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도시공원 법령의 제정과 개정

2-1. 공원 확보의 시작 「조선시가지계획령」

1) 시대 상황

1910년 8월 한반도 식민지화를 이룬 일본은 각 부의 장관에게 훈령을 하달하여

제도적으로 시가지계획 사업을 추진하였다. 총독부는 1912년 10월 시구개정(市區改正, 총독훈령 제9호)에 따라 도로, 교량, 하천을 정비하였고 1913년 2월부터는 시가지건축취재규칙(市街地建築取縡規則, 총독훈령 제11호)에 따라 건축 규제를 시작하였다. 1923년 9월 일본 중심부를 강타한 관동대지진의 영향으로 시가지계획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대구, 성진, 진남포 외 23개 이상 대도시와 소읍에도 시가지계획이 수립되었다. 1931년 9월 일본 관동군이 만주사변을 일으킨 이듬해

1932년 3월 만주국 식민지가 만들어졌다. 이후 일본은 만주의 자원을 본국으로

수송하고 본국의 공업 생산품을 만주로 보내기 위해 함경북도에 항구가 필요하였다.

그러나 동년 8월 조선총독부는 나진을 항구와 배후도시로 최종 결정하였지만 이미 땅값이 상승하여 일본과 조선총독부 예산으로 보상∙수용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선총독부는 재정(財政)을 들이지 않고 나진을 신도시로 계획하기 위해

1934년 6월 20일 예고 없이 「조선시가지계획령」을 긴급 제정 공포하였다.4 그 이후

이 제령을 근거로 우리나라 총 41개소의 시가지가 계획되었다.

일제시대의 공원에 대하여 박인재5는 ‘도시공원 실험기’라고 평가하였다. 당시의 공원계획은 근린주구이론(Neighborhood Unit, 1924)을 접목시킨 것으로 유치 거리 소요 면적 등을 기준으로 경성 시가지에 공원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공원은 산림 또는 공공건물 부지에 결정되어 계획 내용은 이론에 충실하였다고 볼 수 없었다.6 근대 공원 초기에는 장충단, 사직단, 효창원, 삼청원 등이 조성되었으나, 대 한인 의식

4손정목, “우리나라 도시계획의 발자취: 법제화 과정을 중심으로,” 『지방행정연구』 1(2), 1986, pp.4-5.

5박인재, 『서울시 도시공원의 변천에 관한 연구』, (상명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2), p.180.

6 「조선시가지계획령」은 ‘근대성(modernity)’의 이념을 대변하였다. 도시화의 대응, 종합 계획, 계량적 접근, 기능주의, 마스터플랜 근대 도시계획의 주요 특징들이 성문화된 규범으로 제시하였다. 나아가 본토 일본의 도시계획의 난점을 극복하기 위해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조선을 백지상태로 가정하여 선진 도시 실험을 국가시무로 삼았다. 이에 대하여 김흥순은 ‘이식된 근대성(implanted modernity)’라고 평가하며

“조선인의 삶과 조선의 공간을 근대적 모습으로 바꾸는데 일조하였지만 내제된 억압성과 보편성의 기계적

맹신”이라는 이중성에 기인하였다고 보았다.

김흥순, “일제강점기 도시계획에서 나타나는 근대성: 조선시가지계획령을 중심으로,” 『서울도시연구』

8(4), 2007, pp.155-173.

교육을 위한 공원정책 일환이었으며 1940년 고시된 시가지계획 공원도 사유재산 행사의 불가 및 방공 녹지 개념 차원에서 이루어진 개발 제한 기능이 주된 목적이었다.7

2) 입법 과정

1919년 4월 4일 일본의 근대 「도시계획법」 제정에 따라 1922년 조선총독부

내무국 토목과는 「조선시가지계획령」 초안을 작성하였다. 8 1921년 8월에는 조선총독부의 소장급 토목 관료와 재경 일본인 자본가들 중심으로 도시계획 수립을 위한 ‘경성부도시계획연구회’를 결성하였고 1926년, 1927년, 1930년 세 차례 경성의 도시계획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막대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법적 뒷받침이 없어 계획은 실현되지 못하였다.9

