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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윤영선 희곡집

(2)

윤영선

・ 1954 – 2007

© 이은경

(3)

윤영선 희곡집 Ⓒ 박남숙|1판 1쇄 인쇄 2008년 10월 3일|1판 1쇄 펴냄 2008년 10월 10일 지은이·윤영선|엮은이·김광림, 김방옥, 김석만, 박상현, 안치운

펴낸곳·지안출판사|펴낸이·윤정훈|편집·윤정훈 황지영|디자인·이정현

등록·2005년 2월 28일(제300-2005-27호)|주소·서울 종로구 내수동 71 경희궁의 아침 2단지 217호 전화 02-766-1713|팩스 0505-115-1713|이메일 jianbooks@gmail.com

영업· 구본산, 김한중, 박윤경, 윤재숙|전화 02-322-3575|팩스 02-322-3858 출력·영준그래픽스|인쇄 제본·백산하이테크

ISBN 978-89-958970-6-5 03810 값 16,000원

윤영선

희곡집

(4)

나무가 되고 싶었던 극작가

만물이 그러하듯이 사람에게도 이름이 있어 다행스럽다. 글을 쓰는 어떤 이를 어떤 작가라고 칭하는 것은 간단하지가 않다.

윤영선은 어떤 작가인가. 지나간 시간은 참으로 짧기만 하다. 동년배 보다 극작가로서, 연출가로서 데뷔가 늦었던 그는 십여 년 가쁘게 작 품 세계를 일궜다. 후배들과 작업하고 경쟁하다 보니 그는 늘 젊었고 언제나 맏형이었다. 흔히 <키스>와 <여행>을 그의 대표작이라고 하 지만 그로써 세속의 명예를 조금 얻었을 뿐, 그의 작품들은 모두 제 각각의 제목으로 깊은 존재감을 새겨 놓았다.

현대 미국의 실험극에서 형식적 영향을 받은 초기작 <사팔뜨기 선문 답> <떠벌이 우리 아버지 암에 걸리셨네>에서 아버지라 은유되는 우 리 문화와 제도의 뿌리와 쟁투하던 그는 곧 자기 자신만의 목소리를 드러낸다. <맨하탄 일번지> <G코드의 탈출> <내 뱃속에 든 새앙쥐>

에서 국가 또는 가족사로부터의 탈출 또는 그 존재론적 불안을 노래 하더니 이어 가장 독창적인 그만의 언어로 <키스>를 만들어낸다. 마 치 양자역학적 세계관을 사랑과 관계에 축소시켜 놓은 듯 그는 <키 스>로 짧고도 큰 울림을 전해준다.

이런 인식이 사실적이면서도 부조리한 터치로 확대되어 이웃 관계의 폭력성을 드러낸 것이 <파티>이다. <나무는 신발가게를 찾아가지 않 는다>와 <미생자>에서 그는 돌연—돌연이 아니라 내재돼 있던 그만

의 인간성이 드러난 것이리라—자연과 한 몸이 된다. 그는 자연주의 자를 넘어 나무주의자가 되어 문명의 폭력에 아파한다.

<여행>이 발표되었을 때 그의 시적 난해성에 살짝 비껴 있던 많은 독 자, 관객들이 그를 향해 돌아앉는다. <여행>은 범속하고도 따뜻한 언 어로 늘 우리 곁에 있었던 죽음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여행>을 본 많은 관객들은 “내 이야기”로 이야기했다.

그리고…… <임차인>은 구조적인 구성으로 부조리한 삶의 단편들을 날카롭게 묘사하면서 그의 연극세계에 마침표를 찍는다.

이 희곡집으로 처음 공개되는 미발표작 <노벨문학상 수상연설문>은 또 하나의 형식적 파격이다. <죽음의 집> <죽음의 집2 : 쥐가 된 사나 이> <쥐가 된 사나이> <거세>를 보면 그가 깊이를 모를 타나토스의 세계를 계속 여행 중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들이 더 다듬어지고 맺어지지 못했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가 짧은 세월동안 이토록 길고 굽이진 창작의 여정을 보여주고 떠 났기에 어떤 수식어로 한정해 그를 칭하기가 어렵다. 우리는 그를

‘나무가 되고 싶었던 극작가 윤영선’이라 부른다.

2008년 10월

윤영선 유고집 출간위원 일동

(5)

이상도 해라.

왜 나는 정체 모를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나 이 런 글들을 남기는 걸까?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가 우연히 모여 이 육신을 만들었듯 내 이 글들도 우연일까. 기억하고 기억하고 또 기억하고 기억하려고 해도 지난 일들은 시간의 풍화작용에 날려가고 남아있는 것들은 그저 희 미한 편린들 뿐.

하지만 여기 실린 희곡들은 발표된 당시 그럴만한 이유나 필요에 의 한 것들이었을 것이며 시절 인연으로 만난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 속 에서 이루어진 것들일 것이다.

그 많은 벗들, 날 떨리게 해주었고 피폐해진 내 가슴에 작은 불씨를 살려낸 그들의 눈빛과 따스한 말들을 어찌 잊겠는가.

뿐이랴, 산 속에 홀로 있었을 때, 흐느끼지 않도록 도와준 나무와 풀 들, 고양이개코, 샘터에서 눈싸움 했던 청설모, 내 옥수숫대를 넘어뜨 렸던 바람, 밤 마당을 환한 꽃으로 장식해준 배나무, 밤하늘 위에 떠 있었던 오징어배의 불빛, 풀벌레들……

내 글들이 그 많은 샛길을 찾아 달아날 수 있었으면.

빈 하늘 가장자리를 스쳐 지나가며 우는 기러기.

___ 《윤영선 희곡집 1》 (2001) 작가 서문

(6)

발표작

미발표작

청년기 작

나무가 되고 싶었던 극작가 6

작가 서문 8

사팔뜨기 선문답 14

떠벌이 우리 아버지 암에 걸리셨네 49

맨하탄 일번지 95

키스 131

G코드의 탈출 163

내 뱃속에 든 새앙쥐 205 파티 : 그로테스크 심포니 215 나무는 신발가게를 찾아가지 않는다 279

미생자 311

여행 363

임차인 415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문 457 죽음의 집 2 : 쥐가 된 사나이 479

죽음의 집 517

쥐가 된 사나이 541

거세 575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나요 607

누가 온달을 죽였는가 645

윤영선의 삶과 글의 무늬·안치운 684 윤영선 유고집을 내며 688

차례

© 노은

(7)

사팔뜨기 선문답

난 나를 모르는데 왜 넌 너를 아니

초연

1994. 9.15. - 10. 9. (연우소극장)

연출

윤영선

연기지도

김수기

음악

김준성

출연

기신정, 김석주, 박남희, 고영란, 김내하,

김재홍, 신덕호

(8)

16 17 이 작품에 일반적인 의미의 등장인물은 없다. 등장인물에 어느 정도 사

회적 위치가 부여되어 있지만, 일관되고 통일된 개인의 성격 구축이나 구체적인 사회적 정황이 제시되지는 않는다.

관객이 보고 느끼는 것은 배우의 내면에 미리 존재하는 개별성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배우들이 빚어내는 몸짓과 그들이 서있는 위상에 의해서 또한 그러한 것들에 덧붙여지는 문학적인 표현(서정적 침입)과 음악에 의해서 빚어내는 이미지를 통해서 관객 스스로가 의미부여를 하는 것들 이다. 달리 말해서 그 유동적인 이미지에 명료함과 통일성을 부여하는 것은 관객이다. 그 과정에서 관객은 불가피하게 자기의 내면세계를 작 품에 투사하고 고정된 틀 속에 그들을 집어넣으려고 시도할 것이다.

배우 위에 자기의 자아를 겹치는 과정에서, 어떤 관객은 자기 주체를 확 실히 하기 위해 그 이미지를 축소시키고 고정시킬 것이며, 또 어떤 관객 은 그 유동성 속에 자기의 주체를 자유스럽게 끌고 다니기도 할 것이다.

