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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가 채상묵 (蔡相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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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가 채상묵 (蔡相默)

도전정신과 창작성

글 _ 이세기소설가ㆍ전 대한매일 논설위원

이세기의 예술인 탐구(25)

채상묵은 한마디로 완벽주의자다. 그의 춤은 언제나 새롭게 피어난다. 빈틈이 없는 만큼 실수도 없다. 하나 의 테마에 충실하게 파고들어 자신이 안무한 춤을 창작 품으로 완성해 낸다. 지금까지 보여준 춤 작업은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이며 그는 남보다 앞장선 안목으로 우리 춤을 연구해 온 학구파 무용가의 한 사람이다. 남을 의 식하여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의 싸움에서 결국 이기고야 만다는 전 과정을 설정해 놓고 있다. 채상묵은

전통춤을 추는 춤꾼이지만 1970년대 이후 새로운 춤 세 계에 대한 모색과정을 거쳐 우리 무용계에 활력과 생기 를 불어넣어 주었다.

그의 춤 무대는 정치된 짜임새로 장엄한 드라마를 엮 어낸다. 그리고 시와 음악과 정미(精美)가 혼재된 관조 적 메시지를 객석에 던진다. 그가 추는 새로운 승무는 감성과 이성의 시심이 흘러넘쳐 무대에서의 절대미를 창출하고, 득도에 이르기 위한 치열한 몸짓은 시대를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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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하는 예술가의 초상임을 보여준다. 무용극의 경우 장 막극이 범할 수 있는 지루감을 없애기 위해 발레극에서 보이는 디베르티스망과 오페라 갈라 같은 단일한 볼거 리를 모아 춤의 흥취와 멋을 한껏 이끌어내는 것이 특징 이다.

한국무용의 현대화에 도전해 온 학구파 무용가

1976년 조흥동, 국수호, 문일지, 이명자 등과 한국무용 만의 학림회(學林會)를 발족하고 세종문화회관에서 첫 번째 공연을 가졌을 때 그는 전통춤의 현대화를 시도한 창작무용〈맹안(盲眼)의 소녀〉를 선보이면서 무용계의 거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춤은 한국 전통춤을 추 는 사람으로서는 상상치도 못할 파격적인 무대였다.

의상부터가 그랬다. 한국무용은 전형적인 한복을 입 고 국악반주에 맞춰 정중동(靜中動)을 아름답게 추는 것 으로 되어 있었으나 그는 앞을 풀어헤친 볼레로식 조끼 에〈백조의 호수〉에 나오는 발레복 소매를 단 저고리를 입고 버선 대신 맨발로 춤추었다. 이런 자유로운 의상은 한복 속에 갇혀 상체에만 의존하던 한국춤에 박력 있는 힘찬 직선과 유연한 나선을 구사할 수 있게 했다. 어린 시절부터 한국춤을 추고 수많은 무용극에 참가해 온 그 는 곱고 조용하게 춤추는 한국춤이 획기적인 전환을 할 때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실험정신에 대해 당 시 무용계는“한국무용의 발전인가”“이단인가”라는 찬 반 양론과 함께 그에게는 빗발치는 비난과 그럴 수 있다 는 격려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이 작품은 인간이 일상적 으로 겪는 부대낌과 그 부대낌 속에서 끊임없이 가해지 는 위협과 압력에도 불구하고 끝내 자생하는 생명력을 그리고 있다.

그를 아끼던 무용계의 원로 김진걸은“미친놈”이란 극 언을 감추지 않았고 선배 무용가들도“채상묵이 왜 저런

춤을 추느냐?”고 통박해 마지않았다. 그러나 좌절할 것 인가, 도전할 것인가의 양 갈래 길에서 그는 더 이상 갈 곳 없는 정중동의 틀 속에 머물기보다 한국무용을 좀더 확대한다는 쪽에 서서 여전히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그 의 개혁적 시도는 결국 한국 창작무용의 기폭제로 받아 들여졌고 현대무용이 아닌, 전통무용에서 현대어법을 수용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1979년『제1회 대한민국 무용제』에 참가한〈연화정(蓮 花亭)〉을 필두로〈공간+나〉(1981년), 〈머물러 있는 혼 (魂)〉(1983년) 등은 새로운 시각에서 창작된 그의 대표 작들이다. 그 중에서〈공간+나〉는 우주라는 광대무변의 공간을 살아가는 예술가의 삶을 조명하고 있다. 우주 속 에서‘춤추는 존재인 나’를 확인하기 위해 그는 안무, 미 술, 의상 등에서 현대화를 꾀하는 데 망설이지 않았다.

