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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冶와 그 詩에 대한 중국 문인의 인식과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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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李冶와 그 詩에 대한 중국 문인의 인식과 평가*

90)

朴 惠 敬**

❙국문초록❙

본 논문은 역대 문인들의 詩話를 통하여 李冶와 그 시에 대한 인식과 평가를 살펴보았다. 李冶의 시는 최초 로 高仲武의 󰡔中興間氣集󰡕에 간단한 평론과 함께 6수가 수록되었으며 이 책의 비평 관점은 이후 문인들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문인들에 의해 기록된 일화 속에서 李冶는 재능을 지녔으나 행실이 좋지 못한 여성 으로 그려졌으며 그것은 ‘蕩’이라는 시 비평에도 영향을 미쳤다. 明末에 이르러 처음으로 “大曆正音”이라는 中 唐 시의 변화의 측면에서 李冶의 시를 바라보는 평론이 나타났다. 李冶는 大曆 시단의 문인들처럼 五言을 잘 지었으며 禮敎에 얽매이지 않고 이성에 대한 그리움이나 자신의 주관적 사상을 유창한 詩想과 言語로 표현하 였다. 李冶의 시는 大曆 시기 내향적이며 형식을 중시하는 변화된 시풍을 반영한다. 이것이 李冶와 그 시에 대한 역대 문인들의 긍·부정의 이중적인 인식에도 불구하고 李冶의 시가 가치를 인정받고 전해질 수 있는 이 유가 되었다.

[주제어] 李冶, 李冶 詩, 李冶 詩話, 蕩, 大曆正音

❘목 차❘

Ⅰ. 서 론

Ⅱ. 李冶 이미지의 형성

Ⅲ. 李冶 詩에 대한 평가

Ⅳ. 결 론

Ⅰ. 서 론

李冶는 中唐의 女冠 詩人으로 󰡔全唐詩󰡕에

19

수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

1) 李冶와 관련된 正史의 기록은

* 본 논문은 2018년 단국대학교 대학연구비 지원으로 수행된 연구임.

**단국대학교 중어중문학과 연구전담 조교수 / zheneugean@hanmail.net

1) 󰡔全唐詩󰡕에 수록된 李冶 小傳에는 李冶()는 자가 季蘭이며, 女冠으로 吳興 사람이다. 시가 16수 남아있다(李冶(一作裕), 字季蘭, 女冠也, 吳興人. 存詩十六首).”라고 하였다. 그런데 실제 󰡔全唐詩󰡕에는 작자가 李冶로 표기된 시가 卷80517,

(2)

찾아볼 수 없으며 그 외 행적을 추정할 만한 기록도 얼마 남아 있지 않아 李冶를 비롯하여 주변인의 시나 그녀와 관련된 일화들을 통하여 그 행적을 추정해 볼 수 있을 뿐이다

.

이 때문에 李冶 시에 대한 詩話들은 현존하는 최초의 서술인 󰡔中興間氣集󰡕의 관점과 평가를 답습하는 경향을 보인다

.

中唐 사람 高仲武가 서술 한 󰡔中興間氣集󰡕 속 李冶에 대한 간략한 인물 품평과 시에 대한 평가는 이후 중국 문인들에 의해 거듭 인용 되었다

.

이외에도 中

·

晩唐 시기 편찬된 것으로 보이는 󰡔玉堂閑話󰡕과 󰡔奉天錄󰡕에 서술된 李冶와 관련된 일 화들도 이후 李冶의 이미지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

明末 이전까지 李冶에 관한 詩話들은 󰡔中興間氣 集󰡕의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明末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문학사의 측면에서 李冶의 시를 비평하기 시작했다

.

본 논문의 목적은 李冶라는 시인이 중국 문인들에게 어떻게 수용되었으며 李冶에 대한 그들의 인식이 그 녀의 시에 대한 평가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탐구하는 것이다

.

