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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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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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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의 의미

요한복음 5장 42절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오늘부터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오늘은 첫 번째 시간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가장 큰 계명은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신앙의 본질 중의 하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리새인들을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은 누구보다도 안식을 지켰습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목사님, 하나님 사랑하라고 하는 말은 그만하세요.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하니까 여기에 예배드리러 나왔죠.’그 분의 말씀은 한편으로는 일리가 있어요. 그 당 시에 고위 공무원이었는데 골프 약속도 많고, 친구들과의 약속도 많고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 님 사랑하기 때문에 예배드리러 왔다는 겁니다. 당연히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그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안식일 날이면 바리새인들로 치면 오늘날로 말하면 대통령이 불러도 안간 사람입니다. 거기에는 타협의 여기가 없습니다. 끝입니다. 왜냐하면 안식일 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얼마나 철저하게 안식일을 지켰느냐 하면 안식일 날은 땅에 침 도 뱉지 않았고 뱉었다 하더라도 침을 비비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비비다가 땅이 폐이면 안식일에 일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안식일 날은 음식은 먹을지 몰라도 요리도 하지 않고 설거지도 하지 않았습니다. 요리와 설거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는 알갱이까지 세어서 드릴만큼 철저히 드 렸습니다. 일주일에 하루는 반드시 금식을 했습니다. 소득의 일정부분은 반드시 구제를 했습니다.

하루에 몇 차례는 반드시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수련회 가면 성경구절 외우지 않으면 밥을 안줍니다. 그러면 줄을 서서 밥을 먹으려고 성경 구절을 부지런히 외웁니다. 그러면 교사 선생님이 지키고 있다가 외우게 합니다. 트리면 다시 뒤로 가게 합니다. 다 외워야 밥을 줍니다. 교훈을 가르치기 위한 방법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침에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읽습니다. 그러기 전에는 식사를 안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귀합니다. 아 주 소중한 부분입니다. 그러데 바리새인들은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상고하고 묵상했습니 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술을 끊고, 담배를 끊습니다. 귀합니다. 소중합니다.

그러데 바리새인들에 비하면 속된 말로 새 발의 피입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613가지 로 요약했는데 그 중에 365가지는 하지 말라는 것이고, 나머지 248가지는 하라는 겁니다. 이 613가 지의 모든 계명을 그들은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예수 믿고 술집 가는 것 끊고, 담배 피우는 것 끊는 것 귀합니다. 바리새인에 비하면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처럼 바리새인들은 철저히 신앙생활을 했고, 그들은 이 모든 것을 당연히 하나님 을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자신들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고 자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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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오늘 읽은 본문은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종교지도자들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바리새인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한마디로 말하면 너희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을 사랑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이 성경적으로 무엇을 뜻하느냐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바를 알지 못하면 우리가 나름대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전혀 하나님을 사란하지 않은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 37절 이하가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에 관해서 교리적으로, 성경 적으로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살아계신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 하나님의 형용을 보지도 못했고, 그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도 못했고, 하나님 과의 개인적이고 실재적인 교제가 전혀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만큼 하나님을 사 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주님을 보는 것입니다. 주님을 본다는 말은 그분의 형용을 본다는 말입니다. 그분의 형용을 본다는 말은 그분의 영광을 본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하나 님의 신실하심과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아버지 되심과 용서하심과 의로우심을 깨닫게 된다는 말입니 다.

이사야가 성전에 들어가서 하늘이 열리고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보았듯이 그 하나님의 영광을 보 았을 때, 그 1장부터 5장까지 줄기차게 외쳤던 이사야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을 때,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입술이 부정한 자로서, 입술이 부정한 자들 가운데 살면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었음이라’

라고 탄식했듯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그것입니다. 더욱 필요한 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만큼 아는 만큼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 영광을 보는 게 이렇게 연결되어 있고요.

두 번째,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렇게 인격체 되신 살아계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우리의 전 존재로 사랑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큰 계명이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이 말은 우리의 모든 존재로, 우리의 모든 것으로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 라” 그랬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의 전 존재로 인격체 되신 하나님 그분을 사랑하 는 것을 말합니다.

둘째, 그러면 하나님을 우리의 전 존재로 사랑한다는 말은 뭐냐? 하나님을 우리의 전존재로 사랑한 다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와 유일한 주님, 주인과 유일한 생명이 되시는 것을 말합 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구세주와 우리의 유일한 주인과 우리의 생명이 되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 이 우리의 전존재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유일한’이란단어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이시죠. 여러분의 구세주이십니까? 여러분의 구원의 주님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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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 라고 우리가 말할지 몰라도 우리가 만약에 이사하면서 날짜를 잡으면, 손 없는 날 이사하기 위해서 전혀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가 아닙니다. 귀신이 구세주요. 여러분이 우 리가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라고 말할지 몰라도 자녀들 결혼시키면서 토종비결 보면 예수님이 전 혀 구세주가 아닙니다. 실질적으로 살면서는, 살면서는 토종선생이 여러분의 구세주죠. 그러니까 그 말을 듣는 것이죠. 이처럼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란 말은 예수님 그분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세 주가 되셔야 그때야 비로소 주님이 우리의 주세주가 되시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주님이라는 것은 주인이라는 말은 예수님 그분만이 우리의 주인이 되셔야 우 리의 실질적인 주인이 되시는 것입니다. 아멘!

