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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과 연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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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역된 소작과 그 사회적 결과

고 고식(姑息)적인 방편(方便)의 논리를 통해 그럭저럭 이해해야하고, 나아가 강 제적으로라도 균질화해야 하는 운명에 처한 이인 것이다.

조사자가 조선의 소작제도를 분류하는 기준은 가령 이런 것이었다(󰡔慣行(上)󰡕: 11).

가장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보통소작’(普通小作)이라고 하면, 이에 대해 ‘특수소작’(特殊小作)이 존재한다. 특수소작 중에는 조선민사례(朝鮮民 事例)에 근거한 ‘영소작’(永小作)과 관습상의 영대소작(永代小作)인 ‘도지’

(賭地) ‘병작’(倂耕) ‘화리’(禾利) 관행(옛날에는 中賭地, 永稅 기타도 있었

다)의 구별이 있다.(강조는 인용자)

잦은 빈도를 보이는 행태를 ‘보통소작’이라 명명하고, 이에 비해 드물게 존재 하는 행태를 ‘특수소작’으로 명명한다는, 분류의 자의성(恣意性)에 대해서는 두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구분법을 채택한 것은 오로지 식민자의 인식 의 편의를 위한 것이었을 뿐, 어떤 명백한 기준이나 준거가 있었던 것은 아니 다.29) 더구나, 특수소작으로 분류된 영소작, 영대소작, 도지, 병작, 화리 등이 과 연 ‘소작’으로 불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인지, ‘소작’으로 분류되어도 되는 것인지 에 대한 의문은 여기서 아예 망각, 삭제되어 있다. 실제적인 의미에서 식민자인 조사자의 이 실천은, 식민지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토지에 대한 관습과 관행을 제국의 법의 언어로 번역하여 분류⋅기입하는 작업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제국-식민지 간 위세(威勢)의 격차가 엄연히 존재하는 권력의 자장(磁場) 속에서 진행된 정치적 실천이었다.

2장 제국-식민지 농정과 토지임차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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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다. 임시대만구관조사회(臨時臺灣舊慣調査會)가 펴낸 관습조사보고서인 󰡔대

만사법󰡕(臺灣私法, 1910) 제1권 “不動産(上卷)”에 따르면(臨時臺灣舊慣調査會,

1910: 571~573),

贌은 부동산의 貸借를 총칭한다. 다시 말해, 부동산의 업주권(業主權. 소 유권에 해당 - 인용자)을 이전하지 않고 특정 범위 내에서 이를 사용하여 수익을 얻는 관계이다. …… 贌 가운데 경작과 목축을 목적으로 한 토지의 임차는 ‘贌佃’인데, 기간의 長短, 권리의 성질에 따라 佃과 永佃으로 나뉜 다. …… 하나는 단순한 토지의 임차로 그 기간이 짧고 贌佃者는 業主(지주 에 해당 - 인용자)에 대해 토지사용의 債權을 취득한 것일 뿐, 토지 그 자 체에 대해 하등의 권리를 취득하지 못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토지의 장기 임차로서 贌佃者는 토지 그 자체에 대해 특정 범위의 物權을 취득한 것이 다. 전자는 佃이라 불리고, 후자는 永佃으로 불린다.

여기서 이 보고서의 작성자는 식민지 대만에 존재하는 ‘복’(贌) 및 ‘전’(佃)을 토지의 임차, 즉 ‘소작’으로서 ‘번역’하고 있는데, 복전(贌佃)을 채권과 물권으로 구분한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이때 그가 서 있는 자리는 󰡔메이지민법󰡕에서의 분 류체계, 바로 그 위이다. 비슷한 시기 남만주철도주식회사조사과(南滿洲鐵道株式 會社調査課)에서 조사⋅편집한 󰡔만주구관조사보고서󰡕(滿洲舊慣調査報告書(後篇:

不動産權), 1915)의 ‘조’(租)에 관한 항목에서도 이러한 분류체계는 다시금 발견 된다. 이 보고서는 대만의 구관조사의 성과를 충실히 인지하면서 그 인식기반 위에서 논의를 펼치고 있다(南滿洲鐵道株式會社調査課, 1915: 1, 11~13).

