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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론적 인식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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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견의 정견의

정견의 정견의 의미와 의미와 의미와 의미와 수행에 수행에 수행에 수행에 대한 대한 대한 대한 인식론적

인식론적 인식론적

인식론적 이해 이해 이해 이해

2006 2006 2006 2006년 년 년 년

서강대학교 서강대학교 서강대학교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 신학대학원 신학대학원 신학대학원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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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견의 정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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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을 논문을 논문을 철학 논문을 철학 철학 철학 석사 석사 석사 학위 석사 학위 학위 학위 논문으로 논문으로 논문으로 논문으로 제출함 제출함 제출함 제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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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2007년 년 년 1 년 1 1월 1 월 월 월 일 일 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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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 신학대학원 신학대학원 신학대학원 철 철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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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감사의 감사의 감사의 글글글글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가 3.22)

저의 마음에는 두 가지 큰 움직임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 세상이 믿을 수 없고, 무 가치 하며, 절망스럽다는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이 세상이 믿을 만하고, 소중하며, 희 망적이라는 마음입니다. 저의 마음은 항상 이 양 극단을 오가며 고통과 행복을 경험 합니다. 이 세상이 그런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저의 마음속 움직임이 그러하다는 것 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참 모습은 무엇일까요? 이 세상이 가치 있어 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개인적으로 또 공동체적으로 체험하는 고통과 불행을 어떻게 바라보 아야 할까요? 본 논문은 이러한 물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짧게는 논문을 쓴 한 학기동안의 공부를 통해 길게는 그 동안의 저의 삶을 통해, 얻게 된 결론은 언제 나처럼 서두에서 인용한 구절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 딸이 며 그런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또한 아름답고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저희는 그렇 게 사랑스레 창조되었습니다. 자신과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게 하는 무지에서 벗어나 진리의 빛 안에서 우리 모두가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항상 수행의 마음으로 논문을 지도해주신 오문환 교수님과 부족한 논문을 자세하고 정성껏 심사해주신 이종진 신부님과 김율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부처님의 자비로운 마음으로 자료를 알려주신 임승택 교수님과 박태원 교수님께도 감사드립니다. 함께 공부하면서 진리에 대한 열정으로 격려해주시고 도와주신 신학대학원 교수님과 원우 들,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진리를 실천하는 삶으로 마음을 보내주신 지인들께 감사드 립니다. 논문 쓰는 동안 한적한 소임으로 배려해주고 같은 길을 가는 형제로 힘이 되 어준 신학원 공동체, 예수회 모든 신부님과 수사님들, 저희들 공부할 수 있게 도와주 시는 후원회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부족한 자식이라 언제나 기도해주시는 어머니와 가족들, 그리고 힘든 순간에 당신의 사랑으로 위로해주시고 진리를 영으로 이끌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제가 받은 이 모든 사랑에 조금이나마 응답하며 살 수 있기를 간절히 청하며 진리의 빛을 따라 다시 한 걸음 나아갑니다.

自體有大智慧光明義故 徧照法界義故

(진여는 큰 지혜의 빛으로 온 우주를 두루 비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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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bstract Abstract

Abstract ··· ⅲⅲⅲⅲ 국문초록

국문초록 국문초록

국문초록 ··· ⅶⅶⅶⅶ

I.

I.

I.

I. 서론서론서론서론 ··· 1111

II.

II.

II.

II. 본론본론본론본론 ··· 4444

1. 1. 1. 1. 정견정견정견((((正정견 正正正見見見見))))이란 이란 이란 이란 무엇인가무엇인가무엇인가무엇인가? ? ? ? ··· 4444

1.1. 팔정도(八正道)의 처음이자 완성으로서의 정견 ··· 4

1.2. 사성제(四聖諦) ··· 8

1.3. 연기법(緣起法) ··· 10

1.3.1. 인식에 관한 원리로서의 연기법 ··· 10

1.3.2. 존재의 실상 ··· 16

2. 2. 2. 2. 정견의 정견의 정견의 인식론적 정견의 인식론적 인식론적 체계인식론적 체계체계 ··· 19체계 191919 2.1. 진리 인식의 원리 또는 형식으로서의 불성(佛性) ··· 19

2.2. 인식의 근원으로서의 불성-선불교를 중심으로 ··· 24

2.3. 진리 인식의 구조-일심이문(一心二門) ··· 26

2.4. 진여의 본질과 작용 ··· 29

2.4.1. 지혜의 빛인 진여 ··· 29

(6)

2.4.2. ‘공적영지지심’(空寂靈知之心)인 진여 ··· 32

2.5. 일상에서 진여와의 만남 ··· 35

3. 3. 3. 3. 정견의 정견의 정견의 수행체계정견의 수행체계수행체계 ··· 41수행체계 414141 3.1. 팔정도 수행법의 상호 연관성 ··· 41

3.2. 정사유(正思惟) ··· 45

3.3. 정념(正念) ··· 47

3.4. 사념처(四念處) ··· 48

3.4.1. 신념처(身念處) ··· 49

3.4.2. 수념처(受念處) ··· 50

3.4.3. 심념처(心念處) ··· 51

3.4.4. 법념처(法念處) ··· 53

3.5. 현대의 위빠사나 수행법으로 바라본 사념처 ··· 55

3.6. 현대 서구의학에서 활용되는 정념 ··· 60

3.7. 심리학적으로 바라본 정념(正念) ··· 62

3.7.1. Abraham H. Maslow의 이론 ··· 62

3.7.2. Joan Rubin-Deutsch의 이론 ··· 67

3.7.3. 정념과 심리학적인 해석의 연관성 요약 ··· 68

3.8. 정정(正定) ··· 69

III.

III.

III.

III. 결론결론결론 ··· 76결론 767676

참 참

참 참 고 고 고 고 문 문 문 문 헌 헌 헌 헌 ··· 83838383

(7)

Abstract Abstract Abstract Abstract

The The

The The epistemological epistemological epistemological epistemological understanding understanding understanding understanding about

about about

about the the the the meaning meaning meaning meaning and and and and exercising exercising exercising of exercising of of of the the the the JungyunJungyunJungyunJungyun

kim Hyung-chul

The Jungyun(正見, right view) has a special place in Buddhism, whose aim is to see the world as it really is ('Yosiljigyun', 如實知見, see-know reality), by realizing the Truth. the Jungyun is both the beginning and the completion or perfection of the Truth.

The Jungyun is the starting point for the Truth. It is the first step of the Paljungdo(八正道, noble eightfold path), the exercise for realizing the truth of Sasungje(四聖諦, four noble truths) which is the first preaching of the Buddha after the Enlightment. Starting the Jungyun, the Jungsayou(正思惟, right thinking), the Jungeo(正語, right speech), the Jungup(正業, right conduct), the Jungmyung(正命, right livelihood), the Jungjungjin(正精進, right effort), the Jungnyum(正念, right mindfulness), and the Jungjung(正定, right concentration) follow one after another. And finally, we come to realize the truth of the Sasungje. Furthermore, the Jungyun is also to realize the truth of the Sasungje. So the Jungyun has meaning of both the beginning and the completion or perfection of the Truth in that context.

