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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려 ‘쌍화’와 ‘삼사(samsa)’의 관련성 연구

55)

고 혜 선*

❙국문초록❙

‘쌍화점’은 외래적 요소가 가장 확실히 드러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외래요소의 하나인 ‘회회아비’는 무 슬림 위구르족이었을 것이라는 것에 학계의 중지가 모여졌으나, ‘쌍화’에 대해서는 음식명으로 간주하는 해석 외에도 다양한 이론이 존재한다. ‘쌍화점’의 주인이 ‘회회아비’라면, ‘쌍화’는 ‘회회아비’가 속했던 위구르족이 즐 겨 먹던 음식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조선 초의 󰡔훈몽자회󰡕가 ‘만두’를 ‘상화 만’ ‘상화 두’로 풀었다면, ‘쌍 화’는 ‘만두’와 유사한 음식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건국초기부터 ‘대식’ 상인들과 교역하기 시작한 고려는 원 간섭기에 이르러 서역과의 접촉이 증대된다. 이로 인해 서역의 음식문화는 고려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얇은 밀가루 피에 소를 넣어 조리하는 음식으로는 manti 외에 samsa를 들 수 있다. 페르시아가 기원인 samsa는 일종의 군만두로 세모꼴이 특징이다. 󰡔高麗史󰡕

의 팔관회 기록에 등장하는 ‘쌍하’(雙下)는 식사의 마지막 부분에 왕에게만 바치는 귀한 음식이었다. 그러나 점 차 고려 정착 서역인이 증가하면서 ‘쌍하’ 혹은 ‘쌍화’ 전문점이 생기고, 이 음식이 고려인에게도 익숙해졌을 것 이다. 다만, 밀가루가 귀했고, 끓이거나 찌는 것에 익숙한 한국인의 식습관으로 인해, 기름에 튀기거나 구워야 하는 samsa 혹은 ‘쌍하’는 만두에 자리를 내어주었을 것이다. ‘개성편수’ 혹은 ‘변씨만두‘라 불리던 개성 지방의 만두가 세모꼴이라는 것은 어떤 형태로나 samsa의 영향이 감지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본 논문은 서역 제 민족의 전통 음식인 samsa와 ‘쌍화’의 관련성을 역사적 자료와 음성학적 시각에서 조명 하고 있다.

[주제어] samsa, 쌍하, 쌍화, 상화, 쌍화점, 회회, 위구르, 투르크, 만두. 고려

❙목 차❙

Ⅰ. 서 론

Ⅱ. 고려와 서역인들의 교류

Ⅲ. 서역인들의 만두:manti와 samsa

Ⅳ. 雙下와 만두

Ⅴ. 결 론

* 단국대학교 교수 / kohyesun@dankook.ac.kr

(2)

Ⅰ. 서 론

쌍화점

은 노래의 제목에 등장하는

쌍화

가 한반도에 없던 외래명이라는 점

, 1

2

행의

회회아비

회회

라 불리던 외래인을 직접적으로 지칭하고 있다는 점으로 인해 고려 속요 중에서 외래적 요소가 두드러진 작 품의 하나로 간주된다

.

쌍화점

의 회회인이 누구를 가리키는가에 대해서는 회교도라는 설

,

투르크계 서역인이라는 설 등이 있다

.

그런데

回回

는 복합적인 의미를 지닌 단어로 그 지칭 대상이 부단히 변화되어 왔다

.

,

회회는 西域 일원에 서 활동하던 회홀

(

회골

)

의 轉聲語인데

,

元 초기까지 고유한 족칭으로 사용되다가 원의 판도가 서역까지 확장 됨에 따라 점차 종교

(

이슬람교

)

적 의미가 가미되어 때로는 무슬림의 지칭으로

,

때로는 회홀의 족칭으로 혼용 되었다는 것이다

.

1) 한편 이등룡2)은 회회인들이 구체적으로는 돌궐계 위구르

(Uyghur)

인들을 지칭한다고 보 았고

,

김정위3) 역시 위구르와 연관된 개념으로 파악했다

.

즉 위구르인들 상당수가 회교를 믿었으며

, ‘

회회

가 몽고의 지배 지역에 파견된 위구르인들을 통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으므로

, ‘

쌍화점

에 등장하는

회회아비

는 위구르인이라고 본 것이다

.

회회인에 대해 김명준은 고려와 이슬람과의 교역은 고려전기부터 대규모로 이루 어졌으며

,

충렬왕 시대를 전후해서 회회인의 국내 유입이 있었고 이들이 고려에서 상업 활동을 펼쳤으며

,

충 렬왕

5

년의 신궁 준공 잔치에 회회인이 주최가 된 점에서 이들의 영향력이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고 보 았다

.

4)

한편

회회아비

가 주인이었던

쌍화점

에서 팔던

쌍화

가 무엇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

김명준은 현재까지의 고려 속요에 대한 연구를 집대성한 󰡔고려 속요 집성󰡕에서

쌍화점

을 꽃 파는 가게

(

김태 준

), (

만두와 다른

)

상화 파는 가게

(

이병기

),

만두 파는 가게

(

양주동

,

박병채

,

김형규

),

연희 도구를 파는 곳

(

최철

)

으로 정리하고 있다

.

5)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서는

쌍화

라는 단어 자체를 회회인의 직업과 연결 짓거나 위구르어에서 그 뜻을 찾으려는 시도가 등장하고 있다

.

어강석은

쌍화

를 회회인의 직업과 관련해서 설명했 다

.

즉 고려시대 이래로 이들의 주업이 楊水尺이었으며

雙花

가 우리 말

의 훈차이고

,

이것은

고리

,

버드나무로 만든 기물을 뜻한다면서

,

역시 借字인

/

로 추정한다

.

따라서

쌍화

버들고리

’,

쌍화점

은 버들고리로 만든 기물을 파는 가게로 풀었다

.

6) 이 연구가

雙花

를 순수 한국어를 한자로 적는 借 字 과정의 생성물로 보는 반면

,

이개석은 위구르어 단어에서

쌍화

와 유사한 발음이 나는 단어를 찾았다

.

위 구르어로

상가

(sang-gha)’

이므로

솽화

’, ‘

보석

을 의미하고

, ‘

쌍화점

은 보석 혹은 귀금속을 파는 가게라고 추정했다

.

7)

1) 정수일, 「회회고(回回考)」, 󰡔문명교류사연구󰡕, 사계절, 2002, 471~472쪽. 2) 이등룡, 「고려가요 어석연구」, 󰡔인문과학󰡕 32, 2002, 33쪽.

3) 김정위, 「고려말 회골인의 귀화와 이슬람의 한반도 등장」, 󰡔백산학보󰡕 91, 2011, 178쪽.

4) 김명준, 「<쌍화점> 형성에 관여한 외래요소」, 󰡔동서비교문학저널󰡕 14, 한국동서문학비교학회, 2006, 23~24쪽. 5) 김명준, 󰡔고려 속요 집성󰡕(개정판), 2008, 171~178쪽.

6) 어강석, 「구조적 상관성으로 본 쌍화점」, 󰡔고전문학연구󰡕, 38, 2010, 267~268쪽. 7) 이개석, 󰡔고려 – 대원관계 연구󰡕, 지식산업사, 2013, 339쪽.

(3)

그런데

쌍화

를 음식이 아닌 꽃

,

연희도구

,

버들고리

,

돌로 간주한 이들 연구는 조선 초의 󰡔訓蒙字會󰡕에서 饅頭를

상화 饅

’ ‘

상화 頭

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

, 16

세기에

상화

가 만두의 의미를 설명 하기 위해 등장했다면

, ‘

상화

혹은

쌍화

는 고려시대부터 만두를 지칭하는 어휘로 이미 고착되었다는 의미이 다

.

그렇다면

쌍화

는 당시에

만두

와 유사한 음식으로 간주되었음을 의미한다

.

회회

가 서역인이라면

, ‘

쌍화

는 중앙아시아 지역의 음식에서 어원을 찾아야할 것이다

.

