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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포토그래피의 지표 패러다임과 수정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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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표 패러다임과 수정이론

박 평 종*

1)

Ⅰ. 머리말

Ⅱ. 지표이론과 사진 이미지의 존재론

Ⅲ. 사진의 비지표적 특질

Ⅳ. 현대미술의 지표 패러다임

Ⅴ. 수정이론의 논점들

Ⅵ. 맺음말

Ⅰ. 머리말

이 글은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등장 이후 급부상한 사진이론의 주요 쟁점들 을 오늘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재검토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포스트 포토그

* 중앙대학교 다빈치교양대학 강의전담교수

이 논문은 한국미학예술학회 2017년 봄 정기학술대회 기획심포지엄에서 발표한 원고를 수정보완하여 게재한 것임.

* DOI http://dx.doi.org/10.17527/JASA.5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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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피로 지칭되는 현대사진의 두드러진 특성은 아날로그 시대의 사진이론을 지배 했던 개념들과 대척점에 있다. 포스트 포토그래피 이전의 이론이 ‘도큐먼트’, ‘기 록’, ‘실재’, ‘흔적’과 같은 개념에 의지하고 있었다면, 이후는 ‘시물라크룸’, ‘허구’,

‘가상’과 같은 전혀 상반된 개념들로 대체되고 있다. 물론 포스트 포토그래피에 대 한 명확한 개념은 아직 온전히 정리돼 있지 않다. 나아가 이 ‘시대구분적인’ 용어 가 실제로 아날로그 사진과 디지털 사진의 ‘본질적’ 차이를 규정하여 양자를 질적 으로 구분할 수 있는지 여부는 불투명하다. 말하자면 ‘포스트 포토그래피’라는 용 어 자체가 논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미 일반화된 이 용어를 수용하여 논의의 시발점으로 삼을 것이다.

전자를 설명하고자 했던 고전이론은 다양하다. 처음으로 사진에 ‘존재론 (ontology)’의 관점을 도입한 앙드레 바쟁(André Bazin)이나 사진의 ‘본질 (essence, eidos)’을 ‘그것이 존재했었음(ça-à-été)으로 규정한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가 있다. 현대미술의 성격이 도상(icon) 패러다임에서 지표(index) 패러다 임으로 이동하고 있으며, 그 중심에 사진이 있다고 제안한 로잘린드 크라우스 (Rosalind Krauss)의 지표에 관한 노트 Notes on the index(1977)는 지표 논의 의 시발점이다. 이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확산된 이른바 ‘지표이론’을 통해 사진의

‘존재론’은 탄탄하게 정립된다. 장-마리 쉐퍼(Jean-Marie Schaeffer), 앙리 반리에 (Henri Vanlier), 필립 뒤브와(Philippe Dubois) 등은 퍼스의 지표 개념을 사진에 적용시켜 지표이론을 풍부하게 발전시켜 나간다.1)

그러나 1980년대에 맹위를 떨치던 지표이론은 퍼스의 기호학을 ‘순진하게’

받아들임으로써 논점을 단순화시켰다는 비판에 직면한다. 나아가 디지털 테크놀 로지의 도움으로 사진의 수정(retouch), 조작(manipulation)이 일반화되면서 급기 1) 장-마리 쉐퍼는 사진을 단순한 지표가 아니라 지표적 도상(icône indicielle)으로 규정 하며(L'image précaire, 1983), 앙리 반리에는 생산자의 의도가 개입하지 못하는 인덱 스(index)와 그것이 가능한 앵디스(indice)를 구분하며(Philosophie de la photographie, 1983), 필립 뒤브와는 인간이 배제된 채 사진이 찍히는 순간을 ‘순수하 게’ 사진적인 행위로 규정하여(L'acte photographique, 1986) 지표이론을 발전시킨다.

이들의 생각에 다소 편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뿌리는 퍼스의 지표 개념에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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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이론의 재고를 요청받는다. 논리는 간명하다. 만약 사진이 ‘지표’라면, 그리고 그 원리에 따라 사물의 표면에서 ‘실제로’ 반사된 빛이 감광물질에 작용해야 사진 이 생산된다면 포스트 포토그래피의 ‘실재하지 않는’ 사물의 이미지를 어떻게 사 진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인가? 이 경우 그 사진은 지표가 아니거나, 그 이미지는 사진이 아니다. 전자의 경우 지표이론을 버리면 된다. 후자의 경우 그 이미지를 사진이 아니라고 규정하면 된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다. 지표의 속성이 강했던 아날로그 사진의 시대에도 시물라크룸은 있었으며, 지표의 특질을 상실한 것처럼 보이는 디지털 사진도 여전히 빛과 감광판(센서)의 작용을 통해야만 이미지가 생산되기 때문이 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지표이론은 여전히 유효한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지표이 론을 고집스럽게 주장하는 진영에서는 사진과 지표의 관계를 재설정함으로써 문 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들에게 기존의 지표이론은 사진과 지표를 동일 시함으로써 ‘존재론’의 함정에 빠져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사진은 그 자체로서 지 표는 아니지만 지표의 특성을 여전히 지니고 있다. 결국 사진과 지표를 동일시하 기는 어렵지만 허구와 관계하는 사진도 빛에 반응하는 감광물질의 산물인 이상 지표이론의 지배를 받는다.

한편 지표이론이 실효성을 상실했다고 주장하는 진영에서는 패러다임의 근 본적인 전환이 필요하다고 여긴다. 그들에게 지표이론은 애당초 잘못 끼운 단추 였다는 것이다. 예컨대 바쟁이나 바르트와 같은 고전이론이 지표이론과 친화력을 지님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생각을 지표이론의 범주에 넣을 수는 없다. 오히려 이 런 고전이론들 속에는 지표이론을 뛰어넘는 훨씬 풍부한 생각들이 잠복해 있다.

따라서 이를 지표이론의 틀 속에서 보는 것은 일반화의 오류다. 반대로 이 고전 이론들 속에는 포스트 포토그래피의 주요 쟁점들을 설명할 수 있는 다양한 개념 들이 산포해 있다. 포스트 포토그래피 이전과 이후는 지표 개념을 통해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고전이론들의 풍부함을 통해 연결된다. 이런 생각의 바탕 에서 프랑스의 사진이론가인 앙드레 귄테르는 “지표이론의 역설을 해결하기 위해 서는 사진을 ‘이미지의 역사’ 속으로 끌어들”2)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날로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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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디지털로의 이행은 ‘단지’ 이미지 생산의 기술(technic) 변화를 가리킬 따름이 다. 그리고 이런 기술 변화는 이미지 생산의 역사를 관통해 왔다.

위의 견해들이 상이해 보임에도 불구하고 공통점은 분명하다. 즉 기존의 지 표이론은 디지털 시대의 사진을 설명하는 데 더 이상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비록 지표이론이 ‘부분적으로’ 사진의 특수성을 여전히 지탱하고 있음에도 불구하 고 말이다. 이 논문은 이러한 요청의 바탕에서 지표이론의 재검토를 제안한다. 현 재 사진이론의 최전선에서 벌어지고 있는 논의를 소개 정리하는 한편 고전이론 해석에서 간과해 왔던 주요 의제들을 다시 살펴볼 것이다. 이를 통해 포스트 포 토그래피 이전과 이후를 연속선상에서 고찰할 수 있는 합리적 연결고리를 찾아보 고자 한다.