ㄱ. 지역 상업지역 관공아용지

공원지역 철도용지

주택지역 육군용지

특별지역 이왕가용지

홍수급수면범람지

등고 75m 이상지

공원

ㄴ. 지구 방화지구

방수지구

그림 Ⅱ- 1. 1926년 『경성부도시계획구역설정서』11 에서 나타난 공원의 제도적 위치

공원은 1926년부터 제도권에 편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작성되었던

7김덕삼, 『한국도시공원의변천에 관한연구』, (경희대학교대학원박사학위논문, 1990), pp.138-139.

8 「조선시가지계획령」 초안은 1920년에 작성하였지만 12 동안 제정되지 못하였다. 이유는 당시 일본은 도시계획을 사치스러운 것으로 인식하여 식민지 조선에 시행하는 것은 격에 맞지 않다고 보았다.

손정목, “우리나라 도시계획의 발자취: 법 제도 과정을 중심으로,” 『지방행정연구』 1(2), 1986, p.4.

9손정목, “일제하의 도시계획에 관한 연구(2),” 『국토계획』 120(2), 1985, pp.147-163.

11 京城府, 『京城府都市計劃區域設定書』, 1926, pp. 245~284. 이대우, 『공지(OPEN SPACE)의 규제라는 측면에서우리나라공원정책에관한연구』, (서울대학교석사학위논문, 1976), p.60. 재인용.

『경성부도시계획구역설정서(京城府都市計劃區域設定書)』에 따르면 공원은 특별지역에 포함되었고 관동대지진 시(1923년) 공원은 일종의 피난처로 큰 구실을 하였다고 보고하였다. 특별지역은 지역∙지구제를 뜻하는 것으로 재정을 투입하여 설치하는 시설 계획과 달리 별도의 재정 투입 없이 토지의 지정과 행위 제한만으로 계획 목적에 도달하는 제도이다. 즉, 당시의 공원은 조성하여야 할 시가지계획시설이라기보다는 피난처 역할을 위한 도심지의 공지 확보의 개념이 더 우세하였다고 볼 수 있다.

3) 법령 내용

「조선시가지계획령(칙령 제18호)」은 ‘새로운 일본’ 건설이라는 목표에 근대적 도시와 식민지 건설을 위한 제령(制令)이었다. 제령이란 일본 법률(법령 또는 칙령) 제30호에 따라 제령권을 부여 받은 조선총독이 제정한 것으로 일본에서의 경험을 살리고 식민지에 강력한 행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법의 명령이었다.

「조선시가지계획령」은 도시계획과 건축 규정을 통합하며 총 3장 50조로 총칙, 지역 및 지구의 지정과 건축물 등의 제한, 토지구획정리로 구성하였다. 주요 내용과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제령은 시가지계획 입안권, 결정권, 집행권의 모든 권한을 조선총독으로 일원화하여 식민지 행정 효율성을 우선하였다. ② 제령은 국토계획적 성격이 강하였다.

일본의 법이 기성 도시에 한정하였던 것과 달리 제령은 식민지 조선의 토지를 잠재적 도시로 보고 법 적용의 범위를 전 국토로 하였다. 즉, 제령에 의한 시가지계획은 도시 정비보다는 신시가지를 창설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③ 제령 제3장의 토지구획정리에 따라 조선총독은 강제적인 시가지계획 사업을 시행할 수 있었다. 조선총독은 “시급을 요하는 사항”이라는 단서로 필요하다면 주민 의사와 관계없이 토지구획정리사업을 추진할 수 있었다. 강제적 토지구획정리사업은 토지 소유자에 대한 보상이 불필요한 관계로 토지의 수용을 위한 사업 예산 없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따라서 토지구획정리사업은 “토지의 매수 없이 관계 지역의 지주로부터 토지를 공출

(供出)하여 시설 용지를 취득하는 값싼 시가지계획 수법” 12이었다.

