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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원론 1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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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원론 1강

2013년 3월 7일 목요일 오후 2:00

굳이 애써 그러는 이유는 포맷을 바꿔보겠다는 건데. 바꾼다는 것은, 저를 교실에서 처음 만나 는 분들은 어떻게 바꾼다는 감을 가지실 수 없겠지만. 조금은 더- 대학원 수업의 분위기로, 강의 보다는 함께 생각하고 연구하고 토론하는, 밀도를, 비중을 높여보겠다는 대형이에요. 그래서 찾은 건데. 비록 이렇게 되어있지만. 강의 대형 교실보다는 지향을 도모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 있다 고 생각하고요. 저와 함께 했던 분들은 변화의 기획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쪽지를 다 돌려주셨나요? 이제 돌리고 있나요?

지난 학기에 이미 쪽지를 돌리기도 했는데. 지난 학기는 예고가 되겠고요. 이번 학기는 이제- 처음부터 시작하는 건데. 조직신학, 타 전공도 있는데. 전공에 관한 체계적인 분류를 조직신학 교 수들이 하기로 해서. 약 2년 동안은 과도기의 과정을 거치고 나서는 행정적인 분류까지 가려고 합니다. 과도기를 두는 것은 교수들도 그렇지만, 학생들의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입니다. 학생 들도 자연스럽게 편재 개편에 들어오도록. 자연스러운 경과의 기간을 두면 좀 더 부담 없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기획입니다. 사실 지금 조직신학에 소속된 교수들이 저와 전현식, 손호현 교수인데. 저는 종교철학. 전현식 교수는 생태, 여성신학. 손호현 교수는 문화신학. 각각 특성이 다르죠. 조직신학이라는 통칭 이름 가운데서도 점점 다르겠지만. 그 전에는 교의신학, Dogamtic Theology. 그 중에 특수하게 Doctrine. 교의신학이라고 부르는 것. 내용이기도 하고 방법이기 도 했던, 내용과 방법이 함께 가면서 전문화되던- 그러면서 조직신학. 하지만 조직신학도 다음 단계로 갈라지고 있어요. 그 다음은? 진행 중이기 때문에- 전환기입니다. 많은 대안이 1980년대 부터 등장했어요. 제가 석박사 공부를 80년대에 하고 91년에 끝마쳤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쓰 던데, 2000년대 넘어오면서 Systematic을 거의 안 써요. 한국은 50년 전에 가지고 온 것을 아 직도 가지고 있죠. 근데 기독교 윤리학의 경우, 조직신학과 함께 있다가, 찢었다가, 다시 함께하 고 있어요. 유럽은 처음부터 함께하고 있어요. 그래서 논문에 따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분류하 지. 근데 한국에서는 아직도, 그리고 연구재단에서는 아직도. 가톨릭은 약간 다르죠. 기초신학.

Fundamental. 변환. 그런 식으로, 움직이고 있어요. 융복합 이야기를 안해도. 그런 흐름. 흐름 이 있어서- 조직신학이라는 큰 틀에 묶이는 것은 언어 습관이고요. 조금 더 세분화. 전문성을 높 이면서 세분화를 하겠다. 융복합을 강조하면서 인문학 사회학을 만나자는 분위기가 고조되는 가 운데, 더 세분화는 역행하는 것 아닌가? 그런 인상을 가질 수도 있어요. 그런데 융복합이 어떻게 진행되는가? 당시 제가 공부할 때의 공부체계- 보다 지금. 30년이 지난 지금. 분류가 훨씬 더 세 분화되고, 쪼개졌어요. 제가 공부할 때는 박사가 6개 분야였는데, 지금은 11개 분야에요. 다른 학교도 모두. 그럼 융복합은 뭐냐? 전문성의 강도를 더 높이면서, 그것이 다른 분야와 연결하는 시도를 하는 거예요. 융복합은 통폐합이 아니라- 전문화! Religion + XX 임. 문화를 붙이고, 사 회를 붙이고. 전공의 세분화로 가는 길. 종교학부 안에, 분야 분류가 개수가 두 배가 되었더라고 요. 우리가 30, 50년 전 패턴을 그대로 고수한다는 것은 곤란하겠고요. 한편으로는 반대방향으로 달리는 상황이에요. 한편으로는 더 집중해야 해요. 그러면서 좁아지는 문제를 극복하는 방편이기 도 하고, 인간 스스로의 요구이기도 하고. 다른 것과 묶이는 요구. 그게 각 분야마다 십분 반영 되면서, 재구성되는 과정이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것을 다 망라할 수는 없겠죠. 그래서 각자 자신의 특성을 살립시다- 그래서 제안을 한 거예요. 그래서 한쪽에서는 종교철학. 그래서 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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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릴 수 있는 분야가 있겠죠. 그리고 생태신학을 전공하겠다- 그게 환경과학의 문제와 관련해서, 여성신학과 관련해서. 좀더 갈 수 있고요. 문화신학도 그렇고요. 신학의 한 분류라고 해도, 그것 이 인문학- 뿐만 아니라 사회과학 자연과학과의 관련성을 도모하는 방식으로. 여기서 신학과 과 학. 종교와 과학- 이슈가 있어요. 신학의 관심분야가 있어요. 그것은 관심일 뿐, 융복합의 시도가 아니고요. 어쨌든. 각각의 학문체계. 전문성과 연계성. 반대방향일 수 있지만, 동시에 그렇게 움 직일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의 종교철학. 그동안은 철학적 신학으로, 철학적 신학이라는 분야, 분 류 안에서 우리 대학원 과정을 3년 6학기 순환체제로 운영했습니다. 첫 학기 철학적 신학- 철학 과 신학의 평행적인 구조- 학문의 역사를 살피는 거예요. 겉핥기로 갈 수밖에 없어요. 그거 나름 대로의 의미가 있어요. 숲 전체를 조망하는. 고대 중세 근대 모두. 점점 더 현대로 오기 위해, 근 현대를 더 집중하는 신학방법론. 그리고 현대를 강조하는 신학적 해석학. 그렇게 하면, 일종의 세 과목의 형식적인 검토- 그거를 끝내면, 어떤 내용을 담아야지. 틀과 얼이 얽혀야 꼴이 나오잖아.

그래서 인간 문제! 내용 문제의 첫 번째가 인간이야. 이미 암시되어있지만. 물론, 신학의 원천은 인간이 아니에요. 그러면 원천은? 그게 방법론이야. 답할 필요는 없어요. 학으로서의 신학의 출발 점으로서 인간이죠. 그래서 인간 문제를 다룹니다. 그래서 인간과 신의 관계. 그래서 마지막에 신 론을 다뤄요. 그래서 그 길로 가고, 기회가 허락하면 그 틀을 시도할 수 있고. 이런 것이 그간 해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종교철학의 이름으로 이것을 극대화합니다.

그러면 종교철학과 철학적 신학의 차이는? 사실 내용이 상당히 중첩돼요. 그리고 종교철학 한 다고 해서, 예전의 것을 폐처분하지 않아요. 그것은 베이스에요. 하지만 그것 위에 뭔가가 보충될 거예요. 그 뭔가가 차이겠죠. 그러면 무엇이 차이일까? 아주 원론적인 얘기를 하자는 것은 아니 고요. 무엇일까? 그걸 여러분이 지나가면서 의문으로 공유하면 좋겠습니다. 그 정도로 지적을 해 두겠고요.

