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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진여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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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철학의 인식론적 관점에서 설명하는 ‘질문’이 아주 간단하면서도 명확 한 예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일상에서 자주 질문을 한다. 케네스는 “질문은 내가 알지 못하는 바를 표현한다.”라고 설명한다. 이 말이 성립될 수 있는가?

알지 못하는 바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말은 결국 질문에는 비 록 아주 작을지라도 이미 앎이 포함되어 있어야함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고서 는 질문이 성립될 수 없다. 세계가 의심스러운 것으로 현시되는 것은 가지적 으로 현시된다는 말도 그러한 맥락이다.63) 즉 앎이 이미 우리 안에 있고 그것 이 질문의 형태로 표현된다. 그리고 그 앎은 마치 진여가 우리 안에서 작용하 듯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질문하게 만든다. 질문을 통해 새로운 답을 찾고 우 리의 앎은 계속 확장되는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하이데거는 우리가 일상에서 진여를 만나는 계기가 되는 체 험을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동경으로 표현했다고 한다. 고향 상실의 상태가

‘향수병’을 낳고 오히려 고향으로 향하게 한다는 것이다.64) 즉 고향을 잃어버 렸지만 어딘가에 계속 고향에 대한 느낌이 있기에 계속 그리워하고 찾게 된다

63) 케네스 갤러거, 지식철학, pp.88-89 참조.

64) 이찬수, 불교와 그리스도교, 깊이에서 만나다, p.130 참조.

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사람들은 이와 비슷한 체험을 하는 것 같다.

죽음을 앞에 두고 무언가 자신이 가야할 새로운 곳을 느끼고 생각하게 되고 그동안의 삶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전혀 의식하지 않았던 새 로운 세계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수긍하게 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기실 그곳 은 이미 자신이 떠나온 고향이다. 곧 진여이다.

니시타니 케이지(西谷啓治)가 “종교란 무엇인가”에서 기술한 허무(虛無)에 대한 내용도 이와 비슷하다.

우리는 몇 십년 후에 죽음과 만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 이미 죽음을 가 지고 태어난다. 살아가려는 한걸음 한걸음은 죽음을 향한 한걸음 한걸음이며, 끊임없이 한쪽 발을 죽음 속에 얹고 있는 것이다. 순식간에 허무로 돌아가는 까 닭 모를 심연이 우리들 생 속에 잠재되어 있다.65)

니시타니는 ‘허무’(虛無)의 개념을 들어 우리가 진여를 만나는 과정을 설명 한다. 죽음을 앞에 두고 또는 일상에서 문득 문득 우리는 허무를 체험한다.

여기서의 허무는 니시타니가 말하는 ‘절대적인 허무’가 아닌 유(有)에 상대되 는 무로서, 상대적(相對無)인 허무’이다.66) 태어나서 성장하고 좋은 학교를 나 오고 좋은 직장을 가지고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키우고 그렇게 살다가 결국 맞이하게 되는 것은 죽음이다. 또 그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과 고통이 있다.

삶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허무하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산다는 것이 무엇 일까?” 부처님도 이러한 경우였다. 왕자였던 부처님은 성밖을 돌아보면서 늙 고 병들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자신의 삶에 대해 회의를 품게 되었고 그 것이 출가의 계기가 되었다.67)

65) 이찬수, 불교와 그리스도교, 깊이에서 만나다, p.95.

66) 위의 책, p.44 참조.

67) 이연숙, 精選 아함경, pp.104-110 참조.

니시타니는 이러한 회의의 극(極)에서 절대적 허무가 커다란 의심으로 드러 난다고 한다.68) 불교식의 표현으로는 ‘대의현전’(大疑現前)이다. 일상적이고 상대적인 회의와 물음 끝에서 커다란 의심[大疑]의 모습으로 절대적 허무가 드러난다는 말이다. 대의는 일반적인 의심이 아니다. ‘대의현전’이라는 말 그 대로 큰 의심이 자신 안에 솟아오른다는 뜻으로 그 의심은 어떤 객관적인 사 항에 관해서 의심하거나 자신의 뿌리를 대상화시켜 의문을 품는 그런 정도와 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의심하는 자와 의심받는 것이 별개가 아니라, 그 구별의 장을 넘어선 곳에서 자기가 큰[大] 의심[疑] 자체가 되는 것”, 존 재의 근저에서 허무가 솟아올라 일체 유(有)에 집착하던 자신이 큰 의심 덩어 리 자체가 되는 그런 의심이다.69)

일상적인 회의와 허무감의 그 밑바닥에 그것과는 전혀 다른 또 다른 의심과 허무가 있음을 발견하고 그것과 하나가 된다는 뜻이라 여겨진다.

