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칸트의 ‘파레르곤’ 개념을 중심으로
금 빛 내 렴*
1)
Ⅰ. 머리말
Ⅱ. 파레르곤으로서 디자인의 모색
1. 감각적 만족과 결부되는 디자인 그리고 파레르곤 2. 파레르곤 용어 및 개념 분석
Ⅲ. 파레르곤으로서 디자인의 특성 1. 일반적 주해
2. 부대(附帶) 작업 3. 에르곤
4. 모든 것의 확장 5. 허식으로 전락할 우려
Ⅳ. 맺음말
* 서경대학교 강사
* DOI http://dx.doi.org/10.17527/JASA.45.0.08
Ⅰ. 머리말
오늘날 디자인은 구체적인 물건을 형상화하는 분야인 시각적인 영역에서뿐 만 아니라 오감을 포함하는 전 영역에 관여하고 있으며 문학, 예술, 경영, … 등 인간의 마음과 지적체계를 다루는 여러 학문들에서도 성립하고 존재한다. 아울러 이들 디자인은 여타 학문들에서 영향을 받으며 또한 여타 학문과 삶에, 그리고 인간의 생각과 행동 양식에 영향을 끼친다.
본질적으로 디자인은 나와 우리 자신을 둘러싼 사회 제도와 문화, 역사적인 것들과 깊이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디자인 및 예술 일반을 통한 미감적 경험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또는 즉시적이든 암시적이든 당대의 현실이 맞닥 뜨리는 정치, 사회, 문화 등 여러 삶의 상황에 대한 태도와 이해를 함축하고 있으 며, 그러한 태도와 이해를 고양시키는 일이야말로 기본적으로 미학이 지닌 핵심 과제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간혹 ‘디자인 미학’이라는 표제를 단 서적들을 포함하여 기존에 출간 된 디자인 관련 이론서들이 주로 디자인의 요소나 원리라는 주제 하에 디자인의 형식적 조건들을 중심으로 서술되었거니와, 최근 인문학으로서 디자인에 관한 관 심이 증대되고 있는 시점에서 디자인 미학에 관해 다른 방식으로 고찰할 필요가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연구자는 우리가 칸트(Immanuel Kant)의 미학을 통해서 디자인에 관 한 개념적 사유를 다시금 이끌어 낼 수 있다고 본다. 물론 칸트가 살았던 시대 상황과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의 시대 상황을 동일선상에서 단수 비교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인공의 산물인 기예(기술, 예술, Kunst)에 대한 그의 미학적 비평 을 토대로 현대의 디자인 산물에 대해서도 유효하고 의미 있는 논의를 도출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본 논문은 칸트의 주요 저술 중 하나인 판단력비판
을 통해, 즉 그 속에 나타난 주요한 미학적 개념을 통해, 디자인이 어떤 방식으로 우리의 삶과 연관을 맺고 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또 다른 디자인 미학의 가능성 을 제시하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집중할 것은, 판단력비판에서 크게 다루거나 많이 다루지는 않았던 개념이긴 하지만, 오늘날 디자인에 대한 역할을 다시 새겨보는 데에 중요하게 다룰 수 있는 ‘파레르곤(Parergon)’ 개념이다.
따라서 한 마디로, 본 연구는 특별히 ‘파레르곤’ 개념에 초점을 맞추어서 디 자인의 특성에 관해 규명하기 위한 글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이때 디자인이 미감 적 대상으로서 단순히 장식적 기능만을 지니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작품(Werk, ergon) 그 자체인 우리의 삶을 부가적으로 더욱 완성시키고 있음에 집중하고자 한다. 이 작업은 칸트의 저작들 ― 판단력비판과 순전한 이성의 한계들 안의 종교 ― 중 관련 본문을 통해 이루어지며, 아울러 칸트의 ‘파레르곤’ 개념을 분석 하고 해석한 데리다의 회화 안의 진리의 일부분을 함께 고찰하게 된다. 우선 파레르곤이라는 말이 등장하는 배경을 이해하면서 이 용어가 함축하는 여러 가지 의미들을 파악하고, 이 개념어가 쓰이는 전후 맥락 가운데 함께 거론되는 예시들 이 뜻하는 바도 살펴본다.
실상 파레르곤이라는 용어는 제3비판서에서 직접적으로는 복수형으로(parerga) 단 한 번밖에 등장하지 않지만 우리는 이 개념을 통해 디자인에 관해 더욱 새롭 고도 폭넓은 해명을 시도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어느 누구도 이제껏 파레르곤 개념을 디자인과 연관하여 고찰한 경우는 없었다. 이미 데리다가 파레르곤 개념 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판단력비판 자체를 분석한 적이 있긴 하지만, 연구자 는 그의 해석을 참조하되 디자인과 접목하여 ― 데리다는 파레르곤을 디자인과 연결하고 있지는 않으나 ― 이 개념을 디자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틀로 사용할 것이다. 곧 파레르곤 개념과 디자인을 결합하여 ‘파레르곤으로서 디자인’에 관해 심층적으로 분석하며 현대 디자인을 바라보는 시각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Ⅱ. 파레르곤으로서 디자인의 모색
1. 감각적 만족과 결부되는 디자인 그리고 파레르곤
어떤 대상과 연관하여, 예를 들어 건축 디자이너의 관점에서 아주 훌륭한 건물과 연관하여, 그 대상에 대한 판정을 생각해 보면 그에 대한 판단은 각기 다 를 수 있다. 내가 어떤 궁전 앞에 서 있다고 가정해 보자. 궁전에 대한 예는 칸트 가 제시하고 있는 것인데, 누군가 나에게 그 궁전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느냐고 묻 는다, 아니면 “이것은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그것은 판단의 문제 이며, 보편타당성에 대한 판단인데, 그러므로 모든 것은 진술, 질문, 답변의 형식 으로 제시될 수 있다. 미감적 감정이 모든 사물의 존재성과 맺는 관계로부터 배 제되어 환원될 수는 없을지라도, 그 판정의 사례는 내가 “이것은 아름답다” 또는
“이것은 아름답지 않다”고 말할 수 있기를 명한다.
내가 말하고 있는 그 궁전은 아름다운가? 모든 종류의 답변은 그 문제의 핵심에서 빗나갈 수 있다. 칸트가 직접 답변의 여러 예들을 제시하는 바와 같이,
‘나는 빈둥빈둥 멍청하게 놀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그와 같은 사물들 을 좋아하지 않는다’거나, 북아메리카에 거주했던 인디언의 한 부족인 이로쿼이 (Iroquois) 족의 추장처럼 ‘나는 음식점이 더 마음에 든다’고 대답한다거나, 그 밖에 루소와 같은 말투로 우리가 여기에서 보는 것은 민중의 고혈을 그처럼 무 용한 것에 낭비하는 왕후들의 허영의 흔적이라고 한다거나, 내가 만약 어느 무 인도에 살고 있으며 그러한 호사스런 것을 만들 수단을 갖고 있다고 해도 나는 결코 그러한 호사스런 건물을 만들기 위해 그러한 노고를 쏟지 않을 것이라고 확언할 때, 이러한 답변들은 어느 것이나 어떤 본질적으로 미적인 판단을 구성 하지 않는다.1) “나는 이 궁전을 사실상 외적․비본질적인 동기들에 의해, 경험
1) KdU, §2, 6. 참고로, 이 글의 본문과 각주에서 칸트의 책 Kritik der Urteilskraft를 판단 력비판, 제3비판서, 또는 약호 KdU로 표기함. 아울러 함께 표기되는 §는 절을, 숫자는 2 판의 쪽수를 나타낸 것이다.
적인 심리에 의해, 경제적인 생산관계, 정치적 구조, 기술적 인과관계 등에 관련 하여 평가하게 되는 것이다.”2)
칸트에 의하면, 사람들이 이 궁전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느냐고 나에게 물었 을 때, 그들이 알고자 한 것은, 내가 그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가 하는 것이 다. 다시 말하면 대상의 단순한 표상이 ― 그것 자체로, 그것 자체 내에서 ― 나 에게 쾌를 주는가, 내가 그 대상의 현존에 관하여 아무리 무관심(냉담)하다 할 지라도 대상이 나의 내부에서 만족(쾌)을 수반하는가 어떤가 하는 것이다.
