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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4. 연구의 대상과 방법

이상에서 서술한 본 연구의 문제의식은 2007-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의 동아시 아 전략에 관한 질문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금융위기는 단발적이고 일회적인 사 건이 아니라 미국 헤게모니나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변화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들 을 제기하는 사건이다. 이 때문에 금융위기 이후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 역시 표면 적으로 드러난 동아시아 전략 그 자체에 관한 논의로 국한되지 않는 쟁점을 내포 하고 있으며, 이는 미국 외교정책과 대외관계에 관한 단기적인 분석으로는 파악하 기가 힘든 문제들이다.

특히 금융위기 자체가 미국 헤게모니의 장기적 변화의 산물이며, 그에 대한 대 응이 미국 헤게모니와 세계체계의 진로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커다란 중요성을 갖 는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때문에 금융위기 이후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 분석은 미국 헤게모니의 변화와 그에 조응하는 미국의 세계전략 변화에 관한 분석

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

본 연구는 구조적이고 역사적인 접근방법에 기반해서 금융위기가 미국 헤게모니 의 변화에 있어서 갖는 함의를 분석한다. 이러한 접근방법은 개성기술적

(idiographic) 방법에 입각한 개별적 사건의 나열, 그리고 초역사적인 법칙정립적

(nomothetic) 방법에 입각한 추상적 이론화의 두 가지 편향을 지양하고 장기간에 걸

친 거시적 변화에 초점을 맞추어 구조의 역사적 변동을 설명하려는 시도이다

(Wallerstein, 1991; 2011). 일정한 시간적·공간적 지평 내에서 성장·쇠퇴하는 ‘역사적

체계’로서 자본주의 세계체계와 세계헤게모니에 대한 분석을 통해 세계질서의 변 화를 설명하고자 하는 연구들(Wallerstein, 1983, 2010; Arrighi, 1994; Arrighi and Moore, 2001)이나 주류 국제관계론의 비역사성과 정치-경제의 이분법을 비판하면서 헤게모니 국가의 힘의 원천으로서 세계경제에서의 우위뿐만 아니라 세계적 수준에 서 나타나는 정치적·규범적 토대나 사회세력 형성을 강조하는 연구들(Cox, 1986, 1993b; Rupert, 1993, 1995; Gill, 1993; Gill and Law, 1993) 이러한 시도를 대표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입각해서 본 연구는 미국 헤게모니의 변화를 ‘미국 헤게모니 의 역사적 동학’으로 개념화하고, 미국 헤게모니의 형성과 변화의 주요 계기들을 설명한다. 특히 본 연구는 자본축적 메커니즘의 변화를 중심으로 미국 헤게모니의 변화를 분석한다. 본 연구가 자본축적의 메커니즘에 주목하는 이유는 미국의 물리 적 능력의 핵심으로서 중·장기적 차원에서 미국 헤게모니의 진로에 결정적인 영향 을 미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배와 동의의 변증법’으로 구성되는 헤게모니는 물리적 능력으로 환원 되지 않으며, 헤게모니의 정치적·제도적 토대와 사회적·이데올로기적 토대에 관한 분석으로 이를 보충할 필요가 있다. 헤게모니의 정치적·제도적 토대는 헤게모니 국 가의 힘이나 영향력이 관철되는 방식, 그리고 이에 대한 다른 국가들의 인식이나 전략적 대응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소이다. 헤게모니의 사회적·이데올로 기적 토대는 헤게모니에 대한 동의와 지지의 핵심이며, 자국의 이익을 세계체계의 보편적 이익과 동일화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다. 헤게모니의 정치적·

제도적 토대와 사회적·이데올로기적 토대는 물리적 능력의 변화에 직면한 헤게모 니 국가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 즉 헤게모니 국가의 전략에 영향을 미칠 수 있 다는 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미국 헤게모니의 역사적 동학에 대한 설명을 통해서 본 연구가 강조하고자 하는

제1장. 서론 29

것은 거시적인 구조의 지속이 아니라 구조가 진화하는 동학이다. 자본주의 세계체 계나 세계헤게모니의 순환처럼 장기간 지속되는 구조에 주목하는 동시에, 구조적 설명이 단순한 환원론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구조의 변화를 설명할 수 있는 전략 이 필요하다. 즉 구조의 지속이나 재생산뿐만 아니라 구조 내부의 동학에 의해서 나타나는 역사적 변화와 이행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본 연구는 금융적 축 적의 시작을 미국 헤게모니 변화의 핵심 계기로 설정하고, 1945-71년의 실물적 축 적기, 1970년대의 과도기(실물적 축척의 위기), 1979-2007년의 금융적 축적기로 미 국 헤게모니를 시기구분한다.