〈머물러 있는 혼〉은 돌아가신 그의 어머니를 그리워하 면서 만든 작품이다. 평소 그의 춤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던 어머니가 세상을 등진 후 그 영혼은 아들 곁을 떠 나지 않고 아들이 겪는 시련과 슬픔의 고통을 어루만지 면서 위로해 준다는 애상조가

주조를 이룬다. 특히 어머니 를 관에 넣고 못질하는 장면 에서 사물놀이의 이광수가 부른‘오장을 후비는 듯한’

만가는 객석을 눈물바다로 만 들어놓는 이변을 빚었다. 연 극공연이 아닌, 무용공연 에서 관객이 눈물을 보인 것은 별로 흔치 않은 일 이다. 이 공연에서는 국 립관현악단의 장덕화, 김무길, 박종선, 서용석 등 쟁쟁한 악사들이 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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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를 그린〈머물러 있는 혼(魂)〉, 1983년 작품

▼ 이매방류의 승무를 추는 진정한 춤꾼 채상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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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 무대에 나와 악기를 연주했다.

〈맹안의 소녀〉를 보고 크게 나무랐던 원로 김진걸은 이번에는“아주 서정적인 작품”으로 호평해 주었고 당시 문예진흥원 상임이사이던 이종덕(전 세종문화회관 사 장)은 무대 뒤로 찾아와서“이런 한국 창작무용이 외국 에 나가서 공연돼야 한다”고 격려해 마지않았다. 실험적 전위작품은 자칫 해괴망측한 해프닝이나 인간사를 꼬집 는 얄팍한 풍자 해학 일색에 그치기 십상이지만 그의 작 품은 구성·안무·음악 삼박자와 스토리상의 기승전결 을 고루 갖추고 마지막 장면에서 호소력 짙은 감동을 장 식하는 것이 남과 다르다. 다음해 문예회관(현 문예진흥 원 예술극장) 대극장에서〈한마리 학이 되리라〉〈얼〉

〈심청 이야기〉를 한데 묶어 자신의 첫 개인 발표회를 가 졌다.

1986년 5월에 발표한〈공수래 공수거〉에 이르러 그의 창작무용은 더욱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탄탄하고 안정 된 기틀 위에서 자신의 개성을 강화한 이 작품은 반젤리 스의〈차이나〉를 편집해서 음악으로 사용하고 판탈롱 의 상을 선택하여 거칠 것 없이 활기찬 무대를 만들고 있 다. 이에 대해 민속학자 심우성이『한국연극』(1986년 6 월호)지에 발표한 글은 다음과 같다.

“매미가 껍질을 벗는 아픔을 자청하여 이제까 지 비한국적이라 여겨왔던 몸짓과 음악 을 도입, 원 로 한국무용가 들은 혀를 차기도 하지만 채상묵은 서 두를 것도 없다. 남의 눈치를 볼 것도 없다.

채상묵의 이번 춤판은 그런 면에서 우리 모두의 가슴을 뜨겁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무용은 접목이 아니라 수용이다.”

