 변화를 겪게 된다. 교외 지역에 위치하고 자동차로 다닐 수 있는 새로운 사회 공동체에 대한 요구가 개념만이 아닌 실체로 다가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1950년대에 도심을 벗어난 기업 사무직원들은 자신의 교외 단독주택에서 가장 가까운 고속도로 나들목에 위치한 사무실을 요구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더욱이 1960년대 이후의 평등주의적 공동체 윤리관에 따라 사람들은 기업의 첨탑 구조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수직적 위계를 구시대적 발상이라며 점차 경원시했다. 대신 새로운 오피스 모델이 부각, 발전되었고 그 모델은 1960년 독일에서 전개된 ‘오피스 풍경Bürolandschaft’이라는 개념을 고안한 건축가들이 제공했다. 이들의 비형식적이며 수평으로 짜인 오피스 구조는 팀워크와 협동정신을 북돋웠고, 내부 공간 체계는 단순하고 통일된 외벽 안에 자리한 융통성 있고 개방적인 평면 설계에 의존했다.

SOM(스키드모어, 오윙스, 메릴), 세자르 펠리, 케빈 로슈 등 다른 많은 건축가들은 당대의 미니멀리즘 미학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이 새로운 유형의 오피스 건물을 개선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로슈가 1968년 지은 뉴욕의 <포드 재단 빌딩>446 등은 구조적으로 전통적인 중심부를 비우고 그 자리에 내부 아트리움과 약간의 사적 공간을 제공해 평등한 노동력의 이미지뿐 아니라 함께 일하는 공동체의 의미를 부각시키려고 한 것이다. 펠리가 1975년 설계한 로스앤젤레스의

<퍼시픽 디자인 센터>447는 완전히 매끄럽고 밝게 채색된 유리로 이뤄진 대형 격납고들로 구성되어, 곧 널리 쓰이게 될 반사유리로 된 오피스 건물의 선례를 제시했다. 이런 건물들은 기업 문화를 주위 환경과 조화를 이루게 했을 뿐 아니라 건물이 실제로 차지하는 공간을 최소화하려고 했다. 반사되는 표면과 내부 풍경을 지닌 이 로프트 같은 빌딩들은 상대적으로 넓은 대지를 확보하고 깔끔한 잔디밭을 조성해서 직원들에게 완벽한 휴식 공간을 제공했다.

거울처럼 반사하는 이 거대한 괴물들이 그들의 ‘골프 코스’ 같은 배경에서 반짝이자 오피스 공원은 귀족의 전원주택 같은 풍경에 둘러싸였고, 여가와 노동은 새롭고 기묘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실비아 래빈 446

케빈 로슈 포드 재단 빌딩

Ford Foundation Building 뉴욕

1968

사진—에즈라 스톨러 447

세자르 펠리 퍼시픽 디자인 센터 Pacific Design Center 웨스트 할리우드, 캘리포니아 1975

사진—마빈 랜드

오피스 파크 노동과 휴식의 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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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명성이 점차 확산된 것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는 포토리얼리즘의 엄청난 대중적 성공이다. 이는 사진에 기초한 회화 양식을 가리키는 말로, 사진의 광택나는 차가운 표면을 흉내 낸 그림이다. 포토리얼리즘은 있는 그대로의 충실성에 대한 미 국인들의 취향에 어필하면서 소비 풍경에 대한 팝아트의 매혹을 극사실주의 차원으 로 끌고 갔다. 화가 랠프 고잉스, 리처드 에스테스, 로버트 벡틀, 로버트 코팅엄은 상 점 창문의 크롬 도색과 유리창, 가게 정면, 자동차 펜더, 거울 등 번쩍거리며 빛을 반

사시키는 표면에 집중해 다소 중심을 잃은 듯 혼란스러운 극사실적 풍경을 만들어냈

다.448.449 이들의 그림은 사진의 매끈한 표면, 카메라 눈의 기계적인 성격과 소통하는

것이었다. 조각가 듀앤 핸슨은 사진과 같은 극사실성을 비슷하게 적용해 폴리에스테 르 수지와 폴리비닐로 하녀, 보안경비원, 관광객 커플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입체 복 제물을 만들었다. 이들 작품은 전시실에 세팅되어 있으면 진짜 관객들과 구별하기 어 려울 만큼 실제와 매우 똑같다.450

