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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정위기에 대한 정책적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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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 식민지 조선에서의 소작관행조사

이때, 농민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조직화한 것은 ‘착취’라는 정치언어를 통해 이 들을 대표한 사회주의자들이었다. 1924년에 조선노농총동맹이 결성되었고, 1927 년에는 여기에서 조선농민총동맹이 분리되어 나왔다. 전국 각지에서 소작인조합 이 조직되고 농민조직 역시 활성화되어 1931년 기준으로 전국에 1,700여개의 농 민단체가 조직되기도 했다. 1920년대 이후, 소작쟁의는 날로 확대되었고 투쟁도 격렬한 양상을 띠었다(이윤갑, 2013: 111, 118~119; 김동노, 2007: 214).6) 1920년 대 내내, 식민국가는 「민사소송법」(1912), 「치안유지법」(1925), 「폭력행위처벌에 관한 법」(1926), 「경찰범처벌규칙」, 「보안법」(및 「보안규칙」) 등을 법적 수단으로 삼아 이들 농민운동 및 소작쟁의를 탄압하였다.7)

조선총독부 위촉으로 소작제도를 조사하여 󰡔조선의 소작관습󰡕(朝鮮の小作慣

習, 1929)을 펴낸 젠쇼 에이스케는 이러한 사태를 다음과 같이 진단했다. “조선

의 지주와 소작인의 관계는 전통적으로 情誼가 두터웠고 소작쟁의 같은 상스럽 지 못한 분쟁은 종래에는 극히 적었다. 그런데 세계대전 이후 경제계의 동요와 사상계의 혼란에 의해 內地의 각 지방에 농촌문제가 빈발하기에 이르자, 조선에 서도 그런 종류의 소작단체가 생겨나 매우 투쟁적인 분위기를 양성하고 있다. 평온하고 무사했던 조선의 농촌에 지주 對 소작인 관계의 악화를 보게 된 것은 실로 매우 유감스런 일이다. (그러나) 時勢상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아가 그 는, 농촌문제를 매개로 기독교, 천도교 등 민족운동세력이 다액의 돈을 들여 농 촌진흥과 교양에 나서는 등 세력을 확장하고 있고, 적색농민단체도 세포조합을 조직하고 있다고 판단하면서, 이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善生永助, 1929:

57~62).

3장 제국-식민지 농정과 소작관행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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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臨時小作調査委員會)를 설치하고 1928년 2월 8일에 제1회 회의를 개최했다. 이

위원회는 “조선에서의 소작문제를 입법적으로 해결할지 또는 행정적으로 해결 할지를 결정하기에 앞서, 조사항목 및 그 요강을 심의할 필요가 있다”는 인식 하에 총 18회의 회의를 개최하였고, 그 협의의 결과를 토대로 조선총독에게 자 문하였다. 「조선총독부임시소작조사위원회경과보고」(朝鮮總督府臨時小作調査委 員會經過報告)에 따르면, 소작문제 조사항목과 조사요항은 다음과 같다(朝鮮總 督府農林局, 1933a: 64~79).

(1) 소작권의 의의

(2) 소작권의 발생(구두/서면)

(3) 소작권의 효력(대항력, 양도, 전대, 기간, 계속여부) (4) 소작권의 소멸

(5) 소작료(품종과 수량, 납입, 감면, 변경)

(6) 소작관계에 기초한 소작료 이외의 부담(지세, 공과, 노역) (7) 소작지에 대한 비용의 상환과 손해배상

(8) 舍音의 단속(사음의 권한, 설치에 대한 제한, 부당한 사음의 변경) (9) 소작쟁의의 처리

(10) 소작에 관한 지도감독

이 협의 및 결의사항은 조선총독에게 자문안으로 보고되었다는 점에서 중요 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이후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소작입법, 특히 「조선농지 령」(1934)의 입법과정에서 그 근간을 이룬다는 점에서 검토를 요한다. 항목별로 주요사항을 간략히 살펴보도록 하자. 위원회는 첫째, 소작권을 ‘경작을 목적으로 하는 토지임차권’으로 정의했다.[(1)] 둘째, 가급적이면 서면계약을 하도록 장려 하여야 한다는 의견도 피력했다.[(2)]

셋째, 소작권의 효력을 강화하기 위해 소작지임차권 등기가 없어도 소작지를 인도한 경우라면 등기를 한 것과 동일한 효력을 갖게끔 인정해야 한다고 조언 했다. 이것은 「조선농지령」 제12조에 반영되었다. 또, 소작지 임차인은 ‘지주의 승낙이 있더라도’ 원천적으로 소작지를 전대(轉貸)할 수 없게 해야 한다고 결의 했다. 그 이유는 전대로 인해 불로소득이 발생하고 소작관계가 중층화되고 복잡 해지는 폐해가 있으며 이로 인해 소작쟁의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는

2절 식민지 조선에서의 소작관행조사

것이다. 소작인의 전대행위는 현실적으로 소작지 관리인이 행하는 실천과 매우 유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조선농지령」 제13조에 반영되었다. 이와 함 께, 보통소작의 최단기간을 3년으로 상원(桑園)일 경우 10년으로 설정할 것을 제안했다. 소작기간은 가급적 장기로 설정하는 것이 좋지만 소작인이 나태에 빠 질 우려가 있기 때문에 지주 주도의 농사개량을 위해 3년이 적절하다고 결의했 다. 이것은 「조선농지령」 제7조에 반영되었는데, 단 상원의 경우 7년으로 단축 되었다.[(3)]