그리고 이 의심과 허무가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우리가 삶을 바라보던 모든 시각을 바꾸어 놓는다. 근저에서 솟아오르는 허무를 참으 로 비어 있고[虛] 아무 것도 없는[無] 그 허무로서 체험하는 순간, 존재의 모 습도 여실하게 드러난다고 한다. 있는 그대로를 보게 되는 것이다. 니시타니 에 따르면 인간은 본래적으로 허무적 심연 위에서 무와 하나 되어 있다. 그리 고 이 허무를 체험한다는 것은 일상적 ‘나’ 자신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허무가 나에게 스스로를 실재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라고 한다. 인간이라는 주 체가 자신 밖에서 허무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허무가 인간적 존재 안에서 스스로를 일으킨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인간 자신이 허무가 된다.70)

니사타니의 대의(大疑)는 계속해서 대사(大死)와 안심(安心)으로 이루어진다.

68) 이찬수, 불교와 그리스도교, 깊이에서 만나다, p.117 참조.

69) 위의 책, pp.111-112 참조.

70) 위의 책, p.104, p.112 참조.

자기가 의심한다는 의식 작용의 극(極)에서 ‘자기가’라는 분별을 부수고 자기 근저에서 나타난 것이 ‘대의’(大疑)이지만, 그곳은 어디까지나 자기가 궁지에 다다른 곳이며 동시에 ‘자기’가 없어지는 곳이며, 자기가 ‘멸’(滅)하는 곳이다.

그 현상은 마치 콩이 익어서 껍질과 씨앗으로 분리되는 것과 같다. [단 이 경우 껍질은 소(小)자아이며, 씨앗은 세계와 함께 하는 무한성의 ‘대’(大) 이다.] 그 때 자기는 동시에 자기의 ‘무’(無)이다[...]그러한 의미에서 대의는 대사(大死) 라고도 불린다.71)

허무의 자각이란 자의식적 장을 돌파하면서 자기 자신이 허무 그 자체가 되 어 버림을 뜻한다. 그와 동시에 사물을 대상화하면서 스스로 당당해 하던 자 아가 아무 것도 없다는, 즉 허무라는 사실을 꿰뚫게 되고 일상적 자기는 죽게 된다. 그래서 허무의 자각, 즉 대의현전은 ‘큰 죽음’[大死]이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철저하게 부정되는 곳에서 진정한 자기 자신이 긍정된 다. 우리 삶의 근저에 허무의 지평이 열리는 것은 삶이 새롭게 경험되는 계 기, 삶이 그 자체로 긍정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삶에 대한 근원적 의심(疑心, 즉 大疑)이 바로 그 의심을 통해 근저에서부터 ‘안심’(安心)으로 바 뀌게 된다. 왜냐하면 일상적 자아의 죽음이 본래적 자아의 등장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앞서 대의와 허무가 본래부터 있었던 것처럼 이러한 본래적 자아 역시 일상 적 자아 곁에 별도로 존재했던 그 무엇은 아니다. 일상적 자아가 그대로 본래 적 자아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깨칠 때 ‘공’으로 전환된다고 한다. 일체의 일상적 삶을 그 자체로 긍정하게 되고 그렇게 긍정된 일상적 삶이 바로 인간 의 본래진면목(本來眞面目)이라는 것이다. 생사와 열반이, 무한과 유한이, 부 정과 긍정이 모두 대립적이면서도 그대로 동일하다는 것도 이러한 논리이

71) 이찬수, 불교와 그리스도교, 깊이에서 만나다, p.117.

다.72)

대승기신론에서 밝혔듯이 이와 같은 모든 작용이 니시타니가 허무라고 표현 한 진여가 스스로를 드러냄으로써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필자가 니시타니가 말하는 대의나 허무, 대사, 안심의 체험을 하지 못하였기에 그 체험에 대한 설명의 한계를 느낀다. 하지만 깨달음도 완전한 깨달음과 부족한 깨달음이 있 듯이 일상에서 체험하는 상대적인 회의와 허무를 통해서도 일상과 분리되지 않으면서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또 다른 세계의 존재를 느끼기에 절대적 대 의와 허무의 존재 가능성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싶다. 니시타니 가 허무라고 표현한 그 세계와 대승기신론의 진여와의 동일성에 대한 판별은 그것을 체험한 사람의 몫일 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우리가 미처 의식하지 못 하더라도 일상에서 우리를 움직이고 있는 또 다른 실재의 가능성이 있음을 강 조하기 위해서 니시타니의 이론을 소개하였다.

의심과 허무의 체험 이외에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식해온 세계와는 다른 세계가 존재함을 일깨워주는 체험들이 있다. 간단히 말하면 일치의 체험이다.

