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3. 미국 헤게모니의 쇠퇴와 세계전략의 전환
미국 헤게모니의 쇠퇴가 가시화된 1970년대 미국의 대외전략은 과도기적인 성격 을 띠고 있었다. 미국은 한편으로는 ‘닉슨 독트린’으로 불리는 전략을 통해서 대외 전략을 축소하고, 지정학적 긴장을 완화하려는 전략을 추구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으로는 ‘신경제정책’ 등을 통해서 일방적으로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기도 했다. 초 국적 은행 중심의 금융세계화나 ‘선의의 무관심’ 혹은 ‘악의의 무관심’(malign
neglect)은 1970년대 후반의 달러위기로 인해서 지속될 수 없었지만, 금융세계화가
본격화된 이후 미국의 세계전략이 갖는 일방주의적이고 자국본위적인 성격을 예비 하고 있었다.
(1) 닉슨독트린: 지정학적 긴장의 완화와 세계전략의 축소
1960년대 후반 이윤율이 하락하기 시작하면서 미국 헤게모니의 실물적 축적의 위기가 시작되었다. 베트남전에서의 군비지출 증가로 인한 국제수지 및 재정수지 의 악화는 달러에 대한 신뢰를 약화시켰고, 1970년대에 지속된 스태그플레이션으 로 인해서 미국 헤게모니의 경제적 토대는 위기에 빠졌다. 미국 경제력의 쇠퇴는 미국의 능력에 의존했던 전후 국제정치경제질서의 해체로 나타났다. 달러 가치의 안정성에 기반한 금환본위제와 고정환율제가 붕괴되었고, 금융규제가 완화되면서 케인즈주의적 금융억압도 역전되었다.
1960년대 후반 이후의 경제적 쇠퇴와 베트남에서의 패퇴, 발전주의 전략의 실패
와 ‘자유세계’ 내부의 결집력 이완으로 미국은 전후 25년간 유지했던 압도적 우위 와 주도권을 상실했다(McCormick, 1989: 182; Ambrose, 1996: 285-286). 미국의 경제 적 쇠퇴와 군사적 실패로 인해서 미국의 지도력에 대한 의심이 확대되었고, 이는 미국 헤게모니의 정당성의 위기를 야기했다. 미국은 자신의 능력이 갖는 한계를 인정하고 이른바 ‘닉슨독트린’을 통해서 대외전략의 방향을 수정했다. 이에 따라 미국의 대외개입과 지정학적 영향력이 축소되었고, 발전을 위한 정부 차원의 대대 적인 지원과 개입은 ‘자립’에 대한 강조로 대체되었다.
1960-70년대를 거치면서 미국과의 경제적 격차를 줄이는 데 성공한 서유럽과 일 본은 냉전이라는 지정학적 제약 속에서 여전히 군사·안보적으로는 미국에 종속되
제3장. 미국 헤게모니의 역사적 동학과 미국의 세계전략 129
어 있었다. 그럼에도 미국 헤게모니의 변화와 동맹관계의 이완 속에서 과거와 다 른 독립적인 행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서독의 동방정책(Ostpolitik)과 일본의 중국 정책이 바로 그것이다. 서독은 1960년대 말 동유럽 국가들과의 관계를 개선하려는 동방정책을 추진해 1969년 핵확산금지조약에 서명했고, 1970년에는 소련과 불가침 협정을 체결했다(McCormick, 1989: 173-174). 일본은 1960년대 후반부터 중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시도했다. 이에 따라 무역과 직접투자 등 경제적 관계는 이미 상당 한 수준으로 확대되어 있는 상황에서 1972년 「중·일 국교 정상화 공동성명」이 발 표되었다(Goldstein, 2013).
닉슨 독트린은 헤게모니의 약화, 제3세계의 도전, 그리고 ‘자유진영’ 내부의 균 열과 동맹국들의 자율성 강화라는 현실에 직면한 미국의 현실적 대응이었다. 미국 은 데탕트 외교를 통해서 공산권에 대한 봉쇄 완화, 대외개입 축소로 세계전략을 전환했고, 저발전 국가에 대한 군사적·경제적 원조 역시 축소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미국 헤게모니의 실물적 축적기를 특징지었던 세계전략의 핵심 기조로서 반 공·발전주의의 시대가 종료되었음을 의미했다.