굳이- 그 이름의 표현에 충실해서, 비교를 하자면, 종교철학, 철학적 신학. 여기 키워드가 세 개 나와요. 종교, 철학, 신학. 근데 철학과 신학은 모두 학자가 붙는 학문의 이야기고, 종교는 종 교학이 아니죠. 종교-철학, 철학적 신학의 관계를 살피기 위해, 지나가는 의미에서 좀 말하자면- 그 관계. 어떤 공통점, 어떤 차이를 생각해볼 수 있는지. 계기가 될 것입니다. 세 가지 단어를 떠 올리는데. 종교- 는 아직 학 자를 붙이지 않은 가운데. 각자의 역사가 어떻게 됩니까? 종교의 역 사, 철학의 역사, 신학의 역사는? 부득불, 기독교, 기독교의 배경이 되는 서양정신사의 이야기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 세계로 보면 곤란합니다. 철학의 역사는? 신화로부터 이성으로의 전환이 라는 주전 5세기. 인류문명의 거대한 차축의 시대라고 일컬어지는, 야스퍼스 같은 양반이 비판하 면서 하던 말. 학문 중의 학문, 제일학문인 철학이 시작되는 2500년 전. 특히 제일철학인 형이상 학. 신학은? 그분이 오신 다음- 2000년. 앞에 500년에 약간의 차이가 있겠지. 이 500년을 교부 신학자들이 복음의 준비기간이라고. 정리 작업을 미리 다- 밭갈이를 해놓으셨다. 신학 쪽에서 봤 을 때, 기독교의 눈으로 봤을 때. 그게 신학과 철학의 역사입니다. 그러면 종교는? 연대기로 하 면 얼마나 될까요? 종교의 역사는 곧 인간의 역사죠. 인간의 역사는 얼마가 되었죠? 7000년 설 이 있지만, 5만년 설로 점점 더 과거로 소급되는 마당에. 5만년이 됐든, 50만년이 됐든. 우리에 게는 거기가 거기입니다. 마침, KBS 수요기획에서 나체들이 뒹굴 길래 뭔가 했더니- 아마존에 마지막 남아있는 무리들. 인류 문명의 시원적인 기원, 뿌리의 모습이 우리 눈에는 원시로 보여.

Primary가 primitive로 보여. 그게 문명의 횡포죠. 한 글자 뒤집었는데. 어쨌든. 시원. 원시라고 하는 시대에 대한 몰가치적 판단을 마구 들이댈 것이 아니라. 인류학자들이 열심히 뒤지잖아요.

아프리카의 문명을 찾죠. 생존하는 모습의 시원적인 증거들. 여지 없이- 당연히 그들이 살고요.

살면서 모든 삶의 얼개를 이쁘게 문화로 표현하지 않아도 됩니다. 나중에 인간이해의 범주로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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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하자면 얼마든 문화로 말할 수 있겠지만. 다중다양한 문화의 요소로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은, 문화의 탐구, 삶의 얼개들- 이런 저런 복잡다단한 것이 문명의 복잡화 가운데서도 단 하나의 출 발! 가장 단순하게 출발하는 원형은 종교더라. 그리고 어떤 경우든 예외 없이 표출, 표현형태를 갖는 것이 예술이고. 그래서 종교와 예술은 뗄래야 뗄 수 없어요. 연대기적으로 설정할 수 없어 요. 그래서 저 종교문화학 동네에서, 종교와 문화의 관계를 formal substance. 이제는 진부하게 까지 느껴지는 틸리히의 이야기. 그럴 만큼, 삶의 얼개인 문화의 복잡다단한 진화과정을 다 뒤로 하고도, 가장 처음인게 종교. 그리고 표출방법이 예술. 이렇게 보면, 이상한 언밸런스에요. 철학, 2500년. 신학은 2000년. 그러면 종교철학은? 종교철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 특별한 분 야로 지칭되는 것은 얼마 안 된 일이에요. 종교는 인류의 역사지만, 철학의 역사는 2500년이지 만- 이미 인간과 함께 시작한 종교에, 학문이 출현하면서 철학이 등장하면, 철학의 시작=종교철 학의 시작이 되어야 할텐데. 종교철학의 이름의 시작을 이렇게도 보고, 저렇게도 봐요. 종교학- 종교학의 역사는? 철학이나 신학에 비교도 안 되게 짧아요. 종교학의 역사, 종교에 학 하나 붙이 니 확 달라지는 거야. 2000년의 10분의 1인 200년이야. 종교학의 시작. 그래서 전문적인 의미 에서 종교학. 개별학으로서의 종교학과 보편학으로서의 철학. 준비는 이미 다 되어있는데. 철학이 이미 2500년인데, 특정 교학이 이미 2000년인데. 그 두 개가 결합, 카운트 하는 것은 종교학의 출발과 함께, 응용철학으로서 시작됩니다.

철학의 기본틀은- 실제로 그러했고, 통시적인 흐름이지만- 그러면서 공시적인 구조지만. 학문 이 시작됐어. 그걸 고대라고 말해. 중세까지 긴 시간 동안 지배하던 제 일 철학, 형이상학이 있 었어. 형이상학. 형이상학은 여러분에게 구름 잡는 느낌으로, 일반적으로 그런 이미지로 잡혀있지 만. 형이상학에 대해 가장 일상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존재론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환원될 수 없습니다. 앞선 것은 우주론이죠. 등불을 갖고 돌아다니다가, 하는 말이 '만물 의 뿌리는 물이다'. 이런 이야기는 천천히 하겠지만. 물. 우주론이야. 그러다 존재론적인 성찰로 가. 그러다 해결이 안 되서 신론으로 가. 그래서 우주-존재-신론의 결합이야. 그러다 중세로 가 면? 핵심적인 초점, 타깃이 신이야. 그래서 우주론, 존재론은 신론에 봉사하게 됩니다. 하부구조 가 되고, 신론이 상부구조에요. 탁월한 사례가 스콜라 철학이에요. 이성토대로 하는데. 그들이 엮 어냈던 것이, 보편논쟁에서 이러쿵저러쿵. 보편논쟁이 취하는 신존재증명. 그리고 앞선 실재론이 취하는 존재론적 존재 증명. 존재 대신 쓰는 말이 본체론. 근데 그게 더 헷갈림. 그러니 그냥 존 재론이라고 하면 돼. 우주론적, 존재론적 증명. 신에 대하여. 이게 다 어디서? 형이상학의 기본 구조에요. 우주-존재-신이라는 구조니까. 근데 근대로 넘어오니까 어떻게 돼? 우주론은 더 이상 형이상학의 영역이 아니야. 신론은 이미 교권의 체계로 인해 교권으로 넘어가. 그러면 남는 것?

존재론이야. 그래서 근세 이후에는 존재론만 남아요. 근세 후기에 존재론을 복권시키죠. 신론은 이미 교황의 손아귀고. 우주론은 이미 발전된 애들이 있고. 그래서 존재론만 붙잡아요. 그게 근세 의 모습이야. 그래서 형이상학=존재론 이렇게 새겨도 좋다는 거야. 그러니, 있음에 관한 이야기 야. 쉽게, 있음에 관한 이야기를 형이상학이라고 생각하면 돼.

