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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소작에 해당하는 재래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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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에서 펴낸 󰡔조선의 소작관행(상)󰡕(朝鮮の小作慣行(上), 1932. 이하 󰡔慣 行(上)󰡕으로 略記)은 그 모두(冒頭)에서, 조선에서 ‘소작에 해당하는 재래용어’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慣行(上)󰡕: 1~2).

京畿 - 並作, 打作, 一半並作, 半並作, 남에땅진난것, 어우리, 賭只, 半作, 時作, 耕食, 並食, 打並作

忠北 - 幷作, 時作

忠南 - 並作(食), 打作, 時作, 他作, 倂食, 借作, 並食, 作農 全北 - 時作, 幷作, 稅作, 貰作, 外作, 分作, 幷食, 倂農

全南 - 時作, 倂食, 倂作, 佃作, 外作(莞島), 倂植, 半作, 倂農, 耕食, 所作, 幷耕

慶南 - 並(倂)作, 半並作, 半土作, 細作, 時作, 半作, 半分作, 並土作, 稅作, 並耕, 時耕, 並農, 耕農, 並食(倂食), 幷植

黃海 - 倂食, 倂作, 他作, 他倂作, 借作, 賭作, 半作, 打作, 並食, 分作, 半 倂食, 어리(어우리), 賭地, 地定, 賭只, 賭支作, 支定作

平南 - 半作, 一半, 片農, 片作, 打作, 片耕, 並作, 賭只, 分作, 支定, 地惠, 매倂作(지주가 일체의 농경자금을 부담하는 것), 並耕, 三分⋅四分⋅六分並 作, 알三分(子實만 三分하여 二分을 소작료로 하는 것), 耕農, 耕半作, 打並, 他並, 亂作, 和作

平北 - 打作, 半作, 他作(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말), 지에(只與, 支於, 支與, 只於, 只餘, 指與 등으로 쓴다. 定租小作의 경우에만 사용한다), 他分, 折半, 打半, 並作, 他並, 半分, 任作, 打分, 分作

江原 - 並作, 打作, 分作, 半作, 半分, 屯作, 借作, 所作, 倂作, 地定, 賭只, 賭地, 賭作, 賭只논부친다

咸南 - 半作, 分作, 分耕, 半耕, 打作, 並作, 禾利, 賭只, 地例, 屯作, 作嫁, 三分半作, 割地, 쇠촐

3번역된 소작과 그 사회적 결과

咸北 - 半作, 半耕, 半分, 半農, 並作, 打作, 分作, 他作, 禾利作, 三分作(지 주2, 소작인1), 賭只, 半耕, 外作(경흥지방)

이 보고서에는 “단, 한일병합 이후 점차 ‘소작’이라는 용어가 보급되어 근래 그 용어가 통용되지 않는 곳이 없다”라는 언급이 덧붙여져 있다(󰡔慣行(上)󰡕: 1).

보고서에는 이와 함께, 조선에서 ‘토지소유권’ ‘소작권’ ‘지주’ ‘소작인’ ‘소작지’

‘소작계약’ ‘소작증서’ ‘소작료’에 해당하는 용어 역시 위와 마찬가지의 방식으 로 각 지방별로 조사⋅기록되어 있다.27)

위에서 열거된 숱하게 많은 용어들을 통해 미루어보건대, 조선에서 ‘소작에 해당하는 용어’는 종종 공통적으로 겹치는 것이 산견되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지방에 따라 용어로서도, 또 그것이 지칭하는 의미로서도 그리 통일된 모 양새를 갖추었다고는 볼 수 없을 것 같다. 예건대, 이들 용어가 지칭하는 현실 의 실천은 그 권리관계, 토지임차형태, 토지임차료 납부방식 등에서 다양한 양 태와 권리관계를 내포하는 것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단지 용어의 유무 나 다소(多少)의 문제만은 아니다. 즉, 현실 속에서 그 각각이 지칭하는 실천의 양태가 과연 동질적인 것이었는가의 근본적인 문제가 존재하는 것이다. 만약 그 것이 아니라면, 이처럼 번역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그동안 조선사회에서 관행 적으로 옹호되어 오던 토지에 관한 여러 이질적인 권리들이 근대 일본에서 창 출된 ‘소작’ 개념으로 호명되면서(범주화) 균질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바 꿔 말해, 식민지 조선의 ‘소작에 해당하는 용어’가 지칭하는 실천의 관행적 양 태와 권리들이 󰡔메이지민법󰡕의 영소작권 및 임대차에 관한 장에 기재된 조항들 에 의해 규정, 규제, 부정, 재구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토지에 관한 조선 전통 사회의 특정한 사회적 관행들이 ‘소작’이라고 명명되어 그 하위체계로 분류, 기 입되는 순간, 법적 권리에서 균질적인 ‘소작’의 범주 역시 동시적으로 창출되는 것이다.

이 사태는 사카이 나오키가 말한 ‘번역과 주체’(translation and subject)의 문제 를 상기시킨다. 시간적⋅공간적으로 이질적인 두 사회체가 교섭하는 과정에서 이들 두 사회체는 서로가 서로에 대해 융기하지만, ‘번역’은 이 융기를 외면함

27) 소작 이외에 토지에 관련된 권리에 대한 여러 용어들을 부록을 통해 소개해두기로 한 다.

