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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

특집

강과 한국인의 삶

PLANNING AND POLICY

2012 7

이슈와 사람 “자연이 해준 말을 시로 받아썼습니다”- 김용택 시인

-interview 마크 래핑(Mark B. Lapping): 잊혀진 지역과 사람들을 위한 계획: 미국의 농어촌 계획 및 식량 계획

세계의 도시 역사·문화 키워드로 본 자그레브(Zagreb)

해외리포트 런던의 도시이미지 강화를 위한 경관관리방안

(2)

발행일 2012년 7월 10일 발행인 박양호 편집위원장 박재길

편집위원 권영섭, 김명수, 김성수, 김호정, 문정호, 양진홍, 임은선, 차미숙, 천현숙 (가나다순) 간사 이판식 편집 한여정, 한고은 전화 031-380-0114(대표)

031-380-0425(구독문의) 팩스 031-380-0473 인쇄 (주)우진비앤피

국토에 수록된 내용은 필자 개인의 견해이며 국토연구원의 공식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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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시론 | 산을 더 산답게, 강을 더 강답게 2 최정호 _ 전 한국미래학회장

짧은 글 긴 생각 | 마을은 관계망이다 4 위성남 _ (사)사람과마을 운영위원장 특집 | 강과 한국인의 삶

1. 강과 한국의 역대 왕도 6 오순제 _ 한국고대사연구소장 2. 한강의 문화유산과 생활민속 12

박태순 _ 소설가 3. 낙동강의 나루 20

신정일 _ 문화사학자, 사단법인 우리땅걷기 이사장 4. 금강의 강경포구와 덕유정 27

오석민 _ 충남역사박물관장 5. 영산강의 인문지리와 삶 38

이윤선 _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HK교수 6. 생활 속의 강 45

김선희 _ 국토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용어풀이167 | 치산치수(治山治水) 55 구형수 _ 국토연구원 연구원

정책해설 | 「도로법」 하위법령 개정안 주요 내용 56 정연호 _ 국토해양부 도로운영과 사무관 이슈와 사람 92 | 김용택 시인

“자연이 해준 말을 시로 받아썼습니다” 61 양진홍 _ 국토연구원 연구위원(인터뷰)

세계의 도시167 | 역사·문화 키워드로 본 자그레브(Zagreb) 66 김철민 _ 한국외국어대학교 세르비아·크로아티아어과 교수 가던 길 멈추고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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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세계문화유산 시리즈 ⑦

제주화산섬과 용암동굴

제주지역에서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지 역은 한라산, 성산일출봉, 거문오름용암 동굴계 등 3개다. 한라산은 남한에서 가 장 높은 산으로서 화산활동에 의해 생성 된 순상(방패모양)화산체다. 성산일출봉 은 제주도에 분포하는 360개의 단성화 산체(cinder cones: 제주방언으로는 오 름이라 함) 중의 하나이며, 해안선 근처 에 뛰어난 경관을 제공하는 수성화산체 다. 거문오름용암동굴계는 지금으로부터 약 10~30만 년 전에 거문오름에서 분출 된 용암에서 만들어진 여러 개의 용암동 굴이며, 이 동굴계에서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동굴은 벵뒤굴, 만장굴, 김녕굴, 용 천동굴, 그리고 당처물동굴이다.

사진은 이 중 해뜨는 오름으로도 불리는 성산일출봉이다.

(자료, 사진: 문화재청)

(자료: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사진: 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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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 마크 래핑(Mark B. Lapping):

잊혀진 지역과 사람들을 위한 계획: 미국의 농어촌 계획 및 식량 계획 73 김유승 _ University of Southern Maine, Graduate Program in

Community Planning and Development 조교수(인터뷰) 해외리포트 | 런던의 도시이미지 강화를 위한 경관관리방안 86

이진희 _ 국토연구원 연구원

지역통신| 녹색도시 부산 만들기, 도심 자투리땅 녹화계획 추진 93

글로벌정보| 에스튜에르, 루아르 강을 중심으로 한 낭트-생나제르 대도시권 통합 프로젝트 100 KRIHS FOCUS : 국토연구원 소식

‘해외 개발협력 역량강화 세미나’주요 내용 121 박소연 _ 국토연구원 연구원(정리)

‘도시개발 및 도시재생 주체의 재정립 방안 세미나’주요 내용 129 정소양 _ 국토연구원 연구원(정리)

‘2012 폭우재해 대비 전문가 세미나 및 지자체 교육’주요 내용 137 지승희 _ 국토연구원 연구원(정리)

‘2012 한중 국토정책 국제세미나’주요 내용 143 배유진 _ 국토연구원 연구원(정리)

국토연구원 단신 | ‘국토연구원, 2011 종합청렴도 1위 기념패 수상’ 154 KRIHS 보고서

공정사회 구현을 위한 개발사업의 생활보상제도 정비방안 연구(김승종 외 지음) 170 박성진 _ 국토해양부 토지정책과장

사회통합을 위한 지역적 대응과제: 지역사회통합지수 개발 및 활용방안(차미숙 외 지음) 172 이상호 _ 한밭대학교 도시공학과 교수

간추린 소식 | 소규모 보금자리주택지구, 서울 오금·신정4지구 지정 174 연구보고서 구입 안내 180

독자와 함께 182

우리 문화유산의 향기 149 | 삼년산성과 속리산팔연경(俗離山八緣景) 183 박영순 _ 수필가

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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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더 산답게, 강을 더 강답게

최정호 | 전 한국미래학회장

내가 한국미래학회에서 산과 한국인의 삶이라는 연구 프로젝트를 착수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인 1992년 여름의 일이다. 한 세기가 저물어가 고 새로운 세기의 먼동은 아직 트지 않은 땅거미 속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봤다.

백년기가 바뀌고, 천년기가 바뀌는 세기 말에 즈음해서 변화를 준비하고 변화의 흐름을 읽고 그에 대한 대응을 모색하는 일은 중요하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변화한다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빨리 변하는 것 과 더디 변하는 것이 있다. 변화에도 시차가 있다. 심지어 단기적인 전망에서 는 다른 것들이 변화하는 가운데서 변화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있다.

우리들의 삶을 크게 규정하는 공간적, 물리적 환경이 대부분 그렇다. 세상이 아무리 덧없이 변해도 자연은 그리 쉬이 변하지 않는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산과 한국인의 삶이라는 주제를 먼저 생각해본 것은 다음과 같은 까닭에서였다. 산이란 한국에, 한국의 자연에, 한국인의 심상에, 한국인의 자연체험과 세계체험에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는,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니다. 산이란 언제 어디서나 한국의 자연에는 반드시 있기 마련이고, 언제 어느 곳에서 누가 이 땅에 살든 한국인의 자연체험·세 계체험에서는 필연적·운명적으로 만나는 것이 산의 존재다.

산이 있는 곳에는 물이 있다. 개천이 있고, 강이 있다. 서양어의 풍경 (Landscape, Landschaft)이란 말은 토지경지와 같은 평면적인 땅 (Land)에서 나오고, 거기에서 풍경화란 말도 나왔다. 그러나 한국의 풍경 은 평면적인 땅이 아니라 입체적인 고향 산천(山川)이요, 고국(故國) 강산 (江山)이다. 그걸 그린 그림도 산수화라 일컫는다. 산과 강이 있다는 것이 한국적인 자연 공간의 본질이요, 그것이 도망칠 수 없는 이 땅의 자연이 지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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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연적인 구성 요인인 것이다.

왜 산과 강을 생각해 보는 것일까? 왜 21세기의 치산치수(治山治水)를 새롭게 생각한다는 것일까?