관극과정이란 의미화 과정이기에 그러한 해독의 폭력 밑에서 배우들이 창출해내는 이미지는 불가피하게 일그러지고 왜곡을 겪을 것이다.

이 작품은 한 작가의 내면 속에 떠도는 생각들을 형상화 시켜놓은 것 이다. 작가의 정체성과 사유과정은 실제 공연공간 속에서 관객에게 전 달될 것이다. 이 텍스트는 무대와 배우들의 몸짓과 음악들이 빠져 있는

‘말들’이기에 공연의 대체물에 불과하다. 공연은 서정적인 말/음악/배우 들의 몸짓/오브제들이 함께 어우러져 전체 이미지를 빚어낼 수 있을 것 이다.

등장인물은 6명이다. 그 등장인물들은 한 작가의 내면에 떠오르는 작가 의 생각이나 이미지이면서 동시에 그 생각과 이미지를 구성하는 재료이 다. 그러나, 인간의 내면이 어찌 한 가지 목소리로 이루어졌겠는가? 다 만 많은 목소리 중에서 한 가지의 우세한 목소리를 ‘자기’라고 생각하고 다른 목소리들을 억누르거나 거부하거나 ‘죽여버림’으로써 자기의 동일 성을 유지할 뿐이지. 그 6명의 등장인물들은 작가의 내면 속에 억눌려 있던 목소리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배우들 각각이 특정한 인물을 대변 한다고는 생각하지 말자. 그런 동일성은 느슨하게 이어져 있을 뿐이다.

편의상 6명의 이미지와 작가의 목소리(넝마주의)에 대해 개략적으로 설 명해 보자.

N O T E

__ 이미지1(여자) : 투쟁적인 면이 있으면서도 상황에 따라서는 지배 세 력에 동조적이고 때로는 그것을 괴로워하고…/시위자/간호원/창녀/

딸/배우

__ 이미지2(남자) : 이미지1과 첫 번째 특징은 동일함/보통사람/무대 감 독.

__ 이미지3(여자) : 끝까지 말을 하지 않은 인물. 또는 작가의 내면에서 끝까지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자아, 아니면 작가의 깊은 상처이거나 죽음, 아니면 거세된 목소리나 인간의 인식체계 내에 포함되어 있는 불가사의한 영역, 아니면 이성의 영역에서 배제된 광기/시위자/임산 부.

___ 이미지4(여자) : 목격자이면서 끝없이 슬퍼하는 어머니 형상. 물 이 미지.

___ 이미지5(남자) : 전반적으로 지배적이고 이성을 대변하는 형상/아버 지/지배자/의사.

___ 이미지6(남자) : 투쟁적이지 못하면서 그 언저리에서 맴도는 형상, 어쩌면 회의하는 지식인의 형상/꼬마/배우/아들.

___ 작가(목소리) : 작가의 내면의 목소리. 목소리를 낭송하는 자는 무대 위에 널브러진 신문지를 치우는 넝마주의 역을 함.

(9)

19

1 소개

배우 6명이 무대 뒤쪽 벽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다. 6명 모두 똑같이 고 개를 숙이고 오른손을 이마에 짚고 있다. 아직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목소리 내 이름을 묻지 말라. (사이) 나 작가야.

배우들, 15도 정도 고개를 삐딱하게 든다. 모두 선그라스를 끼고 있다.

목소리 지금 생각하고 있는 중이야. (사이) 멋있어? 부끄러워서 선그 라스를 끼어 본 거야. 뭐? 반말해서 기분이 나쁘다고?

배우들 서서히 일어난다. 여전히 고개를 15도 정도 기울어져 있다.

목소리 저 여섯명이 모두 나라니까. 믿어줘. 지금은 저렇게 사이좋게 서 있지만, 두고 봐. 자기 멋대로 놀테니까. 그럼 내 목소리가 어떤지 들어 볼 거니?

배우들 정면을 보고 서 있다가 누군가 ‘아—’ 하고 소리를 내지르자 나 머지 배우들이 같은 어조로 따라서 하다가 다같이 소리를 낮추어 입안 으로 소리를 머금는다. 두 번째 배우가 다른 음높이로 ‘아—’ 하고 소리 를 내면 역시 나머지 배우들이 같은 식으로 따라서 한다. 세 번째 배우 가 ‘아—’ 하고 소리를 내는 순간 배우들 다함께 소리를 지르면서 앞으 로 튕기듯 나오다가 잠깐 정지한 틈을 타서

목소리 난 저렇게 쪼개져 있어.

(10)

94 나타난다. 아버지의 가쁜 숨소리.

아버지, 아직도 거기 계시나요? 왜 아직도 중환자실에 누워 계 시나요?

아버지 고백해다오. 너는 누구냐? 네 이름을 말해다오. 네 이름이 햄 릿이냐? 아니면 오레스테스냐? 아니면 누구냐? 너의 정체를 밝히면 나도 내 정체를 드러내겠다. 내가 누구인지. (사이) 그런 데 내가 누구지요? 여보세요, 내가 누구지요? (사이, 숨소리. 순 간 TV가 지지직거린다) 이제 나는 조용히 해야지. 나는 TV전문 가가 아니니까. 그런데 내 몸이 왜 이렇게 엉망이 되어버린 거 야? (다시 TV가 심하게 지직거린다) 내 몸이 이렇게 엉망이 돼가 는데 도대체 테레비 수리공은 언제 오는 거야?

(가방을 연다) 아버지, 이제 내 가방 속에 들어가세요.

아버지, 손짓으로 작별 인사. 나, 가방을 열고 TV를 집어넣는다. 나, 가 방을 들고 링거병에 매달린 병아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선다. 멀리 희 미하게 문이 보인다.

끝.

맨하탄 일번지

초연

1997. 3. 25. - 4. 20. (성좌소극장)

연출

윤영선

무대

손호성

조명

서정호

출연

장두이, 전수환, 노은주, 조영목

(11)

97

1 방

지하실 골방. 차라리 창고에 가깝다. 야채가게 지하실 창고의 한 켠을 방으로 개조한 것이다. 천정에 배수관과 철골들의 형체가 드러나 있다.

무대 오른쪽에 자그마한 탁자와 몇 권의 책, 그리고 전기스탠드. 탁자 옆에는 가방. 탁자에서 무대 중앙 쪽으로 상준이의 야전침대가 놓여 있 다. 출입구는 오른쪽 벽면과 뒷벽이 만나는 곳에 나있다.

무대 뒤쪽 중앙에는 TV. 보다 왼쪽, 계단 밑의 공간에 코카콜라와 맥주 캔, 그리고 빈 상자곽들. 그 옆에 화장실로 가는 입구가 있다.

무대 왼쪽 바닥에 승길의 침구가 깔려 있다. 보다 왼쪽으로 낡은 냉장 고가 있고, 뒷벽에는 여자 나체사진들이 붙어 있다. 간이 옷걸이에 승 길이의 옷이 걸려 있고, 바닥에 빨래감과 취사도구, 우유 박스들이 어 지럽게 널려 있다. 무대 중앙 쪽에 둥근 테이블과 의자 2개. 그 위에 신 문, 플레이보이 등의 잡지들.

극이 시작될 때 TV는 켜져 있는 상태다. 심야프로가 나오고 있다. 승길, 테이블에 엎드린 채 자고 있다. 상준이가 몸을 뒤적일 때마다 야전침대 가 삐그덕거린다. 멀리서 앰블런스와 소방차 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승길, 눈을 뜬다. 하품을 하면서 리모트 컨트롤로 텔레비젼을 끄고 의 자에서 일어선다. 어깨를 어루만지면서 상준이 쪽을 보고 혼자서 중얼 거리더니 냉장고로 간다. 냉장고 문을 열자 환한 빛이 터져 나온다. 눈 을 찌뿌리며 음료수 캔을 꺼낸다. 몇 모금 마시면서 벽에 붙어 있는 스 위치를 올린다. 승길, 하품을 하면서 띄엄띄엄 말한다.