The Sasungje is the practical instruction about the Yongibub(緣起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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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rine of conditioned arising), the fundamental truth into which the Buddha arranged the Truth after the Enlightment. Therefore the Jungyun in knowing the Sasungje also knows the Yongibub, and to know the Yongibub is to escape the error of the Muji(無知, ignorance) and to reach the existence of the World of Truth, that is why the Jungyun is to know the Truth.

Though our cognition is obscured by the Muji, it is possible to begin the first Jungyun and we can realize the Truth completely at last because there is the Bulsung(佛性, Buddha nature) in us. The Bulsung which is called the Jinsim(眞心, True Mind), Bongak(本覺, Primal Awareness), Yoeraejang(如來, synonym for the Buddha nature) is itself of the Truth. It is working dynamically in us and reveals itself to us and purifies our cognition, which is obscured by the Muji. We can realize the Truth because the nature and working of the Bulsung is such. It raises the first Jungyun and leads us to meet the Truth at last. And when we meet the Truth, we come to know that the Truth is already in us mystically. That Truth is exactly the Bulsung which is both the beginning and the end of the realization. What the realization is begun from the Jungyun and perfected to the Jungyun is in that context. The Bulsung is formed with the special cognition system of the Ilsimyimun(一心二門, two gate as One Mind); purifies our cognition, which is obscured by the Muji; and makes us aware the Truth.

Our effort is also very important to realize the Truth according to the Bulsung's working which leads us to the Truth. In other words, it is the Jungyun's exercising system. The Jungyun is accomplished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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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fected organically in the Paljungdo. Especially, the Jungyun is connected closely and concretely with the Jungsayou, the Jungnyum and the Jungjung. The Jungsayou is important in the aspect of faith, the Jungnyum and Jungjung are important in the aspect of exercising truth in action. The Jungnyum whose content is the Sanyumchoe(四念處, four awakenings of mindfulness) is to observe the body[身], the sense[受], the mind[心], the principle[法]. As they are conception which is based on the Yongibub, we can free ourself from our cognition conditioned by the Muji through observing them in the Jungnyum exercising, and we can see the real existence. We are able to know that the Jungnyum is not just the traditional religious exercise but also modern exercise which is able to be explained scientifically through the modern vipassana meditation, the modern western medical profession's evaluation about the Jungnyum, and through psychological explanation. The Jungjung, which is on the extension line of the Jungnyum, expresses the meaning and need of the passive waiting which should be met on the journey for the realizing of the Truth.

The first Jungyun, which is raised by the working of the Bulsung, is given to the human being passively. It is continued into the Jungsayou, the Jungeo, the Jungup, the Jungmyung, the Jungjungjin, the Jungnyum, which involve the human being's active exercising, then through the Jungjung, which is again a passive waiting, and then it comes to arrive to the Jungjigyun(正知見), which is the last perfection of Jungyun. The Jungyun, which has such special meaning and cognition process, also shows clearly how the Truth and human being's cognition interact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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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e united. They are already united in the Truth but not perfected in the human being's cognition yet. The Jungyun is finally the perfected unity between the Truth and the human being's cogn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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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국문 초록국문 국문 초록초록초록

‘여실지견’(如實知見), 진리를 깨달아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을 목 적으로 하는 불교에서 정견(正見)은 특별한 위치를 가지고 있다. 정견은 깨달 음의 시작임과 동시에 깨달음의 완성이다.

정견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신 후 처음 설법하신 사성제(四聖諦)의 진리 를 깨닫기 위한 팔정도(八正道) 수행법 중에서 첫 번째로 진리를 향한 출발점 이다. 정견을 시작으로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 일어나고 마침내 사성제의 진리를 알게 된다. 그런데 ‘사성제의 진리를 아는 것’을 또한 정견이라고 하여 정견은 깨달음의 시작과 완성이라는 의미를 함께 담고 있다.

사성제는 연기법(緣起法)에 대한 실천적인 가르침이고 연기법은 부처님이 깨달으신 진리를 정리한 최초의 법이다. 따라서 사성제를 아는 정견은 곧 연 기법을 아는 것이고 연기법을 아는 것은 무지(無知)의 오류에서 벗어난 참된 진리의 세계가 있음을 아는 것이기에 정견은 곧 진리를 아는 것이 된다.

우리의 인식이 무지에 가려져 있으면서도 진리를 향한 최초의 정견이 일어 나고 마침내 진리를 완전히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우리 안에 불성(佛性)이 있 기 때문이다. 불성은 진리 그 자체로 진심(眞心), 본각(本覺), 여래장(如來藏) 등으로 불린다. 진리 그 자체인 불성이 우리 안에서 역동적으로 작용하여 스 스로를 우리에게 드러내며 무지에 가려져 있는 우리의 인식을 정화시킨다. 우 리는 불성의 이러한 본성과 작용 때문에 진리를 알 수 있다. 불성이 최초의 정견을 일으키며 마침내는 완전한 진리와 만나도록 우리를 이끌어 간다. 그리 고 우리가 완전한 진리를 만날 때, 신기하게도 그 진리가 이미 우리 안에 있 었음을 알게 된다. 바로 깨달음의 시작이자 완성인 불성이다. 깨달음이 정견 에서 시작하여 정견으로 완성된다는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불성은 일심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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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心二門)의 인식체계로 이루어져 무지에 가려져 있는 인식을 정화하고 진리 를 일깨운다.

우리를 진리로 이끄는 불성의 작용에 따라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 우리의 노 력도 매우 중요하다. 곧 정견의 수행체계이다. 정견은 팔정도 안에서 유기적 으로 이루어지고 완성된다. 특히 그 중에서 정사유와 정념, 정정과 구체적인 연관성을 갖는다. 정사유는 믿음의 측면에서, 정념과 정정은 행동으로 드러나 는 수행의 측면에서 중요하다. 정념은 사념처(四念處) 수행법을 그 내용으로 하여 몸[身], 감각[受], 마음[心], 법[法]을 관찰한다. 몸, 감각, 마음, 법은 연기법에 기초한 개념들로 정념 수행을 통해 몸, 감각, 마음, 법을 관찰함으로 써 무지를 조건으로 하는 인식에서 벗어나 참다운 실재를 보게 된다. 현대의 위빠사나 수행법과 정념에 대한 현대 서구 의학의 평가, 심리학적 해석들을 통해 정념이 전통적인 종교적 수행법일 뿐만 아니라 과학적으로도 설명할 수 있는 현대적인 수행법임을 알 수 있다. 정념의 연장선상에 있는 정정은 진리 를 깨닫는 여정에서 만나는 수동적 기다림의 의미와 필요성을 말해준다.

