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기타 조사: 농가경제조사와 농업생산성조사

문서에서 저작자표시-비영리 - S-Space (페이지 194-198)

󰡔慣行󰡕에 기초하여 이루어진 식민지 조선의 농정은 ‘자작/소작 이분법 인식체 계’ 위에서 구성되었다. 이것은 토지의 소유형태, 경작지형태를 분류의 기준으로 삼은 것이다. 그 계기는 자작농의 생산력이 소작농의 생산력보다 우월하다는 믿

3장 제국-식민지 농정과 소작관행조사

- 176 -

음과, 일본 군부의 총력전론이 전제하는 ‘자작농 애국주의’의 소산으로 볼 수 있다. 통계치의 수집도 이 인식체계 위에서 진행되고 정리되었다. 물론, 거기에 는 실용적 차원에서 수월성도 개입되어 있을 것이다. 다만, 자작/소작 이분법 인 식체계가 농정과 관련된 유일한 분류체계여야 한다거나, 혹은 농정위기를 타개 하는 데에 ‘소작농의 자작농화’가 유일하고 자명한 대안이어야 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에 대해서는 「조선사회성격논쟁」(제4장 제1절)에서 일련의 근본적인 비판이 제출된다. 그 비판은 식민국가의 인식체계와는 다른 분류체계나 개념을 제시하 는 지식실천을 통해서만 성립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당시 동아시아 마르크스 주의자들(특히, 강좌파와 봉건파)은 ‘경작규모의 영세성’(山田盛太郎, 1932)을 지 표로 삼아 ‘소농(小農)부재론’을 제출한 바 있다. 인정식은 이 기준을 수용하여 조선을 분석하는 한편(제4장 제2절), 기존에 총독부 등에서 생산해내는 자료를 가지고는 실제적인 농촌계급을 분류할 수 없다고 하면서, “지주, 부농, 중농, 소 농, 빈농”으로 범주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제4장 제1절). 경영의 규모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를 통해 총독부의 농정의 인식체계(자작/소 작 이분법 인식체계)의 한계를 비판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문제를 해명하고 해결할 수 있는 조사통계는 당시 식민지 조선에 서 매우 드물었다. ‘소농’의 존재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농가경제조사’

를 통해 부분적으로 얻어낼 수 있었을 따름이다. 1925년 사회과에서 펴낸 보고 서에 나오는 ‘농가규모별 1호당 수지상황표’(農家規模別一戸当収支状況表)는 ‘소 농’의 존재여부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에게 매우 요긴한 자료였는데(제4장 제1절, 박문규의 통계치 전유), 단발적인 조사에 그쳤을 따름이다. 이후로는 그런 형태 의 자료를 찾아볼 수 없다.

식민국가에 의해 시행된 ‘농가경제조사’는 1918년, 1933년, 1938년에 각각 수 행되었고 그 보고서를 확인할 수 있다. 우선, 1918년의 조사는 조선총독부 재무 국 임시관세조사과(臨時關稅調査課)에서 󰡔금융과 경제 제6호 부록󰡕(金融と經濟

第6號 附錄)으로 편집한 것으로, 보고서의 정식명칭은 󰡔농가경제상황조사서󰡕(農

家經濟狀況調査書, 1918)였다. 이 조사는 금융조합소재 지방에서 조선인 농가를 상류⋅중류⋅하류의 3개 계급으로 나눠 각 그 대표적인 1가(家)를 선택하여 경 제상황을 조사한 것으로, 조선 전체의 금융조합 267개소에서 조사가 이루어졌

2절 식민지 조선에서의 소작관행조사

다. 결과물은 각 도별 평균치로 제시되었다. 조사시기는 1918년 8월과 9월이었 고, 조사내용은 기왕의 1년간 자산 및 수지의 현황이었다(朝鮮總督府財務局.,