위구르를 위시한 서 역인들이 고려 조정뿐만 아니라 일반 평민으로 살아갔다는 사실로 미루어 본다면

회회아비

가 팔던

쌍화

는 이들의 전통음식과 밀접한 관계를 갖기 때문이다

.

본 논문은 회회 혹은 서역인이 언제부터 고려와 교류했는 가를 살펴보고

,

이들의 음식 중에서 만두류에 속하는 음식이 무엇이 있으며

,

특히

쌍화

와 같은 음가를 지닌 음식이 무엇인가를 찾아볼 것이다

.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이 음식명이

쌍화

라는 借用語로 수용되는 현상을 음성학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

Ⅱ. 고려와 서역인들의 교류

중국인들은 중국 서쪽을

西域

으로 지칭하였다

.

8) 漢代에 서역은 현재의 新疆省 타림분지에 해당하였다

.

唐 시기에는 서역의 범위가 확장되어 인도 뿐 아니라 페르시아

[

波斯

]

와 아라비아

[

大食

]

까지 포함되었다

.

9)

그런데 한반도는 일찍부터 서역과 교류하고 있었다

.

고려의 경우를 보면 大食國이 서역에 있다고 하면서

대식국

상인들이 고려에 내방한 사실을 󰡔高麗史󰡕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① 현종 15년 9월(1024), 이 달에 대식국의 悅羅慈 등 100인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대식국은 서역에 있다.>10)

② 현종 16년 9월(1025) 신사일에 대식만의 夏詵, 羅慈 등 100인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11)

③ 靖宗 6년 11월(1040) 병인일에 대식국의 객상 保那盍 등이 와서 水銀, 龍齒, 占城香, 沒藥, 大蘇 木 등의 물품을 바쳤다. 해당 관아에 명하여 관에서 후히 대접하고 돌아갈 때 金帛을 하사했 다.12)

위의 자료에 언급된 대식국은 압바시아 朝

(Abbasid Caliphate)

를 지칭하고

,

따라서 대식상인은 아랍인이 었음을 의미한다

.

자료 ①

~

③의 상인 열라자

=Al Raza,

하산

=Hassan,

보나합

=Barakah

등은 아랍어의 음역 이었을 것이다

.

13) 그러나 이들 大食商人 혹은 大食商人團이 모두 아랍인이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

14) 아랍 8) 󰡔前漢書󰡕 권96, 열전66, 西域傳, “此城郭國界 中國之西 故曰西域”

9) 󰡔舊唐書󰡕 西域傳에는 高昌, 龜玆, 天竺, 吐火羅, 波斯, 大食 등을 열거하고 있다. 10) 󰡔高麗史󰡕 권5, 顯宗 15년 9월, “是月 大食國悅羅慈等一百人來 獻方物<大食國在西域>”

11) 󰡔高麗史󰡕 권5, 顯宗 16년 9월, “大食蠻夏詵羅慈等 百人來 獻方物”

12) 󰡔高麗史󰡕 권6, 靖宗 6년 11월, “大食國客商保那盍等來 獻水銀龍齒占城香沒藥大蘇木等物 命有司 館待優厚 及還 厚賜金帛”

(4)

인이 건국한 압바시아 조는 페르시아만 전 권역과 아라비아 반도

,

아프리카 북부까지를 세력권 안에 두고 있 었으며

,

이로 인해 아랍계 외에도 페르시아계

,

투르크계와 같은 다인종으로 형성된 이슬람사회였다

.

특히 투 르크계는 압바시아 조가 쇠락하면서 각 지역의 지배층으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

일례로

10

세기 말에는 페르 시아만 연안의 남부

,

호라산

,

인도 북부를 지배하는 가즈나 왕조

(Gaznavid Dynasty, 975~1187)

를 세울 정 도로 강성했다

.

따라서 페르시아계

,

아랍계

,

투르크계로 구성된 압바시아 조의 구성원 모두는 西域人을 총체 적으로 지칭하던

大食人

으로 고려 역사에 기록된 것이다

.

한편 고려와 서역인들의 교류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민족은 高車

,

韋紇

,

回紇

,

回鶻

,

畏吾兒 등의 명칭 으로 불렸던 투르크계 위구르인들이었다

.

이들은 중앙아시아 북부를 터전으로 삼았는데

,

국력이 최고조에 달 했던 때는 위구르 카간국 시대

(Uyghur Khaganate, 744~840)

로 그 판도는 실크로드의 중심축인 중앙아시 아 중남부와 키르기즈스탄

,

몽골

,

거란 지역까지도 세력권에 둘 정도였다

.

이들은 이민족의 종교

,

문화를 적 극적으로 수용했다

.

일례로

8

세기에는 페르시아의 마니교를 받아들였으며

,

이후에는 점차로 이슬람화 했다

.

카간국 시대 이후

,

위구르족은

13

세기 초까지 카라카니드 왕국

(Kara-Khanid, 840~1212)

의 중심 세력으로 활약했다

.

전통적으로 유목생활을 해오던 이들은 실크로드 주역의 하나였는데

,

어강석은 이들이

신라시대부 터 밀접하게 왕래하여 양국 간의 무역과 문화적인 교류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

고 하였다

.

15)이들은 몽골의 협력자로 정복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

이로 인해 원 제국 지배 계급의 주요 구성원으로서 원의 지배 를 받던 각 지역에 관리로 파견되었다

.

투르크계인 회회인들과 고려의 교류는 원 간섭기에 더욱 심화되었다

.

󰡔高麗史󰡕 열전에는 回回 출신 張舜龍에 대한 기록이 있다

.

장순룡은

본래 회회 사람으로 처음 이름은 셍게

[

三哥

]

였다

.

부친 張卿은 원나라의 세조를 섬겨 비칙치

[

必闍赤

]

가 되었다

.

장순룡은 제국공주의 케링코우

[

怯怜 口

]

신분으로 고려에 왔다가 낭장으로 임명된 후 거듭 승진해 장군이 되었으며

,

그 때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 었다

.”

고 한다

.

16) 충혜왕 복위 후

5

8

월의 기록에서는

회회 사람들에게 베를 주고 그에 대한 이자를 챙겼 으며 소를 도축해 그 고기를 날마다

15

근씩 바치게 했다

.”

17)고 한다

.

이것은 회회인들이 상층부뿐만 아니라 평민으로 조정에 세금을 내며 살아갔으며

,

回回

라 지칭한 것으로 보아 이들의 숫자가 적지 않았음을 암시 한다

.

이처럼 고려 초부터 이미 서역인이 내방한 기록이 있다는 사실은 고려사회가 중앙아시아지역 문화와 접할 기회가 충분했다는 것을 입증한다

.

특히

대식인

들이 대규모 상인단을 구성해서 宋에

5·6

월에 와서

11·12

월에 출항했으며

,

그 사이에 고려를 방문했고

,

당시 이들이 고려에 머문 기간이 최소 한 달 이상이었을 것이

13) 김철웅, 「고려와 대식의 교역과 교류」, 󰡔문화사학󰡕 25, 2006, 134쪽.

14) 大食은 북아라비아 부족인 Tayyi를 페르시아가 Taji·Tajik으로 불렀던 것을 중국인이 음역한 데서 유래하였다. 이에 대해 서는 최상수, 󰡔한국과 아라비아의 관계󰡕, 어문각, 1971, 34쪽 및 김정위, 「중세 중동문헌에 비친 한국상」, 󰡔한국사연구󰡕

16, 1997, 47쪽. 한편 고려시기에 대식국은 압바시아 朝(750~1258)로서 수도는 바그다드, 그 영역은 현재의 이란, 이라크, 아라비아반도, 아프리카 북부 등에 달하였다.

15) 어강석, 앞 논문, 255쪽.

16) 󰡔高麗史󰡕 권123, 열전36 폐행1, “張舜龍 本回回人 初名三哥 父卿事元世祖 爲必闍赤 舜龍以齊國公主怯怜口來 授郞將 累遷將 軍 改今姓名”

17) 󰡔高麗史󰡕 권36, 충혜왕 복위 후 5년 8월, “給布回回家 取其利 令椎牛進肉 日十五斤”

(5)

라면

,

이 기간에 자신들의 음식을 조리했을 가능성이 많다

.