결국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운명, 씨앗을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에게 가지고 있었어요. 우주 론은 기본, 신론은 응용이야. 그러니 존재론, 있음 이야기야! 있음 이야기가 근데 구체적으로 뭐 냐- 철학 중의 철학, 제일 철학으로서 형이상학, 존재론으로 정리될 운명의 형이상학. 있음 이야 기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가. 삼라만상은 무엇으로부터 왔는가. 그 씨나락 까먹는 듯 한 질문이 왜 중요했죠? 근원 물음을 했어요. 아르케. 뿌리 물음. 나중에 근세 형이상학은 뿌리 물음을 묻 지 않습니다. 뿌리 물음을 했으니 삼라만상을 물었어요. 물과 불, 양립불가야. 겉으로 드러나는 그런 현상의 뿌리를- 결국 신으로 부르게 되겠지- 그런 다양한 현상은 하나니까. 무수히 달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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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거니까. 결국 충돌로 보이기도 하니까. 이런 물음을 던졌어. 배 두둑한 물음으로 보여. 근데 왜 이런 물음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었을까. 근세인들은 뿌리 대신에 뭘 물었을까요? 여러분은 빈 칸을 알아서 찾고, 철학적 인문학적 상상으로 빈칸을 삼아야 해. 알아서. 왜 뿌리 물음을 물었을 까.

그 시대의 사고방식이기도 했지만. 뿌리를 알면- 사랑과 미움이고. 다 소선생1) 이전에 다 씨 름하고 이야기했어. 다원론자들 중에 다 씨름했어. 전쟁과 평화! 헤라클레이토스. 엠페도클레스, 아낙사고라스. 더 줄일 수 없이 대립되는 성질. 그러면 따로 있을 것인가? 따로 없으면 끝없는 그림대로 갈 수밖에 없어. 근거 뿌리가 하나라면? 결국은 그 뿌리가. 잠시 우리에게 충돌하는 모 습으로 보일지라도, 결국 거쳐거쳐거쳐서, 결국 뿌리가 가고자 하는 열매로 갈 수 있지 않을까.

결국 예측 가능해지고, 불안을 극복할 수 있어요. 이런 씨나락 까먹는 듯 한 질문이더라도, 그 근본 동기는 인간의 삶을 위한 거야. 죽음을 겪을 수밖에 없는 삶. 죽음을 겪은 삶.

죽음이 없었다면, 종교도 없었을 것이다. 최근에는 누가 그런 얘기를 했죠? 누가 안 얘기하면, 그렇게 생각 못 해? 동의하십니까? 삶이 두려워서 사회를 만들고, 죽음이 두려워서 종교를 만들 었다. 일단 옆에 두고. 철학은 죽음의 연습이다. 이 두 명제를 결합시켜보십시오. 만물의 서로 달 라 보이는 것들의 근본 뿌리는 하나일까를 향해서, 그런 작업이, 상아탑에서 한가롭게 지적 유희 를 하는 작업이 아니라, 철학은 죽음의 연습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것처럼, 죽음의 문제와 씨름이 라는 거죠. 이런 방식에서 종교로. 저런 방식에서 철학으로. 종교는 문화의 시원이고. 철학은 문 화의 굽이굽이에서 마지막 자락에서 나타나는 모습이죠. 여기에 해당하는 친근한 설명이 우리 수 업계획서에 있는 '종교에서 철학으로'에 있어요. 물론, 서양철학의 이야기지만. 종교가 결국 학문 으로, 철학으로 정착하는 것에 대한 심도 있는 작업입니다.

자. 그렇게 해서, 있음의 문제. 죽음의 문제- 없어짐의 문제, 없음의 문제. 있었다가 없어지는 없어짐의 문제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없어지지 않고 있음. 없는 적도 없는 있음. 있는 중에도 없어질 가능성이 조금도 없는 있음. 그걸 있음 그 자체로 불렀어. Being itself. 그걸 찾으면- 우 리가 잠시 왔다 없어져도. 뿌리가 우리를 보장해줄 것이다. 여기서는 종교와 철학이 분리가 안 돼. 형식적으로도 내용적으로도 동기적으로도 분리가 안 돼.

아닌게 아니라. 플라톤에서 형이상학의 집성이 이뤄지죠. 그전에는 다 갈래였어요. 피타고라스.

우주론 존재론 결합하지. 다 맞아 묶어 묶어 결합해요. 그러다 사랑과 미움이 나오고. 주물럭거리 다가 소선생이 나오고. 그 직전에 소피스트가 나오죠. 있음. 한가한 있음이 아니요. 구름 잡는 소 리가 아니라. 절박한 문제에요. 죽음의 문제에요! 동기, 방향, 지표에 있어서! 오날날 그것을 가지 고 씨름하는 장르가 너무나 달라 보여. 한쪽은 신앙, 한쪽은 이성- 이것도 다 중세에 씨름했던, 어떤 면에서는 구식의 문제지만, 아직도 그거 가지고 두드리는 네오 토미스트들이 있고. 하지만 정신문명사는 훨씬 더 진도가 나갔다고 볼 수 있는 게 아닌가 싶고요. 하여간 있음이 그렇게 한 가한 이야기가 아니에요. 그게 1000년 2000년 지배했어요.

그러다 근세로 넘어와. 그러다 있음 이야기가 당연하고 마땅한 이야기인데. 필요한데, 충분하지 않아. 필요불충분. 충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온 것이- 새 시대의 문제겠지. 철학과 종교는 아니야. 고전적인 철학, 고전적인 종교가 다 그것만 가지고 붙들었어. 그걸 불충분으로 느끼게 한 것은 과학이야. 옳은데. 그럴듯한데. 당신네들- 있음 이야기- 내용은 그렇다 쳐도- 그 꼬락서니 를 보니, 못 참아주겠다. 그게 과학이야. 있음이- 그런 있음의 이야기를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 느냐. 어떻게 있음을 그렇게 말할 수 있고, 파악할 수 있느냐. 앎의 문제. 긴 세월동안, 앎의 문 제를 생각은 해왔지만, 보조로 생각해왔어요. 근데 보조가 아니야. 앎이. 그 동안은 있음대로 알

1) 소크라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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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다고- 아니, 그렇지도 않다고- 독사와 에피스테메. 참지식, 있음대로의 앎이야. 왜 그게 가 능해? 애당초 그렇게 주어져있기 때문에. 물론, 이데아론 때문에 가능하지만. 결국은, 앎의 이야 기를 못 다루고, 줄구장창 지났어. 어디까지나 내내, 앎은 보론이야(해오기는 했어도). 그러다 다 른 동네에서. 과학에서- 무수히 많은 있음, 앎이 나와. 그게 근세 인식론이 됩니다.

그러면 있음과 앎은 어떤 관계인가요? 그 무엇인가 없지 않아 있고. 또 있는 대로 알고. 그러 면- 그 옛날의 첫출발. 죽을 수밖에 없는 삶의 출발을 위한 절박한 질문을 향해 접근할 수 있습 니다. 결합해요. 그래서 형이상학이 다시 복구됩니다. 근세 후기에. 그러니까, 우리 시대 직전까 지. 형이상학은 있음과 앎이에요. 그래서 오늘날도 기본구도는 존재론과 인식론이에요. 아무리 옛 날 얘기여도, 지난 얘기가 아니야. 그게 충분하지 않을 뿐이지, 폐기처분되지는 않았어요. 그게 근세까지 전체가 남긴 유산이죠. 그걸 현대가 곱씹는 작업을 하죠. 그리고 일상에 적용하는 작업 을 하죠. 있음과 앎의 관계에 관한 -희한하게도 또는 당연하게도- 그 반동으로 출발해.