이 논평의 주안점은“인간의 감성과 무용표현에 대한 천착, 그리하여 곡선적이고 부드럽기만 하던 한국춤이 서 양음악으로 인해 직선적인 힘을 구사하는 등 새로운 삶의 양식을 창출하려는 의도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무용역정을 침묵이나 공백으로 메우지 않고 1987년〈비로자나불(佛)에 관한 명상〉으로『제9회 대한 민국 무용제』에 참가, 다시 한번 안무가·춤추는 자로서 의 역량과 눈부신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비로자나 불’은‘침묵의 부처’란 뜻으로 시인 김용범의 시와 최동 선(서울시립대 교수)이 작곡한 현대음악에 맞춰 승무와 나비춤, 법고춤을 새로운 춤맛으로 탄생시켰다. 이때 선 보인 180도 반원을 그리는 관음상의 환상적 의상이며 목 탁과 염불소리에 얹은 법고무, 긴 수건을 무대에 흘리는 생사고뇌의 자국은 무대 위에 붓글씨를 성취하는 형국 으로 하나의 춤이 그 시대와 공간에서 전혀 다른 변화를 줄 수 있음을 시도하여 불교계의 관심을 모았다.

채상묵은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일들이 진실한 감흥을 줄 때마다 이를 묵과하지 않고 춤으로 만들어 나 간다. 어머니가 그리워서 만든〈머물러 있는 혼〉과 대중 가수 김수희가 부른 대중가요〈님〉에다 어머니의 이미지 를 딴〈님〉등이 그렇다. 이 작품에서 무자는 양복을 입 고 객석에 나와 앉아 스케치북에다 시종 어머니의 모습 을 그리기도 한다. 그는 무용가로서 타성적 구각의 탈을 활짝 벗으면서 그때마다 자신의 입지를 투철하게 구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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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힘의 분출과 아름다운 서정으로 일컬어지는 채상묵의 한량무

2. 1989년 한국무용제전에 참가한 창작무용〈마른 풀꽃의 소리〉를 추는 채상묵 3. 자신의 춤인생을 조명한〈시인의 여정〉. 2001년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4. 1987년 대한민국 무용제 참가작품〈비로자나불에 관한 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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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왔다.

“춤을 배웠다기보다 무용가로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채상묵은 1944년 11월 4일 전주시 전동 1가에서 태어 났다. 양복점을 경영하던 채기동(蔡基同)과 정옥녀(鄭 玉女) 사이의 4남 6녀 중 다섯째, 형제 많은 집안에서 태 어나 어머니와 누나들 틈에서 자라선지 그는 유독 섬세 한 소녀 취향이 강했던 편이다. 그림을 그리고 바느질을 하고 춤, 연극, 음악 등 연희에 집착하여 어릴 때는 여성 국극단 공연장에서 시간을 보내고 집에 돌아와서는 동 네 사람들을 마당에 불러모아 마루에서 춤을 추고 노래 를 불렀다고 한다. 남학생이 춤을 춘다는 사실은 엄두도 내지 못하던 시절에 전주사범 부속초등학교 2학년 때 학 예회에서〈꽃과 나비〉를 추었고 그때 춤을 가르치던 교 사가 발레의 일인자 임성남이다. 임성남은 전주사범 졸 업 후 일본에 유학하기 전까지 이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15세 되던 해‘배숙자’로 이름을 날리던 소녀 무용가 배정혜(전 국립무용단장)가 전국 고교 순회공연 길에 그 가 다니던 전주북중에 와서 춤추는 것을 보고 그는 자신 도 반드시 춤추는 사람이 될 것을 결심했다. 그러나 부 친은 그가 의사가 되기를 원했다. 큰형인 채원묵은 화가 를 꿈꾸었지만 전북대 법과에 진학했고 큰누나 채인순 은 무용가의 꿈을 접고 사범학교 졸업 후 교사가 되었 다. 부친은 그가 춤추는 것을 완강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호남 살풀이춤의 예능보유자로 도문화재이던 무용가 최선(崔善)이 춤공연을 가졌을 때 이를 보고 너 무 감격한 나머지 감상문을 써서 보낸 것이 최선과 끊을 수 없는 사제의 인연을 맺게 되었다. 전주 영생고 1학년 때 전북 교육청이 주관한 학생 콩쿠르에 참가, 장고춤을 추어 특별상을 받고『전북일보』에 이 사실이 보도되자 부친은 춤추는 것을 반대하지 않게 되었고 특히 어머니 가 아들의 무용학습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그 무렵 스승 최선이 전주에 공연하러 왔던 은방초를 소개하여 은방초 춤 발표회에서 장고춤 군무에 출연했 고 정인방, 조용자의 이리공연에서도 부채춤 군무를 추 었다. 고교 졸업 후 서울 서라벌예대에 출강하고 있던 은방초의 권유로 1964년 지금의 중앙대인 서라벌예대에 진학하면서 단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전통춤 공연 무대에 서 왔다. 그후 스승은 남자 무용수를 기르고 싶어하던 태평무의 일인자 강선영 문하로 그를 들여보냈다.

