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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고전고고학과 문헌고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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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고전고고학과 문헌고고학

몇몇 고고학사 연구자들은 현재 고고학자들이 인류의 과거 물적 유존물이라 생각하는 것에 대해 관심을 가짐으로써 고고학의 기원을 찾았다. 그러나 물질문화를 의도적으로 이용하여 과 거에 대한 지식을 추구하는 것으로 제한하는 연구자들도 있다. 이 두 가지 접근들은 분명 역 사적으로 상호 관련되어 있었으며, 전자의 관심은 후자의 발달에 필수적이었을 가능성도 있 다. 고고학의 발달은 상당 정도 물질문화 자체와는 큰 관련이 없는 과거에 대한 관심에서 자 라난 것으로 보인다.

1. 고대 세계에서 과거에 대한 관심

모든 인간 집단은 자신들의 과거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류역사의 많 은 시간 동안 축적된 물질문화에는 그 지역의 특정 민족 집단의 기원이나 모험을 연대기화하 는 신화와 전설들로 채워져 왔다.

·유적과 유물에 대한 관심

15세기에서 16세기로 연대추정되는 이로쿼이족 유적에서는 수천 년 전의 찌르개, 석제 파 리프, 순동 도구들이 출토되었다. 민족지 증거에 따르면 그 유물들은 숲 속에서 그것들을 잃 어버린 사람들의 영혼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된다고 한다. 그런 유물들을 소유하는 사람들 에게 다양한 형태의 행운을 가져다주는 마법의 힘을 가진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중세 유럽에서도 농경민들은 경작 중 발견되는 돌도끼나 찌르개들을 수집하였는데, 그런 물건들이 번개 또는 요정과 같은 영적인 창조물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믿었던 것이다. 일본인들은 돌화 살촉을 비바람이 친 뒤에 땅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땅 위에 떨어진 초자연적인 군사들의 무기 라고 믿었다.

이렇듯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이 살고있는 곳이나 기념물들에 대해 설명을 하고 의미를 부여 하고 싶어한다. 이러한 설명들은 설화처럼 내려오거나 시간이 지나면서 변형되고 다시 이야기 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16세기 아즈텍인들은 정기적으로 테오티우아칸 유지 가운데에서 의식을 거행하기도 하였다.

이 유지는 서기1000년기에 점유된 것으로서 가장 최근의 존재의 사슬이 시작될 때 신이 우주 의 질서를 재정립한 곳이라고 믿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설명들은 현재 우리가 사람이 만들었 거나 자연적으로 형성되었다고 알고 있는 경관들을 사람 또는 초자연적인 기원을 가진 것이라 풀고 있다. 이런 설명은 특이하여 고고학자들이 그 자료의 원래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문화적 으로 특수한 자료의 언어의 형태로 풀어내야 한다. 이러한 유지들은 과거에 공동체들이 공유 하고 있었던 믿음이란 측면에서 설명되는 것인데 구체적으로 어떠하였는지는 우리들이 잘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객관적이기보다는 주관성이 많이 개입될 수 있다는 문제점이 있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초기 문자 문명에서 문헌 자료들은 과거에 어떠한 일들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정보원일 뿐만 아니라 편년적 틀을 제공해 주기도 하였다.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 유물이나 고대 건축물들은 이전 시기 지배자나 정치적으로 위대한 시기의 유지로서만이 아니라 과거에 대한 정보원으로서 가치를 지녔다. 바로 물질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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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주로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명문들이 많이 발견되어 문 헌자료로서 많은 참고가 되고 있다.

이집트의 제18왕조에는 필경사들이 고대의 폐기된 기념물들을 방문하고 벽이나 기둥에 문 자나 그림으로서 표현해 놓기도 하였다. 고대 왕가의 축제에 대한 기록을 남겨 그것을 재현함 으로써 권위와 의식적 권력을 고양시키고자 하였다.

이집트인과 메소포타미아인들의 과거 물질문화에 대한 관심은 모두 종교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신이 처음부터 완전한 형태로 문명을 세웠다고 믿었다.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 타미아에서 이루어진 이 연구들의 목적은 종교적인 관심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지만 물질자료 를 통해서 과거에 대한 이해를 하려했다는 점에서 초기 호고주의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고 생 각 할 수 있다. 비록 이집트에서는 고대 미술들을 주의 깊게 연구하고 복제하기도 하였지만, 서기700년 이후 현재와 과거에 대한 차이를 갈수록 인식하게 되면서 호고주의의 발달을 촉진 시키기보다는 억누르게 되었던 것 같다.

·그리스와 로마 그리고 고대 중국

고대 그리스인들은 역사와 고고학이라는 용어를 역사학의 두 장르를 구분하는 데 사용했다.

둘 모두 처음부터 현재 사용되는 의미로 쓰이지는 않았다.