1918: ‘凡例’). 조사의 기재내용을 보면, (1) 가족수(동거인과 雇人을 포함) (2) 재

산(부동산, 동산, 채권, 채무, 純財産) (3) 수입(부동산, 동산, 직업, 부업, 기타) (4) 지출(식료비, 의료비, 주택비, 재산관리비, 조세 기타 공과, 교육비, 기타 지 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 조사는 본격적인 농가경제조사로 보기에 는 여러 한계를 안고 있었다. 상류⋅중류⋅하류라는 계급구분의 기준이 명확치 않았고, 조세행정을 추구하는 재무국의 관심 속에서 금융조사가 강조되어 있었 을 따름이었다. 다만, 이 조사는 동일한 시기 일본과 대만에서도 함께 이루어졌 다는 점이 특기할만한 사항이다.27)

다음으로, 1933년과 1938년 조사는 시계열적인 조사의 성격을 띠고, 1940년에

조선총독부 농림국 농촌진흥과(朝鮮總督府農林局農村振興課)에서 󰡔농가경제상황

조사󰡕(農家經濟槪況調査)로 편집, 출간되었다. 제1부는 ‘자작농의 부(部)’, 제2부

는 ‘소작농의 부(部)’로 편집되었다. 이 조사는 1933년 농가갱생사업의 대상으로 지정된 농가 가운데 가족, 노동능력, 농업경영 등 여러 요소에서 비교적 평균

(‘中庸’)에 해당하는 농가에 대해 5년 뒤인 1938년에 동일 농가를 대상으로 그

변화를 추적한 시계열적 조사였다. 소작농의 경우, 조사된 농가의 수는 총 1,778 호로 읍면당 평균 1개 호였다. 지역별 세부내역은 아래와 같다.

南鮮區 652호: 전북(146호), 전남(216호), 경남(90호), 경북(200호) 中鮮區 560호: 경기(231호), 충북(92호), 충남(87호), 강원(150호)

西北鮮區 516호: 황해(195호), 평남(119호), 평북(90호), 함남(78호), 함북 (34호)

이 조사는 농가당 가족규모와, 아이와 노인을 제외한 실질적인 노동력 규모를 측정한 점, 도별 토지이용률과 경작작물의 구성을 비교적 세밀하게 조사한 점에 가치가 있다. 하지만, 모든 통계치는 위의 남선구, 중선구, 서북선구의 분류체계 에 따라, 권역별 통계치를 제시하는 데에 그쳤다. 소작농가의 수지상황과 관련

27) 일본의 조사는 帝國農會, 󰡔農家經濟調査󰡕(1918)이고, 대만의 조사는 臺灣總督府殖産局, 󰡔 灣農家經濟調査第一報󰡕(1920)이다. 대만의 경우, 1918년에 지방청과 농회에 의뢰하여 조 사를 수행했고, 조사규모는 총 68戶였다. 조사항목은 조선의 경우와 일치한다.

3장 제국-식민지 농정과 소작관행조사

- 178 -

해서도, 농가계급별 및 경영규모별 수지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요컨대, 자작/ 소작 이분법 인식체계 안에서 조사된 것으로, ‘소농’의 존재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통계치는 추출될 수 없는 성질의 조사였던 것이다. 이 조사는, 5개년 간에 걸쳐 진행된 조선총독부의 농가갱생사업의 성과를 알리는, 일종의 프로파간다 자료로서의 성격이 컸던 것으로 판단된다.28)

다음으로, 농업생산성지수의 조사 역시 조선총독부의 조사에서 활성화되지 못 했다. 1937년 아시아태평양전쟁이 발발한 뒤, 일본의 경우 기존의 농업통계는 농촌노동력의 생산성이나 토지생산성 등 ‘생산요소’에 관한 통계가 없어서 농촌 노동력 이출규모를 측정하고 확정짓는 데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통계’였다는 사실이 부각된 바 있다. 이를 해결하려 한 것이 1941년의 농림통계개정이다. 이 상황은 조선총독부 역시 마찬가지였다.29) 조금 아이러니컬한 이야기이지만, 토 지생산성 지표가 전국단위의 일률적인 통계치가 아니라 농업지대별로 확보된 것은, 전향 이후 인정식이 집필한 󰡔조선의 농업기구(증보편)󰡕(朝鮮の農業機構(增 補編), 1940)에서이다. 이 저작은 이론적 차원에서 그의 전향을 표현하고 있는 결정적인 저작인데(제4장 제2절), 이와 동시에 그로서는 (그리고 당시의 조선농 촌경제론에서도) 농정 분석 차원에서 완성도가 높은 ‘절정기 저작’인 셈이다. 이 외에, 개별농가의 노동력규모, 노동생산성, 소비지출내역 등의 지수를 포착해야 한다는 취지하에, 비록 소규모이기는 하지만 사례를 추출하여 조사를 수행해본 것으로는, 조선총독부 농무관료 히사마 겐이치와 야히로 이쿠오(八尋生男)의 조 사가 있었을 뿐이다.30) 사례의 양과 전형성에 절대적인 한계가 있었다.31)

