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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작관행조사보고서의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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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근대 일본에서의 소작관행조사

의 행정구역 편제에 의거할 때, 전체 町村(11,852개) 가운데 6,478개 町村에 대 해, 전체 637개 郡 가운데 292개 郡을 포괄하는 조사였다(農地制度資料集成編纂 委員會, 第1卷, 1970: 47). 이 조사보고서에 근거하여, 1924년에 「소작조정법」(法 律第18號 小作調停法), 1926년에 「자작농창설유지보조규칙」(農林省令 自作農創 設維持補助規則) 등이 제정되었다. 다만, 애초 조사기획 단계에서부터 상정하고 있었던 소작법의 입법은 지주 등 사회의 이해관계 집단의 반대로 인해 유실되 고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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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결국, 이것은 ‘지식국가’(knowledge state; 최정운, 1992)가 성립하기 위한 최

초의 조건, 전제가 달성되었음을 알리는 사건인 셈이다.

셋째, ‘소작료’ 항목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위의 소작기간의 집계방식처럼 소 작료 역시 지역별 평균치가 확보되어 통계표 안에 숫자로 기입되었다. 1912년 조사와 비교해 볼 때도, 지역단위가 한층 세분화되었음이 확인된다. “지조개정 당시 지가제도(地價制度)의 기초로 삼았던 그 수확미액(收穫米額)을 표준으로 삼 았다. 그 지방에서의 구래의 소작료와 비슷하게 설정하여 村 단위로 통일하여 개정한 바 있다”는 역사적 사실도 새롭게 언급했다. 그리고 지조개정 당시 소작 료 개정이 있었던 지방과 아닌 지방의 소작료 결정기준을 지방별로 도표화했다. 또, 소작료의 납입형태—現物納, 代金納, 金納—에 따른 소작료의 차이도 새롭게 조사하여 수록하였다.

소작료의 감면과 증징에 관한 사항도 조사되었는데, 이것은 소작인에 의한 소 작료 감액요구 행태의 변화와 관련된다. 소작료감액요구 그 자체는 전통시대부 터 존재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대체로 천재지변이나 흉작 등으로 인한 일시적인 탄원요구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 시기에 발생한 소작쟁의에서는 소작인조합이 상설적으로 조직되고 소작인의 계급의식과 단결성이 성장하여 소작료의 영구적 인 감면의 요구가 제출되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경작농민의 권리주장이 전개되 고 있었다. 특히, 지주의 고율소작료 착취의 문제가 집중적으로 부각되었다.

1922년에 설립된 일본농민조합(日本農民組合)에서는 소작료의 영구적인 30% 감

면의 요구가 제출된 바 있다(小山幸伸, 1998: 119). 이때, ‘고율’소작료 문제가 전 국적 이슈로서 제기되려면, 소작료가 고율인지 저율인지에 대한 판단근거가 요 청된다. 소작료에 대한 계수화의 진전이 그 전제조건인 것이다.

넷째, ‘소작료체납처분’과 관련해서는, 체납액의 이자 지불 여부와 계약상 손 해배상조건 및 배상액에 관한 서술이 추가되었다. 체납으로 인한 계약의 해제와 강제집행에 관한 사례, 소송 등 체납에 대해 지주가 취할 수 있는 수단에 대해 서도 추가로 조사⋅서술되고 있다.

다섯째, 1921년 조사에서는 ‘소작지의 제한’이라고 간명하게 되어있던 항목이

1921년 조사에서는 ‘소작지 전대(轉貸)와 소작권의 매매’라는 항목으로 좀 더 구 체화되는 동시에, 지방별 특례도 기재되어 있다. 또, 1912년 조사에서는 단순히 그 관행에 관한 정보만 확인되고 있는데 반해, 1921년 조사에서는 소작권 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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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매매의 이익과 폐해를 두루 열거하고 있다. 조사의 전반적인 결론은 폐해가 이익보다 많은 것으로 평가되어 있는데, 우선 전대의 경우, (1) 지주-소작인 간 의 의사소통에 장애가 되는 점 (2) 소작료에 차액이 생겨나게 되어 일반적으로 소작료가 등귀하게 되는 점 (3) 기간이 단기여서 전차인(轉借人)이 토지에 대한 책임감이 저하되고 토지관리와 경작이 조방화되기 쉬운 점 (4) 불로소득자를 양 산하는 점 (5) 불량소작인이 늘고 소작료미납의 가능성이 높아지며 특히 흉작 시에는 감면교섭을 복잡하게 하여 소작문제의 원인이 되는 점 (6) 연고자나 친 밀한 이들 사이의 전대에는 별 문제가 없지만 중간이득을 거두며 영리적으로 전대를 하는 경우에는 폐해가 많다는 점 등이 보고되고 있다.

