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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호고주의와 고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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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호고주의와 고고학

고전고고학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예술품과 건축물들에 관심을 가지면서 발달을 하였고, 아시리아나 이집트학과 같은 문헌고고학은 명문을 해독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나중에는 군 사적인 목적에 의해서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이렇게 물질 자료로부터 인간의 행위에 대한 정보를 도출해 내는 능력은 점차 커져갔지만, 애초 문헌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민 족에 대해서는 연구하려 하지 않았다.

독일에서 고고학이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이런 종류의 고고학에 제한적으로 쓰이는 경향이 있었고, 이에 반해 선사고고학은 태초의 역사 또는 초기 역사라 불렸다. 이후에 다른 지역에 서 고고학이라는 용어는 연구가 전문화되면서 선사시대 연구까지 확장되기도 하였다. 고전고 고학과 선사고고학은 모두 본래 전문화된 분야가 아니었으며 처음에는 대체로 호고주의적 전 통과 구분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고전고고학과 선사고고학은 처음부터 유물 자체에 대한 연구 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단지 고대유물의 외적인 것에 치중하여 수집하는 것에서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 것을 좋아하여 수집을 하는 것을 가리키는 호고주의와 구분이 잘 되지 않았던 것이다.

1. 북유럽의 호고주의

·중세의 호고주의 : 영국

중세유럽에서도 우리가 선사시대 무덤이나 거석기념물로 인지하고 있는 것들은 지역적인 관 심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지역적인 연대기들을 성직자들이 작성을 하였다. 성직자들 은 자신들의 연대기에 때로 그런 유적들과 결부되어 내려오는 민간설화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들은 왕족이나 귀족 가문의 기원을 찾아 성경이나 고전 문헌에 나와 있는 유명 인물들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연대기를 기록하는 성직자들은 설화나 전설 속에 등장하는 영웅적인 인물들 의 자손이라고 기록하였고, 특정 지배 집단들을 지지하기도 하면서 사실이 아닌 허구적인 이 야기들을 정당화시키려 하였다.

다른 연구들에서는 중동과 종교적 유대를 세우려 하였다. 20세기 말 잉글랜드 서남부의 글 래스튼버리 수도원의 수도사는 성서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하나인 요셉이 서기 63년 예수가 최후의 만찬에서 사용하였다는 성배를 잉글랜드에서 가져왔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주장은 애 국심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북유럽에서 애국심이 확산되면서 개신교 개혁을 불러왔 다. 영국에서는 늦게 르네상스가 들어오면서 종교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당시 북유럽 에서는 개신교 개혁을 맞으면서 인문주의자들이 교회 개혁 운동에 앞장섰던 것은 당연한 일로 평가되었다. 따라서 영국에서는 르네상스 운동이 순수하게 받아들여질 틈도 없이 종교 개혁 운동에 힘을 빌려준 셈이 된 것이다.

이탈리아 역사가 폴리도르 베르길은 헨리 7세를 초빙하여 잉글랜드의 역사를 쓰게 하였다.

그는 대부분 성직자들이 저술한 연대기들 즉, 설화와 구비전승, 전설로 내려오는 이야기들을 통해서 연대기를 작성하는 것을 거부하고 신뢰할 만한 기록들에서 근거를 찾고자 하였다. 그 래서 이전까지 무성하게 피어나던 아서왕의 유럽 정복과 관련된 것을 포함한 많은 기이한 전 설들의 역사성을 거부하게 되었다. 이러한 비판적인 연구로 북유럽의 초기 역사에 상당한 공 백이 만들어졌다.

이 공백을 메꾸기 위해 1600년대 말까지도 영국의 호고가들은 중세 및 그 이전 앵글로색슨 시기로 올라가는 문헌 기록들에서 정보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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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처음부터 몇몇 호고가들은 과거 물질자료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15세기에 존 라 우스와 윌리엄이 과거는 현재와 물질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인지하고 윌리엄은 영국에서 예전 건물들을 계측하고 기술하기도 하였다. 또한 헨리 8세의 수도원 파괴와 더불어 학자들은 어떤 것이 파괴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기록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영국에서의 고고 자료에 대한 연구는 이야기를 창조하는 것을 거부하려는 움직임과 문헌기록을 통해 시작되었다.

또한 애국심이 깊은 잉글랜드 사람들에게 지역의 고대 유물과 유적들은 이탈리아와 그리스 로부터 들어오는 고전시대 예술품을 대체할 만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예술품에 대한 대체할 것을 찾았다는 것은 영국에 대한 애국심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중세, 로마, 선사 시대로 올라가는 기념물들을 찾아 나라의 지리와 역사의 맥락에서 서술하게 되었다. 또한 그 런 유적들과 관련된 지역의 전설이나 전통까지도 기록하였다. 또 다른 지역의 호사품을 수집 하기도 하였는데 이렇게 수집한 것은 박물관의 주요 전시품이 되기도 하는데, 한 가지 예가 왕가 정원사였던 존 트레이드스캔트가 모은 더 다양하고도 광범위한 유물들이 1675년 옥스퍼 드에 설립된 애쉬몰리안박물관의 핵심이 된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왕가에서도 과거의 연구에 대해 관심이 높아져 1533년에 존 릴랜드라는 사람을 왕의 호고 가로 임명하기도 하였다. 윌리엄 캠든은 <브리타니아>라는 책을 출간하였는데 이는 로마시대 의 영국에 대해서 문헌자료와 지리적 조사를 토대로 개괄하는 것을 취지로 한 것이었다. 캠든 의 연구는 로마시대 이전의 잉글랜드와 후일의 색슨시대까지 확장되었다. 그러나 지표조사를 통해서 로마 이전 시기에 대해서는 어떠한 것도 인지되지 못하였다. 문헌기록을 떠나서는 거 의 편년이라는 것을 지각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애국심에 의해서 고고 물질자료에 대한 관심 을 가졌지만 정작 문헌기록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스칸디나비아, 프랑스, 독일의 호고적 전통

