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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 인식의 구조-일심이문(一心二門)

문서에서 인식론적 인식론적 (페이지 38-41)

52) 예문동양사상연구원, 한국의 사상가10인 원효, 고영섭 편저, 예문서원, 2002, pp.156-157 참조.

지금까지의 논의를 종합해보면 인간의 의식구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진다. 하나는 선불교에서 말하는, 우리 존재의 본질로서 마음의 근본이고 진 리와 하나인 자성청정심, 즉 불성이다. 다른 하나는 무지에 가려 있는 마음이 다. 무지에 가려져 있는 마음이 불성과 다르다고 할 수 있지만 결국 그 마음 과 본래의 불성은 같은 한 마음이다. 무지에 가려져 있는 오염된 마음이 불성 과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불성과 같은 마음이라는 말이다.

무지에 가려져 있다고는 하나 인식이 가능한 것은 그것이 본래 우리 인식의 근원이 되는 불성과 같은 마음이기 때문이며 무지에 가려진 인식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나중에 불성의 작용에서 상세히 다룰 것이다.

이러한 마음의 독특한 체계가 대승기신론에서는 ‘일심이문(一心二門)’으로 표현된다. 본래 순수함 자체인 ‘하나인 마음’[一心]이 무명(無明) 때문에 흔들 리고 동요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생이 지닌 본래 한결같고 변화가 없는 마 음의 본체의 측면을 ‘진여문’(眞如門)이라 하고 무명에 의해 흔들리고 생멸 변 화하는 현실적 마음의 측면을 ‘생멸문’(生滅門)이라 한다. 그래서 원천적인 차 원에서 보면 생멸문이 마음 밖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진여인 하나의 마음에 근거해 있으므로 생멸문의 본체는 진여이며 생멸문에도 현상계를 포섭 하는 ‘깨달음의 세계’[覺]가 이미 들어 있는 셈이다. 이런 측면에서 생멸변화 에 의해 더러워진 듯 하지만 마음의 본성은 그것에 상관없이 여래성, 즉 깨달 음의 세계를 이미 가지고 있다는 측면에서 중생의 마음을 ‘여래장’이라 표현 하기도 한다.53) 일심은 곧 진여이며 생멸이다. 순수한 마음의 측면에서 진여 라 할 수 있으며 더러움과 함께 있으면서도 그렇지 않은 측면에서 여래장이라 할 수 있다. 원효는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53) 이찬수, 불교와 그리스도교, 깊이에서 만나다, pp.239-240 참조.

일심[一心]의 체[體]에 본각[本覺]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명[無明]에 따라서 움직여 생멸[生滅]을 만든다. 때문에 이 문에서는 여래의 본성이 감추어 져 드러나지 않는 것을 여래장[如來藏]이라고 부른다.

여기에 심진여문[心眞如門]이라고 말하는 것은 곧 그 경[經]의 적멸[寂滅]을 이름하여 일심[一心]이라고 해석하고, 심생멸문[心生滅門]이라고 말하는 것은 경[經] 가운데 일심[一心]을 여래장[如來藏]이라고 이름하여 해석한다.54)

즉 일심의 본체는 진여문인데 무명에 의해 흔들리고 변화하는 마음이 생멸 문으로 드러난다는 말이다. 그러나 생멸문이라고 해서 진여의 성질이 사라지 는 것이 아니라 여래장이라는 표현처럼 진여 본래의 성질인 깨달음[覺]을 계 속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 진여문과 생멸문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연관되어 작용하고 있는지 살펴 보자. 대승기신론의 본각(本覺)과 시각(始覺), 지정상(智淨相)의 개념이 이를 잘 설명하고 있다.

본각(本覺)은 우리의 마음이 이렇게 구성되어 있어서 우리 마음 안에 이미 진여가 있음을 알고 있는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그릇된 생각과 관념이 사라진 마음의 본체로서 온 우주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고 우주와 한 몸이며 따라서 깨달은 마음은 바로 진리의 몸이며 그 진리의 몸이 또한 본각이 된다. 앞서 반야경에서 언급되었듯이 이 본각은 우리의 주관적인 자각 여부에 상관없이 모든 중생에게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이다. 시각(始覺)은 수행을 통해 이러한 사 실을 깨닫게 되는 경험적 깨달음에 해당한다. 그래서 시각(始覺)은 마음의 근 원을 깨달음으로써 부처의 경지에 이르는 궁극적인 완전한 깨달음과 완전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단계에서 얻어지는 부분적인 깨달음 또는 불완

54) 예문동양사상연구원, 한국의 사상가10인 원효, pp.160-161.

전한 깨달음으로 구분할 수 있다.55)

즉 우리안에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지만 불성으로 이미 존재하는 본래의 의 식은 진여문의 의식, 곧 본각이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의 의식이라고 인식하 는 의식은 무명으로 가려진 생멸문의 의식이다. 그래서 시각은 우리 안에 나 의 의식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생멸문의 의식과는 다른 의식(진여문)이 있음을 깨닫기 시작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본각은 본래 진여문에 있는 깨달음이고 시각은 생멸문에서 일어나는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본각의 두 가지 특징적인 작용이다. 본각 은 그릇된 관념과 무지에 가려져 있으면서도 다음 두 가지 특징을 드러낸다.

하나는 순수한 지혜의 작용(智淨相)이고, 다른 하나는 불가사의한 업의 작용이 다. 본각은 순수한 지혜의 작용으로 끊임없이 진리를 일깨울 수 있다. 왜냐하 면 본각이 가지고 있는 지성(智性)은 무지에 가려져 있다고 하지만 결코 파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불가사의한 업의 작용은 중생의 능력과 소질에 따라서 상황과 조건에 맞는 모습을 끊임없이 드러내어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는 것이 다. 즉 본각이 무명에 가려져 있으면서도 무명을 벗겨내는 작용을 한다는 말 이다.56)

구체적으로 진여 또는 본각의 성질과 작용을 보면서 어떻게 생멸문에서 깨 달음이 일어날 수 있는지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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