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종교철학원론 6강

N/A
N/A
Protected

Academic year: 2022

Share "종교철학원론 6강"

Copied!
12
0
0

로드 중.... (전체 텍스트 보기)

전체 글

(1)

종교철학원론 6강

2013년 4월 18일 목요일 오후 2:39

그 순간에- 뭐 제가 더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고요.

다만 효과적인 토론을 위하여-

나오면서에 이미 화두가 여러 가지 있어요.

그리고 텍스트로 들어가서 정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인경) 하나님과 너무 상관없는 성인 숭배 같아서요. 저자도 카톨릭 철학이고.

#) 종교적 엘리트주의. 190페이지처럼. 헤센의 질문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종교적 질문이 그토록 중요하다면- 왜 다른 사람들은 체험하지 못하나? 지성 능력의 과대. 또 뒤에 - 사랑 안에 있지 못하고, 내면적인 자기성찰의 부족. 그러면 과연- 종교적 체험에 대해 생 각해볼 때- 무엇을 함을 통해 체험할 수 있는데, 다른 이들은 안하기 때문에 못한다. 헤센 은 체험보다는 신앙을 우선하잖아요. 개신교 신학자들은. 그러면 입장이 다르다고 생각하고 요. 그게 우월성, 종교적 엘리트의 우월성과 연결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선미) 순복음에서 어릴 때부터 신앙생활하고, 체험과 은사가 활발하고. 근데 이 책을 읽으 면서 맞아 그랬어 라고 생각하고, 순복음 쪽이 공부를 지지하기보다는 폄하의 분위기가 있 다보니- 공감하는 부분이 많이 있으면서도. 본인이 여기 와서 공부하다보니까, 하나님은 우 리가 이해할 수 있는 지성적인 요소들을 같이 충족할 수 있는 분이구나 를 배우는데, 아까 방해된다고 할 때. 내가 공부하는 지점에서

3)

*) 그 전에 체험이 신성시되거나 신앙이라는 영역에서 없는 것처럼 얘기되는 것의 반동으 로 나오는 듯.

#) 체험이 먼저 아닌가?

*) 체험이 희미해도 나름 체험.

인경) 신비체험에 많이 의존. 이단도. 그러다보니 좀 위험한 듯. 가톨릭 위주로만 말해서 좀 그래요.

모든 것을 다 하나님의 체험이라고 하면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 성찰이 그래서 중요한 것 같아요.

진호) 헤센이라면 성찰은 주지주의. 헤센이라면 확실성 때문에 성찰이 필요 없을 듯.

%) 신에 붙잡혀짐. 130여 페이지. 체험 아래 종속시킨다. 신앙과 인식의 차원으로 하면- 알 수 있는 한계가 이미 있는데. 하나님 인식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붙잡 는 체험을 통해서만 가장 보편적으로 신을 만나는 기준이 될 수 있다는 건데, 그게 판단을 요구한다고 했을 때, 사랑, 경외심 같은 기준. 보편적인 기준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지 않냐.

그런 차원에서 가고 있지 않나.

#) 수평적인 문화의 지평 안에 맞아야 한다는 뜻인가요?

@) 성스러움의 체험. 체험을 다루는 것은 다른 정신적인 가치와는 다르게, 성스러운 체 험. 그 테두리 안에서 신앙, 경험은 체험 안에서 작은 범주로 들어가는데, 경험과 체험- 헤 센이 구분하는 것을 우리가 혼동하는 것 아닌가.

%) 저도 조금 그런 생각했어요.

(2)

@) 성스러운 자와의 체험- 그걸 큰 테두리로 보고. 신앙도 나오고, 종교가 무엇인가 라 는 범주 안에서 신앙을 논하는 것이지, 신앙을 자꾸 체험으로 혼동하는 것은 범주가 다른 것 같네요.

&) 그래서 종교적인 경험을 가치경험이라고 하는 거죠.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느냐- 거기 에 대해 헤센은 명확하게 가치체험이라고, 전인적인 변화를 불러일으키냐.

#) 확실성. 자기만 확실하다고 하면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요. 체험을 먼저 하면- 계시 의 규범성을-

@) 범주 구분 위해 성스러운 자와의 체험이라고 전제. 근데 여기서 얘기하는 것은 신앙 의 체험이 먼저냐- 그런 부분과의 이야기는 좀- 신앙과 체험을 묶어서. 결부되어있고, 신앙 을 경시하는 것도 아니고.

^) 123쪽. 학문적 인식으로 신앙을 파악할 수 없느냐-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신을 인식 하기 위해 신을 대상화해야 하는데, 신을 대상화할 수 없어요. 신에 의해 주어진 것이니까.

인식을 통해 신을 만날 수 없고. 체험은 접붙임, 접촉되기 때문에, 체험을 통해서만 파악될 수 있다고.

태진) 종교적 가치체험의 심리적 전제가 뭐냐- 전제가 깔린 것은 당연하지만- 가치체험 이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거라면, 우리가 계속 수업에서 나누고 있는 논의지만, 면에 대한 깊이로서 종교로는 굉장히 괴리될 수 있는. 무종교인에 대해서 이건 무의미하거든요. 선과 허무. 양자가 아닌 것의 가능성은 답지는 하지만 분석은 안 해요.

^) 종교적 자유. 제 3의 가능성. 그게 존재한다. 헤센이 지적. 셀러라는 사람이 빼먹었다.

그런 가능성은 뭐냐. 종교적 소질. 그리고 그거에 대한 발동으로 필요성이 꼭 필요하다.

태진) 가능태 현실태 개념으로 보는 듯. 주지주의로 너무 빠지고 유한성으로 너무 빠지고 - 결국 종교인과 비종교인의 선택지. 하지만 우리는 이미 무종교인의 가능성으로 가고 있는 데. 이런 이분법으로 부족하다.

&) 체험과 신앙의 단계 뭐가 먼저다가 아니라 같이 간다.

선미) 첫 토론거리 이야기. 개념어가 익숙하지 않기도 하고 잘 모르겠는데. 이 책을 매개 로 자연에서 신적인 걸 경험하고. 자연 역사 등. 평범한 삶에서다고 가능하다고 하는데. 저 한테는 익숙해요. 근데 신앙이 없는 사람은? 신앙이 있는 사람들은 창조 섭리와 결부하는 데. 이 얘기조차도 전제된 신앙이 있어야 결부하지.

@) 종교적 작용에서 하고 있고. 근본태도다. 종교적 인간에서 근본구조로 깔고 얘기하거 든요.