그렇다면 고려인들은 고려 초부터 이들의 음식문 화를 이미 접했을 가능성이 충분하며

,

이러한 문화적 접촉은 고려에 정착하는 이들이 증가하면서 더욱 가속 화했을 것이다

. ‘

쌍화점

’ 1

연은 외국인이었던

회회아비

가 파는

쌍화

를 사러간 고려 여인네를 화자로 한다

.

회회아비

가 주인으로 이 가게를 운영했다는 것은 그 수요층이 회회인뿐만 아니라 고려인도 포함되었기에 가 능했을 것이다

. ‘

서역

음식 중에서 만두와 유사한 음식을 보자

.

Ⅲ. ‘서역’인들의 만두:‘만티(manti, mantou)’와 ‘삼사(samsa)’

서역인

이 즐겼던 만두과 음식

,

특히 실크로드 대상들이 여행할 때나 혹은 몽고와의 정복 전쟁 참여시에 병사들이 간편히 조리했던 음식으로는

manti

samsa

가 있다

.

1. ‘만티(manti)’

manti

에 대한 최초 언급은

13

세기의 중앙아시아와 유럽 접경지역인 아르메니아 민담에서 찾을 수 있다

. manti

충실한 아내

’(Faithful Wife)

의 주인공이 남편을 위해 만들었던 서부 아르메니아의 음식의 하나로 알려졌다

.

18) 이들의

manti

는 양고기 혹은 소고기를 간 것을 밀가루 피에 싸서 끓이거나 찌는 형태였다

.

그 러나 몽골과 협력관계에 있던 투르크계에는 그보다 먼저

manti

가 전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

원이

13

세기 중엽에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흑해 연안국까지 세력권에 두면서 중국의 만두를 이 지역에 전해주었기 때문 이다

.

이에 대해

Holly Chase

는 투르크계 민족과 몽골의 기마병들이 냉동시키거나 말린 만두를 지니고 다니 다가 모닥불에서 쉽게 끓여먹었다고 한다

.

19) 그밖에도 투르크계인 터키

,

키르기즈스탄

,

투르크메니스탄

,

우 즈베키스탄

,

카자흐스탄과 인근 아제르바이잔

,

아프가니스탄에도 전해졌다

. manti

는 현재까지 투르크계 민족 모두가 즐기는 음식이다

.

2. ‘삼사(samsa)’

samsa, sanbusa, sambusek, samosa

등으로 불리는 군만두 혹은 튀김만두의 어원은

아름다운 삼각형

의 의미를 가진 페르시아어

sanbosag

이다

.

그러나 인도 동부에서는

samosa

shingara

로 부른다는 사실에

18) Derderian, Ani, “Characteristics of Armenian Folk Tales”, International Journal of Business and Social Science, Vol.2 No. 24(Special issue), 2011, p.80.

19) Case, Holly, “The Meyhane or McDonalds? Changes in eating habits and the evolution of fast food in Istanbul”.

In Sami Zubaida & Richard Tapper. A Taste of Thyme: Culinary Cultures of the Middle East (2nd ed.). London

& New York: Tauris Parke Paperbacks, 2010, p.81.

(6)

근거해 인도를 기원으로 보는 주장도 있다

.

20) 이 음식의 이동 경로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었든 실크로드를 따라서 이동하던 대상들이 밤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쉽게 조리할 수 있었던 세모꼴의 군만두 혹은 튀김만두가 이들의 여정에서 훌륭한 먹거리가 되었으며

,

인근 국가로 퍼져나간 것은 확실하다

.

21)

sanbosag

은 각 지역에 서 다음과 같이 변형된다

.

(1) 아랍어권

압바시아 조의 알 무스타키 칼리프

(al-Mustakfi bi-llah,

재위:

944~946)

의 연회에 초대받아

sanbūsaj

라 는 음식을 맛본 사람들의 하나는 이샥 이븐 이브라힘 알 마우슬리

(Ishaq ibn Ibrahim al-Mausli, 742~804)

가 쓴

sanbūsaj

예찬 시를 낭송했다

.

그 시는 다음과 같다

.

그대가 어느 음식이 가장 큰 기쁨을 주는지 말하려 한다면, 나한테는 그 어느 것도 저 정도로 오묘하지 않다고 하겠네. 먼저, 최고급 고기를 준비하게나. 부드러운 붉은 색 고기로,22) 기름기가 지나치지 않다면 기름기 있는 그대로 다지게나. 거기에 깔끔히 둥근 모양으로 썬 양파를 넣게나. 아주 신선한 초록빛의 양배추를 넣고

계피, 루 향초23)로 양념을 하고 고수도 한줌 넣게나.

그리고 아주 소량의 정향 향초,24) 잘 다진 생강, 후추도 소량으로 넣게 커민, 무리25)도 약간 넣고,

팔미라 소금을 두 스푼 미리 준비 하시게.

좋은 요리사는 소금을 미리 잘게 갈아놓는 법이라네. 그 옆에 이제 불을 준비하게.

이 모두를 냄비에 넣고, 위에서부터 물을 붓게, 그리고 뚜껑을 닫게나. 불기가 물을 말려서

물기가 없는 게 눈으로 확인이 되면, 그걸 패스트리로 둥글게 싸서

20) http://ariseasia.blogspot.kr/2010/05/tantrik-origin-of-samosa.html(2013. 11. 20). shingara라는 세모꼴 모양의 ‘마름’ (water chestnut) 열매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21) http://www.samosa-connection.com/origin.html(2013. 11. 15).

22) 압바시아 조가 이슬람사회였으므로, 여기서 말하는 ‘붉은 색 고기’는 소고기이다. 23) 원어는 rue. 일종의 향초.

24) 원어는 clove. 일종의 향초. 25) 원어는 murri. 아랍 향신료.

(7)

가장자리를 꼭 꼭 소리 나게 눌러 놓게. 밀가루 반죽을 준비해서

부드럽게 반죽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게. 그 반죽을 밀대로 밀고

가장자리를 손톱으로 끊어내게. 프라이팬에 질 좋은 기름을 붓고 이것을 아주 잘 구워내게나.

마지막으로 국자로 꺼내서 얇은 그릇에 담게. 그릇에는 입맛을 돋우는 겨자도 함께 놓게나. 이 음식을 겨자에 찍어서 즐겁게 드시게. 이것이 저녁 정찬에 먹는 가장 맛난 음식이라네.

If thou woulds’t what food gives most delight, Best let me tell, for none hath subtler sight.

Take first the finest meat, red, soft to touch, And mince it with the fat, not overmuch;

Then add an onion, cut in circles clean, A cabbage, very fresh, exceeding green, And season well with cinnamon and rue;

Of coriander add a handful, too, And after that of cloves the very least, Of finest ginger, and of pepper best, A hand of cummin, murri just to taste, Two handfuls of Palmyra salt; but haste,

Good master haste to grind them small and strong.

Then lay and light a blazing fire along;

Put all in the pot, and water pour Upon it from above, and cover o’er.

But, when the water vanished is from sight And when the burning flames have dried it quite, Then, as thou wilt, in pastry wrap it round, And fasten well the edges, firm and sound;

Or, if it please thee better, take some dough, Conveniently soft, and rubbed just so, Then with the rolling pin let it be spread And with the nails its edges docketed.

(8)

Pour in the frying-pan the choicest oil And in that liquor let it finely broil.

Last, ladle out into a thin tureen

Where appetizing mustard smeared hath been, And eat with pleasure, mustarded about, This tastiest food for burried diner-out.26)

30

행에 달하는 이 시는

sanbūsaj

라 불리던

sanbosag

만드는 방법을 상세히 적고 있다

. sanbūsaj

의 소는 소고기

,

양파

,

양배추

,

고수

,

생강

,

후추

,

각종 향초와 향신료

,

소금을 섞어 다진 다음 끓는 물에 익혀 만든다

.

그리고 이 소를 밀가루로 만든 얇은 피로 감싸서 기름을 두른 팬에 넣어 익힌다

.

조리법으로 보면

sanbūsaj

는 현재 우리가 먹는 군만두라 할 수 있다

.