지난주에도 살펴보았고, 요즈음 화요 모임에서 계속 이 부분 살펴보고 있는데요, 예수님께서 예를 들면, 누가복음 14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4장뿐만 아닙니다. 그러니까 복음서 전체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지만 대표적으로 누가복음 14장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 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아야 할 것이니라. 그 다음에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아내나 남편이나 부모나 자식을 미워하지 않 으면 내게 합당치 않다. 세 번째,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의 소유를 버려야 할지니라 그렇지 않으 면 합당치 않다 그랬어요.

자 그러면 하나하나 살펴보죠.

그러면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할 것이니라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요즈음은 십자가 목걸이를 차고 다니죠. 안 믿는 사람도 액세서리로 십자가 달런데. 그런데 원래 십자가는 액세서리가 아니고요 혹은 교회에 이렇게 붙여 놓는 장식용이 아니고요, 예수님 시대에 누가 십자가를 이렇게 지고 가면 그게 뭘 의미하는지 금방 알았어요. 누가 십자가를 지고 가면 뭘 하러 갔죠. 지금 죽으려 가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자기 십자가를 지란 말은 자기 죽으라는 얘기에요. 그러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란 말은 무슨 말이냐면? 이 말입니다. 우리 나름대로 다 우리 인생에서 가지고 있는 우리 목표 있잖아요. 우리 계획있잖습니까, 우리가 추구하는 바 있지 않습니까, 우리 가 삶에서 얻고자 하는 것 있잖습니까, 우리가 삶에서 이루고자 하는 목표와 목적이 있지 않습니 까, 그거 내려 놓으라는 것이에요. 그거 포기하고, 하나님의 목표가 네 목표가 되고 하나님의목적 이 네 목적이 되고, 하나님이 추구하는 바가 너의 추구하는 바가 되고, 하나님의 열망이 너의 열망 이 되라는 것이에요. 그 말이 그 말입니다.

두 번째, 자기 남편, 자기 아내, 자기 자식, 자기 부모 이것보다 세상에 가까운 사람이 어딨어요.

그렇지 않아요. 그런데 그들을 미워하래요. 그렇지 않으면 주님께 합당치 않대요.

이 말은 진짜 미워하란 말이 아닙니다. 어떤 분은 그런 분들이 있어요. 아내를 미워하는 것 문제가 안돼, 왜 어짜피 안 사랑하거든, 예수님이 그 말씀하신 게 아니거든요.

예수님이 성경에 보면 뭐라고 말하고 있는가 하면, 에베소서 6장에 남편들에게 아내를 사랑하되 예 수께서 교회를 사랑하여 자기 자신을 내어 주심같이 아내를 사랑하라고 그랬어요. 베드로전 3장에 서는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 기도가 막힐 것이라고 그랬어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힐 거라 그 말입니다.

반면에 말씀하시기를 남편에게 복종하되 교회가 그리스도께 복종하듯 복종하라 그랬어요. 아 그러 면 성경에 언제는 사랑하라고 그러고 언제는 미워하라고 그러고 서로 상반된 말이냐 아니에요. 성 경은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져 있기 때문에 상반되지 않아요.

그러면 이 성경 전체로 볼 때 예수님이 자기 자식, 자기 남편, 혹은 자기 아내, 자기 부모, 미워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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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그 말이 무슨 의미인가 알 수 있어요. 성경을 전체적으로 볼 때. 이 말은 미워하란 말이 아니에 요. 사랑하되 그토록 사랑해야 한다고요. 그러면 이 말은 무슨 말이냐? 자기에게 가장 가까운 자기 남편, 자기 자식, 자기 부모, 자기 아내, 이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대조해 보면 자기 남편이나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미움이 될 만큼 하나님을 우선적으로 사랑해야 한다 그 말이 에요. 그 말입니다.

그런데 참고로 미리 말씀 드리면, 실제로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자기 자식도요 진정 한 의미에서 사랑할 수 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자기 욕심을 따라 자기의 선호하는 바가 이루어질 때 사랑하지요 그게 채워지지 않으면 절대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해야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자식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어요. 그전까지는 자기 욕심을 따라 사랑하는 것이죠. 인간적인 정에 의해 사랑하는 것이죠. 자 그런데 이 말씀은 그 말씀입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 뭐라고 그랬냐면?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않으면 합당치 않다고 그랬어요.

이 말은 문자 그대로 여러분 가지고 있는 것 팔아가지고 길거리에 내 던지자 그 얘기 아니에요. 어 떤 목사님이 돈을 다발로 해서 옥상에서 집어 던졌다고 그러는데, 그래가지고 신문에 나고 그랬다 는데, 돈이 하찮지 않은 것임을 보이기 위해서 그러셨다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이 말은 여러분 이 모든 재산 현찰로 바꿔 가지고 옥상에서 뿌리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러면 모든 소유를 버리라는 말은 무슨 말이에요. 이 말은 이 뜻입니다.

부자 청년에게 네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이 얘 기는 뭐냐 하면, 여러분의 모든 소유, 쉽게 말하면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집, 자동차, 보험, 예금 통장, 땅, 사업, 또 뭐 있을까요, 이 모든 것 하나님이 원하시면 아무 때에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드릴 준비가 돼 다시 말해서 그것의 모든 소유권이 하 나님께 이미 이전 되어져서 하나님이 하나님이 원하시면 아무 때에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그대로 사용할 준비가 돼 있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 고는 안 하셔요. 그런데 하실 수 있어요. 하시면 그렇게 하라는 것이죠.

제가 아는 한 집사님은 남대문 시장에서 큰 상회를 하시는 대요, 돈을 많이 버세요. 하나님이 돈을 많이 부어주셨어요.

