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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것을 찬찬히 진지하게 돌아보게 하는 박동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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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Vol. 35, No. 2, pp.275-282

<서평>

당연한 것을 찬찬히 진지하게 돌아보게 하는 박동섭의『비고츠키 , 불협화음의 미학』

유 현 주(태안초등학교 교사)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 지 벌써 23년이 되었다. 교사가 전문적인 직업이라는데 스무 해를 넘게 이 일을 해도 나를 비롯한 많은 교사들은 해가 갈수록 전문성을 갖추었다는 생각보다는 점점 더 가르치는 일을 어렵다고 느끼며 ‘교사로서 전문성을 갖추고 있는가?’라는 물음에 자신 이 없다고 토로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교사는 여러 가지 직업이 혼합된 종합 예술인이다. 때로 는 경찰, 판사, 간호사, 성직자 등 많은 직업군의 역할을 수행하며 직업군 간의 역할 상충에서 오는 갈등이 교사가 전문적이지 않다는 생각을 더욱 깊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지난해부터 교 사 자발적 모임인 초중고 교사들로 구성된 ‘이음학교’를 스스로 찾아가 전문가 초빙 강연과 교 육 도서를 읽고 토론을 시작하게 되었다. <비고츠키, 불협화음의 미학>은 앞 몇 페이지를 읽 고 내가 마치 어린아이가 맛있는 간식을 아껴 먹고 싶듯 야금야금 아껴서 읽고 싶었지만 쉽게 술술 읽혀 그것이 걱정스러웠던 책이었다. 책의 저자인 박동섭은 사실 내가 이전부터 그의 스 승 우치다 타츠루의 번역 책을 읽을 때부터 요즘 시대 상황에 맞게 교육 현상을 읽기 쉽게 글 을 쓰는 작가라 마음에 들어 했었다. 박동섭이 번역한 <교사를 춤추게 하라>, <하류 지향>,

<스승은 있다> 모두 모든 교사가 쉽게 읽을 수 있고 진정 고민해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와 함 께 자신감도 가질 수 있는 책이라 함께 추천하고 싶다.

나에게 비고츠키는 책장에 두꺼운 빨간색 양장본 다섯 권이 원서로 꽂혀 있는 다가가기 어 려운 먼 존재였지만 박동섭이 이해하기 쉽게 쓴 <비고츠키, 불협화음의 미학>을 통해 나는 비 고츠키가 더 궁금해졌고, 곧 그에 관한 책 <사고와 언어>, <도구와 기호>, <심리학적 위기>

도 도전해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비고츠키하면 우리가 보통 떠올리는 ‘사회적 구성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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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 ‘심리’, ‘언어’, ‘매개’ 등과 같은 낱말들은 추상적이기 그지없다. 나는 이것을 구체적으 로 이해하고 있는가? 아니다. 박동섭 또한 비고츠키의 문언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고 말한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좀 위안이 된다. 그는 독자가 텍스트의 의미를 모른다는 것은 대부분 독자에게 이해되지 않도록 씌여 졌기 때문이라며 일상적인 생활 속 소설과 영화와 교육 의 예를 들어 독자를 배려한 글쓰기를 실천했다. 클래식의 대중화를 위한 노력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박동섭의 글이 내가 생각했던 비고츠키와 다소 다르다면 독자들은 비고 츠키에 대한 다양한 비교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고 생각해 보기 보란다. 박동섭은 ‘사회 적 구성주의’를 검색해 보고, 우리 사회에서 교수․학습 방법 이론, 수업 기법으로 정착한 것에 대해 학회와 강연회에서 인간 철학으로서 사회적 구성주의를 설명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러 나 단 한 번도 사회적 구성주의 설명을 성공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만큼 비고츠키에 대한 해 석은 여러 학자들에 의해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고, 잘못 해석 되어지고도 있어 학계에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는 것을 미리 당부하고 싶다.

여러 해 동안 교사 생활을 하면서 나는 일반교육과 특수교육을 분리하여 생각해 본 적이 없 다. 특히나 일반교사로서 특수교육을 전공하고서는 그 마음이 더 굳건해졌다. 무엇이 다른가?