^) 종교적 근본감정이 중요한 것 같아요. 외경 겸손 사랑. 이게 아예 없을 수 있는가. 헤 센은 전제하는데. 종교감정이 전혀 없다고 하면, 그런 사람은 뭐냐. 지성에 문제 있는 사람 이거나 태어날 때 그런 사람들 있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하여 설명할 수 없는 것 같아요.

그런 사람들에게 지적 무능력자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 오히려 더 가능하지 않을까요?

^) 헤센은 그렇잖아요. 지적 능력이 과다해지면- 근데 오히려 거꾸로 아예 없으면.

#) 지적 능력이 단순히 뇌의 활동이-

^) 예를 들면, 18살인데, 태어날 때부터 뇌가 거의 없는 거예요. 그냥 누워있는 거에요.

계속. 과연 그 아이한테 헤센의 이야기가 적용되는 건가.

#) 부모에 대한 감정적인 인식이 있다는 거죠. 그런 얘기가 있는 거죠.

진호) 싸이코패스. 감정이 아예 없는 사람들.

(3)

#) 구조적인 문제가 아님?

진호) 생물학적인 문제의 경우도 있음. 그렇다면 헤센의 논의가 적용 안 될 때도 있음.

인경) 적용 가능성과 떠나서- 예술의 목적성. 허무. 거기서 종교. 하나님께 감사하고, 도 구로 하고 싶지만. 어- 하나님 믿기 전에. 신앙이 없었는데. 감정은 있었겠죠. 추구하고 찾 고 싶어 하는 자유 같은 것들. 거기서 부딪히는 한계. 하나님이 없었을 때. 오는 허무감이 엄청나더라구요. 예술로만 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나 성경말씀 없 이 그거만 바라봤을 때, 하나님을 바라봤을까?

주원) 종교적인 체험이라는 게. 책에서는. 막. 이 책에서 나온 체험하면 좋겠죠. 종교적체 험이라는게- 누가 가능하냐. 사랑의 정신적 능력… 말이 한자라서 그렇지. 누구나 갖고 있 는, 종교적 인간을 말하는 것 같고. 활홍경도 있겠지만. 체험 끝. 신앙. 인식. 개념. 이런 게 아니라- 인간의 종교적인 삶과 같고. 체험 엘리트주의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종교적 인간 이 아니라는 사람과는 대화가 아니라고는 할 수 있지만. 체험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그건 아닌 것 같아요. 기독교적인 체험이 아닌 것은 위험하다라는 것은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 다. 무종교와의 대화 방향을 모색해야할 단계지. 신앙 이후의 체험? 헤센이 말하는 체험은 아닌 것 같고.

@) 말씀하신 게- 신앙 하면 종교적 인간과도 관련된 것 같고. 체험은 종교를 다룰 때.

체험이 우선된다는 것은 강조하지만.

진호) 체험=삶 인듯. 작게 말하지 말자.

주원) 체험- 앎의 차원 아닌 듯. 체험이 없으면- 신앙이 없는데. 기독교적 체험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다는 거죠. 체험과 신앙이 역전되면 그게 우상이 아니지 않나.

진호) 근데 사용하는 예가 다 기독교 사례여서. 다른 종교에는 잘 들어맞지 않아서. 이론 적으로는 아니어도 실질적으로는 기독교라는 것.

선미) 체험으로 변하는 거지 알려줘서가 아닌 듯. 야곱의 사다리.

범서) 그렇다면- 헤센이 굳이 외경 겸손 사랑으로 말하는데. 겸손과 사랑을 다른 종교에 서 어떻게 말하는지요?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에 국한시켜서 한다면- 기독교의 종교감정이 외경 겸손 사랑이라면- 종교적 체험을 종교적 행위로 만들어내고, 종교적 체험 자체가 가치 체험화될 수 있는 매개체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우상화에 가지 않을 수 있다. 종교적인 체 험을 가치체험으로 가게 만드는 것. 제 나름으로는 회개. 성령의 활동. 매개자로서 중재할 때. 무에 빠지는 종교적 성질을 계속 고양시키고 필연성을 부과하는 힘이 되지 않을까. 그 런 쪽에 논의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기독교에 국한해서 얘기하자면.

#) 무엇을 위한 체험? 갈릴리 호수. 어떤 분은 갈릴리 호수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서 감동. 어떤 분은 못 들었어요. 그래서 거기 새벽부터 가서 들으러 감. 체험을 강조하는 이유 가- 영향 작용- 욕망 없는 주체.

진호) 매혹성에 이끌려 가는 것일 뿐.

*) 체험의 구분- 보편적인 기준을 가지고 갈 수 없다는 것뿐이죠. 인간 보편이 가지고 있 는 것들.

범서) 헤센의 책- 수동적인 측면과 능동적인 측면. 전자가 너무 강조되면, 신의 소여, 신 의 현시에 대한 소여로서 이해가 안 갈 수밖에 없다. 그러면 능동성이 무시된다. 타종교의 경우에 체험이 먼저가 아니고 본인의 의지가 먼저 이런 거로 하면 능동적이잖아요. 능동이 그러면 종교적인 체험이 있어야 가능하거든요. 최초의 경험이 아예 없다. 그러면 능동이던 수동이던 아예 성립이 안 하다는 거죠. 그건 자기 계발 같은 거의 차원에서는 가능해도, 종

(4)

교차원은 아닌 것 같아요.

@) 체험 다루면서- 종교가 성스러운 자의 체험이라는 명제를 가지고, 지금 같은 문제를 지적해요. 주지주의, 주의주의. 문제점을 얘기하고, 체험 강조 이유 말하는데. 신의- 종교의 대상. 신의 관계가 있는 것 같아요. 신에게 체험을 당하는 거예요. 수동적 체험 말씀하셨는 데. 인간에게 체험의 주체가 신이라는 거죠. 우리는 체험을 당하는 거죠. 체험과 인식의 상 호관계를 먼저 규명하는 것 같아요. 자기가 체험을 앞에 둘 수밖에 없나.

#) 유한성에 대한 포기가 있어야. 그 체험에 매달려서 하면 신앙이 과연 올바른지는 모르 겠어요.

범서) 그래서 경외가 막연한 두려움이 아니라. 피조성에 대한 자각. 죄의식의 발현이 아닐 까.

진호) 체험이 초월과 만나는 삶의 순간인데. 전제가 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 우리는 체험-앎-삶이라고 생각하는데. 들음이라고 생각해요. 들음은 인식적 체험이죠.