강선영 무용연구소에서 학교에 다니면서 화관무·장 고춤·무당춤·검무를 배우고 스승이 안무한 무용극에 서 여성 무용수들 틈에 끼여 북춤을 추기도 하고 부채춤 을 추기도 했다. 본격적인 무용활동은 1966년 국립무용 단 객원 멤버가 되어 강선영 안무의 무용극〈수로부인〉

〈모란의 정〉등에 출연, 국립극장 산하 민속예술단원으 로서 1968년 멕시코 올림픽, 1972년 독일 뮌헨 올림픽 등 해외공연에 참가해 왔다.

남성 무용수가 드문 춤 풍토에서 그의 춤 재능은 자연 무용계의 시선을 받았다. 1975년(11월 22, 23일) 명동 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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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극장에서 선보인 김진걸 발표회에서 춤춘 것을 보고 당시 유명 평론가이며 경희대 교수이던 안제승은‘새 방 향 모색을 위한 시도’제하의 글에서“조흥동·한보성·

채상묵 등 남자 무용수는 자타가 공인하는 우리 무용계 의 중견, 기(氣)는 빈틈이 없고 흥은 무르익었다”고 칭 찬을 아끼지 않았다. 1976년에 공연된 강선영 안무의

〈원효대사〉중 궁중연희에 나오는 줄타기 사위에 대해 무용평론가 김경옥은“채상묵의 발랄하고 신선한 기교 는 그만의 춤 색깔을 그려냈다. 아끼고 싶은 무용가”“채 상묵은 신진으로서 확고한 자리를 차지했다”『조선일( 보』1976년 6월 22일자)고 평했다.

강선영 문하에 와서 막연하나마 창작춤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고 1979년『대한민국 무용제』가 탄생되면서 무 용제에 출품된 현대무용 작품을 보고 그는 전혀 예상치 못한 종횡무진의 새로운 춤 물결에 큰 충격을 받았다.

지금까지 보아온 것은 강선영의〈산제〉, 송범의〈푸른 도포〉, 김진걸의〈봉선화〉등 주로 한국 춤사위를 사용 한 무용극 스타일에 국한하고 있었으나 현대무용은 그 의 맹안을 눈뜨게 해준 신세계였기 때문이다.

채상묵은 스승 강선영에게서는“춤을 배웠다기보다 무용가로서 살아갈 수 있는 법을 배웠다”고 말한다. “강 선생님은 길을 가르쳐주시는 교육법이 아니라 목적지를 향해 가는 법을 스스로 깨닫게 해주신 분이다. 나는 스 승에게 일찍이 춤을 만드는 법을 깨우쳤고 그것은 나의

평생의 무용적 자산이 되었다.”

그러나 여성 무용인들 속에서 여성 위주의 춤을 추기 보다 좀더 남성적인 무용을 하고 싶었고“남성 무용가 중에는 이매방이 가장 잘 춘다”는 스승의 말을 상기하여 1975년 당시 서울시립무용단장이던 무용가 문일지와 부 산에서 활동하던 이매방을 모셔다가 이매방의 춤을 배 우기 시작했다.