넷째, 소작료의 경우 법규로써 소작료액을 일률적으로 정하는 것이 불가능하 다는 점을 언급하고, 당사자간 자유계약과 지방의 관습에 따르는 것이 적절한 방법이라고 보았다. 또, 재해 등으로 인한 소작료의 일시적 감면도 지방관행에 비춰 적절하게 감면하는 것이면 된다고 하였다.[(5)] 이 ‘일시감면’ 사항은 「조선 농지령」 제16조에 반영되었다. 그런데, 소작료와 관련해서는 이 자문안은 물론,

「조선농지령」도 이를 일률적으로 결정하거나 규제할 수는 없고 자유계약과 지 방관행에 맡겨야 한다는 인식을 견지했다. 그렇다면 소작료와 일시적 감면율을 결정하는 데에 요청되는 지표나 기준, 즉 ‘지방관행’이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그리고 어떻게 파악될 수 있는 것이었을까? 이 대목에서 생각해봐야 할 것은, 추후 분석할 󰡔慣行󰡕에서 제출된 군단위 소작료표준(평균액)에 대한 일련의 계수 화 자료이다. 이에 대해서는 후술하도록 한다.

다섯째, 위원회에서 사음(舍音)의 존재는 조선소작제도의 병폐 가운데 대표적 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들이 지주와 소작인 사이에서 절대적인 권한을 휘둘러 소작쟁의를 유발한다고 보았다.[(8)] 사음을 규제하려는 시도는 「조선농지령」에 서 대단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여, 제3조, 제4조, 제5조, 제33조(부칙)에 반영되 었다. 여섯째, 소작쟁의를 간이하고 신속하게 해결하기 위해 행정관청의 거중조 정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화해와 중재를 맡을 전임직원을 둘 것을 제안했

다.[(9)(10)] 이 사항은 「조선소작조정령」(1932)으로 입법되었다.

이 자문안은 1928년 그 해에 곧바로 그 진가를 발휘한다. 1928년의 봄 기후는 흉년을 예견할 만큼 좋지 않았고, 조선총독부는 예견되는 농정피폐와 소작쟁의 의 증가에 예방적으로 대처한다는 입장에서 1928년 7월 28일 정무총감 명의로 각 도지사 앞으로 「소작쟁의의 개선에 관한 통첩」(小作慣行ノ改善ニ關スル件通

牒)을 시달했다. 법령의 제정에는 시간이 소요되는 만큼, 일단 응급조치로서 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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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첩을 발표한 것이다(이윤갑, 2013: 129). 그 내용은 앞의 자문안에서 제출된 의견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었다.8)

그러나 소작쟁의를 매개로 한 식민지 통치의 위기는 보다 근본적인 수준의 대책을 필요로 했다. 식민국가는 이 위기를 행정처분과 같은 임시방편적인 고식 지계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대대적인 소작관행조사와 이를 근거로 한 소작입법 을 통해 해결해가고자 했다. 󰡔조선의 소작관행(상)(하)󰡕(朝鮮の小作慣行(上)(下), 1932)으로 대표되는 ‘관행으로서의 소작’에 관한 조사들은 바로 이러한 권력의 지의 산물이었다.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분석해보도록 하자.

서술의 방법은, 소작관행조사(1927~1932)의 결과물로서 1932년 조선총독부 농 무과에서 펴낸 󰡔慣行󰡕을 논의의 중심에 놓고, 우선 (1) 그 이전에 식민지 조선 에서 수행된 관행조사들을 시간적으로 배열하여 비교한다. 다음으로, (2) 조사 및 정리의 방법에서 실질적으로 󰡔慣行󰡕의 전범(典範)이 되었던 1921년 일본의 소작관행조사와 비교하여 그 관계를 확인한다. (1)의 비교를 통해서는, 조사 및 정리의 방법, 범주의 구성방식의 변화과정을 확인하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식 민지 농정의 시기별 의제설정 방식의 차이를 확인하고, 식민국가의 통치능력을 측정해볼 수 있을 것이다. (2)의 비교를 통해서는, 이른바 조사가 내포하고 있는

‘식민성’의 흔적이 부조적으로 가시화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2) 시간적 차원의 비교

식민지 조선에서 이루어진 ‘관행으로서의 소작’에 관한 조사로서 󰡔慣行󰡕이전 의 것으로는, 1922년 조선총독부 내무국 사회과(社會課)에서 수행한 조사와, 조 선총독부가 젠쇼 에이스케를 촉탁으로 임명하여 수행한 조사를 들 수 있다. 사 회과에서 수행한 조사의 자료는 󰡔慣行󰡕(하권)의 참고편에 수록되어 있다. 본고 에서의 서술은 이 자료를 활용한다. 그리고 젠쇼의 보고서는 조선총독부조사자

8) 통첩의 정식명칭은 「朝鮮總督府臨時小作調査委員會ノ上申ニ基ク昭和三年政務總監通牒小 作慣行改善案」이었다. 통첩의 이유를 설명하는 대목에 본부 내에 임시소작조사위원회를 설치하여 시세에 적합한 소작제도의 수립에 대해 필요한 조사를 하게 한 결과, 이번에 해당 위원회에서 의견이 상신되었고, 이 상신의견 가운데 아래의 사항은 조선의 실정에 비추어 속히 그 실행을 요하는 것으로 인정된다”는 언급이 있다(朝鮮總督府農林局, 1933a:

82). 해당내용 및 전문은 󰡔朝鮮ニ於ける小作ニ關スル法令󰡕(朝鮮總督府農林局, 1933a)에 수

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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