선미) 들음도 체험이라고 헤센이 하는데.

@) 체험과 인식.

#) 무규정적인 체험을 말하니까요.

*) 언어를 우선시. 린드벡. 언어라는 역사성. 체험되는 내용 자체가 언어로 인식되는 거 죠.

교) 빙글빙글 돌다가 또 번뜩이는 성찰이 올 수 있겠는데. 재밌었고요. 흥미진진했고요.

중간 중간 끼어들고 싶은 욕망을 참고. 그래도 잘 갔어요. 그- 여러분 이야기들… 잘 적었 어요. 복잡한데. 다 읊진 못해도. 시도해봅시다. 잠시 쉬었다가. 합시다.

1부에서 큰 이야기하고 2부에서 작은 이야기 들어갔으니까. 2부가 본론이잖아요. 본론을 살피기 위해, 여기쯤에서는 책 전체 구조를 좀 볼 필요가 있어요. 되짚어 읽어야 할 부분인 데.

제목은 종교 철학의 체계적 이해. 거창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건조한 형식적인 논의일 수도 있겠다. 종교 철학도 체계적도 그렇다. 그런 인상을 아주 강하게 풍기는데. 그런 인상 으로 목차를 펼쳤습니다. 그런데 다른 책도 그렇지만, 학술 서적은 당연히 체계적이어야 해 요. 근데 체계성만으로는 학술적 가치를 말하지는 않아요. 체계를 말하지만, 체계에 매몰되 지 않는 것- 창조성, 독창성이에요. 하지만 체계성과 독창성은 반대로 가는 두 토끼에요. 체 계성은 전통적이에요. 둘러싸고 있는 것은 이러저러하게. 역사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것, 과거가 우리에게 준 것이에요. 현재 안에 있어요. 독창성은 반대방향이에요. 없던 거야 해.

미래를 행해서 던져져야해. 여러분의 학술논문도 그래요. 석사는 체계성만 요구하지만, 박사 는 둘 다 요구해. 그리고 반대방향이라는 것을 잘 기억해야해. 독창성 없으면 그냥 선행연 구만 있어. 하지만 다름을 위한 다름은 조작적이야. 그래도 의미 있는 다름을 위해 가야죠.

체계가 같음이면 독창은 다름이죠. 그런 긴장의 작업이에요.

이 책은 어떨 것인가. 일차, 학술은 체계성이에요. 배워야할 뿐 아니라, 또 들이대야 해.

맞딱드리는 자료들을. 근데 체계적이라는 표현까지 쓰고 있어. 그러면 기대되는 바가 상당 히 있어. 그런 생각을 두고 목차를 펼쳤습니다. 정말 잘 된 책은 목차 자체가 진하게 체계 적이어야 합니다. 그런 형식, 그런 틀을 빌려서 독창성을 구가해야겠죠. 두 개의 향방을 다 추려내겠다는 것보다는 체계의 눈으로 살펴봅시다. 그렇게 보는데- 4페이지에 걸쳐있네요.

서론. 1부. 목차를 보는 방식은요- 이건 아주 지극히 초보적인 매뉴얼의 이야기인데, 이렇

(5)

게 다시 봐야합니다. 부가 제일 크죠. 몇 부까지 있나. 살펴봐야 해요. 목차 뜯어 읽을 때 막 읽는 것- 목차의 순서로 따라 읽으면 거대한 숲에서 떡갈나무 오동나무 그러다 참나무 그룹으로 들어가. Sub sub sub… 목차가 친절하면 계속 내려가. 넘버링 계속 하면서- 그거 다 따라가면, 거대한 숲에서 한 그루 나무로 빨려 들어가. 그러면 왜 이 나무가 있는지 감 못 잡아요. 저자에게 농락당하는 거야. 필자, 저자가 잘 작업하고 잘 짜놨는데- 그 숭고한 의도를 못 읽어내는 거예요. 나무 한 그루, 한 가지, 한 잎사귀! 어느 소속의 잎사귀인지…

가지 분지러져 봐. 이게 도대체 무슨 가지인지도 몰라. 그러지 않으려면 부부터 읽어야지.

그리고 한참 명상해야해. 떠오릅니까, 뭔가? 자립성- 할 때 힐끗 아랫것들 보고 다시 빠져 나와야해. 본질. 많이 쓰는 말이야. 오케. 진리성. 오~ 자립 본질 진리 무슨 관계인지 감 잡 아야해. 그리고 4부, 본질적 현상. 음- 본질 또 쓰네. 거기에 현상이라. 이런 말은 형이상학 에서 많이 쓰는데. 현대 와서는 다 공격받는 언어들인데, 어째 전통적인 언어들로 다시 쓰 냐. 본질적 현상. 원래 한글이 아니니 또 원문을 뒤져야 해. 번역자는 우리가 생각하는 의식 이 좀 필요합니다. 그리고 친절하게 번역해야해. 진짜 좀 친절하게. 완벽한 번역은 없잖아 요. 하나님과 God이 겹치지만 완벽하게 일치할 수는 없어요. 본질도 어떤 맥락에서 본질인 지. 두루뭉술한 굉장히 추상적인 어휘들이란 말이야. 본질과 진리, 어떻게 다르지? 다르니까 부가 다르겠지. 그 내용을 대략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어. 본질적 현상을 우리를 혼란스럽 게 할 수 있는 표현일 수 있어요. 밑에 쑥 보니, 자연 종교 율법종교 구원종교… 그래서 저 는? 유형이라고 써놨어요. 장의 제목을 보고 붙인 이름이에요. 이런 것을 이야기할까? 정도 의 문제의식을 지닌 거지. 유형과 본질적 형상은 꽤 거리가 있어. 4번은 그렇다손 치고. 2 부 3부가 몸통이야. 본질. 진리. 꽤 중후하지만 추상적인 언어들인데. 본질에 들어가서- section A B가 있네요. 태도 대상. 음- 번역어니 더 어려워요. 그러니 여러분도 번역할 때 같이 목차만큼은 붙이면 좋겠다. 가치와 태도. 가치 태도, 잘 안 쓰는 표현이죠. 거기에 활 동까지 있어. 밑에 보면, 짐작이 돼지만, 그보다 먼저 할 것은 종교적 가치의 대상. sB를 봐 야해. A B를 비교해봐요. 둘이 동급이거든.