“대상이 아름답다고 말하기 위해, 그리고 내가 취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나로 하여금 대상의 실제적인 현존에 좌 우되도록 하는 요인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의 내부에서 이러한 표상에 부 여할 수 있는 의미라는 점은 아주 명확한 것이다. 미에 관한 판단에 조금이 라도 관심이 섞여 있으면, 그 판단은 매우 편파적이며 또 순수한 취미판단 이 아니라고 함을 누구나 승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취미의 판단에 서 심판관의 역할을 하자면, 사상(事象)[사물, Sache]의 실제 현존에는 조금 이라도 마음이 끌려서는 안 되고, 이 점에서는 전적으로 냉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극히 중요한 이 명제는, 우리가 취미판단에서 순수한 무관심적 만족을, 관 심과 결합되어 있는 만족과 대립시켜 볼 때에, 그리고 특히 그와 동시에 관 심의 종류가 이제 바로 언급하게 될 종류들 외에는 더는 없다고 하는 것을 확언할 수 있을 때에, 가장 잘 해명될 수 있을 것이다.”3)
이러한 다른 종류의 관심은 ‘쾌적한 것’의 현존에 대한 관심과 ‘선한 것’의 현존에 관한 관심인데, 칸트는 판단력비판 3절과 4절 각각의 절에서 쾌적한 것 과 선한[좋은] 것 모두 관심과 결합되어 있다고 표제를 달고, 쾌적한 것은 “감각 에서 감관들에 만족을 주는 것[적의(適意)한 것]”(KdU, §3, 7)이고, 선한[좋은] 것
2) Jacques Derrida, LA VERITE EN PEINTURE, Flammarion, Paris, 1978, p. 53.
3) KdU, §2, 6-7.
은 “이성을 매개로 해서 순전한 개념에 의하여 만족을 주는 것[적의(適意)한 것]”(KdU, §4, 10)이라고 정의하면서, 각각 전자에서는 “초록색의 쾌적함”(KdU.
§3, 9)을 언급하고, 후자에서는 “무엇을 위해 좋은 것(유용한 것)”과 “자체로 좋은 것”(KdU, §4, 10)을 함께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감각적 색채라든지, 목적에 따라 유용하면서도 그 자체로 좋은 것은 디자인 분야에서 놓칠 수 없는 주요 본질이라 고도 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칸트가 판단력비판 §16에서 분석한 ‘자유미’와 ‘부속 미’ 개념을 통해 디자인과 결부되는 대상 및 목적의 개념에 관해 상세히 고찰할 수가 있다.4) 다만 이곳에서는 판단력비판 내에서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지는 않지만 디자인 미학의 주요 개념으로서, 어떤 산물이 하나의 대상으로서 우리에 게 다가올 때 감각적 만족과 결부시킬 수 있는 ‘파레르곤’ 개념을 다루면서 그 의 미를 탐색해 보고자 한다.
2. 파레르곤 용어 및 개념 분석
‘파레르곤’이라는 용어가 등장하는 곳은 14절에서인데, 칸트는 “순수한 취미 판단의 본래의 대상(den eigentlichen Gegenstand des reinen Geschmacksurteils)”
의 구조를 해명하기 위해 제1장 미의 분석론 중 14절 “사례에 의한 해명 (Erläuterung durch Beispiele)”이라는 제목 아래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미감적 판단은 이론적(논리적) 판단과 마찬가지로, 경험적 판단과 순수한 판단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전자는 어떤 대상 혹은 그 대상의 표상방식에 대 해서 쾌적 혹은 불쾌적을 진술하는 것들이요, 후자는 어떤 대상 혹은 그 대 상의 표상방식에 대해서 미를 진술하는 것들이다. 전자는 감관 판단(질료적 미감적 판단)들이며 후자만이 (형식적 미감적 판단으로서) 본래의 취미판단 4) ‘자유미’와 ‘부속미’에 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고하기 바람. 금빛내렴, 부속미(부용미)로서
디자인의 의미 , 미학예술학연구 제28집 (2008), 한국미학예술학회, 5-28쪽.
들이다 (allein eigentliche Geschmacksurteile).
따라서 취미판단이 순수한 것은, 단지 경험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만족[흡 족, 適意](Wohlgefallen)이 그 규정근거(Bestimmungsgrunde)에 조금도 혼 입되지 않는 한에서만 그러하다. 그러나, 그 판단에 의해서 어떤 것이 아름 답다고 언명해야 할 그러한 판단에 자극[매력](Reiz)이라든지 감동 (Rührung)이 관여할(einen Anteil an dem Urteile haben) 경우에는 언제나 그와 같은 혼입이 발생하는 것이다.”5)
그리고 칸트는 14절 후반부 말미에 미감적 형식에 덧붙여지는 쾌적한 감각 적 자극[매력]들의 예로서 색채와 소리를 열거하며, 이어서 곧장 단락을 바꾸어 우리가 주로 집중하게 될 장식, 곧 파레르가를 언급하고 그에 관한 예들을 들고 있다. 인용이 다소 길더라도 그 용어가 등장하는 전후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대로 기록하기로 한다.
“감관(외적 감관, 혹은 또한 간접적으로는 내적 감관)의 대상들의 일체의 형식은, 형태(Gestalt)이거나 아니면 유희(Spiel)이다. 후자의 경우, 그것은 형태의 유희(공간 속의 유희, 즉 몸짓이나 춤)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감각의 한갓된 유희(시간 속의 유희)이다. (이러한 것들에) 색채나 악기의 쾌적한 음조의 자극(Reiz)이 부가되는(hinzukommen) 수도 있으나, 순수한 취미판 단의 본래의 대상이 되는 것은 형태의 유희에서는 도안[소묘](Zeichnung)이 요, 감관의 유희에서는 작곡(Komposition)이다. 그리고 색채와 음조의 순수 성이나 혹은 그 다양성과 대조도 미에 기여하는(beizutragen) 것 같이 보인 다고 하는 것은, 결코 색채와 음조가 그 자체만으로도 쾌적하기 때문에, 형 식에 관한 만족(Wohlgefallen an der Form)에 대하여 말하자면 어떤 동종 (gleichartigen)의 부가물(einen … Zusatz)을 덧붙인다고 함을 의미하는 것 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색채와 음조가 다만 이 형식을 더욱 엄밀하게 또 더욱 명확하게 더욱 완전하게(nur genauer, bestimmter und vollständiger) 5) KdU, §14, 39.
직관할(anschaulich machen) 수 있도록 하며, 또 그 위에 대상 그 자체에 대하여 우리의 주의를 환기하고 지속시킴으로써, 그것들이 가지는 자극에 의하여 표상을 생생하게 해주기 때문이라고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장식(Zieraten)(Parerga, 부수물[부가물])이라고 불리고 있는 것조차도, 즉 대상의 전 표상에 그 구성요소로서 내적(본질적)으로 속해 있는 것이 아니 라 단지 외적으로 부가물로서 속하여(was nicht in die ganze Vorstellung des Gegenstandes als Bestandstück innerlich, sondern nur äusserlich als Zuthat gehört) 취미의 만족을 증대시켜 주는 것조차도, 실은 그 형식에 의해서 만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회화의 테두리[액자, 틀](Einfassungen), 혹은 조상(彫像)에 입히는 의복이라든지 장려한 건물을 둘러싼 주랑이 그러하 다. 하지만 장식이 그 자체가 아름다운 형식이 되지 못하는 경우에는, 즉 장식이 황금의 테두리(goldene Rahmen)와 같이 단지 그것이 가지는 자극 에 의해서 회화가 갈채를 받도록 하기 위해서만 만들어졌을[설치되었 을](angebracht) 경우에는, 그러한 장식은 허식(虛飾, Schmuck)이라고 하며, 또 그것은 진정한 미를 해치게 되는 것이다.”6)
위 인용에서 언급된 장식물(Zieraten), 곧 파레르가(Parerga, 부수물)에 관해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파레르가(Parega)는 파레르곤(Parergon)의 복수형인데, 이 용어에 대해 데리다가 회화 안의 진리에서 상세히 설명한 것을 정리하여 소개 하자면 다음과 같다.7)
파레르곤이라고 하는 그리스어는, 여기서 작품의 바깥(hors-d'œuvre)이라고 하는 관념에, 준(準)[유사]-개념적인(quasi-conceptual) 권위를 부여하고 있는데, 그렇기는 하지만 이러한 작품의 바깥은 단순히 작품밖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 라, 옆에서, 작품(ergon)의 바로 옆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사전은 대개
“작품의 바깥(hors-d'œuvre)”이라고 하는 번역어를 들고 있는데, 이것이 가장 엄 밀한 번역이지만 이 외에도 ‘부수적인, 외부적인, 이차적인 대상’, ‘보충물’, ‘옆에
6) KdU, §14, 42-43.