역사는 원래 문제를 먼저 설정하고, 그리고 나서 관련 정보를 찾으며, 마지막으로 자료로부 터 결론을 도출하는 탐구의 형태를 가리키는 데 쓰였다. 서기전 5세기 헤로도토스를 비롯한 사람들은 가까운 과거를 연구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역사학적 인 연대기 서술은 페르시아전쟁 이후에 시작되었다. 이후에 학자들은 이런 종류의 연대기들을 종합하여 현대적 의미에서 기록에 근거한 역사를 생산하게 된다. 그 이후 지금과 마찬가지로 역사는 문헌 기록에 바탕을 둔 과거에 대한 연구를 가리키게 되었다.

고고라는 용어는 서기전 4세기에 처음으로 신화, 전설, 구비전승이나 물질자료를 이용한 더 욱 오래전의 과거에 대한 연구를 지칭하였다. 주된 강조는 계보, 도시의 창시, 사람과 제도 및 관습의 기원에 맞추어졌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신전에 봉납하는 물품들을 과거의 위대한 사람 들의 유품으로 인지하였으며 때로는 무덤들을 파서 고대 영웅의 유지라고 믿어졌던 것들을 찾 아내기도 하였다. 하지만 고대 물질자료들에 대한 관심은 많아졌지만 수집하거나 연구하려는 움직임은 없었다.

당시까지 현재적인 의미에서 고고학이 왜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 발전하지 못하였으며 먼 과거에 대한 고찰이 왜 철학적 사색의 대상에 머무르고 말았는지에 대한 상세한 연구는 없 었다. 쉬냅은 이것을 그리스 학문의 이론과 실제의 괴리로부터 오는 것으로 생각하였으며, 이 에 반해 모제스 핀리는 그리스와 로마의 지식인들 사이에 물질문화에 대한 더 일반적인 관심 이 결여된 것이 부분적인 이유라고 하였다.

주나라 사상가 한비자는 지금은 신석기시대의 채문 및 시문 토기라 불리는 유물을 중국 문 명 발달의 초기를 나타내는 것들이라 하였다. 중국의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은 고대 중국사에 서 아주 영향력이 있는 <사기>를 쓰면서 정보를 수집할 때 고대의 유지들을 방문하고 과거의 유존물들에 대한 고찰을 하였다. 유학자들은 적어도 하왕조까지 올라가는 공통의 유산을 강조 함으로써 역사 연구는 중국의 문화 및 정치 생활을 통일시키는 데 강력한 역할을 하게 되었 다. 사마천과 같이 초기 중국의 역사가들은 역사 문헌에서 발견될 수 있는 실수들을 보완하고 자 고대의 물품들에 관심을 가졌다. 즉 중국은 역사를 보완하고 수정하기 위해서 고대 물품들 을 증거자료로서 참고를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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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중세 유럽에서 역사를 보는 시각

최근 연구에 따르면 중세 서유럽에서는 로마 문화의 물적 유존물에 대해서 이전의 생각되던 것보다 더 크게 인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몇몇 도시들에서는 아주 인상 적인 로마의 기념물들은 공식적으로 도시의 자부심의 하나로 보호를 받았다. 또한 중세시대는 암흑시대라고도 불리며 유존물들을 대규모로 파괴하였던 시기이기도 하다. 괴행위로 고대의 비문들과 예술품들이 발견되기도 하였으나, 이 가운데 남아 있는 것은 별로 없다.

중세시대 그 어느 때에도 고고학 발굴이 역사적 원천으로 여겨지던 때는 없었다. 왜냐하며 중세는 암흑시대라고 불릴 정도로 종교에 집착하고 종교만이 나의 전부, 국가라는 인식이 널 리 퍼져있었기 때문이다. 고전시대의 유물들이 발견되어 때로 주목받기도 하였고 그에 대한 평가도 이루어졌으나 그런 발견을 방법론적으로 연구하려는 노력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중세에 있어 로마 카톨릭 교회는 학습을 독점하고 조정하였다. 고대에 대한 확실한 지식이 라고는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나 남아 있는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역사서들뿐이라고 여겼 다. 더구나 성서는 인간의 모든 것에 대한 역사와 우주의 역사까지도 제공한다고 믿었다. 이 러한 토대 위에서 과거에 대한 기독교적인 관점은 다양한 방식으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지속적 으로 고고 자료의 해석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다음과 같은 여섯 개의 진술로 요약될 수 있다.

1. 세상은 그렇게 오래되지 않은 초자연력에서 비롯되었으며, 앞으로도 수천 년 이상 유지 될 것 같지는 않다. 창조의 연대를 교황과 같은 사람들이나 주교들이 연대를 설정하였는데 이러한 연대들은 성서에 나오는 세대들을 역산한 것으로서 수천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또한 세상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끝나게 될 것이라는 믿음 도 가지고 있었다.

2. 물리적 세계는 퇴보가 진전된 상태에 있다고 믿어졌으며, 대부분의 자연적인 변화들은 신이 본래 창조한 상태로부터 부식되는 과정을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물리적 세계 의 부식과 몰락은 모든 물리적 사물들의 덧없음을 증거가 되며, 이는 기독교 교회가 영적 인 것들을 강조하는 것이 타당함을 말해 주었다.