맨 먼저는 자립성- 정체성을 자리매김. 정체성이 그리 되면, 종교의 정체성을 파헤치겠구 나. 그러면 그런 내용이나 형식을 가지고 있는 무엇인가로서의 진리이겠구나. 그게 2-3부의 관계에요. 범주화인데요. 등급에 따라서 하는 거예요. 대분류와 중분류. 본질과 진리. 이런 식으로 시도를 해. 해야 해. 그래야 내 방식으로 의미 있게 책을 읽을 수 있어요. 엉터리가 아니라 의미 있고 공감할 수 있는 방식으로. 2부에 들어갔으니, 가치 태도하고 가치 대상이 야. B에 대하여 대구를 이루는 뭐가 되어야겠죠. 그러면 주체야. Subject, Object. 그러면 왜 주체를 꺼리는가? 종교에서는 주체가 내가 아니야. 그래서 주체를 조심스럽게 써야해.

그러나 논리적으로는 주체지. 종교적인 주체. 종교라는 그 무엇의 주체야. 그러면 B는 종교 적인 대상의 이야기야. 그 대상과 그렇게 관련된 주체, 인간을 가리킬 주체. 하지만 인간을 주체로 하기에는 제한적이기 때문에 전제를 깔고 말해야 해. 어쨌든 논리적으로 생각할 때- 주체 객체로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장으로 들어가서- 종교적 경험 또는 가치체험. 이 맥 락에서는 그냥 체험으로 하면 좋아요. 경험 또는 체험 할 것도 없이, 체험으로. 이럴 때는 구별해야 해요. 확실하게. 경험은 앎의 언어고, 체험은 삶의 언어에요. 독일어는 확실하게 구별되어있고요. 체험을 놓고도 헤센도 말하고 있죠. 경험을 체험으로 정리하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1장은 체험으로 하면 좋아요. 그러면 2장- 작용이에요. 체험과 작용- 그러면 뭐에 요. 전에 제가 썼었던- 그 단어를 열거시켜 볼만하지. 사건-현상-체험-행위. 그죠? 2부는- 1부는 사건-현상-체험-행위, 이거 네 가지를 하나로 묶어서 종교를 말했고, 밀접하게 말하

(6)

고 있어. 전적인 규모의 관계야. 그리고 B에 들어가서- A가 체험-행위를 말하고 있어. A의 1장이 체험, 2장이 행위. 행위를 작용이라고 하고 있어. 이건 어디든, 정치 경제 사회 다 적 용할 수 있어. 경제적인 사건 현상. 문화를 이루는 모든 것들. 다 여기에 넣을 수 있는데.

당연히- 체험 행위가 주체가 되고, 사건 현상이 객체(대상) 이 되겠죠. 주체 안에서도 대상 과 가장 연관되는 방식이 체험이고. 2장에서 작용은 일반적인 틀로 할 때 행위가 되겠구나.

정리할 수 있어요. sA는 어떻게 돼. 체험, 행위. 일반언어로 쭉 다 바꿀 수 있어요. 저자가 전략적인 의도로 사용한 언어를 우리 나름대로 다 바꿀 수 있어요. 근데 체험할 때. 어떤 사람들은 체험 잠깐하고 행위를 쫙 깔 수 있어. 하지만 이 사람은 체험에 12절 갖다붙이고, 작용은 거의 안 하고, 파생적으로, 체험에 거의 딸린 거야. 이런 식으로 체계적인 목차를 볼 수 있어요. 판단감각이 생길꺼야. 그러면 논문 작성할 때도 그런 감각이 나올 꺼야. 박사논 문 500페이지 쓴다고 할 때, 처음부터 쓰면 엄두가 안 나. 하지만 부 장 절 하면- 1부는 100페이지만 쓰면 돼. 100페이지 세 개 쓰는 거야. 장은 또 20페이지. 한 절은 7페이지. 7 페이지 쭈루룩 하면 돼. 시작이 반이다 는 여기에 해당 돼. 물론, 목차가 바뀌죠. 그게 학문 적인 진전이야. 여러분의 작업을 위해 자꾸 습작을 할 필요가 있어요. 유럽 책들이 이처럼 목차가 잘 되어있어요. 영어권 책도 아니고- 프랑스도 또 아니야. 독일이야. 거기는 system 으로 살기 때문에. 훈련을 받을 때는 좋아. 물론, 체계를 넘어서야지. 근데 체계를 언제든지 하고 싶으면 할 때 넘어서는 거지, 못하면서 반체계하면 설득력이 없죠. 제목에 체계적이 들어가니 이렇게 말해봤습니다. 앞으로 그런 식으로 분석하세요. 그리고 2부로 들어가세요.

2부, A- 12개의 절. 그냥 또로록이 아니라, 묶일 것입니다. 1장과 12의 절의 중간 분류 로 묶자면, 뭐로 묶겠습니까. 저는 12절, 345절, 67절은 5절에 대한 보론. 67절은 체험이라 고 하지만, 신비야. 가치체험의 두 가지. 오토의 이야기. 5절과 67절이 등위가 아니라고. 그 래서 그래프로 그리면 한 칸 더 들어가야 해. 그래서 학위 논문에서는 한 칸 들어 넣어야 체계적인 것입니다. 예를 들면 그래요. 그 다음에는 8-12를 하나로 묶었어. 그래서 12절은 형식. 345는 내용. 67절은 예시입니다. 그리고 8-12는 확실성 영향 전제 매개. 시각적으로 확 보여줍니다. 전부 종교체험인데, 영향 전제 매개. 원래는, 논리적으로는 전제 매개가 나 와야해. 그러면 저자가 순서를 뒤집은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봐야해. 왜 하필이면 전제가 뒤에 왔을까. 그 이유는 뭘까. 그걸 묻고 읽어야 해.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계시 받듯이 받으 면 안 돼. 계시도 그렇게 안 받는데- 마태 따로 요한 따로- 그런데 하물며 헤센 따위의 이 야기를 그냥 받겠나. 확실성은 어떤 역할일까. 어떤 빛일까요? 논리적으로는 전제 매개 영 향이야. 그림을 그린다면, 확실성은 어떻게 뒤의 세 개에 대해 위치를 지을 수 있을까. 그리 고 마지막 12절. 구조. 심리학적 구조라고 했지만, 내내 한 게 그건데. 그냥 구조야. 구조라 는 제목의 12절은- 그리고 전체를 묶어서, 8-12를 구로 이름 붙였어. 그러면! 1절의 12개 절. 하나 둘, 셋 넷. 또는 셋의 sub를 만들 수 있겠죠. 그러면 12개의 전개방식을 알 수 있 겠죠. 그리고 2장. 2장은 단지 3절입니다. 그리고 내용을 알기 어려워요. 하지만 절 제목이 이래서는 내용을 알기 어려워요. 본문을 확인해요. 하지만 좋은 목차는 아니에요. 종류는 내 용이 되겠고. 구조는 형식쯤이 되겠고. 필연성은 뭘까. 의문을 가지면 돼. 2장의 세 개는 복 잡할 것 없이 작업하면 돼. 그러면 종교적 가치 태도… B를 가치의 대상. 종교적 대상이라 고 할 수도 있어. A가 인간이라고 하면, B는 신 얘기가 될 거에요. 전형적으로 알고 있는 방법인데- 그러면 인간에서 신으로 가고 있어. 그런 방법도 우리가 캐치해야해. 그런 표현 은 하나도 안 나오지만.

