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기록에서 낙랑군이 만주지역과 한반도지역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 은 명나라 초기에 작성된 『대명일통지』56) 부터이다.
이 책에는 명나라의 직할지와 ‘외이(外夷)’로 구분하여 작성하였는데 직 할지의 기록인 요동도사관련 기록에 한군현이 요동도사 관내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요동도사가 관리하던 지역은 서로는 현재 하북성 산 해관부터 동으로는 현재 요녕성 본계시, 북으로는 길림성 중부지역, 남으 로는 요동반도까지이다. 즉 한군현은 이 요동도사관할 구역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외이의 기록을 하는 과정에서 조선국을 기록하 는 과정에서 조선의 평양에 낙랑군이 있었다는 기록을 남겨두었다. 이해
56)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
이현(李賢) 등의 봉칙찬(奉勅撰:임금의 명을 받들어 편찬)이며, 1461년(天順 5)에 90권 을 완성하였다. 『대원일통지(大元一統志)』를 본떠서 명나라의 중국 전역과 조공국(朝貢 國)의 지리를 기술한 총지(總志)이며, 각종 지도를 게재한 다음, 풍속 ·산천 등 20항 목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1456년(景泰7)의 『환우통지(寰宇通志)』(119권)를 요약한 것이라는 말을 입증하듯이 기술이 간략하고 정확하지 않으나, 당시의 얼마 안 되는 지 지로서 중요하다.
가 안 되는 기록이다. 이 두 기록을 확인해보면 다음과 같다.
❶ 『大明一統志』57)
전체 명나라 요동도사 관할 지역의 역사를 소개하면서 그 지역에 한의 낙랑군이 있었다는 기록과 고구려를 정벌한 후 개주와 요주를 설치하였 고 안동도호부지역이었다는 자세한 기록을 남겨놓았다. 물론 이 기록들 은 꼼꼼히 분석을 해서 이해를 해야 하는데 분명한 것은 위에서 말한 내 용들은 모두 요동도사관할지역에 있었다는 것인데 그가 관할하는 지역의 동쪽 끝은 현재 차이나 요녕성 본계시까지이다.
압록강 동쪽에 있으며 다른 이름으로는 ‘왕검성’이라고 부르는데, 원래 기자의 나라이다. 성 밖에는 기자무덤이 있다. 한나라 때는 낙랑군지역이 었고, 진(晉)나라 의희(義熙)년간에 고련(高璉-고구려 장수왕)이 성에서 처음 거주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후 서경으로 불렀고, 원나라가 동녕로로 하였다.58)
이 기록은 요동도사관련조의 기록이다. 이 기록의 바탕은 역도원의 주장을 기반으로 『요 사』, 『원사』의 기록을 더 보완한 것이다. 이 기 록들 내용 중에서 중요한 것은 평양성밖에 기 자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같은 책 89권
「외이전」에 조선국에 관한 기록에도 다음과 같 이 기록되어 있다.
57) 李賢, 『大明一統志』 上, 卷26, 三秦出版社. 1985年, 424쪽.
58) 『大明一統志』 卷 26.
平壤城: 在鴨綠江東一名王儉城卽箕子之故國城外有箕子墓漢爲樂浪郡治晉義熙後其王高 璉始居此城後號西京元爲東寧路
『대명일통지』권 89.
조선국: 동, 서, 남 지역은 바다에 접해있고, 북은 여직과 접해있고, 서 북은 압록강에 이른다. 동서 2천리이고, 남북 4천리이다. 나라의 도성에 서 북경까지는 3500리에 이르고, 남경까지는 4천리이다.
연혁: 주나라가 기자를 그 나라에 봉했다. 진나라 때는 요동외요에 속 해 있었고, 한나라 초에서는 연나라의 위만이 그 땅에서 살았고, 무제 때 에 조선을 진번, 임둔, 낙랑, 현토 4군으로 정하였다. 소제 때 낙랑, 현토 두 군으로 조정하였다. 한말 공손도가 할거하기 시작하여 그 손자 공손연 에 이르러 위나라가 멸망시켰다. 진(晉) 영가말년에 고구려에 속했다. 고 구려는 본래부여의 별종이다. 그 나라 왕 고련(高璉-장수왕-)이 평양성 에 살았는데, 즉 낙랑군 땅이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평양을 없애고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자 그 나라는 압록강 동남쪽 천 여리로 옮겨 갔다. 오대시기에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였다.
이 기록은 당시 명나라의 동쪽에 있었던 나라 조선에 관한 내용이다.
전체 범혁과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기록을 보면 앞에서 말한 요동도사관할 지역의 연혁 중 차이나사 관 련 기록들 - 우공이나 연, 진 관련기록- 을 제외하고 기자와 위만이 조 선으로 온 내력을 정리하면서 조선에 낙랑군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이 기록들에서부터 낙랑군이 만주에 한곳이 있고, 한반도 평양에도 있 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기록부터 차이나 사서에서는 한군현이 두 군데에서 기록되고 있는 것이다.
❷ 『대청일통지』, 『嘉慶重修一統志』 卷五百五十, 성경통부
청나라 중엽에 편찬된 『대청일통지』59) 성경지역 즉 지금의 요녕성의 동 부지역의 역사를 설명하는 내용을 보면 『대명일통지』와 기본 골격은 비
59)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
중국 청나라의 판도를 상세히 기록한 지리책. 1743년에 서건학(徐乾學), 진덕화 등이 356권으로 편찬, 간행한 제1차 본과 1784년에 화신(和珅) 등이 424권으로 간행한 제2 차 본 및 1842년에 목창아(穆彰阿) 등이 560권으로 완성한 제3차 본이 있다.