1970년대와 80년대로 접어들면서 사진에 가장 크게 기여한 이들은 사진적 재현의 특성에 관한 비평적인 토론에 참여했던 미술가들일 것이다. 이들 대다수는(자신이 사 진작가라고 생각하지 않는 작가들조차) 실제 경험보다 이미지들이 세상을 정의하게 되었 다고 느꼈다. 평론가 더글러스 크림프가 1977년 아티스트 스페이스에서 이 시기 사진

448 리처드 에스테스

사탕가게 The Candy Store 1969

캔버스에 유채, 합성 폴리머 121.3×174.6cm 휘트니미술관, 뉴욕

449 로버트 벡틀

61년형 폰티악 ‘61 Pontiac 1968-69

캔버스에 유채 151.8×214cm 휘트니미술관, 뉴욕

450 듀앤 핸슨 개와 여인 Woman with Dog

1977 폴리비닐, 아크릴릭 폴리크롬,

천, 머리카락 실물 크기 휘트니미술관, 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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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2 1976-1990 383 작가 몇 명을 선보인 ‘사진그림Pictures’이라는 획기적인 전시 도록에 썼듯이, “그 어느 때

보다 더 우리 경험은 사진, 신문과 잡지, 텔레비전과 영화에서 접하는 그림들에 지배 된다. 이런 사진그림들 옆에 있노라면 직접적인 체험에 의한 경험은 뒷걸음치면서 점 점 더 사소하게 느껴진다. 한때 사진그림들은 현실을 해석하는 기능이 있었던 듯한데, 지금은 이것들이 현실을 삼켜버린 것 같다.”132

텔레비전과 함께 자란 이들 미술가는 사진그림들이 가진 힘을 이해했다. 그러나 그들은 베트남전과 워터게이트 스캔들을 목격하면서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이미지의 진실성에 대해 건강한 회의를 품었고, 재현의 이슈를 결정적인 문제라고 생각했다. 평 론가 크레이그 오웬스는 “재현이란 중립적이지 않고, 중립적일 수도 없다. 그것은 우 리 문화에서 권력의 행위이며, 실로 권력의 근거를 부여하는 행위이다”133라고 지적했 다. 미술가와 이론가들에게 사진은 진실성의 패러다임으로서의 위상을 상실했다.

사진적 재현에 관한 의문 제기는 바버라 크루거, 셰리 리빈, 신디 셔먼, 리처드 프 린스, 로버트 롱고, 데이비드 살리, 세라 찰스워스, 알란 매컬럼, 로리 시먼스 등 이 세 대 모든 미술가들에게 하나의 통과의례가 되었다. 미디어에 해박한 이들은 스타 탄 생, 폭력 조장, 흥미 본위의 선정주의, 이데올로기 권력, 물질 만능주의의 유혹을 부 추기는 미디어의 역량에 중독되었던 동시에 그것을 깨닫고 있었다. 사진그림은 그들 의 시각적, 비판적 관점을 구체화했다. 몇몇 사진작가들은 이전의 팝아티스트처럼 미 디어 회사에 고용되어 있었다. 크루거는 콩데 나스트CondéNast 사의 잡지 <마드무아젤

Mademoiselle>의 디자인 실장이었고, 프린스는 타임라이프Time-Life 사에서 사진을 연구했

다. 이들은 매스미디어 내부 현장과 재료에 직접 노출되어 있었고, 곧 사진과 사진 제 판 과정을 미술에 혼합해 미술 자체만큼이나 사진을 새로이 정의할 수 있게 되었다.