자.

(7)

앎 삶

의식 이해 주어진 것

인식 해석 하는 것

지식 성찰 나오는 것

진리 자유 향하는 것

가장 기초적으로 훑어갈 수 있는 목차 읽기의 방법이 되겠고요.

체험과 행위를 두고 분석을 해야겠지. 그걸 그래서- 이런 얘기를 해봅시다.

본문은 시간이 되면 들어갈 텐데. 목차를 통해서만 체험과 행위를 말할 때- 순서는 그렇 습니다. 우리의 얘기는 시간이 허락하는 범위까지.

어~ 그. 그. 그- 여기 지금 썼던 건데.

사건 - 현상 - 경/체험 - 행위.

이렇게 될 텐데요. 일반적으로는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어. 어- 기본적으로는 당연히- 아 까 얘기했지만, 사건 현상이 객체, 체험 행위가 주체에요. 또 저 앞에서 했던 얘기들을 사용 한다면, 사건 현상을 있음이라고 하고, 현상 체험을 앎이라고 하고, 체험 행위를 삶이라고 할 수 있어요. 여기 인식론과 해석학에 밀접히 연관되는 것을 대입하면 복잡다단한 이야기 를 진행할 수 있어. 복잡한 얘기- 간단한 얘기부터 할까요. 큰 얘기부터 해봅시다. 사건 현 상을 묶어서 사실이라고 하고, 현상 체험을 해석이라고 하고요, 체험 행위를 성찰로 묶어보 죠. 인식론자는 현상 체험에서 인식을 볼 거예요. 인식은 경험과 관련되죠. 그러면 오늘 우 리 얘기에도- 헤센 얘기를 따라가면 이런 게 있어요. 제일 밑에 체험이 있고, 그 위에 신앙, 그 위에 인식, 그 위에 개념. 이게 역자의 잘못인지 필자의 잘못인지. 아. 벌써 잘못이라고 했네. 물어보려고 했는데. 뒷말이 너무 복잡하게 머릿속에 있어서 그래. 어떻게 생각하세요.

해석학 할 때마다 나오는 얘기지만-

인식을 쪼개면 이성과 경험이 있어. 그래서 인식과 개념을 쪼개는 건데. 자. 어- 우리 인 간에게 있어서 안다는 것. 앎. 안다는 것은, 앎이라는 행위를 어떻게 하기 전에, 그것을 할 수 있도록 가능한 근본구조가 있어요. 그게 의식이에요. 근데 그 의식 먼저 있는 뭔가가 있 다는 것이 무의식이야. 의식은 주어진 구조야. 의식은 기본적으로 지향성이 근본으로 있어.

이 지향성이 주객관계를 형성해. 인식론에서 의식의 주체와 객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 은 의식이 밑바닥에 주어져 있다 보면 그래. 이게 지향성에 의해 주객구조로 표출될 가능성 이 있어. 그런데 그 기능을 이성이 하느냐, 경험이 하느냐. 지향성의 구조를 누가 하느냐.

그 벌리는 일이야. 하는 것을 이성이 주축이 되느냐, 경험이 주축이 되느냐. 논쟁이 벌어지 는 것이 인식론이야. 주도권이 주에 있다- 이성론, 주도권이 객에 있다- 경험론이야. 물론, 여러 가지가 있죠. 주와 객의 대립, 보편과 개별의 대립, 필연과 개연의 대립, 연역과 귀납 의 대립… 계속 갈 수 있어. 그런데 왜 중요하냐? 해석과 관련해서 중요해. 해석은 그렇지 않아. 그래서 인식이 하는 짓을 알 필요가 있어. 전체 대 집계. 그래서 인식을 통해 지식을 산출해. 나오는 것. 진리 정합설, 진리 대응설. 이러다 나중에 실용주의적 진리, 학으로서의 진리가 나오지. 하여간. 이 시대, 근세의 인간은- 앎의 주체의 방식으로 주체화합니다. 이걸 대상화라고 합니다. 대상화라는 말 많이 써요. 사실 뜻은 주체화에요. 대상이 있는 것이 아

(8)

니라, 대상으로 만드는 거야. 그냥 object가 아니야. 대상이 뭐라고 화하냐. 마주해서 잡아 낸 모양이야. 뭐가 마주해? 대상이라고 가리켜질 것은 마주해. 그 모양의 자리는 어디야?

모양의 자리는 대상이 아니라 주체에 있어요. 보는 시각대상의 정재현은 여기 있잖아. 하지 만 그 상은 망막에 맺혀져. 그 망막은 여러분의 망막이야. 정재현은 여기에 있는데, 대상으 로서 정재현은 여러분에게 있어. 대상이 주무르는 거예요. 앎의 주체는 주도권을 지닌 주체 입니다. 칸트가 확실하게 선언을 해버렸어. 그 때문에 칸트 이후의 신칸트학파, 리츨도 그렇 죠. 그래서 헤센은 리츨을 경계해. 체험을 열심히 호소하는 이유를 몇 가지 각도에서, 거기 서도 볼 수 있는데. 하여간.

