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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에서 ‘ 소작계급 ’ 범주의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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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제국-식민지 농정과 토지임차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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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는 一地가 다수의 권리자에 分屬되면 헛되이 권리관계의 분규를 불러올 우려가 있고 법률상의 소유자에게 實權이 없어서 오히려 永租權者가 소유 자처럼 되어 명실상부하지 못해서이다. 그러나 그 실제상의 이유는 재정의 결핍을 보충하는 것일 뿐이다(강조는 인용자).

다른 어떤 목적에서가 아니라, 재정의 확보를 위해 배타적인 사적소유권이 확 정될 필요가 있었다는 진술이다. 또, 당시 만주에 남아있는 영조가 유럽과 일본 의 봉건시대에 이루어졌던 영소작에 가까운 관습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이 사태 는 (1) 식민지와 점령지에서 ‘영소작’을 구성함으로써 기존에 관습적으로 보장받 아오던 일종의 분할소유권적 권리를 침해하고 배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 (2) 이 시선은 근대 일본의 식민자(colonizer)가 식민지와 점령지에서 자신의 ‘지나간 과거’를 ‘발견’해내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의 시선이다. 다만, 식민자의 이 시선은 󰡔메이지민법󰡕의 제정과정에 존재했던 무수한 논란들과 자신의 전통적 관습을 철저히 외면⋅망각하고 난 위에서 비로소 성립될 수 있었던 것이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 전반적인 과정 자체가 근대 일본의 ‘식민지적 무 의식과 식민주의적 의식’(小森陽一)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인 것이다.

3번역된 소작과 그 사회적 결과

국유지 처분의 사례도 마찬가지였다. 구한말 조선통감부 치하에서 대대적으로

진행된 ‘국유지’ 조사(1907~1910)를 통해 이들 토지를 관리해오던, 예컨대 궁장

토(宮庄土)에서의 ‘도장’(導掌)의 권리는 부정되었다. 조선통감부는 도장에게 3년

간의 수확고에 해당하는 금액의 증권을 발행하는 것을 대가로 도장권을 처분하 였다. 기존 조선사회에서 도장권은 자유로이 매매, 양도, 상속이 이루어지고 있 었는데, 조선통감부는 토지에 대한 그 물권적 속성을 소멸시킨다는 기본 방침 하에 이를 정리했던 것이다.

또, 탁지부에서는 1909년 5월 28일 「탁지부소관국유지실지조사절차」(度支部所 管國有地實地調査節次)를 발포하고 국유지 조사에 착수했다. 조사의 핵심적인 목적은 소작인의 조사, 은토(隱土)의 발견, 토지품등(土地品等)을 파악하는 것이 었다. 이때 소작인을 조사한 목적은 중간소작(中間小作)을 배제하기 위한 것이 었다. 그런데 여기서 중간소작자의 지위는 실상 도장의 그것과 동일한 것이었 다. 그러나 도장의 경우는 앞에서처럼 대개 유상(有償)으로 해소한 것에 비해, 중간소작권은 아무 대상(代償) 없이 소멸시켰다. 조선의 중간소작권은 일본에서 의 관행영소작권(慣行永小作權)보다 훨씬 강력한 것이었지만, 일본에서보다 한 층 더 강행적인 방식으로 해소되어버린 것이다(宮島博史, 1991: 334~335, 344~345; 배영순, 1984).

이 전환의 과정이 그저 순조롭고 평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많은 파열음을 발 생했다. 그것은 주로 도지권과 소유권의 관계에 관한 분쟁으로 나타났다. 지주 와 소작인의 분쟁은 점차 빈번해졌다. 1915~6년 즈음에는 지주가 도지권의 존재 를 부인하고 그 경작을 침해하여 소작인으로부터 도지권 확인을 요청하는 청구 가 속출했고, 반대로 소작인의 도지권 주장에 대해 지주가 그 부재를 확인해 달 라고 청구하는 일도 잦아졌다. 소작인 간에 도지권의 매매가 이루어진 결과 분 쟁이 야기되기도 했고, 지주의 변경시 도지권을 부정하는 新지주의 주장으로 인 해 소송이 제기되기도 했다(󰡔慣行󰡕(상): 781~783).

다만, 이렇듯 식민국가에 의한 ‘소작’ 개념의 강제가 가져온 정치적 결과는 다 소 양가적(ambivalent)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토지임차와 관련된 전통 적 관행이 ‘소작’으로 포착되어 균질화됨으로써, 한편으로 전통적 권리가 박탈 되고 상실되었지만, 이와 동시에 이른바 근대적 의미에서의 ‘소작계급’이 탄생 할 ‘물질적 조건’이 확보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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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태를 좀 더 역사적인 시야를 통해 응시해본다면, 소작쟁의를 일으키는

‘소작계급’으로서의 농민의 성격은, 그에 앞서 존재했던 농민의 형태와의 비교 속에서 온전히 파악될 수 있다. 조선시대의 농민운동은 주로 지세의 문제를 둘 러싸고 국가와 국가관료에 대항하는 형태였다. 1862년 진주민란에서 시작되어 동학농민전쟁으로 이어지기까지의 농민운동이 내건 의제는 부패관료의 처벌, 부 패의 원인이 된 정부기구와 제도의 폐지, 그리고 조세제도의 개혁에 관한 것이 었다. 사회적으로 보면, 신분체계에 근거한 사회적 불평등을 시정하려는 노력이 었다. 총액제와 공동납제도는 농민공동체와 촌락의 역량을 강화시키는 제도적 근거였다. 그것은 외부적 위기요인이 있을 때마다 내부를 결속시키는 동력이 되 는 것으로서, 1862년 진주민란에서 그 전형적인 예가 발견된다. 이러한 촌락 내 적 결속력은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으로 인해 조선시대 지세제도의 근간을 이루 었던 결부제와 총액제가 해체되면서 크게 약화되었다. 즉, 토지조사사업으로 배 타적인 사적소유권이 성립하게 되면서 근대적 개인세로 조세제도가 전환되었고, 따라서 농민공동체의 존재조건이 바뀐 것이다. 아울러, 이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총독부의 사회기반력(infrastructural power: Mann, 1986), 특히 사회로부터 정보를 수집하는 능력은 크게 강화되었다(김동노, 2007: 194~210).