Ⅱ. 지표이론과 사진 이미지의 존재론

2016년 <프랑스 사진학회 Société française de la photographie>가 발행하 는 사진연구 Etudes photographiques지는 “사진이론은 무엇을 말하는가? Que dit la théorie de la photographie?”라는 주제로 논의의 장을 마련했다. 여기에 실 린 다섯 편의 논문은 지표이론의 한계를 ‘확정’하고 사진이론의 새로운 방향을 모 색하는 데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3) 그들의 논점은 다양하지만 결론은 같다. 지표 이론으로는 더 이상 포스트 포토그래피의 주요 특성을 설명할 수 없으며, 지표 패러다임은 불가피하게 수정돼야 한다는 것이다.

2) André Gunthert, “Que dit la théorie de la photographie?”, in: Etudes photographiques, N°34 (2016), http://etudesphotographiques.revues.org/3588.

3) 이 특집호에 참여한 연구자들은 조엘 스나이더(Joel Snyder, 시카고대학), 헤르타 볼프 (Herta Wolf, 쾰른대학), 앙드레 귄테르(André Gunthert, EHESS), 필립 뒤브와 (Philippe Dubois, 파리3대학), 미셸 프와베르(Michel Poivert, 파리1대학)로, 각각 미국 과 독일, 프랑스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미술사와 사진사, 사진이론 분야의 전문 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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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먼저 지적해야 할 점은 지표이론이 갖는 폐쇄성이다. 지표주의자들은 사진을 지표의 틀 속에 가둠으로써 사진 이미지의 복합적인 층위에 대한 논의를 차단해 버렸다는 것이다. 조엘 스나이더는 이런 현상이 사진을 지표의 범주에 속 하는 수많은 기호들(지문, 발자국, 성물 등)과 동일시하려는 강박에서 비롯됐다고 지적한다.4) 이는 지표이론이 확산되는 과정에서 생겨난 현상이다. 그리고 그런 태 도는 1980년대의 지표이론 이전에도 이미 유사한 사진이론이 있었음을 입증하려 는 시도로 나타났다. 대표적인 예는 처음으로 사진을 ‘존재론적 관점’에서 규정하 고자 했던 앙드레 바쟁의 사고를 지표이론과의 관계 속에서 해석하려는 움직임이 다. 지표이론의 대표주자 중 한명인 필립 뒤브와는 “바쟁의 개념들에는 사진은 도 상이기 이전에 우선 지표”5)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고 주장한다. 사진의 존재론은 유사성이 아니라 이미지와 대상 사이의 인접성에 있으며 사물의 형상은 감광물질 위에 그대로 전이된다는 것이다. 바쟁이 주장하는 ‘사진 이미지의 존재론’에는 분 명 지표 개념과의 친화성이 있다. “사진은 그 아름다움이 식물이나 대지의 기원과 분리될 수 없는 꽃이나 눈의 결정처럼 ‘자연의’ 현상으로 우리에게 작용”6)한다거 나, “사진 찍힌 대상의 존재는 마치 지문처럼 모델의 존재에 관여”7)한다는 언급 이 근거다. 지표가 자연의 인과관계에 따른 ‘물리적 접촉’의 산물인 이상 위의 언 급은 사진을 지표로 규정할 수 있는 충분한 여지를 남겨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 나 바쟁의 글 어디에도 지표에 관한 구체적 언급은 없으며, 나아가 지표 개념과 의 유사성을 보여주는 단편적인 표현들이 그의 ‘존재론’을 구성하는 데 반드시 필 요한 것도 아니다. 따라서 이런 개념적 유사성이 어떤 맥락 속에서 나온 것인지, 궁극적으로 바쟁의 ‘존재론’이 ‘왜’ 지표이론과 다른지 살펴보아야 한다.

4) Joel Snyder, “Photographie, ontologie, analogie, compulsion”, in: Etudes photographiques, N°34 (2016), http://etudesphotographiques.revues.org/3589.

5) Philippe Dubois, “De la verisimilitude à l'index”, L'acte photographique (Nathan, 1990), p. 30.

6) André Bazin, “Ontologie de l'image photographique”(1945), Qu'est-ce que le cinema?, (Paris: Cerf, 1985), p. 13.

7) André Bazin, “Ontologie de l'image photographique”, p.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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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사진 이미지의 고유한 ‘존재론’은 회화의 ‘심리적 리얼리즘’을 기계장 치의 ‘객관적 리얼리즘’으로 대체한 데 있다. 이 ‘심리적 리얼리즘’은 조형예술의 기원에 깔려 있는 ‘미라 콤플렉스’를 극복하려는 ‘불가능한’ 충동에서 기인한 것이 다. 예술과 문명의 발전에 따라 미라 콤플렉스의 주술적 기능은 사라진다. 하지만

‘욕망’은 여전히 남아 ‘형태의 리얼리즘’, 즉 모델과 이미지의 동일성을 추구하는

‘가짜 리얼리즘’으로 진화한다. 말하자면 “외부 세계에 대한 어느 정도 완벽한 모 방과 정신적 현실의 표현을 결합”8)시키고자 하는 ‘심리적’ 욕구를 말끔히 몰아내 지는 못했던 것이다. 사진은 “조형예술을 유사성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해방”9) 키면서 탄생했다. 그것이 가능했던 까닭은 사진이 지닌 ‘본질적 객관성(objectivité essentielle)’ 덕분이다. 회화가 갖지 못한 이 객관성은 이미지 생산에 주관성을 개 입시킬 수 있는 여지가 ‘원천적으로’ 차단돼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말하자면 사진 이 찍히기 이전과 이후에는 인간이 개입할 수 있지만 이미지가 형성되는 순간만 큼은 빛과 감광물질의 작용만 있다. 결국 바쟁은 “처음으로 외부 세계의 이미지가 엄격한 결정론에 따라 인간의 창조적 개입 없이 자동적으로 형성”10)되며, 이 “자 동생성(genèse automatique)이 이미지의 심리학을 급격히 전복시켰다”11)고 주장 한다. 이것이 사진 이미지의 ‘존재론’이다.

바쟁의 ‘존재론’을 지표이론에 연계시키는 이들은 이 자동생성 개념이 대상 과의 ‘물리적 연결(connexion physique)’12) 관계를 전제한다고 본다. 그리고 그 해 석은 ‘대충’ 맞다. 하지만 바쟁의 통찰이 지향하는 바는 다른 데 있다. 핵심은 이

‘자동생성’이 조형예술의 기원을 규정하는 이른바 ‘미라 콤플렉스’를 말끔히 소독 하고, 나아가 리얼리즘의 역사를 새로 썼다는 것이다. 그가 “사진은 조형예술의

8) André Bazin, “Ontologie de l'image photographique”, p. 10.

9) André Bazin, “Ontologie de l'image photographique”, p. 12.

10) André Bazin, “Ontologie de l'image photographique”, p. 13.

11) André Bazin, “Ontologie de l'image photographique”, p. 13.