삶에서는. 뭐에요. 이해는 지향성이 아니야. 앎이라는 게 그래. 하지만 이해는 하는 것이 아니라 되는 거예요. 이미. 선이해. 모든 이해는 이미 선이해에요. 특히 모든 해석의 전제의 이해는 선이해에요. 잡아내는 것은 앎에서 하고요, 그저 먼저 하는 거예요. 인식행위의 대상 으로 이미 하고 있는 짓으로의 이해에요. 삶이 하는 거야. 내 대가리가 인식 못 해도 뭔가 하고 있어. 내가 잘 드는 예가 그거야. 아줌마들이 막 수다 떨고 있는데- 꼬마 한 놈 데리 고 왔어. 얼마나 심심해. 계속 엄마를 보채. 그런데 또 어떤 아줌마가 비슷한 또래 애를 데 리고 오면, 상호간의 베이비시팅이 됩니다. 바로 친구가 되어서 난리를 치면서 놀죠. 그러면 아줌마들은 편히 수다를 떨죠. 그때 어린아이들이 막 엄마한테 땡강을 부릴 때- 나는 아줌 마들과 다른 주제를 가지고 있고 다른 삶을 살고- 그런 것들을 생각하지 않아. 자동이야.

그죠? 앎은 말이죠. 실제 현실에서는 인식이 뒤섞여있지. 층이 다르고, 무엇보다 차원이 달 라. 차원이 다른 것을 읽을 필요가 있어. 어떤 게 차원이 다르냐?

아…

작은 얘기는 뒤로 미룹시다.

이거 하나만 얘기할게요. 인식의 틀 안에서 이성과 경험을 대립할 때. 이성은 언제나 보 편이고, 경험은 언제나 개별이에요. 보편, 개별- 대립이잖아요. 근데 공통적인 것이 있어요.

이미 와꾸가 짜여져 있어서 우리에게 주어져요. 데카르트는 생득, 칸트는 선험으로 말해요.

애당초 원초적으로 주어져 있어요. 이건 틀이야. 어떤 내용도 없지만 주어져요. 로크는 백지 상태라고 그래. 경험론자는. Tabula rassa. 굉장히 대조적으로 보이지만, 둘 다 형식에 관 한 표현이거든요. 앎의 경계를 설정했다고요. 이게 무엇이다. 진리다. 선이다 악이다. 형식적 인 도구로서의 틀을 지니는 거고, 경험도 악이다 선이다 책상이다. 다가가고 받아들이고의 차이일 뿐, 다 그 틀 안에 구획하고 경계 짓는 방식으로 할 것이로되, 다 보편, 개별의 틀로 하는 것일 뿐- 당연하지 내용이 아니라 형식일 뿐이니까. 그런데 앎의 틀은요- 이미 보편 이성만 가지고 있어. 만나기 전에 경험 가능한 와꾸만 갖고 있는 거야. 근데! 그러면! 이성 의 길이든 경험의 길이든- 인간이 앎의 주체로서 무슨 방법으로 만나든, 저쪽과 그쪽의 것 을 왜곡 없이, 깔끔하게 그대로 그려내야 할 것 아니야. 대상의 내용이 아무런 내용 없는 형식 안에, 텅텅 비어있거든, 보편 안에, 개별 백지 안에 담겨져야 할텐데- 그러지가 않아 요. 그러지가 못해요. 그건 이성 경험 가지고 설명이 안 돼! 내 얘기 들으면서 말이야- 정재 현이 뭐라고 했어? 그러면 각양각색의 버전이 나와. 그러면 성경은 어떻게 되겠어. 뭘 얘기 하고 싶은 거냐- 앎이라고 하는 건요- 뭘 전제하느냐- 앎의 주체로서 인간이, 앎의 대상과 관련해서, 무색, 무취, 무존재의 위치설정을 미리하고 있다는 거야. 보편 이성이든 개별 경 험이든, 그 극적인 대립에도 불구하고, 둘 다 틀이에요. 하지만 삶의 이야기는 확 달라.

삶은 이미 텅 빈 게 아니야. 그것 자체가 이미- 무엇인가 의도, 관심, 욕구 등등에 의해서 뒤엉켜져 있어. 아는 게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엮는 것이 아니라, 내 관심대로, 내 원하는

(9)

방식으로 그려내는 거야. 여러분도 각자의 코드로 들어. 들리는 것만 들리게 되어있어. 이성 경험이면 좋을 뻔하지? 하지만 그렇지가 않아. 앎이라는 것, 이해라는 게 그래. 우리가 삶을 이루는 것을 만나기 전에 이미 그렇게 생긴 거야. In der Welt, Sitz im Leben. 거기서 벌 어진 해석이에요. 해석은 더 이상 주와 객 사이의 관계에서- 진리정합이다 대응이다- 한쪽 손의 방식이 아니라, 쌍방이에요. 앎은 철저히 일방향이에요. 시작에서 끝이 있어. 그래서 연역이나 귀납이지. 시작과 끝이 있잖아. 연역의 시작은 보편명제에서 끝은 개별명제로. 귀 납은 개별에서 보편으로 가. 인식은 일방적이라면, 해석은 일방적이지 않아. 어떤 것도 앞설 수가 없어. 그래서 쌍방성이고, 순환이야. 해석학적 순환. 거기서부터 성찰이 자연스럽게 나 와. 한 게 아니에요. 거기서, 성찰서 나온 공통적인 가치는 자유야. 말은 달라도. 지지난 학 기 해석학 과목에서 불트만 같은 경우, 결단이라고 해. 본회퍼는 참여. 근데 다 상통하는 말 들이야. 자. 그런 것이거든요.

인식은 어느 한쪽에 주도권을 줘요. 또 반대로 개별경험 이야기. 해석은 주거니 받거니야.

순환이자 쌍방향. 자. 복잡한 얘기- 여기서 더 가지 말고요, 헤센의 목차에 들이대면, 이 사 람이 체험에 이렇게 집중한 이유는? 저기 sB에서 사건 현상이 나올 것으로 기대할 수 있죠.

우리 언어로 바꿔 읽을 수도 있고. 하여간. 체험에 집중한 이유가 무엇인가.