체계적인 호고주의적 연구는 잉글랜드보다 스칸디나비아에서 늦게 발달하였다. 이는 1523년 스웨덴과 덴마크가 정치적으로 분리되면서 정치 및 군사적인 경쟁관계가 조성된 탓도 있었다.

르네상스의 역사가들은 왕가의 지원으로 고대 기념물들에 대한 연구로 확장되었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기념물들을 기록할 수 있었다.

호고가들 중 스웨덴의 공무원인 요한 부레, 덴마크의 의사였던 올레 봄은 많은 수의 룬(유 럽의 고대문자)문자가 새겨진 돌들을 기록하여 역사학적인 접근으로 연구를 하였다. 연구가 이루어지면서 각 나라에서 박물관이 설립이 되기도 하고 고대문물대학이라는 전문적인 대학이 설립되기도 하였다. 안타깝게도 스칸디나비아에서는 17세기 말에 접어들어 스웨덴과 덴마크의 정치적 야망과 경제가 움츠러들면서 쇠약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프랑스에도 르네상스 학풍이 확산되면서 함께 로마 유물들은 고대 유물로 인식되었다. 많은 학자들이 로마시대의 명문들을 집중 연구하였는데, 프랑스에서도 역사시대 이전의 문헌기록이 남아있지 않았던 시대의 문물은 별로 가치를 지니지 못하였다. 하지만 1485년 리옹에서 파올 로 에밀리오의 <골족의 고대유물>의 출간과 함께 켈트 어를 사용하였던 프랑스의 초기 주민 들의 생활양식과 기원에 대해서 호고적 관심이 일어나게 되었다. 18세기 후반이 되면 켈트족 의 문화에 관심이 높아지면서 고전고고학과는 다른 로마 이전 시기에 대한 관심이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움직임은 19세기까지 지속되었는데, 이는 민족주의의 성장과도 결부되어 있다.

조상의 고대 유물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애국심과 자부심 또한 같이 성장을 하게 되어 자신 들의 나라에 대한 민족주의가 생겨난 것이다. 하지만 로마 이전 시기의 물질자료에 대해서는 조사보다는 사색을 좋아하여 고고학의 발달에는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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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는 로마의 역사가 포르넬리우스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가 1451년 재발견되면서 학자들은 중세의 전설이 아니라 고전시대의 문헌들을 통해 초기 역사를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고대 독일에 대한 최초의 일반 역사 연구이다. 스칸디나비아와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역 사적인 접근은 과거의 물질문화에 대한 관심을 증폭하게 하였다.

스칸디나비아, 프랑스, 독일의 초기 호고적인 연구는 모두 문헌기록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르네상스 시대에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학적인 접근은 애국심을 낳기도 하여, 각 나라 의 조상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동유럽의 호고주의 전통

영국, 스칸디나비아, 프랑스, 독일에서는 호고주의적 연구가 역사적인 접근을 통해 발달하였 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북부와 중부 유럽의 초기 호고주의는 중요한 특징도 공 유하고 있다. 동유럽의 정치 지도자들이나 학자들은 고고학적 발견물을 포함하여 자신들의 호 사 수집품을 꾸몄다. 자신들의 사회적인 위치를 강조하기 위해 수집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대 부분의 발굴들은 고고학적인 연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수집품을 모으기 위한 발굴이 이루어 졌다. 이러한 수집품들은 단지 설화나 전설 속에 알려진 민족들과 연결되었고 유물의 연대를 추정하는 체계적인 연구는 발달되지 못하였다. 명문들이 없는 상황에서 문헌기록 이전으로 연 대추정을 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북유럽의 호고주의 전통과 유사한 점을 공 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영국에서도 문헌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시대에 대해서는 아무런 시 도도 할 수 없었고, 스칸디나비아와 프랑스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또한 프랑스에서는 골족이라는 프랑스의 전통 조상이라고 하는 민족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 지기도 하였던 것이 다.

러시아에서도 호고주의는 호사품을 수집하면서 이루어졌다. 레오 클레인에 따르면, 표트르 대제가 러시아를 유럽화시키기 전까지 러시아에는 다른 유럽 지역과 같은 호고주의적 전통이 없었다고 한다. 1718년 표트르 대제는 관리들에게 오래되고 희귀한 물건들이 발견되면 수집하 여 새로운 수도 상트레테르부르크에 가져오도록 명령하였다고 한다.

