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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正定)

문서에서 인식론적 인식론적 (페이지 81-96)

정념 수행을 통해서 세상의 참모습을 볼 수 있음을 지금까지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정정의 과정은 왜 필요한 것일까?

정(定)은 Pali어로 samādhi로 ‘집중’(集中, concentration), ‘마음이 집중 된 상태’(intent state of mind, ‘선정(禪定)의 상태’(intent state of meditation) 등을 뜻한다고 한다. 그래서 정정은 ‘올바른 선정’, ‘마음이 잘 집중된 상태’등을 의미한다 하겠다.141) 아함경에서는 세속을 벗어난 정정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40) 달라이 라마 외, 마음이란 무엇인가, pp.249-241.

141) 한경수, “阿含經에 나타난 修行觀 연구”, p.31 참조.

이른바 불제자가 괴로움의 범위에 대한 진리를 있는 그대로 사유하고, 괴로움 의 원인에 대한 진리․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진리․괴로움의 소멸을 위해 실천해야 할 방법에 대한 진리를 있는 그대로 사유하여, 번뇌 없는 사유를 따르는 마음의 정신 작용[心法]으로 안주하여 산란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으며 거두어들이고 고요하며 삼매요 한마음인 것을 일러 성현의 바른 선정이라 한다.

아함경에서 정(定)과 선(禪)은 두 말의 어원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주로 하 나로 합쳐져서 선정(禪定)으로 사용된다고 한다.142) 그래서 정은 부처님 당 시에 유행하던 수행방식인 선정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굳이 부 처님께서 정정(正定)이라고 하여 바른 선정을 말씀하신 의미는 무엇일까?

이는 선정에도 바른 것이 있고 아닌 것이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서일 것이 다. 왜냐하면 부처님 당시에 선정은 고행과 더불어 주요한 수행 방법 중의 하나였고 부처님 역시도 선정 수행을 하여 당시의 유명한 수행자였던 알라 라 칼라마(Alara-Kalama)에게서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을 배웠다. 그들의 선정은 정신을 통일하여 정신적인 작용이 정지하여 적정(寂靜)한 경지에 도 달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고 한다. 부처님도 곧 그러한 선정에 들었으나 그 방식에 따르면 선정에 든 상태에서만 정신적인 자유가 가능하고 선정에서 나오면 다시 산란한 마음으로 되돌아왔기 때문에 그러한 선정으로는 깨달음 을 얻지 못한다고 생각한 부처님은 결국 독자적인 방법을 찾으셨다.143) 아 마도 깨달음에 이르게 한 부처님 고유의 선정 방식을 정정(正定)이라고 표 현한 것 같다.

부처님은 경전 곳곳에서 자주 선정(정정)에 드셨고144) 진리를 깨닫기 위

142) 한경수, “阿含經에 나타난 修行觀 연구”, p.36 참조.

143) 위의 논문, pp.3-4 참조. 강건기, 불교와의 만남, pp.67-68 참조.

144) 이연숙, 精選 아함경, p.436, 잡아함경, 제40권, 1108경 참조.

해서 선정이 무척 중요하며 당신도 선정 중에 깨달음을 얻으셨음을 말씀하 셨다.

한량없는 삼마디(三昧)를 닦아 마음을 한결 같이하고 생각을 바르게 해라. 무 슨 까닭인가? 한량없는 삼마디를 닦아 마음을 한결같이 하고 생각을 바르게 하 면 이와 같이 진실 그대로 나타난다. 무엇이 진실 그대로 나타나는가? 이른바 괴로움의 범위에 대한 진리[苦聖諦]․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진리[苦集聖諦]․괴로 움의 소멸에 대한 진리[苦滅聖諦]․괴로움의 소멸을 위해 실천해야 할 방법에 대 한 진리[苦滅道跡聖諦]가 진실 그대로 나타난다. 145)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아함경에서 정정을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들어보자.

아함경에는 앞서 팔정도에서 언급한 부분 외에도 정정이 다른 선정(禪定)의 방법 중의 하나인 사선(四禪)과 같다고 말하기도 한다.