12) 퍼스는 지표의 특질을 설명하면서 사진을 예로 든다. 그에게 사진은 ‘물리적 연결’ 덕 분에 대상과 연속성을 갖는 지표다. Charles S. Peirce, Ecrits sur le signe (Paris:

Seuil, 1978), p. 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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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13)이라고 단언하는 이유는 사진의 발명과 더불어 서 구 회화가 리얼리즘의 강박에서 해방됐으며, 그 결과 미적 자율성을 회복할 수 있었다는 인식 때문이다. 따라서 지표주의자들의 지나친 일반화는 바쟁의 이론을 왜곡시킬 위험성을 다분히 내포하고 있다. 예컨대 바쟁이 인용하는 ‘토리노의 성 의’를 지표이론의 맥락에서 이해하려는 태도도 그렇다. 이 성유물은 분명 지표의 특성을 지닌다. 천 조각 위에 각인된 예수의 형상은 지표주의자들의 ‘교리’처럼

‘물리적 접촉’에 따라 형성됐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14) 하지만 이 사례에서도 바쟁의 관심은 다른 데 있다. 그는 여전히 이미지의 심리학을 설명하기 위해 이 예를 끌어온다. 바쟁은 “미라 콤플렉스에서 생겨난 리얼리티의 전이를 똑같이 누 리는 성유물과 ‘기념품’의 심리학을 여기에서 도입할 필요”15)가 있다고 언급한다.

즉 ‘토리노의 성의’에 각인된 이미지에는 사물의 현실성이 그대로 전이돼 있어 대 상의 존재에 대한 확신을 가져다준다. 이런 확신은 미라 콤플렉스를 극복한 이후 모델과 이미지의 동일성에 대한 주술적 사고가 우리에게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음 에도 불구하고 이미지의 심리학을 지배한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실제로 여행했 던 장소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켜주는 기념품과도 같다. 따라서 이 이미지는 제 아무리 모델과 유사한 회화라도 결코 가질 수 없는 ‘비이성적 힘(pouvoir irrationnel)’을 지닌다. 이미지의 심리학을 압도하는 이 힘은 모델의 존재 자체에 서 온다며 바쟁은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이미지는 흐릴 수도, 변형됐을 수도, 색 바랜 상태일 수도 있으며, 기록적 가치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이미지는 생 성 원리에 따라 모델의 존재로부터 나왔으며, 모델 자체다.”16)

바쟁이 언급하는 ‘이미지의 심리학’은 사진 이미지의 ‘존재론’을 유연하게 받 아들이기를 제안한다. 사진 이미지는 생성원리에 따라 모델의 존재와 연결돼 있

13) André Bazin, “Ontologie de l'image photographique”(1945), p. 16.

14) <토리노의 성의>에 대한 진위논란이 여전히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지의 생성원 리를 고려하여 이 성유물을 지표의 성격을 지닌 기호로 간주할 수 있다.

15) André Bazin, “Ontologie de l'image photographique”(1945), p. 14.

16) André Bazin, “Ontologie de l'image photographique”(1945), p.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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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 그 이미지는 ‘흐릴 수도’, ‘기록적 가치가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 점에 따라 스나이더는 지표이론의 지나친 일반화를 비판하면서 바쟁의 ‘심리학’이 지닌 장점을 환기시킨다. 사진은 분명 실제로 존재했던 사물의 흔적이지만 어떤 사물이 찍혔는지 알 수 없는 경우도 무수히 많다. 그것이 사진 이미지의 다양한 층위를 구성한다. 그 사례로 스나이더는 샤를 마르빌의 사진에 찍힌 형체를 알아 볼 수 없는 뿌연 안개나 만 레이의 작품에 등장하는 형체가 일그러진 뒤샹의 초 상에 대해 거론한다.17) 지시대상의 확인이 불가능한 이런 이미지들에서 사진과 지표의 관계를 말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사례 들은 얼마든지 열거할 수 있다. 바쟁 역시 사진의 ‘존재론’을 이런 유형의 사진에 까지 일반화시켜 적용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사진이 ‘이미지의 심 리학’을 극적으로 전복시켰다는 주장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다. 역설적이지만 주술 적 사고를 이미 극복한 비판적 지성조차도 모델과 이미지를 동일시하려는 충동 앞에서는 무능할 따름이다. 스나이더의 주장에 따르면 사진이 제공하는 존재와의 유사성은 이처럼 무능한 지성의 고통을 완화시켜주는 진통제와도 같다.

Ⅲ. 사진의 비지표적 특질

지표이론을 일반화하려는 태도는 바쟁뿐만 아니라 롤랑 바르트의 사진론도 포섭하려 한다. 이런 경향은 대부분의 지표주의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예컨대 필립 뒤브와는 바르트의 사고를 확장시키면 “사진은 미국의 철학자이자 기호학자인 퍼스가 도상이나 상징과 달리 지표라 불렀던 기호의 범주에 속한 다”18)고 단언한다. 바르트가 사진의 ‘본질’이라 규정한 ‘그것이-존재-했었음’이나

‘지시대상의 일회성’은 결국 지표의 특성과 무관치 않다는 것이다. 이런 해석은 충

17) Joel Snyder, Photographie, ontologie, analogie, compulsion.

18) Philippe Dubois, L'acte photographique (Nathan, 1990), p. 59. 뒤브와의 이런 해석은 도처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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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한 설득력이 있다. 실제로 바르트는 사진의 메시지 와 이미지의 수사학 에서 부터 밝은 방 에 이르기까지 사진과 지표의 유사성을 ‘다른 언어’로 표현해 왔다.

그 표현들을 따라가 보자.

바르트의 저 유명한 명제 “사진은 코드 없는 메시지”19)에 이미 지표의 특질 이 묻어있다. 사진은 관습이나 문화와 무관하게 대상과의 ‘연속적인’ 메시지를 전 달하기 때문이다. 이 ‘코드의 부재’가 사진의 ‘자연스러움(le naturel)’을 규정하며, 인간의 개입은 여기서 배제된다. 이미지의 수사학 에서 바르트는 다시 이 개념 을 확장시켜 사진은 “사물의 ‘여기-있음(l'être-là)이 아니라 ‘거기-있었음 (l'avoir-été-là)에 대한 의식”20)을 끌어들인다고 언급한다. 이 생각은 다시 <밝은 방>에서 ‘그곳에-존재-했었음(ça-a-été)’이라는 다른 표현으로 되돌아온다. 이런 표현들에 이미 지표와의 개념적 유사성이 나타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 나 바르트가 여기서 강조하는 바는 지표 기호의 특질이 아니라 사진의 외시적 차 원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지표이론과의 친화력은 밝은 방 에서 더욱 구체화된다. 바르트는 첫 장에 서부터 “나는 사진에 대한 ‘존재론적 욕망(désir ontologique)’에 사로잡혀 있었”고, 결국 “사진 ‘자체’가 무엇인지, 그것은 어떤 본질적인 특징을 통해 이미지들의 공 동체와 구분되는지 알고 싶었”다며 기획 의도를 분명히 밝힌다.21) 이런 언급은 바쟁의 ‘사진 이미지의 존재론’을 환기시키며, 지표주의자들이 사진을 ‘규정’하고자 했던 ‘조바심’과도 연결된다. 이 욕망에 따라 바르트는 사진의 특수성을 다양한 방 식으로 정의한다. 사진에는 지시대상이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거나, 나아가 사 진은 지시대상 자체라는 언급이 그 예다. 구체적으로 지표 개념을 암시하는 대목 은 다음의 문장이다. “사진은 문자 그대로 지시대상의 발산(émanation)이다. 거기

19) Roland Barthes, “Le message photographique”, L'obvie et l'obtus (Paris: Seuil, 1982), p. 11.

20) Roland Barthes, “Rhétorique de l'image”, L'obvie et l'obtus (Paris: Seuil, 1982), p.

35.