그 발상의 바탕에는 산과 강을 있는 그대로 두어서 는 안 되겠다는 인식이 있다. 그것은 처음부터 이 땅 에 있는 그대로의 산과 강에서 유유자적하고자 하 는 것이 아니오, 그래서도 안되겠다는 자각이었다.

산을 그대로, 있는 그대로 두지 않고 잘 다스려왔 기 때문에 우리는 지난 세기 후반, 벌거벗은 이 땅 의 민둥산을 푸르게 물들이며 20세기 유일의, 제3세 계 유일의 조림 녹화 성공국이라는 기적을 이루었다 (UN FAO 발표).

산을 다스린다, 물을 다스린다는 것이 도대체 무 엇일까? 산과 강을 있는 그대로 두지 않는다 해서 산 과 강을 산이나 강이 아닌 다른 것으로 바꾸겠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우리가 생각해보는 새로운 치산 치수란 오히려 산을 더욱 산답게, 강을 더욱 강답게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산은 단순히 땅이 솟아 있는 고지(高地)가 아니 다. 그와 마찬가지로 강도 땅이 꺼져 파인 긴 골짜기 가 아니다. 산은 나무가 우거져야 비로소 산답고, 강 은 물이 흘러야 비로소 강답다. 그럼에도 나라가 망 하고 둘로 갈라지고 전쟁터가 되면서, 우리나라의 산 에는 나무가 없어지고 도처에 민둥산만 있었다. 그러 던 산이 산림녹화라는 반세기에 걸친 치산사업의 대 역사를 통해 마침내 다시 산다워지면서 푸르러진 한 국(Greening of Korea)의 기적을 낳은 것이다.

불과 3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서울의 한강은 홍수 가 나지 않은 평상시에는 실개천처럼 가느다랗게 흘 렀고 강의 대부분은 물이 아니라 모래사장이었다.

산에 나무 대신 모래만 있었던 것처럼 강에도 물 대

신 모래만 있었다. 산이 산답지 않았던 것처럼 강도 강답지가 않았던 것이다. 한강이 오늘날처럼 물이 풍부하고 배가 떠다니게 된 것은 오래된 일이 아니 다. 그것은 오랜 치수사업 끝에 겨우 지난 세기 말에 야 이뤄진 대역사다.

강에는 물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앞으로는 훨씬 많은 물을, 엄청 많은 물을 담고 있어야 한다. 예전 에는 상당량의 저수기능을 담당했던 무논(水田)이 이제는 급격한 도시화와 산업화의 진행으로 상당 부 분 사라졌다. 게다가 공업용수와 생활용수 수요의 폭발적인 증가는 이 땅의 미래 전망에서 물의 수급 상황에 심각한 우려를 낳고 있다. 이는 물의 저장 및 공급 능력을 제고시키는 강의 치수사업이 긴요함을 경고하는 배경 요인이다.

산은 한 곳에 우뚝 서 있으나 강은 흐른다. 그래 서 강에는 길, 즉 물길이 있다. 물길도 길인 이상 고 속도로처럼 그냥 달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길은 사람이 걷고 노닐 수 있어야 한다.

단순히 물만 가둬두는 것이 아니라 물 위나 물가 에서 사람들이 거닐고 노닐 수 있는 물길을 만들어 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도 앞으로 이 땅의 치수사업 은 이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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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은

관계망이다

젠가 뜬금없는 생각이 들었다. 난 지금 행복하며 잘 살고 있는 건가? 뭐가 행복한 것이고 잘 사 는 것일까? 행복한 삶이란 것도 따로 무슨 개념이 있나? 나는 잘 살고 있다는 걸 굳이 의식할 필요가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성미산마을을 방문한다. 단체로 오기도 하고, 혼자서 오기도 한다. 그리고 사진도 찍으 며 이곳저곳 기웃거리고 몇 가지 질문도 한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우리는 행복해하는 표 정을 하고 있어야 할 것 같은 무의식적 압박감을 받곤 한다. 마을을 방문한 이방인들은 무엇을 살피고자 하고 무엇을 알고자 하는 것일까?

내가 생각하기에 성미산마을 사람들은 매우 상식적이며 지극히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다. 우리 사회 의 상식 속에서는 정상적인 삶이 오히려 낯설다. 아이들을 마을 속에서 함께 키우고자 하는 것은 지극 히 정상적이며, 어른들이 이러저러한 동아리를 만들고 그 속에서 부대끼고 관계를 만들고, 누군가 무엇 을 하고자 하면 그저 도와주거나 아니면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는 행위는 지극 히 상식적이다. 사람들과의 그러한 관계망 속에서 느끼는 안정감, 나를 인정하고 받아주는 편안함, 뭔가 호들갑을 떨며 일을 도모해볼 수도 있다는 자신감을 느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비정상적이며 특이하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사회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행복에 대한 절대적 개념과 기준이 있다면 그것을 이루기 위한 수많은 방법들 또한 있었을 것이다. 행 복하다거나 잘 살고 있다는 것은 상대적이며 주관적인 느낌일 수도 있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사회 적 구조와 불평등한 요소를 없앤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행복해지는 건 아니다. 단지 고통스럽지 않게 될 뿐이다.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특별한 목표를 설정하는 순간 우리는 오히려 불안하고 심리적 압박감을 느낀다. 우리가 사회적인 불편부당한 요소와 우리를 압박하는 억압적 구조에 저항하는 것 자체만으로 행 복해지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저항의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사람들과의 관계 형성과 교류, 그 자체에 있지 않을까? 즉 좋은 관계를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성미산마을을 방문한 많은 사람들에게 굳이, 억지로 정답 비스무리한 것을 말해야 한다면 이런 말을 하고 싶다. 마을은 관계망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성미산마을 사람들은 좋은 관계를 만들며 살고 있는 지극히 평범한 이들이다. 좋은 관계를 맺으면 자 연스럽게 서로 협동하게 되고, 배려하게 된다. 협동은 그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 중요하다. 그 순간순간 속에서 행복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나는 잘 살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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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 집

강과 한국인의 삶

우리나라는 2만 7천여 개에 달하는 크고 작은 강이 실핏줄처럼 연결되어 있 는 강의 나라다. 조상들은 예로부터 강을 따라 정주세계를 형성해왔으며, 강 은 지역의 생활·문화·역사와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며 치수와 이수, 친수 등의 기능을 수행해오고 있다. 하지만 지난 반세기 도시화 및 공업화 과정에 서 우리는 강을 주로 경제적 목적으로 활용하면서 수질오염은 날로 심각해 졌다. 이에 1990년 이후 하천을 살리기 위한 노력이 활발히 추진되었다. 최 근 추진되고 있는 4대강 살리기 사업은 친수문화를 활성화시키고, 생태공간 을 회복하며, 지역산업을 활성화시키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번호 특집에 서는 강 주변을 삶의 터전으로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고, 강의 혜택에 의존 해 발전해온 한국인의 삶을 돌아보고, 최근 강을 더욱 강답게 만들고자 하 는 노력을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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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과 한국의 역대 왕도

오순제|한국고대사연구소장

1

강과 고조선의 기원

세계4대문명의 발상지를 보면 나일강의 이집트, 티그리스강 과 유프라테스강의 메소포타미 아문명, 인더스강의 모헨조다 로와 하랍파, 황하강의 은허 등 인류 역사상 대부분 국가의 수 도는 강가에 임해 있다(오순제.

2008).

우리나라에서도 고조선이 패 수(浿水)라는 강가에 있었고, 고

조선을 멸망시키고 해모수가 세운 북부여는 눈강(嫩江)변에 자리 잡았으며, 그들 의 후예인 해부루의 동부여는 길림시의 송화강변 동단산성과 남성자성에 자리 잡 았고, 북부여를 멸망시킨 졸본부여는 환인의 혼강(渾江)변 오녀산성과 하고성자성 에 자리 잡았다.