그 분은 가까운데 교회가 지으니까, 자기의 집이 있으니까, 바로 교회 닥쳐있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거 팔아가지고 줘버리라고 그러대래요.

그냥 줬어요.

하나님한테 드린 거죠.

그랬더니 또 무슨 일을 하는데, 자기가 ‘그러면 가게 팔아서 헌금할까요?’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그러시더래요.

제 얘기는 뭐냐 하면, 하나님께 소유권이 넘어간다고 해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팔아가지고 땡전 한 푼 없이 여러분 알거지 만들고, 다 하늘나라 헌금하라고 하시는 분은 아니라는 것이죠.

그러나 분명한 한 가지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그 모든 소유권이 주님께 드려져야 한다는 거죠.

이게 ‘뜻’입니다.

그 다음에 보십시오.

그럼 ‘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는가?’

예수님 메시지가 똑같은데...

자, 보세요. 하나님을 우리의 전존재로 사랑하려면, 하나님이 우리의 유일한 주인이 되셔야 되는 건데,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려면 우리에게 소중한 자기 자신, 자기 가족, 돈이 포기 되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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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면, 실재로 전혀 하나님이 우리 주인이 아닙니다.

내가 주인이고, 돈이 주인이고, 사람이 주인이죠.

(하나님이)실재로 주인이 아닙니다. 전혀!

마태복음 23장을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에 대한 얘기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그들은 누구보다 철저하게 안식일을 지켰어요. 누구보다 철저하게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누구보다 철저하게 구제했습니다. 누구보다 철저하게 기도하고요, 성경 읽었습니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대로 율법을 613가지로 요약해서 누구보다 철저하게 그 모든 것들을 지켰습니 다.

그래서 자신들은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자부했습니다.

바로 그 바리새인들에 대해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여기 오늘 23장입니다.

한 번 보시죠.

“5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6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7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 을 좋아하느니라”

여기에 보시면, 그들은 누구보다 철저하게 그렇게, 소위 말하면 ‘종교생활’했을지 모르지만, 자 기 자신은 전혀 다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여기 보십시오. 자기 자신이 전혀 내려지지 않았습니다.

자기 자신이 전혀 안 내려졌어요.

자기 자신이 전혀 내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의 자신의 체면과 명예 이만큼도 내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5장만 보더라도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사람의 평가는 소중히 여기면서 유일하신 하나님의 평가는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고 그 랬어요.

그러니까 그들 생각에 하나님 평가를 소중히 안 여긴다고 생각했겠습니까?

그들이 그 모든 안식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드리고, 그 모든 의식들을 행하는 그 모든 것이 다 하 나님의 평가를 소중히 여긴다고 했는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들 속에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이 내려지지 않고, 사람들 앞에서의 자신의 평 가가 전혀 내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겁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여기 보십시오.

(마태복음 23장) “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16 화 있을진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 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17 우맹이요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금이냐 금을 거룩하 게 하는 성전이냐”

근데 왜? 금으로 하면 지키라고 그랬어요? 돈과 관련되니까요.

그 다음에 여기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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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여기에 보시면 알지만, 그들은 자기 자신이 전혀 내려지지 아니하고요, 돈에 대한 그들의 사랑이 전혀 내려져 있지 않습니다.

돈에 대한 집착이 전혀 내려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채찍을 들어 짐승 파는 자들, 돈 바꾸는 자들 쫓아 낼 때도 마찬가 지입니다.

여러분 그 당시만 해도 예수님이 십자가 못박히기 전이니까 아직 구약시대입니다.

예수님이 통해 구속을 이루시기 전이니까 당연히 짐승을 통해 제사를 드리는 것이 성경에 명령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이 채찍을 들어 그들을 쫓아내셨습니까?

제사 지내는 것이 잘 못 된 것이 아닙니다.

제사 지내는 것이 당연한 겁니다. 성경에 명령하는 바입니다.

근데 왜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어요?

또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짐승을 파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멀리서부터 와서 제사를 드리는데, 자기 올 때부터 짐승을 끌고 오지 못하거든 요.

그리고 오다 보면 살이 빠지고, 또 부상을 당하면 제물로 합당하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예루살렘에 와서 사야 했죠.

그러니까 필요한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돈을 하나님께 드리되 그 당시에 동전에는 시저의 형상이 들어 있어서, 형상이 없는 성전에서 쓰는 돈으로, 엽전으로 바꾸는 것이 필요해서 바꾸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근데 왜 예수님은 그 엽전을 바꾸는 것을 뒤집어 엎으셨습니까?

왜 짐승을 파는 것을 채찍을 들고 쫓아내셨습니까?

다 필요한 거라고 있는 거고, 성경에 명령된 바로 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원래 성전은 제사가 목적이 아니라, 제사도 하나님 명령을 따라 행하는, 예수님이 오실 십자가에 대한 예언으로써 행하게 하였으되, 성전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신앙에 대한 이해에서부터 그릇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하나님을 알기를 구하며, 하나님을 전존재로 사랑하기를 구하기 보다, 하 나님께 대한 의식을 잘 하는 그것이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친밀한 교재를 대신해 버 린 그릇된 신앙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행하되, 보십시오.

원래 그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입니다. 그래서 이방인을 위한 뜰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채찍을 들고 쫓아내시면서 “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이해할 수 있듯이, 그들이 아마 짐승을 팔 되 어디서 팔았어요?

이방인의 뜰에서 팔았던 것 같아요.

