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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극장의 증가와 공연예술공간의 확장

문예회관에서의 공연이 활성화되자 대관에 관한 사무 등의 편의를 위 해 우선적으로 극단사무실이 이 지역으로 서서히 이동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극장과 지원기관이 자리잡게 되자 이어 샘터파랑새 극장을 시작 으로 바탕골 소극장, 마로니에 극장 등 민간극장들이 점차 들어서게 되 었다. 특히 신촌에 모여 있던 10여 개의 공연장들이 높은 임대료를 피해 이전하면서부터 동숭동 지역은 문예회관 주변을 중심으로 한 소극장 밀 집공간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특히 문예회관 대극장의 역할은 연극계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면서 이 지역을 연극의 중심공간으로 부상하 게 했다.

‘미추’ 등의 극단 사무실까지 동숭동에 자리잡으면서 대학로 일대는 소극 장의 거리로 변해갔다.

(1) 소극장의 이전 및 개관

지금은 한국 연극계의 중심이 서울 대학로라는 사실이 상식이 되었지 만 연극의 거리 대학로의 역사적 시작은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다. 서울 대학교 문리대, 법대, 미대, 의대 등이 모여있었기 때문에 어느 틈엔가 대학로라 불렸던 종로구 동숭동 이화동 부근이 연극과 관련있는 동네가 된 것은 1980년대 초의 일이다. 그 이전까지 연극의 거리는 명동이었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명동은 오랫동안 연극만이 아니라 문학, 미술 등 여 러 장르 예술인들의 아지트였다.190) 그 한 가지 배경으로 1980년대 들어 서면 예술문화의 공간이 크게 변화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과천으로 옮 겨가고 서울 시내의 미술인들은 인사동을 중심으로 움직였다. 신사동을 비롯하여 강남에 새로운 영화관들이 속속 문을 연 것도 1980년대였다.

그리고 1981년에 동숭동의 문예회관 개관, 서초동 예술의전당 개관으로 공연장의 지도도 크게 바뀌었다. 하지만 문예회관이 개관되었다 하더라 도 금세 연극계에서 대학로시대가 도래한 것은 아니었다. 명동시대에서 대학로시대의 중간에 잠시 신촌시대가 있었다. 연극의 주 관객층인 대학 생들이 밀집해 있는 신촌에는 1970년대부터 몇 개의 소극장이 공연을 올 리고 있었는데, 명동시대가 슬슬 문을 닫으면서 신촌에 소극장이 늘어나 는 현상이 생겼던 것이다. 1970년대에는 이화여대 앞의 민예 소극장 정 도였는데, 1980년대에는 연우 소극장(후에 ‘예술극장 한마당’으로 재개관 했다), 홍익 소극장, 까망 소극장, 신선 소극장, 창무춤터 등의 소극장이 신촌로터리와 이화여대 사이에 밀집해있었다.191)

대학로 일대에는 대략 1986년경부터 소극장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1981년에 문예회관의 개관 이후 1984년 10월에 샘터파랑새 소극장이 개 관했다. 여기에 하나방 소극장과 바탕골 소극장, 연우 소극장이 새로 개 관하면서 연극공간이 조성되다가 1987년부터 1989년까지 7개의 소극장

190) 이영미, 『대학로 시대의 극작가들』, 고려대학교출판부(초판 2쇄), 2010, p. 5.

191) 위의 책, p. 6.