3.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신에 의해 창조되었음을 확인하였다. 에덴동산으로부터 인류가 쫒 겨난 것이 확산의 시작이며, 두 번째는 언어의 분화로 가속화되었다는 것이다.

4. 인간 행동의 기준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퇴보하는 것은 자연스런 것이라 여겨졌으며, 이 생각은 퇴보론에 대한 고전시대의 학설들을 알게 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퇴보론은 유럽 인들이 마주쳤던 수렵채집민과 부족 농경민들의 원시적인 기술들을 설명하는 데도 사용되 었다. 그렇지만 퇴보론의 개념이 기술이나 물질문화에 적용될 때는 그와는 다른 시각과도 충돌하게 된다.

5. 세계의 역사는 많은 사건들의 연속으로 해석되었다. 그 중 기독교는 세계사가 우주적 중 요성을 갖는 일련의 사건들의 연속으로 생각된다는 점에서 인간사에 대한 역사적인 관점을 고취시켰다. 이러한 사건들은 신이 미리 개입한 결과로서 해석되었으며 신의 도움 없이는 인류역사에서 그 어떤 역사적 중요성을 얻을 수 있는 변화 또는 진보가 이루어질 수 없게 된다. 신이 개입하지 않는 동안 인간사를 정체 또는 순환적인 과정을 그리게 된다는 것이 다.

6. 중세의 학자들과 예술가들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 인들보다도 물질문화에서 변화를 인식 하기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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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동안 과거의 물질문화에 대한 관심은 신성한 유품들을 수집하고 보존하는 일을 제외하 고는 고전시대보다도 제한적이었고 일시적이었다. 그래서 과거 물질문화에 대한 체계적 연구 의 발달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 시기에 몇몇 문헌기록으로부터 이루어진 과거에 대한 이해는 유럽에서 사회적 조건이 변화하면서 고고학 연구가 발전할 수 있는 개념적 토대 를 형성하기도 하였다.

3. 르네상스시대의 호고주의

·르네상스와 고전고대에 대한 관심

14세기 동안 교역과 다른 경제적 변화들이 증가한 결과 북부 이탈리아의 봉건제는 상업 도 시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게 되었다. 학자들은 베로나, 파두아, 플로렌스 같은 도시들을 고대 도 시국가의 부활로 여겼으며, 잔존하는 고전시대의 저술들을 찾아 이런 도시들을 고대 도시국가 의 부활로 여겼으며, 고전시대의 저술들을 찾아 이런 도시들에서 정치적 변화를 삼고자 하였 다.

역사적 선례를 예로 들어서 혁신을 정당화하는 일은 세속적인 것과 관련해서는 먼 과거를 현재보다 우월하게 보고 생활을 증진시키는 정보의 원천으로 삼는 것이다. 하지만 르네상스를 계기로 정치혁신을 정당화하는 역사 문헌을 찾게 되면서 점차 당시의 사회 및 문화 생활이 고 전 고대와 그렇게 비슷하지는 않다는 인식을 하게 된다.

14세기 초기 르네상스 학문은 수도원의 도서관에서 발견된 자료들에 집중하였다. 15세기에 는 그리스 문헌들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는데, 당시에는 이런 문헌들이 다른 나라에서 이탈리 아로 대량으로 들어왔었다.

더 학문적인 고전고대에 대한 관심은 문헌에서 건축이나 미술로 확산되어 갔다. 지리학자 알베르티는 고대 건축을 연구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하였고 도시 귀족과 부유한 상인들은 고대 미술과 건축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면서 자신들의 사회적 위치를 드러내기 위해서 미술을 후웜 하였다.

15세기 말에 들어오면 바오로 2세, 알렉산드르 6세와 같은 교황과 추기경들 그리고 이탈리 아 귀족들은 고대 미술품들을 수집하고 전시하게 된다. 이들은 그런 물품들을 찾기 위해 땅을 파는 일을 후원하기 시작한다. 체계적인 발굴은 아니지만 발굴을 시작했다는 것에 의의를 둘 수 있다.

·호고주의의 확산

고전고대에 대한 관심은 점차 유럽 전역에 확산되어 갔다. 이미 16세기에 윌리엄 캠든과 같 은 지역의 호고가들에 의해 연구되었다. 이 과정에서 귀족층은 로마 및 그리스 미술품을 탐욕 스럽게 수집하였으며, 귀족의 대리인들이 미술품을 이탈리아와 그리스로부터 사들였다. 앞에 서 설명하였듯이 14세기 고고라는 말은 문헌기록 편찬에서만 사용되던 말이지만 1600년이 되 면 과거와 관련된 물적 증거들을 수집하는 것을 주된 작업으로 재정립하게 된다. 호고가라는 용어는 이미 15세기부터 쓰였는데, 16세기가 되면 때로 고대의 유물들을 연구하는 아마추어뿐 만 아니라 공식적인 직함을 지칭하기도 하였다.