그는 당대 남성 무용가 송범과 견줄 만한 안무가적 기 질과 업적을 갖추고 있던 강선영의 직계이면서 좀더 속 깊은 우리 춤의 언어를 익히기 위해 이매방 문하에 와서 승무, 살풀이춤, 즉흥무를 공부했고 1987년 중요무형문 화재 27호 승무 이수자·중요무형문화재 97호 살풀이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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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978년 로열 발레단 한국 공연 후 마고트 폰테인과 기념촬영(왼쪽부터 채상 묵, 이영희, 이매방, 마고트 폰테인, 김지수, 김학자)

6. 전국 무용연수를 끝내고(왼쪽부터 채상묵, 한영숙, 강선영, 하나 건너 임성 남, 한순옥)

7. 1979년 문화의 날 강선영 선생(왼쪽) 수상 축하 자리에서(오른쪽 채상묵) 8. 1975년 문화의 날 김백봉 선생과(앞줄 왼쪽 한보성, 채상묵, 김백봉, 조흥동)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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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자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두 스승의 틈에서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 었다. 신의와 정성으로 그를 키우던 강선영은 그가 이매 방 문하로 간 후 섭섭한 마음을 감추지 못해 한동안 멀 리하기도 했으나 세월이 흘러 어느 날부턴가“아들을 장 가보낸 셈치고”다시 제자로 받아들였다.

자신의 춤인생 조명한〈시인의 여정〉, 예술가상 받아

채상묵은 물론 실험을 위주로 하는 전위 예술가는 아 니다. 그는 전통 춤꾼으로서 그의 승무나 살풀이춤은 맛 깔스럽고 깊이 있게, 그리고 우아하게 솟구치고 가라앉 으면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작은 체구에 비해 크 고 힘찬 춤은 무대공간을 광활하게 쓰고 응축한 에너지 를 발산하여 그의 춤에 압도당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춤출 때마다“남성의 춤이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를 과시하여 그가 춤 잘 춘다는 것은 무용계에 정평이 나 있다.

따라서“채상묵은 우리 시대 가장 출중한 중견 춤꾼은 아직 못 된다”라는 말은 채상묵을 몰라도 너무 모르고 하는 소리다. 더구나“조흥동·국수호·정재만과 함께 중견 한국 춤꾼에 속해 있으면서 그들만큼 큰 직책을 갖 고 있거나 속된 말로 빛을 보고 있는 춤꾼은 아니라”고 쓴 글은 예술가에 대한 모독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기준과 근거에서 그런 표현이 나왔는지 모르지만 그는 1960년대 이후 우리 무용계의 기대주였고 기대를 저버리 지 않고 춤의 혁신과 발전을 보여주었다.

무용가는 직책이나 감투로 저울질되지 않는다. 단체 의 이사장이나 지도위원, 또는 교수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는 것이 상당히 빛을 볼 수 있는 조건인 듯이 제시한 것은 어불성설이 아닐 수 없다. 무용가는 잦은 발표회와 행사를 주도하는 직업은 아니며 수 년 만에 춤을 추더라

도 그 춤 속에 투철한 심상이 깃들여 있느냐, 춤을 얼마 나 아름답게 잘 추느냐, 그리고 무엇을 춤추며 자신만의 춤 깊이를 가지고 이를 무대에서 잘 형상화하고 있느냐 가 중요하다. 채상묵은 이 모든 조건을 확고하게 실천하 여 무용계의 신임을 받고 있는 중진이다.

채상묵은 두 번의 결혼실패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두 번 다 성격차이로 헤어졌다. 그래서 주변에서는 그는 결 혼보다 자신의 예술에 정진하는 모습이 그에게 걸맞는 정도라고 조언하는 사람도 있다. 원로 김백봉은 그가 이 혼하자“큰짐을 벗었구나. 이제 영어공부나 하라”고 했 고 애정 어린 충고에 따라 불혹의 나이에 미국의 방송통 신대학에 편입하여 미 패시픽웨스턴대학 체육학과를 졸 업, 명지대 사회교육대학원 사회체육과에서『이매방 승 무의 북놀이 리듬채보』로 체육학 석사학위(1996년)를 받 았다. 그 동안 자신의 창작춤 외에 서울시립가무단의 뮤 지컬〈성춘향〉〈바다를 내 품안에〉(1988년), 〈꼴방지전〉

(1991년), 광주시립국극단의 창극〈이진사전〉(1992년),

〈강릉매화전〉(1994년), 〈배비장전〉(1995년), 극단 성좌·

사조·대중·창무극을 안무하고 지난 1984년부터 명지 전문대·성균관대·원광대·한성대·세종대를 거쳐 1998년부터 한국예술종합대학 무용원에 출강하고 있다.