다음으로 매매의 경우, (1) 지주와 소작인 간의 의사소통에 저해가 되는 점 (2) 소작권을 얻는데 매수자금이 필요한 점 (3) 소작료를 등귀시키다는 점 (4) 소작권의 매매가격을 점차 등귀시켜 자작농이 되고자 하는 의지를 박약하게 하 는 점 (5) 소작지를 얻기가 힘들어져 중간자를 이롭게 할 뿐이라는 점 (6) 지주 측에서 보면 불량소작인에게 소작지를 넘길 뿐만 아니라 소유권을 자유롭게 처 분할 수 없게 되어 장차 자작하고자 할 경우에는 소작권을 매수해야 하는 폐해 가 발생하는 점 등을 들고 있다(農林省農務局, 1926b: 246~247). 다만, 소작권의 매매와 관련하여, ‘지주의 승낙을 얻지 않는 사례’가 다수 언급되고 지방별로 그 구체적인 가격까지 공공연하게 예시되고 있는 점은 무척 인상적이다. 이것은

󰡔메이지민법󰡕에서 규정된 ‘채권으로서의 임차권’, 특히 제612의 규정이 실제의 현실 속에서는 철저히 관철되지 않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근거라고 할 수 있다.

여섯째, 1921년 조사에는 소작계약의 등기와 관련된 사항이 추가되어 있다.

소작계약의 등기를 매우 드물게 승인하고 있는 소수 지역과 승낙하지 않는 다 수 지역을 열거한 뒤, 그것은 “소유권에 구속을 받고 소작인에게 유리한 계약을 맺을 수 있는” 지주의 우려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農林省農務局, 1926b: 252).

일곱째, 경지정리와 산미검사가 소작관행에 미친 영향은 1912년 조사와 1921 년 조사에 별다른 차이가 없다.

여덟째, 1912년 조사에서 영소작은 그 전국적 면적과 분포에 대한 정보만 간

략하게 보고된데 반해, 1921년 조사에서는 그 특질과 발생원인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이 진행되었다. 특히 “이번 조사를 통해 새롭게 드러난 보통소작과의 차이 점으로는, 일반적으로 (1) 소작기간이 긴 점 (2) 지주가 바뀌어도 소작을 해제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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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없는 것 (3) 보통소작에 비해 소작료가 일반적으로 저율인 점 (4) 소작인이 소작지 일체의 수선, 개량을 부담하는 점”이 열거되고 있다. 이와 함께, “지방별 특례로서 (5) 소작권의 매매, 전대가 빈발하고 소작권의 가격이 높은 곳 (6) 소 작권을 물상담보(物上擔保)로 제공하는 예 (7) 소작인이 공조, 공과 및 수선비의 전부를 부담하는 예 (8) 소작료의 감면이 없는 곳”을 소개하고 있다(農林省農務

局, 1926b: 332~333). 그리고 영소작 면적만이 아니라 그 지방별 명칭, 소재지와

영소작인의 인구수도 전수(全數) 조사하여 계수화(計數化)하여 제시하였다.

아홉째, 1921년 조사에서는 부재지주 항목과 소작지관리인 항목이 새롭게 추 가되어 상세히 조사되었는데, 이 점은 특기해둘 필요가 있다. 부재지주의 소작 료와 일반재주지주(一般在住地主)의 소작료의 차이와 그 이유, 농촌에 거주하는 부재지주의 소작료와 도시에 거주하는 부재지주의 소작료의 차이와 그 이유, 부 재지주와 일반지주의 농촌생활에서의 관계, 부재지주 소작지의 경영의 특성 등 에 관한 정보가 지방별로 수집되어 보고되었다. 다만, 부재지주의 소작지의 소 작료가 일반지주의 소작지의 소작료에 비해 일률적으로 고율인 것은 아니고, 지 방별로 그 고저(高低)에 많은 편차가 있음을 확인하였다(農林省農務局, 1926b:

306~312). 소작지관리인에 관해서는, 관리인을 두는 지주의 종류, 관리인의 지방

적 명칭, 업무의 종류, 관리인의 수와 소작인대비 비율, 보수, 폐해 등이 보고되 었다(農林省農務局, 1926b: 275~283).

