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2. 시혜적 헤게모니: 법인자본의 팽창과 반공·발전주의
2차 세계대전과 냉전을 거치면서 압도적인 능력에 기반해서 세계체계를 재조직 한 미국은 뉴딜의 경험을 기반으로 조직 노동자들을 포섭하고, 탈식민주의를 옹호 했다. 미국은 이를 통해 헤게모니의 사회적 토대를 확장하고, 법인자본의 팽창에 우호적인 조건을 조성하고자 했다. 미국은 한편으로는 군사적 케인즈주의와 강력 한 반공정책을 통해서 공산권 국가들을 봉쇄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발전주의에 입각해서 개별 국가들이 자율적으로 발전을 추구할 수 있는 지원을 제공했다. 반 공·발전주의로 요약될 수 있는 미국 헤게모니의 실물적 축적기의 미국 대외전략은 중심부에서 노동자계급의 포섭, 반주변부와 주변부에서 민족국가 단위의 발전을 약속했다는 점에서 시혜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1) 세계체계의 재조직
2차 세계대전 중에 미국은 세계의 공장인 동시에 곡창이었으며, 은행이었다. 유
럽과 일본의 몰락으로 인해 전후 세계에서는 미국과 소련만이 의미 있는 행위자였 고, 미국이 모든 면에서 우월한 능력을 보유했다. 특히 경제력의 우위는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1947년 미국의 금 보유고는 세계 전체의 70%에 육박해 사실상 세계 금융에 대한 독점적 지위를 향유할 수 있었다. 생산능력 및 유효수요에서도 비교 불가능한 수준의 우위를 확보했다.
미국은 이러한 능력에 기반해서 2차 세계대전 이후 국가들 사이의 주권적 평등 의 원리를 대폭 확대한 UN을 건설하고, 거대국제금융에 대한 뉴딜적 통제를 토대 로 한 브레튼우즈 체제를 확립했다. 이를 통해 미국은 세계금융과 국가간 체계를 안정화해서 체계적 축적순환의 지속과 확대를 도모할 수 있었고, 다른 국가들 역 시 민족국가 단위의 발전전략을 추구할 수 있었다.
특히 중요한 것은 브레튼우즈 체제 하의 국제정치경제질서의 성격이었다. 미국 은 뉴딜의 경험을 토대로 형성된 경제관리의 방법을 세계로 투사해서 전후 질서를 건설하고, 자신의 우위를 확고히 했다. 브레튼우즈 체제는 국제 금본위제를 복구했 지만, 그것은 순수한 금본위제가 아니라 달러를 매개로 한 금환본위제로서 금의 중요성을 상대화하고 달러를 기축통화로 채택했다.9) 미국이 전세계 금의 70%를
제3장. 미국 헤게모니의 역사적 동학과 미국의 세계전략 117
보유하고 있는 상황에서 전후 국제통화질서는 미국의 능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 고, 미국의 화폐인 달러가 기축통화로 기능하는 동시에 미국에게 발권이익을 보장 하는 국제통화질서가 형성되었다. 이에 따라 세계시장에 대한 달러 유동성의 공급 은 사실상 미국의 대외정책에 의해 결정되었다(Kirshner, 1995).