하나님의 관점이 가려져 있습니다.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관점이 가려 져서,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택함을 받았다는 그 선민의식이 가득한 가운데 이방인들을 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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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급하는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그런 자세 가운데 있었습니다.

실재로 그들이든지, 이방인이든지 똑같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저들이 다 구속 받아야 할 하나님 의 구속의 대상이었는데.

뿐만 아닙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채찍을 내 치면서 하시는 말씀이 ‘하나님의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 었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거기에 보면 돈의 결탁이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죠.

여러분 김포공항 내에 가시면 식당이 있는데 되게 비쌉니다. 다른데 보다는.

그래도 손님 많습니다.

그래서 거기 임대하려면 돈 많이 줘야 합니다.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왜 그런지 아세요? 독점이거든요. 독점이거든요.

여러분, 그 당시 사람들이 전국 아니면 세계에서 몰려와서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데, 이것은 반드시 있어야 할 부분입니다.

거기에 엄청난 돈이 오고 갔죠.

그래서 결탁이 있었습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예수님이 여기 말씀하신대로, 그들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종교적인 의식을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누구보다 철저히 했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삶에서는 자기 자신이 전혀 내려지지 않았고요, 돈에 대한 집착이 전혀 내려지지 않았습니 다.

이것은 전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만큼도!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는 다만 너희 속에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음을 알았다’고 말씀하 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관련이 있고요, 하나님 그분이 우리의 유일한 구세 주이며, 우리의 유일한 주인이시며, 우리의 생명 되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따르려거든”

이 말은 주님을 주로 삼고, 주님을 모든 것으로 사서, 주님이 목표와 목적 되시는 신앙의 본질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아까 말씀드린 대로, 가장 가까운 사람일지라도 미워하는 것만큼 하나님 우선적으로 사랑하고, 모 든 소유를 버리지 않으면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신 그것이 실질적으로 하나님을 전존재로 사랑하고 말씀하시는 바로 그 내용입니다.

시편18편1절에 보면 다윗이 이렇게 하나님께 고백합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 랑하나이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그런 뜻입니다. 우리는 이 러한 구절을 다 좋아합니다. 그리고 많은 성도들의 집에 가면 이 구절이 액자에 걸려 있습니다. 당 연히 이러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당연히 우리도 예수님이 하나님이 나의 힘이라 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다윗이 말한 이 말은 하나님 그분만이 나의 힘이 되 신 것을 말합니다.

저희가 처음 교회 개척할 때요. 복음 동에서 그 당시 개척하느라 살림이 넉넉지 못할 때입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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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니까 아주 오랜 초기죠. 하루는 제 아내가 시장에 가려고 하는데 호주머니에 천 원짜리 몇 개가 있더래요. 저희 식구가 아이 셋 저희 부부해서 다섯 식군데, 시장에 가려면 기본적인 반찬만 사더 라도 그래도 돈이 몇 만원 있어야 될 텐데 천 원짜리 몇 개 있으니까 그래서 교회에 앉아 있는데 힘이 빠지더래요. 그런데 그 때 하나님이 마음속에 그러시더래요. 또렷하게 “나만이 너의 힘이라 며” 그러니까 그걸 비추신거지요. 제 아내가 늘 고백하기를 “하나님! 하나님이 제 힘이십니다 주 님만이 저의 힘이십니다.”라고 고백해 왔는데 그 시점에 자기 마음속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돈 이 없기 때문에 힘이 빠진 것은 하나님만이 자신의 힘이 아니신 것을 보이신 거죠. 돈이 자기에게 힘을 주는 것임을 보이신 거죠. 그때에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나님 저를 용서해주세요.” 그때 딱 비춰지면서 중심에서 근본적인 전환과 회개가 있었고 그 다음부터는 돈이 많든지 적든지 힘이 빠지거나 힘이 생기는 일이 없다고 그래요.

우리는 다 하나님이 우리의 힘이라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백화점 갈 때에 천 원짜리 두개 들고 가면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말 걸까봐 움츠려지고 여러분의 호주머니에 10만 원짜리 수표 10장 가지고 백화점가면 아무사람이 말 안 해도 힘이 생긴다면 하나님이 여러분의 힘이 전혀 아닙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힘을 주고 있는 것은 돈입니다. 여러분이 보장성 노후보험을 들어놨기 때문에, 그 러니까 보험 들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는 그 얘기하는 건 아닙니다. 어떤 분을 그렇게 설교하지만 저는 그렇게 말한 건 아닙니다. 그런데 보장성 노후보험을 들어놨기 때문 에 여러분의 미래에 대해서 확신이 있다면 지금 여러분에게 확신을 주고 있는 분은 하나님이 전혀 아닙니다. 돈입니다. 여러분이 타고 다니는 차가 다른 사람보다 더 좋은 차이기 때문에 더 나쁜 차 를 타고 가는 사람이 옆에 갈 때 여러분 마음속에 자부심이 생긴다면 지금 그 자부심을 불어넣는 것이 하나님이 아닙니다. 돈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지 않은 모든 힘은 사탄에게서 나 온 겁니다. 그게 우상숭배입니다. 그게 영적인 간음입니다. 다윗이 말할 때 “나의 힘이 되신 여호 와여” 이 말은 자기가 자기와 함께 하는 군대도 의지하고 자기의 배경도 의지하고 세상적인 돈과 명예도 의지하면서 하나님 잘 믿기 때문에 그거 하나님이 나의 힘이라고 고백한 그런 내용이 아닙 니다. 다윗이 고백한 그의 내용은 사울이 온 나라를 동원해서 모든 군대와 모든 경찰력을 동원해서 그를 잡으려 할 때 천천만만이 그를 에워싸고 그를 죽이려할 때 그때에도 그에게 힘과 안식을 주는 분은 하나님 그분뿐이었기에 그는 여기에서 그렇게 고백하고 있는 겁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 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러분 우리가 오늘 1부 예배 시간에 이 부분이 나왔었습니다만은 역대상14장에 보면요. 이러한 다 윗의 신앙이 좀 나옵니다. 8절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아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함을 블레셋 사람이 듣고 다윗을 찾으러 다 올라오매 다윗이 듣고 방비하러 나갔으나 블레셋 사람이 이미 이르 러 르바임 골짜기를 침범하였는지라 다윗이 하나님께 물어 가로되 내가 블레셋 사람을 치러 올라가 리이까 주께서 저희를 내 손에 붙이시겠나이까”(8-10)