이처럼 강에서는 인류에게 중요한 역사가 이루어졌다. 강 주변은 삶의 터전이 었고, 그로 말미암아 찬란한 문명을 꽃피우기도 하였다. 인구가 밀집되어 있는 까 닭에 국가창건의 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이 글에서는 강을 기반으로 형성된 우리나라 왕도와 역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림 1> 송화강변 길림시의 동부여 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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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 맥국, 예국의 왕도

마한의 50개국과 변한 12국, 진한 12국을 다스 렸던 맹주국인 목지국(目支國)의 수도는 직산과 익산으로 거론되어왔으나 익산은 백제 무왕의 고향으로 그가 별도로 사용했던 곳임이 밝혀졌 다. 필자는 백제문화연구회 한종섭 회장과 공동 조사를 통해 안성시 양성면 성하리에서 목지국 의 왕궁터를 발견하였는데(오순제. 2009), 이곳 의 서쪽 능선부에서 마한시대의 거대한 반제리 유적이 발굴되었다. 반제리유적은 만정리고인 돌, 승두리고인돌과 만정리토성, 퇴미산성, 무 한산성, 고성산성 등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왕 궁터 앞을 흐르는 강이 한천(漢川)이다. 한천 은 하늘의 왕궁터 옆을 흐르는 은하수인 천한 수(天漢水)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 부근에는 은 하수를 뜻하는 미리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맥국(貊國)의 수도로 지목되어오던 소양강변 의 춘천시 발산리 일대에는 왕대, 맥뚝 등의 지 명이 남아 있지만 왕궁터를 찾지 못하고 있었는 데, 필자와 한종섭 회장이 공동조사로 왕대란 맥 국의 외성 제일 끝에 있는 망루였음을 밝히고 그 안쪽에서 내성과 왕궁터를 발견하였다. 그 뒤의 수리봉에는 산성이 남아 있어 피난성으로 쓰였 음을 알 수 있다. 이 부근에 흐르는 하천을 한 내(漢川)라고 부르며, 아침못(朝淵), 샘밭(泉 田) 등 물과 관련된 지명이 남아 있다.

이 부근에는 천전리고인돌군이 있는데, 지금 은 4기만 남았지만 원래는 11기의 고인돌이 있 었다고 한다. 1호 고인돌은 전형적인 북방식 고 인돌로, 형태가 잘 유지되어 있다. 2호와 3호 고 인돌은 뚜껑돌만 땅 위로 드러나 있어 전체적인

구조를 살피기 힘들며, 4호 고인돌은 뚜껑돌 동 변의 일부가 절단되어 내려앉았으며 서쪽 장벽 석은 남아 있지 않다. 1967년 국립중앙박물관의 발굴 조사에서 돌화살촉, 관옥, 민무늬토기편이 출토되었다. 주위의 밭에서도 신석기시대의 빗 살무늬토기 구연부편이 발견되었는데, 이를 통 해 이 일대에는 청동기시대에 부족사회가 형성 되어 민무늬토기를 사용하며 강가에서 농경생활 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국(濊國)의 도읍지는 강원도 강릉시 사천면

<그림 2> 조선시대 천문도의 은하수

<그림 3> 한천변의 마한 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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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기막리 강릉운전면허시험장 부근으로, 사천천(沙川川)변에 있는 토석혼축성 안 에 있다. 그 뒤쪽의 운계봉에는 산성이 남아 있어 피난성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2003년 이 부근에서 강원문화재연구소에 의해 발굴된 청동기시대의 방동리유적지는 총 3개의 지구에 걸쳐 주거지 47기, 원형 수혈유구 26기, 고분 2기, 토기가마 3기 등 80여 기의 유구가 발견되었다. 47기의 주거지 유적은 청동기시대의 주거지 41기와 삼 국시대의 주거지 6기로 구분되며, 주거지의 형태는 말각방형에 규모는 4~15m다. 특 히 세 번째 지구에서는 강원 지역 최초로 환호(環濠) 2기와 토기가마 3기가 발견되었 다. 환호 내부에서는 청동기시대의 점토대토기와 무문토기, 반월형석도 조각 등이 출 토되었다(지현병 외. 2007).

고구려의 왕도

환인의 혼강(渾江)변 오녀산성과 하고성자성에 자리 잡았던 졸본부 여의 수도를 주몽이 고구려를 세 우며 그대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제2대 유리왕 22년(AD 3)에 집안 의 압록강변 국내성과 환도산성으 로 천도하였다. 대무신왕은 송화강 변의 동부여와 대동강변의 낙랑국

을 점령하였는데, 동천왕과 고국원왕 당시 외적의 침입으로 수도인 국내성이 초토화 되자 남쪽 대동강변의 평양지역으로 잠시 천도하였다. 그 후 장수왕 15년(AD 427) 에는 평양의 대동강변 안학궁(安鶴宮)과 대성산성으로 천도하였는데, 안학궁 남쪽 대 동강변에서 당시 강을 건너 다녔던 나무다리유적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평원왕 28년 (AD 586)에는 대동강과 보통강(普通江) 사이에 외성, 중성, 내성, 북성로 나누어진 도시 전체를 하나의 나성(羅城)으로 둘러싼 현재의 평양성으로 옮겨 갔다.

백제의 왕도

백제는 초기에 하북위례성인 서울의 중랑천변 북한산 아래의 방학동토성에 온조 왕 원년(BC 18)에 자리를 잡았으나 북쪽의 낙랑국과 동북쪽의 맥국으로부터 끊 임없이 공격받자 18년(BC 5)에 한강 남쪽 남한산 아래 하남시 고골의 하남위례

<그림 4> 대동강과 고구려 왕도 안학궁성과 평양성

자료: 이만열. 1973. 한국사대계. 서울 : 삼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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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으로 천도하였다. 풍납토성은 백제의 왕도로 거론되기는 하지만 필자는 이곳이 한성백제 당 시 중국과 일본으로 떠났던 최대의 진성(津城) 이었다고 판단한다. 왜냐하면 이곳은 을축년 대 홍수 당시 북쪽 성벽이 날아가 버릴 정도의 상 습 침수지역으로 얼마 전에도 펌프장이 고장나 자 바로 침수되었던 곳이며, 고구려 광개토대왕 과 장수왕이 백제를 칠 때 본진을 설치한 아차산 성 바로 아래의 송파벌에 위치하고 있어 적군들 에게 훤히 들여다 보이고 도강한 적에게 포위되 기 쉬운 위치이기 때문이다.

그 후 근초고왕이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죽이고 4국 중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 가 되었으나 대대적인 공격에 대비하여 26년(AD

371)에 한산(漢山)인 남한산성으로 천도하였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공격으로 396년에 백제 의 아신왕이 항복하였고, 그 뒤를 이은 장수왕의 공격으로 475년에 개로왕이 전사당하자 문주왕 이 공주의 금강변 공산성(公山城)으로 천도하였 다. 그 후 고구려가 금강변의 강경지역으로 밀고 내려오자 성왕이 16년(AD 538)에 부여의 금강 변 부소산성(扶蘇山城)으로 옮겨 가게 되었다.

신라와 가야의 왕도

신라는 경주의 형산강변에 자리를 잡았는데, 서 쪽에 흐르는 형산강 상류를 서천(西川)이라 부 른다. 서천을 비롯하여 경주의 북쪽에 흐르는 북 천(北川), 경주의 남쪽에 흐르는 남천(南川) 등 3개의 하천이 서라벌(徐羅伐)이라는 옛 도시를 감싸고 흐른다.