불성의 작용으로 일어난 최초의 정견은 인간에게 수동적으로 주어진 것이 다. 그 정견이 인간의 능동적인 수행인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 념으로 이어지고 다시 수동적 기다림인 정정을 거쳐 마지막 완성으로서의 정 견인 정지견(正知見)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특별한 의미와 인식의 과정을 갖 는 정견은 또한 진리와 인간의 인식이 어떻게 상호 작용하면서 일치하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진리와 인간의 인식은 진리 안에서 이미 일치하지만 인간의 인식 안에서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정견은 곧 그 진리와의 일치가 완성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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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서론

그분은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손상되고 혼란스러워진 모습을 버리고, 하느님의 빛 안에서, 하느님과 꼭 닮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우라고”

우리를 부르신다. (예수회 34차 총회 교령 31-6)

불교의 ‘정견(正見)’을 연구하고자 하는 본 논문에서 그리스도교의 교의를 전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위의 구절이 필자에게 다가온 ‘바로 보는 것’

의 중요성과 의미를 명확히 표현해주고 있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우리 자신 과 세상을 바로 인식하고 있을까? 이 문제는 그리스도교뿐만 아니라 모든 종 교와 사회, 학문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중의 하나였다.

일상에서 우리가 겪고 있는 전쟁과 파괴, 갈등과 혼란, 존중과 봉사, 이해와 일치가 대부분 이 주제와 관련되어 있다. 그런 측면에서 불교의 ‘정견(正見)’

은 우리의 인식에 대해서 성찰해볼 수 있는 아주 좋은 연구 주제이다.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후 처음 설법한 내용이 사성제(四聖諦)와 팔정도(八 正道)이며 사성제의 진리를 알 수 있는 여덟 가지 거룩한 길의 첫 번째에 해 당하는 것이 바로 ‘정견’이다. 팔정도의 첫 번째에 해당함은 그 만큼 중요하다 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정견은 팔정도의 시작이자 동시에 마지막에 완성될 도착점이라는 독특한 인식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렇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정견임에도 불구하고 실상 정견에 대 해서 집중적으로 연구된 자료들을 많이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본 논문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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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연구를 바탕으로 정견에 중점을 두고 논의를 이끌어가려 한다. 본 논 문에서 다루어질 논점은 크게 3가지이다.

첫째, 정견의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고 정견이 좁게는 사성제와 팔정도 안 에서, 넓게는 불교 안에서 어떤 위치에 놓여 있는가 하는 점이다. 정견의 구 체적인 내용은 불교의 원시경전으로 붓다의 직접적인 가르침이 가장 잘 보존 되어 있다는 아함경1)의 국역(國譯)과 한역(漢譯) 경전 원문들을 인용하여 설 명할 것이다.

정견의 구체적인 내용들을 살펴봄으로써 정견이 연기법과 같은 불교의 핵심 개념과 어떻게 연관이 되어있는지를 알게 될 것이고 그 연관성 안에서 깨달음 의 시작이자 완성점으로서의 정견의 특별한 위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정견을 가능하게 하는 인식체계이다. 이 논의는 전적으로, 무지에 가 려져 있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이 어떻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지를 살펴보면서 그 여정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필요한 요소들을 가정 하고 그것들을 뒷받침할 수 있는 자료들을 제시할 것이다. 그 자료들은 주로

‘불성’(佛性), ‘본각’(本覺)과 ‘시각’(始覺), ‘일심이문’(一心二門) 등의 개념들이 다.

그리고 정견을 가능하게 하는 인식체계가 추상적인 내용이 아니라 아주 구 체적으로 우리가 일상에서 체험하는 것임을 다양한 예와 ‘질문(質問)’, ‘고향에 대한 향수’, ‘허무’(虛無), ‘일치(一致)’의 개념들을 통해 보여줄 것이다.

셋째, 정견을 위한 수행체계이다. 정견은 팔정도의 수행체계 안에서 유기적 으로 연결되어 있다. 특히 정사유(正思惟)와 정념(正念), 정정(正定)과 밀접하

1) 이연숙 뽑아옮김, 精選 아함경, 시공사, 1999, p.21, p.2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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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연관되어 있다. 정사유는 믿음의 측면에서 정념은 구체적이고 능동적인 수 행법의 측면에서, 정정은 수동적 기다림의 측면에서 아주 중요하다.

이 중에서 특별히 정념에 대해서는 오늘날 대중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위빠 사나 수행법과 현대 서양 의학과의 접목, 현대 심리학적인 이론과 연결하여 해석할 것이다. 정념은 부처님이 사용하시던 이천년이 훨씬 지난 오래된 수행 법이 아니라 시대를 초월하여 적용 가능한 탁월한 수행법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정을 보면서 진리를 만나는 여정에 있어서 우리 인식의 수동 적 기다림이 갖는 의미와 중요성을 간단히 살펴볼 것이다.

이 3가지 논점을 토대로 정견의 의미와 인식체계, 수행법을 요약, 정리하고 그 의의를 결론에서 말할 것이다.

본 논문이 불교의 정견과 수행법을 다루지만 어떤 특이한 체험이나 신비한 종교적인 진리, 그 자체를 다루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곳에 이르는 인식의 여정을 따라가려 한다. 이제 부족하나마 필자의 안내를 따라 부처님이 제시하 신 바른 인식의 길을 찾아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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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본론

1. 정견(正見)이란 무엇인가?

1.1. 팔정도(八正道)의 처음이자 완성으로서의 정견

“정견(正見)”, 서론에서 언급했듯이 우리는 자주 이 단어를 들어왔다. 그리 고 막연히 “바로 보는 것”, 그리고 팔정도 중의 처음에 해당하는 것, 정도로 만 알고 있다. 이제 구체적으로 정견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자.

정견이 고대 인도어인 Pali어로는 sammādiṭṭhi인데 sammā는 ‘바르 게’(rightly), ‘완전히’(throughly)라는 의미이고 diṭṭhi는 ‘견해’(見解, view), ‘믿 음’(believe), ‘이론’(theory)이라는 의미를 갖는다고 한다. 그래서 ‘올바른 견 해’나 ‘진실(眞實)의 인식(認識)’으로 해석되기도 한다.2) 정견을 포함한 팔정도 (八正道)와 사성제(四聖諦)는 붓다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후에 전에 자신을 모 시던 다섯 비구에게 녹야원에서 처음으로 설법하신 내용으로 그 만큼 불교 사 상에서 중요하고 핵심적인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중아함경의 상적유경(象跡喩 經)에 의하면 모든 짐승 발자국 가운데 코끼리 발자국이 제일인 것처럼 좋은 가르침이 한량없이 많더라도 그 모든 가르침은 다 사성제로 포섭된다고 한 다.3) 아함경에 다음과 같이 사성제와 팔정도의 내용이 실려있다.

그대들은 사제(四諦)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제란 괴로움의 범위에 대

2) 한경수, “阿含經에 나타난 修行觀 연구”, 동국대학교 대학원, 1989, pp.23-24 참조.

3) 이연숙, 精選 아함경, p.19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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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진리[苦諦]․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진리[告習諦]․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진리 [苦盡諦]․괴로움의 소멸을 위해 실천해야 할 방법에 대한 진리[苦出要諦]를 말 한다[...]

괴로움의 소멸을 위해 실천해야할 방법에 대한 진리란 이른바 현성의 팔품도 (八品道), 즉 바른 견해[等見]․바른 사유[等治]․바른 말[等語]․바른 행위[等業]․바 른 생활[等命]․바른 노력[等方便]․바른 기억[等念]․바른 선정[等定]을 말한다.4)

이것이 부처님이 처음 설법하신 내용이고 사성제와 팔정도에 대한 설명은 아함경 곳곳에서 다양하게 반복되어 언급된다. 팔정도의 경우 때에 따라 팔품 도(八品道), 팔성도(八聖道), 팔정도(八正道)로 또 세부항목도 단어가 약간씩 다르게 사용되고 있다. 그럼 보다 구체적으로 팔정도, 그 중에서도 정견에 해 당하는 내용을 찾아보자.