시인은 이 음식을 저녁 정찬의 백미로 꼽으며 극찬하고 있다

.

알 바그다디

(al-Baghdadi)

라 불리던 무아마드 빈 알 하산 빈 무하마드 빈 알 카림

(Muḥammad bin al-Ḥasan bin Muḥammad bin al-Karīm, ?~1239)

10

세기에서

12

세기까지의 중앙아시아 지역 요리를

Kitab al-Ṭabīḫ (The Book of Dishes)

라는 이름으로 펴냈다

.

각 음식을 종류별로 나눈 이 책의

5

장에서는 차가운 음식의 한 종류로

sanbūsaj

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

27)

페르시아 역사가 아볼파즐 베이하키

(Abolfazl Beyhaqi 995~1077)

Tarikh-e Mas’oudi (

마소디아 역사 서

)

에서

sanbūsaj

를 언급했다

.

28) 또한 지암보니노 다 크레모나

(Giambonino da Cremona)

13

세기 후반 에 펴낸 요리서

Il cuoco piemontese perfezionato a Parigi

에서는

11

세기 이븐 부틀란

(Ibn Butlan)

의 아 랍 요리서에서

sambūsaj

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음식을 인용하면서

일종의 라비올리로 삼부사가 있으며

,

이 것은 간 고기를 소로 넣은 삼각형 만두

29)라고 설명한다

.

sanbūsaj

는 아랍이 지배했던 이베리아 반도의 안달루시아 요리책에서는

sanbusak

이라는 이름으로 등장 한다

. 13

세기에 출판된 요리책에서는

sanbusak

을 만드는 방법을 첫째

,

잘게 부순 마늘과 양념으로 소를 채 운 것으로 세모꼴로 접어 기름에 튀긴다

.

둘째

,

다진 고기

,

달걀

,

기타 양념으로 소를 채워서 튀기며 모양은 다양하다

.

셋째로는 어느 것으로 소를 만들어도 관계없으나 물에 넣어 삶는 방법이 그것이다

.

모로코 지방에 서는 고기와 견과류를 소로 넣은 모든 것을

sambousik

으로 부른다는 설명도 곁들여 있다

.

30)

현재 아랍어 사용 국가에서는 이 음식명이

sanbūsak,

아프리카에서는

sambusa,

이스라엘에서는

sambusak,

이베리아 반도에 거주하던 유대계 세파르디

(Sephardi)

에게는

sanbusak

이다

.

26) Roden, Claudia, A book of Middle Eastern Food, Penguin books, 1968, 102쪽. Mas’udi의 Meadows of Gold에서 재인용, 역자 A.J.Arberry의 Islamic Culture, 1939 수록본.

27) Al-Hasan, Muhammed bin(1226). 역서명 A Baghdad Cookery Book, Petits Propos Culinaires, 역자 Charles Perry, Prospect Books, 2006, p.77.

28) http://en.wikipedia.org/wiki/Samosa(2013. 9.20).

29) Zanini De Vita, Oretta (1936). Encyclopedia of Pasta, translated by Maureen B. Fant,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9, p.27.

30) http://italophiles.com/andalusian_cookbook.pdf(2013. 10.1). Charles Perry 역, The Anonymous Andalusian Cookbook. p.173.

(9)

(2) 인도 대륙 및 동남아시아

델리 술탄시대

(Delhi Sultanate)

초기인 맘룩 조

(Mamluk Dynasty, 1206~1290)

의 계관시인이며 학자였 던 아미르 쿠스로

(Amir Khusro, 1253~1325)

sambūsaj

samosa

로 불렀다

.

그는 이 음식을 고기

,

버터

(

인도의

ghee

버터

),

양파 등으로 만든다면서

,

그가 즐겨 사용했던 수수께끼 형태의 짧은 시에서 이렇게 노 래했다

.

사모사를 왜 먹지 않나? 신발은 왜 닳지 않나? 후라이 되지 않은 사모사는 밑창 없는 신발.

Why wasn’t the samosa (a patty) eaten? Why wasn’t the shoe worn?

Wasn’t fried (the samosa); Didn’t have a sole (the shoe).31)

위의 시는 신발에 밑창이 없으면 신발을 신을 수 없는 것처럼

, samosa

도 프라이하지 않으면 먹을 수 없는 음식임을 말하고 있다

.

samosa

로 적은 아미르 쿠스로와 달리

,

그 보다 후대 사람인 이븐 바투타

(Ibn Batutta)

samusak

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

그는

1332

년 혹은

1334

년에 델리의 술탄을 알현하고 연회에서 먹었던 음식을 이렇게 기술 했다

.

첫째는 얇은 빵

,

둘째는 구은 고기

,

셋째는 버터를 섞어 만든 빵

,

그리고 버터와 파

,

생각을 섞은 구은 고기와 함께 제공되는

samusak,

마지막으로는 일종의 후식으로 튀김 음식과 청량음료였다

.

그가 맛본

samusak

는 짓찧은 고기에 감복숭아나 호두

,

아월혼씨

,

양파

,

기타 조미료 등을 섞은 요리로서 버터와 함께 구운 얇은 빵을 감싼 세모꼴 모양의 것이었다

.

32)

samusak

에 대한 영어 번역은 다음과 같다

.

a triangle of very thin fried bread filled with mashed meat cooked with almonds, walnuts, pistachios, onion and spices are served)33)

16

세기에 간행된 󰡔아크바리 법전󰡕

( Ain-i-Akbari )

에서는

samusak

sanbúsah

로 기록하고 있다

.

이 책은 당시 많이 조리되던 요리 중에서

quṭáb

을 설명하면서

,

힌두스탄에서는 이 음식을

sanbúsah

로 부른다고 적 었다

.

재료는 고기

,

밀가루

,

기 버터

,

양파

,

생강

,

소금

,

후추

,

기타 양념이며

,

조리 방법은

20

여 가지였다

.

34) 인도 대륙에서

samosa, samusak, sanbúsah

와 같은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던 이 음식은 결국

samosa, samusa(

벵갈만 지역

), shamuza(

미얀마르

)

로 굳어진다

. samosa

의 소는 간 고기에 기타 채소 혹은 견과류를

31) www.angelfire.com/sd/urdumedia/dosuk.html(2013. 12. 12).

32) 이븐 바투타, 󰡔이븐 바투타 여행기 2󰡕, 정수일 역, 창작과 비평사, 2001, 28쪽.

33) Leibenstein, Margaret, “Beyond Old Cookbooks: Four Travellers’ Account”, Food on the move - Proceedings of the Oxford Symposium on Food and Cookery 1996, Prospect Books, 1997, p.226.

34) Allami, Abul Fazl, Ain-i-Akbari, H. Blochmann, M.A., Colonel H. S. Jarrett 역, Vol.1, Asiatic Society of Bengal, Calcutta, 1873~1907, 60쪽.

(10)

이용했으나

,

감자가 등장하면서 감자를 소로 사용하기도 했다

.

35) 인도를 통해

samosa

를 접한 포르투갈인들 은

chamuça

로 부르며 소는 육류와 야채를 다져서 조리했다

.

또한 포르투갈 식민지였던 서부 아프리카

,

모 잠비크에도 이 음식을 전했다

.

이들의

samosa

는 모두 세모꼴이다

.

(3) 투르크계

투르크계 민족에게는

samsa

라는 이름이 보편적이며 그 모양은 삼각형 혹은 반달이다

.

우즈베키스탄과 터 키에서는

samsa

를 굽지만

,

유목 정서가 강한 카자흐스탄 등지에서는 기름에 튀기기도 한다

.

특이한 것은 투 르크메니스탄 같은 지역에서는 찌기도 한다는 것이다

. samsa

의 소는 다진 고기만을 쓰거나

,

고기와 호박

,

양 파

,

버섯과 같은 야채를 섞어 다지기도 한다

.

아프가니스탄에서는

sambosa

로 부르며 삼각형 혹은 반달 모양 으로 빚는다

.

중국의 신장 지역에 사는 위구르인들 역시

samsa

라 부르나 발음은

[samsá]

이며 한자로는 烤包 子

[kǎo bāozi]

이다

.