이제 여러분 본문을 펼치세요. 제 질문에 대답해보세요. 1장이 요 얘기인데. 뭐- 여러 가 지로 추릴 수 있지만- 제가 추리자면, 크게 두 가지 말할 수 있어요. 두 가지인데요- 하나 는 토론 시작과 함께 바로 나왔어. 뭐냐. 뭐지. 배경이 있어서의 얘기에요. 그러면 어떤 배 경이냐. 현대 종교철학자로서 체험 이야기 열심히 한 것은, 과거가 체험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어요. 과거가 어땠어? 사상사에 대한 상식만 가지고도 새삼스러운 강조의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체험, 감정에 대한 이야기는 현대 신학의 시조, 현대 해석학의 선구자 쯤 해당하는 슐라이어마허로 생각해볼 수 있을 터인데. 체험을 열심히 강조하는 것은, 특별히 카톨릭 신학계가- 이미 개신교는 18빵빵부터 익숙해서 계속 얘기하는데, 카톨릭은 여전히 말 못하고 있어요. 바티칸 2차 공의회 바람 타고 드디어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익숙하지만, 주목할 것이 있어. 카톨릭은 라틴 계열 서방교회 전통이죠. 익숙하게 알고 있 고, 개신교도 속해 있는. 하지만 개신교는 고대 중세를 갖고 있지 않으니까. 가톨릭도 고대 는 약해요. 초기 교부는 다 헬라교부야. 그럴 때, 초반 교부신학을 집성한 양반은? 아우구스 티누스로 사가들이 정리했어. 왜 그랬어. 아우구스티누스는 라틴 계열이니까. 초반은 다 헬 라인데, 왜 뜬금없이 라틴 교부가 나와? 그건 한번 또 볼 필요가 있어. 동방정교회의 배경 이 되는 그 동네. 부족국가지 뭐. 거기에 비해서, 라틴 계열은 로마제국을 형성했어. 문화와 신학에도 중차대한 역할을 하면서 패권을 얻은 것. 하여간. 그런 배경의 라틴 계열 서방교 회에서, 특별히 중세. 중세- 종교. 우리 스미스 책에서 기억해보십시오. 중세 어떤 시대. 종 교라는 범주가 굳이 필요 없어. 종교가 기독교, 기독교가 종교야. 대통령이 박정희고 박정희 가 대통령이던 시대야. 국민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대학교까지 박정희였어. 고유명서만이 아 니라 보통명사였어. 근데 또 들리니까 트라우마가… 지금 77년이야? 시대착오적인 트라우마 가 생깁니다. 하여간. 무슨 말 하다 여기까지 왔지? 음. 중세, 종교. 고대로부터 물려받은 유 산은 이성이야. 근데 중세에 새롭게 부상한 것은 신앙이야. 그래서 신앙과 이성을 맺는 것 이 새로운 작업이야. 어느 정도였지? 아, 이거. 필연과 … 아, 이건 다음에 합시다.

이성 - 신앙. 기본관계.

잘 지어야 해요. 그러니까 학자들의 작업이 돼요. 그러니 스콜라신학. 그런데 관계를 어떻 게 하느냐- 이런 논리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대립한다. 아니다. 주고받는다. 크게 둘로 나

(10)

눠져요. 대립에서 신앙 먼저, 신앙주의. 그리고 이성주의. 신앙에서 이성, 이성에서 신앙. 네 가지가 되지. 역사적인 순서는 신앙주의- 이렇게 말하니 고대와 경계지어짓는 중요한 시대 전환이야. 그런데 신앙만 말하면, 세계화가 될 수 없어. 설득력이 있어야 해. 그래서 신앙에 서 이성으로 가야 해. 그런데 이게 되면, 왜 이성에서 신앙으로 못 가냐가 돼. 그런데 그러 면 이성주의로 그냥 가자고 해버려. 그리고 쫙 찢어지면서 중세가 끝나고 근세로 가. 간략 히 말하면 그래요. 신앙에서 이성이 아우구스티누스, 안셀무스가 있어. 존재론적 증명하겠 지. 이성에서 신앙은 롬바르두스, 토마스가 있겠지. 그러다 옥캄 나오면서 이성주의 나오다 가, 반동으로 에크하르트 나오고… 하여간. 라틴 동네의 기본적인 작업이야. 이성에 대해 정 리하는 것이 지상 최대의 작업이야. 근데 근대 가면서 개신교가 나오지. 그러면서 여기서 조금 다른 말해요. 의지에요. 중세 말에 오캄, 둔스 다른 말해요. 의지. 그러다 루터 칼빈이 의지로 폭발해요. 그래서 새 시대 열어! 하지만 그런 대전환에도 불구하고, 근세에도 이 틀 로 쭉 가요. 그냥 중세교회. 19세기 중엽으로 가. 근대가 아니라 현대라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때에요. 키에르케고르의 작품이 터지면서 본질과 객관, 보편과 정신에 대해 반동이 일어나. 공산당 선언 나오고. 근데 카톨릭은 또 빗장을 걸어. 바티칸 1차 공의회. 그러다 100년 지나고 2차 공의회 열면서, 현대로 세상을 가는 마당에- 바티칸 1차에서는 아직도 중세 스타일로 가다가, 거대한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항복선언을 하는 거야. 문명사적으로 는. 카톨릭 교회 내에서는 교회개혁이지만. 하여간. 이성 신앙이 다른 관계가 있다! 이거 이 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뭘 배우냐? 이 뒤쳐진 아이들한테 라고 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잘 생각해보십시 오. 쯥. 근대정신과 종교개혁은 떼놓을 수가 없어. 루터는 순교를 각오했지만, 이미 근대정 신의 축적과 뗄 수 없는 관계인거야. 그러나 가톨릭 교회는 현대화라는 것- 개신교는 근대 성은 분명히 말할 수 있어. 하지만 개신교는 현대성이라는 것을 얼마만큼, 현대적인 정립되 어있고, 교회 현실에는 얼마나 반영이 되어있는가. 심각한 물음표에요. 슐라이어마허가 있지 만, 아직도 금서야. 포이에르바하는 택도 없어요. 인간의 탈을 쓴 마귀지. 그런데 비해서 가 톨릭 교회는 라너를 정신적 지주로, 근대성과 현대성을 따블로, 위로부터의 개혁이야. 지시 한 거야. 해! 위로부터 하는 거야. 명령이잖아. 수직적 위계질서 속에서. 그래서 카톨릭에서 한꺼번에 전환하면서 재구성하는 작업이 엄청난 폭발력이 나오면서- 최근에 기독교 신학계 의 창조적인 작업은 가톨릭에서 나오는 거에요. 거기서 목숨 거는 것이 체험과 해석이야.