2. 석기의 인지

16세기와 17세기에는 전 세계적인 서유럽의 탐험과 식민화가 시작되었다. 뱃사람들은 아메 리카 대륙, 아프리카, 태평양 지역들에서 많은 수렵채집민과 부족농경민들을 마주쳤다. 이런 민족들과 관습에 대한 서술은 유럽에 퍼졌고 호사품으로 이들의 도구와 의복을 수집하여 유럽 으로 들여왔다. 유럽인들은 수집을 하면서 수렵채집민과 부족농경민들을 대하게 되자 신의 계 시를 받지 못해서 도덕적으로, 기술적으로 퇴보하게 되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는 중 세적인 관점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수집해온 도구들과 의복들에 대해 많은 연구와 사실들이 알려지게 되면서 현대의 “원시적”인 민족들과 선사시대 유럽인들의 유 사점을 찾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비교가 받아들여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선사고고학의 발달에 가장 중요한 진전 가운데 하나는 학자들이 유럽에서 발견되는 석기는 인간이 제작한 것이지 자연적이거나 영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16세기 말 존 트와인은 고대 그리스의 민족지적 기록들을 이용하여 서기전 1000년기에 북부 유럽인들은 석기를 사용하는 북아메리카 인디언들과 유사한 원시적 생활양식을 가졌음을 시사 하였다. 이미 16세기에 이탈리아의 지질학자 게오르기우스 아그리콜라에 의해 사람들이 석기 를 만들었을 것이라는 의견이 나오기도 하였는데 17세기가 되면 영국에서는 신대륙 원주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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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대해서 더 많은 지식이 쌓이면서 석기는 사람이 만든 것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1655년까지도 올레 봄과 같은 뛰어난 유럽의 호고가들조차도 신대륙에서 온 민족지 자료 가 운데 석기들을 수집품으로 가지고 있으면서도 마연된 돌도끼는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라고 믿 었다. 이렇게 석기가 인간이 만든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인식은 되풀이되면서 받아들여졌다.

당시 유럽과 다른 지역에서는 석기가 금속기 이전에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인식이 커졌다.

당시 세계에서 석기는 금속기를 대신할 수도 있었고 금속기와 함께 쓰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중세적인 관점은 완전히 사라지지 못하였기 때문에 성경에 근거하여 철을 가공하는 일은 늦어도 인간이 창조되고 나서 불과 몇 세대 뒤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면서 이 런 민족들은 철광석이 나지 않는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야금술에 대한 지식을 잊어버리고 말았 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1695년 존 우드워드는 인간이 전체적으로 노아의 홍수 이후 미개 화하였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제시하였다. 이는 퇴보론적 맥락에 뿌리박은 관점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호고가들 가운데는 야금술이 유럽에서 상실되었을 것이라는 퇴보론 적인 제안을 거 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그 대신 인류역사 내내 석기를 사용하는 집단들은 가난해서 금속기를 가질 수 없는 사회 집단이나 공동체들에 의해서, 또는 이웃 집단과는 달리 금속을 가공할 줄 몰랐던 몇몇 고립된 민족들에 의해 금속기와 함께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 다. 1857년까지도 석기들은 금속기의 원형을 모방한 것이며, 따라서 금속기에 선행한다는 설 에 반대하는 주장들이 있었다. 19세기 이전에는 인류역사에 대해 진화적 관점이 퇴보론적 관 점보다 더 그럴듯하게 보일만한 사실 증거가 없었던 것이다.

3. 계몽주의

·계몽사상의 배경

진화적 시각은 인간이 경제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탁월해지거나 발달할 수 있다는 확신 이 커지고 있었던 경향에 토대를 두고 있다. 과거에 대한 진화적 시각이 발달한 것은 서북부 유럽에서 17세기에 시작된 사상의 점진적 전환에 힘입은 바 크다.

17세기 초 영국의 철학자이자 정치가인 프랜시스 베이컨은 학자들이 고대의 저술가들의 가 르침보다는 관찰, 분류, 실험을 통해 지식을 찾아야 함을 강조하였다. 베이컨에게는 과학적 귀 납법이야말로 인간이 사실이 아닌 전설이나 설화 등으로 자신들을 정당화하려는 것에서 벗어 날 수 있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17세기 후반이 되면 서유럽에서는 미래에 대해 확신을 가지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낙관론은 기술 혁신에 따른 경제의 성장과 기술 발달, 과학 혁명, 세계관이 변화한 것 에서 힘입어서 늘어나게 되었다. 또한 서유럽인들이 원주민들의 생활양식을 보는 생각도 달라 졌다. 중세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는 신의 계시를 받지 못해 퇴보한 산물로 보았지만 이제는 인간의 원시적인 조건의 잔존물로 생각하게 되었다. 기술의 발달로 인해 중세적인 시작과는 멀어지며 인간을 중시하게 된 것이다.