나는 모르겠다. 일반교실에 있는 학생의 특성들이 모두 다 다르듯 특수교육 지원 대상 학생의 특성은 그것처럼 다를 뿐인 것이다. 언젠가부터 문득, 사람들은 왜 강의실에서 한 명의 교수자 가 한 말을 달리 해석하여 본인이 이해한 것이 맞다고 하는 상황이 벌어지는지, 전달하는 교수 자의 책임인 것인지,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잘 전달해야 할지 꽤 고민이 되었었다. 요즘은 각자 의 경험치에서 바라보다 보니 그런 면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한다. 그래서인지 이 책 <비 고츠키, 불협화음의 미학>을 읽는 동안 많은 실례들이 나는 특수교육이라 부르는 지원이 좀 더 필요한 교육에 관한 이야기로 보인다. 그러나 나는 일반교사, 특수교사 그리고 교육을 전공 하는 모든 학생에게 필독서로 꼭 추천하고 싶다.

<비고츠키, 불협화음의 미학>은 모두 네 개로 구성되어 있다. 각 파트를 간단히 말하면 다 음과 같다. 그 중 Part1은 ‘비고츠키 만나기’로 Part2, Part3, Part4에서 나누어 설명하려는 내용이 간략히 담겨있다. Part1에서 비고츠키 이론의 핵심은 ‘마음’이며, ‘인간의 마음은 도구로 매개 된다.’는 것을 설명한다. 그 첫 부분에 나오는 다음의 이야기는 나를 한동안 충격에 빠뜨린 소 설의 줄거리이다.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영국의 소설가이자 비평가 웰즈 H. G. Wells가 1911년에 발표한 소설 <눈먼 자들의 나라>는 안데스산맥의 험난한 골짜기에 있는 세상과 오래전부터 단절되었으나 부족함 없이 살아오던 나 라에 어느 날 까닭 모를 병으로 사람들은 서서히 눈이 멀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눈이 멀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다 아예 보지 못하는 상태로 세상에 태어나게 되고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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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은 점점 무감각해진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눈먼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많은 것을 잊고, 많은 것을 배워서 보지 못하는 사실 하나만 빼고는 모든 것에 불편함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누네즈라는 주인공은 산지를 답사하다 길을 잃는 바람에 눈먼 자들의 나라로 들어오게 된 다. 누네즈는 이들이 앞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눈먼 자들의 나라에서 눈이 하나 있는 사림이 왕이 된다는 말을 떠올리며 자신이 이 나라의 왕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 나 누네즈의 생각은 여지없이 깨진다. ‘눈먼 자’가 ‘보이는 사람’보다 길을 더 잘 인도하고 자 신을 무능력한 사람으로 취급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게 된다. 누네즈는 눈먼 자들의 나라 여 인과 사랑에 빠져 청혼을 하게 되는데 그들은 결혼을 허락하되 누네즈의 눈을 도려내야만 그가 살았던 세계(볼 수 있는 세계)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병을 완전히 고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결 국, 누네즈는 필사적으로 도망치게 된다.

누네즈의 생리학적 사실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증해 주지 못한다는 내용 이 담겨있는 소설이다. 우리가 그토록 말했던 ‘장애’는 도대체 어디서, 누구의 기준으로 이루어 졌던 것일까? 장애는 단지 불편할 뿐이라는 이야기는 어떤 사회에서 통용되는 말일까? 현재 우 리가 사는 시대가 그렇다면 왜 <눈먼 자들의 나라>처럼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도록 하지 못하 는 것일까? 많은 생각이 내 머릿속을 두들기며 내 마음이 덩달아 불편해졌다. 여러분도 한 번 생각해 보기 바란다. 박동섭은 우리가 ‘장애’에 대해 규정짓고 있는 부분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현대사회는 장애를 ‘결핍’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장애인의 ‘적응’을 강요하고 있다. 장 애의 정의 규정에 의학 모델만을 들이대고 장애를 개인 차원의 불행으로 규정하는 사회에서

‘장애는 사회․문화적으로 만들어지는 하나의 사회적인 가공 구조’라고 말이다.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해마다 장애인의 날을 맞아 ‘장애 이해 교육’을 특수교사든 일반교사든 흥미 있는 주제와 잘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을 보여주곤 한다. 그때마다 나는 학생들에게 묻는다.