이를 위하여

2

장에서는 위 세 서적 속에 서 李冶가 어떻게 서술되었으며 그 속에 반영된 李冶와 그 시에 대한 당시 문인들의 인식 및 평가를 분석해 보겠다

. 3

장에서는 李冶에 대한 인물 품평이 그녀의 시에 대한 평가와 어떠한 연관성을 가지는지 李冶 시의 분석을 통하여 추론해보겠다

.

이상의 과정을 통해 李冶의 시가 어떻게 유구한 역사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그 심미적 가치를 인정받아 현재까지 전해질 수 있었는지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

Ⅱ. 李冶 이미지의 형성

李冶의 생몰 시기는 참고할만한 자료의 부족으로 논란이 있으나 대략

735

년경에 출생하여

784

년 사망하 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

2) 최초로 李冶의 시를 수록하고 평론한 서적은 中

·

晩唐 사람 高仲武가 편찬한 시선 집 󰡔中興間氣集󰡕이다

.

이 외에 唐代 일사를 수록한 󰡔玉堂閑談󰡕과 󰡔奉天錄󰡕도 李冶의 이미지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

이 서적들에는 李冶의 유년 시절과 여도사 시절

,

사망과 관련된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

그런 데 이 서적들에 기록된 것이 사실임을 확인할 만한 교차 자료는 충분하지 않다

.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본고에 서 이 일화들을 서술하고 분석하는 이유는 中唐 이후 李冶의 시에 대하여 서술한 사람들이 위 세 서적의 기 록을 인용하면서 유사한 수용 태도를 견지했기 때문이다

.

즉 李冶는 중국 문인들에 의해 한 명의 여성 시인 으로서의 이미지가 만들어지고 전달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

따라서 그들이 李冶와 그 시를 어떻게 해석하고 인식하느냐를 살펴보기 위하여 위 서적들 속 李冶에 관한 서술을 살펴보는 것은 유용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8882, 19수 수록되어 있다.

2)李冶의 생몰 년도에 대해서는 709년 출생설과 735년 전후설이 있다. 709년 설은 󰡔唐才子傳󰡕의 천보 년간에 현종이 그 시재 를 듣고 궁으로 불러들였다(天寶间, 玄宗闻其诗才, 诏赴阙).”와 李冶의 「황명으로 입궁하며 광릉 지인들과 이별하며 남김( 命追入留别廣陵故人)」을 근거로 한다. 735년 설은 입궁 시기를 大曆 년간으로 본다. 본고에서는 735년 전후설을 따랐다. 몰 시기에 대해서는 Ⅱ-2에서 더 서술하였다.

(3)

1. 󰡔中興間氣集󰡕 – 李冶에 대한 최초의 기록

󰡔中興間氣集󰡕에는 李冶의 「湖上臥病喜陸鴻漸至」

·

「寄校書七兄」

·

「寄朱放」

·

「送韓揆之江西」

·

「道意寄崔 侍郎」

·

「賦得三峽流泉歌」 총

6

수와 함께 아래와 같은 李冶와 그 시에 대한 평론이 서술되어 있다

.

高仲武는 序에서 이 책의 選詩 범위를

至德 원년

(756

)

에서 大曆 말년

(779

)

까지 작가 수천 명 중

26

명을 선별하 였다

(

起自至德元年首

,

終於大歷末年

.

作者數千

,

選者二十六人

).”

라고 밝히고 있다

.

즉 安史의 난이 발발 한 이듬해부터 약

24

년 사이의 기간인 中唐 초기의 작품 중에서

130

여 수를 선발하여 수록한 것인데 이 시기

20

대 초반에서

40

대 중반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李冶가 이

26

명의 시인 속에 포함된 것이다

.