이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연극문화의 공간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192) 이 러한 배경은 대학로에 연극단체, 소극장 등이 밀집하게 되는 장소를 형 성했다. 1980년대 말에는 마당극 세력의 일부가 다시 실내소극장으로 들 어와 연우 소극장을 중심으로 실내마당극이라는 양식을 만들어내기도 했 다. 마당극은 이념적으로 재무장하는 대신 양식적 범주를 넓히면서 ‘민족 극’이라는 명칭으로 아리랑 등 실내극장으로 돌아왔다.193) ‘창작극의 발 굴과 우리 연극의 정착’이라는 문제는 연극계 전체의 공동목표이자 구호 이기도 했다. 그러나 연극계는 실질적으로 그것을 몸소 실천하고 부딪쳐 뒹굴면서 그 현주소와 위상을 찾아내는 노력에서는 소극적이었다. 저마 다 민족연극의 수립을 외쳐대면서도 막상 무엇이 민족연극이며 무엇이 우리 연극인가라는 질문 앞에서는 주저하는 연극인이 더 많은 실정이었 다.194) 그런 점에서 연우무대는 주목해야 할 극단이었다. 연극계에서 하 나의 뚜렷한 개성을 지닌 극단으로 연우무대를 내세우는 것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다. 연우무대는 그만큼 뚜렷한 개성과 자기 목소리와 몸짓을 지니고 있었고 꾸준히 일관성 있는 연극을 해왔다. 이 집단이 한때는 떠 돌이 생활을 면치 못하고 뿌리를 내리지 못했지만, 1987년부터 종로구 혜화동 53의 9번지에 소극장을 마련하면서부터 가장 창조적인 작업을 펴 나왔다.195)

극단 <연우무대>는 창단 당시부터 우리 연극의 발견과 육성이라는 대

192) 정호순(주 179), p. 218. 1986년부터 1989년까지 개관한 소극장은 다음과 같다. 1986년 - 하나 방소극장, 광대소극장, 바탕골소극장, 연우소극장, 미리내소극장/ 1987년 - 청파소극장, 대학 로극장, 홍익소극장, 꿈나무극장, 챔프소극장 3개, 마로니에극장, 는깨소극장/ 1988년 - 현대 토아트홀, 탑거리소극장, 황정순소극장, 한마당예술극장, 신촌무대, 동방예술극장, 홍익소극장, 사랑방소극장, 예당소극장, 대중예술극장, 계몽문화센터 영아트홀/ 1989년 - 동숭아트센터 소 극장, 동숭소극장, 코미디아트홀, 에르나니소극장, 품바예술극장이다. 이 중에서 대학로에 개 관한 소극장은 문예회관 소극장(1981), 샘터파랑새 소극장(1984), 하나방소극장, 바탕골소극장, 연우소극장, 미리내소극장, 대학로극장, 마로니에극장, 황정순소극장, 동숭아트센터 소극장, 동 숭소극장, 코미디아트홀, 에르나니소극장으로 13개소이다. 한국문화예술진흥원, 『한국의 공연 전시장(한국의문화공간 1)』 (정음사, 1989) 참조.

193) 김방옥, 「[한국연극 100년 다시 읽고 싶은 연극론‧비평選 25] 미학적 측면에서의 한국 소극 장운동의 흐름」, 『공연과 리뷰(PAF : the performing arts & film review)』 제21권 제3호 (2015), 현대미학사, p. 59.

194) 차범석(주 133), p. 194 195) 위의 책, p. 186.

전제 아래서 창작극만을 고집하였다.196) 이 작품들은 때로는 정치적 색 채가 농후한 작품이기도 했고, 때로는 제도권에 도전‧항거하는 작품이기 도 해서 어떤 때는 문예진흥원의 지원 대상에서 제외되기도 했다.197) 이 러한 배경이 된 요인으로는 극단 연우의 구성단원들의 공통분모에서 일 련의 상식적인 맥을 짚을 수 있다. 그 첫째가 서울대학교 출신이라는 점 이고, 둘째는, 교내 연극동아리 활동의 경험자라는 점, 셋째는, 민족극 또 는 마당극의 경험자라는 점에서 극단 <연우>의 창작극에 대한 고집과 의지는 너무나도 당연하고 논리적이었다. 그들 말대로 번역 희곡에 의존 하며 방향감각도 잊어버리는 기성연극에 반발하고 나선 그들의 연극선언 은 어쩌면 의식화된 젊은이가 아닐지라도 쉽사리 느낄 수 있는 현실적 감각이라고 볼 수 있다.198) 극단 연우무대는 1977년에 창작희곡 읽기모 임으로 출발했다. 정한룡, 오종우, 이상우, 김민기, 김석만, 김광림, 최형 인 등 주로 서울대 문리대 극회 출신이 주요 단원으로 활동하며, 국내 연극계에 창작극 활성화의 바람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들의 성과는 1970년대의 유신독재와 1980년대의 군사독재에 대한 정서적 저 항을 기초로 하여 관객들과 친밀히 만나는 소극장스러운 연극을 만들어 낸 것이었다. 연우 소극장은 그 보금자리가 되었고 이후 1990년대에는 풍자의 기치를 높게 올린 극단 <차이무>(연출가 이상우)도 독립되어 만 들어졌다. 더불어 1980년대의 저항정신은 극단 <아리랑>(연출가 김명곤) 과 <아리랑소극장>, 극단 <한강> 및 극단 <오늘>과 <축제소극장> 등 을 대학로에 둥지를 틀게 했다.199) 이런 가운데 1980년대 초부터 시작되 었던 연극계의 대학로시대가 화려하게 개화했던 시기는 1980년대 말부터 였다고 할 수 있다. 1990년대로 넘어가면서 소극장들이 대학로로 집결하 면서 신촌시대는 급격히 막을 내리게 되었다.200)