호고주의가 확산이 되면서 고대 명문 연구 전문가였던 자코브 스폰은 근대적인 의미에서 이 전 인간사회들의 물적 유존물에 대한 고찰을 가리키는 뜻에서 고고학이란 용어를 사용하였다.

·빙켈만과 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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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동안 호고가들은 고전시대의 미술품을 연구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호고가들은 미술품을 수집하여 근대 미술가들의 모델로 유행시켰다. 석조상이나 금속조상들은 미적으로 높이 평가되었으며 장식의 의미를 알아내려는 노력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작품들은 역사 문 헌을 통해서만 연대를 추정할 수 있었는데, 명문을 가진 것은 별로 없었으며 그러한 맥락에서 발견되거나 구체적인 기록을 가진 것도 없었다. 이와 같은 문제를 독일의 호고가 요한 빙켈만 이 해결하였다.

빙켈만은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유를 사랑하였기 때문에 세상에서 제일 위대한 미술들을 만 들어냈다고 믿었으며, 이는 의인화된 이미지들에 분명하게 나타난다고 하였다. 그는 자신의 생애를 이탈리아에 전시된 그리스와 로마의 조각품을 연구하는 데 바쳤다. 당시 그리스 미술 의 많은 작품들은 로마시대의 복제품 형태로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빙켈만은 고전시대 문헌 에 그 연대가 나와 있는 작품들을 찾아냄으로써 될 수 있는데로 많은 조각품들의 연대를 추정 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그리스 조각품들을 네 시기로 나누었다. 시원양식, 고도의 양식, 세련 된 양식, 모방과 쇠락의 시기였다. 이런 양식들은 아직까지도 그리스 미술을 말할 때 자주 인 용되곤 한다. 그렇지만 빙켈만은 미술사적으로 훌륭한 업적을 남겼지만, 스스로 생각하는 예 술적 아름다움에 대한 이상적 기준들을 찾고자 하였으며 자신을 후원하는 귀족들에게 큰 관심 을 끌 만한 물건들을 지속적으로 연구하였다. 그리하여 일상생활에 대한 고찰은 전혀 보여주 지 못한 것이다. 다만 고전 문명에 대한 자신이 역사적인 지식을 고대 문헌들에서 부적절하게 다루어진 영역들에까지 확장시키기는 하였다.

빙켈만은 흔히 고전고고학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양식 편년을 수립하여 연대를 모르는 유물 들에 적용시킬 수 있음을 논증한 것은 고고학을 역사학과는 다른 독자적인 학문 분야로 세우 는 데 중요한 한 걸음을 나아간 것이다. 하지만 빙켈만은 18세기의 다른 호고가들과 마찬가지 로 일반적으로 고고학과는 다른 물품들을 연구하는 데에만 관심을 가졌다. 그 자신의 주된 관 심은 양식이었지 출토맥락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빙켈만이 미술사학의 창시자라는 주장 이 고전고고학의 아버지라는 주장보다 많은 점에서 더 합당하다. 빙켈만은 분명 고전학 연구 와 미술사학이라는 독립된 학문이 서로 밀접하고도 오래 지속된 관계를 맺는 데 큰 역할을 하 였던 것이다.

·18세기의 발굴과 유적조사

18세기에 호고가들이 예술품을 수집하는 것 이외에 체계적인 고고학 발굴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는데 바로 서기 79년 베수비우스 화산 폭발로 파괴도니 헤라쿨레니움과 폼페이에서의 로 마 유적들 발굴이 그러하다.

프랑스에서는 17세기 이후 로마 건물들을 고찰하고 기록하며 보존하는 데 관심이 증가하였 다. 이러한 관심은 루이 14세 치하에 도로를 건설하고 요새를 확충하는 프로그램으로 더욱 자 극을 받았다. 건설 과정에서 땅속에 묻힌 로마의 구조물들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건축가들은 아주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헤르쿨라네움과 폼페이의 건축물들에 대해서 평면도와 해발고 도를 기록하였다. 이러한 발굴들은 빙켈만이 호고주의적 연구를 고전고고학으로 전환시키는 데 했던 기여 못지않게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고대 신전들과 다른 일반 건물 유지들을 발굴하고 보존하는 일은 1809년에서 1814년까지 나폴레옹이 로마를 점령하였던 시기 동안 프 랑스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러한 발굴의 목적은 미술품들을 찾는 일이었지만 18세기가 되 면 헤르쿨라네움과 폼페이에서 새로운 발굴의 기준이 수립되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호고가 들은 르네상스 초기부터 로마의 도시 지리학에도 관심을 가졌지만, 18세기가 되어서야 미술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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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수집뿐만 아니라 특정 유적의 건축물들까지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연구들은 피치콜리에 의해서도 이루어졌다. 또한 1734년 이탈리아를 여행하였던 잉 글랜드 신사들은 호고가협회를 조직하여 1751년부터 그리스에서 고대 기념물에 대한 상세한 지표조사를 후원하게 되었다. 이런 조사에 대한 출간물들은 이탈리아 뿐만아니라 고대 그리스 전반의 미술 및 건축에 대한 관심을 고양시켰다.