어떤 것이 바른 견해인가? 바른 견해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세속의 바 른 견해로 번뇌[漏]와 집착[取]이 있고 선취(善趣)로 향하게 한다. 다른 하나는 세속을 벗어난 성현의 바른 견해로 번뇌와 집착이 없고 괴로움을 바르게 다하 여 괴로움의 끝으로 향하게 한다.

번뇌와 집착이 있고 선취로 향하게 하는, 세속의 바른 견해란 어떤 것인가?

보시도 있고 주장[設]도 있으며 재(齋)도 있고 선행과 악행도 있으며 선악행에 대한 과보도 있고 이 세상과 저 세상도 있으며 부모도 있고 중생의 태어남도 있으며 세상에는 후세의 생명을 받지 않게 된 아라한도 있음을 아는 것을 일러 세속의 바른 견해라 한다.

4) 이연숙, 精選 아함경, pp.153-154, 증일아함경, 제14권, 고당품(高幢品). 팔품도는 팔정도로서 일반적 으로 바른 견해[正見]․바른 사유[正思惟]․바른 말[正語]․바른 행위[正業]․바른 생활[正命]․바른 노력[正 精進]․바른 기억[正念]․바른 선정[正定]이라 표현한다.

(18)

번뇌와 집착이 없고 괴로움을 바르게 다하여 괴로움의 끝으로 향하게 하는, 세속을 벗어난 성현의 바른 견해란 어떤 것인가? 이른바 불제자가 괴로움의 범 위에 대한 진리[苦]를 있는 그대로 사유하고,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진리[集]․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진리[滅]․괴로움의 소멸을 위해 실천해야할 방법에 대한 진리[道]를 있는 그대로 사유하여, 번뇌가 없는 사유를 따라 가르침을 선택하고 분석하고 추구하며 깨닫는 인식력[覺知]과 지혜[點慧]로 관찰하고 불성을 개발 하며 깨닫는 것5)을 일러 성현의 바른 견해라 한다.6)

위의 내용에 따르면 정견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진다. 하나는 세속의 바 른 견해로 선행과 악행이 있음을 알고 또 해탈한 아라한이 있음을 알아서 선 행을 행하고 아라한이 되도록 노력하라는 뜻으로 여겨진다. 일상적으로 우리 가 학교나 다양한 교육을 통해서 듣게 되는 선한 일을 하여 성인(聖人)이 되 라는 다소 일반적인 내용이다. 다른 하나는, 세속을 벗어난 바른 견해로 궁극 적인 해탈과 관계되는 보다 심오한 견해라고 볼 수 있다.7) 앞으로 본 논문에 서 살펴볼 내용은 주로 이 두 번째 바른 견해이다.

세속을 벗어난 정견의 내용을 잘 읽어보면 아주 짧고 간단하게 씌어져 있지 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사성제를 비롯하여 불교의 모든 가르침, 깨닫는 인식 력과 지혜로 관찰, 불성을 개발하며 깨닫는 것(開覺) 등으로 사실상 불교의 모 든 것이라 할 수 있다. 정견의 내용이 얼마나 넓고 심오한지, 또 얼마나 중요 한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정견의 내용이 워낙 광범위하다 보니 사성제와 연기법(緣起法), 삼법인(三法印)으로 요약하여8) 설명하기도 한다. 본 논문에서 는 그 중에서도 사성제와 연기법에 중점을 두고 논의를 풀어갈 것이다. 그런

5) 大正一切經刊行會(이하 大正), 大正新修大藏經, 제2권, 大正一切經刊行會, 1924, p.203, 잡아함경, 제 28권, 785경. 이연숙은 ‘불성을 개발하며 깨닫는 것’이라고 번역하였으나 漢譯경전 원문은 開覺(개각) 이다.

6) 이연숙, 精選 아함경, p.527, 잡아함경, 제28권, 785경.

7) 월폴라 라훌라 저, 붓다의 가르침과 팔정도, 전재성 역, 한국 빠알리성전 협회, 2002, p.90 참조.

8) 이연숙, 위의 책, p.43 참조.

(19)

데 여기서 우리는 부처님의 설명이 약간 특이한 논리적 구조를 지니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팔정도는 사성제를 깨달을 수 있는 길이고 그 첫 번째 길에 해당하는 것이 정견이다. 즉 정견은 방법에 해당한다. 그런데 정견을 설명하면서 정견이란 사성제를 아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깨닫기 위해서 정견을 하라고 하면서 정견이 바로 깨달음이라니 이것이 도대체 무슨 말일까?

여기서 우리는 정견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위상을 알 수 있다. 정견은 팔정 도를 통한 깨달음의 시발점이자 곧 궁극적인 도달점인 것이다.9) 시작으로서의 정견은 사성제에 대한 완전한 인식이 아니다. 아주 초보적인 수준의 인식이 다. 그러나 그러한 초보적인 인식이 있음으로 해서 그 다음 단계로 넘어 갈 수 있는 것이다.

해가 뜨기 전에 밝은 모양이 먼저 나타나듯, 비구가 괴로움을 바르게 다하여 괴로움의 끝에 이르기 전의 모습은 이른 바 바른 견해[正見]를 지니는 것이다.

바른 견해는 바른 사유․바른 말․바른 행위․바른 생활․바른 노력․바른 기억․바른 선정을 생겨나게 하나니, 선정 삼매가 생겨나는 까닭에 불제자는 탐욕․노여움․어 리석음에서 마음이 바르게 해탈한다. 이와 같이 마음이 잘 해탈한 불제자는 자 신이 바른 인식력[知見]을 얻어[...]10)

마치도 해가 조그마하게 뜨기 시작해서 나중에는 온 세상을 환하게 비추듯 이 정견 역시 초보적인 수준의 인식에서 시작해서 나중에는 불교의 모든 진리 를 바로 알게 되는 것으로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한경수의 “阿含經에 나타

9) 냐나틸로카 지음, 붓다의 말씀, 김재성 역, 고요한 소리, 2002, pp.77-78 참조.

10) 이연숙, 精選 아함경, p.526, 잡아함경, 제28권, 749경.

(20)

난 修行觀 연구”에도 이러한 정견의 진행을 설명하고 있다.11) 또 월폴라에 따 르면 시작으로서의 정견은 ‘진리에 따르는 올바른 견해’라고 부르고 종극으로 서의 올바른 견해는 ‘진리를 꿰뚫는 올바른 견해’라고 부른다고 한다.12) 특히 아함경의 漢譯 원문을 보면 시작으로서의 정견과 마지막 완성으로서의 정견을 구별하여 마지막 정견은 정지견(正知見)이라고 표현하였다.13)

正見生已 起正志 正語 正業 正命 正方便 正念 正定[...]正定起已 聖弟子得正 解脫貪慾瞋恚愚癡. 如是聖弟子得正解脫已 得得正正知知見14)

어떻게 이러한 인식적 과정이 가능한지는 2장과 3장에서 더욱 자세히 다룰 것이다. 이제 정견에 해당하는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먼저 세속을 벗어난 정견에서 계속하여 강조하고 있는 사성제이다. 사성제의 의미를 따라 가 보면 정견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1.2. 사성제(四聖諦)

책마다 약간씩 다르긴 하지만 본 논문에서는 고성제(苦聖諦)․집성제(集聖諦)․

멸성제(滅聖諦)․도성제(道聖諦)로 표기한15) 것을 따르기로 하겠다. 도성제에 대한 내용은 앞서 언급되었기에 여기서는 경전의 기록을 보면서 고성제, 집성 제, 멸성제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자.