토지소유권의 확정과 일본자본주의의 성장에 따라 농촌사회에서는 토지매매 가 활성화되고 인구의 도시이동이 증가했다. 이 과정에서 부재지주와 소작지관 리인이 새로운 사회적 존재로 등장했다. 여기서 소작관행조사를 통해 이들이 하 나의 ‘범주’로서 새롭게 기입되고, 농촌의 문제, 그 중에서도 소작관행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온 존재로 의미화되었다는 점은 새삼 주목을 요한다. 전국적 규모의 지주, 자작농, 소작농 호수 및 그 경작면적에 관한 일련의 정보가 통계치로 수 치화되어 농촌사회의 위기를 매우 간명하게 제시하는 ‘사회적 사실’(social facts,

Durkheim)이자 명백한 과학적 근거로 간주된 것과 마찬가지로, 부재지주와 소작

지관리인이라는 범주를 새롭게 구성해내고 기입하는 조사의 실천을 통해 농촌 사회의 위기에 대한 하나의 정책적 처방, 가령 자작농창정사업으로의 길이 ‘예 비’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1921년의 소작관행조사는 조사통계의 ‘범주’(category)에 의해 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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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사회의 문제가 특정한 방식으로 구성되고, 그 대안 역시 그 범주가 구획한 범 위 안에서만 ‘상상’되어버리게끔 하는 실례로서 다시 응시될 필요가 있다. 조사- 권력은 조사기획 단계에서 특정 범주를 구성하는 과정 그 자체를 통해 이미 행 사되고 있는 것이고, 정책 및 법제의 입안이나 사회운동의 의제결정 과정에서 이 ‘조사-범주’는 가시화되지 않고 은폐되며, 그 결과 자명하고 의심할 수 없는 것으로 자연화되어버리는 사태까지 발생하는 것이다. 이것은 권력이 파놓은 인 식론적 함정이자 인식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이러한 ‘범주화’가 내포한 문제성은 다만 거기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 니다. 예를 들어, “부재지주 鳩山一浪가 홋카이도에 가지고 있었던 수백 정보의 농지나, 소학교 선생이 노후를 위해 월급을 절약하여 매수하고 任地의 관계로 자경할 수 없기 때문에 타인에게 소작하게 하였던 1反步의 토지도 똑같이 부재 지주의 소유지로서 간주되어 취급”되는 문제를 배제, 은폐하는 것이다. 즉, 통계 치의 의미가 탈맥락화(decontextualization)되어버리는 문제이다. 또, “도호쿠 지방 에서 3정보의 자작농은 부농이라고 할 수 없고 낮은 생산력과 생활정도를 보이 고 있는데 반해, 간사이의 농촌에서는 1정보의 보유면적으로도 농촌 내부에서 강력한 힘을 갖는 물질적 기초가 되는 예가 있었다는 사실” 역시 이러한 통계 집계방식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近藤康男, 1953: 13).

(3) 1936년의 조사와 그 이후의 농업조사

1936년의 소작관행조사는 정부에 의해 「농업차지법」(1936)의 심의가 개시된

시기에 이루어진 조사이다. 보고서는 󰡔소작사정조사󰡕(小作事情調査)라는 제목으 로 농림성 농무국에서 1938년에 발간되었다. 소작입법은 1931년 의회에 제출되 어 귀족원에서 심의말료(審議末了)가 되어 유산된 이래로 거의 다루어진 바 없 었고, 이후 수년마다 한 번씩 소작입법이 심의되는 일만 반복되었다. 1936년의 조사는 바로 이런 시기에 이루어진 조사인 것이다. 「농업차지법(案)」 역시 1937 년 「농지법」이라는 이름으로 심의되었지만, 중의원 심의 도중에 중의원 자체가 해산되는 바람에 또 말료로 끝났다. 이후 이 소작입법의 흐름은 1938년에 제정 되는 「농지조정법」(農地調停法)으로 귀결된다(小山幸伸, 1998: 121). 1936년의 조 사는 1921년의 조사에 비해 조사항목에서 거의 변화가 없고 내용 자체도 매우 간략한 편이다. 시계열적 차원에서의 비교를 위해 한 차례 더 시행한 조사로 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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