승길 야, 상준아… 글쎄… 꿈에 주인 마누라를 봤다니까… 재수 더 럽게 없는 꿈이야… 고게 팔자걸음으로 아그작아그작 걸어오

등장인물 승길(30대 초반) 상준(30대 중반) 수진(20대)

1990년 대

장소

모든 사건은 맨해튼에 있는 야채 가게의 지하실에서 일어난다.

© 이은경

(12)

98 99

승길 허허, 솜방망이로 가슴을 칠 일이다. 이렇게 내 우정을 몰라 주 다니. 임마, 그건 널 생각해서 했던 말이야.

상준 어쨋든 난 이제 저 지린내 나는 메트리스—

승길 침대.

상준 (응 그런가 하는 표정으로) 그래 침대. 상준이는 이제 침대에서 안 잘 거야. (바닥에 웅크리고 눕는다. 승길, 혼자 슬 며시 웃더니 살그 머니 상준이 옆에 누워서 상준이를 껴 안는다. 상준, 소스라치게 놀래서 일어난다) 상준인 호모가 아니야.

승길 (낄낄거리고 웃으면서 도망가는 상준이를 쫓아간다) 여봉 왜 그래?

(상준, 한손엔 이부자리를 들고 또 다른 손으로 사타구니를 움켜잡고 한쪽에서 서서 경계한다) 여봉 배 고파? 응? 내가 라면 끊여줄까?

응? 잠깐만 기다려 응? (일어나서 책상 위에 있는 냄비를 들고 입으 로 안을 불어낸 다음 손으로 닦아낸다)

상준 정지!

승길 왜? (무엇인가 말할 듯 말듯하며 승길이를 쳐다본다) 왜? 나 줄게 있 어? 있으면 줘 봐. (상준, 어쩔 수 없다는 듯 메트리스 밑에 숨겨놓은 마른 사과를 꺼내 아까운 듯 몇 번을 망설이다가 옷에 슥슥 문지르고 난 뒤에 승길이에게 내민다. 그러나, 승길 냄비를 머리 위로 쳐들고서 던지 라는 시늉) 슛. 슛슛. (상준, 그 놀이에 끼어들기 싫다. 그러나 승길, 뒷 걸음 치며) 슛슛. (상준, 승길이에게 다가가다 무대 중앙에 자기 가방과 신발이 놓여있는 것을 바라본다. 왜 그것들이 거기에 놓여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표정. 갑자기 사과를 바닥에 동댕이치고 그쪽으로 간다. 승 길, 사과를 집어들고) 이 새낀 내가 돼지인 줄 알어? 미국 돼지도 이런 건 안 먹겠다. 하긴 돼지 우리에 사니까 돼지는 돼지다만.

상준 그래도 이 방은 공짜야. (자기 탁자에 가서 앉는다)

승길 뭐 공짜? 웃기지 마라. 주인이 이 방을 쓰게 한 건 우릴 창고 지키는 개새끼쯤으로 여기기 때문이야. 주인 새낀 우리가 밤 더니 내 앞에 턱 스드라구. 그러더니 미스타킴 날 좀 봐요. 이

러구 아양을 떨더라니까. (상준, 시트를 머리에 뒤집어쓴다) 들어 봐 지금부터 진짜라구. 그러더니 요염하게 웃으면서 치마끈을 살며시 끌르는데 가랭이 사이에서 백불짜리가, 빳빳한 백불짜 리가 쏟아져내리는데… 너— 내 얘기 듣는 거야? 들어보라니 까 지금부터 진짜래도. (상준, 마지못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앉는다) 웅, 그래서 그 돈을 줏어 가지고 오스카 상을 받으로 간 거야.

상준 상준이,재미없어. (다시 자리에 눕는다)

승길 그래 쌔끼야, 재미 없으면 된장에 풋고추 박히듯 침대에 쳐박혀 서 잠이나 자. (김이 빠졌다는 듯 탁자로 가서 의 자에 앉아 있다가) 넌 자다 일어난 놈이 오줌도 안 마렵냐? 나가서 오줌이나 싸고 와라.

상준 (벌떡 일어나 자기 사타구니를 보더니 새삼스럽게) 아차.

승길 (화장실에 가는 상준이를 가로막으며) 응, 그래서 내가 그 꿈에 오스 카 상을 받으러 단상에 올라갔거든. 야, 사람들은 엄청나게 모여 있지, 휘황찬란한 조명은 때리지, 줄리아 로버츠, 데미 무어가 젖 꼭지가 보일락말락한 드레스를 입고 나와서 빵긋빵긋 웃지 또 그 옆엔 죽은 제임스 딘, 쌍권총을 차고 나온 크린트 이스투우드—

상준 상준이, 재미없어. (자기 침대 있는 쪽으로 다시 간다)

승길 왜 그래? (약간 겁이 난 표정이다. 침대 근처로 가며) 너 진짜 화났 어? (사이) 그래도 넌 푹신푹신한 침대에서 자니까 잠이나 잘오 지 난 이 딱딱한 마룻바닥에서 자니까 더러운 개 꿈만 꾸잖아.

상준 알았어. (이부자리를 걷어들고 승길이 침구 있는 쪽으로 온다. 침대를 가르키며) 오늘부터 네가 저기서 자. 그리고 저게 푹신푹신한 침대야? 그리고 저게 네 꺼야?

승길 맨하탄 길거리에 굴러 다닌걸 내가 먼저 봤잖어.

상준 같이 봤지, 언제 네가 먼저 봤어? 그리고 넌 침대에서 자면 허 리 아프다고 했잖어.

(13)

100 101

마. (사이) 가게 물건은 원래 훔쳐먹는 게 아니야.

승길 세상 다 그런 거지 뭐. 그 많은 것 중에서 내가 몇 개 먹는 다고 축나냐? 너도 제 명에 살고 싶거든 요령껏 일해라. 고참이 말 할 때 새겨들어 임마.

상준 너 계산대에 손대는 것 같더라.

승길 허허 점점 점입가령이네.

상준 (승길이의 말에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생각하다가) 점입가령은 원래 점입가경이야.

승길 그게 그거지 뭐. 쑥떡처럼 말하면 찰떡처럼 알아 들어.

상준 넌 쉴새없이 떠드는구나. (자기 말에 스스로 만족하여 씨익 웃고 메 트리스 쪽으로 간다)

승길 세상에선 돈이 제갈량이고 봉추 선생은 이 귓구멍이야. 열심 히 줏어들으면 그게 나중에 다 재산이야. (사이) 너 한국에 있 을 때 대학 문턱이라도 얼쩡거려 본 모양인데 그렇다고 사람 무시하지 마라. 내가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있는데 네가 말하지 않아도 훤히 알아 임마. 너 미국 와서 공부한답시고 부모가 보 내준 돈으로 빵빵한 스포츠카에 쭉쭉 빠진 기집애들 태우고 다니면서 놀다가 학교에서 짤린 거지? 짜식 제대로 공부했으 면 왜 이런 지하실 방에서 나 같은 놈하고 이 지랄하면서 쳐박 혀 있겠어?

(상준, 시트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침대에 눕는다) 나하고 얘기 하기 싫다 이거지. 좋아. 알았어. 나도 얘기 안 할테니까. (승길, 테이 블에 놓인 도색잡지를 집어들고 자기 자리에 눕는다. 상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다) 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너, 나한테 욕 한 거지?

(상준, 여전히 중얼거리지만 알아들을 수 없다. 승길, 은근히 걱정이 된 다) 자식이 속이 허해서 헛것이 보이나? 야 상준아, 너 왜 그 마다 입맛대로 이것저것 빼먹는다고 생각할 거라구. 그래도 도

둑놈이 들어온 것보다 낫다고 생각되니까 모른 척하는 거야?

이런 한심한 놈, 너 그래 가지고 어떻게 미국 생활 할거냐? 너 내가 출출해서 라면 하나 끓여 먹는 게 그렇게 마음에 쓰이냐?