남천변의 반월성(半月城)에 왕궁을 만들고 북천에 자리 잡은 이궁(離宮)까지 주작대로의 큰길을 만들었으며, 첨성대를 중심으로 고분군 과 안압지, 전랑지, 황룡사, 분황사 등을 만들었 다. 또한 남천변의 반월성에서 불교유적이 많은 남산(南山)으로 가는 길에 하천을 건널 수 있도 록 일정교(日精橋)와 월정교(月精橋)라는 돌다 리를 만들었다.

가야는 낙동강 물줄기를 따라 자리 잡은 나라로 상류로부터 함창의 고령가야, 성주의 성산가야, 고 령의 대가야, 창녕의 비화가야, 함안의 아라가야, 김해의 금관가야 등이 낙동강변에 자리를 잡았으 며, 고성의 소가야만 바닷가에 자리를 잡았다.

그중에서도 비화가야(非火伽倻)는 낙동강 이 휘돌아나가며 황강과 남강이 합수되는 창녕

<그림 5> 하남시 고골의 백제 하남위례성

<그림 6> 금강과 백제의 공산성(輕部慈恩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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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 있었다. 비화가야는 낙동강을 1차 방어선으로 하고 우포못, 번개못, 장 척못, 한못 등의 늪지를 2차 방어선으로 했으며, 왕궁의 뒤에는 화왕산성이 자 리 잡은 수중도시를 구축했다.

발해의 왕도

발해는 고구려의 유민들이 오동성인 돈화의 목단강(牧丹江)변 성산자산성에 대 조영이 698년에 세운 나라다. 그 후 742년에 해란강(海蘭江)변의 서고성인 서경 압록부로 천도하였다가 755년에 목단강변 발해진의 상경용천부로 옮겼다. 그러 다가 다시 785년에 두만강변의 팔련성인 동경용원부로 갔다가 794년에 목단강변 의 상경용천부로 옮긴 후 926년에 거란의 공격으로 최후를 맞이하였다.

가장 오랜 왕도였던 상경성(上京城)은 그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로 100만 명이 살았던 당나라의 장안성(長安城)과 맞먹는 크기를 가지고 있었기에 해동성 국(海東盛國)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이곳 왕성의 뒤를 흐르는 목단강변에서는 당시 강을 건너다니던 칠공교(七孔橋)라는 다리유적이 발견되었다.

고려의 왕도

고려는 임진강과 예성강 사이의 개성에 태조 왕건이 919년에 자리를 잡았는데, 그 도시의 중앙에 사천(沙川)이 관통하여 남쪽으로 흘러 임진강으로 들어간다. 개경의

<그림 8> 수중도시인 창녕비화가야의 왕도

<그림 7> 낙동강과 가야연맹의 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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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을 흐르는 예성강 하구에 있는 벽란도는 큰 배가 서해바다로 바로 들어갈 수 있는 양항으로, 당시의 국제 무역항으로 유명했다.

조선의 왕도

조선은 이성계가 1394년에 한강변의 한양에 자 리를 잡았는데, 양(陽)은 강의 북쪽에 있는 도 시에 붙이던 이름으로, 한양이란 한강의 북쪽 에 있는 도시라는 뜻이다. 이와 비슷한 이름으 로, 심수의 북쪽에 위치한 심양(瀋陽)과 낙수의 북쪽에 위치한 낙양(洛陽)이 있다.

한강의 북쪽에 자리 잡은 한양이라는 도시의 중심부에는 청계천이 관통해 흐르는데, 그 방향 이 서로 달라 S자 형태의 태극수(太極水)를 이룬 다. 또한 북에는 북악, 동으로는 낙산, 서로는 인 왕산, 남으로는 남산의 내사산(內四山)이 자리 잡 고 있고, 그 바깥으로는 북쪽에 북한산, 서쪽에 덕 양산, 동쪽에 아차산, 남쪽에 관악산의 외사산(外 四山)이 다시 감싸고 있는 천하의 명당이다.

한양은 선사시대에도 압록강과 두만강 쪽에서 흘러온 문화의 교차점이 된 매우 중요한 곳이고, 백제가 한성이라는 도읍을 정했던 고대의 도시 다. 고려시대에는 남경(南京)으로 불린 부수도였 으며, 조선왕조가 왕도로 삼아 한양이라 하였다.

맺음말

지금까지 살펴본 우리나라의 도읍지 대부분들은 강변의 물이 들지 않는 높은 둔덕에 자리 잡고 있 는데 그 배후에는 산성을 갖추고 있어 적이 쳐들 어올 경우 피난하였던 곳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들이 강변 부근에 자리 잡은 것은 적의 도강을 어 렵게 하는 해자(垓字)의 역할을 하고 각지에서 거 두어들인 물류들을 강을 통해 모으기 쉽기 때문 이며, 그 외에도 강물을 음용수와 농업용수, 놀이 공간으로 사용하여 그곳에 사는 도시민들의 삶의 질을 높여주기 때문이다.

평지성(平地城)과 산성(山城)이 결합된 형태 의 도읍은 고조선시대에 속하는 하가점문화에서 시작하여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에서 모두 나타나고 있으며, 특히 한성백제시대의 한 성, 웅진성, 사비성과 고구려의 장안성, 고려의 나 성, 조선의 한양도성 등은 도시 전체를 하나의 성 벽으로 둘러쌓는 나성(羅城)의 구조를 지니고 있 는 것이 특징이다. 이들 도시의 한복판에는 작은 하천이 흐르고 있으며 그 바깥쪽을 한강, 금강, 예 성강 등의 거대한 하천들이 두르고 있다.

<그림 9> ‘한양도성도(漢陽都城圖)’에 그려진 조선 왕도 한양의 청계천과 한강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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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문화유산과 생활민속 1)

박태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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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근대화와 탈근대화

한강에 관한 개인적인 기억으로는 제1한강교(한강대교) 일대의 넓은 모래밭에서 종달새를 쫓아다니며 겅정거렸던 일이라든가, 무더운 여름철 동대문에서 전동차 로 갈아타고 뚝섬유원지로 찾아가 해수욕과는 묘미가 다른 강수욕을 즐기던 일 들이 우선 떠오른다.

1960년대에 경제개발5개년계획 추진과 함께 한강개발사업이 본격화되면서 강변 풍경이 엄청나게 변모하는 것을 목도하며 어리둥절해하던 기억도 새삼스럽 다. 한강의 도시화·산업화는 당면한 국토건설의 과제이기는 하였으나 아쉬운 점 도 없지 않았다고 회고하게 된다. 가령 여의도는 처음에는 시민공원의 녹색공간 으로 존치시킬 계획이었으나 자본권력이 이를 방관하지 아니하여 원래의 방침을 변경시켜 한국의 맨해튼이 되게 한 것이었다고 한다. 시민공원으로 계속 남아 있 었다면 어떠하였을까 반문해보게 된다. 서울 나름의 트라팔가(런던), 시테 섬(파 리)과 같은 광장과 녹색공원이 당연히 한강변에 마련돼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제 방 및 강변도로(당시의 김현옥 시장은 윤중제라는 신조어를 붙이기도 하였다) 토목공사 가설의 필요성에 따라 밤섬, 저자도(닦섬), 뚝섬 등이 사라져버린 것은 일단 한강 문화자원의 손실이었다고 회상하게 된다. 시민들의 접근권과 조망권 을 차단하고 흐트러뜨린 강변도로라든가 아파트촌의 난립에 대해서는 여러 관찰

1) 이 글은 국토연구원에서 기획·편찬한 「강과 한국인의 삶」에 기고하였던 원고를 요약·보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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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능하지만 한강 전통경관을 되살릴 소중한 기회를 놓쳐버렸던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적 성 찰도 오늘에는 갖게 된다.