4. 고전고고학의 발달

·고전고고학의 성립

18세기 말 고전고고학은 학문적 맥락에서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프로이센 제국의 북부 게르 만왕국은 1806년 나폴레옹에 패하여 교육 체계의 혁신을 기획하게 되었다. 이 혁신의 목적은 공무원들을 교육시켜 프랑스 계몽주의의 혁명적인 사상에 노출시키지 않으면서도 국가의 사무 를 더 효율적으로 조정하는 것이었다. 프로이센의 교육 혁신을 맡았던 빌헬름 폰 훔볼트는 고 전 언어, 문학, 역사, 철학, 미술 연구에 바탕을 둔 고등학교 과목들이 미래의 관료들이 혁명 사상에 노출되지 않도록 교육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는 그리스 철학 은 독일 학생들에게 근대 세계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사상들을 충분히 제공해 존다고 생각하였다. 고전학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폰 훔볼트의 교과목 혁신의 영향으로 프로이센과 같은 게르만 대학들에서 고전학연구가 확 충되었다. 고전학은 괴팅겐대학에서 헤인이 설립하고 그의 학생이었던 프리드리히 볼프가 할 레 대학에서 더 명확하게 정식화시켰다. 그것은 철학을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화를 이해하는 열쇠로 생각하였다. 고전학자들은 고대 문헌의 진실을 검증하기 위해서 고고학에 의지하기보 다는 문헌 비판에만 의존하였다. 그래서 고전학자들은 역사학적인 방법론을 취하여 문헌 비판 에 집중하였다.

·19세기 후반 고전고고학 발굴

19세기 후반 고전고고학은 문헌기록으로부터 알려진 지식을 확증하고 확장시킬 수 있는 정 보를 얻을 방법을 찾기 시작하였다. 주세페 피오렐 리가 이탈리아 정부의 지원을 받아 1860 년 폼페이의 발굴 책임을 맡게 된다. 그는 이전까지 이루어지는 미술품과 건축물 발굴들은 모 든 종류의 건물들에 대한 세부적인 발굴이고 서로 다른 부분들이 어떤 목적으로 사용되었는지 를 파악하기 위한 아주 세부적인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즉 지금 행하고 있는 발굴은 큰 목적 을 달성하기 위한 아주 부분적이라는 것이다.

19세기 동안 독일의 모델에 강한 영향을 받은 고전학 연구는 인문학의 정수가 되면서 유럽 과 미국 전역에 인문학 교육의 토대가 되었다. 따라서 고전시대에 대한 지식은 우월한 기호, 교육, 사회적 지위에 대한 표시가 되었다. 때문에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주요 도시들에서 박물 관, 이탈리아와 그리스 및 주변 지역에서는 고전학 연구를 증진시키기 위한 국립 학교들을 수 립하는 데 지원이 이루어 졌다.

이탈리아는 외국학자들의 발굴을 금지하였지만 그리스에 터를 잡은 외국 학자들은 지중해 북부지역에서 고전시대 유적들에 대한 중요한 발굴들을 수행하였다.

고전시대의 발굴은 크림반도에서 19세기 초에 시작되었고 1826년이 되면 크레흐에 많은 발 견물들이 모이게 되어 고고학 박물관이 수립되기에 이른다.

많은 전문적인 고전고고학 훈련은 그에 결부된 학교들 안에서 이루어졌다. 주요 국가들에서 만 대규모 발굴을 지원하는데 필요한 재원들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국가들은 고고학을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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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적인 위신을 획득할 수 있는 길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고전고고학 발굴이 국가의 정세에 개입되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고전고고학의 성격

고전학과나 미술사학과가 대학이나 박물관에 자리를 잡게 되면서 고전고고학자들은 선사고 고학자들이나 인류학자들과는 다르게 분류되었다. 그것은 바로 고전고고학의 연속성에 있다.

고전고고학은 성당, 일반 건물들에서 고대 문헌과 미술품들을 찾아왔다. 그리고 조금 더 발전 하여서 도시에 초점을 맞추어서 도시의 평면도를 알아내고자 하는데 관심을 두었다. 정작 도 시 안에서 생계나 취락유형 등은 무시를 하였다. 이렇게 고전고고학은 다른 곳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서 초기의 르네상스적인 경향에서 계속 머물렀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19세기 동안 고전고고학에 변화가 일어났다. 고전고고학에 전문화가 진 행되면서 미에 대한 초기적 관심이 양식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에두아르트 게르하르트는 고고 학은 유물에 대한 체계적인 서술과 비교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고전고고 학자들은 유물들을 편년적으로 배열을 하고 어디서 만들어 졌는지 파악하려하고 누가 만들었 는지를 분석하려 하였다. 양식적인 분석을 하려 시도하였지만 고전고고학자들은 고대 유물의 기능에 대해서는 관심을 보여주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외적인 사람으로 미국의 고고학자 해리 엇 앤 보이드 호이스를 예로 들 수 있다. 그는 많은 크레타의 유물들을 기능적인 측면에 대한 고려를 토대로 분류하였다. 19세기와 20세기 초에 몇몇 고전학자들이 인류학적 주제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지만 고전고고학에 오랫동안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였다. 고전고고학이 기 능적인 측면에 관심을 가지지 못한 이유는 유물의 기능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바로 유물 들을 보고 어떤 대화를 가능하게 해주는지에 대한 즉, 외적인 면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진 것 이다. 따라서 고전고고학의 주된 목적은 원래 사회 또는 문화적 맥락에 대한 것에서 고립된 양태로 물질문화에 대한 제한적인 범위의 형식적 연구로 후퇴하게 되었다. 고전고고학의 보수 적인 경향에 대해서 스티븐 다이슨과 이안 모리스는 대학원학생들이 외국으로 나가 흔히 대규 모의 장기 발굴들을 위해 조직된 위계적 구조 안에서 연구를 수행해야 할 필요가 있었음을 주 장하기도 하였다.