위구르의 삼사는 삼각형 외에 원형도 있으며

,

이 원형의 정 중앙에 장식을 하기도 한다

.

(4) 중국

흥미로운 것은 중국의

shaomai

이다

.

이것은 딤섬의 한 종류로 원대에서 조리되기 시작했으며 燒賣,乾 蒸、燒麥、烧梅、肖米、稍麥、鬼蓬頭 등의 이름으로 표기된다

.

음식 이름에 대한 표기가 다양하며

,

包子와 는 달리 음식명이 음식의 특징을 나타내지 못한다는 점에서 외국 혹은 이민족에서 전래된 음식일 가능성을 보여준다

.

특히

shaomai

가 중앙아시아의 투르크계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원 제국 시대에 등장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

투르크계의

samsa

와 관련되었을 수 있다

. shaomai

의 모양은 세모꼴이 아니나 중앙에 장식 을 한다는 점이 위구르인들의

samsa

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

이들 이름을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

<표 1>

지역명 이 름

아랍어권, 동 아프리카 sambūsak, sanbusak, sambusa(아프리카), sambūsaj

이란어권, 타지크스탄 sanbusé, samboosa

투르크계(터키,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즈

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위구르) samsa, somsa(우즈베키스탄),

아프가니스탄 sambosa

인도 대륙 samosa, samusak, sanbúsah, samusa, shingada, shing-ra(아셈),

smosa(펀잡), sumosa(구자라티), sambusak(파키스탄), samuza(네팔)

버마 shamuza

포르투갈 chamuça

35) 포르투갈이 인도의 고아 지방을 식민하면서 아메리카가 원산인 감자를 인도에 전래했다.

(11)

위의 표에서 굵은 글씨로 표기된 것은 이 지역에서 현재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이름이다

.

이들을 음 성학적 차원에서

sanbosag

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

① 대부분이 3음절을 유지하나 투르크계에서는 2음절로 줄었다.

② 마찰음 /s/ 혹은 /ʃ/는 첫 음절과 마지막 음절에서 음가를 유지한다.

③ 첫 음절의 비음이 존속한다.

④ sanbosag의 종성 자음은 아랍계와 아랍어권에서는 /k/로 바뀐다. 그러나 다른 언어에서는 탈락 한다. 이것은 음절이 일반적으로 열린 음절을 지향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으로 라틴어의

‘momentum’이 스페인어에서는 ‘momento’로 변하는 경우, 한국어에서 영어의 ‘McDonald’가

‘맥도날드’로 차용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⑤ 두 번째 음절의 /b/가 탈락된 경우는 양순음 /m/과 /b/과 겹치면서 /b/이 탈락한 것으로, 이에 따르는 모음 /o/도 함께 탈락한다.

⑥ 대부분의 언어에서 [n]>[m], 즉, 치경음의 양순음화가 발생된다. 이것은 두 번째 음절의 초성이 양순음 [b]로 역행동화한 경우다. 영어 in+possible=impossible이 되는 현상이 여기에 속하며, 스페인어에서도 un poco는 [umpoko]로 발음된다.

음식으로 본 특징은 다음과 같다

.

① 반드시 소가 있다. 이 소는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육류, 혹은 육류와 야채를 다져서 만드나 인도 에서는 호두 종류를 갈기도 하고, 감자를 사용하기도 한다. 또한 치즈를 이용하기도 한다.

② 굽거나 튀긴다. 단, 투르크계에서는 찌기도 한다.

③ 차와 함께 먹는 일종의 간식이기도 하나, 정찬의 마지막 코스로 등장하기도 하며, 후식으로 준비 할 때는 과일과 견과류, 치즈 등을 넣어 설탕에 조려서 차와 함께 제공하기도 한다.

④ 모양은 세모꼴이 가장 보편적이나, 투르크계에는 반달 혹은 원모양도 있다. 위구르인들은 원 형 태로 만들어 중앙에 장식을 하거나 깨를 뿌리기도 한다.

다음으로

manti

samsa

를 비교해 보자

.

<표 2>

발효성 소 모양 조리 방법 유포지역

manti 비발효 다진 고기

다진 고기+야채 반달 찐다. 투르크계

samsa 비발효

다진 고기 다진 고기+야채 간 견과류 감자

세모 (반달) (원형)

기름에 튀긴다. 오븐에 굽는다. 설탕에 조린다. (찐다)

투르크계, 아랍계, 인도계, 아프리카, 유럽

※ 괄호 안에 제시된 것은 특정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다.

(12)

Ⅳ. ‘雙下’와 ‘만두’

문헌을 중심으로 살펴볼 때

, ‘

쌍화

만두

가 한반도에 전래된 시기는 고려시대이다

. ‘

쌍화

라는 어휘가 원 래는

쌍하

’(

雙下

)

였다는 주장을 한 사람은 김상보이다

.

그는

고려에서는 나라에서 개최한 팔관회 때 왕에게 쌍하를 올리는 의례가 있었다

.

비록 쌍하가 어떻게 조리된 음식인지는 몰라도 국가 차원의 행사 때에 의례 중 일부분으로 進雙下가 있었음은 당시 쌍하가 식생활에 미친 영향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

라고 하였 다

.

36)

쌍하

는 중국 명대의 󰡔大明會典󰡕에도 등장한다

.

永樂帝 초의 郊祀에서는 상탁

,

상중탁

,

중탁 및 기타 하급관리 및 노비

,

악사들의 상에 올릴 음식 가지 수를 규정했다

.

그리고 상탁과 상중탁에는 각종 음식과 함 께 簇二大饅頭를

,

중탁에는 簇二饅頭를 차리도록 한 반면

,

金槍甲士

,

象奴

,

校尉에게는

雙下饅頭

만을 敎坊司 樂人에게는 몇 가지 음식

,

술과 더불어

雙下饅頭

를 차리도록 했다

.

,

국왕 및 고급관료들에게 제공하던 만 두와

,

하급관리 및 악사 등에게 제공하던 만두의 종류가 달랐던 것이다

.

그러나 동일한 해 동지절 상차림에 서는 상탁

,

중탁

,

장군의 상에서도 簇二饅頭 대신

雙下饅頭

를 차리도록 했다

.

37)그리고 영락제

13

년의 기록 에는

雙下大饅頭

雙下饅頭

가 등장한다

.

38)

쌍하대만두

쌍하만두

를 신분과 직제에 따라 상에 올렸다는 것은 영락제 초기의 상차림에서

簇二大饅頭

를 상탁과 상중탁에 올리던 반면

簇二饅頭

는 중탁에 올렸다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여기서

雙下

가 무엇을 지칭하는가에 대해서는 모양 혹은 재료 를 뜻한다는 등의 해석이 있다

.

󰡔고려사󰡕와 󰡔대명회전󰡕이 거의 동시대에 씌어졌고

,

예법을 언급하는 부분에 서

쌍하

쌍하만두

가 언급된다면

,

이 두 단어는 동일한 음식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

󰡔고려사󰡕의

쌍하

는 그것이

쌍화

의 전신이든 혹은

안주

이든 국왕께 바치던 음식명이었음에 틀림없으므로

,

󰡔大明會典󰡕의

쌍 하만두

에서

쌍하

가 단지 만두의 재료 혹은 모양을 뜻할 수는 없을 것이다

.

따라서

쌍하

로 불리던 만두과 음식을 놓고

,

고려에서는

쌍하

,

중국에서는

쌍하만두

로 불렀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

팔관회는 개경에서는 매해

11

월 중순

,

서경에서는

10

월 중순에 개최하던 국가적인 행사였다

.

󰡔高麗史󰡕 禮 志에는 팔관회에 대한 자세한 기술이 나온다

.

국왕이 「궁전에서 하례를 받는 의례

(

坐殿受賀

)

」에 의하면 근시 관이 술을 국왕에게 올리면서 주악이 시작되고

,

다 마시면 주악이 그친다

.

그 후 국왕이 태자 이하 시신들에 게 술을 돌리면 이들은 두 번 절하고 술을 받으며

,

이때 다시 주악이 울리고 술을 다 마시면 주악이 그친다

.