한성부에 속하는 한강에 대해서는 특히 경강 (京江)이라 하였는데, 이처럼 경강인 한강의 인 문학은 특별한 바가 있었다. 동호(東湖)-노량 진-서강(西江)으로 내려가는 한강은 그 문화지 형이 서로 다른 특성을 지녔다. 동호는 남한강·

북한강 상류로 통하는 내륙 수운의 강항을 이 루었고, 노량진은 삼남대로와 영남대로 육로 도 선장의 교통 요지였으며, 이와 달리 서강은 한 강 하류 삼각주에서 임진강을 만나 조강(祖江) 을 이루고 강화만을 끼어 서해 바다로 나가는 해 운의 항구로 번성하였다. 내륙 수운으로 금강산, 오대산, 태백산 등에 이르는 산간오지까지 왕래 할 수 있는 고속도로 구실을 하고, 전국을 엮어 놓은 9대로의 중앙지대를 엄호하여 문자 그대 로 경강의 정치·경제·군사 문화특구를 형성 케 하고, 여기에 서해 바다를 열어놓아 전국의 물산을 집산시키고 중국·일본 등의 해양진출 과 왕래를 원활하게 하였던 한강이었다. 한강은 이처럼 내륙 오지와 전국 교통로, 해양로의 모 든 혜택을 서울에 집중시킬 수 있도록 해주었다.

국토문화에 관심을 가져온 처지에서 살필 적 에 안타까운 현상이 있다. 서울강인 한강이 베 풀어온 국토 풍요의 소중함과 고마움을 정작 서 울 시민들이 너무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 론 한강의 문화유산을 어찌 지속가능하게 계승 해야 할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 소홀하기만 했 던 지난 시대의 개발 우선주의에 대한 반성적 성 찰도 당연히 필요하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거 룻배, 나룻배, 너벅선, 판옥선 통행의 과거시대

한강을 무조건 예찬할 수는 없으며, 여기에서 한 강의 근대화, 나아가서는 탈근대화의 거대화면 로드맵을 새롭게 작성해볼 필요가 있게 된다. 정 작 오늘에 이르러서는 경강인 한강이 거대한 콘 크리트 숲의 미로(迷路)처럼 되어 어선, 세곡선, 관선, 병선들이 드나들며 온갖 혜택을 누리게 하 던 수리(水利)의 풍요를 놓치게 하는 바가 있다.

첨단기술로 조형(造型)되는 오늘의 한강은 야경이 불야성을 이루어 대단히 화려하고 윤택 한 미래도시의 풍광을 펼쳐놓고 있지만 메갈로 폴리스 한강 예찬만으로는 되레 헛헛하기 이를 데 없는 점도 있는 것이다. 세계의 내로라하는 수도들을 순력해보지 않은 이들이라 할지라도 서울강 한강이 단연 빼어나다는 것을 충분히 실 감하게 되기에 묻지 않을 수 없다. 근대화의 젖 줄이 되어온 한강정치경제주의 차원과는 달리 산업화의 소란을 견뎌내며 훼손되기도 했던 한 강인문주의의 특성을 어찌 발휘하도록 해야 할 것인가 질문해보아야 한다. 압축개발시대 산업 화의 중심지였던 한강, IT 첨단기술로 관리되는 유비쿼터스의 한강 자랑에는 정녕코 누락된 요 인들이 있다. 무엇보다도 공해오염이 방지되는 자연생태의 한강, 시민문화가 꽃을 피우는 생활 문화의 한강을 되찾아 살려내야 한다.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슈트라우스)이라 든가 스메타나의 음악 몰다우강처럼 국토의 얼 과 넋을 지켜온 한강, 또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맑은 영혼을 노래하는 아폴리네르의 미라보 다 리 시편에 나오는 파리 센강에 못지않아야 할 서울의 한강, 곧 한강 문예주의 기틀이 과연 어 떠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성찰이다. 노벨문학상 을 받은 「드리나강의 다리」(이보 안드리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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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 이슬람교도, 유태인들이 함께 거주하며 갈등과 화해를 거듭하는 대 하 서사문학이었고, 러시아 혁명의 빛과 그림자를 폭넓게 담아낸 「고요한 돈강」

(숄로호프), 그런가 하면 평생토록 미시시피강을 떠나지 않고 이 강과 고락을 함 께하며 「미시시피강의 생활」, 「허클베리 핀의 모험」 등의 작품을 남긴 마크 트웨 인을 떠올린다.

이에 한 문학인으로 송구하기 이를 데 없다. 정치인의 한강, 경제인의 한강이 당연히 중요하지만 인문·문예의 한강에 관해서는 누구보다도 문화예술인의 줄 기찬 탐구, 끈질긴 문예캠페인이 전개되었어야 마땅한데 구차한 변명을 내세울 나위도 없이 직무유기를 해온 것이 아닌지 깊이 반성해보아야 할 바가 있기 때 문이다.

그린웨이의 한강, 청사(靑史)의 한강

한강 개념도는 남한강을 본류로 하고 북한강을 지류로 삼는 지리부도로서 작성 된다. 태백산 줄기의 검단산에 있는 검룡소가 가장 먼 거리에 놓여 있으니 한강 본류의 시원지가 된다고 근대지리학은 측정하지만, 역사를 통해서는 줄곧 오대 산의 우통수를 발원지로 이해하고 있었으니 이러한 전통지리학의 개념도도 무시 할 바는 아니다. 검룡소 발원의 골지천은 정선 아우라지 일대에서 대관령-배나 드리-송천으로 내려오는 물줄기와 만나고 다시 나전 일대에서 우통수로부터 오 대천으로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끌어들여 이윽고 조양강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어 천(漁川)은 화암약수와 몰운대의 정선 소금강을 갈무리하면서 뒤미처 조양강에 합류되는데 이로부터 천하절경을 이루는 영월 동강의 곡류가 된다. 다른 한편으 로 오대산 쪽의 속사천과 치악산 쪽의 주천강이 합류된 평창강은 영월 땅으로 들 어서면서는 서강이라고 개명되어 단종애사의 사연이 서려 있는 청령포로 흘러내 린다. 그리하여 마침내 동강과 서강은 합류되지 않을 수 없는 환경을 맞게 되는 데, 이로부터 비로소 (남)한강이라는 본 이름을 획득한다. 복잡다단한 최상류 일 대의 여러 갈래 수계(水系)는 오늘에 이르러 문화기행 답사를 통해 구체적으로 그 수려한 경관을 체현해볼 수도 있게 되었다.

북한강의 발원지는 남쪽의 오대산 - 설악산 일대와 북쪽의 금강산 일대에 걸쳐 있는데, 먼저 제2지류가 되는 내린천의 족보부터 거슬러 올라보면 북한 강-남한강이 똬리의 형세를 이루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내린천은 오대산 북쪽 산록이 되는 계방산의 계방천과 자운천, 방대천을 끌어모으게 되는데, 이는 남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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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우통수-오대천 물줄기와 산남산북으로 갈 라지는 것이어서 비유컨대 이란성 쌍생아의 출 생과 흡사하다. 더구나 내린천은 엉뚱하게 북류 하여 남류하는 오대천과 상반되는데, 북한강과 남한강의 성격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었을까. 내 린천은 마중물의 형세를 보이면서 인제의 소양 강에 합수되는데, 강원도 내륙산간지역을 드렁 칡처럼 얽히게 하는 북한강의 산전수전(山戰水 戰) 경관이 이로부터 본격화된다.

북한강의 본류는 금강산 일대에서 발원되는 금강천이 월남하여 평화의 댐-파로호를 거쳐 춘천댐으로 내려오는 물줄기가 된다. 소양강댐 건설로 국토 최대의 인공호수 소양호가 생겨난 것처럼 춘천댐 공사로 인해 조성된 인공호수 춘 천호에도 관광자원을 활용하는 인프라 시설들이 차츰 정비되어 새로운 명소로 각광을 받는다. 의 암댐으로 생겨난 의암호, 팔당댐이 만들어낸 청 평호는 호반도시 춘천의 지형지리를 바꾸었거니 와, 관광개발 바람이 불고 있는 북한강의 또 다 른 지류 풍광명미의 홍천강도 뒤처져 청평호로 들어오는 강이다.