그리고 우봉 이매방 전통춤 보존회 회장으로서 전승적 역할을 맡는 등 수많은 공적이 인정되어 2002년 서울예 술단 무용감독이 되었다.

대표적 안무 작품은 서울예술단의 가무극〈성춘향〉, 공동체 문화 속의 인간의 삶을 그린〈지신님 지신님〉

〈살·살풀이〉〈사풍정감〉〈흥춤〉, 승무와 살풀이를 재조 명한〈혼의 울림〉〈혼이 흔들리는 몸짓〉, 현대춤 작가전 에서 출품한〈마른 풀꽃의 소리〉〈회심곡〉등이 있고 대 한민국 무용제 장려상(1979년), 전주대사습 무용부문 장 원·개천예술제 무용특장부문 최우수상(1987년)을 수상 했다. 이후 좀더 우리 춤을 연구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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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활동을 접고 이매방류의 춤에 정진하다가 일본·중 국·미국·이스라엘 등 해외공연에 다녀와서 다시 새 춤을 만든다는 당찬 계획을 세웠다.

2001년 춤인생 40년을 맞아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 가진〈시인의 여정〉은 강선영·이매방 두 스승의 춤사위 에서 갈등을 겪고 방황하다가 마침내 자신의 춤을 찾게 된 한 예술가의 탄생에서 성장까지의 무용역정을 그리 고 있다. 시인들이 원고지에다 시를 쓰듯이 무대를 원고 지 삼아 처음에는 태평무를 추다가 스승을 바꾸어 승무 를 추게 된 자신의 체험을 표현하여 근래에 보기 드문

‘예술작품’‘문학적 무용’으로 평가되면서 한국평론가 협의회가 주는 2001년 예술가상을 받았다.

서울예술단 무용감독이 된 후 지난해 4월에는 일본 도 가 페스티벌 참가, 5월에는 첫 작품으로〈고려의 아침〉

을 올림픽공원에서 선보였고 가을에는 뮌헨 공연에 이 어〈해어화(解語花)〉를 공연, ‘말하는 꽃’을 의미하는 해어화는 가무악시서(歌舞樂詩書)와 화(畵)에도 능했던 조선시대 기생들의 풍류와 삶, 사랑과 이별 속에 우리 춤을 어느 시대 누가 어떻게 춤추었는가, 민속춤이 만들 어지기까지의 과정을 치밀하게 조망해 내었다.

실제로 무대에는 신윤복·김홍도의 풍속도가 소개되 고 서경에서는 장고춤과 검무, 1장에서는 입춤·장고 춤·한량무, 2장은 사랑춤과 학춤, 3장은 살풀이춤, 4장 은 승무와 나비춤, 특히 5장에서는 도창 이숙영과 장고 에 장덕화·김청만, 거문고 원장현, 아쟁 박종선, 가야 금 박준호의 연주로 22명의 단원들이 각기 7개의 북, 총 154개의 북을 두드리는 힘의 분출을 모아 일사불란하게 춤의 풍류사를 연출해 냈다.

최근에는 예술의전당 토월극장(4월 11∼13일)에서

〈홍랑, 그 애달픈 사랑〉을 무대에 올렸다. 한 남자만을 희생적으로 사랑한 기생 홍랑의 이야기를 신문에서 읽 고 이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여 최경창과 홍랑의 사랑을

무용극으로 꾸몄다. 이 가무극에서는 무용단의 무용수 들이 직접 무대에 나와 노래를 부르는 등 강렬한 컬러 슬라이드 필름들로 장면을 처리하여 한국무용 공연에서 의 빠르고 경쾌한 속도감과 눈부신 진행과정을 실현시 켰다.