왜 희한하냐면- 죽음에 관해서 던졌거든. 그러면 다 죽음과 관련된 질문인데. 당연히 현실에 밀접해야 하는데, 현실이 그러지 못했어. 출발과 동기가 분명히 그러했는데, 결과가 그러지 못하 고 충돌하는 결과로 내던져지게 되었다는 것이 오늘 우리 시대정신의 전통에 대한 진단이야. 그 러면 왜 그랬느냐. 있음과 앎의 관계 때문이죠. 그러면 어떤 관계에요. 존재론과 인식론이야. 철 학 책을 보면, 개론적인 설명에서는 언제나 이 두 개야. 그 다음에는? 가치론이나 의미론. 이게 이론적인 뼈대야. 그리고 이게 실제 상황에 적용되면, 상황- 정치철학 경제철학 음악철학 미학이 되고. 마찬가지로 종교에 적용되니 적용철학이 되지. Applied philosophy.

근데 반동이 일으킬 수밖에 없는 것은- 한쪽의 관계 일변도로 가서 그래요. 있음과 앎의 같음.

물론, 당연히 그렇죠. 죽음과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좋은 틀이 될 것입니다. 있는 대로 알 고, 아는 대로 있으면. 근데 죽을 수밖에 없는 삶에서 이것을 획득하기에는 너무나 한계가 있어 요. 비타당한 것이 아니라, 불가능해. 타당해요! 바랄 것도 없어. 구할 수만 있다면. 그런데 구할 수도 없어. 왜 구할 수가 없는가? 내가 들고 있는 이 컵. 썩지 않는 플라스틱. 이것 하나 있는 대로 구할 수가 없어. 우리는 100년 뒤에 서 있을 가능성이 없지만, 얘는 플라스틱은 가지고 있 어. 개념이 아니라, 내가 지금 들고 있는 뚜껑이. 그리니 있는 대로 앎을 구할 수가 없지. 이 하 찮은 것으로도. 이걸 실제로 알 수 있다는 것이 실재론이었어. Idealist. 이 방향, 저 방향. 잠시 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영역으로 설정하고. 그게 실재론과 관념론의 싸움이고요. 거기서 이제. 있 음과 앎의 같음이라는 것이 비타당하지는 않지만, 불가능하다. 그러니 정직하게 삶으로 눈을 돌 리자. 그러니 의미론, 가치론이 나와요. 그래서 존재론-인식론-가치론(의미론). 이것은 다 아시는 이야긴데. 제 버전으로 푼 거야. 그러니- 존재론은 있음, 인식론은 앎, 가치론은 삶에 관한 이야 기다! 그러면 텍스트를 어떻게 보던지, 재구성하고 말할텐데. 이제 어휘에 대해서는 같이 공유했 으면 하는 취지도 아울러서 하고요.

원래로 되돌아가봅시다. 이게 원론적인 의미에서 종교철학이다- 그러면 종교철학의 역사=철학 의 역사야. 그러면 2500년이지. 근데 또 다른 뜻이 있다고 했어요. 종교학과 관련해서. 고전적인 의미의 정치철학은 현상 사건 경험 행위. 현상이 행위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이 있습니다. 저쪽에 이르는 현상이야. 사건화해요. 이쪽으로 오면서. 그게 주체로 들어오면 경험이 돼. 그리고 행위를 해. 일련의 트랙이 됩니다. 어디에든 다 돼. 경제든 사회든. 삶을 이루는 영역들. 네 개의 트랙 으로. 그렇잖아! 옛날부터 있었지. 인간의 삶에서 원래 그랬지. 그죠? 제 일 학문으로서의 철학이 바로 성찰을 했겠지. 메타작업을 했겠지. 그래서 정치철학은 철학과 함께 시작했죠. 소선생과의 대화를 기록한 플라톤의 저작들. 그런데 원조로 가면, 존재론으로 올라가요. 우주론은 아닌데. 존 재론에서는 이미 씨앗이 있어요.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이미 고전적으로 융성하게 꽃핍니다.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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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행위는 옛날에 이미 있었어. 씨족사회에서도. 학문 시작 전에도. 근데 정치학은? 16세기. 그 이전에는? 다 그런 것이 만학의 학으로서 형이상학 안에 들어있었어. 아선생2)은 다 했지. 인문학 자 사회학자 자연과학자 다 해. 종교는 말할 것도 없고. 물리학 천문학 생물학 다 해. 플선생3)보 다 더 방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플선생은 너무 저 세상 지향주의야. 근데 아선생은 이 세상.

진리에 대한 애정. 플선생은 그림자라고 했어. 근데 아선생은 저기서 끌어만 주면, 올라갈 수 있 다고 해요.

중세야 학문적으로 진도 나간 게 없지. 그리고 르네상스. 학문의 분화가 일어나. 역시 선두주 자는 형이하학이에요. 초자연의 눈으로 본 것에 대한 새로운 선언들이 나오고. 그리고 정치학. 물 리학자들이 막 떠들어대고, 사회과학 분화되고. 경제학 나오고. 다 16세기. 그리고 17, 18세기.

사회학이 찢어져 나오고. 19세기 넘어오니까- 역사학이 나오고. 역사. 19세기에 또- 종교가 나오 고. 자. 결국 어떻게 돼. 16세기 출현한 정치학- 15세기까지는 다 철학이 담당했어요. 근데 16 세기, 학문의 전문화를 기치로 개별화되어 나왔거든. 종래 어머니 학문에 있던 정치학이 어떤 모 습을 가질까? 철학 자체의 모습이 변합니다. 언제나 메타였어. 언제나 한 발 뒤에서 성찰하는 작 업이었거든. 어떤 모습으로 둔갑해도, 비판적 성찰의 대상이야. 종래는 정치적인 현상 경험 행위 가 대상이었는데. 이제 정치학이라는 학문 분과의 대상으로 나왔거든? 그러면 철학은? 정치학에 대하여! 정치학에 대한 메타의 작업으로 위상을 잡아요. 경제학, 사회학 마찬가지야. 구체적으로?

학문방법론이 됩니다. 그래서 사회과학의 철학. Philosophy of social … 방법론이야. 형식이라 는 이름으로. 가장 기본적으로는 체계성과 논리적인 일관성이야. 개별학문들이- 얼마나 체계적으 로! 전문성을 기치로 하나에 빠지지 않는지. 그게 체계성의 문제야. 그게 작동하는 방식. 논리적 인 방법들. 그게 개별학문에 대한 방법론적인 성찰로서 응용철학이야. 예전에는 그것 자체에 대 한 메타였지만, 이제는 개별학문에 대해서는 메타야. 그러니 종교철학은 종교학이 등장하고 나서 야. 정치학처럼.

