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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앞에서 낙랑과 평양에 관한 사료 정리를 해봤다. 사료를 근거로 하여 한군현 관련문제를 종합적으로 정리해보면 한군현은 중국의 동북지 역 국경선과 고구려의 서남쪽 국경선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 현재 중국 의 요서지역과 하북성 동북부지역-, 서로 뺏고 빼앗기는 지역이었다. 그 러다가 수‧당 시기에 구체적으로 낙랑군을 고구려의 중심부인 평양지역에 못 박았고, 수와 당은 원래 고구려의 영토 중 평양성 지역은 그들 조상들 의 영토였던 기자조선, 낙랑군이었다는 것을 상기시키면서 계속해서 공 격했던 것이다.

86) 『水經』 浿水出樂浪郡鏤方縣, 東南過臨浿縣, 東入於海.

87) 那珂通世,「朝鮮樂浪玄帶方考」, 『史學雜誌』5-4, 東京大學文學部內史學會 ,1894.

88) 稻葉岩吉,「秦長城東端及王險城考」, 『史學雜誌』21-2, 東京大學文學部內史學會,1910.

이런 사료들을 분석해 본 결과 낙랑군은 처음부터 끝까지 현재 중국 하 북성과 요녕성 서쪽지역 어딘가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역도원의

‘패수=낙랑’이라는 관점은 북위 지역에 없어진 패수라는 이름이 고구려 도읍지인 평양의 남쪽에 있다는 것을 알고, 앞뒤 안 가리고 ‘낙랑=평양설’

을 만들었다. 이것은 6세기경이었는데, 그 뒤 대부분의 역사서는 이 설을 따랐고, 수·당나라는 이 설을 근거로 하여 고토회복 작전에 나서 엄청난 전쟁을 치렀다. 고구려가 당나라에 무너지면서 고구려 도읍이었던 평양 은 당나라 영역에 들어갔다가 다시 발해의 중경이 되면서 한국사에서 낙 랑에 대한 생각은 지워졌다.

그 후 고려 말 지금의 평양에 평양이라는 지명이 등장하면서부터 점점 과거를 회고하면서 과거의 역사를 평양에 복원하는 노력이 있었는데 조 선후기에 이르러 몇몇 관리들이 낙랑을 당연하게 지금의 평양에 비정해 버린 것이다. 이것이 바로 18세기 무렵이다.

그림9. 낙랑군 인식변천도

물론 이들이 낙랑을 한반도로 비정하는 데는 역사지리상의 사실보다는 기자와 관련된 심리적인 보상을 받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었다.89) 그들은 정약용을 비롯한 몇몇의 관리와 학자들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그런 의견 이 대세는 아니었다. 역시 여러 의견 중 하나였다. 그러던 것이 1890년대 일본학자들이 한국사연구에 손을 대면서 상황은 크게 변하기 시작한다.

특히 고고학이라는 학문이 도입되면서 일부학자들 - 아마도 일본의 대륙 공격파들과 연루된 학자들 - 이 주장하는 견해가 당시 일본이 만들기 시 작하였던 일본사에 한국사가 편입되는 과정에서 조선후기 일부 학자들이 주장했던 소중화 사대주의 사관들을 그대로 적용하여 마치 그것이 정설 인 양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의 학자들은 이런 결과를 만들어내 기 위하여 엄청난 돈과 인력을 투입하여 왜곡을 한 것이고, 그 결과가 오 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즉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낙랑군위치 는 차이나사의 확대와 한국사의 축소로 차이나의 영역이 확대가 되면서 차이나의 최동북방에 있었던 낙랑도 점점 동쪽으로 확대가 되고, 한국사 는 점점 축소가 되면서 최서남방에 있었던 국경이 점점 동쪽으로 후퇴하 게 되면서 변화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18세기 당시 조선의 실 학자들이 이른바 ‘조선학’을 한다는 명목으로 한국사를 연구하지만 그 정 통성을 기자로 두면서 당시 조선의 평양에 조선의 정신적인 고향을 만드 는 과정에서 한반도 낙랑설이 점점 무게가 실리다가 일본학자들에 의하 여 사실인 양 확립되게 된 것이다.

89) 이 문제는 별도의 지면을 얻어 정리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