또 전간기에 발생한 경쟁적인 평가절하로 인한 폐해를 방지하기 위해 고정환율 제를 실시했다. 무역수지적자가 누적될 경우 1% 범위 내에서의 환율조정이 허용되 었다. 또 무역수지적자가 발생한 국가는 국제통화기금 출연금에 해당하는 대여금 을 자동적으로 인출할 수 있었다. 출연금을 초과하면 IMF가 제시하는 구조조정정 책을 수용하는 한에서 구제금융을 받을 수 있었다. 만성적·구조적 국제수지 적자와 국제준비자산이 대폭 감소하는 근본적 불균형의 경우 IMF와의 협의를 통해 10%
안에서 대폭적인 환율조정도 허용되었다. 이처럼 조건부 평가절하와 국제기구의 지원을 보장한 것은 국제수지 균형의 회복과 통화가치 유지를 위해 모든 부담을 국내경제에 전가하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특히 브레튼우즈 체제는 자본의 국제적 이동을 통제하고, 환율의 안정성을 보장 함으로써 개별 민족국가에게 거시경제정책의 상대적 자율성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중요했다.10) 브레튼우즈 체제는 각국 정부에게 높은 수준의 고용과 임금 보장, 경 제발전을 위해 금융자본의 국제적 이동을 통제할 권리를 부여했고, 이는 케인즈주 의에 기초해서 국민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Helleiner, 1994;
Guttmann, 1994; Eichengreen, 1996).11)
9) 브레튼우즈 회담에서 영국 대표 케인즈는 세계화폐 방코르(bancor)의 도입과 세계중앙은행 으로서 국제청산은행(International Clearing Bank)을 설립을 제안했다. 그러나 미국 대표 화이 트는 기축통화 발행국의 발권이익을 인정하지 않는 케인즈의 안을 반대하고,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발권이익이 보장되는 금환본위제를 주장했다. 케인즈의 제안은 헤게모니 국가의 우 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미국의 압도적 능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국제정치경제의 현실에서 실현 가능성을 결여하고 있었다(Meier, 1974; Helleiner, 1994).
10) 먼델의 ‘불가능한 삼위일체’(Impossible Trinity) 정리가 보여주는 것처럼 자본의 이동성, 환 율의 안정성, 거시경제정책의 자율성은 동시에 달성될 수 없다. 영국 헤게모니 하의 금본위 제가 자본의 이동성과 환율의 안정성을 위해서 거시경제정책의 자율성을 희생한 것이라면, 브레튼우즈 체제의 금환본위제와 고정환율제는 자본의 이동성을 억제하는 대신 환율의 안 정성과 거시경제정책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체제이다.
11) 흄의 가격-정화 플로우 모델(Price-Specie Flow Model)이 보여주는 것처럼 금본위제 하에서 는 통화와 환율의 안정성이 정책의 최우선 목표가 되며, 이를 위해 국내경제는 희생될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반면 미국 헤게모니가 확립한 케인즈주의적 관리통화제 하에서는 국민
한편, 브레튼우즈 회담에서는 국제통화기금을 보완하는 국제무역기구(ITO)의 창 설이 제안되었다. 그러나 이 제안이 미국에 의해서 부결되면서 관세와 무역에 관 한 일반협정(GATT)이 국제무역질서의 수립과 유지를 담당할 다자주의적 제도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GATT 체제는 무차별 원칙과 호혜주의 원칙 하에 참여국 들 간의 관세를 대폭적으로 인하하여 무역의 확대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GATT 체제의 목표는 완전히 자유로운 무역이라기보다는 ‘보다 자유로
운’ 무역이었고, 여러 가지 예외규정을 포함하고 있었다. GATT는 상품무역에만 적 용되었고, 농산물과 서비스, 섬유, 그리고 국제투자 및 반경쟁적 기업행동 등의 국 내경제관행은 제외되었다. 또한 국제수지 불균형의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수입제한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특정산업이 수입으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볼 경 우에는 긴급수입제한조치(safe guard)가 허용되었다(백창재, 2012: 51; Eisner, 1995).
전후 무역질서의 이러한 성격 역시 거대국제금융의 통제와 국민경제의 발전이라 는 전후 국제정치경제질서의 재건방향과 일치한다. 또 그것은 미국 헤게모니의 경 제적 토대 중 하나인 법인자본의 성격에도 조응하는 것이다. 미국의 거대 법인기 업은 다사업부제와 자회사를 통해 세계시장을 내부화했고, 따라서 기업활동의 자 유만 보장된다면 자유무역의 부분적 제한은 이윤추구에 큰 제약이 되지 못했다.
미국이 서유럽에서 자유무역의 제한을 인정하면서도 미국기업의 진출과 활동에 대 한 제한을 용인하지 않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Arrighi, Barr, and Hisaeda, 1999).