21) Roland Barthes, La chambre claire (Paris: Cahier du cinéma/Seuil, 1980), pp.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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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던 현실의 물체로부터, 여기 있는 나와 접촉하러 오는 복사광선이 출발했다 .”22) 이 문장은 퍼스의 지표 개념에서 핵심인 ‘물리적 접촉’이 사진의 시각적 경 험에 ‘실제로’ 개입함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이 ‘접촉’의 경험을 좀 더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과거의 사물이 즉각적인 광선을 통해 표면과 ‘실제로’

접촉했고 뒤이어 나의 시선이 그 표면과 다시 접촉”23)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르트는 이런 인식을 통해 ‘사진에 대한 존재론적 욕망’을 성취했다고 할 수 있 을까? 달리 말하자면 그는 다른 이미지들과 구분되는 사진의 ‘본질적인 특성’을 이 ‘물리적 접촉’에서 발견했는가?

사실 접촉에 관한 바르트의 서술은 그가 사진의 ‘본질’이라고 역점을 두어 강조하는 ‘그것이-존재-했었음’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다. 이 개념은 바르트가 자신의 어머니의 어린 시절을 보여주는 ‘온실사진’에서 찾아낸 것으로, 이 사진이 이상적으로나마 “유일자의 불가능한 과학24)”을 완성해 주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바르트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어머니의 소녀 시절 모습이 바로 그 ‘유 일자’임을 확신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소녀 시절 모습이 어머니 와 닮았기 때문이 아니다. 진정한 이유는 바로 그녀에게서 ‘실제로’ 발산됐던 빛이

‘온실사진’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기 전 인화지 표면을 덮고 있던 감광물질과 접촉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이 빛에 대해 경의를 표하며 다음과 같이 쓴다.

“온실 사진은 제 아무리 희미하다 할지라도 내게는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그리 고 그녀의 머리칼과 피부, 원피스와 시선에서 바로 그날 발산됐던 보물 같은 빛”25)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바르트에게 사진의 ‘본질’을 알려 준 이 ‘유일자’

는 다른 이에게 결코 동일한 경험이 될 수 없다. 여기에 역설이 있다. 만약 지표 의 기능이 대상의 존재를 확증하는 데 있다면, 그리고 궁극적으로 지시대상과 이 미지의 연속성을 확인시켜 주는 데 있다면 이 경우 한계에 봉착한다. 온실사진이

22) Roland Barthes, La chambre claire, p. 126.

23) Roland Barthes, La chambre claire, p. 127.

24) Roland Barthes, La chambre claire, p. 110.

25) Roland Barthes, La chambre claire, p.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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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표의 생성원리를 따름에도 불구하고 이미지는 지시대상을 확증해줄 수 없기 때 문이다. 바르트를 제외한 어느 누구도 온실사진의 ‘어린 소녀’에서 그의 어머니의 존재를 확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며, 나아가 그와 동일한 경험(고통)을 할 수 없는 것이다. 바르트는 바로 그 때문에, 즉 그 사진은 자신을 위해서만 존재하고 다른 이들에게는 그저 대수롭지 않은 소녀의 초상에 불과할 터이기 때문에 <밝은 방>

에서 그 사진을 보여주지 않았다.26)

지표주의자들의 ‘단순한’ 해석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뒤브와는 지표의 원 칙을 유일성(singularité), 증명(attestation), 지시(désignation), 세 가지로 요약하면 서 그 특성이 바르트의 사고에 모두 드러난다고 주장한다.27) 첫째, 지표가 실제 사물과의 접촉을 통한 물리적 흔적인 이상 지표는 유일성을 지닌다. 뒤브와는 그 예로 바르트가 “사진이 무한히 복제하는 것은 단 한번만 일어났으며, 존재론적으 로 반복될 수 없는 것을 기계적으로 반복한다”28)고 주장한 문장을 인용한다. 둘 째, 지표는 자신을 낳은 실제 사물의 존재를 입증한다. 뒤브와가 인용하는 바르트 의 문장은 그가 사진의 노에마를 ‘그것이-존재-했었음’으로 규정한 후 리차드 아 베든이 촬영한 윌리엄 캐스피의 초상이 “우리 시대로부터 그리 멀리 않은 시기에 노예가 존재했었음을 증명한다”29)고 언급하는 대목이다. 셋째, 지표는 자신과 실 제 접촉했던 사물을 지시한다. 뒤브와는 바르트가 “내게 사진가의 신체기관은 눈 이 아니라 손가락”30)이며, “사진은 항상 ‘이것, 바로 이것이야’라고 말하는 동작의 끝에 위치해 있다31)”고 언급하는 대목을 인용한다.

지표의 세 가지 특성을 정당화하기 위한 뒤브와의 인용이 잘못됐다고 할 수 는 없다. 하지만 이런 이해가 바르트가 의도했던 사진의 특수성을 온전히 설명해 주는 것도 아니다. 바르트는 밝은 방에서 사진의 ‘비(非)지표적’ 특성을 고찰하 26) Roland Barthes, La chambre claire, p. 115.

27) Philippe Dubois, L'acte photographique, p. 68.

28) Philippe Dubois, L'acte photographique, p. 69.

29) Philippe Dubois, L'acte photographique, p. 71.

30) Philippe Dubois, L'acte photographique, p. 72.

31) Philippe Dubois, L'acte photographique, p.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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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데도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예컨대 그는 푼크툼의 특징을 열거하면서

‘보충(supplément)’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그것은 내가 사진에 보충하여 덧붙이 는 것”이자,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가려진 시야”이기도 하며, “이미지가 보 여주는 것 너머로 욕망을 분출하는 것처럼” “시야 밖의 미묘한” 영역에 속한다는 것이다.32)

이런 특성은 뒤브와가 제시한 지표의 세 가지 특질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 으며, 바르트 자신이 제안했던 사진의 노에마(그것이-존재-했었음)와도 무관해 보 인다. 시야 밖에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 ‘보충’은 바르트가 관찰자(Spectator)라고 표현한 ‘사진을 보는 자’의 상상, 욕망에서 생겨난 것이며, 그것은 ‘이미지의 공동 체’가 지닌 일반적 속성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바르 트는 ‘온실사진’의 ‘소녀’에서 어머니를 확인했던 ‘동일시’ 과정에서 ‘닮음’의 기만 성을 언급한다. 그는 어머니와 닮았던 다른 사진들에 대해 실망했던 반면 ‘닮지 않은’ 온실사진이 “어머니의 눈부신 진실”을 보여주었다고 말한다.33) 또한 닮음보 다 더욱 기만적인 것이 “현실의 얼굴에서 전혀 지각하지 못하는 유전적 특질”34) 이라며 사진의 지각에 개입하는 비가시적 요소에 대해 거론한다. 물론 바르트는 이 닮음과 혈통이 지닌 ‘기만성’을 비판하지만 그것이 사진의 지각에서 ‘실제로’

작동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나아가 그는 사진의 지표성이 지닌 ‘자명함’이 ‘사물’이 아니라 ‘존재’와 관련 할 때 전혀 다른 쟁점을 끌어들인다고 주장한다. “사진이 어떤 사람의 존재를 인 증하기 때문에, 나는 그를 신분증상이나 유전적 닮음을 넘어 전체로, 즉 본질적으 로, ‘그 사람 자체로’ 되찾기를 원한다. 여기에서 사진의 평평함(자명함)은 더욱 고 통스러운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가리킬 수 없는(indicible) 무엇을 통해서만 나의 광적인 욕망에 화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은 명백하지만 (그것이 사진

32) Philippe Dubois, L'acte photographique, pp. 89-93. 바르트는 푼크툼의 특징으로 디테 일, 비의지적 성격, 코드화할 수 없음, 보충을 제시한다.