7) Jacques Derrida, 앞의 책, pp. 63-64.
있는 것’, ‘잔여물’과 같은 번역어가 제시되어 있다. 파레르곤이란 주요한 주제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남으로 해서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되는 것, 그러한 것이다.
즉 법제상에 있는 아이들의 교육(법률 766a)이라든지 지식의 정의(테아이테토 스 184a)는 파레르가(부수적인 것)로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원인의 탐구나 여 러 원리들의 인식에서, 파레르가가 본질적인 것에 선행하는 것을 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1098a30).8) 지금까지 철학적 담론은 항상 파레르곤 에 대립되어(contre; against) 있었던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립되어’라 는 것은 어떤 상황에 접해 있었다는 것일까?
파레르곤은, 에르곤 ― 즉 실행된[완성된] 작업(le travail fait), 진상(眞相, le fait), 작품(l'œuvre) ― 에 대립되며, 옆에 있으며, 부착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한 쪽 옆으로 완전히 벗어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떨어져서 작품의 구성에 개입하고 함께 작용한다. 그것은 단순히 바깥에 있는 것도 아니며 단순히 안에 있는 것도 아니다. 흡사 우리가 가장자리에서, 테두리에서(au bord, à bord) 받아 들일 수밖에 없는 어떤 장식품(부속품)과 같다. 파레르곤은 우선 경계(가장자리) 가 있는 데에서 경계에 있는 것이다 (Il est d’abord l’à-bord).
그러한 à-bord(경계에)라고 하는 말은, 만약 우리들이 약간만 ─ 시적으로
─ 이 단어의 어원으로 유희해보면, 중세 독일어의 bort(널빤지, 판, 선박의 갑판) 에 주목하게 한다.9) 리트레 Littré 사전에 의하면, “따라서, bord는 원래 널빤지 이다. 그리고 이 어원에서 보면 우리들은 그 단어의 의미의 연결고리를 파악할 수가 있다. 최초의 의미는 선박의 갑판, 즉 판자를 이어서 만들어진 구조물이라는 뜻이다. 덧붙여서, 환유에 의해 테두리 짓는 것, 가두는 것, 경계 짓는 것, 말단에 있는 것이라는 뜻이다”.
8) “그러니 다른 경우들에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곁가지의 부차적인 문제들이 우리의 주된 과 제를 압도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Ethica Nicomachea, 1098a 30. 아리스토텔레스, 니코 마코스 윤리학, 강상진, 김재홍, 이창우 옮김, 도서출판 길, 2012, 31쪽.
9) 참고로, 현재 독일어 사전에서 보르테(Borte)는 ‘가장자리 장식, 테두리, 레이스 등’을 의미 한다. 또한 독일어 보르트(Bord)는 ‘널빤지’라는 뜻도 있고, ‘옷의 가장자리(장식), 레이스’
라는 뜻도 있다. 그리고 프랑스어 보르(bord)는 ‘가장자리, 기슭, 테두리, 선박의 측면, 배 (선박) 등’을 의미한다.
bord(테두리, 가장자리)는 나무로 되어 있다. 그것은 회화의 액자틀처럼 얼 핏 보기에는 무관심하다. 나무는 돌과 같이, 돌보다 더 적절히 질료(hyle는 그리 스 어로 목재를 의미한다)를 명명한다. 목재, 질료, 틀, 안과 밖의 경계에 관한 이러 한 문제들은 가장자리(테두리) 부분 어딘가에서 동시에 설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데리다에 따르면, 파레르곤, 즉 이러한 작품 외적 보충물은, 만약 그것이 하 나의 철학적인 준(準)-개념의 지위를 가진다고 하면, 하나의 형식적이고 일반적인 술어적 구조를 제시해야만 하는데, 우리는 이러한 구조를 전혀 변경시키지 않은 채로, 혹은 어떤 일정한 규칙에 따라 변형시키거나 개조하여, 다른 제 분야들에 제시함으로써 새로운 내용을 이 구조에 따르게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Ⅲ. 파레르곤으로서 디자인의 특성
그렇다면 이제 디자인은 어떻게 ‘파레르곤’이 되는가에 관해 고찰해 보자.
일단 이 용어가 등장하는 곳을 보면, 칸트는 판단력비판 제2판의 14절에서
‘장식(물)(Zierat)’의 복수 형태인 ‘장식(물)들(Zieraten)’이란 말에 이어서 둥근 괄 호 안에 ‘파레르곤(parergon)’의 복수 형태로 ‘파레르가(Parerga)’를 추가[부가, Zusatz]하면서 ‘장식’과 동일한 의미 또는 부가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데, 그 것들이 “외적으로 부가[첨가]물로서 속하여(als Zutat gehört) 취미의 만족을 증 대시켜 주는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먼저, 우리는 칸트가 ‘파레르곤’이라는 말을 판단력비판이 아닌 다른 곳에서도 사용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맥락이 다르긴 하지 만, 그 구조는 유사한 것으로서 역시 비중 있게 다룰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말을 순전한 이성의 한계들 안의 종교(이후 때로는 종교로 표기)의 제2 판(1794년)에 적혀 있는 대단히 긴 하나의 주석에서 발견할 수 있다.10)
10) 연구자는 순전한 이성의 한계들 안의 종교에 있는 본문을 통해 ‘파레르곤으로서 디자인’
에 관한 몇 가지 근거 중 일부를 도출하였는데, 이에 관한 힌트는 데리다(Jacques
그 ‘주석’이 붙어있는 것[곳]은 무엇[어디]인가? 바로 제2판의 제1논고 뒤에 있는 ‘일반적 주해’의 맨 끝에 붙어 있는 것이다. 칸트는 순전한 이성의 한계들 안의 종교를 크게 네 편(제1논고, 제2논고, 제3논고, 제4논고)으로 나누어 서술 하고 있는데, 각각의 논고가 끝난 뒤에 또한 각각 ‘일반적 주해’를 덧붙이고 있다.
그런데, 칸트의 저술 순전한 이성의 한계들 안의 종교에서 파레르곤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이러한 ‘일반적 주해’라는, 그 주해의 개념인 것인데, 그것이
종교에 덧붙여진, 그 책의 일부로서는 아니지만, 그 책에서 전혀 외적(비본질 적)인 요소도 아닌 것을 규정하고 있는 한에서 ‘일반적 주해’의 개념인 것이다.
그 책의 각 부분[네 논고들]이 하나의 ‘일반적 주해(Allgemeine Anmerkung)’를, 즉 하나의 파레르곤에 관해 설명하고 있는 하나의 파레르곤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칸트는 ‘일반적 주해’들 중 제1논고 뒤에, 제2판 때에 추가된 주석의 시작 에서, 그 주해의 지위를 파레르곤으로서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이 인용 역시 다소 길다고 할 수 있겠으나 우리가 다루는 핵심 개념어가 인용의 첫 부 분과 끝 부분에 나오므로 문맥을 고려하여 그대로 인용한다.