어제는 주인 마누라 년이 뭐라구 하디? 아유 미시타킴, 밤에 출 출하면 창고에 있는 싱싱한 과일도 갖다먹고 꼬리뼈도 과다 먹 어용. 고년이 내 뒤통수치느라고 그러는 거지 뭐 정말로 갖다 먹으라고 그러는 줄 알아? 그런데 너한텐 뭐라구 하디. 미시타 박, 못 팔게 된 과일 있잖아, 상품가치가 떨어진다고 해서 못먹 는 건 아니니까, 그런 건 알아서 둘이 먹여용, 이 지랄하고 있 잖아. 그건 니가 물러터져서 그런 거야. 임마 그럴 땐 듣고 있 지만 말고 한 마디쯤 쏘아부쳐. 아줌마나 갖다먹으세요.

상준 (사과가 아까와서 사과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원래 퍼석퍼석한 사 과가 맛있어.

승길 어라, 관 속에 들어갈 노인 같은 소리하고 있네. 과일이나 여자 나 싱싱한 게 좋지, 쭈그렁 망태 같은 것을 누가 좋아하나? 케 쉬대에 주인 예편네하고 수진이하고 같이 앉아 있어 봐라. 누 가 실실 쪼개고 있는 주인 예편네한테 가디, 싱싱한 수진이한 테 가지. 너 그렇게 오래된 게 좋으면 주인 예편네 꼬셔서 장가 나 가라.

상준 (승길이가 사과를 가지고 장난치는 것에 화가났다) 라면 먹고 잠이나 자.

승길 어제 돼질지 모르는 놈이 맨날 라면이나 끊여먹게 됐어. (장난 감 권총을 뽑더니 어조를 바꾸어서) 어느 날 깜둥이가 재수 없게 여길 들어와 봐. (상준, 겁에 질려서 도망친다) 빵빵. 두 방이면 너 하고 나하고는 굳바이야. 멍청하게 나란히 서 있다간 빵, 한 방 이면 끝나는 거구. 이 쪼다야.

상준 (그 말을 부정하고 싶다. 바짝 얼굴을 들이대고) 재수 나쁜 소리하지

(14)

130

야할 거야. 다시는 하늘의 별들이 떨어지지 않도록. (상준, 말을 마친다. 멍하니 서 있다가 선그라스를 쓴다) 동지! (가방을 든다) 난, 시간이 없소.

승길 너 진짜로 갈 거야?

상준 이젠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이 없소. Good Bye! (승길이에게 손을 내민다)

승길 상준아! 나, 다시는 연극 안하기로 했는데 (상준이를 만류하며) 너 나하고 한 번만 더 연극 안 할거니? 이건 진짜로 재미있는 거라구. 기다려. (탁자 위에 올라가서 하얀색 시트를 얼굴에 두른다.

마치 잠자리에서 갓 깨어난 여인과 같은 모습이다) 난 지금 엠파이 어 스테이트 빌딩 위에 올라가 있는 거야. 난 새처럼 날고 싶 어. (팔로 날개짓을 한다) 넌 내가 훨훨 날 때 그 총으로 나를 쏘 는 거야. 멋있지. 응?

(상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유심히 바라보더니 가방을 들고 출입구 쪽 으로 간다) 난 죽었다가 다시 태어날 거야. 아니, 차라리 춘자라 는 여자라고 하자. 그래, 난 춘자야. (상준이가 출입구로 나가려하 자) 동지! (상준, 멈칫 선다) 동지! 난 동지의 적이요. 그러니 어 서 그 권총으로 나를 쏘시오. (상준, 그 말에 다시 방안으로 들어와 권총을 뽑아든다) 그래. 빨리 쏴. 난 죽고 싶어. 난 죽었다가 다시 태어날 거야. 하늘을 훨훨 날 때 날 죽여줘. 난 죽어서 하늘의 별이 될 거야. 그러니 어서 날 쏴. 난 죽고 싶단 말이야. 빨리, 빨리 나를 쏴!

상준, 승길이를 겨냥하고 쏘려던 권총을 자기 입 속에 집어넣는다.

암전.

끝.

초연

1997.5.1. - 5.31.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 연출

1부 윤영선 | 2부 박상현 | 3부 이성열 출연

1부 이용규, 박미현 | 2부 남긍호 3부 김대통, 임진순, 정은경, 홍경숙, 최보규, 이준혁, 김성희

*한국연극평론가협회 선정 1997 올해의 연극 베스트3 수상

1998. 10. 17. - 10. 29.(문예회관 소극장) 연출

1부 김동현 | 2부 박상현 | 3부 이성열 출연

1부 오신환, 진경 | 2부 남긍호 3부 김대통, 임진순, 정은경, 김미자, 김미자, 최보규, 이준혁, 정진희, 이다기, 김경희

1999.6.8. - 7.4.(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연출

1부 김동현 | 2부 박상현 | 3부 이성열 출연

1부 김내하, 이경선 | 2부 남긍호.

3부-나자명, 임진순, 김미자, 이지하, 이준혁, 최보규, 김상근, 이다기, 황영민, 김경희, 김수동

키스

(15)

133

1 남, 녀 서로 떨어져 서있다.

나, 여기 있어.

나도 여기 있어.

거기?

(사이) 거기 어디?

그냥 여기.

그냥 거기?

아니 여기.

그러니까 거기.

아니. 거기가 아니라 여기 말이야.

(사이) 여기.

그러니까 거기지.

아니.

(사이) 여기여기여기.

(사이) 나, 여기 있어.

(긴 사이) 나, 여기 있어.

거기?

(사이) 거기 어디?

© 이은경

(16)

134 135 아니, 너.

(사이)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어?

아니,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어.

아니라니까.

(사이)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어.

(긴 침묵)

나 거기 있고 너 여기 있어.

(사이) 다시 해 봐.

나 거기 있고 너 여기 있어.

(사이) 틀렸어.

(사이)

나 여기 있고 나 거기 있어.

(사이) 틀렸어.

(사이)

너 여기 있고 너 여기 있어.

(사이) 틀렸어.

(사이)

나 여기 없고 너 거기 있어.

(사이) 틀렸어.

(사이) 그냥 여기.

그냥 거기?

아니, 여기.

그러니까 거기.

아니 거기가 아니라 여기 말이야.

(사이) 여기.

(사이)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어.

(사이)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어.

(사이) 너?

나.

그러니까 너.

아니 나.

(사이) 있다고?

응.

나도 그래.

너도?

아니 나.

(사이) 너라니까.

나라니까.

(사이) 나?

(17)

진짜로 입?

그래, 진짜로 입.

(사이) 같이 할까?

응.

(사이) 남/여 입!

서로 입을 꾹 다물고 바라본다.

사이.

서로 무엇인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을 듯 하지만 서로 눈치만 살핀다.

사이.

서로 조금씩 조금씩 더 가까이 간다.

무엇인가 말할 듯하지만 입을 벌리지 않는다.

입술이 곧 닿을 듯. 입술이 약간 움직일 듯.

서로 바라본다.

암전.

끝.

G코드의 탈출

초연

1998. 12. 24. - 1999. 1. 3.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

연출

박상현

무대

김준섭

조명

김종연

음악

김준성

드라마터그

김동현

출연

양양조, 이혜원, 홍성경

(18)

165

1

흔히 볼 수 있는 여관. 무대 왼쪽에 방문이 있다. 그 문을 열고 나가면 복 도와 연결되는 출입문이 있고, 그 옆에 붙어있는 화장실. 물론 관객들은 화장실과 출입문을 볼 수 없다. 만약 방을 비스듬하게 배치하면 보일 수 도 있겠다. 정면 뒷벽 받침대 위에 놓인 소형 텔레비전과 노란색 쟁반.

쟁반 안에는 단정하게 접힌 하얀색 수건 한 개, 요구르트 한 병, 치솔 한 개 그리고 물병과 컵이 있다. 바로 그 앞, 방바닥에 놓인 전화기.