다만 여기서 한 가지 유념해두어야 할 점은, 이렇듯 계급의 경제적⋅객관적 위치가 확보되었다고 해서 곧바로 계급 그 자체가 현실 속에서 현현(顯現)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것은 일련의 사회적 변화를 통해 새로운 범주의 사람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단지 그 ‘출발점’에 해당될 따름이다. 생산관계 에서 하나의 계급의 존재위치가 확정되었다고 해서, 이를 가지고 곧바로 그 계 급이 그들 자신의 언어, 즉 집합적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일종의 비약이다. 계급은, ‘인식의 매개’를 통해 ‘계급’으로서 구성되고 확정되었을 때에

30) 이영훈은 조선시대의 전(佃)의 의미를 고고학적으로 탐색하여 조선의 토지소유관계를 분 석하고 소작관계의 기원을 확인하고자 했다(이영훈, 1994). 그러나 이때 전(佃)이나 전부

(佃夫)의 존재조건이 어떤 것인지에 관해서는 여전히 논란 속에 있다. 바꿔 말해, ‘전’

(佃)소작을 동일한 계보 위에 위치시키기 위해서는, 전통사회에서도 토지에 대한 전 일적이고 배타적인 사적소유권이 광범위하게 존재했다는 사실이 먼저 충분히 확인되어 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여기서 전부(佃夫)는 자신의 언어로 스스로를 표현하는 정치화 된 집단범주는 더더욱 아니다. 따라서 전통사회의 ‘전’ 또는 ‘전부’를 근대적 의미의 ‘소 과 등치시키면서 그 기원으로 설정하는 방식의 논의는, 사회구성체의 성격이 다른 두 역사적 사회 속의 존재를 동일시하는, 일종의 시대착오를 야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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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비로소 현실 속에서 실현(realization)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집단형성(group formation; group-making)의 상징적(symbolic) 차 원 및 메커니즘을 분석한 부르디외의 통찰력 있는 연구를 잠시 검토해볼 필요 가 있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계급(classes)은, 삶의 기회를 차등적으로 배분한 결 과 자연스럽게 성립하는 무미건조한 무엇(a brute given)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 적인 비전과 집단구분의 지배적인 원칙으로서 여러 경쟁적인 개념들(지역, 종족, 국적, 젠더, 연령, 종교 등)을 제치고 계급을 부각시키는, 일련의 투쟁적인 집단 형성 작업에 의해 얻어진 결과물이다. “사회집단, 특히 사회계급(social classes)은 과학적인 시선의 개입 이전에 이미 물질적 자산의 분배형태로서 존재하는 무엇 이기는 하지만, 이와 동시에 —예컨대 라이프스타일처럼— 이러한 자산의 분배 를 가늠하는 여러 실천적 지식들에 기초하여 각 행위자들이 서로를 분류하고 재현함으로써 존재하게 되는 무엇이다.”(Bourdieu, 1978: 16; Wacquant, 2013: 276 에서 재인용) 그리고 통상 이 분류와 재현의 ‘상징조작’(symbolic manipulation) 업무를 독점적으로 수행하는 이는, 조합의 대표, 정치인, 관료, 여론조사전문가, 언론인, 지식인 등 일군의 전문가집단이다. 이들은 명명(nomination)이라는 사회 적 기능을 수행함으로써, 사회공간의 객관화된 분리에 기초한 일련의 범주들을 단단한 실체로 고착시킨다(Wacquant, 2013: 276~277).

집단형성의 과정에서 전문가집단에 의해 주도적으로 수행되는 이 ‘명명’이란, 이를 달리 표현하면 ‘기입’(inscription)하는 행위를 의미한다(Hacking, 1986). 본래 의 논의로 돌아와서, 식민지 조선에서 ‘소작’을 명명하는, 바꿔 말해, 종이 위에 그 범주, 항목을 기입하는 실천은 󰡔조선총독부통계연보󰡕에서 목격된다. 구체적 으로, 󰡔조선총독부통계연보󰡕의 ‘경지면적’ 항목에서 [자작지] [소작지]가 구분되 어 기입되기 시작한 것은 1914년도분의 󰡔조선총독부통계연보󰡕(1916년 발행)에서 부터이다. 이에 비해, ‘농업자 호수’ 항목에서 [지주(갑/을)] [자작] [자작겸소작] [소작] [겸(兼)화전] [순(純)화전]으로 항목을 나눠 농가계급별 해당 농가호수를 기재하기 시작한 것은 1929년도분의 통계치가 실린 󰡔조선총독부통계연보󰡕(1931 년 발행)에서부터였다. 다만, 이때의 ‘농업자 호수’의 표 자료에서 집계수치가 확인되는 것은 1916년부터이다. 바꿔 말해, 1916년 이후로 계속 위의 농가계급 분류대로 농가호수를 파악해오기는 했지만 그간 󰡔조선총독부통계연보󰡕에는 기 재하지 않았다가, 1931년에 1929년도분의 󰡔조선총독부통계연보󰡕를 편집하여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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