1960년대 이후 고전학 연구는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그 이유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는 더 이상 현대의 다민족사회에서 예전과 같은 관심을 끌 수 없었다.

5. 이집트학과 아시리아학

고전학 연구는 이집트학과 아시리아학의 발달에 모델을 제공해 주었다.

·고대 이집트 연구

고대 이집트는 오랫동안 사색과 환상의 대상이었다. 왜냐하면 성서에 이집트는 이국적인 경 이의 땅이자 도피처의 이미지와 함께 억압, 우상숭배, 위험한 여자들의 땅으로 그려졌기 때문 이다. 또한 15세기 르네상스 학자들은 고전시대 저술들에서 이집트를 재발견하게 되면서 모세 보다 오래전에 이집트인들은 완전하면서도 덜 부식된 형태의 신성한 지혜의 원초적 계시를 지 니고 있을 것이라는 식의 공상을 하기도 하였다.

고대 이집에 대한 체계적 연구는 1798~1799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이집트 원정에 동행 한 프랑스 학자들의 관찰로 시작되었으며 1809년부터 <이집트 서술>이라는 몇 권짜리 책을 출간하였다. 이러한 군사 행동으로 로제타스톤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 이는 장프랑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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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폴리옹의 고대 이집트 스크립트들에 대한 해독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비문이었다. 이때부 터 이집트에 대한 중요한 연구결과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대부분의 이집트 문헌들은 지식의 저장소가 아니라 종교 의식의 일상적인 양상들과 더불어 역사, 행정, 그리고 세속적인 사항들 을 다루는 것이었음이 드러났다. 그래서 몇몇 고고학자들은 기념비적 명문들을 기록하기 시작 하였다. 문헌들을 사용하면 고대 이집트에 대한 편년과 역사의 골격을 얻을 수 있었으며 이와 관련하여 이집트학자들은 이집트 미술과 건축의 발달을 연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샹폴리옹은 성서와 상충되는 편년을 제한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는 나폴레옹의 패배 이후 프랑스를 통치 하던 보수적 관료들의 종교적 감정을 자극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1880년대부터 이집트에서 작업을 하기 시작한 페트리는 자신의 발굴 도면을 그리고, 어디 에서 유물들이 발견되었는지를 기록하였다는 점에서 새로운 기준을 세웠다. 그는 단면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층위 단면은 거의 그리지 않았다. 이집트 고고학을 현대의 기술적 수준과 비슷하게 연구한 학자는 미국의 고고학자 조지 라이스너이다. 그는 이미 1900년 엘발 라스 수도원에서 층위 단면을 일상적으로 그리기 시작했고 기자의 헤테페레스 여왕 무덤과 함 께 묻힌 많은 물건들을 세심하게 기록하였다. 이집트학도 고전고고학과 마찬가지로 일생생활 에 대해서는 관심을 보여주지 못하였다. 고전학 연구를 모델로 한 이집트학자들은 문헌학, 문 학연구, 정치사, 상류층의 예술 및 건축 연구에 집중하였다.

·아시리아학의 성립

아시리아는 메소포타미아 북부 지역에서 티그리스강 상류를 중심으로 번성한 고대 국가이 다. 아시리아학의 연구도 명문의 해독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2세기에 서아시아를 여행하는 유 럽인들은 이라크와 페르시아의 고대 도시 유지들을 주목하였고 때로는 해석할 수 없는 명문들 이나 다른 유물들을 유럽으로 가져오기도 하였다. 1616년 피에트로 델라 발레는 바빌론의 유 지를 찾아 고찰을 하였으며 우르지역을 방문하기도 하였고 1786년 조제프 드 보샹은 바빌론 에서 알려진 첫 발굴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세 도시 유적들은 모두 구약성서에 언급되어 있 던 곳들이다. 1754년 장자크 바르텔르미는 고대 히브리어의 지식을 이용하여 페니키아 알파벳 을 해독하였으며 이로부터 서아시아 문명에 대한 금석학적 연구가 시작되었다. 19세기 초에 바빌론 유적들을 포함하여 메소포타미아 유적들을 조사하고 수집하였으며 북부 이라크의 님루 드와 쿠윤직에서 더 대규모로 발굴을 하게 되었다. 1857년에 헨리 롤린슨은 페르시아 왕 다 리우스 1세가 이란의 비시툰의 절벽에 새기라고 명령한 세 개의 문자로 된 기록을 시작으로 고대 바빌론 언어로 된 설형문자들을 성공적으로 해독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는 고대 아시리 아와 바빌론의 역사를 재구성하는데 획기적인 일이었다.