여러분! 다윗이 참 귀한 게 있어요. 많지만, 다윗은 어린아이 같은 신앙을 가졌어요. 그러니까 어 린아이 같은 신앙은 신앙의 본질에서 나온 겁니다. 그런데 어떤 어린아이 같은 신앙을 가졌는가 하 면 다윗은 자기의 자원을 의지하지 않았어요. 하나님만이 그의 힘이었어요. 다시 말하면 순간순간 그는 하나님의 자원으로만 살았어요. 무슨 말이냐고요. 여기에 보면 그러니까 한편으론 이런 부분 도 있습니다. 여러분, 다윗이 이새의 아들로서 이스라엘에서 아무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 목동으로 있을 때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어요. 다윗처럼 그런데 다윗은 그때에만 그렇게 한 게 아니고요.

그가 이스라엘 왕으로서 한 나라를 그의 손에 가지고 있을 때에도 그렇게 했어요. 한 나라를 그의 손에 가지고 있을 때···. 그의 한 마디 명령이면 수십만 혹은 수백만의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그때에도 그는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행했어요. 자기자원으로 살지 않았어요. 그 대표 적인 예가 여기 있는데요. 여기보시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블레셋 사람이 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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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엘로 쳐들어 온 겁니다. 그래서 이미 블레셋 사람들이 리바임 골짜기라는 곳까지 침범해 왔어요.

그런데 여기 다윗을 보세요. 이러한 상황이 닥쳤을 때 다윗은 항상 어린아이처럼 자기자원을 가지 고 살지 않았어요. 이게 하나님 나라는 어린아이와 같은 자라 그랬잖아요. 바로 이것을 말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자기자원을 의지하지 않았어요. 자기의 지혜와 자기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았어요.

하나님 그분만이 그의 힘이었기 때문에요. 그래서 다윗이 묻습니다. 뭐라고요? “하나님, 제가 치 러 올라갈까요? 말까요? 올라가면 저들을 저에게 붙이시렵니까?” 이 말은 무슨 말인지 아세요? 하 나님이 올라가지 말라면 안 올라 갈 참입니다. 여러분 그뿐만이 아니고요. 다윗이 왕 되기 전에 무 슨 일이 있었어요? 왕 되기 전에 그가 사울이 죽이려하니까 도망갔잖아요. 도망간 곳의 하나가 어 딘가 하면 블레셋이었죠. 적진으로 도망갔어요. 한 때는 미친척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고요. 어떤 때는 자기가 도망간 블레셋족장이 그를 잘 봐줘서 그 밑에서 이렇게 살아가는 거죠. 그런데 이 블 레셋족장들이 힘을 합쳐서 사울과 전쟁을 치르게 됐어요. 이때 자기를 잘 돌봐주던 블레셋족장이 같이 데리고 나갔어요. 그랬더니 다른 족장들이 안 받아들이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에 소 문이 있기를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그랬는데 전쟁하다가 이 다윗이 딱 마음이 돌변해 가지고 양쪽에서 협공하면 우리는 몰살당하는 거 아니냐?” 그러니까 못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러 니까 다른 족장들이 그러니까 다윗을 잘 봐주던 족장이 돌려보냅니다. 다윗이 와 봤더니 그동안에 무슨 일이 있었냐 하면 자기와 자기 부하들이 전쟁에 나간 사이에 아내들과 얘들은 놓고 가잖아요.

다른 적군이 쳐들어 와 가지고 아내들과 얘들과 모든 짐승들을 다 노략질해 가버리고 쑥대밭을 만 들어 놓은 거예요. 이렇게 되고 보니까 자기 따르던 부하들 까지도 한 500됐는데 여태까지 대왕님 주인님하고 따르던 그들이 돌을 들어서 다윗을 죽이려 그래요. 그 상황에서 다윗은 어떻게 한 줄 아세요? 우리 같으면 돌아볼 것도 없어요. 당연히 쫓아가야죠. 한시라도 빨리···. 그런데 다윗은 그 상황에서도요. 하나님께 묻습니다. “하나님, 올라갈까요? 말까요?” 하나님이 가지 말 라 그러면 안 갈 참입니다. 여러분 이게 아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겁니다. 다윗에게는 요. 자기 아 내, 자식보다···. 여러분, 다윗이 자기 자식 안 사랑했다고 생각하세요? 자기가 밧세바 를 범해서 낳은 첫 아이 났을 때 그 아이가 위독할 때 먹지도 아니하고 금식하면서 하나님 앞에 애 통하는 것 보셨어요? 자기 아이 안 사랑했다고 생각하세요? 자기 아내 안 사랑했다고 생각하십니 까? 아니 그 양들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고 생각하세요? 자기 목숨이 지금 경각에 달려 있는데 안 소중하다고 생각합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이게 다윗입니다. 그는 그 모든 것보다 하나님의 뜻이 더 중요했어요.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뜻을 절대적으로 자동적으로 간주하지 않았습니다. 이게 중 요한 것 같더라구요. 하나님의 뜻을 자동적으로 간주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린아이와 같아요. 자 기 자원으로 살지 않아요. 하나님의 자원으로 살아요. 그래서 묻는 겁니다. 올라 갈까요 말까요?