이런 설명이 왜 필요하냐? 종교철학의 이름으로 여러분이- 잘 봐요. 이 눈으로 보면, 어떤 것 은 고전적인 방식으로 종교철학을 전개하고, 어떤 것은 근대적으로 전개해. 여기서 단서는 딱 잘 라놨는데. 근세로 그렇게 하니 경계선이 되겠지만, 그렇게 쪼개놓을 때- 고전적인 응용철학은 지 나간 것이라고만 취급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분화되다보니, 철학의 다이내믹스가 그렇게 갔다는 것뿐이지. 그러니 오날날. 다른 응용분야에서도 이 논쟁이 계속 있어요. 물론, 다 타당하지. 부분 적으로. 그렇게 계속 실랭이를 벌인다고. 그래서- 좀 더 직접적으로 보이는 거야. 그런가 하면, 학문적인 방법으로 더 가기도 하고. 그래서 점점 더 수렴적으로 가고 있어. 20세기 후반이야. 방 법론적인 성찰의 고민이- 가장 열심히 한 것이 사회학이야. 방법론 논쟁이 상당히 긴 세월동안 이뤄졌고요. 해석학자들이 많이 했고요. 비판 이론- 특히 아도르노 같은 사람 말고, 마르쿠제, 하 버마스 같은 사람들. 방법론 논쟁의 거목들이지. 점점 수렴해. 고전과 근세가. 거칠게 말하자면, 내용과 형식이 만나는 거예요. 참 거칠게. 근데 따로 떨어진 얘기야? 그럼 오늘 우리 마당에- 그 런 스팩트럼으로 보자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배우는거야. 그런데 그걸 이제 배우는 거야. 그러나 약간의 우리 선배들이 씨름하기 시작해. 이럴 때는 이게 진라야. 저쪽에서는 저래. 그러면 기준을 뭘로 봐야 해? 기준은 그 안에서 나올 수 없어. 기준의 폴은 항상 밖에서. 엑스트라 폴! 학문 바 깥에 둬야 해? 학문에 두면 학문주의로 빠져. 그러면 어디다 둬야겠어요? 당연히, 삶에다 둬야지.

그런데 삶의 현실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천국과 지옥인데. 정반대의 현실을 겪는 삶. 삶은 사 실 굉장히 광범위하고 무책임한 말이야. 현실도. 만만치 않은 작업인데. 그러니 할 만하고 해야하

2) 아리스토텔레스 3) 플라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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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거지. 그런 면에서 종교철학은 다 작업된, in the making. 그 수렴하는 과정이니. 진짜 수렴 의 눈으로 보면 진짜 수렴이고. 정교회와 카톨릭도 만나려고 하잖아. 개신교는 대표가 없잖아.

WCCㅋㅋㅋ 그런 계보와 역사를 종교철학이 갖고 있는 것이고. 그런 고전 패턴과 근현대 패턴이 빙글빙글 돌고 있고, 수렴의 논란도 한 세대 돌고 있고, 말끔하게 정리되지 않고, 우리의 작업을 필요로 하고 있어.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종교철학에 대한 아주 형식적인 디스스크립션이야.

잠시 쉴 건데.

종교철학과 철학적 신학은 어떻게 될까? 얼마나 어떻게 다를까? 철학적 신학에 대한 설명을 안 하더라도. 철학적 신학의 역사는? 똑같애! 2분 내로 끝낼께. 고전적으로는? 대표적인거- 타고 난 사례야. Theologia naturalis. 또는 naturae. 앞에 것이 전통적인 언어. 이 반대가 계시신 학. Revulatus. 위로부터! 아래로부터! 저는 이 표현을- 아주 그냥- 되도 안 되는 것으로 생각하 지만- 도대체 인간이 어디에 있는데, 아래로부터야? 어디 아래? 인간이 위에 있으면 어디 위야?

하여간. 이게 고전적인 의미로 철학적 신학의 한 사례가 됩니다. 자연에 관한 신학, 자연적 신학, 자연의 신학(ae). 생태신학과 관련해서. 위는 철학적 신학(고전적 사례). 철학적-은 방법적 표현이 고, 이거는 내용적이죠. 이성으로 검토해서 올라가서 신까지 이야기하는 방식. 그러다 근현대로 넘어오면서, 학문에 대한 반성으로 덧입어요. 다른 학문들이 그렇게 방법론적인 성찰을 철학과 개별학문 사이에서 하니까, 기독교계도 편승해서 범위를 확장하는 거죠. 이렇게 중첩이 돼요. 벌 어지기도 하고. 근데 결정적인 차이는? 하나는 철학이고, 하나는 신학이에요. 한번 생각 해보시 고.

종교철학에 대한 형식적인 이야기를 대충. 생각하는 대로 갈겼다면. 이제는 내용적인 이야기로 들어갈 텐데. 고전적으로 그리 할텐데- 사상사에서 종교가 어떻게 자리매김된 가운데, 철학이 어 떻게 그것과, 그것을 대상으로 삼으면서 그 패턴을 이리저리 변화시켜 왔는가. 그러면 앞의 형식 과 내용을 붙인 스토리로, 한 단위로 완결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전에.

잠시 쉬었다가.

한 학기 이야기 좀 하고.

허락되는 범위까지 이야기하겠습니다.

초반부터 너무 달려서 죄송합니다.

(휴식) 사실 그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과목 이름만 말하려다가 이렇게 되었네요. 제 신조와는 다르게.

책, 과목 소개와는 비교도 안 되게 중요한- 인간과의 만남을 잠시라도 짚고 가지 못한 기본 불 찰이 있었습니다.

지금이라도 깊이 회개하고. 개과천선해서. 하려고 합니다. 잠시- 교실대형도 아니라, 쌍판을 마 주대하는 대형인데.

인사도 안 하고, 왜 앉아있는지도 모르고. 저도 모르는 사람도 많은데. 죄송합니다.

간단히 소개하는 시간을 가질게요.

행정적인 이야기 좀 하다가.

시간이 허락하는 한까지 이야기하다가.

될 수 있는 대로 시간을 맞추도록 하겠습니다.

제 소개부터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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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종교철학, 철학적 신학을 관심하고요. 연세대학교에서 일하는지는 10년째입니다. 그 전에 는 제가 성공회대에서 12년 있었습니다. 그 전에는 시간강사 생활을 1년 반 했고요. 그 전에는 에모리 대학에서 공부를 했고. 그 전에는 연대 철학과에서 공부했고. 그 전에는… 계속할 것은 없는 것 같고. 늘 경계의 기분으로 살고 있습니다. 공부하는 것도 사는 것도. 조금 자세한 것은 시간과 장소를 바꿔서. 돌아가면서 전공 소속. 그리고 정말- 이런 한 마디는 하고 싶다. 이게 마 이크가 이래서. 어디서부터 할까요. 고도리 방향!

어-

함께 다룰 책에 대해서 얘기를 할 텐데. 이미 수업계획서에 다 있기는 합니다만.

여러분, 사이버교실 공지사항에 올린 이렇게 생긴 수업계획서에 있어요. 먼저 올린 것도 있는 데. 같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올리는 것은, 네모 칸이 우리를 시각적으로 피곤하게 만들어요. 이 렇게 보니까- 3도막으로 되어있어요. 한 장으로 보자면- 단순히 효과- 가 아니라. 전체의 그림 을. 그 그림에 대한 필요를 느낄 때마다, 한 장에 담아낸 것은요.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는지.