2차 세계대전에서의 승리는 20세기 초의 법인혁명과 관리자혁명, 그리고 1930년

대의 케인즈혁명을 기반으로 형성된 미국의 헤게모니적 능력을 확증해주었다. 세 계경제의 생산과 무역은 미국의 압도적인 경제력에 의존해서 전례 없는 속도로 팽 창했고, 미국은 우월한 생산능력에 기반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통해서 세계체계를 재건했다. 미국이 달성한 고도의 생산성 향상은 임금소득의 증가를 통한 조직노동 의 포섭을 가능하게 했고, 자기충족적인 속성을 가진 대륙적 규모의 경제는 식민 지의 독립을 강력하게 지지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미국은 이러한 능력을 토대 로 한편으로는 소련을 중심으로 결집한 공산주의 진영에 대한 강력한 봉쇄전략을 추진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국제제도의 역할을 확대하고 이를 통해서 제3 세계 국가들이나 노동자계급의 요구를 부분적으로 수용하고자 했다. 또한 이 시기 미국의 세계전략은 다른 지역과 국가의 성장과 발전을 동반했고, 이를 통해 미국 은 이데올로기적 지도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실물적 축적기의 미 국 헤게모니는 ‘시혜적’(benevolent) 성격을 띠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1960년대 후반 헤게모니 쇠퇴 징후가 나타나면서 전후 미국 헤게모니를 특징지 었던 요소들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우선 미국 헤게모니의 경제적 토대에서 변화가 나타났다. 1960년대 후반 미국경제의 이윤율이 하락하기 시작하고, 1970년대에 스 태그플레이션이 지속되고, 무역수지가 악화되면서 미국은 더 이상 압도적인 경제 적 우위를 향유하지 못했다. 미국 경제력의 쇠퇴는 미국의 압도적인 능력에 의존 했던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로 귀결되었고, 이에 따라 미국의 정치적 영향력도 쇠퇴했다. 1970년대의 헤게모니 위기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세계전략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브레튼우즈 체제가 붕괴된 이후 통화·금융권력을 활용한 일방주 의적 행보를 취하던 미국은 1970년대 후반의 달러위기를 계기로 거대국제금융과의

동맹을 통해서 헤게모니의 위기에 대응하기 시작했다.

생산에서의 우위는 쇠퇴했지만 통화·금융 권력을 바탕으로 헤게모니를 다시 강 화하고자 한 미국의 시도 속에서 미국 헤게모니의 경제적 토대뿐만 아니라 정치 적·제도적 기제와 이데올로기적 정당화의 메커니즘 또한 완전히 변화했다. 미국은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를 국가적 기획으로 강력히 추진하고, 이

른바 ‘워싱턴 컨센서스’라고 불리는 정책개혁 프로그램을 다른 국가들에게 강제하 면서 헤게모니를 다시 강화할 수 있었다. 또 미국은 통화·금융 권력의 강화를 통해 서 냉전에서 우위를 확보하고 소련과의 지정학적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통화·금융 권력의 강화가 미국의 경제적 우위의 회복은 물론, 일방적인 군사적 우위에 기반한 이른바 ‘단극체계’의 형성에도 기여했던 것이다.

그러나 금융세계화의 확산은 일부 국가와 지역, 나아가 세계체계 전반의 불안정 을 더 심화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금융적 축적이 실물적 축적을 대체하면서 조직 노동을 포섭했던 사회적 타협이 해체되었고, 다른 국가와 지역의 성장을 추동할 수 있는 미국의 역량도 쇠퇴했다. 그 결과 미국 헤게모니의 사회적·이데올로기적 토대가 약화되었다. 미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필요에 따라서 일방주의적으로 행동했고, 기존 국제제도의 기능을 변형시키거나, 이러한 제도들을 우회하고 파괴 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미국 헤게모니의 정치적·제도적 토대 또한 약화되었고, 미 국의 정치적 영향력과 지도력은 축소되었다. 이러한 변화의 결과 미국 헤게모니에

서 ‘동의’보다는 ‘지배’의 요소가 강해졌고, 과거와 달리 미국 헤게모니의 강화는

다른 국가와 지역의 희생을 담보로 한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금융적 축적기의 미국 헤게모니는 ‘약탈적’(predatory) 성격을 띠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2007-08년 금융위기는 1980년대 이후 미국 헤게모니의 변화와 쇄신을 가능하게

했던 금융세계화의 한계와 취약점을 드러냈다. 또 금융위기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신흥국들의 영향력이 커졌고, 이를 기반으로 국제제도들의 지배구조를 개혁해야 한다는 주장도 확산되었다. 나아가 미국이 위기의 진원지였다는 점에서 이른바 ‘미 국 모델’의 정당성과 미국의 이데올로기적 지도력도 약화되었다.

그러나 연준의 통화완화정책이나 재무부의 적자재정정책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미국은 여전히 통화·금융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미국은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를 활용해서 위기에 능동적으로 대응했고, 금융위기 해결을 위한 국제적 공조를 강조 하는 등 자국 중심의 국제정치경제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공세적인 전략을 추진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