28) 해방 이후인 1948년, 한국에서는 일제시대의 이 농가경제조사를 전례(典例)로 삼아 ‘민족 적 관점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조사가 시행되었다. 금융조합 주관으로 경기도와 충청남 도에서 산간, 평야, 중간의 세 지대로 나눠 총 45개 호를 대상으로 조사가 수행되었다.

관련사항은 李獻榮, 「農家經濟調査槪念實施內容」, 朝鮮金融組合聯合會, 󰡔金融組合󰡕 (1948.10)을 참조.

29) 총력전기 접어들어 농업생산력 측정과 관련하여 부분적으로 조사가 진행된 것으로는, 선총독부 소작관이었던 나카타니 다다오(中谷忠治)의 일련의 보고서를 들 수 있다. 「統 計上に現はれた朝鮮農業生産力の發展とその指標に關する一試驗」(1)(2), 󰡔朝鮮總督府調査

月報󰡕 1942.1~2; 「農業生産力擴充運動を阻むもの」(1)(2), 󰡔朝鮮行政󰡕 1940.8~9.

30) 久間健一, 「農民家族經濟と其の經營規模に關する硏究」, 󰡔水原高等農林學校創立二十五周 年記念論文集󰡕(久間健一, 1935, 󰡔朝鮮農業の近代的樣相󰡕, 西ケ原刊行會에 재수록); 八尋生 男, 1933, 「農家經濟更生計劃樹立の一例」, 󰡔自力更生彙報󰡕제2호(1933.4.20.). 특히 야히로

이쿠오(八尋生男)의 조사는 농촌진흥운동에서 농가의 노동력을 조사한 것으로, 경기도의

한 소작농가의 사례를 자세히 조사하여 보고한 것이다.

3절 소작관행조사와 그 사회적 결과: 󰡔朝鮮の小作慣行󰡕의 권력효과

이런 상황에서, 식민국가의 ‘자작/소작 이분체계’는 식민지 조선의 농정의 ‘인 식체계’ 전반을 지배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상황은 마르크스 주의 이론에 의해 비판적 관점이 확보될 때까지는 지속되었던 것이고, 심지어 그 비판적 관점의 기초가 될 조사사례의 양적⋅질적 제약으로 인해, 현실적인 차원에서는 전혀 해체되지 않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가령, 필연적 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자작농창정사업’에 대해, 이를 기획한 식민국가는 물 론이거니와, 식민지 사회의 일반적 여론도 별다른 이의제기 없이, 식민지 농정 문제 해결에 근간이 될 것으로 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일본 대장성(大 蔵省)에서 제기된 예산문제와 지가(地價) 불안정의 이유로 조선총독부에서 이 사업을 연기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 나오자, ‘민족언론’에서는 이에 대해 조기실 행을 강력히 촉구하는 사설을 싣고 있었을 정도였다.32)

제3절 소작관행조사와 그 사회적 결과:

󰡔朝鮮の小作慣行󰡕의 권력효과

그렇다면 ‘관행으로서의 소작’ 조사의 완결판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방대한 규 모의 보고서 󰡔慣行󰡕이 발간된 이후 식민지 조선의 농정에는 과연 어떤 변화가 발생했을까?

문서에서 저작자표시-비영리 - S-Space (페이지 194-1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