196) 1970년대 <장산곶매>, <우리들의 저승>, 1980년대 <한씨 연대기>, <칠수와 만수>, <변방에 우짖는 새>,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늙은 도둑 이야기>, 1990년대 <마술가게>, <날 보러와요>, <김치국씨 환장하다>, 2000년대 <락희맨 쇼>, <이(爾)> 등의 대표작을 발표했다.

197) 차범석(주 133), p. 194.

198) 위의 책, p. 188.

199) 김윤정(주 127), pp. 327-28.

200) 이영미, 2010(주 190), p. 7.

구분 1960년대 1960-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 이후

지역 명동 지역 세종로 지역 신촌-홍대 지역 대학로 지역

밀집 사유

·국립극장과 드라마 센터 등 거점시설 위치

·국립극장의 장충단 이전과 세종문화회관 건립

·저렴한 임대료

·대학이라는 공간적 이미지

·문예진흥원 입지

·문화공간 이미지

*저렴한 임대료 주요

특징

·번안극을 중심으로 한 극단과 공연장 입지

·다수의 극단 및 공 연관련 시설 입지

·다수의 공연장 입지

·실험연극 및 창작연 극의 출발

·1990년대 초반부터 공연장 밀집시작

·공연 클러스터 형성

(2) 소극장의 운집과 클러스터의 형성

앞서 설명했듯이, 대학로가 문화예술의 거리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 은 문예회관의 설립이 강력한 원인이 되었다. 또한 연극협회는 월간

『한국연극』의 발간, <전국연극제> 등의 사업들을 시행하며 연극인들 의 입지, 역할 등을 부여하였고, 그들이 자생적으로 작품을 생산하고 연 극단체들 간의 유기적 관계를 형성할 수 있도록 네트워크를 구축하였다.

이러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지원주체의 설립은 1990년대 소공연장의 밀집화를 주도하는 중요한 원인이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대학로에 집 중적으로 개관하기 시작한 소극장은 1990년대에 들어와서도 계속적으로 늘어났다. 1990년부터 1994년까지 5년 동안 대학로에는 20개의 소극장이 더 생겨 1989년 말에 13개였던 것이 31개로 늘어났다. 1999년 12월말에 서울시내에 소재한 94개 공연장 중 40여 개가 대학로 지역에 밀집되었 다. 1980년대에 이어 극단전용 소극장이 더 늘어났고 아울러 연극전용 극장도 늘어나게 되었다. 또한 1980년대에 개관한 샘터파랑새, 바탕골, 동숭아트센터, 학전 소극장을 제외하면 대부분 연극인들이 마련한 소극 장이었다. 연극, 무용, 음악 등 다양한 예술의 공연장으로 출발한 다목적 소극장들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체 극단의 필요성을 느끼고 전속극단 을 창단한 것이었다.201)

<표 Ⅲ-3> 연극 클러스터 지역의 변화과정202)

201) 정호순(주 179), pp. 227-29.

202) 서울시정개발연구원(주 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