그 후에는 국왕에게 음식을 올리고

,

태자

,

시신들의 순으로 상을 차리며 이때에도 주악이 따른다

.

그 후에 다시 국왕이 술을 하사한다

.

그리고

그 다음

,

국왕에게 雙下를 올리고

,

이어 태자 이하 시신들의 음식이 차

36) 김상보, 󰡔조선시대의 음식문화󰡕, 가람기획, 2006, 204쪽. 반면 󰡔국역 고려사󰡕(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2008)에서는 “쌍하:

미상. 하(下)가 술을 마실 때 먹는 안주라는 뜻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안주를 두 차례 올리는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라는 주 석을 달고 있다.

37) 󰡔大明會典󰡕 권114, “永樂間、上卓…簇二大饅頭… 上中卓…簇二大饅頭… 中卓…簇二饅頭… 隨駕將軍、按酒。細粉湯。椒醋 肉並頭蹄。簇二饅頭… 金鎗甲士 象奴 校尉 雙下饅頭。教坊司樂人…雙下饅頭”

“冬至節 永樂間、上卓…雙下饅頭。中卓…雙下饅頭。將軍… 雙下饅頭。金鎗甲士象奴校尉、雙下饅頭。教坊司樂人…雙下饅頭” 38) 󰡔大明會典󰡕 권114, “永樂十三年、上卓、按酒燒煠四般寶粧茶食。果子五般。軟按酒五般。菜四色。湯三品。雙下大饅頭。羊肉

飯。酒五鍾。上中卓、按酒燒煠四般。寶粧。茶食。果子四般。軟按酒四般。菜四色。湯三品。雙下饅頭。羊肉飯。酒五鍾”

(13)

려질 때 주악이 시작되고 다 먹고 나면 주악이 그친다

.”

고 하였다

.

39)「대회일에 국왕이 임석하는 의례

(

大會 日坐殿

)

」에서는

국왕에게 올리는 음식이 雙下까지 이르고 나면 태자와 공

·

·

백은 집례관의 인도로 궁전 을 내려가 추밀 및 위 쪽 계단의 시신들과 함께 무도하는 자리로 간다

.”

40)고 하였다

.

국왕에게 마지막으로 올리는 음식이

쌍하

라는 것은 이븐 바투타가 묘사한 델리 궁전의 정찬과 흡사하다

.

그는 정찬의 마지막 부 분에 한 사람 당

4

개씩의

samusak

을 제공했다고 했다

.

고려 태조부터 시작된 팔관회는 성종

6

년에 중지되었고

,

현종 원년

(1010)

에 다시 열렸다

.

덕종

3

(1034)

에 는 규모가 상당히 커져서

,

(

)

의 상인

,

동번

,

서번 및 탐라국에서도 사신을 보냈다

.

사신들의 참여는 그 후 로 하나의 관례가 되었다

. ‘

쌍화

雙下

라면

,

적어도

11

세기 고려 초부터는 궁중의 큰 행사에서 왕에게 특별 히 바치는 후식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

또한 태자 혹은 신하들에게도 하사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상당 히 귀한 음식으로 대접받았음을 추정할 수 있다

.

󰡔高麗圖經󰡕에 의하면 고려는 밀의 생산이 풍부하지 않아 상인 들이 중국에서 사온다고 하였으니

,

41)만두피의 원료인 밀가루를 구할 수 없었기에

쌍화

만두

공히 성례 때 가 아니면 먹지 못하던 귀한 음식이었다

.

42) 그러나 원 간섭기에 회회인들의 숫자가 증가하면서

쌍화

를 전문 적으로 파는 가게가 등장했고

,

고려인들 가운데도

쌍화

라는 이국적 음식을 즐긴 사람이 등장했을 것이다

.

만두

에 대한 기록 역시 󰡔고려사󰡕에 등장한다

.

이미 고려 초에 기록된

쌍하

와 달리

만두

는 충혜왕 복위

4

(1343) 10

월의 기록에 등장하는데

, “

어떤 자가 궁궐 부엌에 들어가 饅頭를 가져가자 노한 왕이 도둑질을 한 것이라 여겨 그를 죽이게 했다

.”

고 한다

.

43) 이것은 만두가 궁중에서 먹던 음식이며 만두를 가져간 것을 사형으로 다스릴 정도로 귀한 음식으로 대접받았음을 뜻한다

.

만두의 기원에 대해 송

(

)

의 󰡔事物起原󰡕에서는 위진남북조 시대에 제갈량이 노한 강을 잠재우기 위해 사 람의 머리를 바치는 대신 사람머리 모양의 음식을 만들어 바친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

이때 제갈량이 밀가루 반죽 안에 넣은 것은 현재 우리가 먹는 만두의 소처럼 간 고기였다

.

이성우는 진나라 때의 󰡔餠賦󰡕에 서 饅頭와 起溲를 다른 음식으로 기술하는 것을 근거로 본디의 만두는 발효시킨 것이 아닌 것 같다고 판단했 다

.

그리고 宋代 羅大經의 󰡔鶴林玉露󰡕에서 부엌에 包子를 전문으로 만드는 공간이 있었다는 것을 근거로

만 두

가 송대에 이르러

포자

로 불리게 된 것으로 보았다

.

또한 元代의 󰡔居家必用󰡕에 나오는 만두 만드는 방법 이 밀가루를 발효시켜 부풀게 하고

,

소를 넣어서 쪄 냈기 때문에 원대에 이르러 起溲에 해당하는 발효병이 되었다고 보았다

.

44)

1527

년에 간행된 󰡔訓蒙字會󰡕

(

, 10)

1690

년의 󰡔譯語類解󰡕에서는 饅頭를

상화 만

’, ‘

상화 투

로 새겼기 때문에

상화

혹은

쌍화

만두

와 동일하게 보는 시각이 굳어지게 된다

.

45)반면 이등룡은 󰡔訓蒙字會󰡕에서

39) 󰡔高麗史󰡕 권69, 志23 禮11 「仲冬八關會儀」, “坐殿受賀…次進雙下 次設太子以下侍臣食樂作食訖樂止”

40) 󰡔高麗史󰡕 권69, 志23 禮11 「仲冬八關會儀」, “大會日坐殿…進御食 至雙下 後引太子公侯伯 下殿與樞密 上階侍臣 就舞位” 41) 󰡔高麗圖經󰡕 권22, 雜俗 1 鄕飮, “國中少麥 皆賈人 販自京東道來”

42) 이성우, 󰡔고려이전 한국식생활사연구󰡕, 향문사, 1978, 339쪽.

43) 󰡔高麗史󰡕 권36, 충혜왕 복위 4년 10월, “有人入內廚 取饅頭 王怒 以爲盜 卽命殺之” 44) 이성우, 앞의 책, 391쪽.

45) 상당수 국문학자들, 예를 들면 양주동, 박병채, 김광순, 최철, 박지민 등이 상화=만두로 보고 있다.

(14)

흔둔

만두 흔

’, ‘

만두 둔

으로 새기면서 이를 즉 변시라고 적었고

,

속칭

만두

라 불리던

만투

상화 만

’,

상화 투

로 새길 정도로 일찍이

饅頭

만투

를 분리했다는 것에 주목했다

.

이들을 동일하게 간주했다면

,

흔둔

’=’

만두

’=’

만투

’/‘

만두

’=’

상화

가 되어 결국

상화

’=’

만두

의 공식이 되므로 󰡔訓蒙字會󰡕의 설명이 당착에 빠 지게 되고 동시에

상화

’=’

변시

가 된다는 것이다

.

그리고 이들 어휘를 현대어로 바꾸면서 상화는

찐 빵

’, ‘

변 시

는 오늘날의 물만두가 되었다고 보았다

.

46) 주영하는 일본의 온돈

(

饂飩

)

은 중극 음식 훈툰

(

餛飩

)

에서 나 온 것으로

, ‘

훈툰

은 작은 만두를 국물에 넣은 일종의 만둣국이라고 보았다

.

이 논리대로라면 흔둔은 변시가 된다

.

47) 변시는

편수

’, ‘

변씨 만두

로 불리며

,

만두 피를 정사각형으로 만들어 만두소를 넣고 네 귀퉁이를 서 로 접어 삼각 형태를 만드는 것이 특징이다

.