미국은 서유럽과 일본이 안보적으로 더 큰 역할을 담당하도록 하고, 소련과 중 국을 협상 대상으로 인정했다. 냉전전략에 입각한 봉쇄는 미국·중국·소련의 전략적 삼각관계로 대체되었고, 경제적 측면에서 미국의 압도적 능력에 기초한 체계는 ‘삼 자위원회’(Trilateral Commission)가 상징하듯이 미국·서유럽·일본의 정책조정으로 대 체되었다.25) 그 결과 미국의 동맹 내부에서도 원심적 경향이 강화되었다.
데탕트 외교는 우선 동유럽에서의 긴장 완화, 그리고 아시아에서 중국과의 관계 개선으로 나타났다. 미국은 1971년의 베를린합의(Berlin Accord)를 통해 동독을 인 정했고, 1974년에는 동독과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또 1972년의 헬싱키합의(Helsinkin
Accord)를 통해서 동유럽의 현상유지를 수용하겠다고 선언했는데, 이는 미국이 동
유럽에서 소련의 우위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했다. 아시아에서 미국은 중·소 분쟁을 활용하는 동시에 중국에 대한 봉쇄를 철회하고 1972년에는
25) 삼자위원회는 뉴딜적 자유주의의 해체에 직면한 서구 자본주의의 지배블럭이 자본주의 진 영의 원심력을 봉쇄하기 위해서 만든 초국적 엘리트들의 네트워크이다. 1980년대 이후 삼 자위원회는 2차 냉전과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를 지지했고, 미국 헤게모니를 유지하기 위 한 정책조정을 주도했다. 세계경제포럼으로 계승된 삼자위원회는 빌더버그 회의의 전통 위 에서 서구 엘리트들의 네트워크를 지향했지만, 조직노동을 배제하는 등 그 사회적 토대는 협소해졌다(Pijl, 1984, 1998; Gill and Law, 1993).
중국을 인정했다. 또 같은 해에 오키나와를 일본에 반환하고, 오키나와에서 핵무기 를 철수시켰다.
닉슨 행정부는 군비를 축소하고 전략무기제한회담(Strategic Arms Limitation Talks: SALT)과 지대공미사일제한협정(Anti-Ballistic Missile Treaty: ABMT)을 통해서 소련과의 전략 무기 경쟁도 완화했다. 그에 따라 1969-75년에 비국방예산이 연간
47억 달러씩 증가하는 상황에서 국방예산은 연간 60억 달러씩 삭감되었으며, 군사
개입이 축소되면서 병력도 감축되었다(Daugherty and Pfaltzgraff, 1986: 359-360).
또 미국은 소련과의 직접적인 대결을 완화하는 동시에 ‘세계경찰’로서 미국의
역할을 ‘지역경찰’들에게 분담시켰다. 여기에는 브라질, 남아프리카공화국, 이스라
엘 같은 전통적인 ‘하위제국주의’(sub imperialism) 국가들뿐만 아니라 이란, 사우디 아라비아, 이라크 같은 산유국이 새롭게 포함되었다. 이러한 변화에는 대규모 건설 사업이나 금융투기, 나아가 무기거래를 통해 ‘석유달러’를 환류시킴으로써 위기에 빠진 미국 헤게모니의 경제적 토대를 회복하려는 목적도 내재되어 있었다(Reifer and Sadler, 1996: 45).26)
또 닉슨 행정부는 이전의 행정부들이 원조와 발전주의 정책을 통해서 너무 많은 목표를 추구했다고 비판했고, 이제 다른 사회를 미국의 이미지대로 개조하는 것은 미국의 임무가 아닌 것으로 규정되었다. 군사적·경제적 원조보다는 자립이 강조되 었고, 닉슨 행정부의 뒤를 이은 포드 행정부와 카터 행정부 역시 정부 차원의 원 조보다는 사적 부문을 강조했다(Daugherty and Pfaltzgraff, 1986: 392). 이에 따라 제3세계에서 미국의 영향력도 크게 축소되었다. 제3세계 국가들은 중심부 산업국 가들 간의 경쟁 격화로 인한 원자재 가격 상승, 달러 유동성의 저렴한 공급 등으 로 인해서 개선된 자신들의 전략적 위치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국제기구에서 제
3세계의 발언권은 커졌고, 세계적인 정치적·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문제제기도 확대
되었다(Reifer and Sadler, 1996: 49; Rist, 2014: 142; McMichael, 2012: 208-210).