󰡔中興間氣集󰡕 卷下

선비에게는 지켜야 할 百行이 있으나 여자에게는 지켜야 할 것이 四德 뿐이지만 계란은 그렇지 못 했다. 형상과 기운이 여성스럽고(웅건하고) 시의 역시 호탕하였다. 포조 이래로는 이러한 인물들이 드 물었다. “먼 물 위엔 신선의 배가 떠가고, 찬 별은 사신의 수레를 따르리”와 같은 시구는 오언의 아름 다운 경지이다. 위로 반첩여에는 모자라지만 아래로 한영과 비교하면 넉넉하다. 만년만 아니라면 역시 한 명의 준수한 노년의 여성일 것이다(士有百行, 女唯四德. 季蘭則不然. 形氣既雌, 詩意亦蕩. 自鮑昭以 下, 罕有其倫. 如“遠水浮仙棹, 寒星伴使車.” 盖五言之佳境也. 上倣班姬則不足, 下比韓英則有餘, 不以遲 暮, 亦一俊嫗).3)

위에 인용한 것은 󰡔四庫全書󰡕에 수록된 嘉興 沈氏가 소장했던 明本 󰡔中興間氣集󰡕인데 「中興間氣集校文」4) 에서는 이 판본을 아래와 같이 교정하였다

.

李季蘭 밑에 ‘六首’ 두 자가 있고 ‘然’ 밑에 ‘也’자가 있다. ‘雌’가 ‘雄’으로 되어 있다. ‘罕有其倫’ 아래

“嘗與諸賢集烏程縣開元寺, 知河間劉長卿有陰重之疾, 乃誚之曰: “山氣日夕佳.” 長卿對曰: “衆鳥欣有託.”, 舉座大笑. 論者兩美之.” 마흔 아홉 자가 있다(李季蘭下有六首二字, 然下有也字. 雌作雄. 罕有其倫句下 有四十九字云, “嘗與諸賢集烏程縣開元寺, 知河間劉長卿有陰重之疾, 乃誚之曰: “山氣日夕佳.” 長卿對曰:

“衆鳥欣有託.”, 舉座大笑. 論者兩美之).”

󰡔中興間氣集󰡕의 판본들 사이 가장 큰 차이는

形氣既雌

(

)”·

劉長卿과의 일화의 수록 여부

·‘

自鮑

·

班 姬

·

韓英

이상 세 부분이다

.

5) 이 중

形氣既雌

(

)”

形氣

形器

로 한 판본도 있는데 전자의 경우 李冶

3)본고에서 인용한 것은 󰡔四庫全書󰡕에 수록된 嘉興沈氏藏明本 󰡔中興間氣集󰡕이다. 󰡔唐人選唐詩新編󰡕에 따르면 󰡔中興間氣集󰡕

중 현존하는 판본은 毛氏汲古閣影宋鈔本·明萬曆本·明嘉靖本·汲古閣刻 󰡔唐人選唐詩󰡕本 등이 있다. 이중 嘉靖本과 萬曆本 는 거의 동일하다. 󰡔唐詩紀事󰡕·󰡔全唐詩話󰡕·󰡔唐音統籤󰡕·󰡔唐才子傳󰡕 등의 서적에서 모두 󰡔中興間氣集󰡕의 李季蘭의 평어 를 수록하고 있는데 판본의 차이에 따라 해석의 차이도 존재한다. 그 중 形氣既雌()’의 경우 影宋鈔本·󰡔唐詩紀事󰡕 卷 78·󰡔唐音統籤󰡕 卷922·庚籤三宮閨詩之六에서는 으로, 嘉靖本·汲本·󰡔全唐詩話󰡕 卷6에서는 로 표기하고 있다.

󰡔四庫全書󰡕에 수록된 汲本에는 로 표기되어 있으며 劉長卿과의 開元寺 일화도 수록되어 있지 않다. 4) 󰡔四庫全書󰡕, 󰡔中興間氣集󰡕 卷上.

(4)

의 외형과 언행을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하지만 후자의 경우 외형에 대한 묘사로만 해석한다

.

