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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경험했던 기근

문서에서 중국의 三農 문제 회고와 전망 (페이지 97-100)

식량문제: 대국의 근심

1.1. 이미 경험했던 기근

중국의 식량안보문제를 되돌아 봤을 때, 우리는 20세기 50년대 말과 60 년대 초 사이에 발생했던 좀처럼 보기 드문 기근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오늘날 식량안보의 배경이 이미 많이 변하긴 했지만, 우리는 기근에 대한 고통스러웠던 기억으로 인해 식량안보에 대한 이성적 인식과 정책의 선택에 지장을 주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역사는 결코 잊혀질 수 없는 것, 하물며 이처럼 중대한 식량문제는 어떻겠는가.

당시 기근의 참상은 신비에 가까웠다. 그 베일을 벗기는데 있어, 지금도

여전히 충분한 자료가 없는 실정이다. 다만 소량의 단편적인 자료를 통해 대강의 내용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통계자료가 나타내듯이, 1959~1961년 사이, 중국 농업의 쇠퇴가 심상치 않 았으며, 농업경제의 각종 지표는 모두 마이너스 성장을 보였다. 농업 생산 의 급격한 쇠퇴로 인해, 1960년 전국 일인당 평균 식량 점유량은 1957년의 306㎏에서 29.7% 감소한 215㎏이었고, 면화는 2.6㎏에서 38.5% 감소한 1.6㎏

이었으며, 유재료(油料)는 6.6㎏에서 56.1% 감소한 2.75㎏이었다. 이 해의 5 월과 9월, 중공중앙은 잇따라 도시와 농촌 인민의 식량, 면직물 및 식용유 등의 공급 정량을 줄일 것을 결정했다. 1960년에는 1957년과 비교했을 때, 전국 일인당 평균 식량 소비는 203㎏에서 163.5㎏까지 감소하였고, 식용유 는 2.4㎏에서 1.85㎏까지 감소하였으며, 돼지고기는 5.1㎏에서 1.55㎏까지 감 소하였다. 당연히 도시와 농촌 간의 기준량과 감소 폭의 차이는 매우 컸으 며, 농촌의 식량 기근과 긴장의 정도는 도시보다 매우 심각하였다.

식량과 부식품의 부족 현상이 심각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먹을 수 있는 것은 거의 모두 찾다시피 했다. 1960년 7월 9일자 <인민일보>에 <과채(瓜 菜)류를 많이 심자>란 제목의 사설이 게재되면서, 과채류를 많이 심고, 건 채(干菜)를 많이 만들고, 소금에 절인 채소를 많이 만들 것을 호소했다. 11 월 14일, 중공중앙 긴급 지시를 발표하였다. 즉시 대규모의 “식품 대체물”

을 채집하고 제조하는 운동을 벌일 것을 결정했던 것이다. 그리고 중국과 학원의 건의에 따라, 오늘날 기껏해야 겨우 거친 사료로 쓰일 법한 몇 가 지 먹을거리(과채 대체물이라 불렀다)를 추천하여, 고난을 극복하고, 기근 을 넘기도록 하였다. 12월 21일, <학생, 교사 신체 건강에 관한 긴급 통 지>를 발표하면서, 학교에서의 식사문제를 잘 해결하고, 업무·학습·노동량 을 더 줄이고, 수면과 휴식시간을 늘리며, 운동량이 많은 체육활동을 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학교는 줄곧 중국의 식량 공급 사업에 있어 반드시 보 위해야 할 영역이었는데, 당시 학교의 상황이 이와 같은데, 일반 주민들의 처지는 어떠했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맛있고 영양가 있는 음식을 추구하는 사람들로서는 이처럼 어려 웠던 상황이 틀림없이 마치 다른 세상의 일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이는 확실한 역사적 사실이다.