云何正定 比丘者離欲離惡不善之法 至得第四禪成就遊 是謂正定146)

어떤 것을 바른 정(定)이라 하는가. 비구는 욕심을 떠나고 악해서 착하지 않 는 법을 떠나 내지 제사선(第四禪)을 얻어 성취하여 노니나니 이것을 바른 정이 라 하느니라.147)

그리고 이 사선(四禪)은 바로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시기 위해 사용하 신 바로 그 선정이다.

145) 이연숙, 精選 아함경, p.48, 잡아함경, 제16권, 429경. 한글 대장경 잡아함경에서 출전을 확인하였 으나 이연숙의 번역이 더 현대적이어서 그 책의 번역을 따름)

146) 한경수, “阿含經에 나타난 修行觀 연구”, p38. 중아함경, 제49권 聖道經, (大正1. p736b) 147) 동국 역경원, 한글 중아함경, 제3권, p.175. 각주146)에 대한 한글 번역이다.

나는 그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고 생각을 앞에 매어 두었다. 그리고는 탐욕과 모든 악한 것을 여의어서 탐색과 세심한 관찰이 훌륭 해진 초선의 경지에서 자적하였고 그 다음에는 탐색과 세심한 관찰마저 다한 제이선․제삼선의 경지에서 자적하였으며 그 다음에는 생각을 깨끗하게 지켜 근 심과 기쁨이 다 제거된 제사선의 경지에서 자적하였다. 그때 나는 청청한 마음 으로 모든 번뇌[結使-결과 사는 모두 번뇌의 다른 이름. 번뇌는 몸과 마음을 속박하고 괴로움을 형성시키므로 결, 중생을 따라다니면서 마구 몰아대어 부리 므로 사라고 함-저자 주]를 제거하고 자신감[無所畏]을 얻었으며 과거세의 무 수한 내력과 변화를 알게 되었다[...]나는 청정한 삼매의 마음으로 모든 번뇌 [漏]가 다하여 번뇌 없는 심해탈(心解脫) 혜해달(慧解脫)을 이루었다[...]곧 위없는 바른 깨달음[無上正眞之道]을 이룬 것이다.148)

여기서는 사선의 내용이 짧게 기술되어 있는데 좀더 부연하자면 탐색은

‘覺’에 대한 번역이며 관찰은 ‘觀’을 뜻하고 초선은 그러한 탐색과 관찰이 훌륭해져서 안으로 고요히 쉬어 일심(一心)이 되는 것이다. 제이선은 선정에 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상태이며 기쁨에 대한 욕구도 버리고 구함 을 버려 구함이 없이 자적하면서 바른 생각과 지혜로 있어 몸으로 즐거움을 체험하는 것이 성인이 설하고 베푸는 바이며, 바른 생각과 안락한 생활이자 공(空)의 경지인 제삼선이다. 즐거움과 괴로움이 멸하고 기쁨과 근심의 근본 도 이미 멸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고요․바른 생각․청정의 경지가 제사선 이다.149)

이렇듯 부처님께서 선정 중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 정도로 선정, 즉 정 정의 중요성을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우리는 사선으로 표현되는 정정이 정념 과 아주 무관하지 않음을 발견한다. 사선의 내용을 자세히 보면 마치 그 안

148) 이연숙, 精選 아함경, pp.122-123, 증일아함경, 제23권, 증상품(增上品), 8경.

149) 위의 책, p.235, 중아함경, 제55권, 포리다경(晡利多經) 참조. 大正, 大正新修大藏經, 제2권, p.671.

에 정념이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표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초선의 경지 가 바로 그것이다. 탐색(覺-사념처에서 수념처가 각념처로도 표현되는 것을 보았다. 즉 감각을 탐색하고 관찰하는 것을 覺으로 표현했다고 보여진다-필 자 부연)과 세심한 관찰[觀]이 훌륭해져서 안으로 고요히 쉬어 일심이 되는 것은 은 곧 정념의 내용이다. 사념처에 대한 아함경의 다른 구절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있다.