11) 한경수, “阿含經에 나타난 修行觀 연구”, p.25 참조.

12) 월폴라 라훌라, 붓다의 가르침과 팔정도, p.91 참조.

13) 柳萬烘(이하 류만홍), “根本佛敎의 修行體系 硏究”, 동국대학교 대학원, 1994, pp.45-46 참조.

14) 大正, 大正新修大藏經, 제2권, p.198, 잡아함경, 제749경. 한글 해석은 각주 10)과 동일.

15) 강건기, 불교와의 만남, 불지사, 2002, p.163 참조.

(21)

괴로움의 범위에 대한 진리(苦聖諦-필자 부연)란 무엇인가? 이른바 태어나는 것은 괴로움이요 병드는 것도 괴로움이며 늙는 것도 괴로움이요 죽는 것도 괴 로움이며, 미워하는 이와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요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며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요 물질과 몸․감수작용․지각 작용․의지와 충동․분별의식[五盛陰]을 붙들려는 노력도 괴로움이라는 진리이다.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진리란(集聖諦-필자 부연), 이른바 괴로움의 원인은 감 수작용[受]과 즐거움의 대상에 대한 목마른 갈구[愛]가 끊임없이 생겨나 늘 싫 증냄 없이 대상에 탐착하는 데 있다는 진리이다.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진리란(滅聖諦-필자 부연), 이른바 괴로움의 소멸은 즐 거움의 대상에 대한 목마른 갈구를 남김없이 멸하여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하 는 데 있다는 진리이다.16)

사성제란 결국 괴로움이 무엇인지를,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괴로움 은 소멸될 수 있으며, 소멸할 수 있는 8가지 길이 있음을 말한다.

괴로움의 범위를 보면 생노병사(生老病死)와 일반적으로 우리가 겪는 괴로 움, 즉 미워하는 이를 만나는 것,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것, 구하는 것을 얻 지 못하는 것과 오성음17)에 집착하는 노력을 포함해서 한마디로 우리의 인생 이 고통스럽고 괴로운 것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이러한 표현 때문에 불교 는 염세적이라고 잘못 이해하는 사람도 있다.18)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진리가 이에 대한 답을 해줄 수 있다.

우리가 보통 “무엇은 괴로움이다.”라고 정의 한다면 “난장이는 키가 작은

16) 이연숙, 精選 아함경, p.154, 증일아함경, 제14권, 고당품(高幢品).

17) 위의 책, p.328 참조, 오온을 말함. 사람을 포함한 모든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다섯가지 요소로, ‘물 질과 몸’(色), ‘감수작용’(受), ‘지각작용’(想), ‘의지와 충동’(行), ‘분별의식’(識)을 뜻함.

18) 월폴라 라훌라, 붓다의 가르침과 팔정도, p.44 참조.

(22)

사람이다.”처럼 그 무엇 자체가 괴로움이어야만 한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죽 는 것은 괴로움이다.”라고 할 때 “죽음=괴로움”이 성립할 수 있는 “죽음”과

“괴로움” 단어 자체에 대한 의미를 따지기보다 괴로움의 원인의 문제를 제기 한다. 이러한 논리적 구조는 어떤 대상이 그 자체로, 예를 들어 “죽음”이 그 자체로 괴로움이 아니라 그것을 괴롭다고 인식하게 하는 원인 때문에 괴로움 이 됨을 의미한다. 만약 그것을 괴로움으로 인식하게 하는 원인이 사라지면 그 대상은 더 이상 괴로움이 아니라는 말이다. 즉 “죽음” 자체가 괴로움이 아 니라 어떤 원인 때문에 “죽음”을 괴로움으로 인식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 원인은 무엇인가? 부처님에 따르면 감수작용과 즐거움의 대상 에 대한 목마른 갈구로 인한 탐착이 그 원인이다. 그리고 이 원인이 소멸되면 우리는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 해탈에 이르게 된다.19)

여기서 우리는 사성제에 대한 부처님의 논의가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논의의 중점이 “괴로움” 자체에서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감수작용”과 “갈구”, “탐착”으로 옮겨가고 있다. 그리고 이 개념들은 바로 연기법(緣起法)에서 가져온 것이다. 따라서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의미를 명확 히 알기 위해서는 연기법에 대한 연구가 반드시 필요하다.

1.3. 연기법(緣起法)

1.3.1. 인식에 관한 원리로서의 연기법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신 후에 다섯 비구들에게 처음 설법하신 진리는 사 성제와 팔정도이다. 하지만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신 후에 처음 정리한 내용 은 사성제와 팔정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연기법이었다. 남전(南傳) 대장

19) 이연숙, 精選 아함경, p.526 참조.

(23)

경 소부경전(小部經典)에 들어있는 자설경(自說經)에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 시는 순간의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나는 이렇게 들었다. 어느 때 비로소 정각(正覺)을 나타내신 부처님은 우루벨 라(優樓毘羅) 네란자라(尼連禪) 강가에 있는 보리수 아래에 머물고 계셨다. 그 때 부처님은 한 번 결가부좌한 그대로 7일 동안 해탈의 기쁨을 누리면서 앉아 계셨다. 7일이 지난 후 초저녁경(오후 8시경) 부처님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다 음과 같은 순서로 연기(緣起)의 법을 생각해 내셨다.20)

위의 내용처럼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고 처음 정리하신 진리는 연기법이었 다. 그런데 왜 처음 설법하신 것은 연기법이 아니고 사성제와 팔정도였을까?

깨달음을 얻으시고 나서 부처님은 자신이 깨달으신 법을 사람들에게 전해야할 지 말아야할지 숙고하셨다. 왜냐하면 그 법이 세상을 거스르고 미묘하고 난해 하여 이해하기 어렵고 욕망의 격정에 빠진 자, 암흑으로 휩싸인 자를 깨닫게 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오랜 숙고 끝에 범천의 청을 들으시고서 설법을 결심하신 부처님은 자신이 정리한 연기법을 사람들이 알아듣기 쉽게 새롭게 편성하셨다.21) 그것이 바로 사성제와 팔정도로서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보다 실천적이고 체계적인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22)

이제 사성제와 팔정도의 근원이 되는 연기법으로 들어가보자.

어떤 것이 연기법의 내용인가? 이른바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 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즉 진리에 대한 무지[無明]를 조건[緣]으로 하여 집착하는 대상을 실재화하려는 의지와 충동[行]이 있고, 집

20) 增谷文雄 저, 근본불교 이해, 홍사성 역, 만다라 총서, 1992, pp.27-28.