“이 일반적인 주해는 이 저술의 각 편에(jedem Stück dieser Schrift) 부가 된[붙인, 부록처럼 덧붙여진](angehängt) 4개의 주해들 중 첫 번째 것이다.
이 주해들은 다음과 같은 표제를 가질 수 있겠다. 즉 (1) 은총의 작용[효력]
들(Gnadenwirkungen)에 관하여, (2) 기적들(Wundern)에 관하여, (3) 신비 들(Geheimnissen)에 관하여, (4) 은총의 수단들(Gnadenmitteln)에 관하여.
─ 이 주해들은 순수한 이성의 한계 안의 종교의 파레르가(Parerga)[부대 (附帶) 장식, 부가물, 부록]이다.11) 즉 이 주해들은 그것[이성의 한계] 안에
Derrida), 앞의 책, pp. 64-69에서 얻은 것이다. 물론 데리다는 이 책에서 ‘디자인’을 전혀 언급하지 않으며 종교에 나타난 ‘파레르곤’의 용어에 관해서만 서술하고 있다.
11) 칸트는 종교(1판 1793, 2판 1794)를 간행하기 전에, 이미 판단력비판(1판 1790, 2판 1793)에서 이 “파레르가”를 “대상의 전체 표상에 그 구성요소로서 내적으로 속해 있는 것 이 아니라, 단지 외적으로 부가물로서 속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KdU, §14, 43. 유의할 것 은,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파레르가’라는 말이 두 책 모두 1판이 아닌 2판에서 추가되었
속하는 것은[필수불가결한 부분은] 아니지만(sie gehören nicht innerhalb dieselben), 그것에 인접해 있다.12) 자기의 도덕적 필요요구를 만족시킬 능 력이 없음을 의식하는 이성은 그 결함을 보완[보충]해 줄 것 같은 초절적인 이념들(überschwenglichen Ideen)에까지 자기를 넓혀 가지만, 그럼에도 그 이념들을 확장된 소유로 자기에게 소속시키지는 않는다. 이성은 이 이념들 의 대상들의 가능성 또는 현실성에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으나, 그것들을 다 만 자기의 사고와 행위의 준칙들 안에 채용할 수 없는 것뿐이다. 이성이 더 나아가 고려하는 바는, 초자연적인 것의 탐구 불가능한 분야 안에, 이성으 로서 이해할 수 있는 것 이상의 것이기는 하나, 도덕적 무능력을 보완 (Ergänzung)하는 데 필수적일 터인 어떤 것이 있다면, 이것은 사람들이 (그 가능성에 관한) 반성적(reflektierende) 신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신앙 ─ 지 식을 표방하는 교조적[독단적] 신앙은 부정직[불성실]하거나 주제넘게 나타 나므로 ─ 과 함께 그의 선 의지에도 알게 모르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 이다. 왜냐하면 그 자체로 (실천적으로) 확립되어 있는 것에 대한 난점들을 제거하는 일은, 그 난점들이 초험적인(transzendent)13) 물음들과 관련한 것 일 때는, 단지 하나의 부수적인 일[파레르곤, 부대장식, 부업, 이차적인 과제](Nebengeschäfte)에 불과하기 때문이다…”14)
위 인용 본문에서 추출할 수 있는 두 가지 핵심어를 통해 우리는, 파레르곤 다는 점이다.
12) 데리다는 이 부분에서 “경계”, “접촉”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다음과 같은 표현을 꺾은 괄 호[ ] 안에 덧붙이고 있다. [그것들은 그것(이성의 종교)에 접촉하고 그것을 누르며 그것 들을 밀쳐내고 자기를 밀어붙이고 접촉을 구하고 경계 부분에서 압박을 가한다.] Jacques Derrida, 앞의 책, pp. 64-65.
13) 본 논문에서 독일어 transzendent에 해당하는 우리말 옮김은 ‘초험적’이라고 표기한다. 아 울러 독일어 transzendental에 해당하는 우리말 옮김은 논자들 사이에서 ‘선험적’, ‘초월적’,
‘초월론적’, ‘초험적’ 등으로 표기되고 있으나 본 논문에서는 ‘선험적’으로 표기한다.
14) RGV B 63 = VI 152. Immanuel Kant, RGV[Die Religion innerhalb der Grenzen der bloßen Vernunft], hrsg. von B. Stangneth, felix Meiner Verlag / Hamburg 2003 [PhB 545] ; 베를린 학술원판 제6권 (Berlin 1914, Akademie-Ausgabe Bd. VI, S. 1-202) ; 참고 로, 인용문은 백종현 역본(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 2011)과 신옥희 역본(이성의 한 계 안에서의 종교, 1984)을 참조하면서 연구자의 부분 수정역도 추가한 것임. 아울러 인 용문 중 글자의 진함 및 기울임은 연구자가 한 것임.
으로서 디자인에 관해 아래와 같이 첫째 명제와 둘째 명제를 제시할 수 있을 것 이다. 그리고 이후 연속하여 추가로 제시하는 명제들은 판단력비판 내의 본문 을 토대로 하게 될 것이다.
칸트가 파레르곤을 판단력비판에서는 아름다운 대상(예술)과 관련하여 언 급하고 있다면 종교에서는 좀 더 심원한 것들을 추구하는 이성과 관련하여 언 급하고 있으며, 그 말이 쓰이는 맥락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두 경우 모두 파레르 곤이 구체적이고 본질적인 것을, 외적이고 내적인 것을 연결하는 데 중요한 개념 임을 알 수 있는 바, 연구자는 두 책의 본문을 함께 고찰하면서 파레르곤을 디자 인과 접목하고자 한다.
1. 일반적 주해
첫째, 파레르곤으로서 디자인은 일반적인 주해(Allgemeine Anmerkung)를 다는 일이다.
칸트의 저술 순전한 이성의 한계들 안의 종교에서 파레르곤이란 ‘일반적 주해’라는, 그 주해의 개념이다. 그런데, 그것은 종교에 덧붙여진, 그 책의 일 부인 듯하면서 결코 일부가 아니지만, 그 책에서 전혀 외적(비본질적)인 요소도 아닌 것을 규정하고 있는 한에서 ‘일반적 주해’의 개념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 책의 각 부분[네 논고들]이 하나의 ‘일반적 주해’를, 즉 하나의 파레르곤에 관해 설명하고 있는 하나의 파레르곤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것들은 얼핏 보면 모두 외적․비본질적인 듯하지만 실상은 그 책에 없어서는 안 될 내적․본질적인 것 들이기 때문이다.15)
한편, 데리다는 판단력비판을 한 권의 책으로서 그리고 예술작품으로서 15) 다음 글과 비교해 보라. “장식물(Zieraten)(부수물(附隨物), Parerga)이라고 부르는 것조차, 다시 말해 대상의 전체 표상에 그 구성요소로서 내적으로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외적으로 부가물로서 속하여 취미의 만족을 증대시켜주는 것조차도, 이러한 작용을 단지 그 형식을 통해서만 하는 것이다” (KdU, §14, 43).
바라볼 때의 그 책이 갖는 특질과 문제를 회화 안의 진리에서 언급하고 있다.
아름다운 대상이 한 권의 책인 경우, 무엇이 현존하며 무엇이 더 이상 현 존하지 않는 것인가? 그 책은 그것의 현존하는 견본[사본, 범례, 원형]들의 감각 적인 다양과 혼동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러므로 ‘책’이라는 대상은 그것의 본질적인 구조에서, 그것의 견본들과는 독립적인 것으로서 그것 자체로서 자기 를 제시한다. 그러나 그 경우에 책의 관념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순수하 지 않다. 즉 고도로 판별력 있는 분석이, 책의 관념성을 관념성 일반으로부터, 여타 유형의 대상의 관념성으로부터 구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예술의 영역에서, 여타 부류의 책(소설, 시 등)의 관념성으로부터, 혹은 비(非)언설[추론]
적인 또는 비(非)서적(書籍)적인 예술대상들(회화, 조각, 음악, 연극 등)의 관념 성으로부터도 그것[책의 관념성]을 구별해야 한다. 각각의 경우에서 (유일하거나 다수적인) 범례성의 구조는 독창적[독자적]이고 그리하여 각각 상이한 감정을 규정한다. 그리고 각각의 경우, 우리는 각 경우에 어떠한 중요성[무게]을 부여하 는지, 즉 그것을 외적인[비본질적인] 찌꺼기로서 제거해버리는지, 혹은 그것을 내적[본질적인] 관념성으로서 보유해 두는지, 이러한 것을 밝혀야 할 문제가 아 직 남아있다.16)
그러면서, 데리다는 판단력비판을 하나의 사례로 들고 있다. 우리는 이 책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이것은 한 권의 책인가? 그것을 한 권의 책답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책을 읽는다고 하는 것은 어떠한 일인가? 이 책을 어 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것은 아름답다고 말할 권리가 내게 있을까? 그리고 애 초부터 그와 같이 자문할 권리가 있을까?