33) Philippe Dubois, L'acte photographique, p. 160.

34) Philippe Dubois, L'acte photographique, p. 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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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법칙이다) 있을 법하지 않다 (나는 그것을 증명할 수 없다). 이 무언가는 분위 기다.”35) 위의 서술은 바르트 스스로 사진의 노에마라 불렀던 자명함(그것이-존 재-했었음)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여기에서 지표성은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한다.

게다가 ‘분위기’를 인지한다는 것은 사진의 인증을 넘어 ‘존재’를 되찾는 것이기도 하다. ‘온실사진’이 어머니를 확인하는 것(인증) 이상의 경험을 가져다주었던 것도 바로 이 분위기였다. 즉 바르트는 그 사진에서 “어머니의 긴 생애 동안 매일같이 보았던 분위기, 어머니의 얼굴과 일체가 되어 있던 그 분위기”36)를 보았던 것이 다. 결국 바르트에게 분위기는 “진실의 표현”37)으로 사진이 지닌 인증의 힘, 즉 지표성을 압도한다. 바르트는 필립 랜돌프의 초상사진에 이런 ‘선함’의 분위기가 잘 드러난다고 언급하면서 이런 ‘분위기’를 보여주지 못하는 사진에서 남는 것은

‘메마른 신체’뿐이라고 덧붙인다. 말하자면 사진은 분명 그 사람의 존재를 확인시 켜 주지만 그 지표적 특성은 거기서 멈출 뿐 ‘진실의 표현’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결국 바르트에게 사진은 생성의 관점에서는 지표의 특질을 지니지만 지각의 차원 에서는 전혀 다른 계열의 의미를 끌어들인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층위는 넓 고도 두텁다.

Ⅳ. 현대미술의 지표 패러다임

지표주의자들이 바쟁과 바르트로 대표되는 사진의 ‘존재론’을 지표이론의 틀 속으로 끌어들이게 된 배경에는 로잘린드 크라우스의 지표에 관한 노트 (1977, 이후 ‘노트’로 약칭)의 영향이 있다.38) 주지하다시피 노트 는 1980년대 프랑스를 35) Philippe Dubois, L'acte photographique, pp. 166-167.

36) Philippe Dubois, L'acte photographique, p. 168.

37) Philippe Dubois, L'acte photographique, p. 168.

38) 프랑스 지표주의자들에 앞서 크라우스가 바쟁과 바르트를 인용한다. 특히 바르트에 대한 인용은 자주 눈에 띈다. 바르트의 밝은 방 이 노트 보다 나중에 출간된 탓에 크라우스는 이미지의 수사학 과 기호학의 요소들 을 주로 인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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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으로 전개된 지표 논의의 시발점이다. 크라우스는 퍼스의 기호이론을 핵심 전거로 삼고, 바쟁의 사진 이미지의 존재론 과 바르트의 이미지의 수사학 을 인용하면서 도상과 지표의 차이에 따라 현대미술의 성격을 고찰한다. 프랑스 지 표주의자들은 크라우스의 노트 가 의지하고 있는 퍼스, 바쟁, 바르트의 개념들을 주요 논거로 끌어들여 이론을 확장시켜 나간다.39)

그런데 왜 프랑스 지표주의자들은 굳이 크라우스의 노트 를 전거로 삼아야 만 했을까? 우선 양자의 입장 차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들의 ‘의도’는 바쟁과 바르트를 해석하는 방식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사진의 ‘존재론’을 구축하는 데 있 다. 한편 크라우스가 퍼스의 지표 개념에 주목하는 이유는 ‘단지’ 현대미술의 성격 이 ‘도상’에서 ‘지표’로 이행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데 있다. 이 차이는 중요하다.

사실 프랑스에서 사진의 예술적 지위는 1970년대에도 여전히 미약했다. 따라서 프랑스 이론가들은 사진의 ‘이론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신생 매체’의 ‘존재 론’을 구축할 필요가 있었다. 도미니크 바께(Dominique Baqué)는 크라우스의 분 석이 이런 관점에서 사진의 ‘정당화 담론’을 강화시켜 주었다고 지적한다.40) 이런 맥락을 고려하여 크라우스는 자신의 논평들을 완전히 새롭게 재구성한 프랑스어 판본 서문에서 뒤샹의 <대형유리>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회화가 아니라 거대 하고 복잡한 한 장의 사진”으로 볼 수 있으며, 결국 이 작품은 현대미술의 성격이

“도상에서 지표의 규범으로 대체”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라고 언급한다.41) 점을 압축하자면 크라우스가 퍼스의 지표 개념에 주목했던 것은 뒤샹의 작품에서 39) 프랑스의 지표주의자들이 로잘린드 크라우스의 지표 개념을 수용하게 된 배경과 과정 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77년 October에 처음 발표됐던 노트 는 1979년 프랑 스의 Macula에 번역, 소개된다. 이후 프랑스의 지표이론들이 속속 발표되고 다시 1990년에는 지표와 관련된 크라우스의 다른 논평들이 “Le photograpique”라는 제목으 로 묶여 출간된다. 이에 관한 내용은 다음의 글에 상세히 정리돼 있다. Katia Schneller, “Sur les traces de Rosalind Krauss – La réception française de la notion d'index 1977-1990”, in: Etudes photographiques, N°21 (2007), pp. 123-143.

40) Dominique Baqué, La photographie plasticienne (Paris: Rgard, 1998), p. 99.

41) Rosalind Krauss, Le photographique – Pour une théorie des écarts (Paris: Macula, 1990), p.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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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견한 현대미술의 근본적인 전환을 설명할 수 있는 개념적 도구를 거기서 발견 했기 때문이다. 한편 프랑스 지표주의자들은 크라우스의 발상에서 사진의 ‘존재론’

을 탄탄히 펼칠 수 있는 계기를 찾았다고 할 수 있다. 크라우스의 이런 ‘의도’를 카티아 쉬넬러(Katia Schneller)는 정확히 간파한다. 즉 크라우스의 관심은 사진의 존재론을 이론화하는 것이 아니라 매체의 특수성에 대한 미국 모더니즘 담론을 대체할 이론적 도구를 찾는 데 있었다는 것이다.42) 말하자면 프랑스 지표주의자 들은 사진 매체의 특수성을 설명하기 위해, 크라우스는 반대로 매체의 특수성에 대한 담론에서 벗어나기 위해 각각 지표 개념을 끌어들인 셈이다.