무대 오른쪽 벽에 창문이 보인다. 창문엔 커튼이 쳐있다. 바로 그 옆에 나무로 만든 옷걸이가 있고, 옷걸이 아래 쪽 방바닥에 놓인 검은색 가 방. 그 외 콜라캔, 맥주캔, 커피캔, 그물에 든 오렌지, 휴지, 쓰레기통, 종 이조각, 양말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방에는 이부자리가 깔려 있고 창 문이 있는 벽에 머리를 기댄 채 비스듬히 누워 있는 사내.

사내, 캔맥주를 마시고 있다.

맥주를 몇 모금 마시더니 팔을 뻗어서 바닥에 놓인 담배갑을 집어들고 담배를 꺼내서 불을 붙인다.

재털이에 담뱃재를 털어 내면서 맥주를 홀짝거리며 마신다.

얼마 후 맥주캔을 흔들어본다. 비었다. 캔을 벽에 던진다. 옆에 있는 다 른 맥주캔을 뜯는다.

맥주를 마신다. 무엇인가 골똘이 생각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커튼을 젖히고 밖을 바라본다. 얼마 후 다시 돌아와 이부자리에 누워서 맥주를 마신다. 흔들어 보더니 비어있다는 것을 알고 또 다시 벽에 캔을 집어 던진다. 담배를 부벼 끈다.

다른 맥주캔을 뜯어서 맥주를 마신다. 담배를 꺼내서 불을 붙인다. 담 배를 피우면서 맥주를 마신다.

등장인물 사내(30대 중반) 여자(20대 초반)

1막은 2월 어느 날 저녁.

2막은 몇 시간 뒤 장소 소도시의 여관방

<G코드의 탈출>과 <내 뱃속에 든 새앙쥐>는 함께 묶어서 공연될 수도 있고 각각 독립적으로 공 연될 수도 있다. 함께 묶어서 공연될 시 제목은 <G코드의 탈출>+<내 뱃속에 든 새앙쥐>가 될 것 이다. 실제로 1998년 초연시 <G코드의 탈출>은 <내 뱃속에 든 새앙쥐>와 묶여 공연되었다.

(19)

166 167 여자 뭐 있는데?

사내 여긴 냉장고도 없어가지구……

여자 괜찮아. 귤이나 하나 먹지. 아니, 콜라 있네. (사내, 콜라를 준다. 여 자, 콜라캔을 따서 마신다. 사내, 여자를 바라본다) 왜? (웃으며) 왜에?

사내 여전해.

여자 뭐?

사내 콜라 좋아하는 거……

여자 으응. 가끔 마셔. (사이) 근데 정말 웬일이야? 얼마나 놀랬는데.

식구들이 받았으면 어쩌려고 전화했어? 미쳤어, 정말.

사내 식구들이 받으면 안돼?

여자 아니, 괜찮아. 다른 남자애들도 자주 전화하는데 뭐.

사내 근데?

여자 그냥… 내가 괜히 그렇다는 거지. (사이) 언제 온 거야?

사내 일주일쯤 됐나……

여자 자기가 언제 온지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니? (사내, 손가락으 로 자기를 가르킨다) 그래, 잘 났어.

사내 방안에만 계속 틀어박혀 있다보니 날짜 가는 것도 모르겠어.

여자 구경도 좀 하지 그랬어.

사내 갈 데가 어딨겠어. 배고프면 나가서 뭘 사먹고 다시 들어오고 배고프면 또 나가서 뭘 사먹고 다시 들어오고… 나중엔 그것 마저 귀찮아져서 맥주하고 귤하고 뭐 그런 것을 잔뜩 사들고 들어와서 계속 처박혀 있는 거지.

여자 (사이) 여긴 처음이지?

사내 (사이) 새벽 3시쯤엔가 도착했어. 기분이 묘하더라고.

여자 뭐가?

사내 어디로 가야할 지 막막하더라구. 다행히 심야 포장마차가 있 길래 들어갔어. 앉아서 국수에 소주 몇 잔을 걸치니까 마음이 일어나서 수화기를 든다. 전화를 걸려다가 수화기를 놓고 복도 쪽으로

귀를 기울인다. 시건장치를 풀고 방문을 열더니 귀를 기울인다. 문을 닫는다. 시건장치를 잠근다.

자리에 기대어 맥주를 마신다. 담배를 부벼 끈다.

얼마 후. 노크 소리. 사내 긴장한다.

다시 노크 소리. 사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시건장치를 풀고 방문을 연다.

사내 누구세요?

여자 (목소리) 나야.

사내 (고개를 돌려 헛기침을 하고) 잠깐만.

밖으로 나간다. 출입문을 여는 소리. 사내와 여자 함께 방으로 들어온다.

사내 (앞서서 들어오다가 여자를 보고 웃음을 지으며) 왔네.

여자 그럼. (사이) 한참 찾았어. 택시기사가 잘 못 찾더라.

사내 그래? (사이) 앉어.

여자 응. 어우 추워. (잠시 머뭇거리더니 외투를 벗어서 방바닥에 놓고 이 부자리 위에 앉는다) 그런데 웬일이야?

사내 뭘?

여자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분 거야, 여행?

사내 응.

여자 (방을 둘러보며) 여기 계속 있었던 거야? (사내 고개를 끄덕인다) 오래됐어?

사내 응.

여자 자기도 앉아. (사내, 옆에 앉는다) 얼굴이 많이 못됐다.

사내 (자기 얼굴을 만지작거리며) 면도를 안해서 그럴 거야. 뭐 좀 마실 거야?

(20)

204 여자 자기야… 자기야… (여자, 울먹이며 말을 잇지 못한다)

사내 울지마. 널 울리려고 한 건 아니었어. (TV를 켠다) 혼자서 텔레 비전를 가끔 보았어.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올라가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어. 이 더러운 세상이 끝나고 죽은 영혼들이 하 늘로 올라가는구나. (고르지 못한 TV 화면이 뜬다) 울지마. 난 널 사랑했어. (경찰의 핸드 마이크 소리가 방문에서도 들린다. 사내, 낄낄 거리고 웃는다) 저 문으로 결코 나가지 않을 거야. 내가 나를 가 둬버린 저 문으로 다시는 나가고 싶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저 문으로 들어왔다가 또 나갔겠고 또 너도 저 문을 열고 나가겠 지. 난 딴 세상으로 가고 싶어. 아무도 가지 않은 곳으로 말이 야. (TV 화면이 선명해지더니 영화 자막이 올라간다) 마침 좋은 시 간이군.

(사내, 창문 쪽으로 걸어가더니 고개를 돌려 여자를 바라보며) 아직도 날 사랑하니?

말을 마치자 유리창으로 몸을 날린다.

암전.

끝.

내 뱃속에 든 새앙쥐

1998년 12월 24일 <G코드의 탈출>과 묶여서 초연되었다.

(21)

207

1

아파트의 거실. 노파 혼자 거실에 있다. 혹은 노파는 보이지 않고 목소 리만 들릴 수도 있다.

노파 아가, 너 거기 있냐? 내가 너한테 얘기했었냐? 내 뱃속에 들어간 쥐 말이다. 그날이 언제지 잊어버렸다만 글쎄 쥐새끼 한 마리가 내 뱃속에 있지 않겠냐? 아주 작고 귀여운 놈이란다. 괜찮아, 무서워 할 필요 없어. 그러니 겁내지 말아라,

아가. 네가 국민학교 다닐 때 너하고 나하고 광 속에 숨어 들어가 서 곡식 훔쳐먹는 쥐를 많이도 잡았지야. 살이 퉁퉁하게 찐 고놈들 잡았을 때, 내가 어찌나 마음이 흡족한지 아니? 눈 앞에 선하다.

쥐들이 뚫어놓은 창구멍을 양말짝으로 틀어 막았지야? 밑에 구멍 한 개만 남겨놓고 말이다. 넌 빈 밀가루 푸대를 그 구멍에 대고 쥐새끼들을 기다리고 나는 기다란 잣대로 여기저기 쑤시 고 돌아다녔지야. 넌 오사게도 겁이 많아서, 금방이라도 푸대 안으로 쥐들이 뛰어들까봐 벌벌 떨면서 웅크리고 있었지야.