데리다는 판단력비판을 한 권의 책, 하나의 작품으로서 예를 들면서 이 책을 본질적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지 아울러 비본질적인 것은 무엇인지, 그리 고 만일 그 어떤 것이 비본질적인 것이라면 그것은 못 쓸 것으로서 여겨 그냥 잘라버려야 하는 것인지, 그리고 그러한 판단은 무슨 근거로 내려야 하는지…
등에 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한 책에서, 어느 한 작품 16) Jacques Derrida, 앞의 책, pp. 57-58.
에서 본질적인 것은 본질적인 것을 더욱 본질적인 것으로 만드는 그 어떤 것이 없이는 본질적인 것이 되지 않는 법이다. 위에서 제기한 물음들은 우리로 하여 금 바로 본질적인 것으로 만드는 그 무엇, 비본질적인 것인 듯하지만, 없어서는 안 되는 부가물, 곧 파레르곤에 주목하게 하는 바, 비본질적인 그 파레르곤은 또 다른 차원의 본질적인 것으로까지 변모하여 확장되는 것이다.17)
책 이야기가 나왔으니 출판과 관련하여 이야기해 보자. 재미있는 책이든 지 루한 책이든, 그림이나 사진이 있든 없든, 책은 디자인되어 간행되는 과정을 거친 다. 그러한 출판 과정 중에는 내용 자체를 다루는 저자와 편집자가 있을 것이고, 그 내용을 책이라는 형식에 담아내는 디자이너가 있을 것이다. 판단력비판이라 는 책의 경우를 예로 들어 보자. 이 책은 처음 접하는 독자들에게 쉽게 읽히지 않을 수 있다.
먼저, 저자(또는 역자)와 편집자의 위치에서 보면, 교열 및 교정 작업을 하 며 오․탈자를 바로잡는 것은 기본이거니와 내용적으로는 이 글을 독자들이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조금이라도 더 친절한 설명을 시도할 것이다. 필요한 개념 을 본문 속에서 반복하며 강조하기도 하고 어떤 용어에는 따옴표를 사용하거나 방점을 찍거나 서체를 달리하도록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아가 본문의 틀을 벗 어나 울타리 바깥에 따로 주석을 달아 보충적으로 설명할 것이다. 이때의 주석은 본문을 보완하는 것이면서도 주석 없이 본문은 완전하지 못한 경우가 된다. 이미 칸트가 그의 저술들 속에서 시도했듯이 말이다.
그럼, 다음으로 이 책을 맡아 디자인하는 편집 디자이너는 어떻게 해야 조 금이라도 더 독자에게 다가가게 할 수 있을까? 그는 자신만의 그리드와 레이아웃 을 염두에 두면서, 내용을 담는 여러 형식적 부가물들인 파레르가로서 서체․자 간․행간․각주․여백 등을 고려하고, 때로는 사진을 넣을지 일러스트레이션을 넣을지 등을 고민하고, 책의 판형과 함께 표지를 하드커버로 할지 페이퍼백으로 할지… 등을 판단한다. 이는 판단력비판의 우리말 역본 중에, 번역의 내용적인 17) “또 다른 차원의 본질적인 것으로까지 변모하여 확장되는 것”과 관련해서는 잠시 후 본
장(章)의 3절과 4절에서 좀 더 고찰해 볼 것이다.
것을 떠나서 형식적 외면만 고려할 때, 오래 전에 출간된 구역본과 그 후 세월이 흘러 새로 출간된 신역본을 비교해 봐도 그 편집 디자인적 요소의 중요성을 가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저자와 편집자의 시각에서는 내용상의 주석달기가 글의 완성 도를 높이는 것이라면, 형식상의 주석 달기란 출판 과정 중에 나타난 편집 디자 인적 요소들 모두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편집 디자인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공간 디자인 차원에서 보자면, 일차적으로 어느 도시를 개발구역으로 디자 인[계획]할지가 우선이고, 그 다음으로 건축 디자인을 통해 그 도시에 기반이 되 는 여러 시설들에 대한 건설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각 건축물 에 알맞은 실내 디자인이 후속적으로 이뤄져야 할 터인데, 이 모든 것들 또한 일 차적인 작품에 뒤따르는 주석 달기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칸트의 논의 체계를 ‘구성[설정된 구조, 골자](Konstitution)’이라고 간주할 수 있는 데, 그의 작업은 곧 제3비판서라고 하는 건축물 전체를 그 두 커다란 익벽(미감적 판단력의 비판과 목적론적 판단력의 비판)의 중앙 한곳에 결합시키고 곧게 세우는 것이다. 그리고 곳곳에 각 방에 어울리는 실내 디자인 과 같은 주석들을 배치하면서 책 전체를 하나의 작품으로서 완성해 간다. 물론 이것은 유비로서 그 책 안의 어디에서건 작용한다. 그리고 우리는 체계적으로 그것의 효과를 검증할 수 있다.
주석달기의 유비와 건축의 유비는 실제의 편집 디자인과 관련하여서도 적 용될 수 있는데, 말하자면, 편집 디자이너는 또한 책이라는 또 다른 건축물을 세우는 건축 디자이너이며, 각각의 페이지라는 방에 적절한 공간성을 부여하는 실내 디자이너이기도 하다. 그는 책이라는 건물 외관을 어떤 지붕과 어떤 기둥 과 어떤 벽체로 세울 것인지, 대문을 어떻게 다른 집 현관과 구분 지을지를 고 민한다. 또한 각각의 페이지 공간들을 어떻게 채울지 비울지를, 채색을 할지 말 지 등을 고민한다. 그리하여 편집 디자이너는 내용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어 느 서체를 사용할지, 이탤릭체로 기울일지, 볼드체로 굵게 표현할지, 통단으로 할지, 2단으로 할지, 왼 끝 맞추기로 정렬할지 아니면 가운데 맞추기나 오른 끝
맞추기로 정렬할지, 시각 자료인 일러스트레이션으로서 그림을 사용할지 아니면 사진을 사용할지 등을 고민하며 책이라는 작품에 대한 주석달기를 끊임없이 시 도한다.
나아가 더 넓은 관점에서 보자면, 디자인은 나와 너, 우리 모두의 인생이라 는 작품(ergon)에 주석을 덧붙이는 일이다. 실상 우리 모두는 삶의 주인공으로 서, 그리고 이 세상의 단독적인 주체로서 살아가고 있다. 이 때 우리 삶속의 여 러 디자인 작업들은 때로 필수불가결한 것은 아닐지라도 서로서로 인접해 있다.
그것들은 서로 접촉하고 밀고 당기며 삶을 더욱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하나의 온전한 작품이 되게 한다. 돌이켜 보면, 인류 역사 자체가 덧붙이고 덧붙이는 행위의 연속이다. 문명의 발달과 문화의 창출 및 전달 과정 속에 나타난 여러 산물들은 모두 다 인간의 주석들로서, 인류를 작품 자체로서 더욱 온전히 돋보 이게 해 왔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디자인이 끊임없이 우리의 삶 속에서 주석을 다는 행위임을 의식한다면, 이때의 디자인은 삶을 보완하고 완성시키는 디자인이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 만인 디자인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석을 통해서 작품을 더욱 온전 히 파악할 수 있으며, 해석의 지평을 더욱 넓힐 수 있기 때문이다.