“선생님은, 안경을 써야 잘 보여요. 안경이 없으면 잘 볼 수가 없어요. 그러면 선생님님도 장애 인인가요?” 나의 물음에 아이들은 “아이요.”라고 말하면서도 눈빛이 흔들린다. 안경이라는 인공 물로 인해 나는 ‘장애인’이라는 꼬리표가 붙지 않는다. 지각하지 못하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는 않는다고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라는 주체의 존재는 도구의 영향을 받을 뿐만 아니라 관계 망이나 특정 활동 속에서 ‘나’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도구의 영향을 받은 나는 수업 시간에 질문하는 활동 행위를 통해서 ‘교사’라는 ‘나’가 되기 도 하고 커피숍에서 커피를 구입하는 활동 행위를 통해 ‘고객’이라는 ‘나’가 되기도 했다. 비고 츠키의 인간관처럼 활동하는 인간으로서 나는 활동이 바뀌면서 ‘나’의 모습도 바뀌고 있었다.

‘장애인’이 아닌 나, ‘교사’인 나, ‘고객’인 나. 활동을 통한 나는 그때마다 어떤 의식을 갖고 있 는가? 같은 의식을 갖고 있는가? 다른 의식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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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다 타츠루의 <하류지향>에서는 ‘활동이 의식을 만들어 낸다.’의 명제가 잘 나타나고 있 다. 내가 생각하기에 요즘 아이들은 내가 학교 다닐 때보다도 더 많은 공부를 하고 있다. 공부 하는 시간도 많아진 것 같고, 수면의 시간이 다른 나라에 비해 부족하다는 통계까지 나왔다. 그 러나 사회 일각에서는 학생들의 학력이 저하되었다는 이야기가 빈번히 들리고 있고, 예전처럼 공부를 하지 않는 것 같다. 왜일까? 우치다 타츠루는 요즘 아이들이 공부를 하지 않는 것은 그 들이 소비 주체로 등장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소비 주체인 아이들은 ‘이것이 무엇에 도움이 되는지’를 묻는다. 마치 ‘수학이나 과학을 배우는 데 무슨 의미가 있나요?’라고 묻는 것처럼. 나 도 초등학교 고학년을 지도할 때, ‘왜 공부를 해야 하나요?’라는 질문을 받았었다. 그때마다 학 생들을 설득하기 위해 노력했고 교사는 꼭 이래야만 하는지 이상한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대 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는 학생들이 내는 입학금이 아깝지 않도록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이 무거운 책임감으로 오기도 했다. 심지어 교육도 ‘서비스’라는 어느 교장선생님의 말씀은 서글프 기까지 했다. 정말, 교사는 어떻게 답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우치다 타츠루는 어려서부터 소비 주체로서의 활동만 했지 생산자로서의 활동이 부족한 학생들은 판매자와 구매자라는 의식의 관 계에서 상품의 유용성과 의의에 대한 설명을 듣지 못한다면 모두 자신에게 무가치한 것이 되어 공부를 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나는 종종 이런 질문을 한다. ‘의식이 활동을 지배하는가?, 활 동이 의식을 지배하는가?’ 여러분도 생각해 보기 바란다.

Part2는 ‘비고츠키와 친해지기’로 박동섭은 ‘인식의 사회적 구성’이라는 용어를 중요하게 말 하고 있다. 개인의 인지(인식)는 홀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 도구와 같은 사회․역사적 인공물과 인지가 발생하는 상황이 함께 어우러진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 예로 ‘사탕을 누군가 와 똑같이 나누기’ 위한 ‘숫자 세기’와 같은 ‘인지’는 상대방과 공정하게 나누기 위해 상대방이 있어야 성립하고 숫자를 세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상대방에게 철저히 의존하는 ‘협동 작업’을 하는 사회적 유의미성이 배경이 되고 있다는 예를 보여준다.

일상에서 나는 교사라는 직업 때문인지는 몰라도 항상 교육에 관한 내용이 그냥 지나쳐지지 않는다. 비고츠키의 다른 책 <사회 속의 마음 Mind in Society(특정한 마을에 살고 있는 주민)>

에 나타난 명제도 매우 인상 깊었다. 능숙한 운전 실력을 갖추었지만 언제나 위험한 상황을 경 험하고 나면, ‘그래 조심해야지!’라는 마음을 먹듯 어른이 만들어 낸 일상 속에서 아이의 낯섦 과 어른의 혼란스러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서로의 낯섦이 동시에 공존하는 학교에서 우 리는 인간적인 모습을 탐구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다음은 수학 문장제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이다. 어른과 아이의 낯섦에 동시에 공존하는 상황 에서 서로 언어라는 도구로 서로가 사는 특정 마을에서 다가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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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 성준이는 사탕을 세 개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엄마한테 몇 개인지는 모르지 만, 사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사탕을 다섯 개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 엄 마한테 받은 사탕은 몇 개일까요?