2장 제국-식민지 농정과 토지임차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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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써, 그러니까 망각과 은폐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며, 이를 통해 ‘주체’는 비로소 구성된다. 이랬을 때 현실의 강고한 주체란, 자신이 구성된 존재라는 사 실조차 깨닫지 못하는 ‘인식론적 장애’를 체현하는 존재에 불과하다. 이러한 차 이의 의식을 상기할 수 없게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공간적으로 제국주의의 폭 력이고 시간적으로 근대의 폭력인 것이다. 이들 개념이 피식민 주체에게도 ‘식 민지적 무의식’으로서 수용될 때, 번역이 지니는 정치적 의미는 은폐되거나 상 실되어버린다.

그렇다면, ‘소작에 해당하는 용어’라는 기술(記述) 그 자체가 갖는 의미는 과 연 무엇일까? 이 기술은 조사를 수행한 식민자의 뇌리에 ‘소작’이라는 개념이 이미 전제되어 있었음을 시사한다. 조사자는 식민지에서 그것과 비슷하거나 또 는 적어도 이에 준한다고 간주되는 사회적 관행들을 관찰, 수집, 분류, 기입하고 있는 셈인데, 이 점에서 이 기술에는 그의 ‘인식론적 여행’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여행’이 늘 즐겁거나 유쾌한 것만은 아니다. 이 여행 은 성찰적이고 세심한 관찰자라면 감당하지 못할 과제를 수행해야 하는 고행(苦 行)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제국-식민지의 권력관계는 이 고행을 외면하게 해주 기도 한다. ‘식민지적 무의식’을 통해 자기 자신을 식민화한 식민자는, 이전에 자신이 스스로에게 그랬듯, 근대와 문명과 합리성의 이름으로 타자의 삶을 거침 없이 재단해버리는 것이다.28)

이런 점에서, 식민자로서 조사자는 자민족중심적인 인식체계 위에서, 식민지 조선에서 마주한 거칠고 불투명한 현실을 조사하고 기입하며, 어떻게든 해석하 고 길들여야 하는 과제를 기꺼이 떠안은 이이다. 그는 매끈한 논리나 투명한 재 현이 인식론적으로 보장된 토대 위에서 자신의 과업을 수행할 수 있는 ‘행운’을 얻은 이가 아니라, 육박해오는 식민지의 ‘비균질적’ 사회를, 그 역시 비체계적이

28) 아이러니컬한 것은, 다른 지면에서 이 ‘소작에 해당하는 용어’가 일본의 ‘자기식민화’의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농상무성 농무국에서는 소작관행조사와 동시에, 유럽 등지의 소작제도와 소작법령을 함께 조사하였다. 1921년에 나온 󰡔小作參考資料 諸外國ニ於ケル 小作制度 第1卷(佛蘭西, 英吉利, 北米合衆國及獨逸)󰡕에는 일본의 소작’ ‘소작료’ ‘지주

‘소작인’ ‘정기소작’ ‘영소작’ ‘분익소작’ ‘又소작’ ‘소작증서’에 해당하는 유럽 각국의 용 어들을 소개하고 그 의미를 상술하고 있다(農商務省農務局, 1921). 이것은 서구사회의 역 사적 경험을 일본의 그것과 ‘자연스레’ 등치시키는 정치적 실천이었고, 서구를 기준

(standard)으로 자기 사회의 관습적 용어를 대응시킨다는 점에서 서구중심주의를 내면화

한 지식실천이었다고 할 수 있다.

3번역된 소작과 그 사회적 결과

고 고식(姑息)적인 방편(方便)의 논리를 통해 그럭저럭 이해해야하고, 나아가 강 제적으로라도 균질화해야 하는 운명에 처한 이인 것이다.

조사자가 조선의 소작제도를 분류하는 기준은 가령 이런 것이었다(󰡔慣行(上)󰡕: 11).

가장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보통소작’(普通小作)이라고 하면, 이에 대해 ‘특수소작’(特殊小作)이 존재한다. 특수소작 중에는 조선민사례(朝鮮民 事例)에 근거한 ‘영소작’(永小作)과 관습상의 영대소작(永代小作)인 ‘도지’

(賭地) ‘병작’(倂耕) ‘화리’(禾利) 관행(옛날에는 中賭地, 永稅 기타도 있었

다)의 구별이 있다.(강조는 인용자)

잦은 빈도를 보이는 행태를 ‘보통소작’이라 명명하고, 이에 비해 드물게 존재 하는 행태를 ‘특수소작’으로 명명한다는, 분류의 자의성(恣意性)에 대해서는 두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구분법을 채택한 것은 오로지 식민자의 인식 의 편의를 위한 것이었을 뿐, 어떤 명백한 기준이나 준거가 있었던 것은 아니 다.29) 더구나, 특수소작으로 분류된 영소작, 영대소작, 도지, 병작, 화리 등이 과 연 ‘소작’으로 불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인지, ‘소작’으로 분류되어도 되는 것인지 에 대한 의문은 여기서 아예 망각, 삭제되어 있다. 실제적인 의미에서 식민자인 조사자의 이 실천은, 식민지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토지에 대한 관습과 관행을 제국의 법의 언어로 번역하여 분류⋅기입하는 작업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제국-식민지 간 위세(威勢)의 격차가 엄연히 존재하는 권력의 자장(磁場) 속에서 진행된 정치적 실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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