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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요인

문서에서 중국의 三農 문제 회고와 전망 (페이지 50-53)

제 3 장

1.1. 역사적 요인

역사적으로 볼 때, 구 중국은 보편적인 공업화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만약 근대사에 있어 중국이 공업화 과정을 겪었다면, “三農” 문제는 대부 분 해결되었을 것이며, 최소한 현재의 이와 같은 상황은 아닐 것이다. 그 러나 역사는 역사일 뿐이며, 결코 가정할 수 없는 것이다.

중국은 역사상 고도의 기술 문명을 보유한 바 있고, 명(明)나라 시대에 는 정화( 和)가 최초로 서양을 항해하는 위대한 업적을 세웠다. 그러나 공업혁명을 이끌지는 못했다. 영국의 퇴역 잠수함 사령관 케빈 멘지스(加 文·孟席斯)는 65세에 <1421: 중국이 세계를 발견하다>란 책을 발간했다.

책 속에서 중국이 서방보다 먼저 세계를 발견했다고 확신하고 있으며, 콜 럼버스(哥 布)가 아메리카를 발견한 것도 아니고, 마제란( 哲 )이 최초 로 세계일주를 한 것도 아니며, 쿡( 克)이 남반구 탐험을 최초로 시도한 것도 결코 아니라고 지적하고 있다. 명나라의 관리였던 정화가 중국 선단 을 이끌고 이미 먼저 이들 지방에 도달했었으며, 1421~1423년 사이 세계 해도(海 )를 제작하였다. 이 퇴역 군인은 사료를 근거로 하여 중국 함대 가 마젤란이 태어나기 60년 전, 이미 마젤란해헙에 도달했었으며, 유럽인 들보다 300년 앞서 경도( 度)의 비밀을 밝혔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1421~1423년의 항해가 끝나고 몇 십 년 뒤, 중국은 뜻밖에도 세계 원양 항해 계획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왜 중국은 정화의 서양 항해를 계기로 삼아, 대외무역의 발전을 통한 원시 자본을 축적하고, 공업화의 길로 가지 못했을까? 원래 정화사절단이 선단을 이끌고 서양 항해를 실시한 것은 명나라 성조(成祖)가 제정한 해 외 제국과 함께 “태평의 복을 함께 누리자(共享太平之福)”는 외교 방침을 실천에 옮기고, 명나라 왕조와 아시아·아프리카 국가간의 평화 관계를 맺 기 위해서이며, 외국의 재화를 약탈하려는 뜻은 전혀 없었다. 이는 마치 중국의 주류 문화 전통인 “평화를 소중히 여긴다(以和 )”와 부합하는 것 같다. 사절단 선단은 중국으로부터 도자기, 비단, 철기, 금속화폐와 각 종 공예품을 가지고 갔으며, 외국으로부터 옥수수, 감자, 바나나, 연초, 면 화 등의 경제작물을 들여왔다. 명나라 왕조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지의 30여 개의 국가와 평화우호관계를 성립하고 발전시켰다. 당시 중국의 수 공업 부문에서는 이미 자본주의 맹아가 싹트고 있었다. 이미 자신의 노동 력을 파는 고용노동자와 다른 사람의 노동력을 고용하는 규모가 큰 수공 업 작업장의 주인과 상인이 존재했다. 생사(生 )업에서는 규모가 큰 수공 업 작업장이 수공업 공장으로 발전하였고, 상품자본은 상당히 활기를 띠 었다. 그러나 명나라시대의 중국은 결국 공업화의 길로 가지는 못했다. 아 직까지 이것에 대해 합당한 해명을 한 역사학자를 보지 못했다. 중국은

쉽게 오지 않는 이 역사적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청나라시대에 이르러, 강건이제(康乾二帝) 때까지만 해도 세계에서 강국 중의 하나였으나, 청나라 중후기부터는 점차 쇄락하기 시작했다. 17~19세 기, 서방 열강들은 여기저기서 들고 일어나 각지에 식민지를 개척하고, 다 른 나라의 재화를 약탈함으로써 원시 자본을 축적하였고, 국내에 자본주 의를 발전시켰다. 공업혁명과 자본계급혁명을 겪으면서 자본주의제도가 확립되었다. 중국은 서방 열강들의 약탈의 대상이 되었고, 청나라 정부는 그들과 어쩔 수 없이 일련의 불평등 조약을 맺어야만 했으며, 서방 열강 들은 전함을 동원해 중국의 굳게 닫힌 쇄국의 대문을 부수었다. 국권을 상실하여 국위가 실추되고, 외국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위기에 직면하면서, 강유위(康有 ), 양계조(梁 超), 담사동( 嗣同)을 대표로 한 자본계급의 개량주의자들이 실권이 없는 광서제(光 帝)에게 여섯 차례나 상소를 올 려 변법자강운동을 실시할 것을 직언했다. 유명한 무술변법(戊戌 法:변법 자강운동)은 겨우 103일 동안 지속되다가 결국 힘의 열세로 인해 자희태 후(慈禧太后)를 중심으로 한 봉건보수파에 의해 무참히 탄압당하여 실패 를 선언하고 말았다. 중국은 공업화의 기회를 또 한번 놓치고 말았다.

1840년 제1차 아편전쟁 이후, 중국은 반식민지·반봉건의 낙후한 국가로 전 락하기 시작했으며, 이에 따라 근대 중국의 열세적 위치와, 농민의 비참한 운명을 확정 짓게 된다. 농민은 구 중국의 사회구조에서 가장 낮은 계층 에 처하게 된다.

왜 역사는 이렇게 발전한 것일까? 모택동 주석은 1939년 12월 1일 이를 중국의 뿌리 깊이 박혀있는 봉건전제 정치의 탓으로 돌리는 글을 썼으며, 제국주의와 봉건주의, 그리고 매국노 관료가 상호 결합된 결과라고 보았다.

어느 서양 학자가 역사적 고찰을 통하여 진일보한 해석을 내놓았다. 즉,

“중국은 소수의 엘리트가 통치하는 국가이다. 역대 정치가들은 절대 권력 을 가지고 있어, 어떠한 감독도 받지 않았다. 그들은 농민을 마음대로 마 구 짓밟아도 되는 존재로 보았으며, 농민봉기를 일으키지 않는 전제 하에

서,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었고, 농민으로부터 가혹하리만큼 세금을 착 취해갔으며, 제멋대로, 그리고 임의대로 그들의 재산을 몰수해갔다.……그 럼으로써 통치자들은 공동의 재산을 축적할 필요가 없었다.”, “(적당한) 질 서와 신임의 부족과 정부 당국의 임의로 재산을 몰수하는 관례는 공업과 기업에 대한 투자를 억제시켰다. 이 서양 인사는 진일보한 결론을 내렸다.

“중국과 기타 아시아 대국에 있어 사회, 정치 및 법률 등 갖추어야 할 조 건들이 부족했다‐‐‐‐간단히 말해서, 일정한 제도가 부족했다. 그 거대하고 밀폐된 경제에서 통치자들은 그 영역 속으로 지식과 기업가의 재능을 갖 춘 사람을 끌어들이거나 남겨둠으로써 경쟁할 필요가 없었다. 또한 통치 자들은 자본을 모으고 기업에 대해 관심을 끌 그와 같은 제도도 만들 필 요가 없었다”(Jones, 1981~1987). 이와 같은 해석은 설득력이 있으며, 핵심을 찔렀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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