아이 :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음..., 나는 엄마한테 사탕을 받은 적이 없는데!

나 : (웃으면서) 아, 그냥 받았다고 생각하고 해 보는 거야. (다시 질문을 반복한다.) 아이 : (계속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나 : 무엇을 잘 모르겠니?

아이 :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진지한 표정으로) 엄마가 나한테 줘 놓고 왜 몇 개 주 었는지 모른다는 거지?

나 : 그건 말이지. 준아, 그건..., 이건 산수(뭔가 생각난 듯 급히 말을 끊으며) 실은 엄 마가 준이가 사탕을 떨어뜨리지 말라고 종이에 싸서 주었기 때문에 사탕이 보이 지 않아서 몰랐던 거야.

아이 : (웃고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그럼 당연히 두 개지 뭐!

특정한 마을(학교)의 주민(학생 혹은 교실)이 된 아이들은 비현실적인 내용에는 관심을 가지 지 않고, 기호와 숫자로 움직이는 세계에서 자동으로 문제를 풀게 된다고 한다.

가령, “몸무게가 6킬로그램인 6학년 학생이 10명 있으면 전부 몇 킬로그램일까요?”

라는 질문에 아직 교실인이 되지 않은 아이들은 “6학년이나 되었는데 몸무게가 6킬로 그램 밖에 안 나가? 그것도 10명씩이나. 그 아이들을 만나고 싶은데”라는 반응을 보이 지만 교실인이 된 학생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처음부터 아이들이 특정 마을의 주민이었다고 생각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전에 부족 하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우리는 처음부터 ‘장애’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서 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보통’이라는 암묵적 전제가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지는 않은지.

Part3는 ‘비고츠키 풀기’로 우리가 추구하는 ‘학습 전이learning transfer’는 학교 수업에서 배운 지식이 실생활에 적용되고 있는지를 통해 학교 교육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반성해 보 는 기회를 주고 있다. 다음은 이 책에서 예를 든 심리학 실험실에서 제시한 장면이다. 여러분들 은 학습 상황과 수학적 계산 상황이 다르니까 라고 쉽게 생각하겠지만 정말 우리는 학습 상황 에서 이와 같은 다름을 지나치게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마침 특매로 두 가지 커피를 판매하고 있습니다. 커피 A는 260g에 8,980원, 커피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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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180g에 6,980원. 어느 커피를 구입하는 것이 이익일까요? 그리고 왜 그 커피를 선택 하게 되었는지 이유를 구체적으로 말해주세요.” 교실에서 배운대로라면 정확한 수학적 계산에 따라 이익이 되는 커피 A를 살 것이고, 연산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겠지만, 집에서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 나 혼자이고, 용돈을 받아 생활하는 입장이고, 유통기한이 지나버리면 버릴까 봐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후자를 선택할 것이다. (중략) 일상의 복잡성과 개별성을 무시하는 것은 아닌지. 학습과 상황은 분리되었을 때보다 상황 안에서 잘 이루어진다. 실제 학교에서 논리적으로 사고하고 표현하는 문제를 잘 해결하지 못하는 아동이라도 친숙한 실생활 문제에 직면했을 때는 문제를 효과적으로 파악하고 자신의 의견을 논리적으로 표현하며 해결 방법을 찾는 것을 볼 수 있다.

비고츠키를 이해하려 하다 보면 끊임없는 질문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 이 학습자에게 유의미하기 위해서는 실제적인 과제를 가지고 학습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 면 되는가? 학습자에게 유의미한 것은 누가 정할 것인가? 등등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이 생 기겠지만 그래도 당연시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싶다.