이는 마치 역사의 대풍자극과 같다. 1958년만 해도 사람들은 “식량이 많 으면 어떡하냐?”고 물었었다. 전국 각지에서 “뱃가죽을 늘려서라도 밥을 먹으라고” 소리쳤으며, 어떤 곳에서는 밥 먹기 대회까지 열었다. 그러나 1 년 후에는 “배급 기준이 낮아지고, 과채 대체물”이 필요하게 되었다. 방금 까지 쌀과 밀가루를 먹은 것 같은데, 어느새 상황이 변해 대부분이 조악 한 음식으로 된 “대체 음식물”로도 배를 채울 수가 없었다. 제강·제철 운 동의 구호로 아직 떠들썩한 것 이외에, 농업의 높은 생산고 신기록에 관 한 보도는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잉여 식량이 너무 많아 보관할 곳 이 없을 것을 걱정해 수출할 것을 요구하고, 창고를 지을 것을 요구하고, 가공업 발전을 요구하던 농업 부문이 이제는 각 산업에 강력하게 지원해 줄 것을 절박하게 요구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상황은 이미 되돌리기 어렵게 되었고, 본래 대약진을 하기 바랐지만, 결과적으로 잇따라 밑바닥 끝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대약진”시기의 떠들썩함과 열광은 이미 죽은 듯 이 고요한 적막으로 완전히 뒤바뀌었다.

기근은 너무나 끔찍한 결과를 낳았다. 먼저 가축들은 죽고, 사람들은 피 골이 상접했으며, 뒤이어 각종 질병들이 만연하였다. 사료에 따르면, 기아·

영양부족과 질병은 전체 인민이 직면한 운명이었다. 기아는 사람들로 하 여금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하여 발악하도록 하였고, 그 중 상당수의 주민 들은 부종병(몸이 붓는 병)을 앓았다. 많은 기록들이 설명하듯이, 당시 간 계통의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의 수도 대폭 증가하였다. 자궁하수, 월경 불규칙 등의 부인병을 앓고 있는 여성의 수도 평소에 비해 수배로 늘어났 다. 결국, 사람들은 굶어죽게 된다.

기근으로 인한 사망자 수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정부 당국의 정식 발표 가 없다. 일부 학자들은 대부분 호적 계통의 연 출생자수와 사망자수를 분석의 기초로 하여 연구하였으며, 또한 인구조사 결과와 “1/1000의 인구

출산율 표본조사”를 근거로 하여 출생률을 도출하여, 수치를 정리하고 수 정하였다. 그러나 얻어낸 결과들 사이에 차이가 너무 크다. 1,650만에서 4,100만까지 그 수치가 고르지 못했다. 이는 아마도 영원히 정확한 연구 결과를 얻어낼 수 없는 문제일 것이다.

현재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은 아마도 사망자수를 정확하게 알아내고 누구에게 이에 대한 책임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교훈을 얻어 내는 것이다. 1962년의 7천인대회에서, 당시 국가 주석이었던 유소기( 少 奇)는 명확하게 지적했다. “경제적 어려움을 초래한 원인 중, 3할은 하늘 이 내린 재난 탓이고, 7할은 사람이 만든 재앙이며, 주된 책임은 중앙에 있다”. 이처럼 사람이 만든 재앙이 당시 기근의 근본적인 원인이며, 이것 이 기본적인 판단이었다.

학술적 시각에서 보면, 당시 위기의 원인에 대해 이미 적지 않은 연구 가 있었다. 많은 연구자들은 당시 위기의 원인을 인민공사제도와 극“좌”정 책의 탓으로 돌리고 있고, 그러한 제도와 정책 하에서, 농민들은 남김없이 빼앗기고, 어떠한 재산도 남아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어떠한 자주권도 가지지 못했다. 심지어 자신의 노동력을 지배할 권리조차 없었다. 일년 내 내 고생한 결과 기본적인 의식주도 해결할 수 없었고, 자연히 증산에 대 한 어떠한 의욕도 없었다.

우리는 여기서 더 전면적인 해석을 내놓을 마음은 없다. 단지 한 가지 만 강조하고 싶다. 즉, 극“좌”주의는 중국이 현대국가로 진입하는데 있어 심각한 장애가 되었다. 극좌주의는 사람들을 빈곤과 재난으로 몰아넣었고, 수천만 명의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1.2. 개혁 이후 중국의 식량안보와 최근의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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