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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三農”에게 많이 거둬들이고 적게 지급했다

문서에서 중국의 三農 문제 회고와 전망 (페이지 59-65)

제 3 장

2. 도시와 농촌의 분할과 이원화 정책

2.2. 오랫동안 “三農”에게 많이 거둬들이고 적게 지급했다

공업과 농업 상호관계의 각도에서 볼 때, 국가 공업화 과정은 일반적으 로 세 단계를 거친다. 첫째, 초기 단계, 즉 공업화의 원시 자본 축적 단계 로 농업이 공업 발전을 지원한다. 농업이 공업을 부양하는 것이다. 둘째, 중기 단계, 공업의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능력이 증강되고, 농업과 공업 이 평등하게 발전한다. 농업과 공업 모두 스스로 성장하는 것이다. 셋째, 후기 단계, 국가 경제력이 더욱 강화되고, 공업이 농업 발전을 지원한다.

공업이 농업을 부양하거나 농업 편향적이 된다. 중국의 경제발전은 완전 히 위에서 말한 순서에 따라 변화한 것이 아니라, 국가 공업화의 초기 단 계부터 도시와 농촌의 이원화 정책을 실시하였으며, 그것이 지속된 시간 도 매우 길다. 이로 인해 “三農”은 억눌려 큰 고통을 받게 된다. 도시와 농촌의 이원화 정책은 국가가 농촌에서 농업잉여를 거두어 들여, 그것을 국가 공업화와 도시 발전에 투입하는 것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공산 품과 농산품 가격의 “협상가격차(剪刀差)”가 주된 수단이었으며, 20세기 50년대 중반 “협상가격차”의 총액은 이미 정부 재정수입의 30%를 차지했

다. 우리는 20세기 80년대 후반의 연구를 통해 계산해 볼 수 있다. 즉, 국 가는 공산품과 농산품 가격의 “협상가격차”와 세수입을 통해, 1952~1989년, 농촌에서 7,000여 억 위안의 자금(국가가 “농업을 지원하는” 자금은 제외) 을 거두어 들였다. 이는 농업이 새로이 창출한 가치의 1/5이며, 당시 국유 공업의 고정자산 가치를 초과한다. 많은 학계인사들은 90년대 초 국가 공 업화의 원시 자본 축적 단계는 이미 끝났으며, 이미 중간 발전 단계로 진 입했다고 생각했다. 중간 단계에서는 당연히 공업과 농업이 스스로 성장하 거나 평등하게 발전해야 하며, 도시와 농촌간의 자금은 서로 공평해야 한 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없었고, 농촌에서 자금을 거두어들이는 국가의 정책은 여전히 지속되었다. 1990~1998년, 국가는 재정적 경로, 공산품과 농 산품 가격의 “협상가격차”와 금융의 경로를 통해, 또 농촌에서 1.9만억위안 의 자금을 거두어들였다(표 3‐1 참조). 통계에 따르면, 1950~1996년까지 중 국 농민이 국가 공업화와 도시 발전을 위해 제공한 자금의 누적 액은 2만 억위안이 넘으며, 대략 전국의 자본 보유량의 2/3에 해당한다(이금(李 ), 2001).

표 3-1. 20세기 90년대 농촌의 자금 유출 현황

(억위안)

유출 경로 1990년 1991년 1992년 1993년 1994년 1995년 1996년 1997년 1998년* 소계 백분비 1. “협상가격차” 654.4 862.9 1,230.5 1,014.8 422.9 535.3 805.7 782.0 - 6,308.5 32.8 2. 재 정 171.7 197.7 550.9 714.0 2,378.0 1,343.0 1,238.0 1,438.0 1,361.0 9,392.3 48.8 3. 금 융 140.2 255.0 106.8 185.6 1,089.0 481.0 373.0 388.0 510.0 3,528.6 18.4 4. 합 계

(4=1+2+3) 966.3 1,315.6 1,888.2 1,914.4 3,889.9 2,359.3 2,416.7 2,608.0 1,871.0 19,229.4 100.0

* 1998년 “협상가격차” 경로의 유출된 금액을 계산하지 못했다. 그 해의 추정치는 작을 것임으로, 9년간의 합계 수치와 백분비에 영향을 주었다.