미국의 대외전략 축소로 형성된 권력의 공백 속에서 반주변부 및 주변부에서 식
26) 지역 거점 국가의 군사력이 중요해지면서 1970년대 이후 반주변부 중위국가들의 군사적 무장이 급격히 진전되었다. 1970년대 무상재 수준으로 공급된 국제적 달러 유동성도 여기 에 기여했다. 석유파동으로 인해서 막대한 달러 유동성이 공급되었고, 미국의 하위 파트너 였던 일부 산유국들이 미국의 무기를 대량으로 구매했다. 또 무기구매뿐만 아니라 건설계약 발주, 미국 재무부증권 구입 등의 형태로 석유달러가 미국으로 다시 환류되어 달러가치를 지탱해 미국 헤게모니 유지에 기여했다.
제3장. 미국 헤게모니의 역사적 동학과 미국의 세계전략 131
민주의 잔재 청산과 민족해방의 완수, 친미 정권 제거 등의 시도가 연속적으로 출 현했고, 주변부 국가 상호 간의 국지적 분쟁도 증가했다. 또 소련 및 그 동맹국들 과 결탁한 세력들이 발흥했고, 중심부의 강대국들은 이를 통제하지 못했다. 소련이 제3세계 혁명운동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선회하면서 소련의 위상은 오히려 상승했 고, 1970년대 말 미소 간의 긴장이 고조되었다(McCormick, 1989: 225).
(2) 국제적 조정기제의 붕괴와 미국의 일방주의
한편, 미국은 대외경제전략에서는 자국본위의 정책을 강화하면서 헤게모니의 쇠 퇴를 반전시킬 수 있는 대안을 모색했다. 1971년 발표된 ‘신경제정책’(New Economic Policy)은 달러의 금태환을 일방적으로 중지했을 뿐만 아니라 무역적자를 조정하기 위한 10%의 수입과징금도 도입했다. 특히 이러한 정책기조를 토대로 미 국은 주요 흑자국들에게 통화 평가절상과 ‘불공정’ 무역관행의 수정을 요구했다.
특히, 대표적 ‘불공정’ 무역관행으로는 일본의 비관세장벽과 유럽공동체의 공동농 업정책을 표적으로 삼았다. 또 미국은 동맹국들에게 군비 분담을 더 확대할 것을 요구했다(Odell, 1982: 277).
서유럽과 일본은 자국 통화의 평가절상 요구를 수용하는 대신, 평가절상 폭을 완화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을 모색하는 동시에, 그 반대급부로 국제통화질서를 안정화 시킬 수 있는 해법으로 미국에게 달러의 금태환 재개를 요구했다. 주요 국 가들의 협의 결과 스미소니언 합의(Smithsonian Agreement)가 도출되었다. 미국은 달러화의 가치를 금 1온스당 38달러로 변경하는 것에 동의했고, 엔화와 마르크화 의 가치는 달러화 대비 각각 16.9%, 13.6% 평가절상되었다. 애초 달러화의 가치가 변화하지 않는 상태에서 다른 통화들의 평가절상을 목표로 삼았던 미국은 달러화 의 금가치를 평가절하하자는 제안에는 부분적으로 양보했지만, 금태환에 관해서는 비타협적 태도를 유지해 달러와 금태환과 관련된 어떠한 의무도 지지 않을 것임을 명확히 했다(Odell, 1982: 280-287; Block, 1977: 197-198; Helleiner, 1994).
금과 달러의 연계를 단절한 순수 달러본위제 하에서 기축통화 발행국인 미국은 외환보유의 부담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고, 이 때문에 거시경제정책에서도 자율성 을 향유했다. 적자의 누적에도 불구하고 국내경제 조정을 회피할 수 있었던 것이 다. 실제로 미국은 1960년대 후반에 대미 흑자국 통화의 평가절상을 요구했고, 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