의 차이도 이후 해석의 차이를 발생시킨다

. “

形氣旣雌

일 경우 李冶의 외모와 분위기가 여성스럽고 아름 다웠음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하게 되지만

,

6)

形氣旣雄

일 경우 李冶의 人品을 비롯하여 詩品이

와 상대되 는

’,

즉 남성적인 것으로 해석된다

.

이에 대하여 周蕾는

形氣旣雄

이 합당하며 이것이

李冶의 재능과 정 서가 창쾌하고 대범하였으며 글의 기운이 맑고 소탈하였다는 것 외에도 시적 재능에 대한 자신감과 문사들과 의 교우 및 호방하고 소탈하며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언어와 행동거지와도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

7)고 보았다

.

陳文華도 李冶의 기질적 특징을 의미하는

으로 해석하였으며 黃芸珠는

이 李 冶의 외형과 기질이 매우 남성적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

8)

󰡔中興間氣集󰡕의 기록은 무엇보다 먼저 그 글의 구성 논리에 초점을 두어 살펴볼 필요가 있다

.

高仲武는 李冶와 그 시를 서술하기에 앞서

士有百行

,

女唯四德

.”

를 전제하였다

. “

四德

은 󰡔周禮󰡕 속 부녀자 배워야 하 는 네 가지 덕행이다

.

9) 선비들은 지켜야 할 행동 준칙들이 백 가지가 넘으나 여성들은 네 가지의 덕행만을 갖추면 된다는 전제는 유가적 여성 인식을 전제하고 있으며 李冶가 儒家의 여성상에서 완전히 벗어난 인물임 을 강조한다

. “

形氣既雌

(

),

詩意亦蕩

은 서술 구조상

形氣

詩意

와 대응하고

(

)”

亦蕩

과 대응 한다

.

形氣

는 李冶의 人品을 말하고

詩意

는 詩品을 말한 것으로

(

)”

의 기질이 詩意의

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서술한 것이다

.

10) 전형성에서 벗어난 여성을 묘사한 것이라면 이것은

보다는

으로 묘사 되는 것이 논리적으로 더 적합하며 뒤이어 오는

亦蕩

과도 호응을 이룰 수 있다

.

요컨에 󰡔中興間氣集󰡕의 李冶에 대한 최초의 서술은 그녀가 전통적인 여성상에서 벗어난 남성성을 가진 인 물이었으며 그러한 성향이 그녀의 작품에도 반영되었다고 평가한 것이다

.

여기에는 일정 정도 비판적 인식이 내포되어 있으나 李冶가

26

인 중에 포함되어 그녀의 작품

6

수가 수록되었다는 것은 이러한 특수성이 시인으 로서의 개성적인 풍격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5) “鮑照·班姬·韓英은 판본에 따라 鮑令暉나 鮑暉·班婕妤·韓蘭英 등으로 표기된 것도 있다. 班婕妤는 중국 고대 여성 시 인을 대표하는 인물로 여성 시 비평의 표준으로 자주 등장 이름이므로 李冶 시의 특정한 풍격을 비교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 . 鍾嶸은 󰡔詩品󰡕에서 南北朝 宋·齊 시기에 시를 잘 짓는 인물로 鮑令暉와 韓英 두 사람을 들었다. 高仲武가 李冶와 견준 인물들이 鮑照를 제외하고는 모두 여성이라는 점을 미루어 鮑令暉의 오기로 보는 것이 적합할 듯하다.

6) 󰡔唐才子傳󰡕과 󰡔全唐詩󰡕는 모두 로 표기하고 이를 요염한 여성의 모습으로 해석하였다.

7) “‘形氣既雄之評除於季蘭才情暢達·詞氣清灑相關外, 還明顯與其自恃詩才·交游文士及豪放灑脫·自由不羈的言談舉止密不可

.”, 周蕾, 「󰡔中興間氣集󰡕李季蘭評語疏證」, 󰡔中國詩歌硏究󰡕5, 2008, 225.