쌍화

의 한자 표기는 󰡔高麗史󰡕의

雙下

’,

󰡔樂章歌詞󰡕의

雙花

,

󰡔東國歲時記󰡕의

霜花

’,

󰡔六典條例󰡕의

床 花

이며

,

한글로는

솽화

’, ‘

상화

’, ‘

쌍화

’,

󰡔名物紀略󰡕의

샹애

등이다

.

48)

쌍화

의 어원이 한자라면 한글 발음은 변할 수 있으나 한자 표기에서는 다양한 표기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

따라서

쌍화

는 한자가 아닌 다른 언어에서 온 차용어일 가능성이 많게 된다

.

또한

쌍화

의 전신으로 추정되는

쌍하

가 고려 초부터 시행된 팔 관회에 기록되었고

만두

가 고려 말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쌍하

만두

보다 먼저 전래되었을 가능성을 제시 한다

.

한편 󰡔訓蒙字會󰡕와 󰡔譯語類解󰡕에서

쌍화

만두

를 유사하게 간주했다면 적어도 두 음식은 유사성을 갖는다는 의미가 된다

.

이성우는 두 음식의 차이를 발효와 비발효에서 찾았다

.

, 16

세기 말 󰡔음식디미방󰡕

의 霜花는 소를 넣은 발효병이고

, 1835

년경의 󰡔林園十六志󰡕나

1760

년대 초에 간행된 󰡔星湖僿說󰡕의 만두는 소를 넣은 비발효병으로 중국의 수교자와 유사한 것으로 보았다

.

49)그러나 이것은

16

세기 말 이후의 문헌을 참고로 하기 때문에

쌍화

만두

가 원래 어떤 차이가 있던 음식인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

이개석은

쌍 화

만두

와 동일시하는 연구에 대해

전문적인 상업 집단을 꾸려 몽골세계의 무역을 담당하였던 회회상인 이 고려수도 개경에 개업한 가게에서 하필이면 만두와 같이 값싼 음식을 팔았을까

?”

50)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

그러나 전술한 바와 같이 외국에서 수입할 정도로 생산량이 부족하던 밀가루를 주원료로 하던

만두

혹은

쌍화

는 결코

값싼

음식으로 간주될 수는 없다

.

雙下

와 가장 유사한 음가를 지닌 만두류 음식명으로는 투르크계의

samsa

이다

.

그러나

samsa

가 기름에 튀기거나 굽는 음식이었으므로

,

끓이거나 찌는 조리법에 익숙한 고려인들에게는 차라리

만두

가 식성에 맞았 을 가능성이 많다

.

두 음식은 소를 미리 준비하고 밀가루 반죽을 펴낸 얇은 피에 그 소를 싸서 조리한다는 점에서 거의 동일한 음식으로 볼 수 있다

.

그러나 조리법으로 인해

쌍하

는 점차 사라지게 된 반면

, ‘

만두

는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에서 조리되는

편수

’,

일명

변씨만두

의 생김 새가 세모꼴을 기본으로 한다는 점은

samsa

의 기본 형태가 세모꼴이라는 점에서 두 음식간의 유사성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

다만

변씨만두

는 기름에 튀기는 대신 찐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

46) 고혜선, 「<쌍화점>의 외래요소 연구현황과 전망」, 󰡔아시아아메리카연구󰡕 12-2, 단국대학교, 2012, 8쪽. 47) 주영하, 󰡔차폰 잔폰 짬뽕󰡕, 사계절, 2009, 29쪽.

48) 이성우, 앞의 책, 390쪽. 49) 이성우, 앞의 책, 392쪽.

50) 이개석, 󰡔고려 – 대원관계 연구󰡕, 지식산업사, 2013, 338쪽.

(15)

Ⅴ. samsa와 차용어 ‘쌍하’

외래어 차용은 자신의 언어에 등가가 성립하지 않는 경우

,

외래어를 그대로 차용해서 자국의 언어 음운 체 계에 따라 수용하거나 자국의 언어를 기반으로 그 모습을 형용하는 새로운 단어를 만드는 수밖에 없다

.

일례 로 스페인은 라틴아메리카를 정복하면서

,

유럽에서는 볼 수 없었던 신대륙의 동

·

식물

,

음식명 등을 그대로 차용한다

.

재규어 호랑이

(jaguar),

토마토

(tomate),

카누

(canoa),

담배

(tabaco),

바베큐

(barbacoa),

감자

(patata),

고구마

(batata),

그물침대

(hamaca)

와 같은 이름이 스페인어로 유입되며

,

이들 어휘들은 후에 다른 나라에서도 거의 그대로 차용된다

.

반면

,

스페인의 만두는

manti

혹은

samsa

와 달리

empanada

로 불린다

.

,

음식의 모양을 중심으로 빵 사이에 무엇을 채운 음식이라는 의미의 새로운 어휘를 만든 것이다

.

한국어 역시 외래 동

·

식물과 음식명을 중국어

,

몽골어

,

일본어

,

기타 서양어에서 차용한 경우가 많다

.

특 히 고려시대는 광종시대에 실시하기 시작한 과거 제도의 영향으로 중국계 차용어가 급격히 증가되었고

,

원 제국과의 접촉으로 인해 몽고어의 차용어가 증가했다

.

일례로 관직명에서 몽고어의

[daruɤačin]

다루하치

(

達魯花赤

)’

,

무관의 옷인

[terlig]

텰릭

으로

,

매 종류인

[šongqor]

숑골매

>

송골매

,

(

)

을 뜻하는

[šülen]

슈라

>

수라

,

여진족과의 교류로 土萬

[tümən]

두만강

이 되었다

.

중세국어의 차용어 수용 과정은 중국어를 제외하고는 외래어를 각 음절에 해당하는 글자를 가장 유사한 발음의 한자로 표기한 것이 많으며

,

어떤 경우는 한국어와 외국어를 합성하기도 했다

.

󰡔太祖實錄󰡕 總序에는 고려말에 우왕의 명을 받은 태조 이성계가

1380

년에 전라도 운봉에서 왜적을 물리칠 때

,

우리 군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15·16

세였던 왜적의 적장

阿其拔都

이야기가 나온다

.

51)

阿其拔都

아기바톨

로도 읽으며

,

여 기서

아기

는 한국어

아기

이지만

, ‘

발도

는 몽골어의

勇士

, ‘

바톨

(ba’atur)

을 의미하는 말이다

.

52)

한글 사용이 보편화되면서부터는 서양의 동

·

식물과 음식명의 차용어는 원음의 음가를 그대로 존속시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

일례로

담배

는 아메리카의 카리브지역 원주민어인

tabaco, ‘

토마토

역시 카리브지역의

tomate

에서 차용되었으며

, ‘

재규어

호랑이는 파라과이의 과라니어

yaguar, ‘

비프스테이크

는 영어

beef steak,

개화기의

나지오

radio,

비누의 사투리인

사분

은 포르투갈어

‘sabão’, ‘

카스테라

는 스페인의 지명

‘Castilla’

에서 차용된 것이다

.

전술한 바와 같이 고려에 전해진 서역인의

雙下

에 가장 유사한 어휘는 투르크계의

samsa

이다

.

이들의

samsa

가 한자로 雙下가 되었으며

,

후에는 아름다운 모양을 그려내기 위해 雙花

,

(

)

에 오르는 꽃 같은 음 식이라는 의미의 床花

,

발효병으로 변모하면서 흰 색깔을 강조하기 위해 霜花로 표기했을 가능성이 있다

.

두 단어를 음성학적으로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

51) 󰡔太祖實錄󰡕 總序, “辛禑六年庚申八月…我軍稱阿其拔都 爭避之 太祖惜其勇銳 命豆蘭生擒之 豆蘭曰 若欲生擒 必傷人 阿其拔 都著甲胄 護項面甲 無隙可射 太祖曰 我射兜鍪頂子令脫 汝便射之 遂躍馬射之 正中頂子 兜鍪纓絶而側 其人急整之 太祖卽射 之 又中頂子 兜鍪遂落 豆蘭便射殺之”

52) 조남호, 「중세국어 어휘」, 󰡔국어의 시대별 변천·실태 연구 I󰡕, 국립국어연구원, 1996, 140쪽.