17세기 동안 진보에 대한 믿음이 성장한 것은 합리성을 더 강조하는 경향과 어울린다. 프랑 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는 인간의 마음을 떠난 모든 자연 현상들을 기계적 원칙이라는 단일 한 체계에 근거하여 설명하고자 하였다. 그는 자연을 지배하는 법칙은 보편적이며 영속적으로 적용된다고 상술하였다. 신은 물적 영역과 떨어져서 존재한다고 생각되었고 물적인 영역이란 더 이상의 신의 개입 없이도 기능할 수 있는 기계와 같은 것으로 창조되었다고 생각하였다.

이제는 일상들에서만 아니라 자연에서도 신의 개입을 거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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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이 르네상스의 발견이나 서유럽에서 기술의 발달이 있었다고 해도 진보는 인류역사 에서 보편적으로 일어난 현상이라는 결론이 직접적으로 도출된 것은 아니었다. 이탈리아의 철 학자 기암바티스타 비코는 역사가 순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으며, 인간 사회는 단 일한 신의 섭리를 반영해 주는 유사한 발달 및 쇠락의 단계들을 거치며 진화하였다고 주장하 였다. 비록 진화론자는 아니었지만, 비코의 관점은 인류역사가 자연과학과 유사한 규칙성들의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미 프랑스에서 16세기 말에 문화진화에 대한 생각은 제시되었지만 중세적 시각에 도전하 였던 시각은 18세기까지도 공식적으로 제기되지 못했다. 가장 야심차고 영향력 있는 지성적 운동으로서 계몽철학은 프랑스에서 시작되었다. 몽테스키외, 볼테르, 콩도르세 그리고 경제학 자 튀르고 등의 학자들로 대표한다. 이들을 계몽철학자라고 부른다.

계몽철학자들은 사회과정에 대한 자연주의적인 이해와 진보에 대한 확신을 결합하여 사회변 화를 설명하는 취지를 가진 일련의 통합된 개념들을 제시하였다. 또한 이른 시기부터 인류 발 달의 보편적 과정을 연구하는 방법론을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프랑스 계몽주의는 이 같은 불만족을 지성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시작으로 점차 혁명적인 잠 재력을 가진 운동을 도모하게 된다. 사회 진보는 인류의 보편적인 관심에서 필연적인 것이라 주장함으로써 프랑스의 중간계급뿐만 아니라 하위 계급들의 지지까지도 끌어내고자 하였다.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에서도 계몽사상이 일어났다. 스코틀랜드의 계몽철학에 대한 관심은 남부와 북부의 경제적 차이에 기인한다. 남부는 급속한 발전을 겪고 있었지만, 북부의 고지대 는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발전되지 못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이러한 지역적인 차이로 인 해서 스코틀랜드의 지성인들은 제도의 기원, 발전, 근대화에 관련된 문제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반면에 잉글랜드에서는 기원에 대한 문제들은 일반적으로 사색적인 것에 머물러 회피 되는 경향이 있었다. 스코틀랜드의 지성인들이 근대세계에서 계몽사상의 발달에 중요한 기여 를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더 큰 정치권력을 추구하는 중간계급 사 이에 유행하게 된 것은 18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발달한 더 혁명적인 계몽철학이다.

·계몽사상의 내용

다음은 계몽주의의 주요 사상들이다.

1. 심적동일성. 모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종류와 수준의 지성과 동일한 기본 감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 심적 동일성이란 학설에는 프랑스 사회를 귀족, 성직자, 평민이라 는 세 개의 불평등한 신분으로 나누는 봉건적인 구분은 아무런 자연적인 정당성도 지니고 있 지 못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그러나 심적 동일성이라는 사상을 포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몽사상의 옹호자들 가운데는 남성과 여성의 정치 및 사회적 평등을 지지하는 사람 은 별로 없었다.

2. 문화진보는 인류역사의 주도적인 성격이다. 변화는 분기별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 적으로 일어나는 것이고 자연적인 원인에 따른 것이라 생각한다. 많은 계몽철학자들은 진보를 필연적인 것, 곧 자연의 법칙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3. 진보는 기술발달뿐만 아니라 사회 조직, 정치, 도덕, 종교 신앙을 포함하는 인간 생활의 모든 양상을 특징짓고 있다. 이런 모든 영역에서 일어나는 변화로 서로 동반하여 일어나며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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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적으로 동일한 발달의 연쇄를 따라 일어난다. 동일한 발달의 연쇄에 따라 발생하는 문제에 대해서 동일한 해결책을 찾는다. 따라서 생활양식은 유사한 선상을 그리며 진화한다고 생각된 다. 문화변화는 흔히 보편적인 일련의 단계들의 측면에서 지각된다. 이러한 단계들은 경제적 인 측면에서 정의 된다. 여기서 발생하는 질적인 문화 차이들은 일반적으로 기후 및 다른 환 경적 영향 탓으로 생각되었다.