운명적인 만남이라 해야 할지, 두 사랑의 맺 음이라 해야 할지 두물머리라 부르는 양수리 (兩水里, 양평군 양서면) 일대가 남한강과 북한 강의 합수머리를 이루게 되는데, 이로부터 한강 은 장강대하의 본색을 발휘하는 만큼 그 뱃노래 곡조를 달리 부르도록 한다. 한강수타령은 어 떠한 민요인가? 5음계 굿거리장단이고 양산도,

경복궁타령과 함께 입창(立唱, 선소리)에 드 는 경기민요라는 것이 한강수타령이라는 노래 에 대한 사전적인 풀이다. 사설이 활달하면서 다 양하고 다채로운데, 서울 한강 중에서도 노들강

(노량진)을 중심 삼아 흥청망청 늘어놓는 가사 의 몇 대목을 우선 옮겨본다.

한강수라 깊고 맑은 물에 수상선 타고서 에루화 뱃놀이 가잔다

(후렴) 아하 아하 에헤야 에헤야 어허야 얼싸함 마 둥게 디여라 내 사랑아

조요한 월색은 강심에 어렸는데 술렁술렁 배 띄 워라 에루화 달맞이 가잔다

한강수라 맑고 맑은 물은 주야장천 흘러서 노들 (노량진)로 흐르고 흐르네

양구 화천 흐르는 물 소양정을 감돌아 양수리를 거쳐서 노들로 흘러만 가누나

정선 영월 흐르는 물 단양팔경 감돌아 여주 벽절 (신륵사) 지나서 노들로 흘러드누나

노들강변 봄버들 경치가 좋아서 좋았나 물 길러 간 처녀들 맵시가 좋아서 좋았나

앞강에 뜬 배는 낚시질 거루(거룻배)요 뒷강에 뜬 배는 님 실러 가는 배란다

노들에 버들은 해마다 푸르른데 한강을 지키던 님 지금은 어디 계신가

한강수 푸른 물아 너는 어찌 늙지 않어 만고불변 한결같이 흐르는데

아하 아하 에헤야 무정할손 사람만이 늙는구나.

농업경제시대의 서울 한강수가 산업경제시대 를 거쳐 지식정보경제 단계에 이르고 있는 엄청 난 환경변화 속에서 경기민요 한강수타령이 잊 어버린 노래, 어쩌면 잃어버린 노래가 된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러함에도 이 민요의 잊어버 림, 잃어버림의 상실된 문화콘텐츠의 콘셉트 를 새롭게 탈바꿈시킬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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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수타령에는 이 강물과 온갖 희로애락을 함께 누리는 삶이 스며 있고 녹 아 있으나 오늘의 서울 시민에게 한강수는 더 이상 삶터의 바탕이 되고 있지는 않 다. 한강이 생활 바깥으로 빠져나가서 마치 타인의 강처럼 되고 만 것을 우선 확 인해보게 되는 것이다.

사설의 한 대목에 나오는 것처럼 한강을 지키던 님은 지금 어디 계신가 묻지 않을 수 없고, 한강수 푸른 물은 만고불변 한결같이 흐르는지 어떠한지 지속가 능한 한강과 불가능한 한강의 상관관계를 새롭게 정립해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이 민요에 나오는 건강한 서민정신의 한강을 지식정보시대의 중요한 문화자원으 로 재출력하고자 한다면 과연 무엇을 어찌해야 할까?

습수(濕水) - 산수(汕水) - 열수(洌水)

정약용은 소내(召川), 마재(馬峴), 또는 두릉(杜陵)이라 부르던 강변마을에서 태 어나 성장하고 서울 중앙 정치무대에 진출한 후에 온갖 영욕을 겪으면서도 고향 의 생가와 원림을 유지하였으며 아울러 고향에서 작고하여 묻혔는데, 그의 75년 생애의 전체 과정은 이러한 한강 또는 경강(京江)의 정치경제지리학 내지는 정신 문화지리학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그의 재세 시에는 소내 고향이 경기도 광주 군 초부면 마현리에 속하였으나 지금은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가 된다.

정약용은 열수(洌水), 또는 열초(洌樵)라는 호를 즐겨 사용하였으며, 그의 고향에 대해서는 열상(洌上)이라 부르곤 하였는데 이는 열수의 강 언덕이란 뜻이었다. 그 자신은 다산(茶山)이라는 호보다는 열수라는 호를 더 선호한 쪽이었는데, 75년 생애 중에서 강진 다산 땅은 18년 유배지의 애환을 아로새기 게 했던 것이었으나 마재 본가의 열수야말로 전 생애에 걸친 것이었다. 열수는 덕소 - 팔당-양평 일대의 한강을 가리키는 것이었는데, 오늘에는 이러한 명칭 자 체가 생소하기만 하다. 박람강기의 그는 어떠한 근거에서 두물머리 아랫녘의 한 강을 열수라 지칭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충실히 고증하고 열심히 답사를 다녔다.

정약용은 배를 타고 경강, 남한강, 북한강 일대를 누구보다도 줄기차게 탐방하 였고, 평생에 걸쳐 한강 기행시편들과 기행문들을 다수 남겼는데, 노년에 쓴 산 수심원기(汕水尋源記)라는 그의 산문을 소개해본다. 산수(汕水)라 부르는 강의 근원을 밝혀보고자 한다는 논술인데, 산수란 곧 북한강을 가리킨다. 그는 1818 년에 강진 유배에서 풀려나 마현 고향으로 돌아온 뒤에 춘천 북한강 일대를 두 번 찾았다. 1820년 음력 3월에는 형 정약현과 함께였고, 그의 나이 62세이던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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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음력 4월 15일에는 맏아들 학연과 동행했다.

두 번째 춘천기행을 마친 직후에 산행일기

산수심원기를 집필했다.

그는 산수심원기에서 북한강에 대해서는

산수(汕水)라 표현하고, 남한강은 습수(濕 水), 그리고 양수리에서 두 강물이 합류하여 그 의 고향 남양주 마현으로 흐르는 한강 본류에 대 해서는 열수(冽水)라고 하였다.

그는 중국 역사서 「사기(史記)」의 조선전(朝 鮮傳)에 조선에는 산수(汕水)와 습수(濕水), 그 리고 열수(洌水)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고증하면서, 열수는 한강 본류를 지목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확인한다. 산수와 습수 두 물이 용진 (龍津)의 서쪽에서 모이는데, 산(汕)이란 산곡 (山谷)의 물을 뜻하고, 습(濕)이란 원습(原濕) 의 물을 뜻하므로 북한강이 산수이고 남한강이 습수이며 두 강물이 합류하는 두물머리(용진 서 쪽)부터 열수라 불렸다고 밝히면서 그의 집이 있는 열상(洌上) 일대의 문화역사지리를 규명했 다. 정약용의 글에 나오는 용진 서쪽은 대체로 오늘의 두물머리 일대를 지목하는 것이 분명한 데, 현재의 행정지명으로는 양평군 양서면 양수 리와 남양주시 조안면 진중리 또는 송촌리를 잇 는 강나루일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정확한 위 치는 현재까지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시기에 따라 물줄기가 달리 흐르고 나루 의 위치도 변하곤 하였으며 갈수기에는 걸어서 강을 건널 수도 있었기 때문에 수로의 길이 여럿 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열두 용진이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는데, 그만큼 조운 수로가 여러 군데였음을 알게 하는 것이라 한다.