8) 陳文華, 󰡔夢爲蝴蝶也尋花-李冶, 薛濤, 魚玄機詩注評󰡕, 上海: 上海古籍出版社, 2007, 4; 黃芸珠, 「唐代女性與文學的相關性 硏究」, 陝西師範大學 博士學位論文, 2003, 81.

9) 󰡔周禮·天官·九嬪󰡕, “掌婦學之法, 以敎九御婦德·婦言·婦容·婦功.”

10) “不以遲暮, 亦一俊嫗의 해석도 다양하여 나이가 들어서도 외모가 준수했다’·‘만년에 변절하여 주차에게 헌시한 것만 아니 라면 뛰어난 여성이었다나 앞서 비교한 班婕妤나 韓英과 연관시켜 활동 시기의 선후로 기준을 삼을 수 없으니 李冶 또한 빼어난 여성 시인이다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5)

2. 李冶의 詩才에 대한 이중적 시선

(1) 詩才와 失行婦人

李冶와 관련된 일화에는 李冶와 그녀의 시에 대한 수용자들의 인식과 가치 평가가 내포되어 있다

.

李冶의 유년 시절과 관련된 일화는 五代 王仁裕이 편찬한 󰡔玉堂閑話󰡕에 최초로 기록되어 있다

.

이 책은 宋代에 이미 전해지지 않았다고 하나 󰡔太平廣記󰡕에 부분적으로 수록되어 그 일부를 살펴볼 수 있다

.

이 책에서는 李冶의 자를

秀蘭

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季蘭

의 오기이다

.

󰡔太平廣記󰡕, 卷273, 婦人四, 李秀蘭

이계란은 여자이지만 재주로 이름을 날렸다. 대여섯 살에 정원에서 그 아버지에게 안겨 「장미」라는 시를 지어 읊기를 “시간이 지나도 받침을 대주지 않으니 심사가 이리저리 뒤틀렸구나.”라고 하였다.11) 아비가 이에 성을 내며 “이 딸아이는 장래 글재주는 풍부하겠지만 행실이 좋지 않은 여인이 되겠구나.”

라고 하였다. 종래에는 그 말대로 되었다(李秀蘭以女子有才名, 初五六歲時, 其父抱於庭, 作詩詠薔薇. 其末句云: “經時未架却, 心緒亂縱横.” 父恚曰: “此女子將來富有文章, 然必爲失行婦人矣.” 竟如其言. 出

󰡔玉堂閑話󰡕).

󰡔唐詩紀事󰡕도 이 이야기를 그대로 인용하였고 󰡔唐才子傳󰡕에 수록된 李冶 傳도

此女聰黠非常

이라는 구 절을 제외하고는 거의 동일하다

.

12)이 일화는 전형적인

詩讖

의 성격을 띤다

.

李冶의 타고난 시적 재능을 신 비화하면서도 성장 후 李冶의 행위에 대한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인식이 내포되어 있다

.

위 시는 李冶의 천부 적 재능을 묘사하면서도

해악한 재능

이라는 부정적인 인식도 내포한다

.

장미는 李冶를 은유하는데 아름다우 나 제멋대로 자라버린 넝쿨은 禮敎에서 벗어난 자유분방함을 은유한다

.

이 시를 李冶의 부친은 李冶의 미래 의 운명

,

즉 禮敎에서 벗어난 방종한 여성으로 성장할 징조로 해석하였고 서술자는 이에 대하여

종래에는 그 말대로 되었다

.”

라는 말로 李冶에 대한 평을 대신하였다

.

여기에는 여성 시인의

시적 재능

에 대한 긍정과 부정이라는 이중적 인식이 반영되어 있다

.

이것은

女唯四德

.

季蘭則不然

.”