4. 진보는 인간성을 완전하게 한다. 이는 인간성을 변화시켜서가 아니라 점진적으로 무지와 미신들을 몰아내고 감정을 조절하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것이 종교적인 관념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인간 본성은 본질적으로 선하며 따라서 인간은 개인적이고 집합 적인 이익을 위해 자신들의 일들을 꾸려나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5. 진보는 인간의 조건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이성적 사고를 발휘한 결과이다. 중세시대에 오로지 신에 대한 믿음에 의지를 했다면 좀 더 사람에게 집중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성적 사고를 발휘함으로써 인간은 점차 환경을 통제할 더 큰 힘을 얻게 되고, 이는 다시 더 복합적 인 사회를 만들어내며 인간성과 우주의 성격을 더 심오하고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데 필요한 부와 여유를 가져다주었다. 결국 진보란 인간의 생각으로 인해서 발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류문화의 진보에 대한 시각

스코틀랜드 철학자 스튜어트는 계몽철학자들이 인간의 제도의 발달을 추적하기 위하여 고안 한 방법론을 “이론”사 또는 “추측”사라고 불렀다. 이 방법론은 서로 다른 특징을 가지고 발달 하는 단계에 있다고 판단되는 민족들을 비교 연구하고, 문화들을 단순에서 복잡으로 논리적으 로 단선적으로 배열하는 일을 필요로 하였다. 이러한 연구는 민족지 자료에 근거한다. 처음으 로 진화한 것이 농경이었는지 아니면 유목이었는지 하는 부분은 의견이 다르게 나타나기도 한 다. 하지만 여러 지역에서 민족들의 발달 단계나 농경이었는지 유목이었는지 하는 것은 지역 마다 차이가 있더라도 증거에 따르면 비슷한 발달단계를 보인다고 여겨졌다. 이러한 것은 계 몽철학의 주요 사상에서 심적 동일성의 원칙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즉 모든 인간은 본질 적으로 동일한 종류의 감성과 지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역적인 차이에도 불구 하고 비슷한 발달단계를 보이는 것이다.

민족지 자료에 근거하여 인류문화를 보는 시각이 있는 반면에 고고학이 중요하지 않다는 시 각을 갖기도 한다. 튀르고는 근대 세계는 과거 선사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모 두 담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현재의 사회들을 비교하고 배열하는 일은 인류 진보의 역사를 전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믿음으로 민족학자들이 18세기부터 인간행위의 전체 변이들을 연구하고 있으며, 고고 자료에 의지하지 않고서도 인류사회의 일반 적 발달을 기록하는 데 필요한 수단을 가지고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이런 검증되지 않은 가 정으로 많은 사회인류학자들이 고고학은 이론적으로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하는 시각을 갖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다윈의 <종의 기원>출간 훨씬 이전부터 문화 진화적 시각은 인류역사의 설명으 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글린 대니얼은 계몽철학이 고고학 발달에 중요하였다는 데 의문을 제기하였다. 왜냐하면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계몽주의 학자들은 자 신들의 저술에서 고고자료를 등한시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선사시대 물건들을 연대 추정하는 그 어떤 확립된 방법도 없는 상태에서 고고학은 장기간의 문화변화를 논하는 데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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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기여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계몽주의 저술들이 호 고가들의 사고에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진화적 발전의 시각은 최초의 문헌 기록 이전에도 고고학자들이 연구할 만한 많은 변화가 있었다는 것이다.

·물질문화의 진보와 삼시대설

더 구체적으로 계몽주의는 로마의 에피쿠로스학파의 철학자 티투스 루크레티우스 카루스의 시 <사물의 성질에 대하여>에서 설명하였던 문화발달에 대한 유물론적이고 진화적인 시각에 다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가장 이른 시기의 도구가 돌이나 나무뿐만 아니라 손, 못, 이빨이었다고 주장하였다. 그 뒤 청동, 철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대체로 도구들은 일정한 단 계를 거치면서 진화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유행하였던 것은 금, 은, 청동 그리고 철의 시대를 거쳐 계기적으로 도덕적 퇴보가 있었다는 생각이었다.

18세기 초 프랑스 학자들은 루크레티우스의의 생각과 함께 석기가 과거의 도구라는 증거가 증거하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루크레티우스와 함께 인류의 도구로 시기를 구분한 학자 들에는 니콜라스 마위델, 앙투안이브스가 있다. 이러한 삼시대설에 대한 지지는 모두 고고학 적인 발견에 근거했다고 할 수 있다.

이후에 문화진보에 대한 관심이 성장하고 널리 퍼지면서 삼시대설은 대중적인 존중을 얻게 된다. 삼시대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늘어갔지만, 이 학설은 루크레티우스의 시절과 마찬가지 로 여전히 사변적이며 증명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더구나 18세기 동안 기술진화에 대한 삼시대의 틀은 수렵채집에서 상업에 이르는 계몽주의적인 진화와 결부되지 못한 채 남았다.

그러나 과거에 적어도 몇몇 유럽인들은 석기를 만들고 사용하였을 것이라는 생각은 광범위하 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4. 학문적 호고주의

17세기와 18세기 선사시대의 유물유적 연구는 계몽주의의 발달에 역할을 하였던 과학적 방 법론의 확립에 영향을 받았다. 1660년 찰스 2세가 설립한 런던왕립협회는 관찰, 분류, 실험을 강조하였는데 이 학회의 회원들은 고대의 저술들이 지식의 원천이라는 것을 부정하고 사물 자 체를 연구하는 데 전력했다. 17세기 후반부터 고대 저술들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유물에 대 한 연구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17세기왕립협회의 회원이었던 호고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는 존 오브리를 예로 들 수 있다.