국제정치경제질서와 국가간 체계가 기틀을 마련한 상황에서 미국이 재건한 세계 질서가 작동하기 위해서 해결되어야 할 마지막 문제는 달러 유동성의 부족, 즉 ‘달 러갭’으로 알려진 문제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미국이 전세계에 유동성을 공 급해야 했는데, 달러갭을 최종적으로 해결한 것은 ‘냉전의 발명’을 통한 ‘군사적 케인즈주의’와 각종 원조 프로그램이었다. 달러 유동성 공급 과정에서 미국은 세계 중앙은행의 역할을 하면서 유럽을 비롯한 ‘자유세계’ 내에서 달러 유동성 부족 문 제를 해결하고 경제 재건의 토대를 마련했다(Arrighi, 1994: 297, 1999: 234-235;
Block, 1977; Gill and Law, 1993; Eichengreen, 1996; Guttmann, 1994: 458-459).
경제에 신용과 유동성을 공급하기가 용이하다. 정부와 중앙은행이 적자재정을 실행하고, 화 폐발권량과 금리를 적절히 조절해 경기변동에 대응하는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3장. 미국 헤게모니의 역사적 동학과 미국의 세계전략 119
(2) 냉전과 법인자본의 팽창
미국 헤게모니에 의한 국제질서 재조직의 전망과 이를 위한 전략은 2차 세계대 전 전후 구상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루즈벨트는 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국제정 치에서 미국의 권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세계정치의 재조직을 구상했다. 특히 루즈 벨트는 세계의 ‘번영’과 ‘안전’이 미국의 권력과 도덕적 우위에 기반하는 국제적 조직을 통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는데, ‘세계정부’의 구체적인 제도화를 통해 이러한 기획을 현실화하고자 했다.
그가 구상한 세계정부는 미국의 뉴딜을 세계적 수준으로 확장하려는 의식적인 기획이라는 점에서 ‘혁명적’이었고, 소련을 포함한 공산권 국가들과 제국주의에서 해방된 구 식민지 국가들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단일세계주의’(one-worldism)를 지 향했다(McCormick, 1984; Silver and Slater, 1999). 루즈벨트는 1941년 연두교서에서
‘전체주의’에 대항할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종교와 표현의 자유, 그리고 공포와 결
핍으로부터의 자유에 기초한 하나의 세계(one world)라는 이상을 표방했다. 루즈벨 트의 이러한 구상은 2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인 1941년의 「대서양헌장」으로 소급하 는 것으로, 그가 구상한 세계정부의 구체적 형태는 UN이었다(Taylor, 1996)
그러나 냉전으로 인해서 루즈벨트의 구상은 불가피하게 수정될 수밖에 없었다.
뉴딜과 케인즈주의의 세계화에 기반한 세계적 개혁이라는 루즈벨트의 이상주의는 냉전의 시작과 동시에 소련의 영향력 억제를 가장 우선적인 목표로 설정한 트루먼 의 현실주의로 대체되었다. 뉴딜적 케인즈주의 기획 역시 군산복합체와 초국적 법 인자본의 우위에 기초한 ‘국제적 군사 케인즈주의’로 수정되었다. 세계를 미국의 이상에 기반해서 재편하려는 기획은 서유럽과 일본(동아시아)을 자유세계의 요새이 자 발전의 쇼케이스로 만든다는 현실적 목표로 대체되었다.12)
압도적인 물리적 능력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전후의 ‘체계적 카오스’ 상황에서 스스로 팽창하고 세계체계를 재조직할 수 있는 조건을 창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교착상태를 깨뜨린 것이 바로 냉전이었다. 냉전과 재무장은 달러 유동성
12) 이러한 변화는 정부조직의 변화를 수반했다. 1947년 「국가안보법」(National Security Act)이 제정되고, 육군을 관할하는 전쟁부(Department of War)와 해군을 관할하는 해군부(Department
of Navy)가 통합되어, 국방부(Department of Defense)가 창설되었다. 또 백악관에는 국가안보
회의(NSC)가 설치되고, 그 산하에 중앙정보국(CIA)이 설립되었다. 냉전기 미국 대외전략을 규정한 미국 대외전략의 이러한 변화는 NSC-68로 집약되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