자료 출처: 1995년과 1999년 <농촌경제녹피서( 村 皮 )>에서 관련 수치 정리

우리는 1999년 이후 도시와 농촌 자금의 상호 이동 상황을 추적하여 살펴 보지 않았지만, 어느 보고서에 따르면, 농촌 자금은 여전히 유출이 유입보다 많은 상태이다. 특히 농지가 비농업 목적으로 전환되어 이용됨으로써 농민 의 손실이 매우 큰 실정이다. 최근 20년간 국가는 1억여무의 농민 집단 소 유지를 수용하였으며, 수용 과정에서 독점 1급 토지시장을 이용하였다. 토지 가격의 “협상가격차”(시장가격‐토지 수용시의 보상비)를 통하여, 농민의 수중 에서 2만여 억 위안의 토지 자산 수익을 가져간 셈이다. 이 수치는 아주 보 수적인 추정에서 나온 것이다. 어떤 자료에 따르면, 1978년 이후 농민이 토 지를 잃게 되면서 재산의 권리와 이익에서 입은 손실이 약 5만억위안이라 고 한다(곽서전(郭 田),2004). 많은 지방정부와 상인이 손을 잡고 불법으 로 농민이 책임 경작(承包地)하고 있는 토지를 점유하고 있으며, 최근 도시 화에 이용된 토지 중 약 70%가 지방정부가 농민들로부터 빼앗은 것이다.

맘대로 구획을 나누고 함부로 농경지를 점유하는 현상을 누차 막지 못하고 있으며, 개발을 명목으로 토지를 점유하는 현상은 점점 더 성행하고 있다.

국가가 농촌의 자금을 가져가는 것은 농촌과 농민의 발전 기회를 빼앗 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금융 서비스는 “三農”의 수요를 아예 따라가지 못하고, 신용사(信用社)의 돈은 빌리기 어려우며, 은행에서의 대출도 어렵 다. 국유 4대 상업은행 개혁 후, 모두 도시로 축소되었으며, 현( ) 및 현 이하의 기구는 합병을 시키거나 없애버렸다. 현 지역 내의 대출업무는 점 점 더 적어졌고, 여전히 향촌 지역에 남아있는 지점은 거의 농촌 자금의

“인출기”로 변했다(주택(朱 ),2003). 정규 금융시장의 공급이 너무 부족한 나머지 지하 금융에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국가의 “농업 지원” 자금은 실지로 농업을 지원하지 않았다. 국가 재정 은 “농업 지원 자금”을 따로 마련하기는 했지만, 많은 지출 중 약 60%는 수리 등의 건설사업에 쓰여 졌고, 농업 자체가 받은 지원은 얼마 되지 않 으며, 그 비중도 점차 감소하는 추세다. 역사적 자료에 의하면, 국가의 농 업 지원 자금이 전체 재정 지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비교적 높았던 것은

1978년의 13.43%, 1980년의 12.2%, 1991년과 1992년에 감소하여 각각 10.26%

와 10.69%였다. 그 이외의 해에는 10%이하 이었으며, 1993~1997년 점차 감 소하였고, 1999~2000년에 약 7%~8%까지 더 감소하여 1986년 이후 가장 낮 은 수준을 보였다. 이는 개혁개방 초기보다도 5.43에 6.42백분율이 감소한 것이다. 장기간에 걸쳐, 국가 재정 성격의 농업 지원에 대한 지출의 비중 은 일반적으로 농업 GDP가 전체 GDP에 차지하는 비중의 1/3내지는 1/2이 다. 나는 국가의 농업발전에 대한 지원 정도는 일정한 경제발전 단계의 산물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중국의 농업에 대한 지원 비중은 선진 국의 농업 지원 수준보다 낮을 뿐만 아니라, 태국, 인도, 파키스탄, 브라질 등의 개발도상국들보다도 현저하게 낮다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사실 이다. 최근 5년간 국가는 적극적인 재정정책을 실시하였다. 장기 국채를 더 많이 발행하였으며, 사회 기반시설 건설을 더욱 강화하였다. 1998~2001 년, 중앙은 5,100억 위안의 국채 자금을 집행하였다. 그 중 농업 기반시설 건설에는 겨우 56억이 사용되었다. 이는 전체의 1.1%에 지나지 않으며, 같 은 기간 농업 기반시설 건설에 필요한 자금의 약 10%만 만족시켰을 뿐이 다(농업부, 2002). 이는 대부분의 재정 지출과 국채 자금이 도시와 비농업 영역에 사용되었다는 말이다.