쥐들이 이리저리 도망치다 결국에는 구멍으로 도망치다가 니 가 붙들고 있는 푸대 안으로 들어갔었지. 그러면, 넌 푸대 아가 리를 조아리면서 “어머니, 쥐요, 쥐!”하고 숨막히는 소리로 날 불렀고, 난 니가 건네준 푸대를 땅에다 동댕이쳐서 쥐들을 죽 였지야. 어떤 날은 서너 마리를 한꺼번에 잡은 날도 있었지.

(사이) 아가, 너 거기 있지야? 내가 무슨 말하다가 쥐잡는 이야 기를 하게 됐지야? 정신은 멀쩡한디 가끔 흐릿흐릿해질 때가 있다. (사이) 맞다, 내 뱃속에 사는 쥐 얘기하다 말았지? 그래, 그 쥐가 내 뱃속으로 들어가더니 얼마나 겁이 났던지 숨도 못

(22)

초연

1998.12.31. - 1999.1.17.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연출

이성열

무대

박동우

조명

서정호

출연

김동수, 이봉규, 남명렬, 정재은, 정철민,

김혜민, 임진순, 정은경, 정진희, 김경희

파티

그로테스크 심포니

파티는 끝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손님은 머무르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갈 곳이 없기 때문에.

초대받지 않은 사람들이 도착하기 시작하고, 집은 엉망이 된다.

집안을 청소하자는 한 마디 말도 없이 우리 모두는 함께 있어야만 한다(M.vii) __ 존 케이지 《반미학 》 173쪽

(23)

김가형의 거실. 아주 특이하게 생겼다. 무대 후면에 마름모꼴의 커다란 유리창 두 개가 둔각을 이루며 엇비스듬하게 붙어있다. 그 유리창들을 통해 베란다와 그 너머로 마을의 모습이 멀리 보일 것이다. 물론 지금은 밖은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김가형이 구입한 주택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단독주택이라고 부르는 것 과 판이하게 다르다. 여기서 그 주택의 설계개념, 건물의 배치, 형상, 재 료, 색상 등 모든 부분을 장황하게 설명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본 작품 의 무대화에 도움이 될지 몰라 몇마디 덧붙이고 싶다.

김가형이 구입한 집은 자연 친화적인 주택을 지어보자는 의도로 건축주 와 설계자가 함께 지었으나 완성된 집이 거주공간으로는 적합하지 않 다. 반듯하고 좌우 대칭구조의 일반적인 주택의 형태를 거부하고 자유 스러운 상상력과 자연스러운 재료의 성질을 살려가며 건축설계를 하다 보니 주거하는 공간이 약간 조롱기마저 띠고 있어, 왠지 그 안에 있으면 자기의 삶이 장난이라는 느낌마저 든다. 둘쭉날쭉한 집의 외곽선과 지 붕의 모양 그리고 수평으로 마주보는 벽면이 없는 내부와 거친 나무결 을 살린 내부장식 등 주택 자체가 너무 강한 개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인 지 모른다.

초가집의 모양을 변형해 여자의 젖가슴처럼 융기된 지붕에는 옹기조각 을 붙여 햇빛이 내려쬐면 반짝반짝 빛이 난다. 야산의 중턱에 자리잡은 이 주택은 산바람을 막기 위해 북쪽의 지붕은 아예 땅에 붙여버려서 멀 리서 보면 커다란 봉분처럼 보이기도 한다. 일층은 주로 창고용으로 사 용되며 베란다가 붙어 있는 2층이 주 거주공간인데 ,사실 구태여 1층과 2층으로 구분한다는 것이 무색하다. 키 큰 사람이 뜰 앞에 서있으면 유 리창을 통해서 2층이 들여다 볼 수 있을 만큼 건물의 높이가 낮기 때문 이다. 지상면에서 베란다로 가기 위해서는 서너 단의 계단을 오르면 된 다. 결국 거실이 2층인 셈이지만 일반적인 2층과는 다르다. 이 주택을 지었을 때 너무나 특이한 집의 모양 때문에 마을사람들 사이에 많은 이 야기가 오고갔다 한다.

물론 공연 시엔 다른 식으로 무대를 꾸밀 수도 있다. 객석에서 볼 때 거 실이 주공간이고 부엌과 화장실은 보이지 않으며 2층으로 오르는 계단 이 무대 한 쪽에 놓여 있다. 객석과 무대 경계선은 유리창인 셈이고 출 입문은 무대 뒤쪽에 나 있다.

N O T E

등장인물

김가형(46세) 집주인. 대학교수 이주희(41세) 그의 부인

김종실(17세) 그들의 아들. 고등학생(등장하지 않는다) 김희아(15세) 그들의 딸. 중학교 3학년

박영춘(55세) 동장

정달수(77세) 약간 치매증상이 있는 노인 곽봉걸(39세) 막노동꾼

최순임(36세) 그의 아내 홍사형(25) 시인을 꿈꾸는 삼수생 이정례(29세) 식당종업원

장소

김가형의 전원주택 거실

시간 12월 말

(24)

218 219

이주희 (손으로 맞은편 벽을 가르키며) 여기서 저기까지 말이예요.

김가형 참 당신도 별걸 다… (하지만 자기도 흐뭇한 기분에 싸여) 짜식 들… 집들이하라고 야단들이야. (거실을 둘러보며) 여기 와서 보 면 깜짝 놀랄걸. (사이) 집은 잘 산 것 같애. 그지?

이주희 (웃으며) 예. (사이) 근데 집이 너무 커요.

김가형 그거야 익숙해지지 않아서 그렇지.

이주희 여보, 여기다 커튼 치면 안 될까요?

김가형 왜?

이주희 겨울이잖아요. 포근할 거예요. 밖을 보고 싶으면 그냥 커튼만 젖히면 되고……

김가형 아냐. 이 집은 애초에 설계할 때부터 커튼 같은 건 고려하지 않 았데. 내 친구 김박사 있잖아, 건축학하는 친구, 그 친구가 그 러는데 이 집은 아주 잘 지은 집이래. 쓸데없이 개조할 생각하 지 말래. 이거 아주 유명한 사람이 설계한 거래.

이주희 그래도 난 좀 이상해요.

김가형 뭐가?

이주희 밖에서 누가 여길 자꾸 훔쳐보는 것 같잖아요.

김가형 누가 여길 들여다 본다구 그래?

이주희 누가 그렇다는 게 아니라……

김가형 참 당신도… 너무 예민해서 탈이야. 이 좋은 집을 사고도 불평 이야?

이주희 근데 여보, 그 젊은 부분 왜 그렇게 이 집을 싸게 내놨을까요.

김가형 글쎄… (사이) 여긴 참 조용하다. 연말인데도 평상시하고 똑같애.

이주희 그래두 난 좀 이상해요. 너무 조용해서.

김가형 하긴……

멀리서 개 짖는 소리.

1

김가형은 며칠 전에 이 집에 이사왔다. 집안 정리가 아직 끝나지 않았 는지 아직도 풀지 않은 짐꾸러미들이 거실 여기저기 놓여 있다. 위에서 설명했듯이 무대 후면은 온통 유리창이고, 무대 후면 오른쪽에는 출입 구가 있다. 거실은 작업실 겸용으로 설계되어 무대 후면 왼쪽에는 주방 이 설치되어 있다. 어둠 속에서 클레식 음악, 샤워 소리 들리면서 서서 히 무대 밝아지면 김가형 누워서 잡지를 보고 있다. 전화벨 소리. 김가 형, 일어나서 전화 받으러 가려는데 전화벨 끊긴다. 김가형, 다시 눕는 다. 다시 울리는 전화벨. 김가형, 귀찮은 듯 망설이다 전화기를 든다.

김가형 여보세요. 여보세요.

이주희 (목소리) 종실예요?

김가형 몰라. 끊겼어.