2. 부대(附帶) 작업
둘째, 파레르곤으로서 디자인은 부대적인 작업(Nebengeschäfte)을 행하는 것 이다.
독일어 네벤(neben)은 “…의 곁에, 옆에, …와 나란히, …와 동시에, …외 에, …와 더불어, …와 비교하면”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디자인은 곧 작품 (ergon)으로서 현존하는 나의 인생 및 타자의 인생과 함께 존재하는 것이지, 홀 로 독립적으로 그 자체만의 디자인으로는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인생을 살아 가는 여정 속에 있는, 또는 난점들을 제거하는 과정 속에 있는, 부대적인 일
(Nebengeschäfte)은 그러므로 또한 “이차적인 과제”라고 칭할 수도 있다. 즉 부 대적인 사항 내지는 용무, 바로 옆에서 부수적으로 따르는 또는 대립되는 활동 이나 조작이다. 파레르곤은 어떠한 여분의 것을, 즉 본래의 분야(여기에서는 순 수 이성의 분야 및 순전한 이성의 한계들 안의 종교라고 하는 분야)에서 외적 인 것에 해당된다. 그러나 그것은 데리다 식으로 말하면, 그러한 것의 초험적 외재성이 유희하고 경계 그 자체에 접하고 그것을 건드리고 그것을 문지르고 그것을 밀어붙이고 그리하여 그 안쪽에 개입하게 되는데, 다만 그 안쪽이 결여 되어 있는 범위에서이다. 그 안쪽은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으며 자기 자신에게서 자기 자신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디자인은 삶이라는 작품 속에 뭔가 결여되어 있는 그 무언가를 채 우려는 행위이며, 보충적인 활동을 필요로 하는 과제를 수행하는 행위이다. 디 자인이란 행위를 간단히 특정 산물을 창조하여 가치를 유발하는 계획적 활동이 라 할 때, 디자이너는 인간 생활에 유용한 어떤 것을 만드는 조형 활동 과정 중 에, 인간의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욕구에 대해서 그러한 욕구들을 충족시키는 파 레르곤으로서 주석을 달고 부록을 첨부하여 보완하는 추가적인 가치 창조자라 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인간의 감각적, 정서적, 정신적 욕구를 포괄하는 인간의 욕구들은 예술적, 실용적인 주석을 갖게 되면서 진정으로 채워지는 것이다.
한편, 칸트가 판단력비판 14절에서 들고 있는 여러 실례들 중 한 예로서 조상(彫像)의 의복은 파레르곤과 장식의 기능을 지닐 것이다. 칸트가 명확히 설 명하는 바에 따르면, 이것은, “대상의 전체 표상에(in die ganze Vorstellung des Gegenstandes)” 불가결한 “구성요소[존립부분]로서(als Bestandstück)” “내적 (innerlich)”․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부가물로서(als Zutat)” 즉 여분의 것, 첨가 물, 보충물로서 “단지 외적(nur äußerlich)”․비본질적으로 그 표상 전체에 속해 있음을 의미한다.18)
따라서 작품의 바깥, 즉 조상의 의복은 조상의 나신을 장식함과 동시에 그 것을 덮는다. 그럼에도 작품의 바깥은 그 작품의 가장자리에, 즉 ― 칸트의 논 18) KdU, §14, 43.
의에 따르면 ― 그것이 그 전체 표상에 속하지 않는 범위에서 표상된(곧, 조상 의) 신체의 가장자리에 딱 붙어 있다. 그 표상에서 표상된 것이란 나신인 상태 로 자연스러운 신체일 것이며, 조상의 표상적 본질은 이러한 신체에 관련되며, 따라서 조상에서는 오직 아름다운 것은 그러한 표상만이다. 곧 그것은 필수적으 로, 순수하게, 본질적(내적)으로 아름다우며, “순수한 취미판단의 본래의 대상”이 다.
데리다는, 이와 같은 표상의 중심과 완전무결함의 경계설정, 표상의 안과 밖의 경계설정이 이미 이상한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을 것이라며, 또한 어디에 서 의복이 시작되는지가 의심스럽다고 말한다. 파레르곤은 어디서 시작되고 어 디서 끝나는가? 의복의 전부가 파레르곤일 수 있을까? 팬티라든지 그와 같은 것도 그럴까? 완전히 투명해 보이는 베일(면사포)의 경우는 어떤가?19)
이것은 표상적이고 객관화하는 본질의 문제이며, 그러한 본질의 안과 밖의 문제이며, 또한 이와 같은 경계설정에 관여하는 기준의 문제이며, 그것에 전제 된 자연성이라고 하는 가치의 문제이며, 그리고 부수적으로든 원칙적으로든 그 러한 문제설정 전체에 있는 인간의 육체의 지위 내지는 특권의 문제이다. (순 전한 이성의 한계들 안의 종교에서 이미 우리들이 검증한 것처럼) 만약 어떠한 파레르곤도 모두 단지 그것이 부가되는 그러한 체계에 내적인 어떤 결핍 때문 에 부가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조상의 신체의 표상에는 무엇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의복이 그것을 보충하는 것일까? 그리고 디자인과 예술은 이것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 것일까? 그것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그리스의 고전기 조각가들은 조각상의 신체를 콘트라포스토(contrapposto) 로 자연스럽고 완벽한 동세를 구축하면서도 근육의 힘줄과 동맥, 나신을 감싸는 옷 주름 하나 하나,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에도 소홀하지 않고 정성을 쏟았다.
이들 세부(細部)들은 조각의 대상으로 삼은 신(神)이나 영웅의 내면 가치와 조 화를 이루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파레르가였다. 이로써 그 조각상은 내 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하나로 합치된 완전한 전체 표상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19) Jacques Derrida, 앞의 책, p. 66.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육체의 경우는 어떠한가? 조상의 신체가 아닌 우리의 실 제 몸은 이미 작품 그 자체로서 본질적으로 아름다우며 “순수한 취미판단의 본 래의 대상”이다. 그렇더라도 우리 몸은 결핍을 겪고 있다. 여전히 뭔가를 필요로 한다. 그리하여 수많은 것들을 생산하며 채우고 있다. 그런데 어디까지만 파레 르곤인가? 전체 의복인가 팬티만인가 아니면 넥타이와 브로치까지인가?
우리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우리 몸은 그 자체로 완전한 에르곤 이다. 그러나 여전히 뭔가를 필요로 한다. 우리에게 디자인은 끊임없는 파레르 곤으로서 부대작업이다. 옷을 필요로 하고 집을 필요로 한다. 그때 디자인은 뭔 가를 덧붙이면서 필요를 보충한다. 그러면 인간은 덧붙여진 상태에서 또 하나의 작품이 된다. 하지만 여전히 더 필요하다. 장갑과 양말과 신발 등이 필요하고, 지붕과 문과 창문 등이 필요하다. 그리고 연이어 물이 필요하고 관개수로가 필 요하고, 시장이 필요하고 마을 공동체가 필요하고, …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파 레르곤은 에르곤에 덧붙여진다. 이는 한 개인의 본능적 욕구를 채우는 디자인으 로서 부대작업이기도 하고, 한 사회의 시스템을 유기적으로 작동케 하는 디자인 으로서 부대작업이기도 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디자인은 생활양식을 다채롭게 만들며 효율적으로 변화 시키며 삶의 전반에 개성을 부여하며 삶의 질을 풍요롭게 변화시킨다.
3. 에르곤
셋째, 파레르곤으로서 디자인은 또한 “그 자체 아름다운 형식을 가지는” 에 르곤이 되기도 한다.
연구자가 파레르곤으로서인 디자인이 또한 에르곤이 될 수도 있다고 명제 화한 근거는 칸트가 판단력비판에서 장식[파레르곤]은 “그 자체 아름다운 형 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롯한 것인데 (KdU,
§14, 43), 파레르곤이 지니는 ‘형식성’에 관하여서는 잠시 후에 좀더 논의하기로 하고 우선 14절에서 언급되는 칸트의 예시를 살펴보기로 하자.