이 차이는 역설적이지만 어쨌든 크라우스의 지표 개념은 사진의 ‘존재론’이 아니라 패러다임에 가깝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크라우스는 자신에게 사 진은 연구의 대상이 아니라 이론의 대상이라고 분명히 밝힌다.43) 요컨대 ‘사진 자 체’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진이 모더니즘 미술 담론의 이론적 대상이기 때문에 중요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노트 에서 크라우스가 분석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사진이 아니라 현대미술이 지닌 사진적 특성들이다. 여기서 ‘사진적 특 성’은 ‘지표성’을 가리킨다. 이 등식은 그녀가 “모든 사진은 빛의 반사를 통해 감 광판 위에 전이된 물리적 자국의 결과”며, 결국 “사진은 대상과 지표적 관계 (indexical relationship)를 가지는 도상(icon) 혹은 시각적 재현 형태”44)라고 규정 하는 데서 확인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크라우스가 사진을 지표 자체와 동일시하 기보다 ‘지표성을 지닌 도상’으로 이해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노트 에서 크라우스는 뒤샹의 작품들[<Tu m'>(1918), <Elevage de poussière>(1920), <With my tongue in my cheek>(1959)]이 지닌 지표성에 주목 한다. 특히 <대형유리>는 “일종의 사진”인데, 그 이유는 “단지 다양한 지표의 사

42) Katia Schneller, “Sur les traces de Rosalind Krauss – La réception française de la notion d'index 1977-1990”, pp. 125-126.

43) Rosalind Krauss, Le photographique – Pour une théorie des écarts, p. 12.

44) Rosalind Krauss, “Notes on the index – Seventies art in America (Part I)”, in:

October, N°3 (MIT Press, 1977), pp. 68-81, p.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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례들을 보여주는 표면의 표식들이나 그림의 장 속에서 마치 물리적 실체로서 유 예된 이미지의 존재 때문만이 아니라 자신의 의미와 관계하는 이미지의 투명 성”45) 때문이다. 한편 <With my tongue in my cheek>은 뒤샹 자신의 프로필을 그린 데생과 턱 부분을 떠낸 석고반죽을 결합한 작품으로, 여기에서 “지표는 도상 과 나란히 있다.”46) 뒤샹이 끌어들인 지표성은 1970년대 이후 사진을 직, 간접적 으로 활용하는 현대미술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예컨대 데 니스 오펜하임은 <Identity Stretch>(1975)에서 자신의 엄지손가락 지문을 타르를 사용하여 거대하게 확대한 상태로 대지 위에 펼쳐 놓는다. 크라우스는 이 작업이

“지표의 명시적 특성과 결합한 사진”이자 “지표를 활용한 현존의 순수한 배치”라 고 간주한다.47) 이런 경향은 특히 스토리 아트, 바디 아트, 일부 개념미술과 대지 예술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48) 그 밖에도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을 분석하면서 크라우스는 지표가 이 예술가들의 감성을 구조화했으며, 그들이 의식했건 그렇지 않았건 자신들의 작업을 “지표의 논리에 종속시켰다”49)고 결론짓는다.

위에서 살펴보았듯 크라우스는 지표를 현대미술의 핵심 특성으로 파악하면 서 ‘지표의 예술’을 주장한다. 한편 프랑스 지표주의자들은 지표 개념을 통해 ‘사 진의 존재론’을 구축하려 한다. 따라서 그들의 지표이론은 크라우스의 그것과 큰 차이가 있다. 그들은 퍼스의 지표 개념을 수용하면서도 바르트의 후기 사고에 의 존하는 경향이 있어 지시체주의자(référentialiste)로 불리기도 한다. ‘지시체주의 (référentialisme)는 지시대상(référent)이 사진에 달라붙어 있다는 바르트의 언명 에서 유래한 것이다. 하지만 정작 바르트가 의지하는 기호이론은 퍼스의 그것과 어떤 관계도 없으며, 따라서 크라우스의 지표이론과도 거리가 멀다.50) 또한 크라

45) Rosalind Krauss, “Notes on the index – Seventies art in America (Part I)”, p. 77.

46) Rosalind Krauss, “Notes on the index – Seventies art in America (Part I)”, p. 78.

47) Rosalind Krauss, “Notes on the index – Seventies art in America (Part I)”, p. 80.

48) Rosalind Krauss, “Notes on the index – Seventies art in America (Part II)”, in:

October, N°4 (MIT Press, 1977), pp. 58-67, p. 66.

49) Rosalind Krauss, “Notes on the index – Seventies art in America (Part II)”, p. 67.

50) Katia Schneller, Sur les traces de Rosalind Krauss – La réception française de 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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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스는 지표성을 지닌 모든 자국, 흔적 등을 사진과 동일시하는 데 비해 프랑스 지표주의자들은 사진이 빛과 감광물질의 물리적 접촉으로 생성된 이미지라는 한 에서만 사진을 지표로 규정한다.

Ⅴ. 수정이론의 논점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프랑스 지표이론과 크라우스의 지표 패러다임에는 차 이가 있다. 전자는 퍼스의 지표 개념을 주축으로 받아들이고 바쟁과 바르트의 사 고에 의지하여 사진의 ‘존재론’을 구체화하고자 한다. 한편 후자는 퍼스의 용어를 빌어 현대미술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안한다. 그렇다면 지표이론과 지표 패러다 임은 포스트 포토그래피의 성격 변화를 설명하는 데 어디까지 유효할까?

디지털 사진이 아날로그 사진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는 이들 은 두 가지 관점에서 지표이론에 접근한다. 첫째, 디지털 사진도 ‘지표성’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아날로그 사진에서도 ‘비지표적’ 특성을 찾아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선 첫 번째 관점은 아날로그 카메라와 디지털 카메라가 대상을 기록 하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유사하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전자의 경우 대상에서 반 사된 빛이 감광유제와 접촉하여 이미지로 변환된다면 후자의 경우 그 빛은 숫자 정보로 저장된다. 양자의 차이는 단지 정보의 저장, 유통, 처리 방식에 있을 뿐이 다. 톰 거닝(Tom Gunning)은 이런 유사성 때문에 디지털 사진이 아날로그 사진 처럼 증명사진이나 다른 모든 종류의 기록 및 자료 사진에 활용될 수 있고, 그 때문에 디지털 사진도 지표성을 갖는다고 주장한다.51)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 표와 사진을 동일시할 수는 없다. 사진이 지표성을 가질 때 그것은 단지 지표의 여러 사례 중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결국 양자를 동일시하는 것은 종(種)과 류

notion d'index 1977-1990, p. 133.

51) Tom Gunning, “La retouche numérique à l'index”, in: Etudes photograhiques, N°19 (2006), p. 96-119, p.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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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類)를 동일시하는 것과도 같다. 두 번째 관점은 아날로그 사진에도 수많은 형태 의 ‘시물라크룸’이 있으며, 그 사진의 지표성은 도상성(유사)과 섞여 있다는 사실 을 전거로 제시한다. 수작업으로 형태를 변형시킨 픽토리얼리즘이나 포토몽타주, 바르트가 ‘수사학’이라고 불렀던 사진의 ‘코노테이션(connotation)’ 등이 그 예다.