전체를 보니까 3토막이다. 개요와 계획.

다음 시간부터, 3시간 동안 1부. 그리고 2부, 3부.

첫 번째는 제목을 이렇게 붙였어요. 종교학적 통찰.

그 다음은 헤센의 책. 책 제목으로 그대로 했습니다.

3번째는 종교의 의미에 대한 철학적 성찰. 먼저. 원초적 종교성이다. 딱딱한 표현이지만. 한 마 디로 줄이면- 이 말을 치환하면, 여러 가지로 할 수 있겠지만. 단어를 줄여야 맛은 아니겠지만.

죽음과 얽힌 삶이라고 할 수 있고. 사람도 되고.

사람 이야기에서 출발하겠다. 근데 너무 막연하잖아요. 인간이란 무엇인가도 중후하지만 폐기 처분하기도 어렵고. 그런 오묘한. 찬란하면서도 질곡스러운 의문인데. 막연한 것의 실마리를 풀기 위해. 종교와 관련한 인간이해. 이런 것으로 새겨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책에서는 삶이라는 말 이 굉장히- 눈여겨보지 않으면 별 뜻 없이 지나갈 것처럼 범람해요. 삶이라는 글자에 동그라미 다 치면 뱅글뱅글 돌아다닐 거예요. 어쨌거나 이것은 삶에서. 사람에서 시작을 해보겠다. 그것과 관련해서 종교. 사람과 관련해서 종교는 중요한 관계로. 왜 그러냐면- 우리는 종교를 생각하고, 논하고. 이러쿵저러쿵 할 때. 사람과 관련해서 라고 하는 것이 사실 망각됩니다. 종교를 종교 자 체로. 논하고자 하는 태도들을 부지불식간에 방치하게 됩니다. 더군다나 기독교로 가면 더 강해 지는데. 기독교라는 종교를 얘기할 때, 시작은 당연히 신이고. 그 다음은 성부니까 성자가 나오 고. 그리고 줄줄이 교리적인 순서가 나와요. 앞에 그런 얘기가 나오기 때문에. 내내 전통이 창조 타락 구원이라는 도식. 우리에게는 굉장히 자연스럽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 바깥에. 창조 바깥 에. 창조신앙에서야 창조 바깥이 없지만, 창조 신앙 바깥은 있습니다. 창조 바깥의 밑자락. 그래 도 인간은 있어요. 그러면- 전제되어야만 성립하는, 그러한 제한된 인간이해와 같은 방식으로. 종 교를, 인간을 최대한 배척합니다. 엑스트라 폴이 없어. 그러니 창조 신앙 바깥을 설정하지 않으 니,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만들 수가 없어. 기독교 신학이 전통적으로 내내 그래왔습니다. 신학의 눈으로 보면 안 보여. 그 테두리 안에서 이야기하니까. 피조물로 봐요. 장황한 얘기는 뒤로 밀고 요. 스미스 책 읽으면서 할 텐데.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다음 이야기. 메타 이야기. 현상 사 건 이야기. 학문에 대해서도. 스미스 자료로도. 다음 이야기를 세미나를 통해서. 그리고 묶고 하 는. 인간과 관련해서 종교라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잠시 잠깐. 특히 기독교 2천년이 우리에게 습 관과 관습, 진리가 되어버린 감각은- 인간이 배제되어야 종교를 종교로서, 종교 그 자체로서 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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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게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을 강박적으로 갖게 되는데, 강박으로 느끼게 되지 않죠. 인간과 관련 해서. 단적인 예를 한번 생각해볼까요? 인간과 종교의 관계를 떠올리지 못한다면? 종교의 본질은 뭐죠? 종교의 의미는 뭐죠? 거창하게 생각할 것도 없어요. 종교의 본질, 의미는 뭐에요? 인간의 삶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구원 받기 위해서. 해방되기 위해서. 종교 자체로만 보아서는 해방이 야. 해방이라고 읽어요. 저 비교 종교학의 이야기로서 역현적, 성현적, 자력, 신현적 종교. 타력이 고 자연이지. 인본과 신본 종교. 그런데도 등급이 어떻든 간에 다 해방을 꿈꿔요. 역현적, 힘을 통해서. 모자란 힘을 보충해서. 겪을 수밖에 없는 한계를 넘어서자는. 인간은 종교에게 해방을 기 대하는데, 종교는 인간에게 해방을 주느냐. 없지는 않아요. 근데 더 많은 경우에, 해방이 아닌- 아니, 해방의 반대 경우도 적지 않다는 거죠. 심리, 사회적인 차원에서.

왜 이렇게 정반대로 갈까? 인간은 종교에서 최대의 욕망을 기대해. 근데 종교는 인간 보고 욕 망을 억제하라고 해. 억제는 그러니까, 초월하라고 해. 사실, 이 충돌의 뿌리가 여기죠. 이걸 앞 으로 우리가 <이중적 양면성>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인간과 종교의 관계의 이중적 양면성, 또는 양면성 관계.

여기서 인간을 제끼면? 종교는- 해방과 초월로 남아요. 멋있잖아요. 처음부터 끝까지 포장할 수 있어. 교리가 그런 거야. 그런데 현실에 착지하지 못하는 이유가 뭐냐? 이 양면성이야. 앞에 관련하여서 라는, 불가분리의. 종교 자체. 기독교가 해왔던 것처럼. 그렇게 하면 해방, 초월 이야 기. 스미스가 그걸 비판해. 읽게 되겠지만. 남의 종교 이야기할 때는 열심히 떠올려. 그런데 자기 종교로 싹 들어오게 되면? 자기는 없어. 종교만 남아. 그렇다고 케노시스의 경지는-당연히!- 아 니지. 그런 비판을 스미스가 하게 됩니다. 일단 종교라고 하는 것. 현상이고, 사건이고, 경험이고, 행위지. 원초적으로 깔려야 하는데, 제껴버린다니까. 그러니 스미스가 정말 예리해. 타자와 자기 의 관계에서 들이댄다니까. 그러니 종교철학이고 뭐고 간에. 다 뭡니까. 상아탑서 탁상공론하자는 거 아니잖아. 다 뭘 위해서? 성찰. Critical reflection. 두 가지 결합인데. 비판과 성찰이라는 말. 한글 어법의 용례를 보자면- 비판은 어디에 접근하느냐? 자기와 타자, 양쪽에 다 걸려요. 타 자 비판, 자기 비판. 동무, 자아비판 해보쇼. 근데 성찰이라는 말은? 타자에 쓰는 말은 아니에요.

비판은 양쪽에 다 걸리지만, 성찰은 자기에게 몰아서 쓰는 표현이거든요. 이걸 좀 정리를- 이런 방식으로 좀 하려고 합니다. 앞으로 편하게. 약속으로. 타자 비판이라고, 자기 성찰이라고. 자기 성찰과 타자 비판. 어휘 정리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중요한 것은 둘의 관계입니다. 스미스가 예리하게 지적하는 것은 뭐에요. 자기 성찰에 대해서는 유보하는 것. 타자 비판만 하고. 사실 여 기서 결정적인 차이는 자기나 타자냐. 그러니까 자기를 어떤 상황과 관련해서 어느 영역, 어느 밀도까지 이뤄지냐에 따라 타자비판과 대립각을 세우기도, 자기성찰로 끌어오기도 한다. 그래서 타자 비판을 자기 성찰의 언어로 승화시킬 필요가 있다. 통찰의 언어를 가지고! 인간을 종교와 관련해서. 그게 첫 번째, 제 1부에서. 스미스가 이런식으로 구도를 막 놓고 친절하게 레토릭을 전개하지 않아요. 우리가 끌어내야해. 그런 식으로 작업을 하자는 거죠.