오브리는 1650년대 옥스퍼드대학에서 베이컨의 방법론에 익숙해졌으며 1649년 에이브버리의 선사시대 거석기념물 유적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1663년 찰스 2세는 개인적으로 오브리에 게 스톤헨지와 에이브버리에 대해 상세히 기술하여 후일 오브리가 <영국의 기념물>이라고 이 름 붙인 책을 준비하도록 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훌륭하고 웅장한 거석기념물들은 아마도 드 루이드교 신전일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다른 거석들과 비교하여 독특한 기념물의 범주에 속함을 밝히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남부의 유적들은 분명히 로마 시기 이전으로 올라간다 고 주장하였다. 오브리는 자신의 연구방법에 대해서 “비교 문물학”이라 불렀다. 그 목적은 그 돌들이 스스로 증거를 제공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책은 20세기가 되도록 출간이 되 지 못하였지만 잉글랜드에서 선사시대 고고자료에 대한 공식적 연구의 시작을 알렸다고 할 것 이다. 하지만 오브리는 드루이드교 신전일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고고자료 자체에 대한 연구를 시도하기는 하였지만 아직까지 초기 호고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왕립협회의 조사로는 윌리엄 스터클리의 야외조사를 예로 들 수 있다. 캠든과 마찬가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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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터클리도 중세 이후 잉글랜드의 많은 지역에서 농민들이 주목하였던 기하학적 농작물의 흔 적은 이미 파괴된 구조물들의 기초가 묻혀 농작물의 성장에 영향을 미쳐생긴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는 고고학의 야외조사에서 쓰이는 방법이다. 파괴된 석조구조물들이 땅속에 묻히게 되면 수원의 흐름이 원활하지 못해 그 위에 숲이나 작물들이 자라나게 되면 유독 그곳은 길이 나 색깔에서 차이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스터클리는 직선 토루들이나 상이한 종류의 봉문과 같이 비슷한 형태의 기념물들을 형식별로 모아서 얼마 안 되는 역사적 증거의 측면에서 해석 하고자 하였다.

다른 나라에서도 이제는 고고 자료 자체에 대한 연구를 하기 시작하였다. 사물 자체를 연구 하는 방법은 고대 유물과 기념물들을 더 정확하게 관찰하고 기술할 수 있으며, 이것을 통해 상대연대를 추정함으로써 선사시대 연구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물론 이런 조사가 너무 단편적 이고 그 결과가 선사고고학이라는 학문이 되기에는 너무 산발적이었다고 할지라도, 결국은 학 문의 발전에 도움을 주는 토대가 되기는 하였다.

5. 호고주의와 낭만주의

18세기 동안에는 문화 진화적 사고의 영향력이 강해지면서 오히려 보수적인 반향도 낳게 되었다. 보수주의는 당시 호고가들의 연구에 진화론보다 더 큰 영향을 미쳤다.

1724년 프랑스의 예수회 선교사 라피토는 캐나다 인디언 연구를 하였으며 <원시시대의 관 습과 아메리카의 야만 관습>이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이 책에서 라피토는 아메리카인디언과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종교와 관습들은 모두 종교와 도덕의 타락이 했다는 점에서 서로 닮았 다고 주장하였다. 라피토의 고대와 원주민들의 관습들은 모두 종교의 타락에서 나타난 것이라 고 생각하는 것인데 이는 퇴보론의 부활로 스터클리의 주장과도 비슷하였다. 스터클리는 영국 의 선사시대의 주요 기념물들을 드루이드교도들과 결부시켰으며 이것을 기념물들과 결부시켜 터무니없는 해석들을 하였던 것이다.

스터클리의 사고는 낭만주의로 향하는 경향을 비추어주기도 한다. 18세기 말에 시작된 낭만 주의의 움직임은 장자크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에서 예견되었다. 계몽철학자로서 루소는 이성을 믿었지만, 인간행위의 중요한 구성요소로서 감정과 지각을 강조하였다.

낭만주의는 감성을 중요시하면서 보편적인 것에 우선하여 지역적이고 문화적으로 특수한 것 을 선호한다. 낭만주의자들도 과거에 대한 관심은 있었으나 개인이나 개별 국가의 과거이지 인류 전체의 과거는 아니었다. 낭만주의는 원시적 또는 자연적 사회들을 옹호하였으며 기념물 이나 민속에 반영되어 있는 의미들이 근대 예술과 문학의 영감의 원천이라고 보았다.

이렇듯 낭만주의는 특정 민족의 역사에 대한 관심을 고취함으로써 호고주의를 자극하기도 하고 민족주의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18세기 후반 이루어진 연구로는 윌리엄 커닝턴과 그 의 후원자 리처드 콜트 호어의 연구를 들 수 있다. 이들은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아 윌트셔의 광범위한 지역을 지표 조사하여 고대의 마을 유적과 토루들을 찾고 379개 무덤을 발굴하였다.