거닝은 지표성에 의지하지 않는 이런 사례들을 고려하면 디지털 사진의 ‘조작 (manipulation)’이 사진의 본성을 변화시키지 않았다고 단언한다.52)

이런 관점에서 보면 지표는 사진(아날로그와 디지털을 포함하여)의 특수성 을 ‘부분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지표이론은 사진을 기호의 범주로 축소시 킴으로써 사진의 ‘다른 층위’를 논의에서 배제해버렸다. 그 ‘다른 층위’를 거닝은 사진이 지닌 시각적 풍요에서 찾는다. 즉 사진은 지시대상의 ‘모든 디테일’을 놓치 지 않고 재현한다. 이 ‘디테일’은 지표의 ‘지시성’에만 집착하는 사진에서 ‘불필요 한 여분’으로 취급됐던 요소다. 예컨대 베르티용의 신체사진에서 인물의 식별에 불필요한 요소들은 배제돼야 한다. 식별을 방해하는 주관적 인상을 심어줄 수 있 기 때문이다. 이런 조건에서만 사진은 지표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는 기호일 수 있다. 하지만 사진의 ‘여분’은 이 지시적 기능에 완강히 저항함으로써 ‘이미지’로 남는다.53) 그리고 이런 속성은 아날로그와 디지털 사진 모두에게 고유하다. 결국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이행은 거닝의 입장에서 보면 콜로디온 습판에서 젤라 틴 브로마이드 건판으로의 이행이나 휴대용 카메라가 야기한 스냅사진의 등장보 다 더 혁명적인 사건은 아니다.54) 그것은 ‘단지’ 사진의 생산방식만을 바꾸어 놓 았을 뿐이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지표 개념이 사진의 부분적인 특성을 설명하는 데 유효한 도구임은 분명하지만 가장 적합한 용어는 아니라고 결론 내린다.55)

거닝이 포스트 포토그래피의 지표성을 부분적으로 옹호하는 입장에 있다면 필립 뒤브와는 훨씬 ‘급진적으로’ 지표 패러다임이 시대착오적이라고 주장한다. 그

52) Tom Gunning, “La retouche numérique à l'index”, p. 7.

53) Tom Gunning, “La retouche numérique à l'index”, p. 11.

54) Tom Gunning, “La retouche numérique à l'index”, p. 12.

55) Tom Gunning, “La retouche numérique à l'index”, p.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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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1980년대 프랑스 지표이론의 대표적인 선두 주자였던 점을 감안하면 이런 주 장은 파격적이다. 뒤브와는 우선 2000년대에 진입하면서 사진이론의 화두가 바뀌 었다고 지적한다. 1990년대까지의 사진이론이 던졌던 질문이 “사진은 무엇인가?”

로 축약될 수 있다면 2000년대의 관심은 “사진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로 요약 할 수 있다는 것이다.56) 말하자면 사진의 ‘본질’에서 ‘용도(usage)’로 논의의 무게 중심이 이동한 셈이다. 그 이유는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혁명’이 야기한 변화가 사 진뿐만 아니라 다른 종류의 ‘기술 이미지(technical image)’에도 영향을 미쳤기 때 문이다. 그 변화는 이미지의 ‘생산’뿐 아니라 특히 사회적 소통의 방식에서 두드러 지게 나타났다.

뒤브와는 회화, 사진, 영화, 비디오 등 다양한 유형의 이미지들 사이에 존재 하는 ‘본질적’ 차이가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등장으로 거의 사라져버렸다고 판단한 다.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모든 정보를 동일한 방식(숫자 정보)으로 저장, 유통시 킨다. 즉 디지털의 관점에서 보면 “텍스트와 이미지, 소리 사이에 어떠한 차이도 없다”57)는 것이다. 모든 아날로그 정보는 디지털 신호로 코드화돼 데이터로 저장 될 뿐이다. 그 차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디지털화되기 이전의 오리지널 상태로 되돌아가야 한다. 뒤브와는 이 변화가 근본적인 이유는 이미지의 생성 단계에서 이미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사진의 ‘존재론’은 이미지와 실재 사이의 연속 성, 지표이론의 용어로는 ‘물리적 접촉’을 전제한다. 그리고 그 점이 사진의 본성, 매체의 정체성을 규정한다고 간주돼 왔다. 그러나 디지털 방식은 세계와 이미지 의 유기적인 관계, 즉 ‘연속적인’ 관계를 차단한다. 수는 불연속적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아날로그의 원리는 유사(연속성), 디지털의 원리는 차이(불연속성)에 있 다. 따라서 디지털 이미지는 더 이상 ‘지시대상의 발산’(바르트)도 아니고, ‘리얼리 티의 전이’(바쟁)도 아니다. 이 ‘질적 변화’를 수긍하면서 뒤브와는 결국 사진의

‘본질’로까지 부각됐던 지표이론이 ‘존재론적 남용(abus ontologique)’이었다고 반

56) Philippe Dubois, “De l'image-trace à l'image-fiction”, in: Etudes photograhiques, N°34 (2016), http://etudesphotographiques.revues.org/3593, p. 4.

57) Philippe Dubois, “De l'image-trace à l'image-fiction”, p.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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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한다.58) 그래서 이제 지표이론은 부분적으로만 적용될 수 있고, 지표의 ‘존재론’

은 이미지 생산의 기술적 과정에 관한 이론으로 축소돼야 한다고 후퇴한다.

이런 조건에서 뒤브와는 가설의 형태로 포스트 포토그래피의 새로운 이론을 제안한다. 그것은 ‘가능세계(monde possible)’에 관한 이론이다. 포스트 포토그래 피의 이미지는 더 이상 실재에 근거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필연적으로 ‘존재-했었 던’의 현실의 ‘발산’이 아니라 현실에서 지시대상을 찾을 수 없는 개연적인 세계로 서 우리 앞에 놓여 있을 뿐이다. 비록 현실은 아닐지언정 그 세계는 “자신의 논리 와 정합성, 규범을 갖고 있는” 자율적인 세계며, 어떤 점에서는 ‘허구의 우주 (univers de fiction)’라 할 수 있다.59) 사실 이 ‘가능세계’나 ‘허구의 우주’에 관한 이론은 표현만 다를 뿐 이미 철학과 문학, 미술의 고전에 차고도 넘친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뒤브와는 이 ‘가능세계’에 관한 이론을 통해서만 포스트 포토그래피 의 이론을 구축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이를 위해서는 지표의 자격을 상실한 포 스트 포토그래피가 “존재론적으로 허구인지”를 질문해야 하며, 결국 ‘허구의 진리 (vérité de la fiction)’라는 새로운 이론의 장을 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60) 그런 점에서 뒤브와는 여전히 ‘존재론적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이 새로운 이론의 장을 위해 그는 네 가지 논점을 질문의 형태로 제시한 다.61) 첫째는 다큐먼트와 아카이브에 관한 질문이다. 요지는 만약 포스트 포토그 래피의 허구적 이미지가 다큐먼트처럼 생산된다면 이를 날조된 흔적으로 볼 수 있는지의 여부다. 나아가 그 이미지를 아카이브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그것을 가 공된 아카이브로 봐야 하는지의 문제가 남는다. 둘째, 이미지의 저장과 유통에 관 한 질문이다. 디지털 시대의 사진은 점차 물질성을 잃어가고 있다. 그 이미지는 더 이상 어딘가에 저장, 보관되지 않고 가상세계를 떠다니고 있다. 웹상에서만 존 재하는 그 이미지는 유통과정에서 변형과 재생산을 반복하는 유동성을 특징으로

58) Philippe Dubois, “De l'image-trace à l'image-fiction”, p. 6.

59) Philippe Dubois, “De l'image-trace à l'image-fiction”, p. 7.

60) Philippe Dubois, “De l'image-trace à l'image-fiction”, pp. 8-9.