乃至知身受心法法觀念住 精勤方便 不放逸行 正念正智 寂靜於心 乃至知法150)

나아가서 몸과 느낌․마음을 알고 법을 법으로 관하여 생각에 머물러, 방편으로 꾸준히 힘쓰고 방일하지 않아, 바른 생각과 바른 지혜로 마음을 고요히 정하게 하며 나아가서는 법을 아는 것이다.151)

류만홍의 논문에는 Pali어를 번역한 내용으로 나와 있는데 더욱 초선의 내용에 가깝다.

몸에서 몸을...느낌에서 느낌을... 마음에서 마음을... 법에서 법을.. 觀 하여 머 물면서 몸/느낌/마음/법을 <참되게 알기[?âna] 위해서>, 熱心 <正知> 一趣 [ekodibhûtâ] 心淸淨[vippasannacitta] <得定[samâhitâ]> <心一境 [ekaggacittâ]>이 되어라.152)

즉 정정은 팔정도의 다른 수행법이 그런 것처럼 정념과 별도로 행해지는

150) 大正, 大正新修大藏經, 제2권, p.173, 잡아함경, 제24권, 621경

151) 동국 역경원, 한글 대장경 잡아함경, 제2권, 동국 역경원, 2001, p.192. 각주 150)에 대한 한글 번 역이다.

152) 류만홍, “根本佛敎의 修行體系 硏究”, p.21. 출전이 나와 있어 찾아보았으나 권수와 쪽수가 달라 찾 지 못하였다.

것이 아니라 정념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지는 상태라고 보여진다. 초선의 경지가 지나면 탐색과 관찰이 사라지고 선정의 기쁨과 즐거움이 생긴다. 이 는 정념에서, 무지에 조건화된 몸과 감각과 마음의 움직임을 관찰했을 때 그 인식이 사라지고 참 모습이 드러나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제이선에서 는 참 모습이 드러났기 때문에 더 이상 관찰할 필요가 없고 드러난 참모습 에 머물면서 그것을 기억하고 참모습을 본 기쁨과 즐거움을 맛보는 것으로 여기서부터는 념(念)의 의미 중에서 인지한 것을 기억하는 의미가 해당된다 고 하겠다.

그리고 제삼선과 사선은 더 이상 정념의 영역이 아니라 정정에 해당할 것 이다. 이 단계에서부터는 정념에서처럼 인식주체가 능동적으로 인식대상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로 드러난 참모습이 스스로 자신을 드러냄을 기다리면서 수동적으로 바라본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제삼선에서는 기쁨 에 대한 욕구도 버려지고 바른 생각과 바른 지혜에 자적한다고 말하고 있 다. 정정에서는 구체적으로 그 진리가 사성제라고 밝히고 있고 사선에서는 인식내용보다는 그러한 진리가 드러나서 인식될 때 인식주체가 느끼는 감정 이나 마음의 상태를 기술하고 있다.

요약하자면 정념으로 보게 된 참모습이 정정을 통해서 여실히 드러나는 것이다. 정념을 통해서 참모습을 보았지만 그것은 완전한 인식이 아니다. 다 만 참모습을 보기 시작했을 뿐이다. 그것이 정정의 과정을 통해 완전히 드 러나게 된다.

그래서 정념에서의 관찰과 집중이 능동적인 것이었다면 정정에서의 봄은 진리에 머문 상태에서 진리 스스로가 자신을 드러냄을 보는 수동적인 성격 을 지닌다. 제삼선과 사선의 내용에서 보여지듯이 정정에서 하는 것은 정념 을 통해 드러난 진리에 집중하여 머무는 것뿐이다. 과거세의 무수한 내력과 변화는 저절로 부처님에게 보여져 부처님이 알게 된 것이고, 심해탈과 혜해

탈은 그 여정의 끝에서 역시 저절로 주어진 것이다. 앞에서 인용된 선정의 내용에서 선정을 닦을 때 진리가 스스로 드러날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는 말 도 이러한 맥락이라 생각한다.

진리와의 만남을 이루기까지 우리의 능동적인 응답이 필요하지만 그것이 드 러나게 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니다. 사람과의 만남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그 사람을 어떻게 아는가? 만나서 그 사람이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낼 때 우리는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정념을 통해서 진리를 만나고 그 모습을 완 전히 드러낼 때까지 우리는 단지 기다려야 한다. 그 시간이 바로 정정이며 이 정정을 거쳐 우리는 완전한 깨달음, 마지막 완성으로서의 정견인 정지견(正知 見)에 이르게 된다.