업계만큼이나 영향력이 큰 곳은 많은 예술가들의 훈련장이 된 발렌시아의 칼아츠 였다. 1970년대 미국의 가장 중요한 미술학교로 꼽히는 이 학교는 업계에 자양분을 제공하게 될 일종의 학제적 벌집 개념으로 월트 디즈니가 1961년에 설립했다. 1971년 주디 시카고와 미리엄 샤피로에 의해 페미니스트 아트 프로그램이 확립되었고 개념 미술가인 더글러스 휘블러, 마이클 애셔, 존 발데사리를 교수로 임용하면서 칼아츠는 노바스코샤 미술대학이나 휘트니미술관 독립연구프로그램 같은 대안적인 미술학교 로서 전위예술의 아카데미가 되었다. 칼아츠의 혁신적인 학과의 학과장을 맡았던 존 발데사리는, 자신이 1967년에 그러했듯이, 많은 학생들에게 붓을 카메라로 바꾸도록 종용했다.355.451

451 존 발데사리 애시퍼틀 Ashputtle 1982 흑백 젤라틴 실버 프린트 11장, 실버 다이 블리치 프린트(시바크롬) 1장과 텍스트 패널 전체 213.4×182.9cm 휘트니미술관, 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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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세대의 사진 작업은 사진을 ‘찍는 것’보다는 하나의 사진을 ‘만드는 것’을 강조 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를 통해 하나의 단일한 프레임 속에 완벽한 구성을 잡아내려 는 관습적인 욕구를 타파했다. 작가들은 작품의 재료로써 사진 이미지를 전용했고, 이 를 콜라주하거나, 편집해서 재정리하거나, 인용하는 방식으로 변형시켰다. 바버라 크 루거의 포토몽타주 작품, 신디 셔먼과 로리 시먼스의 연출된 타블로, 데이비드 살리의 사진적 참조물을 곁들인 그림을 예로 꼽을 수 있다.452.455-460

가장 극단적인 경우로, 리 처드 프린스와 셰리 리빈은 잡지 광고나 미술책에서 가져온 이미지의 복제본double을 만들기 위해 다시 재촬영함으로써 뒤샹의 레디메이드 전통을 대중문화의 공공 이미

452 데이비드 살리 백을 흔들자 We’ll Shake the Bag 1980

캔버스에 아크릴릭 121.9×182.9cm 엘렌 컨 컬렉션

453 리처드 프린스

무제(한 방향을 바라보는 세 여인)

Untitled(3 Women Looking in One Direction) 1980

크로모제닉 컬러 프린트 3장 각각 101.6×152.4cm 체이스 맨해튼 은행, 뉴욕

454 세라 찰스워스 1978.4.21 April 21, 1978 1978(세부)

젤라틴 실버 프린트 45장 각각 약 53.3×50.8cm 로스앤젤레스 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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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6 1976-1990 387 면은 서로 다른 문화 속에서 뉴스가 어떻게 다뤄지는지, 누가 그리고 무엇이 중요한 지를 암시하기 위해 어떻게 구성되고 있는지, 그리고 사진으로 재현된 여성이 얼마나 놀랄 만큼 적은지 보여준다.

<무제 영화 스틸>455-457에서 신디 셔먼은 그녀 자신이 카메라 앞에서 일련의 전형 적인 누아르 필름의 배역 인물들과 여성성으로 코드화된 이미지들을 연기하는 모습 을 연출, 감독해서 자신의 이미지를 능동적으로 통제하고 있다. 다른 모델들을 모사 하기 위해 그녀 자신을 모델로 기용하여 우리에게 조건 지워진 상황을 고찰하게 하며 (남성의)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여성에서 벗어나 재현 그 자체로 시선을 빗나가게 하는 것이다. 일부는 퍼포먼스 예술가로서, 일부는 사진작가로서 셔먼은 스스로 주체이자 객체이고, 이미지이자 작가였던 것이다. 그녀의 여성들과 그녀의 작품들은 욕망, 기 대, 기만의 복합체로 읽혀지는 모호한 불안을 투사하고 있다. 로리 시먼스도 셔먼처럼 지배적인 성적 스테레오타입들을 파고들었다. 시먼스는 인형, 복화술사의 마네킹, 의 인화된 사물들을 대용물로 사용해 일부러 어색하고 무표정한 타블로들로 포즈를 취 지 저장소로 확장시켰다.453.466.467

이들 미술가의 작품은 비록 각각 상이한 형식을 취 했지만, 사진을 우리 자신의 이미지를 포함하는 현실을 ‘창조하는’ 시지각의 한 방식 으로 사용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세라 찰스워스는 1970년대 후반부터 시작한 연작 중 하나인 <1978.4.21>454에서 알 도 모로 이탈리아 총리 납치라는 하나의 사건을 추적하기 위해 세계 각국의 신문 1면 을 사진으로 복사했다. 그 다음 텍스트를 잘라내서 발행인란과 사진들만 남게 했다.