그러나 영국에서 수많은 종류의 기념물들이 계기적으로 어떤 주민들이 남긴 것인지, 또는 구 체적인 형식들은 어떤 민족만이 남긴 것인지 밝히지 못하고 말았다. 당시에도 초보적인 수준 에서 석기만 출토되는 무덤들이 다른 무덤들보다 오래되었다기보다는 단지 더 거친 부족이나 가난한 사회 집단들이 남긴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호고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아 직까지 잉글랜드에서 진화론적인 사고가 인식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18세기 호고가들은 선사시대 고고 자료에 대해 적절한 편년 법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학문들의 정보를 이용하였다. 비교 민족지, 비교 언어학, 형질인류학, 민족학, 구비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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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은 모두 선사시대의 민족들에 대한 정보원으로 가치를 인정받아 고고 자료를 해석하는데 도 움을 주고 있다. 이러한 종류의 연구가운데 가장 중요한 성과로는 1786년 영국의 동양학자 윌리엄 존스의 인도유럽어족의 확인을 들 수 있다. 이 발견은 비교언어학의 시작을 알렸다.

하지만 언어학적 발견과 고고 자료와의 결함이 쉽지 않다는 한계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이러 한 연구로 과거를 연구하는 데 사용되는 방법들은 각각 그 자체로 학문적인 정립이 필요하였 으며, 오늘날까지도 어떻게 종합되어야 할 것인지는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6. 신대륙: 17~18세기 인디언의 과거에 대한 인식

인디언에 관한 연구는 1492년 콜럼버스의 소위 신대륙 발견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식민지 배경 아래 과거에 대한 연구는 언제나 원주민의 땅을 빼앗고 착취를 정당화하는 데 이바지하는 고도의 이데올로기적인 활동이었다. 원주민들을 보고 유럽인들의 첫 역사적 문 제들은 이들은 누구인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에 관한 것이었다. 이전까지 학자들은 인디 언들이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대륙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만큼 상상력이 풍부하였다.

이런 생각들은 유럽에서 들어온 정착자들이 특정한 집단들에 대해 가졌던 자만이나 문화적 편 견을 비추어주고 있다. 몇몇 초기의 스페인 식민자들은 인디언들이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였다. 17세기 매사추세츠만의 청교도 지도자들은 자신들은 신 이스라엘이라고 생각 하며 인디언들을 노예화할 권리를 가졌다고 여기기도 하였다. 또한 퇴보론 자들은 원주민 문 화를 창세기에 서술되어 있듯이 신의 계시를 받은 부족장사회의 생활방식이 부패되어 살아남 아 있는 것 정도로 해석하였다. 18세기가 되면서 몇몇 지도적인 유럽의 학자들은 박물학적인 맥락에서 신대륙이 유럽이나 아시아에 비해 기후적으로 열등하다는 것은 식물과 동물의 생활 뿐만 아니라 원주민의 열등성까지도 설명해 준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16세기와 17세기 동안 멕시코와 페루에서 스페인의 정치 및 종교 권위자들은 원주민들이 기독교 이전의 과거와 종교를 가지고 있음을 지우고자 하였다. 왜냐하면 멕시코와 페루를 정 벌한 스페인인들은 원주민들이 그러한 역사 즉, 과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지우고자 하였다.

식민지화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18세기 말 이전에는 북아메리카의 선사시대 고고자료 가운데 눈에 덜 띄는 것들에 대해서 아무런 주의도 기울여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북아메리카에서는 땅에서 출토된 유물 수집품은 거의 없었고 유적 발굴이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784년 토머스 제퍼슨이 버지니아 주에서 인디언 무덤에 대한 체계적이고 주의 깊은 발굴을 한 것이 있다. 제퍼슨은 인디언들이 최초의 아메리카인들이었다고 함으로써 식민주의의 희생양들을 새로운 공화국의 국가 상징으로서 낭만적으로 그려냈다. 하지만 이미 자민족중심주의의 팽배로 유로아메리칸들 은 고고학 자료로부터 원주민들, 또는 예외적인 경우 유럽 문명의 확산으로 동화될 운명에 있 는 사람들의 역사에 대해서 의미 있는 지식을 얻는다는 데 회의적이었기 때문에 당시에 큰 반 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7. 호고주의의 막다른 길

프랑스뿐만 아니라 북아메리카에서도 선사시대 고고자료에 관심을 가진 호고가들은 여전히 고고자료에 대한 역사적 맥락을 알아내기 위하여 고전고고학자들 못지않게 문헌기록이나 구비 전승에 의존하였다.