이라크 남부에서는 영국과 프랑스가 크림전쟁에 참여한 뒤에야 대규모 발굴이 시작되었다.

1877년에서 1901년까지 텔로에서 에르네스트 드 사르젝의 발굴은 서기전 3000년기 이라크 남부에서 번영하였던 수메르문화에 대해 차음으로 방대한 증거를 제공하였다. 독일 고고학자 로베르트 콜데바이는 광범위한 범위의 고대 바빌론 유적을 발굴하였는데 이로서 바빌론시대 도시구획에 대한 많은 정보를 얻었다.

아시리아학자들은 문헌 자료를 사용하여 메소포타미아 역사를 재구성함으로써 미술과 건축 에 있어 장기간의 변화를 연구할 수 있었다. 아시리아는 문자 자료가 아주 잘 보존이 되어 있 어서 금석학자들이 기록 자료에 더 크게 의존할 수 있었다. 때문에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정치 사, 문학 장르, 종교 신앙, 사회 및 정치 조직을 연구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다양한 고문헌 자 료들로 메소포타미아의 금석학자들은 시대 및 주제에 따라 전문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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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시리아학은 문헌에 기반을 둔것과 고고학적인 지향을 가진 아시리아학이 유리되어 있다는 점이 메소포타미아의 자료에 대한 해석을 종합하는데 가장 큰 장애가 되고 있다.

·이집트와 아시리아학의 의의

이집트학과 아시리아학의 발달로 고대 히브리, 그리스, 로마 인의 서술들을 통해서만 이차 적으로 알 수 있었던 이 두 지역에 3000년이라는 문헌사를 더해 주었다. 이 두 학문은 고전 학을 모델로 하여서 유물들이나 건축물들에 대한 기능적인 면에 관심을 보여주지 못하였지만 편년, 역사 기록, 종교 신앙 등에 대한 많은 정보들을 주었다. 두 학문 모두 문자 자료에서 많 은 발달을 이루었다. 문자 자료들이 모두 땅에서 출토되고 있었기 때문에 고전학을 모델로 하 였지만 고고학에 의존을 하였다. 이집트와 아시리아학의 발달에는 성서 연구과 관련되어 있다 는 점에서 지원을 받아 성장하게 되었지만 학문이 전문화되면서 한계들을 극복하려고 하였다.

이집트학과 아시리아학에 내재된 또 다른 편견은 이집트와 이라크의 이슬람 시대에 대한 연 구를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문화는 이슬람 문화보 다 우월한 것이라는 생각이 광범위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고학은 북아프리카와 서아시아에 서 식민화에 대한 유럽인들의 생각을 반영해 주며 간접적인 지원을 하였던 것이다.

6. 기타 초기 고고학적 행위들

중국 송나라 때에는 식자층 사이에서 유학이 부활하면서 고대의 진귀한 유물들을 연구하는 오랜 전통이 강화되었다. 이러한 관심은 황하의 흐름이 전도되면서 상나라의 청동 그릇들이 우연하게 출토되어 커지기도 하였다. 송나라 학자들은 고대 청동 및 옥 제품, 특히 명문을 가 지고 있는 유물들에 대한 상세한 서술과 연구들을 간행하기 시작하였다. 송나라 학자 조명성 은 고대유물에 대한 책의 서문에서, 남아 있는 고전 저술들에서 연대, 지리, 공식 명칭, 계보 와 같은 사항들을 고대의 그릇에서 나타나는 기록들로 검증할 때 두 자료는 30~40%정도 상 충됨을 주목하였으며, 이러한 근거에서 남아 있는 고전 저술들이 잘못된 것이라는 결론을 내 리게 되었다. 송나라 이후 이 같은 호고주의적 연구는 크게 쇠락하였지만 청나라 초에 다시 부활하였다. 고염무, 염약거와 같은 학자들은 문헌 비판에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 이들의 주된 관심은 고대 저술들의 진실성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청동이나 돌에 새겨진 고대의 명문들은 초기의 사전들에 나와 있는 글자의 의미를 입증하고 바로잡는 데 쓰였다. 또한 고증학파의 학 자들은 1898년부터 안양에서 출토되기 시작한 상나라 복골에 쓰인 문자를 해독하기 위한 노 력도 하였다. 이러한 연구들이 현대 중국에서 고고학의 발달에 토착적 토대를 제공하였다고 해석되기도 하지만, 이러한 연구들은 단지 과거의 사료를 평가하고 검증하는 과정을 통해 역 사적 진실규명과 그 관련성을 추구하는 역사학 한 가지에 머물렀다. 중국학자들이 고대유물을 열정적으로 연구하였다고는 하지만 발굴을 수행하는 데는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20세기 까지도 무덤을 범하는 것이 알려지만 처벌 받았으며 모든 형태의 발굴은 땅에 흐르는 초자연 적인 정기를 해치는 일이라 믿어졌다.