그 다음에. 그 전제에서. 종교. 3부는 의미라고 했어. 장의 제목을 그대로 써왔어. 2부의 본질 과 진리라고 했어요. 3부, 의미라고 했어요. 사실 아닌게 아니라 그렇습니다. 본질 진리 의미. 두 번째, 세 번째 책 펼치면 제목이 그렇게 나와요. 그래서 그거 그대로 썼어요. 그런데. 제가 지금.

여기에- 맹색이, 명실공히 철학인 마당에. 도구적인 개념들이에요. 최소한 정리를 해볼께요. 철학 개론의 사전적인 이야기들인데요.

기본 뼈대가 있음이라고 했죠? 있음, 앎, 삶. 따옴표를 붙여서 쓸게요. 그냥 지칭어에요. 근데 이걸 탐구하는 구체적인 작업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한자어가 나열되지만, 최대한 한글로 풀어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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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요.

실재인데. 참으로 있는 것이지. 그러니 존재. 그리고 무. 실제로 있는 것은 무다! 없는 것이 있 는 것이다! 벌써 언어의 한계에 부딪히는데. 존재는 한쪽 손만 들어주는 거야. 실재는 참으로 있 는 것인데, 정확하게 말하자면 참인 것. 저 실재를 앎으로 끌고 오면, 그게 바로 진리. 진리는 뭐 야. 참인 것으로 알려지는 것. 이게 진리라고. 삶에서는-이게 가치론이라고 했어. 가치야. 의미.

자. 여기서는 참되게 살게 하는 것. 가치라는 말도 마찬가지. 이렇게 풀어볼 수도 있겠죠. 그러면 있음 앎 삶. 실재-진리-의미가 있어. 근데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 존재론이라는 말을, 버려. 실 재, 진리. 고 중세의 지배 언어라고 했습니다. 근세, 현대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공시적 -synchronic-한 구조이기도 하면서, 고중근세의 통시적인 구조이기도 해. 실재가, 진리가, 의미 가 가장 중요하게 되는 흐름! 가로와 세로축. 씨줄과 날줄의 구조이기도 한 거예요. 조금 뒤로 밀고. 공시적인. 참인 것이 존재와 무라는 주장이 있어요. 근데 존재도 또 갈라져. 본질과 실체.

무는 실존과 관계. 참인 것인데. 그것도 없지 않고 있어. 아니야. 있음마저도 뭔가 참인 것을 방 해하는 왜곡이야. 이 무 전통에서 진하게 표현하는 것은, 압축돼서 보니까 그렇게 보이는 것이지, 풀어서 보면 볼 수 없는 무규정적인 것이야. 이게 팽팽히 맡서죠. 이 존재는 있음 중의 있음을 지상목표로 포장할 것 아니야. 그러니 신이 되는 거야. 작게는 존재론, 크게는 형이상학. 그러니 이런 본질과 실체라는 것으로 씨름했어요. 본질과 실체는. 이 말들을 보세요. 그래도 무 실존 관 계는 좀 보여. 그런데 실재 존재 본질 실체는 다 비슷해 보여. 우리를 가장 괴롭히는 말들. 어디 가 어디에 걸쳐- 근데 가장 큰 것은 이거야. 이렇게 범주화하자고. 물론, 엉키는 경우도 있지만.

실재는 양쪽에 다 걸려. 우선 네이밍만 깔아보자고. 관계는 간단히 끝나는데. 다들 대립되겠지.

대립되는 방면이 다 있어. 그러면서 본질-실존, 실체-관계도 대립이야! 딱딱 대립을 형성해. 본질 과 실체의 대립은 플라톤 아선생 대립. 본질과 실존은 현대에 와서 대립하기 시작해. 실체와 관 계는 아선생은 택도 없어. 그런데 현대로 넘어와서, 정면으로 부딪혀. 정말 대항마로. 작은 지류 속성이 아니야. 이 안에 철학사가 다 담겼어. 그래서 사전적인 정의로 풀어지지 않아. 역사가 필 요해. 그것을 진리, 앎에 깔면? 저는 그림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의 sample로. 제 그림은 model이 아니라, 참고용 sample에 불과해. 진리, 의미로 해봐. 함께 찾아갑시다. 그를 위해서, 근세 인식론에서 지식론, 진리론까지 가겠지. 정합설, 대응설이 대립하면서도 묶여. 그러면 뭐하 고 대립할까. 그걸 찾아봅시다. 큰 물음표를 남겨둬. 이게- 무슨 철학이 되었든 간에. 이걸 정치 철학에 대입하면? 종교철학은? 본질 진리 의미. 다른 것은 다 빨간 건데, 이거만 왜 본질이지?

개념체계에 따르면, 실재가 되어야 합니다. 근데 이 본질을 가지고, 여전히 실재를 가리키는, 용 례상의 잠정적 치환으로 사용해. 근데 이 작은 얘기하고 큰 이야기한다가 아니라, 아우르는 범주 야로 묶어낸다면- 원래 지칭하고자 했던 영역. 제대로 읽을 수 있는 눈을- 있음과 앎이잖아. 그 리고 이것(삶)을 향하고 있는 것으로. 그런 면에서 두 번째와 세 번째 책은 분위기가 이러이러합 니다.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만 하는 것이 아니야. 그 무언가, 사람의 현실이 있어. 그거를 한 차원에서 이렇게, 다른 거는 이렇게 해요. 얘네 셋은 어떤 관계일까. 어떤 관계이어야할까. 우 리가 해야 하는 일이겠지만. 하여간. 2부에 본질과 진리는 있음과 앎으로 할 수 있어. 근데 동떨 어진 있음과 앎은 아니잖아요. 영역이 따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굳이 있음 앎- 하나의 시 각적 이미지로. 가로 세로 높이로. 별로 적절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평면 위의 영역 구별이 절대 로 아니라. 가로세로 높이. 입체적인 거지. 사람이 앎 삶 있음의 차원. 다만, 가로는 높이에 어떤 관계냐가 관건이라고 했어요.

오날날. 여기까지 온 철학이. 현대 철학이. 저 앞의 과거의 선조들의 작업을 다 싸안고 들어오 죠. 그래서 삶에서 거대한 용광로를 만들어. 실존철학. 고전의 실존은 들어있는 실존이야. 고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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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는 이쁘게 들어있지만, 삶에서는 정면으로 충돌해. 저 실존철학이 본질과 대척을 이루는. 그리 고 실존이 본질을 앞서는 급진파와 실존=본질이라는 온건파까지. 하지만 고전 구도에서 본질=실 존은 황당한 이야기야. 그런데 지금은 그게 지론이야. 삶의 영역에서는 그게 삶의 기틀이야. 실존 철학, 현상학이라는 것. 다 나와 있지. 의미가 해석학의 전유물이 아니고요. 다 의미이야기야. 현 대 철학의 다양한 의미의 버전이에요. 없던 게 나온 게 아니라, 삶의 틀로 재구성해낸 것이지.