칸트가 열거하는 여러 실례들 중, 조상의 의복에 이어지는 사례는 장려한 건축물을 둘러싼 주랑[열주들]에 관한 사례이다. 따라서 이러한 열주들 또한 보 충적인 파레르가이다. 기둥은 왜 건물에서 외적인 것으로 취급받는가? 앞의 의 복의 경우에서만큼이나 이 규준은 모호할 뿐만 아니라 이 경우의 규준은 더욱 큰 어려움을 나타내고 있기까지 한데, 이번 경우의 파레르곤은, 그 어느 것도 표상하지 않으면서 그 자체로 이미 자연에 부가된 그러한 작품에 추가된다. 우 리는 인체에는 무엇이 그 고유한 것으로서 귀속하고 또는 귀속하지 않는가, 무 엇이 인체에서 분리되고 또는 분리되지 않는가 ─ 비록 파레르곤은 정확히 말 하면, 그것을 작품에서 분리한다 해도 쉽게 분리되지 않는 것일지라도 ─ 에 대 해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건축 디자인 작품에서 그 표상 (Vorstellung)은, 구조적으로 표상적[재현적]이지 않으며, 그렇지 않으면 분명히 비판적 방식으로 안과 밖, 필수 불가결한 부분과 분리 가능한 부분을 분간하려 고 하는 자를 당황하게 하기에 충분히 복잡한 우회로를 통해서만이 표상적이 다.20)
우리가 실제 우리의 몸에서 몸과 의복을 나눌 수 있지만, 건축 디자인에서 무엇을 필수적인 것으로 하고 무엇을 부수적인 것으로 할지 구분하는 것은 쉬 운 일이 아니다. 지붕과 기둥이 없는 건축물을 상상할 수 있으며, 벽과 문이 없 는 건축물을 생각할 수 있을까?
이 열주의 사례와 함께, 하나의 주위[場,환경](milieu)에 새겨 넣음의 문제, 하나의 울타리[범위, 영역] 안에 작품의 오려내기의 문제 전체가 나타나는데, 그 러한 주위 또는 울타리에 대해서는 그것이 자연적인 것인지 아니면 인위적인 것인지를, 그리고 인위적인 것인 경우에 그것이 파레르곤인지, 아니면 에르곤인 지를 결정하는 것은 어떤 경우든 어려운 일인 것이다. 왜냐하면 주위가 작품에 인접한다고 해도, 그 모두가 칸트적 의미에서 파레르곤을 구성하는 것은 아니기 20) Jacques Derrida, 같은 책, pp. 67-68.
때문이다. 신전의 건립을 위해 선택된 자연적 부지는 물론 파레르곤이 아니다.
또한 인위적인 부지라고 해도 역시 파레르곤이 아니다. 즉 교차로도, 교회도, 박 물관도, 이 건물 또는 다른 건물 주위의 다른 작품들도 파레르곤이 아니다. 그 런데 의복이나 기둥은 파레르곤인 것이다. 왜 그런가? 의복이나 기둥이 분리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의복이나 기둥이 다른 것보다도 좀더 분리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특히, 만약 의복이나 기둥이 없었다면, 만약 그것들의 준(유사)-분리(그것들이 유사 분리되는 것)가 아니라면, 작품 내부의 결핍이 드 러나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결핍(결핍에 대해서는 매한가지 가 되는)은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파레르가로서인 그것들을 구성하는 것은 단 순히 잉여분으로서인 그것들의 외재성이 아니라, 에르곤의 내부에 있는 결핍에 그것들을 고정시키는 내적인 구조적 연결고리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결핍은 에르곤의 통일성 그 자체의 불가결한 구성요소일 것이다. 이러한 결핍이 없다면 에르곤은 파레르곤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에르곤의 결핍이 파레르곤의 결 핍, 의복이나 기둥의 결여일 것인데, 그럼에도 의복이나 기둥은 에르곤에게는 외적인 것으로 남는다.21)
이와 관련한 사례는 현대예술 작품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작품의 받침 대도 작품의 일부로 만드는, 오브제 조각가 하임 슈타인바흐(Haim Steinbach)22) 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아무런 개성도 없는 오브제들을 가져다가 창조 의 도구로 이용하였으며, 미술작품과 상품을 동일하게 취급하였던 바, 그에게서 는 순수예술과 대중문화 코드가 상호 혼입되어 있으며, 예술과 디자인, 작품과 제품의 경계가 모호하다. 우리는 그의 작품 속에서, 과거에는 주목받지 못했던 받침대가 중요하게 부각되며 그 받침대 위의 오브제들은 이전에 놓여 있던 위 치와 상황과는 전혀 다르게 가치가 하락되거나 상승되어 새롭게 우리에게 다가 옴을 인지하게 된다. 실상, 그의 작품만이 아니라 60년대의 팝아트 전반에서도 21) Jacques Derrida, 같은 책, p. 69.
22) 하임 슈타인바흐(Haim Steinbach, 1944- ). 이스라엘의 레호보트 출신으로 뉴욕에서 살고 있 는 미국 예술가이다. 그의 작품 다수는 대량 생산된 사물, 즉 기성품(readymades)을 배열하 는 것으로 구성된다.
파레르곤으로서 상품과 에르곤으로서 작품의 경계는 이미 모호해지고 역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파레르곤이 에르곤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일상의 디자인에서 규명하 면서 현대 예술에서도 관련 사례를 들고 있지만 미술사를 좀더 살펴보면, 순수예 술 분야에서 이러한 경계의 모호함, 또는 주도적인 것과 부차적인 것에 관한 전 복의 시도는 이미 20세기 초의 다다이즘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인 레디메이 드 작가 뒤샹(Marcel Duchamp)은 사물의 미학화를 시도한 이였는데, 그에게서는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자전거바퀴나 병따개, 눈삽 같은 물건들이 단순한 일상용 품으로 머물지 않고 새로운 미적 이념을 부여받아 예술품이 되”었던 것이다.23)
그런데, 우리는 현실태(energeia)를 어떤 방식으로 공정하게 다루어야 할까?
그 다음의 사례인 회화의 테두리, 곧 액자틀에 관해 살펴보자. 액자틀, 이 것도 앞의 것들과 마찬가지로 파레르곤이다. 그 일련의 사례들은 놀라운 것이 다. 우리는 어떻게 하여 액자틀의 기능을 조상 위에 (안에, 주위에, 혹은 바로 옆에 맞닿아) 부착된 의복의 기능이나 건물을 둘러싼 열주의 기능과 유사한 것 으로 취급할 수가 있는 것일까? 그리고 옷을 입은 인체의 형태를 띤 열주에 둘 러싸인 건물을 재현[표상]하고 있는 그림을 틀 지우는 액자의 경우라면 어떠한 가? 가장자리, 테두리[경계]에 있는 것에 대해 품게 되는 불가해한 점은, 단지 내재적인 한계 ─ 즉 액자틀과 그림 사이를, 의복과 신체 사이를, 기둥과 건물 사이를 지나가는 내재적 한계 ─ 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외재적 한계에 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파레르가에는 일종의 두께, 일종의 표층이 있는데, 이것 이 파레르가를, 칸트가 주장하듯이 단지 완전체를 구성하는 내부로부터 ─ 즉 에르곤이라는 작품의 고유 영역[몸]으로부터 ─ 떼어놓을 뿐만 아니라, 외부로부 터도 ─ 즉 그 그림이 걸려 있는 벽으로부터도, 조상이나 기둥이 설치되어 있는 그러한 공간으로부터도 ─ 떼어내며, 그 결과 점차로 서명충동이 생기하는 역사 적, 경제적, 정치적인 새겨 넣기의 전 범위로부터도 떼어내는 것이다. 어떠한 ‘이 론’도, 여하한 ‘실천’도, 어떠한 ‘이론적 실천’도, 만약 그것이 그러한 액자틀을 검 23) 김광명, 뒤샹과 칸트 미학 , 조형예술학연구 Vol. No. 24 (2008), 한국조형예술학회, 60쪽.