III. 결론

본 논문은 ‘정견(正見)’, 즉 ‘바로 봄’에 대한 의미에서 시작하였다. 왜냐하 면 불교의 근본 목적이 세상의 참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如實知見), 즉 진리를 깨닫는 것이라고 할 때, 정견이 특별한 위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 했기 때문이다.

정견의 구체적인 내용들을 살펴보면서 불교에서의 정견의 위치를 더욱 명확 히 알 수 있었다. 정견의 내용은 크게 세속적 정견과 세속을 벗어난 정견으로 나뉘는데 세속적 정견은 어렴풋이나마 진리가 있음을 알고 진리를 향해 나아 가게 하는 출발점으로서의 정견이며 세속을 벗어난 정견은 사성제와 팔정도, 삼법인과 연기법 등 불교의 모든 진리를 아는 것을 뜻한다.

사성제를 통해 우리가 괴로움이라고 인식하는 것이 실재로 존재하는 괴로움 이 아니라 우리가 집착하는 대상에 대한 갈구 때문에 생기는 것임을 알게 되 었다. 그리고 그 갈구는 연기법에서 말하는 무명(無明-無知로 많이 번역) 때 문에 생긴다. 연기법은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후 그것을 정리한 것으로 불교의 모든 이론들이 연기법에 기초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정견은 연기법을 아는 것이고 연기법을 아는 것은 우리의 인식의 대부 분이 무지에 가려져 있음을 알고 그러한 인식으로 파악된 세계와는 다른, 세 상의 참 모습이 있음을 아는 것이다. 곧 진리의 세계를 아는 것이다. 물론 그 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동떨어져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세 계이다. 다만 우리가 무지에 가려져 세상의 참 모습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다는 말이다. 부처님은 그것을 알게 되셨고 마침내 세상의 참 모습,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정견은 바로 그러한 여실지견(如實知見)을 뜻한다.

이런 측면에서 정견이 진리를 향해가는 출발점이자 동시에 도착점이라는 독

특하고 중요한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즉 정견이 없이 진리를 향한 여 정은 시작될 수 없고 정견이 없이 깨달음은 완성되지 않기에 정견이 불교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부족하지 않다. 팔정도에서 처음에는 정견을 통해, 정사 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 일어나지만 마지막으로 다시 정견으로 완성 되는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정견이 출발점이자 완성점이라는 특별한 위치를 지닐 수 있는 것은 우리 안 에 어떤 독특한 인식의 체계가(일반적인 우리의 인식체계 전반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적인 관점에서의 인식체계이다) 있기 때문이다. 그 체계는

‘불성’(佛性)과 ‘본각’(本覺), ‘시각’(始覺), ‘일심이문(一心二門)’의 개념들로 설 명되어진다.

우리의 인식이 무지에 가려져 있으면서도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최초의 정 견이 시작되는 것은 우리 안에 ‘불성’이 있기 때문이다. 원시불교에서 진리를 알 수 있는 원리나 바탕의 측면으로 표현되었던 자성청정심이 대승불교를 잇 는 선불교에 와서는, 진리 그 자체로서 역동적으로 자신을 알리고 무지를 제 거하기 위해 활동하는 불성의 개념으로 더욱 확대된다. 우리 안에 진리 그 자 체인 불성이 있고 그것이 역동적으로 활동하기에 우리가 진리를 인식할 수 있 다는 말이다.

이러한 불성과 무지에 가려져 있는 마음이 함께 있는 구조는 대승기신론의

‘일심이문’(一心二門)으로 설명된다. 불성 또는 본각으로 한결 같은 마음의 본 체인 진여문(眞如門)과 무지로 오염되어 흔들리고 동요하는 마음의 측면인 생 멸문(生滅門)이 함께 있는데 이 두 마음은 서로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 하나인 마음으로 진여의 본성을 갖는다. 그래서 비록 무명에 가려져 있 는 생멸문이라 하더라도 진여의 성질인 지성(智性)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진리 를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게 된다. 지눌의 공적영지지심(空寂靈知之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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