정부는 과학기술 진흥전략을 반복해서 강조하지만, 중국 정부의 농업에 대한 과학기술의 투입은 줄곧 보잘 것 없는 수준이었다. 20세기 80년대 중반, 외국의 농업 과학기술연구에 대한 투자는 이미 농업 GDP의 1.5%~2.0%에 달했다. 중국은 그에 비해 비율이 매우 낮다. 1979년 0.3%, 1980~1986년 0.19~0.27%, 현재는 0.23%이다(세계 평균은 1%이고, 선진국 평 균은 2.37%이다. 표 3‐2 참조). 어떤 연구에 의하면, 1985년 이후 중국 정부 의 농업 과학기술연구에 대한 투자 강도가 감소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으 며, 90년대에 들어선 이후 감소 폭이 더 커졌다. 1996년, 중국 정부의 농업 과학기술연구에 대한 투자 강도는 선진국 평균값(2.37%)의 1/10에도 이르 지 못하며, 30개의 최저소득 국가의 간단한 평균값(0.65%)의 1/3에도 미치

지 못한다. 인도, 멕시코 등의 개발도상국보다도 아주 낮다. 중국의 농업

본업인 농업을 저버리고 어떻게 오래 갈 수 있겠는가? 농업 투자가 부족하고, 기초가 약한 상황에서 생산자재 가격은 계속 오르고, 농산물 가 격은 떨어지면서 식량 주생산지의 농민들은 본업을 저버리고 있다. 진계 체( 桂棣)와 춘도(春桃)의 회북(淮北) 지역에서의 연구에 따르면, 무( )당 밀의 생산비는 325위안이며, 무당 밀 450㎏을 생산함으로써 겨우 330위안 의 판매수익을 올린다. 농민이 일년간 힘들게 일한 것이 헛수고가 된 것 이다. 1990년 이후, 쌀은 소위 말하는 “계약 수매”에서 “정부 수매”로 바뀌 었고, 책임량에 대한 수매가 끝난 다음의 잉여량은 오로지 “협상 가격”에 따라 식량 구매·판매소(粮站)에 팔 수 있었다. 여기서 말한 “협상 가격”이 란 실제로 농민과 협상을 통해 정해진 가격이 결코 아니며, 단지 “수매가 격”보다는 조금 높고, 시장가격 보다는 낮다. 예를 들어, 1988년 쌀의 수매 가격은 0.45위안/㎏, 협상가격은 0.7위안/㎏, 시장가격은 1.1/㎏이었다. 이 하 나만 보더라도, 1988년 안휘성 농민이 정부에 판매한 상품 식량의 가격은 시장가격보다 50여 억 위안이나 적었다. 동시에 “협상가격차”도 여전히 계 속되었다. 1989~1995년의 7년간, 농민은 11,887억 위안의 소득이 증가하였 고, 같은 기간 지출은 13,437억 위안에 달했다. 이로써 증가한 소득과 증가 한 지출은 서로 상쇄되며, 전국 농민이 1,550억 위안의 손해를 본 셈이다.

본업인 농업을 저버리는 것은 오래 가지 못하며, 안휘성 등 일부 지방에 서 휴경지들이 나타나는 것이 이를 잘 증명해준다.

갖가지 현상들이 나타내듯이, 장기적으로 중국 경제의 발전과 “三農”의 관계는 비협조적이었다. 현재 중국의 공업화는 중간 단계에 진입하였으며, 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중화학공업과 신형 공업화가 같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국가는 다음과 같이 제기했다. 즉, “농민의 소득 증가 사업을 농 업과 농촌 사업의 중심에 놓고, 많이 지급하며, 적게 거둬들이며, 활력을 불어넣는 방침을 견지한다. 농민 소득의 지속적인 성장을 촉진하고, 장기 적인 효과를 지닌 시스템을 만든다”. 이와 같은 공업화 중기의 “三農” 정 책은 비록 늦은 감은 있지만, 좋은 시작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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