21) 위의 책, pp.44-47 참조.

22) 강건기, 불교와의 만남, pp.162-163 참조.

(24)

착하는 대상을 실재화하려는 의지와 충동을 조건으로 하여 분별의식[識]이 있 으며, 분별의식을 조건으로 하여 신체와 정신 작용의 결합[名色]이 있고, 신체 와 정신 작용의 결합을 조건으로 하여 주관성이 확립된 여섯 감각 기관[六處]

이 있으며, 주관성이 확립된 여섯 감각 기관을 조건으로 하여 주관성이 확립된 여섯 감각 기관과 여섯 감각 대상의 접촉[觸]이 있고, 주관성이 확립된 여섯 감 각 기관과 여섯 감각 대상의 접촉을 조건으로 하여 감수작용[受]이 있으며, 감 수 작용을 조건으로 하여 즐거움의 대상에 대한 목마른 갈구[愛]가 있고, 즐거 움의 대상에 대한 목마른 갈구를 조건으로 하여 집착하는 대상을 자기화하려는 행위[取]가 있으며, 집착하는 대상을 자기화하려는 행위를 조건으로 하여 존재 형성[有]이 있고, 존재의 형성을 조건으로 하여 태어남[生]이 있으며, 태어 남을 조건으로 하여 늙음과 죽음[老死] 및 괴로움이 무더기23)로 발생한다는 것 이니, 이것을 일러 연기법의 내용이라 한다.24)

집성제에서 괴로움의 원인으로 말하는 감수작용과 갈구, 집착하는 대상을 자기화 하려는 행위의 개념이 연기법에서 나왔음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본 논문에서 연기법에 대해서 깊이 논의할 수는 없다. 연기법 하나 만으로도 수 많은 논문이 나올 만한 중요한 주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다만 정견의 직 접적인 내용으로 언급된 사성제와의 연관성을 알기 위해 연기법에 대한 인식 론적 해석만을 간단히 살펴보려 한다.

그런데 연기법을 공부하면서 많은 이들이 연기법을 과학적 인과율처럼 물리 적 세계에도 적용되는 원리로 이해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23) 이연숙, 精選 아함경, p387, 중아함경, 제54권, 다제경(嗏帝經). 여기에서는 연기법을 설명하면서 괴 로움의 무더기에 대한 내용으로 ‘근심․울음․걱정․번뇌․괴로움’이 첨가되어 있다.

24) 위의 책, pp.374-375, 잡아함경, 제12권, 298경. 12연기의 내용에 대한 설명이 漢譯 원문에는 ‘謂緣 無明行 乃至純大苦聚集’으로 간단히 줄여져 표현되어 있다. 왜냐하면 293경에서 자세히 언급되어 있기 때문에 굳이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연숙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 를 다시 풀어서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25)

헤라클레이토스는 “모든 것은 흘러간다.”고 말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만물은 운동 속에 있다.”고 했다. 붓다 또한 생성 유전하는 존재의 모습을 관 찰한 결과, 존재하는 것은 모두 그럴만한 조건이 있어서 생겨난 것이며, 조건이 없어지면 그 존재도 있을 수 없게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어쨌든 보리수 밑 에서 깨달은 만유의 진상이란 이런 것이다. 일체의 존재는 어느 것이나 그럴 만 조건이 있어서 생긴 것, 즉 ‘말미암아 생긴 것’이다. 그렇다면 일체의 존재는 또한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겠다. 연기의 문제가 마침내 인과(因果, hetuphala)의 문제로서 논해지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25)

존재의 형성[有]과 태어남과 죽음이 그 안에 포함되어 있으니 그렇게도 생 각할 수 있겠으나 연기법의 시작과 구성을 잘 살펴보면 연기법이 우리의 의식 외부에 존재한다고 판단되는 물리적 세계에 적용되는 원리가 아니라 근본적으 로 그러한 대상에 대한 인식이 어떤 구조로 이루어지고 있는지에 관한 원리임 을 알 수 있다. 칸트의 표현을 빌자면 현상계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이루어지 는가에 관한 원리라고도 말할 수 있다.

연기법에서의 존재의 형성[有]와 태어남과 죽음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식 하고 우리의 의식 외부에 실재로 존재한다고 판단되는 어떤 사물로서의 존재 와 존재의 태어남, 생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체계 안에서 구 성되는 존재의 형성과 태어남과 죽음이다. 괴로움도 마찬가지다. 앞서 사성제 에서 설명되었지만 괴로움은 어떠한 존재로 실재하는 괴로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감수작용과 갈구와 탐착으로 괴롭다고 인식한 그 괴로움이다.

즉 실체로서의 괴로움이 아니라 괴로움이라고 인식된 괴로움이다.

그래서 경전의 다른 부분에서는 “이것(또는 이 사건으로 번역된다)이 있을 때 저것이 있으며,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는 연기법의 가장 기

25) 增谷文雄 저, 불교 개론, 이원섭 역, 현암사, 2003, pp.82-83.

(26)

본적인 원리를 “所謂是事有故是事有 是事起故是事生”26)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특별히 일어나고 생기는 것을 ‘事’로 표현하였는데 ‘사’는 실체적으 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인과적으로 얽혀 있는 사건을 말한다.27) 즉 ‘事’가 우리 의 인식 안에서 인과적으로 존재하는 그런 대상이라는 뜻으로 연기법이 인식 에 관한 원리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연기법의 시작자체가 연기법이 인식에 관한 원리임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 다. 연기법의 시작은 진리에 대한 무지[無明]이다. 무지, 밝음이 없다는 것,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 이것은 근본적으로 인식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진 리에 대한 무지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경전의 내용을 들어보자.

어떤 것이 진리에 대한 무지인가? 과거를 알지 못하고 미래를 알지 못하고 과거와 미래를 알지 못하며, 마음[內]을 알지 못하고 외경[外]을 알지 못하고 [...]부처를 알지 못하고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그 가르침을 따르는 출가 제자 를 알지 못하며, 괴로움의 범위에 대한 진리를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원인에 대 한 진리를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진리를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소 멸을 위해 실천해야 할 방법에 대한 진리를 알지 못하며 원인[因]을 알지 못하 고 원인이 일으키는 현상[法]을 알지 못하며[...]연기를 분별함을 알지 못하 며, 여섯 감각 기관[六觸入處]을 진실 그대로 깨달아 알지 못하여, 이것 저것 모두에 대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며 미혹됨 없이 밝게 알지 못하고 어리석고 어두워 밝지 못하며 크게 어두운 것을 일러 진리에 대한 무지라고 한다.28)

그리고 이 무지는 도대체 왜 생기는 것일까. 부처님은 간단하게 그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26) 大正, 大正新修大藏經, 제2권, p.245, 잡아함경, 제34권, 961경.

27) 월폴라 라훌라, 붓다의 가르침과 팔정도, pp.152-154 참조.

28) 이연숙, 精選 아함경, pp.375-376, 잡아함경, 제12권, 298경.