마지막 Part4 ‘비고츠키의 변주곡들’에서는 실험실과 일상의 생태학적 적소에서 우리의 행위 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다양한 연구 사례를 보여주며, 유능함과 무능함을 어떤 기준에서 바 라볼 것인지, 공동체 속에서의 실천적 행위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은 어떠했는지를 반성하게 해 준다. 우리는 이 파트를 통해 교실과 사회 속의 불협화음을 이해할 수 있다. 흥미로운 연구 예시들이 많지만 내가 수년 전 대학원 시절에 읽었던 논문의 내용이 나와 예전의 추억을 생각 게 함과 동시에 그때 받은 충격과 나의 교육적 노력은 과연 최선이었는가를 반성하게 한 후쿠 이 특수학교에 다니는 ‘마리’라는 중복 장애아의 특수교육 실천 기록 다큐멘터리 이야기인 <마 리의 요리 만들기> 일부를 소개하고자 한다.

야마시타선생님은 마리와 함께 누워서 책을 읽어 주는데 마리가 한 번씩 미미한 표 정으로 반응한다. 아무래도 마리는 ‘요리책’을 좋아하는 것 같다. 그래서 읽다 보니 실 제로 요리를 만들고 싶어졌다. 자, 그러면 요리를 만들어 보자 하는 이야기다. 일반적 인 특수교육에서는 개개의 장애아에게 결여되어 있는 능력을 대상으로 훈련 시켜서 그들을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장애아의 능력 결여가 초 점의 대상이 되고 목표가 된다. 그러나 이 2시간짜리 교육 실천 기록 영상에서는 훈련 을 통해 능력을 향상 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하고 싶은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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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면 할 수 있을까?”

“이렇게 하면 할 수 있을 것 같아.”

“자, 그럼 그것을 먼저 시작해 볼까?”

요리 만들기 모든 과정에서 마리는 자신의 의견을 표명하지만 손발을 움직인 사람 은 야마시타 선생님과 친구들이다. 우리는 어떤 시각으로 마리가 학습을 했느냐, 안 했느냐를 논할 것인가?

<마리의 요리 만들기> 또한 읽는 독자의 경험에 따라 다양한 의견이 있겠지만 우선 나는 내가 알고 있던 학습의 기준부터 다시 생각해 보고 싶어졌고, ‘장애’ 학생을 가르치는 목표 설 정이 ‘결핍’을 분석한 데서 시작하지 않고, 아이가 하고 싶은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충 격으로 다가왔었다. 교실이라는 곳에서 개인은 언제나 능력과 지식을 누군가에게 평가받아 왔 지만, 특별한 이유가 없는 요리처럼 무엇을 만드는 것이 주된 목적이 되어 서로 돕고 협력한다 면 ‘유능함’과 ‘무능함’도 다르게 볼 수 있는 상황! 비고츠키가 말하는 공동체 속에서의 행동이

‘마리’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된다는 것을 <비고츠키, 불협화음의 미학>을 읽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 소개된 간단한 대화문을 보자.

우리가 일상에서 하는 요리 만들기 음미로 ‘양파를 다지는’ 실천을 떠올려 보며

“양파는 당신이 길렀나요?”

“아니오, 슈퍼마켓에서 사 왔습니다.”

“식칼은 본인이 만들었나요?”

“아니오, 예전에 마트에서 구입했어요.”

(중략)

“만드는 방법은 스스로 생각한 건가요?”

“아니오, 레시피를 검색해서 참고했습니다.”

“그러면 햄버거를 당신 혼자 만들었다고 할 수 없는 거네요?”

“음..., 듣고 보니 그렇군요.”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알 것이다. 관점이 다른 사람은 어쩌면 이해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박동섭은 비고츠키의 사상을 현실 교육(개별화 교육, 학습자 중심 교육)에서 잘 못 접목시킨 부분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현실 교육에 접목시킨 많은 교육자들은 그래서 마지 막 파트가 더욱 불편할 수도 있지만, 독자들은 다른 시각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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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들은 끊임없이 수업을 디자인한다. 어떻게 디자인할 것인가? 내가 디자인한 수업 설계에 따 라 어떤 학생은 무능한 학생으로 보여질 수도 있고 유능한 학생으로 보여질 수도 있다면 이 책

<비고츠키, 불협화음의 미학>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은 ‘미완’이라고 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끊임없이 복원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당연한 것을 찬찬히 진지하게 돌아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될 것이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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