그게 각종 다양한 가지들이지.

바로 그런 이유로. 그런 것들을 이루는 이야기로- 독특성과 연관성. 있음 앎 삶의 영역을 배치 시켜본다면. 해당하는 것에 배치를 시켜본다면. 대략 훑어보면서 배치를 해보십시오. 요 챕터는 요 부분에 관해서 이야기를 관해서 하고 있구나. 좌판에서 좌표를 찍어낼 수 있잖아. 하나에 대 해서 좌표를 찍는 것만이 아니라, 다른 것과의 관계도 읽어낼 수 있어. 그 작업을 2부에서 했으 면 좋겠고요. 3부는 명실공히 의미거든요. 훨씬 더 밀접하게 다가가는 방향을 염두에 두어 두면 서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합니다. 별도의 독자적 영역이 아니라고 했어. 어떤 것이든지 다 걸쳐있 어. 다만- 우리가 목적을 가지고, 어떤 각도에서 이야기할 수밖에 없으니- 구별된 영역에서 하는 것이 아니다. 어디든 다 걸리잖아요. 그러니까 동그라미로 이렇게 했지만, 쪼개지는 것이 아니라.

현상으로부터. 사건 경험 행위에 이르기까지, 스펙트럼을 다 아우르는. 그걸 다 보안하는. 3발이 가 아니지. 자기장 같은 입체의 축을 들이대는, 그러한 접근의 구도로 이해한다면. 의미로 넘어갔 을 때.

다만 단서로 남길 것은 가로 세로 높이라는 입체적인 관계다. 동시다발적인 것이다. 라고 말했 을 뿐인데. 진짜 있음 앎의 관계가 어떻게 엮여야 하는지. 현대철학이 다 그런 주장을 한 거예 요. 다 그런 주장을 했어. 제 나름대로 주장한 것은- 엮어지는 삶을 있음의 눈으로. 실존 철학은 이런 반동의 유산에서 정리하고자. 현상학은 앎의 차원에서 삶의 이야기를 재구성하고자. 해석학 은 삶에서 있음과 앎의 관계를 정리하고. 그런 것이 해석의 이름으로. 세 축의 관계를 설명하는 시도로 읽어볼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러니 우리의 작업을 위해서. 현대철학의 이런저런 사조에서 어떻게 되는지 고민한다면. 내용과 형식적인 차원을 우리의 버전으로 할 수 있지 않겠나.

자-

수업 진행 순서는 이런 의미에서 책을 선택하고 짰고요.

이런 맥락에서 읽기를.

스미스는 촉촉하게 읽고.

두 번째는 틀을 잡는 목적이고.

세 번째는 좀 더 현실의 이슈. 구체적인 문제들. 종교의 문제들을 철학적으로 접근하는 것으 로.

거기서 의미와 가치를 끌어내는 것으로. 각각의 책들을 우리가 사용하겠다는 설계를 가지고 쓰 겠다는 목적의식을 좀 더 분명히 가지면, 차이를 좀더 명확하게 가지면 명확하지 않을까 해요.

시간이 되었기 때문에.

종교철학 서설에 관한 이야기는 시작을 못했습니다만. 늘 그렇듯이. 담 시간에 하면 되겠지만.

아. 스미스 책 1-2장 이야기 가지고, 한 꺼리가 될 것이고, 서설에 해당되는 이야기를 할 터인 데. 1-2장 한꺼번에 하면서 토론도 할 것이고요. 나는 이렇게 읽었습니다 토론도 해볼꺼고요. 구 체적인 운영 방식은- 매주 마다 여러분이 해당하는 부분. 대표발제는 하던 대로 하면 되고요. 근 데 발제는 가능한대로 내용요약을 적게 하고. 여러분의 비판적인 성찰.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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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양반을 모시고 강연을 듣고, 우리가 이야기를 해보자. 아주 편안하게. 비판적인 성찰을 해보 자. 그렇게 했으면 좋겠고. 매주 해당부분을 읽으면서, 갈기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기 힘들 겁니 다. 그 충동을 분출시키는! 읽다보면 책에 갈기게 되잖아요. 그걸 다다닥 갈기면- 절대 한 페이 지를 넘기지 마. 인생 낭비, 종이 낭비, 듣는 사람 시간 낭비. 그러니 반 페이지. 그래야 한 페이 지가 안 넘지. 사이버 교실에. 독서보고서 방이 만들어집니다. (3월 21일부터). 왜 그러지? (교수 님이 그렇게 하자고 하셔서…) 그래, 좋습니다. 그렇게 합시다. 그거는 우리가 책을 펼치면서 읽 으면, 이렇게 적절히 한 두 마디. 파스칼의 팡세 같은 외마디 질러대기 하면 돼요. 이런 통찰이 나의 뇌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이런 걸 모으면 여러분의 작품이 되는 거에요. 그걸 하라는 것 입니다. 제출, 발표를 염두에 두는 것이 아니고. 그냥 거기에 올립니다. 강의 녹음은 없어지지 않 지만. 여러분의 쪽글은 연대가 없어질 때까지! 자손대대 영원히! 그때 가서 후손에게 '뒤져봐라!

너의 선조가!' 그렇게 갈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걸 여기서 자유롭게. 앉은 순서대로, 아까는 고도리- 그런데 그렇게 안 하고, 편안하게. 이런 저런 생각들이 떠올랐는데.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토론이 엮어져 가기를 바라겠습니다.

시간관계상 여기까지 하겠고요. 다음 시간 스미스 책과 함께, 보고서는 한 주후부터 시작하고.

오늘 하고자 한 서설을 하겠고. 발제물의 양은- 많이 하지 말고, 3페이지 넘게 하지 말고. 독서 보고서를 아우르는 화두를 던지면 돼요.

내내 강조하고 싶은 것은- 어떤 내용을 더 많이 이해하고 파악해서 알아야겠다- 이런 대다 초 점을 두지 마시고, 교실을 나가는 순간, 다 잊어도 좋은 것이로되, 중요한 것은 비판적 성찰이라 고 했죠? 이렇게 구별하면 좋습니다. 학부생들에게 잘 쓰는 표현입니다. 뭘 배워서 알겠다는 것 을 목적으로 하지 말고, 이 수업에 남는 게 없다를 목표로 해야 해. 뭘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 라, thinking을 해야 해. 비판적 성찰이라는 방식에 대한 연습을- 철학은 죽음의 연습인데, 여기 서는 생각하는 연습을 주고 받으면서 해야 해. 그래서 dialogue가 중요해. 대화의 기술, 감각을 연마하는 기회를 공유하는 목표가 되기를 바랍니다. 누가 어떤 얘기를 했는데. 막 열심히 정리해 서 종합시험에 사용하는 것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저자의 이름을 몰라도. 그런 계기, 자료, 참고 자료로 쓰도록 해봅시다! 시작할 때마다 하는 것이지만. 철학을 타이틀로 내걸었는데. 그게 인문 학적 성찰이고요. 종교철학. 취지. 그런 방향입니다. 한 발짝씩 움직이겠습니다. 그러면 첫 시간, 잘 된 것으로 보고 마치겠습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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