(16)

음절 동일 음소 조음위치가 다른 음소

samsa sam+sa /s/ /a/ /a/ /m/ /s/

쌍하 saŋ+ha /s/ /a/ /a/ /ŋ/ /h/

/m/

/ŋ/

은 비음으로 조음위치가 각각 양순음

,

구개음이며

,

마찰음인

/s/

/h/

의 조음위치도 각각 치 경음

,

성문음이다

.

비음은 동화에 가장 취약한 음이다

.

일례로 스페인어의 비음 음소는

/m/, /n/, /ɲ/

이나

,

역행동화현상으 로 인해

[m], [n], [ɱ], [ņ], [ŋ], [ɳ], [ɲ]

과 같이 다양하게 발음된다

. samsa

/m/

쌍하

에서

/ŋ/

으로 조 음위치가 바뀌었다면 이것은

[m]>[n]>[ŋ]

의 과정을 밟은 것으로 볼 수 있다

.

, samsa

/m/

이 치경음

/s/

에 의해 역행동화되어

/n/

으로 바뀌며

,

후에 연구개음과 조음위치가 유사한 성문음

/h/

에 의해

/ŋ/

으로 역 행동화된 것이다

.

/n/

이 구개음

/g/, /k/,

연구개음

/x/(

혹은 성문음

/h/)

에 의해

[ŋ]

으로 역행동화되는 경우를 보자

.

스페인어:inca [íŋka], inglés [iŋglés] San Juan [saŋxuán], San José [saŋxosé]

한국어:한국 [haŋguk], 한강 [haŋgaŋ]

비록 한국어에서는 연구개음에 의한 역행동화현상이 찾아지지 않는다 해도

,

조음 기관이 인접해있다는 것 을 염두에 둔다면

,

스페인어에서 발생하는 현상은 한국어에서도 발생할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

마찰음의 조음 위치 변환은

/s/

/h/

의 혼용현상에서 찾을 수 있다

.

국어 음성학에서 고찰되는 현상의 하 나로 그 대부분은

/h/

/s/

으로 바뀐다

.

이를

구개음화로 부르며

, ‘

이 이중모음인

와 이어질 때

으로 바뀌는 경우

,

혹은

와 이어질 때 바뀌는 현상을 가리킨다

.

일례로

, ‘

밥힘

>

밥심

’, ‘

희희덕거리다

>

시 시덕거리다

’, ‘

>

>

이 좋은 예다

.

남광우는 이 현상이 호남을 진원지로 해서 서서히 북상하는 경향으로 보았다

.

53) 도수희는

16

세기에

/s/, /h/

의 혼기 현상을 지적하면서

,

동일어에 대해 두 어형이 사용된 것으로 보았다

.

예로

15

세기의

,

은 본래는

,

이었으며

, 16

세기에 다시 등장하게 된 것은 원래의 형태로 돌아간 것으로 보았다

.

, 15

세기의

,

은 ㅎ구개음화 현상이 적용된 형태로 해석하고 있다

. 15

세기의

16

세기에는

로 나타나므로

,

둘 사이의 선후 질서를

>

로 상정할 수밖에 없다고 적었다

.

54) 이에 대해 이동석은 반대로

,

이 원래의 형태이고

,

은 과도 교정 표기일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

55) 반면 김동석은 고대 국어에

/h/

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고 이후 중앙어에서

/s/

/h/

로 바뀌 었다가

/s/

를 유지하고 있던 남부 방언의 영향으로 다시

/h/

/s/

로 바뀌었다고 보았다

.

56) 반면 박종국은

53) 남광우, 󰡔한국어의 발음연구󰡕, 일조각, 1997, 126쪽.

54) 도수희, 「‘ㅎ, ㅎㅎ’의 구개음화에 관한 몇 문제」, 󰡔언어󰡕 15, 1994, 충남대학교 어학연구소, 376~377쪽. 55) 이동석, 「ㅎ 구개음화 현상에 대한 연구」, 󰡔언어연구󰡕 17, 2010, 206~207쪽.

56) 이동석, 위의 논문, 205쪽.

(17)

中古 국어의 자음체계를 재구성하면서

/h/

음이 존재했다고 보았다

.

특이한 것은

의 존재를 인정했 다는 것이다

.

57)

중세 국어에서

/h/

/s/

가 혼용되는 현상이 존재했고 이미

15

세기 문헌에서 이러한 현상이 보인다면

, samsa

라는 외래어를 수용함에 있어 두 번째 음절의

/s/

/h/

로 수용되는 것은 외래어 수용 과정에서 충분 히 발생할 수 있는 현상이다

.

Ⅵ. 결 어

본 논문은 고려가요의

쌍화점

에 등장하는

쌍화

의 어원을 회회인들의 만두과 음식명에서 찾아보았다

.

쌍화점

1

연의

회회아비

라는 인물의 등장

,

그 인물의 가게에서 고려인에게는 생소한

쌍화

라는 물건을 팔았다는 사실에서 외래적 요소가 가장 확실히 드러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 ‘

회회아비

에 대해서는 그가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으로서 위구르족이었을 것이라는 의견이 가장 보편적이다

.

그러나 아직도

쌍화

에 대해 서는 그것이

만두

와 등가라는 의견

, ‘

연희 도구

’, ‘

’, ‘

보석

’, ‘

버들고리

라는 의견 등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 다

. ‘

쌍화

만두

라는 설은

16

세기의 󰡔訓蒙字會󰡕에서

만두

상화 만

,

상화 두

로 풀었기 때문이다

. ‘

연희 도구

쌍화점

이 연희의 하나라는 차원에서 제기되는 설이며

, ‘

쌍화

의 花에 방점을 찍은 경우이고

,

보석

은 위구르어의

sang-gha

라는 점에서

, ‘

버들고리

쌍화

가 순수 한국어를 借字하면서 생긴 용어 로 보았기 때문이다

.

그러나

16

세기의 󰡔訓蒙字會󰡕와 󰡔譯語類解󰡕에서 만두를 상화로 풀었다면

, ‘

쌍화

는 음식 이라는 차원에서 조명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

고려와 회회

,

즉 서역인으로 불리던 이들과의 교류는 일찍이 시작되었다

.

󰡔高麗史󰡕에서는 이들의 교류에 대해 大食國

,

즉 서역의 대상들이 한번에

100

명씩이나 국왕을 예방하고 공물을 바쳤다고 세 번에 걸쳐 기술 하고 있다

.

당시의 대식국은 압바시아 조를 가리키며

,

주요 구성원은 아랍계

,

페르시아계

,

투르크계이다

.

투 르크계는 압바시아 조가 쇠퇴기에 들어간

10

세기부터 각 지방의 맹주로 패권을 잡기 시작했다

.

그렇다면 고 려를 방문했던 서역인 가운데에는 아랍인뿐만 아니라 페르시아

,

투르크 출신들이 있을 것이라는 가정이 성립 된다

.

또한 원 간섭기에는 원의 관리로 고려에 파견되는 투르크계 위구르인들이 증가하며

,

일부는 관료로

,

일 부는 평민 신분으로 고려에 정착했다

.

이들의 문화

,

특히 음식문화는 어떤 형태로든 고려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 ‘

쌍화점

의 주인이

회회아비

였다면

, ‘

쌍화

는 만두류에 속하는 회회인의 고유 음식으로 보아야한다

.

소가 있는 이들의 만두류 음식으로는

manti

혹은

mantou

samsa

라는 군만두

(

혹은 튀김만두

)

를 꼽을 수 있다

. manti

는 몽골이

13

세기에 투르 크와 더불어 정복 전쟁을 하면서 전해준 음식으로 그 기원은 중국의 만두이다

.

그러나 현재 중국의 만두와 달리

,

이들이 전해준 것은 중국 만두가

포자

라는 단어로 분화하기 이전의 비발효 만두이다

.

현재 투르크계 57) 박종국, 󰡔한국어 발달사󰡕, 문지사, 1996, 153쪽.

참조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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