그 결과 생긴 연속적인 이미지는 그것들의 크기, 지면과의 상호관계들과 더불어 새 로운 서사를 창조했다. 처음에는 개조된 지면으로 인해 이미지들이 터무니없이 초현 실적으로 접속되어 있다는 점을 드러내려는 듯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이들 지

457 신디 셔먼 무제 93번 Untitled #93 1981 실버 다이 블리치 프린트(시바크롬) 61×121.9cm 작가 소장 456

신디 셔먼 무제 영화 스틸 16번 Untitled Film Still #16 1978

젤라틴 실버 프린트 25.4×20.3cm 개인 소장 455

신디 셔먼 무제 영화 스틸 6번 Untitled Film Still #6 1978

젤라틴 실버 프린트 25.4×20.3cm 앨빈과 매릴린 러시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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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8 로리 시먼스

걷는 카메라Ⅱ(지미 카메라) Walking CameraⅡ (Jimmy the Camera) 1987

젤라틴 실버 프린트 210.3×120.7cm 휘트니미술관, 뉴욕

459 바버라 크루거

무제(너의 열광이 과학이 된다)

Untitled(Your Manias Become Science) 1981

젤라틴 실버 프린트 94×127cm

피터 브로이도 부부 컬렉션

460 바버라 크루거 무제(너의 몸은 하나의 전쟁터다) Untitled(Your Body is a Battleground)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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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0 1976-1990

하게 했다.458 이 같은 어린이극 기법은 그녀가 연출한 소외되고 불안정한 환경으로 관객을 유인하며, 거기서 역할 놀이와 역할 모델들이 검토될 수 있도록 한다.

바버라 크루거는 20세기 초 러시아 구성주의 작가들과 바이마르 공화국의 독일 미 술가들이 만든 선전・선동용 포토몽타주 정신을 바탕으로 환기적인 기성 흑백 이미 지들을 확대한 뒤 그 위에 이탤릭체 글자가 적힌 대담한 빨간색 종이 블록을 붙였다.

‘시간이나 때워라You Kill Timeʼ ‘너의 응시가 내 옆얼굴을 때린다Your Gaze Hits the Side of My Faceʼ ‘너의 열광이 과학이 된다ʼ459 ‘너의 몸이 전쟁터다ʼ460 같은 텍스트들은 미디어와 광고 문안에 담긴 남성의 소리를 역전시킨 사회 고발적 진술이다. 크루거는 여성들을 주체이자 관객으로 다뤘고, 책, 포스터, 광고판 등 많은 공공 프로젝트들을 통해 미디 어 공간을 자신의 대안적인 메시지들을 위해 개간한 것이다. 그녀의 상표 같은 작품 양태가 미디어에 의해 널리 모방될 만큼 효과적이었다는 점은 미술과 미디어가 상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근자에 그녀는 <타임>과 <에스콰이어Esquire>

같은 잡지의 표지 디자인을 의뢰받기도 했고, 1992년 <뉴스위크>는 미국에서 최고의

461 제니 홀저 선동적 에세이 Inflammatory Essays 중에서 선별.

1979-82 오프셋 종이 포스터 각각 43.2×43.2cm

462 제니 홀저 진부한 문구들 Truisms 1982 스펙타컬러 광고판 561.6×1219.2cm 타임스스퀘어, 뉴욕 공공미술기금 소장

463 제니 홀저 애가 Laments 1989 설치 장면 디아 아트 재단, 뉴욕 LED 전광판과 석관 석관 각각 61.9×208.3×76.2cm 전광판 각각 325.1×25.4×11.4cm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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