租란 私法上 부동산의 有償貸借를 말한다. 토지의 유상대차는 租地라고 부른다. …… 永租 및 普通租는 경지를 목적으로 하는 임차관계이다. 전자 는 영원무궁에 걸친 임차관계이고 후자는 단기한의 임대차이다. 永租는 각 종의 官地, 蒙地에서 발생한 관습이다. 永租는 또 永佃이라고 부른다. 永租 의 관습은 支那 일반에 걸쳐 이루어지고 있다. …… 永租관계는 按年活租, 즉 年期小作과 相對하여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臺灣에 서도 역시 永佃 또는 永耕이라고 하여 舊時 곳곳에 이 관계가 발생했음을 알 수 있다. 滿洲에서는 永租가 부쳐진 토지는 각종의 餘地, 管莊地, 隨缺 地, 伍田地 등 각 官地와 寺廟地, 또는 屯會의 공유에 속한 公地 등에 가장

3번역된 소작과 그 사회적 결과

많고, 民地에서는 王公莊田에서는 이것이 보이기는 하지만 일반 民地에서 는 희박한 편이다. 이 토지에 설정된 임차권은 제반의 사정에 의해 장기간 에 걸쳐 物權的 永租權으로 변화했다. 이 권리가 부쳐진 것은 토지소유권 을 제한하는 바가 매우 커서 거의 一地二業主의 결과를 낳는다. …… 原佃 戶가 그 永佃權을 타인에게 讓渡할 때는 承佃者로부터 買價를 수령하기 때 문에, 철도용지로서 이런 종류의 토지를 收用할 때는 地價는 業主와 佃戶 간에 分領해야한다고 한다. …… 현재 민간에서 계약상 이것(永佃權 - 인용 자)을 설정하지 않고, 모두 이른바 按年活租의 債權的 단기 차지계약만을 체결하고 있다. 대만에서도 永佃은 예전 개간이 왕성하게 이루어지던 시대 에 발생한 것으로 오늘날 이를 설정하는 것은 전혀 없다. 대만총독부에서 는 영원히 토지소유권을 제한하는 임차권의 존재가 경제상 해가 된다고 하 여 永佃이라 하더라도 100년을 초과할 수 없다고 정하고 있다(「明治三十三 年臺灣總督府律令第2號」, 강조는 인용자).

중국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영조(永租)의 관습이 일지이업주

(一地二業主), 즉 분할소유권적 속성을 가지기 때문에 토지소유권의 확정에 저

해가 되고, 따라서 그 시기를 100년으로 단축하여 설정한다는 것이 그 요지이 다. 그렇다면 이러한 설정행위의 배경에는 과연 어떤 정치적 목적이 자리하고 있었을까? 그 말을 조금 더 들어보자(南滿洲鐵道株式會社調査課, 1915: 17~18).

경제학설에 따르면 경지의 賃借 관계는 3종으로 크게 나눌 수 있는데, (1) 永小作(Erbpacht) (2) 年期小作(Zeitpacht) (3) 分益小作(Teilpacht)이 그것이 다. 이들은 각국에서 성립되어왔다. 支那에도 존재하고 滿洲의 租 관계도 이와 크게 다를 바 없다. 永小作은 …… 로마법에서 이미 인정하고 있고, 중세의 봉건시대에 歐洲 각국에서 이루어진 제후의 영지, 사원 및 대지주 의 소유지에서의 소작관계는 모두 이 제도에 의거하고 있다. 그런데 그 후, 농민의 사회상태를 개량하려는 정책과 토지경제의 발달이 현저한 흐름이 되자 각국의 입법정책은 영소작제도에 반대하여 농민과 농지의 해방을 실 행했다. 근세에 이르러 이들 제도는 거의 폐지되는 경향이 있다. 일본민법 에서도 봉건시대의 無期永小作을 고쳐 20년 이상 50년 이하의 期間附小作 으로 삼았다(민법 제278조). 만주에서의 永租관계는 곧 구주의 중세 및 일 본 봉건시대에 이루어졌던 영소작이다. …… 최근 支那정부는 官地에서 永 租를 목적으로 하는 토지를 인민에게 불하하는 방침을 취하고 있다. 그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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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는 一地가 다수의 권리자에 分屬되면 헛되이 권리관계의 분규를 불러올 우려가 있고 법률상의 소유자에게 實權이 없어서 오히려 永租權者가 소유 자처럼 되어 명실상부하지 못해서이다. 그러나 그 실제상의 이유는 재정의 결핍을 보충하는 것일 뿐이다(강조는 인용자).

다른 어떤 목적에서가 아니라, 재정의 확보를 위해 배타적인 사적소유권이 확 정될 필요가 있었다는 진술이다. 또, 당시 만주에 남아있는 영조가 유럽과 일본 의 봉건시대에 이루어졌던 영소작에 가까운 관습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이 사태 는 (1) 식민지와 점령지에서 ‘영소작’을 구성함으로써 기존에 관습적으로 보장받 아오던 일종의 분할소유권적 권리를 침해하고 배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 (2) 이 시선은 근대 일본의 식민자(colonizer)가 식민지와 점령지에서 자신의 ‘지나간 과거’를 ‘발견’해내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의 시선이다. 다만, 식민자의 이 시선은 󰡔메이지민법󰡕의 제정과정에 존재했던 무수한 논란들과 자신의 전통적 관습을 철저히 외면⋅망각하고 난 위에서 비로소 성립될 수 있었던 것이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 전반적인 과정 자체가 근대 일본의 ‘식민지적 무 의식과 식민주의적 의식’(小森陽一)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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