시가지계획시설인 공원은 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시행할 수 있었다. 제령 제3장에 따라 공원 용지의 확보는 조선총독의 승인에 따라 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민간의 토지를 강제 수용할 수 있었고 설치, 변경 또는 해지할 수 있었다. 13 당시 『동아일보』는

12 손정목, 『일제강점기 도시계획연구』, (서울: 일지사, 1990), p.254.

13 제령 제1장(총칙)에서 공원은 도로, 광장, 하천, 항만처럼 조선총독이 정하는 시설이었고, 사업을 시행하기 위해 조선총독은 토지나 위의 물건(건축물)에 대한 소유권 이외의 권리를 사용 있었다[제령6]. 제령3(토지구획정리)함은공원등의 시설을설치, 변경또는해지하는[제령

“시가지령과 그 미치는 영향”을 주제로 장기간 연재하며 공익 사업에 의한 개인의 권리 침해는 보상으로 구제할 수 있다고 하지만 재결(裁決)과 재정권이 조선총독에 있어 훗날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고 예견하였다. 그러나 사직, 삼청동, 장충단 등의 공원 주변은 풍치지구로 지정될 수 있어 유람·산책하기 좋은 장소가 될 것이라고 여론은 기대하였다. 14

기사 내용으로 보아, 공원은 제령으로는 시설 개념이지만 여전히 지구∙지역제 개념이 유지되고 있었다. 풍치지구15는 개발로 인해 시가지 교외의 경관지가 피해를 입는 것을 방지하고, 생산 부분과의 조화를 이루고 도시 내 풍치를 유지함을 목적으로 그 영향을 주는 각종 건축물에 규제를 가할 수 있었다. 1937년 12월

「조선시가지계획령」을 개정한 조선총독부는 녹지지역을 추가하여 공원계획이 지방계획16의 견지에서 처리될 수 있도록 하여 시가지 근교의 산림과 생산녹지를 공원으로 지정할 수 있었다. 즉, 지역∙지구제에 의거한 규제 장치는 풍치 보전 및 위생∙보건 등 공원의 기능을 유지하고 도시 근교지역으로 공원을 확장시킬 수 있는 제도적 근거가 되었다.

2-2. 공원 재건을 위한 「(구)도시계획법」

1) 시대 상황

해방 이후 1960년까지 우리나라의 도시계획은 뚜렷한 정책이 없었다. 기존 시설에 대한 유지관리 예산과 경험이 부족하여 혼란을 겪었다. 한국전쟁 이후 전재 복구는 시급한 과제였지만 농지 개량 및 수리 시설만이 지역개발의 명백을 유지하였다. 도시의 급격한 인구 증가로 빈민가 형성은 도시 문제로 부상하였다. 공원정책도 부재하여 이

42]으로 조선총독만이 사업을 시행할 있고[제령 44] 허가, 취소 정지를 명할 있는 권한[제령 제45조]도 규정하였다.

14 법이 제정(1934년)된 이틀 동아일보는 6월 22일, 27일, 28일, 29일 그리고 7월 3일 다섯 차례에 걸쳐

“시가지령과 미치는 영향,”이라는 주제로 기획 연재하였다.

15 [제령 21조], 조선총독은 시가지계획 구역 내에 있어서 풍치지구를 지정하고 지구 내에 있어서의

토지형질의 변경, 공작물의 신축, 개축, 증축, 대수선 혹은 제거, 물건의 부가 증축, 죽목∙ 토석류의 채취, 기타 풍치 유지에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는 행위의 금지 또는 제한에 관하여 필요한 규정을 설치할 있다.

16 도시의 확장은 도시 내부에 종합적 계획을 필요로 하는데 지방계획은 식료품, 원료품의 공급지인 지방 농촌과 관련해서 기존 시가지의 모순과 교외지 발전의 통제를 통해 도시와 농촌 도시 상호 간의 관계를 종합적으로 계획하는 것을 말한다.

今津重成, 『建築法規(朝鮮市街地計劃令)解說』, (京城: 朝鮮出版社, 1941), p.4. 이대우, 『공지(OPEN

SPACE)의 규제라는 측면에서 우리나라 공원정책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76), p.65.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