일본에서는 도쿠가와시대 동안 사무라이 학자들과 상인들이 고대 유물들을 수집하고 기술하 였다. 신유학자들 중 아라이 하쿠세키는 돌화살촉이 초자연적인 힘으로 만들어진 아니라 옛날 사람들이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국학운동을 따랐던 사람들은 일본에 끼친 외국의 영향을 배제하고자 하였으며 신도의 중요성과 왕권 회복을 꾀하였다. 이들은 8세기에 편찬된

<고사기>와 <일본서기>와 같은 문헌자료 연구를 독려하였다. 이들은 모호한 자료나 단지 상상 에 의존하여 많은 고분들은 특정 초기 왕들의 무덤이었음을 주장하였으며, 그것들을 보존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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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하려 하였다. 이런 식으로 경관을 통하여 불교 사원보다 신도 사원들이 우월함과 도쿠가 와 봉건제에 비해 중앙집권화환 정부의 우수성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집 트, 아시리아, 중국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과거 유물에 대한 관심은 문헌자료로부터 시작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인도에서는 식민시대 이전에는 학문이나 호고주의는 발달하지 못했다. 인도의 학문 은 다른 분야들에서는 지적 성취들을 이룩하였지만 정치사에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는 아마도 힌두교와 카스트제도에서 상위의 성직자와 전사 집단들 사이에 사회규율적인 권 력의 분할로 생활과 역사적 사건들의 의미에 대한 이해가 더 우주론적인 영역의 일부가 되었 기 때문일 것이다.

7. 결론

처음에 체계적으로 발달한 고고학은 역사학적인 것이었다. 과거의 물질문화에 대한 관심은 보편적이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기능적인 면에 대해 연구를 하여 과거에 대해 알아보려는 시 도는 보편적이지 않았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조각상들과 건축물들이 연구가 되기는 하였지만 그 기능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또한 이집트와 아시리아학은 두 학문 모두 종교적인 기록에서 시작되었으나 그 발달이 계속 이어지지 못하였다. 그리고 사회적인 상황으로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이슬람이 연구되지 못하였다. 또한 일본에서는 고대 유물의 연구들이 정치적으로 연관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고고학을 연구하는데 있어 고고 자료는 사회적 맥락을 포함하지 않고는 연구 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전고고학은 후일 유럽 문화를 상류층의 시각에서 정의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왜냐 하면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훌륭한 석조상들이나 건축물의 파편들을 사고 모으면서 이러한 것 들이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데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20세기 이전 중국과 일본 사회에서 보이는 강한 연속성과는 대조를 이루며, 고대의 문자 문명에 대한 주된 정보원으로서 고고학이 발달하는 계기가 되었다.

고전학, 이집트학, 아시리아학은 한 번 형성된 뒤 1960년대까지도 근본적인 변화를 겪지 않 고 그 형태가 그대로 유지되었다. 각 학문은 하나 이상의 고대 문명의 상류층 문화에 여전히 초점을 맞추었으며 미술품과 기념물 건축에 대한 고찰로 고대 문헌 연구를 보완하였다. 이들 학문에서 고고학의 주된 역할은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이 해석하게 될 자료를 제공하는 일이었 다. 이는 고고학에게 금석학, 고대 문학, 역사 및 미술사 연구에 비해 고고학은 열등한 역할만 을 수행함을 의미한다.

2장은 앞 부분에 ‘모든 사람은 각자의 방식대로 그리스인이 되어야 한다. 어쨌든 반드시 그 리스인이 되어야 한다!’라는 문구가 등장한다. 이 글은 고전고고학과 문헌고고학의 기원을 말 해주는 듯 하다. 각자의 방식대로 그리스인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반드시 그리스인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인은 반드시 되어야 하지만 그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는 것이다. 즉 마지막 에는 하나로 통일되지만 그 하나가 되기까지는 기원도 다르고 발달된 과정도 다르다는 것이 다. 고전고고학과 문헌고고학이 바로 그러하다.

고전고고학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고대 유존물에 대한 단순한 관심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다. 반면에 이집트와 아시리아학은 문헌고고학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처음부터 문헌자료에 집중을 한 것은 아니다. 두 학문 모두 종교적인 관심에서 발달한 것인데 이집트는 나폴레옹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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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적인 행위에서부터 연구가 시작이 되었고 아시리아학은 유럽인들의 관심에서 비롯된 명문 해독에서 시작되었다. 괴테의 문장은 바로 이러한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의 완성체 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많은 방식들이 존재한다는 것, 그 배경에는 역시 사회적 맥락이 존재한 다는 것이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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