가지 말라면 안 갈 참입니다. 이게 다윗입니다. 그 속에 하나님을 경외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 랑함이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그의 힘이 되십니다. 하나님만이 그의 자원이 되십니다. 하나님만이 그의 길을 지도자하는 자 되십니다. 하나님만이 그의 삶의 목표입니다. 하나님만이 그의 삶의 모든 것입니다. 이게 주님을 사랑하는 겁니다. 여기 이렇게 얘기했어요. 그랬더니 하나님이 올라가라고 그러시네요. 올라가서 붙이실거라고. 그대로 해서 상대방을 대패시켰습니다. 하나님 능력으로 하나 님의 도우심을 따라서. 그랬더니 보실래요? 13절에 보면 “블레셋 사람이 다시 골짜기를 침범한지 라 다윗이 떠 하나님께 묻자온대” 여기 보시면, 이렇게 블레셋이 대패하고 도망갔는데 머지않아 다시 쳐들어 왔어요. 우리 생각이 이럴 수 있어요. 바로 얼마 전에 블레셋이 쳐들어 와서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나가라고 해서 싸워서 이겼다 그러니 당연히 쫓아가는게 당연하겠죠. 그런데 이번에도 다윗은 자기 자원을 의지하지 않아요. 이게 다윗에게 귀한 겁니다. 자기 자원을 의지하지 않아요. 방법을 의지하지 않아요. 어제의 은혜를 의지하지 않아요. 다시 주 앞에 묻습니다. 주님!

제가 갈까요 말까요? 여기 냉용을 보시면 사실, 묻지 않고 갔다면 대패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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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더니 뭐라 말씀하시냐면 앞으로 가지 말고 뒤로 돌아가라고 했어요. 앞으로 갔더라면 대패했을 겁니다. 왜냐면 저들이 한 번 패하고 난 후에 대비하고 왔으니까. 무슨 말씀이냐구요? 다윗의 삶에 는 하나님 그분만이 유일한 구세주였구요 하나님 그분만이 유일한 주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유일 한 주인이 된다는 말은 그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도 자기 가족도 자기 돈도 자기 명예도 모든 것이 다 내려져 있었습니다. 그것이 목동 시절 뿐 아니라 피해 다닐 때에도 왕이 되었을 때에도.. 그러 니까 하나님이 힘이신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똑같은 구절을 인용하면서도 그리고 주일에 교회 와 서 예배를 드릴는지는 몰라도 바리새인처럼(바리새인들은 우리와 비교도 안될 만큼 더 잘했다니까 요. 예배드리는 것이든 헌금하는 것이든 봉사든 기도하는 것이든 우리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잘했 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삶 속에 하나님은 주인이 아니었습니다. 본인들은 주인이라고 했죠. 왜요?

하나님이 유일한 주인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자신도 내려지지 않았고 돈도 내려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안 사랑한다는 겁니다. 실제로 우리가요 자신이 내려지지 않으면 사람들 앞에 진실로 하나 님을 경외함으로 이렇게 다윗처럼 하나님의 뜻이 가장 소중해서 그 무엇보다도 그 뜻에 순종함으로 엎드릴 수 없구요, 절대 없드릴 수 없습니다. 상황이 편할 때는 몰라도. 그리고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의 진정한 주인이 아니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온전히 순종할 수 없습니다. 선별적으로 순종할 따름이죠.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대로. 저는 아까 경배와 찬양 하면서 오늘 설교를 놓고(왜냐면 제 가 이 설교를 여러 번 했기 때문에, 이 설교를 수십 번 들은 사람도 있잖아요), 하나님께서 이 설 교를 하시기를 원하시는 것 같더라구요. 그런데 하나님! 오늘 이 말씀을 가지고 무엇을 어떻게 전 해야 합니까? 이렇게 기도가 애통하게 나오더라구요. 기도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비 추시냐 하면 마태복음 23장 그 부분을 비추시는 것 같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찬양하다 말고 23장을 봤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아까 살펴본 대로 바리새인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했지만 전혀 자시;s 이 내려지지 않는 모습,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했지만 전혀 돈에 대한 집착이 내려지지 않은 모습.