이주희 (목소리) 장난 전환가 보죠. (김가형, 음악 끈다) 이주희 (목소리) 지금 몇시예요?

김가형 10시쯤 됐을 거야. 애들이 늦는데—

이주희 오고 있을거예요. (샤워를 끝낸 이주희, 맨몸에 가운을 걸치고 욕실 에서 나온다. 젖은 머리카락과 상기된 얼굴. 관능적이다) 전에 다니던 교회 친구들 있잖아요. 오늘 그 애들하고 송년파티를 한다나 요. (거실을 발걸음으로 잰다)

김가형 송년파티? 학생들이 송년은 무슨… (이주희를 보고) 뭐 해?

이주희 (벽면에 도달한 뒤) 열 다섯. (김가형을 본다. 김가형, 손으로 얼굴을 부빈다) 여보, 열 다섯 걸음이예요.

김가형 뭐?

이주희 열 다섯 걸음이라고요.

김가형 뭐가?

(25)

220 221

이주희 잠깐만요. (김가형에게) 당신이 받아보세요.

김가형 (음악을 끄고, 부인에게서 전화기를 받아든다) 여보세요. 전화 바꾸 었습니다. (이주희, 옆에 서 있다) 예? 뭐라구요? 잠깐만요. (이주 희, 김가형에게 귓속말을 하자, 김가형 알았다는 손짓. 이주희, 이층으 로 올라간다) 여보세요. 예, 제가 김가형입니다만… 예, 맞습니 다. 아, 예, 안녕하세요? 괜찮습니다. 말씀하시지요. 아 그러셨 군요. 아까 전화하셨지요. 예? 아니라구요?

이주희 (이층에서 고개를 내밀고) 누구예요?

김가형 (수화기를 손으로 막으며 부인에게) 동장이래, 동장. (수화기에 대고) 여보세요… 녜, 아주 좋습니다. 네, 경치도 좋고 공기도 맑고 말입니다. 아, 그렇군요… 예, 제가 운이 좋은 모양이지요.

이주희 무슨 일이예요?

김가형 네? 뭐라구요? 지금 오시다뇨… 파티요? 무슨 파티를… 파티 라고 하셨나요? 네, 네… 하지만 말이죠. 너무 갑작스런 일이 라서… 아, 그래도 말이죠… (이미 끊겨버린 전화기 를바라본다) 이주희 (계단에서 내려오며) 파티라고요?

김가형 응.

이주희 무슨 파티요?

김가형 이사온 걸 축하해준다나.

이주희 (사이) 누가 장난한 게 아닐까요? 아까두 장난 전화였잖아요.

김가형 하지만 내 이름도 알고 집주소도 알고 있는 걸 보면 장난은 아 닌 것 같애……

이주희 장난이예요.

김가형 글쎄……

이주희 장난이라니까.

김가형 아냐, 진짜 동장인 게 분명해.

이주희 (사이) 정말 예의는 쥐톨만큼도 없는 사람들이야. 지금이 몇 신 김가형 여보, 그래도 시골 사람들이라 다르긴 달라. 우리 이사올 때

말이야 마을 사람들이 여기까지 와서 짐 나르는 걸 도와주잖 아. 여긴 아직도 인심이 남아있나봐.

이주희 그런데 우릴 보는 눈초리가 좀 이상했어요.

김가형 뭐가?

이주희 아무튼 좀 이상했어요.

김가형 낯선 사람이니까 그랬겠지. 당연한 거야.

이주희 글쎄요… 짐을 나르면서도 괜히 자기들끼리 수군거리고… 그 러다 우릴 빤히 쳐다 보기두 하구.

김가형 신기하니까 그랬겠지.

개 짓는 소리.

김가형 (사이. 김가형, 나직히 ‘Ich liebe dich’를 부른다. 이주희 따라 부른다) 올 한 해도 이렇게 가는구나. (다시 노래 부르며 이주희의 컵과 수 건을 받아들고 부엌으로 가다가 문득 생각난 듯) 여보, 그럼 우리끼 리라도 연말 파티 한 번 할까?

이주희 우리 둘이서요?

김가형 그럼. (음악을 튼다) 음악을 들으면서, 와인을 마시면서……

이주희 뷔엔나에서처럼?

김가형 으흥. 다시 옛날로 돌아가는 거야. 추실까요?

함께 춤을 춘다. 이때 전화벨 소리.

이주희 (전화기 쪽으로 가며) 종실인가 봐요. (수화기를 들고) 여보세요.

(사이) 네? 예, 김가형 씨요.

김가형 (음악의 볼륨을 낮추고, 음악에 맞추어 지휘하는 동작을 하며) 누구야?

(26)

278

열어주신 것 정말 고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대 접을 못해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사람들, 일제히 가형을 쳐다본 다) 부디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김가형, 이주희, 김희아 다시 계단을 오르고 남은 사람들, 인간적인 모 습으로 돌아오면 서서히 암전.

끝.

나무는

신발가게를 찾아가지 않는다

초연

2000. 5. 24. - 5. 31.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

연출

이성열

출연

김원기, 이지하, 김대통, 김미자,

정진희, 홍창현, 도현정, 김상근

2000. 10. 18. - 11. 12. (바탕골소극장)

연출

이성열

조명

구근회

음악

김만중

출연

정철민, 김대통, 임진순, 정은경, 김미자, 이지하,

김미자, 김원기, 이다기, 김상근, 김경희, 김현영

*2000 새로운 예술의 해 연극부문위원회 공모선정작

(27)

281

1 난 나무가 될 거야 여자, 바닥에 앉아 있다.

여자 난 문 밖으로 나가지 않을래. 문을 열고 나가면 정글이야. 번들 거리는 눈으로 누군가 날 노리고 있어. 새 같은 가슴으로 조심 스럽게 숨을 쉬며 머리 위에 새집을 지을 수 없을까. 내 발바닥 엔 왜 뿌리가 나지 않을까. 내 피는 너무 뜨겁고 너무 새빨개.

푸른 액체를 빨아들이며 견딜 수 없을까. 머리 위엔 새들을 키 우며.

(자리에서 일어나서) 난 나무가 될 거야.

(여자, 몇 걸음 앞으로 나오며)

하지만 내 손은 무엇인가를 움켜쥐려 하네. 내 눈은 무엇인가 를 보려고 하네. 내 귀는 무엇인가를 들으려 하네. 내 입은 뭔 가를 먹으려 하고 무엇인가를 말하려 하네. 내 발은 어디론가 가려고 하네.

뛰지 않고 그냥 견딜 수 없나.

남자, 무대에 등장한다.

남자 밤이 쌓이는 거리에서 나는 그녀를 보았다. 쑈 윈도우에서 쏟 아져 나오는 불빛을 받으며 바삐 걸어가는 사람들의 물결 속 에 팔리지 않은 물건처럼 그녀는 외롭게 서 있었다.

등장인물

남자 : 30대 초. 영화감독.

여자 : 20대 초.

사장 :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는 부인 : 사장의

아들 : 사장의 여자친구 : 아들의 거리의 예언자 제작자 배우 지망생 중국집 배달원 코러스1, 2, 3

죽음의 의식을 행하는 배우들1, 2, 3, 4 그 외 무수하게 지나가는 사람들

현재

(28)

282 283

(행인들, 예언자의 말이 끝날 때마다 야유를 보낸다)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그 옆에 또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그리고 그 옆에 또 다른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소나무 옆에 소나무 또 그 소나무 옆에 소나무일 수가 있다.

참나무 옆에 참나무 또 그 참나무 옆에 참나무일 수도 있다.

떡갈나무나 사과나무나 자작나무나 벚나무나 층층나무나 물 푸레나무일 수도 있다.

머리를 하늘로 향한 나무들은 땅 속 깊이 뿌리를 박고 저마다 꿈을 감추어 두고 있다.

행인들, 퇴장한다.

거리의 예언자 나무는 나무를 낳고 빌딩은 빌딩을 낳고 돈은 돈을 낳고 사람은 사람을 낳고

그리고 나는 길을 잃었다.