슷하나 구체적으로 증거자료를 활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면
청일통지』에서는 낙랑, 현토는 고구려의 서쪽에 있었다고 분명하게 기록 을 해놓고 있는 것이다. 역시 청나라 때도 명나라 때와 같이 한군현이 두 곳에 있었던 것으로 인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위의 「성경통부」는 청나라의 영역이었기에 차이나의 역사를 기록한 것 이고, 아래 「조선전」은 ‘조선’이라는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이 기 록과정에서 ‘조선’이라는 나라이름과 관련한 기록을 그대로 붙이는 것이 다. 그러므로 한군현이 현재 한반도에 편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림6. 낙랑군 양 지역 표시도
위와 같이 명나라, 청나라 때는 한군현이 만주와 한반도 두 곳에 기록 되게 된 것이다. 이런 인식은 만주국시절에 편찬된 『봉천통지』에도 같은 형식으로 편찬되고 있는 것이다.
险【唐司马贞史记索隠辽东有险凟县即朝鲜王旧都】恵帝时兼有濊貊与髙句骊沃沮地凡数 千里传子及孙右渠武帝元封三年遣楼船将军杨仆等击灭之因分置乐浪临屯元菟真畨四部 昭帝时省临屯真畨二部入元莬徙居髙句骊西北其沃沮濊貊分七县置乐浪东部都尉辖之光 武建武六年省都尉弃七县地顺帝阳嘉元年置元菟郡屯田六部汉末有扶余人髙姓者据其地 改国号曰髙骊又曰髙句骊【杜佑通典髙句骊本出于夫余先祖朱蒙朱防母河伯女为夫余王妻 日所照遂有孕而生及长名曰朱蒙俗言善射也国人欲杀之朱蒙弃夫余东南走渡普述水至纥 升国城遂居焉号曰句骊以髙为氏
그렇다면 왜 갑자기 낙랑이 두 지역에서 나타나는가? 그것은 바로 ‘조 선’이라는 국호와 평양이라는 지역 이름을 쓰면서, 이성계 조선이전의 조 선역사가 한반도 넘어 오기 시작한 것이다. 즉 고려시대나 고구려시대에 는 한반도 지역에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 갑자기 조선시대부터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조선이라는 국호와 평양이라는 지명이 한반도에 나 타나기 때문이다. 특히 평양이라는 지명에 대한 집착이 강한데 한반도에 나타나는 평양은 고구려의 평양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의 평양 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 근거는 『원사』에서 볼 수 있다.
『元史』 卷五十九 志 第 十一 地理〉 二62)
동령로는 본래 고구려 평양성인데, 또 장안성이라고도 한다. 한 이 조선을 멸망시키고 낙랑, 현도군을 설치하였는데, 이곳이 낙랑 땅이다. 진(晉) 의희(義熙) 후에 고구려가 처음으로 거주하기 사직 하였다. 당이 고구려를 정벌하자 평양은 압록강 동남쪽 천 여리로 옮겨갔다. 지금 평양은 옛 평양은 아니다.
이 글은 명나라 때 편찬된 『원사』의 내용이다. 이 글을 근거로 해볼 때 고구려 평양과 원나라 때 인식하고 있던 평양은 달랐다는 것이다. 두 평 양은 거리가 천 여리 차이가 나는 곳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 은 『원사』에서 인식하는 것이나 『대명일통지』 인식하는 평양은 고구려 와 고려를 이어지는 왕조로 인식하는 듯하다. 그것은 고구려가 멸망한 지 250여년이 흘러 한반도지역에 고려라는 나라가 건국이 되는데 이 고 려와 고구려를 계승관계로 본 것이다. 고구려 멸망이후 한반도 땅에는 신 라가 있었다는 것을 몰랐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들 기록에서 볼 때 고 구려와 고려는 계승관계로 보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원
62) 『元史』 卷五十九 志 第十一 〈地理〉 二
東寧路, 本高句驪平壤城, 亦曰長安城。漢滅朝鮮, 置樂浪、玄菟郡, 此樂浪地也。 晉義熙後, 其王高麗始居平瓖城。唐征高麗, 拔平壤, 其國東徙, 在鴨綠水之東南千餘里, 非平壤之舊 。
나라 동녕부와 고려가 건국된 개성지역과의 거리를 고려하였을 때 고구 려가 멸망하자 압록강 동남쪽 천 여리에 나라를 옮겨 세운 것으로 인식 을 한 듯하다. 더구나 『원사』의 기록은 고려가 원나라의 공격으로 엄청 위 축된 시기에 기록된 것이다. 아마도 훗날 조선시대에 평양을 중시한 것은 그 지명이 조선의 역사에서는 정통성을 부여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에 매 우 중요하게 의미가 부여된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인 상황들을 정리해보면 『대명일통지』나 『대청일통지』에서 왜 두 곳에서 낙랑군이 나타나는지 알 수 있는 것인데 그것은 평양이 옮겨간 것 을 설명하지 않고 조선이라는 나라와 평양만을 연동시켜 보았기 때문이 다. 즉 역도원의 해석방식이 그대로 적용된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명나라와 청나라의 한군현 인식은 매우 잘못된 것이
전체적으로 보아 명나라와 청나라의 한군현 인식은 매우 잘못된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