그렇기에 그들이 외부적으로는 신앙의 모양은 있었으나, 종교적으로는 누구보다 뛰어난 자였을지는 모르지만 전혀 실제로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그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여지면서 왜 예수님이 그 렇게 말씀하실 수밖에 없었는가? 그 말씀이 같이 연결되면서요 너무 너무 하나님 앞에 회개가 나오 는게 오늘날 목회자를 포함해서 오늘날 성도들의 모습이 어떻다고 생각하시나요 여러분? 저와 여러 분의 모습은? 너무 너무 애통하는 회개가 나오더라구요.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전혀 사랑하지 않는 거죠. 우리가 성경에서 말하는 의미에서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면 우 리의 삶은 오늘날 교회의 삶은 절대로 이렇게 되는 것이 불가능한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 나님이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가 되시며 유일한 주인이 되시며 생명이 되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 서 핸리 블래커비 목사님도 그렇게 얘기하시잖아요.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을 위해서 ‘본질’을 네 가지로 말하는데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다 걸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존재를 다 걸 지 않으면 하나님을 사랑하는게 아니에요. 둘째는 하나님의 통치권에 완전히 순복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순복하되 선별적으로 순복하면 전혀 순복한게 아니에요. 온전히 순복하지 않으면 순복한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유익이 있을 때만 순복하는 것은 아무리 99% 순복하고 한 번 우리에게 유익이 안 되니까 순복하지 않아도 그것은 실제로 순복한게 아니죠. 우리가 주인이죠.

마음의 자세를 말하는 겁니다. 이 얘기는 ‘100% 순종해야 하나님이 주인이시지, 한 번 이라도 순 종하지 않으면 그건 순종하지 않는거야’ 그 얘기가 아닙니다. 그런 완벽한 사람은 세상에 한 사람 도 없죠. 우리는 자라나죠. 제 얘기는 뭐냐 하면, 하나님께 대한 순복이 진정한 순복이 되려면 선 별적인 순복의 자세를 가지면 그건 아무리 많이 해도 순복이 아닙니다. 온전히 순복되어지는 것만 이 순복인 것입니다. 그 얘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실질적이고 개인적으로 경험해야 한다. 우 리는 하나님을 완전히 의지해야 한다.’ 의지하되 온전히 의지해야 되죠. 아까 다윗의 경우를 보더 라도. 이길수 목사님 얘기를 제가 자주 합니다. 그분이 화순에서 목회할 때, 원래 전도사(감리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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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있다가 안수받으러 거기 들어갔어요. 조그만 시골 마을, 산중턱이 있어서요 교회에서 소리를 질 러도 마을에서 잘 안 들릴 만큼 떨어져 있어요. 그리고 앞에 숲이 우거질 때면 보이지도 않아요.

그러니까 목사님 집회 가면 사모님 혼자 애들 둘 데리고 있으면 얼마나 불안합니까? 밤중에는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평상복 입고 문 꼭꼭 잠그고 자요. 여자로서 얼마나 불안해요. 누가와도 도둑이 들어도 모르게 되어있는데. 잠도 깊이 못 자고 그런 곳이에요. 아이들이 유치원 가려해도 갈 수 없 어요. 유치원이 있어야죠 그 시골 동네에서. 사모님은 서울에서 떠나본 적이 없는 분인데 목회 때 문에 거기 가 있는데, 애들이 학교를 제대로 다닙니까 뭐 과자 하나를 동네에서 제대로 사먹을 수 있습니까 문화생활하고는 완전히 동떨어진 그런 생활이죠.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다뤄가시는데, 신 앙의 본질을 보게 하시고.. 그분에게 다루신게 뭐냐 하면, 이제는 친척들 만나면 뭐라고 하냐 하면 목사가 실력이 없으니까 그 시골구석에 박혀있는 것처럼 이제는 안수도 받았고 좀 됐으니까 이제 도시로 좀 나와야 되지 않겠느냐 자꾸 이렇게 얘기하는 거죠. 실력이 없어서 그런 것처럼 말을 그 렇게 하는 거예요. 자기도 3년 있어야 안수 받으니까 3년 있었지만 3년만에 나오면 너무 염치 없으 니까 4년만 있다가 나오려고 했는데 나오려고 하니까 문제는 뭐냐 하면 여기저기서 초빙이 오는데, 옛날 같으면 자기가 생각해서 좋으면 가겠는데 이제 하나님의 뜻을 묻고자 하고 그런데 하나님께 물으면 대답을 안 하시는 거예요. 대답을 하셔야 나올텐데. 그러면서 다루어 가시는 거죠. 그분 표 현에 의하면 하나님은 곤란하시면 대답 안 하신다고 하는데 그런 건 아니죠. 우리를 다루시는 것입 니다. 응답을 안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보다 내려 놓습니다. 시간이 또 갑 니다. 또 초청이 옵니다. 또 하나님의 뜻인가 묻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안하십니다. 시간이 자꾸 갑니다. 시골에 계속 있습니다.

그 때에 한 번은 대학로에서 왔습니다. 그 분은 원래 젊은이들 목회를 하기 원했습니다. 대학부를 맡아 달라는 것입니다. 너무 너무 잘 됐습니다. 그래서 그 때는 하나님께 묻지도 않았답니다. 물으 면 대답을 안 하실 것 같아서. 그래서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 전화가 왔는데 계획이 바뀌어서 다음에 해야 할 것 같고, 죄송하다고 하더랍니 다.