가톨릭 신학자들이 입만 열면 나오는 게 이런 거야. 압도적인 다수가 가톨릭 철학자와 신학 자야. 뭘 얘기하고 싶냐면, 현대성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비록 위로부터 개혁이지만, 학문 의 영역까지 밀고 나오면서 강한 드라이브가 걸려 있어서, 명실공히 현대화라는 것이 1960 년대면 이미 반세기가 지났어. 하여간, 얼마나 효과적인지 알아야 해요. 자. 실상에서의 흐 름이고. 내용적으로 보게 되면- 근세까지 끌고 가다가, 근현대의 흐름을 수용하면서 가톨릭 계의 흐름은- 신앙과 마주하는 이성 대신에, 경험 대신에 체험까지 끌고 가는 거죠. 그럴 때 이 사람이- 체험은 삶의 차원인데- 과거의 근세. 중세의 추려낸 인식이 의미가 없는 게 아니야. 하지만 그 밑바닥이 체험이야. 조상들의 작업이 체험이야. 인식이라는 말을 하지만, 이성이라는 말로 바꾸면, 무슨 말인지 다 나와. 이성의 근저에 뭐가 있는지. 개념은 별로 중 요하지도 않아. 체험 신앙 이성. 막 주고받았는데. 조상들 말씀이 틀린 게 아닌데, 그 밑바 닥이 체험입니다. 인식론 이야기가 아니고요. 체험이에요. 이성이 아니라 체험, 앎이 아니라 삶이에요. 그런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고.

(11)

또 하나 주목할 것은- 행위와 관련해서, 수동적이고 수용적이야. 행위가 능동이고 작용이 야. 그런데 수동과 수용에 주목하는 겁니다. 이 맥락에서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어. 분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맥락에서 보게 되면, 차트를 갖고 있는데, 시간이 있으면 보여 줄 수 있지만, 가려지니까 안 하고… 또 하나 하고 싶은 얘기는- 그런 리딩의 사상체계도 엄연히 있어요. 딜타이는 그렇습니다. 슐라이어마허가 객 드라이브된 것에 주석을 달았어.

거기에 딜타이가 꼳혀. 객에 역사라는 축을 꽂아. 슐라이어마허가 준비한 것을 딜타이가 받 아. 200년 전 얘기를 100년 전에 받아. 하여간.

사전적인 정의를 갖는 게 아니고요. 일의적인 방식- 분석철학에서 이상언어. 하지만 일상 언어는 말의 뜻의 범위가 퍼져있어요. 그래서 다르기도 하고 뒤집히기도 하고. 하여튼. 체험 의 수동을 강조하면서 뭘 말하고자 하느냐. 그래서 카톨릭 신학자야. 라너도 그렇고. 체험의 객관성, 확실성도 말해. 뭘 말하고 싶은 거야. 삶인데. 삶을 말하려는데- 삶의 앎 막 하고 작용으로 몰고 갔어. 거기에 반해 수동을 엄청 강조하면서- 체험의 수동과 수용을 지적하면 뭘 가리켜? 행위를 강조하면 신을 만들었다고 바로 나와. 투사의 공격. 인간이 하는 행위야.

열심히 휘발유 부으니까 불 붙은 거야. 그런 거에 반면에, 수동성 강조하면, 내가 한 게 아 니야. 난 그냥 맞딱뜨려서 당하는 거야. 그래서 수동을 통해 있음으로 가는 거지. 체험의 수 동성. 이런 구조를 가지고 있는 근거- 존재 증명은 아니지만. 전혀 아니야, 증명 아니야. 하 지만 저 있음의 얘기를 하고 싶은 거야. 내내 그러고 있다고. 신존재, 신의 있음을 말하는 방식을 보라고. 개신교 신학에서는 하지 않던 방식이야. 라너가 칸트와 하이데거를 합쳐서 주물러서 자기 사상 만들었거든? 칸트가 어떤 사람이야. 리츨 얘기도 나왔지만, 칸트로 인 해 카톨릭 신학은 붕괴됩니다. 붕괴되잖아? 없다고 안 해요. 모른다고. 근데 토마스는 모르 는 것을 주무르니 우스운 거야. 근데 라너는 칸트를 통과해서 어떻게 토마스가 살아남을까.

그 힌트를 하이데거를 통해 얻어요. 형이상학에 대한 집요한, 존재에 대한 향수를 갖는 거 야. 그러니까 이건 정치신학 사회신학 문화신학- 주제적인 신학과는 달리, 근본적으로, 교의 학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는데, 더 이상 옛날 버전으로 할 수 없어. 삶의 차원에서 저 있 음을 어떻게 할 지 짤짤한 고민이라고. 저 유구한 역사와 현대. 칸트에 의해 날라갈 것 같 은, 그러면서 체험의 수동성을 봅시다. 그 눈으로 보십시오. 그러면… 하여간, 그런 취지와 목적을 가지고, 얘기를 전개한 것에 있어서-

체험을 얘기한 두 가지 이유.

신앙 이성이 아니라, 삶.

수동성을 통해 신의 있음.

개신교 신학에서는 발견하기 힘든 모티브야.

이 사람의 책은 1권에 비해 쉬워요. 은혜롭기도 하고, 배울 것도 적고. 종교철학도 이렇게 은혜로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고요. 헤센의 1권은 이런 기회에 한번 보십시오. 분위 기가 확 다릅니다. 2페이지가 힘듭니다. 어쨌든. 거꾸로 할 수도 있지만. 고민을 많이 했습 니다. 그랬다가는 여러분 다… 세상이 왜 이러냐 할 테니. 대신에 여러분이, 오늘 얘기한 식 으로 더 입체적으로, 종횡무진 접근하면 좋을 거예요.

sB에 대해서도 그러면 좋을 거예요.

광고가 하나 있는데. 작년, 대학원 수업에- 저렇게 깔끔하게 노트 잘하는- 태진이가 진작 대학원에 왔어야 해. 수집을 합니다. 노트 수집합니다. 저는 강의록이 보시다시피 없잖아요.

(12)

하지만 강의록을 제출하래요. 학교평가… 중앙일보가 걸려있는데. 걔네 때문에 별짓을 하는 마당인데. 노트 한 것- 다 사진 찍어가지고, 쫙. 할터인데. 노트 잘 해놓은 거…

부탁의 말씀을 드린 거고, 조교는 취재와 취조를 하시기를ㅋㅋㅋ

오늘은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사실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이제부터 들어가면 딱 딱 찝으면 되잖아요. 본문 찝으면 되는데, 그러면 6시반이야. 오늘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참조

관련 문서

그래서 경제학자들은 그러한 가정에 따른 가격분석을. ‘비교정태분석(comparative static

그래서 상임위원회에서도 특히 법 안소위원회의

그래서 북한의 미사일 발사는 기습공격(SURPRISE

그래서 정치실패가

국민통합이라는 구호는 정치적으로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정책목표로 삼기에는 부적합 하다... 그래서 선거는

그러나

그러나 WLS는 다음과

그런데 경제자유와 사회통합은 충돌하는 관계이기에 사회통합을 위해서는 경제자유를 억제하는 간섭주의가 필요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