61) Philippe Dubois, “De l'image-trace à l'image-fiction”, pp. 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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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고 있다. 따라서 ‘가능세계’의 이론은 이 이미지의 ‘장소’와 ‘물질성’, 그것이 지 닌 ‘유동적 기억’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 셋째는 이미지의 시공간적 통일성에 관한 문제다. 포스트 포트그래피의 주요 특징은 합성을 통해 복수의 시공간이 하나의 이미지 속에 공존한다는 데 있다. 말하자면 아날로그 사진처럼 촬영 순간 단일한 시공간을 추출해내는 것이 아니라 상이한 시공간이 마치 통일성을 지닌 것처럼 환영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뛰어난 ‘접합기술’ 덕분에 여러 시공간의 경계 는 눈에 띄지 않는다. 따라서 새로운 이론은 이 문제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넷 째는 이미지의 부동성에 관한 문제다.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도움으로 사진 이미 지에 움직임을 부여하는 경우다.62) 만약 이미지가 ‘움직이거나’, ‘지속된다면’ 사진 과 영화의 관계를 새롭게 고찰해야 한다. 이 경우 예컨대 바르트가 사진과 영화 의 차이를 구분하는 기준은 아무 의미가 없다.63)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톰 거닝과 필립 뒤브와의 입장은 상이하다. 거닝이 아 날로그와 디지털 사진이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보는 데 비해 뒤브와는 그 차 이가 본질적이라고 여긴다. 따라서 전자는 지표이론이 여전히 ‘부분적으로’ 유효하 다고 생각하며, 후자는 패러다임의 대 전환을 요청한다. 그러나 이런 차이에도 불 구하고 두 상이해 보이는 견해가 수렴하는 지점은 있다. 양자 모두 지표이론을 완전히 폐기하지는 않고 이미지 생성의 원리로 남겨두기 때문이다. 비록 뒤브와 가 지표개념을 이미지 생산의 기술에 관한 이론으로 축소시켜야 한다고 주장함에 도 불구하고 그것이 사진의 생성원리에 관여함은 부정할 수 없다. 말하자면 디지 털 사진이 현실을 숫자 정보로 변환시켜 ‘불연속적인’ 이미지를 생산할 때도 그 현실은 카메라 앞에 ‘필연적으로’ 있어야 한다. 또한 그가 ‘가능세계’의 쟁점 중 하

62) 이 ‘움직이는 사진’의 사례로 정연두의 <Six points>(2010)를 생각할 수 있다. 작가는 이 작업에서 카메라의 움직임을 대상의 움직임으로 치환하여 마치 동영상과 같은 효 과를 불어넣는다.

63) 바르트는 사진이 움직여 영화가 될 때 사진의 노에마는 변질된다고 언급한다. “사진에 서는 무언가가 작은 구멍 앞에 멈춰 영원히 머물러 있고, 영화에서는 동일한 작은 구 멍 앞으로 무언가가 지나갔”기 때문에 둘은 전혀 다른 현상학에 속한다는 것이다.

Roland Barthes, La chambre claire, pp. 12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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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 제시한 시공간의 통일성 문제도 그렇다. 비록 합성된 이미지 속에 복수의 시공간이 공존하지만 그 시공간의 개별적인 구성요소들은 각자의 고유한 시공간 을 갖고 있다. 즉 본래 이미지의 생성원리는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뒤브와가 제시한 네 가지 쟁점은 이미지의 수용과 인식의 관점에서 논의해야 할 문제다. 그런 점에서 ‘가능세계’나 ‘허구의 진리’는 포스트 포토그래피에만 배타적 으로 적용되는 개념일 수 없다.

Ⅵ. 맺음말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도입 이후 사진 이미지의 세계는 급격한 변화를 맞았 다. 시물라크룸으로 가득 찬 이른바 포스트 포토그래피의 시대에 사진은 더 이상 현실의 흔적이라는 ‘고전적’ 지위를 갖지 못한다. 그에 따라 사진이론의 주요 쟁점 들도 불가피하게 수정을 요청받고 있다. 1980년대 이후 사진 논의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지표이론이 핵심이다. 지표이론은 퍼스의 지표 개념을 축으로 삼아 바 쟁이 처음 제안한 사진 이미지의 ‘존재론’과 바르트의 ‘지시체주의’를 끌어들여 사 진의 ‘특수성’을 정의하고자 했다. 유사를 속성으로 삼는 도상과 달리 지표로서의 사진은 실재와의 물리적 접촉에 따라 생성된 기호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표이론 으로는 현실에서 원본을 찾을 수 없는 포스트 포토그래피의 주요 특징들을 설명 하는 데 분명한 한계가 있다. 결국 사진이론의 최전선에서는 지표이론의 ‘남용’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수정이론들을 내놓고 있다.

이런 지형 속에서 이 글은 한편으로는 지표이론이 지나치게 ‘자의적으로’ 해 석해 왔던 고전이론들, 특히 바쟁과 바르트의 사진론을 지표 개념과의 관계 속에 서 다시 고찰했다. 그에 따르면 그들의 사진론은 지표이론의 관점으로 축소될 수 없으며, 오히려 포스트 포토그래피의 특성을 설명할 수 있는 풍부한 전거들로 충 만하다. 또한 프랑스 지표주의자들에게 논의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던 로잘린드 크라우스의 지표이론은 사진의 ‘존재론’과 무관하며, 단지 현대미술의 성격이 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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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지표로 이행하고 있음을 주장하는 개념적 도구임을 지적했다.

한편 수정이론의 관점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아날로그와 디지털 사진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관점으로 여기에서 지표이론은 여전히 부분적으로 유효하다. 둘째, 디지털 사진은 아날로그 사진과 생성 원리 자체가 다 르다는 입장으로, 그에 따르면 지표 패러다임은 시대착오적이다. 원칙적으로 아날 로그는 유사(연속성), 디지털은 차이(불연속성)를 이미지 생산의 원리로 삼고 있 다. 아날로그 사진이 실재의 흔적인 데 비해 디지털 사진이 실재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관점은 이 원리에 의지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유사도 차이도 동일 성을 갖지 못한다. 그것이 모든 사진 이미지(아날로그, 디지털)의 속성이다. 요약 하자면 디지털 시대의 이른바 ‘포스트 포토그래피’는 근본적으로 아날로그 사진과 다르지 않다. 비록 생성원리에 차이가 있다 할지라도 양자 모두 부분적으로는 지 표성을 지니는 이미지의 범주에 속하기 때문이다. 사진의 수정, 조작 가능성을 무 한히 열어놓은 디지털 시대의 기술적 상황이 새롭기는 하지만 그 또한 아날로그 시대의 그것과 비교할 때 본질적 차이라고 할 수는 없다. 본문에서도 지적했듯이 아날로그 사진에도 수작업을 통한 수정은 있었기 때문이다.

지표이론은 ‘전통적인’ 사진의 특수성을 규정하고자 하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사진은 생성의 관점에서 지표성을 지님에도 불구하고 지표기호와 동일시될 수 없으며 이미지의 고유한 속성 또한 함께 갖고 있다. 포스트 포토그 래피의 시물라크룸이 아날로그 사진에도 있었던 이유는 그 때문이다. 따라서 디 지털 테크놀로지가 열어놓은 허구성이 사진 이미지의 세계에서 ‘본질적으로’ 새롭 다고 할 수 없다. 그 변화를 낯설게 받아들이는 이유는 오히려 사진의 ‘존재론’에 대한 집착이 만들어 놓았던 편향성 탓이다. 따라서 우리는 바쟁의 통찰력 있는 사고를 차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사진의 발명으로 회화가 리얼리즘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났다면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도입으로 사진은 지표성(증명과 기록)에 대한 강박으로부터 해방됐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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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문투고일: 2017년 4월 12일 / 심사기간: 2017년 4월 16일-5월 15일 / 최종게재확정일:

2017년 5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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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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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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