토하거나 거기에 기대지 않는다면, 효과적으로 그러한 새겨 넣기의 범위에 개입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액자틀만이 여기서 쟁점이 되는 것의 결정적인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액자틀은 ─ (해석학적․기호학적․현상학 적․형식주의적인 전통 전체에 의해서 옹호되어 온) 의미의 내재성을 한계 짓 는, 그리고 또한 보는 것도 읽는 것도 할 수 없는 채로 이 문제를 전적으로 지 나치는, 비본질적[외적]인 것에 관한 온갖 경험주의를 한계 짓는 (그리고 이들 사이에 있는) ─ 비가시적인 경계 부분에 있다.24)
파레르곤은 에르곤(작품)으로부터도 또한 동시에 주위로부터도 떨어져 나 온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배경[토대] 위에 뚜렷이 드러난 형체처럼 분리된 다. 그러나 그것은 작품과 같은 방식으로 배경에서 분리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후자는 배경으로부터 떨어져 나온다. 그러나 파레르곤의 액자틀은 두 개의 배경 으로부터 분리되는데, 두 배경 중에 각 한쪽과 관련하여, 다른 한 쪽 속으로 합 병되는[통합되는] 것이다. 액자틀은 그것에 대해 배경으로서 구실하는 작품과 관련해서는 벽면 속으로 합병되고, 그러고 나서 점차, 일반적인 텍스트라고 하 는 배경에 관련해서 액자틀은 일반적 배경으로부터 떨어져 분리되는 작품 속으 로 합병된다.25) 언제든지 배경[토대] 위에는 하나의 형태가 있으나, 파레르곤이 라고 하는 형태의 전통적인 규정은, 그것이 자기의 최대의 에너지[효력]를 발휘 하는 바로 그 순간에, 배경[토대]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 라지고 가라앉고 스스로를 지우고 녹아드는 것에 있다.
데리다 식의 파레르곤에 관한 분석에 입각해 본다면, 우리는 에르곤이면서 파레르곤인 디자인, 또는 파레르곤이면서 에르곤인 디자인, 곧 주위 환경에 자
24) Jacques Derrida, 앞의 책, p. 71.
25) 참고로, 액자틀에 대한 데리다 식의 이런 분석의 예시는, 이미 헤겔의 미학강의에서도 발 견할 수 있다. 헤겔은 초상화와 액자 테두리에 관해 언급하면서, 커다란[위대한] 초상화의 경우 테두리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인물의 생동감을 부각시키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고 하였는데, 특별히 예를 들어, 반 다이크의 초상화들에서는 그림의 액자틀이 “세상으로 통하 는 문(die Tür der Welt)”처럼 보였다고 말하고 있다.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tr.
by T. M. Knox, Hegel's Aesthetics: Lectures on fine Art, Vol. II, Clarendon Pres, Oxford University Press, 1975, p. 852.
연스럽게 녹아들며 일체화하는 디자인의 가능성을 지니게 된다. 이때 우리가 염 두에 두어야 할 것은, ‘나’가 에르곤이고 나를 둘러싼 환경이 파레르곤일 수 있 으며, 반대로 자연환경이 에르곤이고 ‘나’가 파레르곤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여러 가지 면에서 제3비판서는 하나의 작품으로서 그 자체를 제시하고 있 다. 그러므로 이 저작은 그 자체로서 그 자체에 중심이 두어지고 그 자체가 틀 에 끼워지도록 해야만 한다. 즉 우리는 이 저작의 근거[토대]를 확정하고 그 근 거를 하나의 틀에 의해 잘라내어서 일반적 배경으로부터 드러나게 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러한 틀은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어떤 작품에서, 더욱이 판단력비 판 내에서, 본질적인 것과 부수적인 것을 명확히 파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 다. 그리고 특히 알지 못하는 것은 이러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것, 즉 칸트가 파레르곤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 본질적이지도 부수적이지도 않은, 본래적이지 도 비본래적이지도 않은 것, 예컨대 액자틀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어떤 사물이 부수적이냐 에르곤적이냐 하는 것은 디자인된 사물 그 자체 로 규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 사물이 놓인 배경, 곧 사물을 둘러싼 환경에 따라 서 그 사물의 성격은 판이하게 달라진다. 예를 들어 주전자나 물동이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상수 시설이 잘 갖춰져 있는 곳에서는 이런 물 담는 도구가 단순 히 몸을 덜 움직이기 위해 잠깐 동안의 편의를 위한 파레르곤으로서 부수적인 것이지만, 시설이 열악하고 심각하게 물이 부족한 아프리카의 어느 지역에서는 그것 자체가 생존과 직결되는 에르곤으로서 본질적이면서도 필수적인 것이다.
과연 파레르곤이란 무엇인가? 미감적 판단력의 분석 전체는, 시종일관 우 리가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을 엄밀히 구별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미감적 판단력은 본래, 본질적인 미에 관련되어야만 하며 장식물이나 부 가적인 것에 관련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칸트는 ‘액자틀’을 파레르곤의 실례 로서 언급하고 있다.26) 즉 이때 파레르곤은 외부와 내부의 일종의 혼성이지만, 혼합이라든지 어중간함과 같은 혼성이 아니라, 외부가 내부의 내부로 끌려 들어 가 이 내부를 내부답게 성립하게 하는 외부인 것인 바,27) 디자인은, 삶이라는 26) KdU, §14, 43.
작품 내부로 들어가 내부를 내부답게 만드는 파레르곤으로서 또한 에르곤의 가 능성을 열어 놓는다고 할 것이다.
4. 모든 것의 확장
넷째, 파레르곤으로서 디자인은 에르곤의 확장이며, 우리 자신의 확장이다.
파레르곤으로서 각각의 액자틀, 조상의 의복, 건물을 둘러싼 주랑은 또한 각각의 에르곤의 확장이다. 액자틀은 회화의 확장이고, 조각상의 옷 주름과 머 리카락 묘사는 신체의 확장이고, 문설주와 기둥의 장식은 건물의 확장이다. 마 찬가지로 우리는 여러 사물들을 디자인하고 산출함으로써 각각의 산물들을 확 장함과 동시에 우리 자신을 확장한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들로써 자신들을 드러낸다. 우리는 우리가 소유한 것 들로 우리 자신들을 배우고, 정의하고, 상기하는데 이는 현대 생활의 불가피한 실 상인 듯하다. 소유물들에 의한 자기 확장의 이러한 과정은 여러 디자인 분야의 산물들에서 나타나지만 오늘날 특히, 디지털 기기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곧, 이러 한 현상은 사람들이 자신의 컴퓨터 바탕화면, 화면보호기, 자신의 웹사이트 및 다 양한 표준 응용[애플리케이션] 프로그램들을 변경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형식들의 독특한 부가[첨부]들은 현대의 정보기술(IT)의 유연성과 적응성에 의해 더 잘 제공된다. 현대의 소프트웨어 애플리케이션의 출현은 사용자들의 취미에 적합하도록 개성화될 수 있다. 이러한 추세[트렌드]를 반영하는 다양한 디자인들 은 하드웨어에서, 비록 조금 작은 규모에서라도, ─ 예를 들어, 풍부하고도 다양한 휴대전화 커버, 마스코트 및 여타 장식품들에서 ─ 발견될 수 있다. 각종 디지털
27) 참고로, 파레르곤에 대한 데리다의 분석을 토대로 보면, 한국 전통의 건축 디자인에서 중 요한 요소로서 자리 잡는 앞마당이야말로 “외부가 ··· 내부를 내부답게 성립하게 하는 외 부”로서 파레르곤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이 마당은 헤겔 식의 “세상으로 통하는 문”으로 서 ‘안’으로도 ‘밖’으로도 연결하고, ‘비움’의 공간이자 ‘채움’의 공간이기도 하는 양면의 ‘전 이공간’이기도 한 바, 파레르곤이면서 에르곤이기도 하는 공간 디자인의 탁월한 사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