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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외도시개발의 역사

(1) 근세 이전의 해외도시개발

근세이전의 도시개발 역사를 시기적으로 구분하면 광개토대왕의 대륙 영토 확 장과 도시경영, 장보고의 해상무역 및 신라방 건설과 도시의 관리 및 경영, 조선 시대의 해상봉쇄로 인한 해외진출 암흑기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근세 이전의 해외도시개발은 국력이 강할 때 농경지 등의 확대를 위한 영토 확장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한다. 광개토대왕의 시기 철기문화와 기마전술은 주변국에 비해 우위 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대륙 영토 확장을 달성할 수 있었다. 다민족, 다문화를 아우르는 리더쉽, ‘온 세상’, ‘만민’에 대한 통치이념과 제도 등을 통해 고구려 중심주의가 아닌 포용주의로 대륙을 경영하였다. 특히, 점 선 면 방식의 대륙확장을 추구하였는 바, 확장된 영토에서 가장 먼저 취한 것은 성의 축조였으

며, 성과 성을 연계하고 점차 면을 취하는 거점개발 방식을 사용하였다. 행정단 위도 이 시기 재편되어 성城 곡谷 촌村에서 부락部落 영營 곡谷 성城 촌村 등 으로 하였다. 여기서 성은 군현을 의미하는 것으로 오늘날의 도시라 할 수 있으 며, 성은 도시경영의 핵심 행정단위라고 볼 수 있다. 성의 건설뿐만 아니라 행정 단위 개편 및 제도 도입을 통한 관리가 대륙경영의 중요한 매개체였다고 생각된 다.1) 광개토대왕의 대륙 진출이 단순히 정복 전쟁으로 비춰지는 경향이 있으나 성(도시)를 중심으로 한 제도 및 문화의 전파, 다민족 문화의 융복합 관리 등 소 프트웨어적 사고가 우리의 해외도시개발에 필요함을 적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림 2-1> 신라-당 무역교역도 신라의 경우 750년(경덕왕 9년) 이후 신라 와 당나라의 관계가 다시 가까워지면서 교 역이 활발해지고, 많은 신라인들이 당에서 거주했다. 그들은 해상교통이 빈번했던 산 둥반도 남쪽의 해안 일대와 화이허 강(淮 河) 하류에 이르는 지역에 주로 거주하면 서 신라인 촌락을 형성했다. 주로 상공업 에 종사했고, 일부는 그와 관계된 수부(水 夫) 및 공인(工人)으로 생활했으며,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었다. 특히 뛰어난 항해술로 국제무역을 활발히 전개 했는데, 양저우(揚州)·밍저우(明州)·쑤저우(蘇州) 등지를 중심으로 아랍·폐르시아 상인들과도 교역했고, 일본과 신라 본국을 왕래하면서 해상무역을 주도했다. 상 공업에 종사했던 사람들은 주로 추저우(楚州)와 롄수이(漣水) 등의 도시에 모여 살았는데, 당은 '신라방'이라 하여 자치를 허용 해주었다.

이곳에는 '구당신라소(勾當新羅所)'라는 관청이 있었으며, 총관(總管)이 행정을 관장했다. 그 아래에 교섭업무를 주관하는 역어와 전지관(專知官)이라는 관리가

1) 전경일, 2007, 「광개토대왕: 대륙을 경영하다」p.243

신라인과 관련된 사무를 전담했다. 한편 산둥성 원덩현(文登縣) 칭닝향(淸寧鄕) 츠산촌(赤山村)의 신라인 통할 관청인 구당신라소의 장은 압아(押衙)라 하여 추 저우와 롄수이 신라소의 장을 총관이라 한 것과는 다르게 불렀다. 그러나 압아가 총관과 거의 대등한 위계를 가졌으므로 같은 지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2)

신라의 해외도시개발은 무역을 활발하게 진행하는 과정에서 자국민을 보호하 기 위한 수단으로서 가능하였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신라방의 경우 중국이 일정 자치를 허가하고 신라인이 도시를 경영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에서 도시가 단순 건설되는 것만이 아니라 관리체계를 갖추고 경영되는 관리 개념을 엿볼 수 있다.