흔히 아무리 늦어도 늦은 것이 아니라 말한

다. 현재 양수리 유원지가 조성되어 있기는 하 지만 옛 용진나루 일대를 복원시켜 습수산 수의 서로 다른 물의 성질이라든가 온도, 습도 의 차이 등을 측정하고 체험하는 21세기 버전 의 녹색생명문화단지를 조영해볼 수 있기를 기 대한다. 여기에 정약용의 또 다른 기록이 보탬 이 될 것이다.

정약용은 1819년(순조 19) 4월 15일부터 형 과 함께 충주에 있는 선산 묘소에 참배하기 위 해 남한강 뱃길 여행을 다녔고, 다음 해에 아들 학연과 함께 두 번째로 북한강 춘천 선상 유람을 했던 것인데, 이를 계기로 남한강 시모음 75수와 북한강 시모음 25수의 창작 시편을 엮어 「귀전 시초(歸田詩草)」라는 시문집을 꾸몄다. 이 시집 의 첫 편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감회를 밝혔다.

지난해에는 황효수 가에 있던 사람이(去歲黃驍 水上人)

금년 봄에는 다시 녹효수 가에 왔나니(綠驍水上 又今春)

이어서 스스로 주석을 달아놓았다.

황효는 여주(驪州)이고, 녹효는 홍천(洪川)이 다. 그래서 남쪽(남한강)을 황효수라 하고 북 쪽(북한강)을 녹효수라 한다.

효(驍)는 날랜 말을 가리킨다. 따라서 녹효 수는 녹색 말처럼 달리는 강물이고 황효수는

황색 말처럼 달리는 강물이 된다. 녹효수(녹색 강)는 홍천강이고 황효수(황색 강)는 여주 여 강의 별칭이라는 것이었으니, 오늘에 이를 어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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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긍·납득할 수 있을까? 북한강-남한강은 물의 성질이라든가 온도와 습도의 차이만 아니라 산악의 강, 평야의 강으로 수질마저 격차를 보였다는 것인데, 이에 관한 과학적인 실측 조사가 이루어지기를 당부해본다.

정약용의 습수-산수 고찰과 함께 살펴보아야 할 다른 고전도 있다. 안정복(安 鼎福)은 정약용보다 50년 전에 태어난 윗세대에 속하는데, 「동사강목」 부록 하 권에서 열수고(考)라는 논문을 통하여 열수가 한강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고 고증한다(다만 그는 洌水가 아니라 列水라고 기록한다).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낙랑군 탄열현(呑列縣)에 분려산(分黎山)이 있고 거기 에서 열수(列水)가 나와 서쪽으로 점제(黏蟬)에 이르러 바다에 들어가는데 수로 의 길이가 840리이고, 또 열구현(列口縣)이 있는데 열수가 바다로 들어가는 어 귀에 있다고 하였다. 우리나라 내지에 수원(水源)이 800리가량 먼 것이 없는데, 한수의 수원이 가장 멀어 그 잇수가 800여 리가 충분히 되니, 열수는 바로 지금 의 한수인 것이다.

이어지는 그의 설명을 요약한다. 한강의 수원이 하나는 강릉 오대산에서 나오 는데 그것이 남강이고, 다른 하나는 회양(淮陽)의 말휘령에서 나오는데 그것이 북강이다. 「사기」에는 습수와 산수가 합쳐서 열수가 된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한강 상류의 남강과 북강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탄열현, 열구현에 대 해 고증한다. 탄열은 아마도 남강-북강이 만나는 용진 일대일 것이라고 막연히 추정하지만, 열구(列口)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지리지에 고구려의 혈구현 (穴口縣)은 지금의 강화(江華)이다라고 하였다는 기록에 비정시켜 열구는 강화 만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고 지적한다.

열수의 탐구, 그리고 산수와 습수의 필드 스터디는 가능 여부를 떠나 오늘에 활용될 수 있는 실사구시의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 것은 아니라 할 수도 있을 터 다. 그러함에도 국토문화지리의 콘텐츠 진흥을 위해서는 이러한 전통시대의 한강 개념도 탐구가 소중한 문화유산의 값어치를 지닐 것이라고 확언해두고자 한다.

한강 문화자원과 문화인프라

남한강 뱃길 따라, 영남대로 옛길 따라라는 주제의 테마기행, 북한강의 흐르 는 강물처럼이라는 제목의 문예기행을 기획해본 적이 있었다. 이와 함께 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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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리 기행, 뗏목노래 기행 등의 팸투어를 해 보기도 했고, 고구려 국원성-신라 중원경 역사 탐방이라는 인기 없는 내용의 학술답사를 꾸며 보기도 했다. 한강은 한강스페셜 정보를 엄청 나게 저장해두고 제공해주려 하는데 이를 출력 시켜 받아내려는 이가 드물었다고 비유적으로 설명해볼 수 있다. 하지만 탈산업문명-지식정 보문명의 전환기에 새롭게 전향(前向)해야 하는 시대의 요청에 따라 한강 문화지도를 새롭게 작 성해보고자 하는 요구와 의욕이 확산될 것이다.

한강 문화유산에 대한 종합적인 조사 연구가 요청된다. 암사동, 미사리, 수양개의 선사유적 등은 1960년대 이후에 새롭게 발굴되거나 본격 적으로 조사·연구되고 있지만, 일반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면 문화 동력이 충원될 필요가 있다.

삼한시대에는 한강 일대가 마한 54국의 근거지 를 형성하여 부족사회에서 국가사회로 이행되는 데, 이 또한 역사적 상상력을 통한 접근에 의존 하게 되는 쪽이다. 원삼국시대 초기에는 백제의 왕경(위례성)이 자리 잡게 됨에 따라서 한강문 화사는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더구나 고구려 장수왕은 475년에 백제의 한 수위례성을 함락시키면서 북한강 일대는 물론 남한강 중상류 지역까지 장악하는데, 이때 한강 이 역사의 중심 무대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특히 남한강의 충주 일원에 국원성을 세우는데, 그때 까지는 주목을 받지 못하던 장소에 이러한 지명 을 붙여 산성과 도성을 쌓았다는 것은 정치군사 지리학의 요충지 발견 차원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이보다 앞서 장수왕은 427년에 압록강 의 국내성에서 대동강의 평양 안학궁으로 왕도 를 옮기는데, 남한강의 국원성 건설은 곧 압록강

의 국내성과 쌍벽을 이루어 양 날개 구실을 하 도록 하기 위한 것이리라 유추해볼 수 있다. 압 록강-대동강-한강이 하나의 문화권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은 아틀라스 한국사의 진전임에 틀 림없는데, 미래 코리아 블루오션의 문화원형으 로 이를 고찰해보아야 한다.

역사문화지리학이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지 만 충주-여주-양평의 한강문화지리학이 제대 로 조명된 적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 한의 한강, 백제의 한강, 고구려의 한강, 신라의 한강으로 주인을 바꾸어가던 시절은 물론이려니 와 조선후기의 경강상인들에 의한 한강 상업 번 성에 관한 것들도 현지조사를 통해 문화복원을 기획해보아야 할 것이다.

한강의 문화유산, 문화자산, 문화자원…….

한강 문화자원 개발에 앞서 한강 문화자산의 실상이 어떠한가에 대한 확인이 선행되어야 하 고 한강에 대한 문화인식이 달라져야 한다. 그러 나 문화자산·문화자원 개발과 활용에 관해서는 문외한의 처지이므로 이 글에서는 더 이상 논급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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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의 나루

신정일|문화사학자, 사단법인 우리땅걷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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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낙동강은 민족의 대동맥이자 영남의 젖줄이다. 강원도 태백시 천의봉 너널샘에 서 발원하여 태백시내의 황지에서 발원한 황지천을 만나고 구문소를 지나 경상 도에 접어든다. 봉화군 명호면을 지나 안동에 이르는 그 강가에 수많은 나루들 이 들어섰었다.