(27)

비구들이여, 물질과 몸[色]이 있기에 물질과 몸의 일이 일어나고 물질과 몸에 집착하며 물질과 몸에서 ‘나’를 보아 중생들이 진리에 대한 무지로 덮이고 애욕 에 그 머리가 얽매여 먼 길을 내달려 생사를 윤회하고 떠도는 것이다.29)

이 말에 따르면 진리에 대한 무지가 물질과 몸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인 데 이 설명은 적절한 답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연기법에 따르면 물질과 몸 역시 무지 때문에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부처님께서 물질과 몸에 대한 집착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생각한다.

부처님도 더 자세히 무지의 근원에 대해서 말씀하지 않으셨고 대승기신론에 서는 시작을 알 수 없는 아득한 과거부터 있어왔다고 해서 무시무명(無始無 明)30)이라고 간단히 표현하고 있다. 무지에 대해서 그렇게 자세히 언급하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중요한 것은 무지의 원인을 아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아 는 것이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진리를 깨닫게 되면 무지의 문제는 자연히 해 결되는 것이다.

이렇듯 진리에 대한 무지가 인식에 관한 것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앞서 인 용된 연기법에 대한 구절이 연기법이 인식에 관한 원리임을 더욱 명확하게 해 준다.

즉 진리에 대한 무지[無明]를 조건[緣]으로 하여 집착하는 대상을 실재화하 려는 의지와 충동[行]이 있고,

漢譯 원문으로는 “謂緣無明行”31)이다. 무지 때문에 집착하는 대상을 실재화

29) 이연숙, 精選 아함경, p.472, 잡아함경, 제6권, 136경.

30) 서광 스님, 현대 심리학으로 풀어본 대승기신론, 불광 출판사, 2004, p.60 참조.

31) 大正, 大正新修大藏經, 제2권, p.85.

(28)

하려는 의지와 충동이 있다는 말은 무지 때문에 집착하지만 원래는 실재하지 않는 어떤 대상을 실재화하려는 의지와 충동이 있다는 말이다. 즉 무지 때문 에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집착하게 되며 그것을 실재로 있는 것처 럼 의지하고 충동한다는 것이다. 연기법에 따르면 이렇게 무지 때문에 실재하 지 않는 대상에 대한 집착이 생기고 결국 끝없는 괴로움으로 귀착된다. 앞서 사성제에서 괴로움이 실재하는 괴로움이 아니라 괴로움으로 인식된 것임을 보 았고 이제 그 괴로움의 시작 자체가 무지 때문에 실재하지 않는 것을 실재하 는 것으로 착각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연기법은 우리의 왜곡된 인식이 어떤 과정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하겠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정리해보자. 정견은 곧 사성제와 팔정도를 포함한 불교 의 진리를 아는 것이고 우리는 그 중에서 사성제를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다.

사성제를 보면서 사성제가 근본적으로 인식에 대한 문제이며 사성제 자체가 연기법에서 기인한 것임을 보았다. 따라서 정견은 곧 연기법을 아는 것이고 연기법을 아는 것은 진리에 대한 무지로 인해 왜곡된 인식의 구조를 아는 것 이다.

쉽게 풀어 보자면 일상에서 우리가 괴로움이라고 여기는 것이 또 실재로 존 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실상은 우리의 무지에서 비롯된 인식의 오류라는 것 이다. 그래서 우리가 정견(正見)으로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무지를 떨쳐버리면 우리가 어떤 대상을 괴로움이라고 인식하는 오류에서 벗어나고 마침내는 무지 때문에 오류가 일어나기 전의 바른 인식에 도달하게 된다. 즉 정견에서 시작 하여 정견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부처님이 설하신 것은 연기법이지만 그 연기 법에 대한 설명 자체가 무지에서 벗어난 바른 인식(정견)이 있음을 이미 내포 한다고 할 수 있다.

1.3.2. 존재의 실상

(29)

불교는 무엇보다 현실적인 종교로 사물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보게 한 다.32) 즉 깨친 눈으로 존재의 실상을 바로 보게 하는 것이다.33) 그렇다면 과 연 그 정견의 완성은 어떤 것인지, 정견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할 수 있다. 화엄경에 그러한 세계가 언급되어 있다고 한다. 화엄경의 세 계는 부처님의 눈으로 본 세계이고 화엄경, 성기품에 “하나의 티끌중에 삼천 대천세계를 포함하고 있다”는 유명한 비유가 있다고 한다.34) 그러나 아함경에 서 부처님은 그 세계에 대해서 언급하기보다 주로 깨달음 이후의 인식의 상태 에 대해 말한다. 물고기에게 산을 이야기 한다고 물고기가 산을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부처님은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인식의 상태에 대해서 말한다.

그는 눈으로 모양과 빛깔을 보고는 좋아도 즐기거나 집착하지 않고 싫어도 미워하지 않으며, 신념을 닦고 마음은 번뇌가 없어 한량없이 넓으며[無量心], 심해탈과 해해탈을 진실 그대로 알아, 생겨난 악하고 착하지 않은 일을 남김없 이 멸한다. 귀․코․혀․몸․마음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이와 같이 밉고 밉지 않음에 따라 일어나는 감각을 자기화하여 즐거워 하거나 괴로워하거나 괴로워하지도 즐거워하지도 않는 행위를 멸한다. 그는 감 각을 즐기지 않아서 감각을 구하거나 집착하거나 자기화하지 않기에 즐거운 감 각이라도 곧 멸하나니, 즐거움이 소멸하면 집착하는 대상을 자기화하려는 행위 가 멸하고, 집착하는 대상을 자기화하려는 행위가 소멸하면 존재의 형성이 멸하 며, 존재의 형성이 소멸하면 태어남이 멸하고, 태어남이 소멸하면 늙음과 죽음 이 멸하며 근심․울음․걱정․번뇌․괴로움이 멸하여 큰 괴로움이 무더기로 소멸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바로 갈구가 완전히 다한 해탈[愛盡解脫]이 아니겠느냐?35)

32) 월폴라 라훌라, 붓다의 가르침과 팔정도, p.44 참조.

33) 강건기, 불교와의 만남, pp.23-24 참조.

34) 다카사키 저, 불성이란 무엇인가, 전치수 역, 여시아문, 1998, p6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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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들은 이 글을 읽고 부처님이 아무 감정도 없는 무감각한 사람이 아 닌가 오해할 수도 있다. 부처님은 무감각한 분이 아니라 오히려 무지에 의한 감정에서 벗어나 세상 사람들에 대한 깊은 사랑과 연민을 가지신 분이셨다.

부처님의 ‘전도선언(傳道宣言)’에 이것이 잘 표현되어 있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올가미에서 풀려났다. 그대들 또한 모든 올 가미로부터 자유로워졌다. 비구들이여, 그러니 이제 유행(遊行)하라. 많은 사람 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 세상을 불쌍히 여기고 인천(人天)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 두 사람이 한 길로 가지 말라[...]36)

정견으로 보는 해탈의 세계, 미움과 즐거움, 애착에서 완전히 벗어난 연민 과 사랑의 눈길이 어떤 것인지가 매우 흥미로운 주제이긴 하나 본 논문은 그 곳에 이르는 인식의 여정에 관한 연구임을 되새기며 다시 본래의 논의로 돌아 가도록 하겠다.