춤을 만들고 춤추면서 예술가적 행적 엮어가는 춤꾼

그는 현재 목동아파트에 혼자 살고 있다. 밤에는 음악 을 듣고 글을 쓰는가 하면, 그가 정리해 논 스크랩북과 앨범, 모든 자료들은 그가 걸어온 춤의 흔적을 갈피마다 역력하게 아로새기고 있다. 평소에는 배호의 노래를 즐 겨 부르고 발레나 현대무용 공연에 빠지지 않고 다닌다.

요즘은 아침마다 예술의전당에 있는 서울예술단에 출근 하는 것이 행복하기만 하다. 그는 타고난 교사로서 후진 들에게 자신이 가진 기량을 나누어주는 데 조금도 인색 하지 않다. 그가 춤을 배울 때는 춤 한 자락을 배우기 위 해 갖은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으나 그는 단원들에게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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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교 1학년 때 전인방 무용 발표회에서 부채춤을 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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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에도 무용수로서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북과 장고 다 루는 법을 철저하게 가르친다. 혹독한 훈련으로 다듬어 진 그의 무대는 20, 30여 명이 함께 오르는 북춤 군무에 서 한치의 흐트러짐이 없는 총체적 연희로 전문 예술단 다운 자존심을 지킨다.

원로 김백봉이 채상묵을 보고“속이 훤히 들여다보이 는 맑은 물 속 같은 사람”이라고 한 것처럼 그의 영혼은 투명하고 솔직하여 어느 한 구석에서도 위선의 그림자 는 찾아볼 수 없다.

항상 정갈한 옷매무새와 활기찬 걸음걸이, 나이를 멈 춘 듯한 청년적 기질은 오로지 춤추기 위한 싱그러운 투 지와 긴장과 기개로 번뜩인다. 권위의식을 내세우지 않 고 자신을 남과 빗대어 견주거나 타인의 평에 일희일비 하지 않는다. 자신의 주장을 정연하게 내세우면서 좋은 것은 좋다고 말하고 상대방을 인정하는 가운데 자신의 입지를 세울 줄 안다.

무용가 이은주(인천전문대 교수)가 쓴 글이 그를 두고 가장 적절해 보인다.

“채상묵은 인간과 인간의 감성을 탁월하게 해석하는 능력을 가진 무용수, 대형 무대를 압도하는 그의 동선, 그리고 묵묵히 한 예술의 세계를 옆을 보지 않고 정진해 온 구도적 자세, 완벽한 전통의 탐구와 이를 바탕으로 한 창작무용을 시도한 것”이 그의 이미지다.

그는 일찍이 여러 가지 실험적 작품을 시도하여 무용 계의 빗발치는 질타를 감내했으며 한국무용의 앞날을 내다보는 지혜로운 안목으로 자의적인 작품세계를 남보 다 일찍 이룩할 수 있었다. 전통춤은 전통춤대로 가치 있고 보존돼야 마땅하지만 새로운 세대는 새로운 춤언 어로 시대에 걸맞는 다른 작품을 창작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의지다.

한국무용의 현대화에 불을 당긴 당사자로서 전통무용 과 현대무용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충실히 해냈고 무

용계의 올바른 방향 정립을 위해 이론적 접근이 아닌, 사실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영감을 바탕으로 새로운 춤 세계를 펼치는 등 그는 한국무용 근대사의 변천사를 꾀 한 무용가라고 할 수 있다.

춤을 만들고 춤추면서 예술가적 행적을 엮어가는 그 는 지금 진정한 춤꾼의 한 사람으로 무용계 중앙에 서서 자신이 세운 춤기틀을 활기차게 도약시킬 수 있는 중요 한 시점을 맞고 있다.

이세기약력

·이화여대 및 대학원 졸업

·『조선일보』신춘문예 소설 당선, 『현대문학』소설 추천

·『서울신문』에‘이세기의 인물탐구’(1992∼1999) 연재

·『대한매일』논설위원, 본지 편집자문위원·한국간행물위원회 심의위원

·창작집「바람과 놀며」「그 다음은 침묵」, 김옥길 평전「자유와 날개」외

·현대문학상·서울언론인클럽 신문칼럼상

▶ 1964년 중앙대 재학 중 발레 학습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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