나루는 강가나 냇가 또는 좁은 바닷목의 배가 건너다니는 곳을 이르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공주의 웅진(熊津)을 곰나루라고 한 것이 가장 빠른 시기의 나 루에 관한 이름이다. 배로 사람이나 짐을 나르기 때문에 나르는 곳에서 나루라 는 말이 나왔을 가능성도 있다. 한자로 표현할 때는 도(渡, 삼전도), 진(津, 정 암진, 주문진)이라 하였고, 조금 더 큰 것을 포(浦, 다대포. 삼천포)라고 하였으 며, 대규모의 바닷가 나루는 항(港, 부산항)이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이름난 나루터에는 취락이 발달하였다. 그 형성 배경은 대체로 화 객(貨客)을 이동하기 위하여 도선장(渡船場), 계선장(繫船場), 주막, 여인숙, 여 관, 상가 등이 들어선 것이었다. 낙동강의 왜관·삼랑진, 금강의 강경포, 한강변 의 삼전도·양화진·목계, 영산강의 영산포, 예성강 동안에 위치한 벽란도가 이 름난 나루터 마을이었다.

나루에는 나룻배가 있어서 강가에 사는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일 때문에 건너다 녔다. 강 건너로 장을 보러 다니기도 했고, 관청에 일보러 가거나 학교 다닐 때도 나룻배를 탔다. 그리고 옛 시절에는 소를 배에 태우거나 물건을 가득 싣고 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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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너기도 했다. 사공이 없는 곳에서는 배를 움 직이는 방법이 달랐는데, 강의 양쪽 언덕에 쇠 밧줄을 걸고 그 줄을 잡아당기며 건너는 줄배였 다. 지금도 섬진강이나 한강의 상류에는 줄배가 남아 있다.

수많은 이별이 이루어진 나루터

나루를 배경으로 전해오는 이야기 중 가장 오래 된 이야기는 고대 시가 중의 공무도하가(公無渡 河歌)일 것이다. 술병을 든 백발의 미친 노인인 남편이 나루에서 물에 빠져 죽자, 뒤따라가던 아 내가 노래를 불렀다.

임은 물을 건너지 마오.

임은 기어코 물을 건너다가 물에 빠져 죽었네.

임은 장차 어이하리오.

이 노래를 부른 여인은 이 노래를 공후로 연 주하고 뒤따라 죽었는데, 그 광경을 목격하고 이 노래를 전달한 사람이 사공 곽리자고(郭里子高) 였다고 한다.

어떤 이별보다 애절한 이별이 나루터에서의 이별이라고 한다. 수많은 나루터의 이별 중 압 권은 고려의 천재 시인 정지상(鄭知常)이 지은 시 대동강송인(送人)이라는 시다. 사람을 떠나보내는 이별의 시인데, 천년을 두고서 이보 다 더 슬픈 이별의 시가 없다는 평을 받고 있다.

비 갠 긴 언덕에는 풀빛이 푸르기도 한데, 그대를 남포에서 보내며 슬픈 노래로 울먹이네.

대동강 물은 어느 때라야 다 없어질 것인가.

이별의 눈물이 해마다 푸른 물결에 덧보태지니.

누구라고 정한 사람은 없지만 떠나보낸 슬픈 심정에 눈물은 대동강 물처럼 마를 날 없이 보태 지기만 하는 애틋한 마음을 시로 노래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여러 강 중에서도 유독 낙동강에 나루가 많았다. 봉화와 안동 지역에도 크고 작은 나루가 즐비했다. 그중에서도 사연이 많기로 소 문난 나루가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의 삼강나루 였다. 낙동강의 큰 흐름이 태백산 자락에서 발 원한 내성천과 충청북도 죽월산에서 시작하는 금천을 이곳 풍양면 삼강리에서 만나는 것이다.

한 배 타고 세 물을 건넌다는 말이 있는 삼 강리는 경상남도에서 낙동강을 타고 오른 길손 이 북행하는 길에 문경새재 쪽으로 건너던 큰 길 목이다. 또 삼강리는 낙동강 하류에서 거두어들 인 온갖 공물과 화물을 배에 실어 올라와 노새 의 등이나 수레에 바꿔 실어 문경새재를 넘어가 던 물길의 종착역이었다. 여기에서 낙동강 줄기 를 따라 더 올라가면 안동 지방과 강원도 내륙으 로 연결되었다.

세 곳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몸을 섞는 삼강나 루에 이제 나룻배는 사라지고 주막테마파크가 만들어졌다. 이 시대의 마지막 주모였던 유옥연 주모가 살았던 주막집 근처가 새로운 관광지로 탈바꿈한 것이다.

낙동강변에서 제일 큰 낙동나루

상주는 낙동강변에 자리 잡은 고을이다. 상주시 와 함창읍, 그리고 네 개의 면이 낙동강변에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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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해 있다. 상주 지역에는 열두 곳의 나루가 있었고, 그중에서 가장 큰 나루가 상 주시 낙동면 낙동리에 있던 낙동나루다. 낙동강의 연원이 된 낙동나루는 고려시 대는 물론이고 조선시대에도 나라 안에서 가장 번성했던 나루다.

옛 시절의 낙동나루는 영남 지방 사람들이 서울로 용무를 보러 가거나 과거 보 러 갈 때 꼭 거쳐야 하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과거를 보러 가던 길 이었으며, 해방되기 전까지는 부산에서 출발한 소금배가 낙동강을 거슬러 안동 과 예안으로 올라간 길목이자 문경새재를 넘어 서울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낙동나루는 조선시대에 일본 사신들이 낙동강의 물길을 따라 올라오던 길목이 었다. 일본의 사신들은 많은 화물을 휴대했기 때문에 감시하고 조사하기 위한 수 참관(水站官)과 창(倉)이 낙동강 여러 곳에 분포되어 있었다.

낙동강변에 자리 잡은 큰 포구들은 조선의 상선과 일본인들이 타고 온 배들 의 기항지로, 배들이 들어올 때마다 갯벌장이 발달했다. 교통이 발달하기 전까 지만 해도 낙동강은 중요한 수상교통의 통로였다. 김해에서 거슬러 올라온 소금 배와 상선들이 꼬리를 이었고, 주변의 객줏집과 주막에는 외지 선원들과 상인들 이 문전성시를 이뤘다.

낙동나루는 영남대로를 연결하는 중요한 나루였다. 때문에 5척의 대형 나룻 배와 도선군(導船軍) 등 16명의 군인과 장교가 배치되었고, 나라에서 나루의 관 리자인 도승(渡丞)까지 파견되었다. 1920년대만 해도 소금과 비단, 그리고 당시 귀했던 인삼과 녹용을 가득 실은 배들이 낙동나루에 정박했고, 보부상들은 이곳 에 부려진 소금을 비롯한 생필품들을 등짐과 봇짐으로 져다가 안동·봉화·영양 일대를 다니며 팔았다.

낙동나루는 낙동강 하류지방의 각 조세창고에서 한양으로 세곡을 실어 나르 던 뱃길의 최상류 종착지점이기도 했다. 낙동강 700리라는 말이 생긴 것도 바 로 이 때문이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조선조 문물(文物)의 유통은 수로(水路) 를 주로 이용했는데, 세미(稅米)의 경우, 영남지방에서는 낙동강을 이용해 상주 낙동진에 모아서, 육로를 이용해 점촌, 문경을 지나고 조령을 넘어 충주 가흥창 (可興倉)에서 다시 한강 수로를 이용해 한양으로 운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낙 동나루는 조선후기까지만 해도 원산, 강경, 포항과 함께 수산물의 4대 집산지였 을 정도로 낙동강변에서 가장 큰 나루였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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