정견에서 시작하여 정견으로 완성된다는 점에서 새로운 논의가 도출된다.

깨달음을 얻으시고 설법하기를 주저하신 부처님의 모습에서 볼 수 있듯이 대 부분의 사람들은 진리에 대한 무지의 상태에서 인식의 오류 속에서 살아간다.

부처님 역시도 처음에는 진리를 알지 못했다. 즉 무지의 상태에 있었던 것이 다. 그렇다면 어떻게 무지로 가려져 있는 사람이 자신이 무지하다는 인식을 시작할 수 있는가? 연기법에 따르면 진리에 대한 무지에서 시작된 인식은 계 속 괴로움으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 시작이 잘못된 인식이 끊임없는 인식의 왜곡을 낳는 것이다.

35) 이연숙, 精選 아함경, pp.397-398, 중아함경, 제54권, 다제경.

36) 增谷文雄, 근본 불교 이해, pp.6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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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떻게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을까? 그 악순환을 끊을 수 있는 정견(正見)의 첫 시작이 어떻게 이루어 질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우리 안에 무지에 가려져 있는 인식과는 다른 인식, 즉 자신의 무지를 바라볼 수 있는 또 다른 인식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불성(佛性)과 “대승기신 론”의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의 개념이37) 그 새로운 인식 체계를 설명할 수 있는 적절한 자료가 될 수 있겠다. 곧 최초의 정견(正見)이 가능하게 하는 인 식체계의 뼈대가 되는 개념들이라 할 수 있다. 이제 그 인식체계에 대해서 알 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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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정견의 정견의 정견의 정견의 인식론적 인식론적 인식론적 체계인식론적 체계체계체계

불성과 본각, 그리고 시각의 개념은 열반경, 대승기신론, 등에서 언급된 개 념으로 특별히 정견의 인식체계로 한정되어 설명되지는 않는다. 필자가 찾아 본 참고 도서에도 그 개념들을 정견의 인식체계라고 설명한 책들은 보지 못하 였다. 필자가 정견에 대한 공부를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그 인식체계에 대한 물음이 생겼고 이 개념들이 정견의 인식과정을 잘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아 빌 려온 개념들이다. 특히 대승기신론을 편집한 책을 보면서 그 당시에 이미 그 토록 깊고 정교하게 인식에 대한 연구가 있었다는 것에 놀랐고 불성과 본각, 시각의 관계를 풀어가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2.1. 진리 인식의 원리 또는 형식으로서의 불성(佛性)

37) 길희성, 보살 예수, 현암사, 2004, p.23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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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서양 철학의 세계로 가보자. 플라톤의 파이돈에서 ‘같음’과 ‘안 같음’

에 대해 설명하면서 우리가 감각적으로 어떤 것이 같은지 같지 않은지를 판단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 대상을 감각하기에 앞서 ‘같음 자체’, ‘안 같음 자 체’를 알고 있어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다.38) 즉 같음에 대한 이데아가 우리에 게 없다면 우리는 “같다”라는 정의를 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케네스 갤러그(Kenneth T. Gallagher) 역시 플라톤과 꼭 같지는 않을지라도 정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선험성에 대해 말한다. 그는 우리가 지각한 것을 명 명하는 행위는 지각 행위 이상의 것으로 개념(con-ceptum) 안에서 파악하거 나 생각하는 것은 어떤 것(something)을 파악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없는 것 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사물들을 명명할 때, 언어 안에서 언어 이전에 있는 실재의 측면을 포착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언어가 경험된 실재에 의존해 있기에 본질적으로 지시적이라는 점은 사유가 실재적인 것을 창조하거나 고안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실재를 파악할 수 있는 원리가 우리 안에 선험적으로 있어 야만 한다. 케네스는 제1원리라고 불리는 3가지 원리를 든다. 1)동일성의 원 리 :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2) 충분 한 이유의 원리 : 존재하는 모든 것은 존재하는 충분한 이유를 갖는다. 3) 작 용인의 원리 : 존재하기 시작하는 모든 것(우연적 존재)은 작용인을 요구한다.

그는 이런 원리들이 도출되는 것은 사유 자체이고 이 원리들은 그로부터 사유 가 발생하는 사유의 시발점 또는 원천이기에 모든 개별적 진술이 자신의 궁극 적 가지성(可知性)을 이 원리들에 의존하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이 원리들은 경험을 사유에 의해 파악되게 하는 궁극적인 빛이 되며 이 원리들을 연역해 내거나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왜냐하면 모든 증명이 이 원리를 전제하 기 때문이다. 이 원리들은 개별적 정신이 최초로 형성하는 판단을 포함한 모

38) 플라톤, 플라톤의 대화, 최명관 역, 종로서적, 1987, pp.143-14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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든 판단에 대해 선행적인 것으로 거기에 잠재해 있다. 인간은 이러한 정신을 가지고 태어나며 그 정신의 구조 중 일부는 이 원리들의 진리성을 인지하는 능력으로, 정신은 이런 선천적인 능력을 통해서 비로소 정신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39)

다시 부처님에게로 돌아가자. 부처님은 무지에 가려져 있는 인식을 가지고 계셨지만 깨달음을 얻으셨다. 무지에 가려져 있는 인식이 깨달음을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즉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원리 내지는 성질, 플라톤의 표 현으로는 이데아가 우리의 인식 안에 먼저 있어야만 진리에 대한 인식이 가능 할 것이다.

선불교에서는 그것을 불성(佛性), 여래장(如來藏), 진여(眞如), 진심(眞心)40), 본심(本心), 번뇌가 없는 텅빈 마음으로 무심(無心), 본각(本覺) 등의 다양한 명칭으로 부른다.41) 이름이 다르고 사용되는 맥락에 따라서 약간씩 다른 의미 를 지니지만 근본적으로는 같은 의미라는 것이 본 논문을 읽어가면서 드러나 게 될 것이다.

먼저 불성을 살펴보자. 필자는 가능하면 아함경과 같은 원시경전에 근거하 여 그 단어의 쓰임을 찾아보려 하였으나 많은 책에서 특정 경전을 지정하여 출처를 밝히지 않고서 원시경전과 소승경전에 있는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 라는 표현을 들어 불성의 개념이 불교의 시작부터 논의되었음을 밝히고 있 다.42)

자성청정심이란 인간의 마음이 본래부터 깨끗하다는 뜻이다. ‘자성청정심(自 性淸淨心) 객진번뇌염(客塵煩惱染)’이라는 말 또한 인간의 마음은 본래 깨끗한

39) 케네스 갤러거, 지식철학, 철학과 현실사, 2002, p.193. pp.165-173 참조.

40) 吉祥 편집, 불교대사전 上, 弘法院, 1998, pp.1540-1541 참조. 여기서의 심(心)은 연기법에서 육처 에 해당하는 사고(思考)의 기관이 아니라 우리들의 존재의 근저에 있는 원리로서의 마음 또는 각종 불 신(佛身)이 시현되는 곳의 근본인 깨달음의 마음의 실체로서의 마음이다.

41) 길희성, 보살 예수, p.130, p.220, p.281 참조.

42) 다카사키, 불성이란 무엇인가, p.42 참조. 길희성, 같은 책, p.130 참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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