그래서 하나님께 잘 못했다고 회개했는데 며칠 후에 그곳에서 또 전화가 왔습니다. 그 때는 안 가 겠다고 했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다루어 가시는가 하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온전히 승복한 것을 보이 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모님이 그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평생 여기 있으라고 하면 있겠습니다. 그런 데 지금 평생 있으라는 말씀은 하지 마세요”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느냐? 우리가 하나님을 전존재로 사랑 한다는 것은 전존재를 다해 사 랑한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권에 온전히 승복하는 것과 같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존재를 다해 승복한다고 말하면서 통치권에 온전히 승복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실 질적인 우리의 주인이 아닙니다. 내가 주인입니다. 돈이 나의 힘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생각 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하나님이 생명이십니다. “야, 그러면 나는 뭐 냐? 하나님만 있고”

그것이 어리석은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하나님 나라는 가장 값진 보화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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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보니까 엄청난 양의 보물이 뭍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에게 와서

‘땅을 팔겠냐’고 하니까 ‘판다’는 것입니다. ‘얼마나냐’고 했더니 ‘당신 있는 만큼만 내라

“고 합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길을 가다가 넘어져서 화가나서 욕을 했는데 보니까 빤짝빤짝 빛나는 것이 있어서 보니까 엄청난 다이아몬드 광석이 있다고 합시다. 알아보니 값으로 따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인 에게 ‘팔거냐’고 했더니 ‘판다’ 고 합니다. ‘얼마냐’ 고 했더니 ‘당신 가진 것만 다 내라’

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집이 안팔려서 난리 날 것입니다. 여기 저기 부동산에 집을 내 놓고 난리를 칠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나님을 그렇게 전존재로 사랑하라는 것은 그 사랑의 관계에서만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가 열릴 수 있는 것입니다.

부부간에도 남편이 아내도 사랑하고, 다른 여자도 사랑하면 아무리 아내를 사랑한다고 해도 실재는 아내를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그 상황에서는 친밀한 교제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눠진 마음이 우상 숭배요, 탐심이 우상 숭배라고 말하고 있듯이 하나님을 전존재로 사랑 하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먼저 전존재로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친밀한 교 제를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이 독생자를 하나님을 사기 위해서 지불한 댓가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하나님은 그 댓가 하고는 비교도 안될만큼 소중한 분입니다. 보화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내 인생의 목표와 계획, 내 가족들을 위한 미래의 인생, 이것을 꼭 붙들고, 때로 는 신앙생활에도 하나님이 이것을 채워주는 수단으로서 교회 오면 마음도 편하고, 구원도 받는다니 까, 가끔 하나님의 역사도 경험하고, 하나님 도움도 받을 수 있느니까 이것이 내 목표가 되어서, 하나님께서는 도움을 주니까 그렇게 신앙생활을 할지 몰라도 또는 그렇게 하면서 나름대로 이따금 식 오는 찡한 마음의 평안함, 또는 안식이나, 가끔 매달려서 기도했더니 채워주는 도움을 구할 수 는 있을지 몰라도 그 분은 하나님을 전혀 경험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생명은 전혀 경험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삶 하고, 내 모든 것으로 주님을 사서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주님의 온전한 통치 가운데 살아가는 그 삶은 비교 자체가 무색할 만큼 그 삶은 하나님의 생명이 넘칩니다.

베드로가 어부였습니다. 자식 새끼 다 있었습니다. 아내도 있고, 배도 있었으니까 가난한 사람 아 니었습니다. 거기서 자식 새끼들 하고 낚아서 잘 먹을 수 있었습니다.

어떤 날은 많이 잡히면 ‘할렐루야 아멘’ 하면서 하나님께 팁을 더 많이 드렸고, 옆에 사람에게 고기도 나눠 주고, 덜 잡히면 코가 쑥 빠져서 ‘에이, 오늘 망쳤다’ 하면서 왔을지 몰라도 나름대 로 잘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이 그를 초청하실 때 ‘이 모든 것으로 주님을 사라’고 초청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가 모든 것으로 주님을 샀습니다. 그런 사도 베드로의 삶은 이 삶 하고는 비교도 안될만 큼 소중한 삶이었습니다.

30배 정도가 아니라 60배, 100배 보다 소중한 삶이었습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생명과 은혜가 넘쳤고, 삶의 기쁨과 만족이 있었고, 이 땅에 존재하게 된 이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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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고, 목적이 있었고,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신 의도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요즘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인 [목적이 이끄는 삶]이 있습니다.

거기 보면 무엇부터 시작하느냐? “여러분의 인생을 여러분 자신부터 시작하면 절대로 생명과 평안 과 안식도 경험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목적을 가지고 여러분을 창조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하나님부터 시작해야 하나님의 의도하신 목적을 경험 할 수 있고, 하나님이 준비하신 생명을 경험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날 너무 많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자기 자신을 전혀 내려 놓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생명을 경험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주인이라고 말하지만 실재로는 자신을 전혀 내려 놓지 않고, 실재로는 돈에 대한 집착을 내려 놓지 않고, 실재로는 자기 가족에 대한 집착을 내려 놓지 않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세 가지 다 가장 소중한 부분들입니다. 다른 많은 것들을 다 포함하지만 가장 중요 한 것을 언급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결론적으로 한 마디만 말하면 하나님을 전혀 사랑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명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주님의 영광을 더 보게 해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것으로 주님을 사게 되기를, 다시 말해서 주님이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요, 유 일한 주인이요, 생명 되심을 다윗처럼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을 우리의 전존재로 사랑하는 그런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이 예비하신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시기까지 사랑하시면서 예비하 신 그 놀라운 생명, 승리, 그 은혜가 저와 여러분의 삶속에 넘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 니다.

우리가 ‘주 알기 원해요’ 찬양을 했습니다.

그것이 무슨 찬양인지 아십니까? 이렇게 주님을 사랑함으로 주 알기를 원하게 될 때 그것이 ‘주 알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보는 만큼 주님을 사랑하게 되어 있고, 이러한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기를 원하는 것이 같이 가는 것, 이것이 주님을 알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집착과 자신에 대한 집착이 전혀 내려지지 않은 채 주님을 알기 원하는 것은 후회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 그리로 우리가 인도 되기를 소원합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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