묻노니.

너희들은 빌딩을 찬양하여 나무에 칼을 드리대겠느냐.

답하라.

너희들은 무엇을 원하고 어디로 가려 하느냐.

(여자를 보더니) 여자여!

내 너에게 이르노니 2

거리에서 1 나무와 빌딩 사이에서

행인1, 2, 3 허겁지겁 들어온다. 여자도 함께 묻혀서 들어온다.

행인1, 2, 3 바쁘다 바뻐. 나는 바쁘다. 나는 바뻐. 나는 걷는다. 나는 바삐 걷는다. 나는 할 일이 많다. 나는 뛴다. 시계를 본다. 바쁘다 바 뻐. 나는 바쁘다. 나는 바뻐.

거리의 예언자 보라!

(건물 역을 맡은 배우가 등장하여 무대 오른쪽 뒤 단 위에 동상처럼 선다) 썩은 몸들아! 보라! (행인들, 건물을 바라본다)

빌딩 한 채가 서 있다. (예언자의 말이 끝날 때마다 행인1, 2, 3은 환 호성을 지른다)

그 옆에 또 빌딩 한 채가 서 있다.

그리고 그 옆에 또 다른 빌딩 한 채가 서 있다.

빌딩 옆에 빌딩 또 그 빌딩 옆에 또 다른 빌딩 한 채가 서 있다.

머리를 하늘에 두고 땅 속 깊이 뿌리를 박고 빌딩은 저마다 꿈 을 키워가고 있다.

행인1 빌 게이츠는 희망이다. 빌 게이츠는 위대하다. 빌 게이츠는 달 콤하다. 빌게이츠는 황제다.

행인2 나는 에디슨을 존경한다. 에디슨은 전기를 발명했다. 전기 때 문에 밤은 환하다. 나는 이제 자지 않아도 된다.

행인3 나는 미래를 향해 뛴다. 미래? 미래라고? 그래, 미래, 미래다, 이 시팔 놈아. 내 미래니까 넌 상관 마. 내 미래는 내 꺼야.

거리의 예언자 보라! (나무 역을 맡은 배우가 무대 왼쪽 뒤 단 위에 선다) 썩은 몸들아! 보라!

(29)

310

나는 일어나네

부끄러운 얼굴을 물로 씻어내고 토닥거리며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지며

죽음을 저만치 밀쳐내고 나는 식탁에 앉네 내가 가야할 곳을 향해

내 발가락은 벌써 예감으로 꼼지락거리고 뇌 속은 부글거리고 하루를 요리하고 있네 남자 나는 어디까지 걸어가야 하는 거지?

닳아빠진 내 신발을 끌고.

끝.

미생자 未生子

초연

2004. 3. 18. - 3. 28.(문예회관 소극장)

2004. 3. 31. - 4. 25.(학전 블루)

2004. 5. 19. - 5. 23.(국립극장 별오름 극장)

*제25회 서울연극제 공식 참가작 연출

이상우

작곡

권성택

무대

문수호

조명

고희선

의상

김민지

일러스트

윤정섭

안무

최은화

출연

김요한, 김지현, 서동갑, 서상원,

성열석, 윤영민, 이경훈, 이안나

(30)

313

PRESET

풍경 소리, 겨울 새 소리들, 또는 그런 느낌의 소리들이 아주 간간히 들 린다.

무대는 하얀 눈밭.

무대 뒤로 배경막… 차가운 회색 겨울 하늘 배경막 뒤에 거대한 나무가 숨어있다.

무대 앞에 정육면체 상자 16개, 무대 여기저기 쌓여 있다.

천천히 암전.

각주자 인서트 #1

각주자 혹은 노숙자 1, 2, 3, 4, 5, 6, 7, 8, 상자에 앉거나 서거나 걸터 앉 거나 말거나…

각주자2 각주! 각주 1. 각주자, 각주를 설명하는 사람. 즉 나 같은 사람.

각주자3 각주 2. 미생자, 아직 미(未). 날 생(生). 사람 자(子). 어떤 한글 사전에도 수록되지 않음.

각주자4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 또는 태어나기를 원치 않은 사람. 또 는 태어나기를 거부당한 사람.

각주자5 우리 인식의 그림자, 틈새, 감추어진 부분. 증오와 폭력의 인간 역사 과정에 숨어버린 존재. 배제되어버린 인간성.

각주자6 아직 오지 않은 인간, 그리움, 절망의 씨앗 속에 자라는 배아.

거짓 속에 태어난 사람.

각주를 하는 동안, 나머지 각주자들이 상자들을 옮겨놓고 다음 장면을 등장인물

각주자 또는 미생자 1, 2, 3, 4, 5, 6, 7, 8 아파트의 남편

아파트의 아내 아파트 경비 고려의 어미 고려의 아비 고려의 할아비 고려의 어르신 고려의 미친 여자 고려의 산파 모병관 부관 각하 여단장 총알병사 종군 기자 나무 여인 기계 병사 총알 할아버지

여기저기 거기

옛날, 그리고 지금

(31)

314 315

남편 (눈을 뜨며) 왜?

(아내의 모습을 본다) 뭐야? 왜 그래?

아내 (냉장고를 가리키며) 저거.

남편 저거 뭐? 냉장고?

아내 (고개를 끄덕인다) 좀 전에 깼거든. 목이 말라서.

남편 그런데……

아내 그래서 냉장고 문을 열었거든… 아니… 손잡이를 잡고 문을 막 열려고 했거든. 근데 바로 그 순간, 어머! 혹시 할아버지가 안에 계시면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이 드는 거야.

남편 할아버지? 할아버지 오셨어?

아내 아니! 음식을 넣어 두는 냉장고가 그 냉장고였는지,

아니면 저쪽에 있는 냉장고가 그 냉장고고, 그 냉장고는 할아 버지가 사시는 냉장고인지 헷갈렸다는 거야.

남편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아내 문을 열려고 하는 순간 혹시 그 안에 할아버지가 계시면 어떻 게 하지? 주무시다가 깨시면 뭐라고 말을 하지?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소름이 쫘악 끼쳤다니까.

남편 잠깐 잠깐, 지금 도대체 무슨 말하는지 알 수가 없어.

아내 도대체 말을 듣는 거야 먹는 거야?

남편 냉장고 안에 할아버지가 산다니… 도대체 무슨 소리야?

아내 어휴, 답답해. 잘 좀 들어보라니까. 그러구 대학은 어떻게 나왔어?

남편 참, 답답해. 너 지금 잠꼬대 하는 거지?

아내 (사이) 이런 거 알아?

남편 머?

아내 직장에서 엄청 스트레스 받으면서 일을 한 거야. 그래서 퇴근 하자마자 곧장 집으로 온 거거든. 아무튼 어찌 어찌해서 집 앞 에 도착했어. 아, 이제 집에 들어가서 편히 쉬어야지 하면서 긴 준비한다.

남편(각주자1)과 아내(각주자8), 겉옷을 벗고 분장을 지우고 자리를 잡 는다.

각주자 7은 빠져나가 등장을 준비한다.

연기를 하지 않는 배우들은 구경꾼이며 소품담당자이다.

예를 들면, 공연 내내 상자들을 옮기고, 소도구와 의상을 준비하고, 다 른 배우들이 연기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들여다 본다.

1

총알 할아버지 나타나다

조명 바뀌면, 늦은 밤, 아파트 거실.

방안에 여기저기 이삿짐 박스들, 침대 그리고 냉장고 두 개.

남편은 쿠션을 끼고 잠들고, 아내는 쿠션을 안고 멍하니 앉아 있다.

각주자2 각주 3. 지난 주에, 우리 아파트에서 생긴 일.

각주자 2 가 살며시 침대 위에 데스크 램프를 올려 놓고 구경한다.

아내, 램프를 켠다.

아내 여보야. (사이) 여보야.

남편 (잠에 취한 채) 응?

아내 여보야. (사이) 여보야, 제발 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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