헨리 롤랜즈는 “고대의 명칭이나 단어들의 유추 사물들의 이성적인 결합이나 일치, 평이하 고 자연스런 추론과 이론에 근거한 연역은, 더 확실한 관계나 자료가 모두 결여되어 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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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최선의 권위들이다”라고 선언하였다. 롤랜즈의 말처럼 사물자체를 연 구하는 일은 문헌기록이 결여되어 있을 경우 최선책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기념물에 대한 설명은 고대의 기록에 언급된 민족이나 개인이 어떠한 목적에서 그것을 축조하 였는지를 확인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18세기와 19세기 초 호고가들은 문헌기록에 지속적으로 의지하였던 결과 기록이 시작되기 전의 시기에 대한 호고주의 연구에 대한 한계를 느꼈다. 잉글랜드의 수필가이자 사전 편찬가 였던 새뮤얼 존슨은 호고가들을 달가워하지 않았는데, “영국에 대해 진실로 알려진 것은 고작 종이 몇 장에 쓸 수 있는 정도에 불과하다. 우리는 고대의 저술가들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 이상으로 과거를 알아낼 수는 없다”라고 하면서 호고가들의 조사연구에 대해 더욱 어두운 전 망을 던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선사시대에 대한 연구는 그렇게 정체되어 있지는 않았다. 15세 기에서 18세기까지 유럽의 호고가들은 석기가 유물임을 알았으며, 그리고 어떻게 땅을 파고 발견물을 기록할 것인지, 기념물과 유물들을 어떻게 기술하고 분류할 것인지, 층서법을 포함 한 다양한 연대추정 방법들을 사용하여 어떻게 몇몇 선사시대의 발견물들의 상대적이고, 심지 어 기년의 근사값을 추정하는지 요령을 터득하였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이러한 성과들이 제한 적이었다고 하더라도 선사시대의 연구를 이미 크게 진전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종교적인 차이에서 오는 한계는 여전히 고고학적 기록에 대한 진화적 해석을 명백하게 옹호 하고 발달시키는 데 방해가 되었다. 계몽철학자들은 과거의 고고자료가 아니라 “이론사”에 집 중하였기 때문에 호고주의와 구분되어 있었으며 문화 발달의 주된 지표로서 도구의 기술보다 는 생계유형에 치중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사시대에 대한 상대 편년을 수립하고, 인류 의 발달에 대한 연구에서 방해물은 유물과 기념물들은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의 성취를 그저 보여줄 뿐이라는 것이다. 즉 문헌기록이나 설화 등을 통해서만 물질자료, 건축물 등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문헌기록이 없이는 과거에 대한 그 어떤 체계적인 이해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18세기 말부터 증거들은 그 같은 이해가 가까운 미래에 귀납적으로 얻 어질 것 같지 않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었다. 이러한 진전에도 불구하고 학문 분야로서 선사고 고학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호고가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시각을 제한하였던 가정들로부터 벗 어나야 했다.

호고주의는 옛 것을 좋아하는 것을 말한다. 호고주의는 고고학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물론 호고주의가 모든 나라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것은 아니다. 대부분 처음부터 고대 유물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 것도 아니었다.

영국은 전설과 설화로 무장한 연대기에 의지하다가 종교개혁으로 인해서 생각이 바뀌게 되 었다. 그 공백 기간을 메꾸기 위해 중세시대 이전시기의 기록들에 대한 정보를 찾으면서 고대 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스칸디나비아는 왕가의 후원으로 고대 문자들을 연구함으로써 역사학적인 접근을 하였다. 동유럽은 호사품을 수집하기 위해 고고학적 발굴과 연구가 이루어 지기도 하였다.

본격적으로 고대 물질자료 자체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7세기부터라고 할 수 있다. 계 몽사상으로 인해 중세적인 관점이 어느 정도 사라지고, 인간을 중시하였다. 때문에 17세기부 터 원주민들을 종교와 도덕적으로 타락한 존재로 보는 관점은 줄어들고 그들이 사용하는 사물 자체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된 것이다.

18세기에는 낭만주의가 고고학 발굴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낭만주의는 개인의 국가나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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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의 특성에 중점을 두기 때문에 지역적인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인류문화의 진보적인 시각이 계속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의 신대륙 개척에 의한 식민지화로 인해 인디언들에 대한 인식은 나아지지 않았다. 여러 지역들 을 식민지화하면서 그곳에 있던 인디언들의 문화를 없애 노예로 삼으려는 경우가 많았다. 그 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이들의 문화를 인정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이미 자민족중심주의가 퍼져있었기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에 호고가들은 여전히 고대 물질자료에 대한 맥락을 알아내기 위해서 문헌기록을 이용 하였다. 점차 호고주의 연구에도 한계에 다다르기 시작했다.

조지 쿠블러는 <시간의 형상>이라는 책에서 “과거를 아는 것은 별자리를 아는 것만큼 놀랄 만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별자리에는 다양한 그리스 신화가 담겨져 있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듣고 알아가는 것은 우리에게 상당한 흥미를 일으킨다. 그것만큼 과거를 아 는 것 또한 흥미롭다. 고고학사에 대해서 현재 이론들의 결과물만 알고 있지만, 그것이 형성 되기까지의 과거를 알아간다는 것은 전체적은 흐름을 이해하기 쉽고 기억하기 쉽게 해준다.

인류문화의 진보에 대해서 단선적인 연쇄라고 말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단선적이라는 것이 인류 진화의 이론에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고학사에서도 단선적인 단계들을 거쳐서 이루 어졌다고 생각된다. 고전고고학과 문헌고고학을 거쳐서 호고주의, 나아가서는 문화사고고학 기능주의 고고학 등 기술발달에 따라 사회적 상황에 맞추어 단선적인 단계를 거치면 이루어진 것이 바로 고고학사가 아닐까 생각된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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