통일신라이후 고려시대는 벽란도를 거점으로 해상무역이 활발하던 시기 였으 며, 우리나라가 코리아라는 명칭을 얻은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신라방에서처 럼 해외에 특별한 거점이 마련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주 무역대상국 인 중국에서 북송, 남송, 원, 명으로 이어지는 정치 격변기에 타국에까지 관리를 허용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 판단된다. 조선시대에는 사정이 더욱 좋지 않아 해 외도시개발은 보이지 않는다. 중국은 명과 청으로 이어지는 초강대국으로 역할 하고 있었으며, 일본은 자국의 통일을 구성하는 시기이다. 이 시기 임진왜란, 병 자호란 등 한반도에는 전쟁이 끊이질 않았으며, 조선은 급기야 해상봉쇄령을 통 해 자국 국민의 해상진출마저 스스로 막아서기에 이르렀다.

근세 이전의 해외도시개발 역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 첫째, 행정 및 제도적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은 해외도시개발 역사는 우리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둘째, 국력이 강할 때 해외도시개발이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어 진다. 셋째, 타국에서의 정치적 안정과 해외도시개발은 정비례적 관계가 있다. 넷 째, 해외도시개발의 공간적 개념은 점선면의 유기적 결합체인 지역개발까지 포 괄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이상의 역사적 시사점 중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 은 관리의 중요성이다. 도시의 개발도 중요하지만 관리를 통해 문화를 전파하고 다민족 다문화 사회에 적응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우리의 해외도시개발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전망한다.

2) 두산백과사전 엔싸이버 참조(www.encyber.com)

(2) 최근 해외도시개발의 역사

조선시대 이후 근세는 일제 강점기, 동란, 미국의 원조 등을 거치며, 우리 국토 의 개발 주체라기보다는 개발주체의 하청을 수급하는 건설도급의 역사로 기록되 어 진다. 현대에 와서 우리 건설은 주로 건설과정의 하청업체로 역할하여 왔으 며, 현재까지도 종합건설사가 시행 및 시행보증을 통해 전체 개발과 건설을 주도 하는 형태를 가지고 있다. 해외에서 벌어지고 있는 건설과정도 인프라 건설 등에 서 용역을 수주하는 건설도급의 체제를 못 벗어나고 있다. 그러나 건설도급과 아 울러 1980년대부터는 일부 개발에도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관찰되고 있는바, 간 략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 해외도시개발의 건설도급 역사

1965년 현대건설의 태국 고속도로 공사 이후 1970년대 저임금과 단순 건설기 술을 기반으로 외화획득을 위한 수출의 주요 산업으로 발전하였다. 1980년대부 터 1992년까지는 부가가치가 낮은 저가공사 수주, 기술개발 노력 부족으로 침체 기를 겪었으며 2000년대 이후 회복기를 거쳐 2005년 이후 플랜트를 중심으로 급 성장하였으나 수익률이 그다지 높은 상황은 아니다.

(나) 해외도시개발의 개발(디벨로퍼) 역사

1980년 대우건설의 미국 시애틀 노인주택 개발을 최초로 2008년까지 총 152건 153억 달러를 수주하였다. 대우건설은 1980년대 이미 단순 주택건설에서 벗어나 미국 시애틀 노인주택, 뉴욕의 맨하튼 트럼프 월드 타워, 플로리다 임대주택 등 많은 외국 주택의 개발사업을 통해 디벨로퍼로서 명성을 쌓았다. 연도별 해외 개 발사업 추이를 살펴보면, 1990년대 들어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다가 1997년 외환·

금융위기 이후 감소, 2000년 이후엔 서서히 늘어나다가 2006년 및 2007년에는 아 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급격한 증가를 보여주고 있다. 전반적으로 해외도시개발 의 개발은 대규모 디벨로퍼(developer)라기 보다는 소규모 디벨로퍼로서 임대형

디벨로퍼 또는 하위 디벨로퍼(sub-developer)로 기능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