물론 니시타니의 대의와 허무 역시 일치의 성격을 지닌다. 그러나 약간 다른 종류의 일치의 체험도 있다.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아주 아름다운 음악을 듣다가 어느 순간 마치 내가 그 음악과 하나가 된 듯한 체험을 하기도 하고, 꽃이나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바라보면서 마치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된 듯한 체험을 한다.73) 또 어떤 사람과 대화를 나누다가 온전히 그 사람과 내가 하나가 된 듯한 체험을 하기도 한다.

마치 우리가 알고 있는 ‘나’라는 것이 사라진, 그래서 나와 너의 구별이 없 는, 완전히 탈개인적 경지 혹은 세계, 경험하는 주체와 경험되는 대상의 구별 이 사라진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74) 물론 우리가 언제나 완전히 그러한 경험

72) 이찬수, 불교와 그리스도교, 깊이에서 만나다, p.104, pp.124-128 참조.

73) 길희성, 보살 예수, p.150 참조.

74) 위의 책, p.146 참조.

을 지속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기존에 어떤 사물을 대상화하여 인식하던 것과는 아주 다른 체험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체험은 니시타니가 말한 의심이나 허무의 체험에서 비롯되는 일치가 아니라 뭔가 알 수 없는 일 치의 유(有)에 대한 체험이라고 말하고 싶다. 진리와의 일치라고나 할까? 내 존재의 허무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과정이 없는 직접적인 진리와의 만남이다.

길희성은 이러한 체험을 항구적이고 절대적인 평화와 희열의 세계로 보고.

동양에서 우주의 궁극적 실재나 초월적 실재를 표현하는 무(無), 상대적 허무 의 무가 아닌, 모든 존재자의 생명의 근원인 무와 다르게 보고 있지 않다.75) 필자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다만 니시타니가 말한 성격의 체험뿐만 아니라 또 다른 방향에서 진여의 작용을 인식하는 체험이 있음을 말하고 싶다.

지금까지 여래장, 진심, 본각, 진여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대승불교 에서 우리 존재와 인식의 근원으로 진리의 시작이며 진리 그 자체라고 여기는

‘불성’의 구조와 작용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주로 불성의 본성과 능동적인 작 용, 우리가 일상에서 체험하는 그 영향에 중점을 두고 살펴보았는데 그러한 본성과 구조가 곧 최초의 정견을 가능하게 하는 인식의 근원과 구조이다. 그 리고 일상에서 체험하는 불성의 작용 역시 일상에서의 정견 체험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의 고뇌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 안에 불성이 있음에도 불구하 고 모두가 깨닫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내면에서 울려오는 진리의 소리를 인 식하지 못하고 쉽게 지나칠 수 있다. 부처님처럼, 일상생활에서 끊임없이 자 신의 존재를 알리는 불성의 소리를 듣고 지속적으로 그것을 향해 갈 수 있는 수행이 필요한 것이다. 진리는 이미 완성되어 존재하고 그것을 알리기 위해 작용하지만 그것을 알아듣고 밝히는 것은 결국 우리 각자의 몫이다. 즉 최초

75) 길희성, 보살 예수, p.146 참조.

의 정견은 불성으로부터 시작되지만 그것을 지속시키고 완성하기 위해서는 우 리의 수행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자, 이제 다시 부처님에게로 돌아가자. 과연 부처님께서는 어떤 수행을 통 하여 깨달음을 얻으셨는지 알아보고 현재의 우리 삶에도 적용해 보도록 하자.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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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정견의 정견의 정견의 정견의 수행체계수행체계수행체계수행체계

2장의 정견의 인식체계에서 보았듯이 최초의 정견은 불성의 작용에 의해서 일어난다. 그렇다면 이 정견은 어떤 과정을 거쳐서 더욱 커다란 정견으로 확 장되는 것일까? 그 과정을 알아야만 일상에서 정견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부처님은 정견이 포함되어 있는 팔정도를 통해 그 길을 설명하고 계신다.

8정도 중에서 특히 정사유(正思惟)와 정념(正念), 정정(正定)이 수행측면에 서 직접적으로 정견과 관련이 있다. 정사유는 믿음과 관련이 있고 정념은 사 념처(四念處)를 통해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될 것이며 현대 위빠사나와 서구 의학에서의 응용, 그리고 심리학적 이론들을 참고하여 그 의미를 현대적으로 해석할 것이다. 정정은 진리와 우리의 인식과의 관계성에 대한 의미를 잘 보 여준다. 그러면 팔정도부터 차근차근 알아보자.

3.1. 팔정도 수행법의 상호 연관성

정견은 앞에서 다루었고 나머지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활[正命], 바른 노력[正精進], 바른 기억[正念], 바른 선 정[正定]에 대한 아함경의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어떤 것이 바른 사유인가? 바른 사유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세속의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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