과 동일한 맥락을 형성하며

失行 婦人

라는 李冶에 대한 인식의 근거가 되었다

.

(2) 詩豪

󰡔太平廣記󰡕에 수록된 󰡔玉堂閑話󰡕에는 李冶와 劉長卿을 비롯한 당시 문인들의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

宋代 陳振孫의 󰡔直齋書錄解題󰡕 卷

19

13)과 宋末 馬端臨의 󰡔文獻通考󰡕

,

243,

經籍考

70

14)에는 󰡔中興間文集󰡕에 두

11) 이 시에 대한 해석은 다소 차이가 있다. “시렁을 넘지 못하다책상에서 물러나지 않았다등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장미 를 보고 읊은 어린아이의 시라는 전제가 있으므로 정원의 장미 넝쿨을 보고 그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해석하였다. 12) “始年六歲時, 作薔薇詩云: ‘經時不架却, 心緒亂縱横.’ 其父見曰:此女聰黠非常, 恐爲失行婦人.”

13) “李季蘭集一卷. 唐女冠. 與劉長卿同時相譏調之語, 見 󰡔中興間氣集󰡕.”

14) “李季蘭集一卷. 陳氏曰: 唐女冠. 與劉長卿同時.. 相譏調之語, 見 󰡔中興簡氣集󰡕.”

(6)

사람의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고 서술되어 있으며 元代 辛文房의 󰡔唐才子傳󰡕과 明代 鍾惺의 󰡔名媛詩歸󰡕에는 이 일화 전체가 인용되어 있다

.

반면 󰡔四庫全書󰡕에 수록된 󰡔中興間氣集󰡕 및 宋代 󰡔唐詩紀事󰡕와 󰡔唐音統籤󰡕

·

󰡔全 唐詩話󰡕에는 모두 이 일화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

계란이 일찍이 여러 선비와 오정현 개원사에 모였는데 하간의 유장경이 음질이 있는 것을 알고는

“산 기운이 저녁노을로 아름답네.”라고 하였다. 유장경이 이에 대답하기를 “새들도 기탁할 곳 있음에 기뻐하네.”라고 대답하니 좌중이 크게 웃었다. 논자들이 둘의 대화를 찬미하였다.……출전은 󰡔中興間 氣集󰡕이다(秀蘭嘗與諸賢會烏程縣開元寺. 知河間劉長卿有隂疾, 謂之曰: “山氣日夕佳.” 長卿對曰: “衆鳥 欣有託.” 舉坐大笑, 論者兩美之.……出中興間氣集).15)

일화 속 李冶가 인용한 시구는 陶淵明의 「飮酒」 제

5

수 중 제

7

구이며 劉長卿의 것은 陶淵明의 「讀山海經」

1

수 중 제

3

구이다

.

李冶는

疝氣

16)의 諧音인

山氣

에 착안하여 劉長卿을 희롱하였는데 이에 劉長卿은

날 아다니던 새들도 더불어 돌아오네

(

飛鳥相與還

)”

라는 뜻에 어울리도록

새들도 기탁할 곳이 있어 기뻐하네

(

衆 鳥欣有託

)”

로 답하였다

.

이 구절도

衆鳥

와 발음이 비슷한

重屌

로 되받아친 것이므로 좌중이 그 뜻을 간파 하고 폭소하였다

.

이 일화는 李冶의 기질과 당시 문인들과의 관계를 극적으로 드러낸다

.

李冶의 거리낌 없는 자유분방한 언행은 현재의 관점으로 보아도 비범하다고 할만하다

.

더구나 좌중이 이를 멋진 풍류로 받아들였 다는 서술을 덧붙인 것도 주목할 만하다

.

이것을 풍류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는 李冶의

女冠

이라는 특 수한 신분 때문이었을 것이다

.

李冶는

詩豪

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이 역시 󰡔唐詩紀事󰡕에 기록된

유장경은 이계란을 여자 중의 시호라고 불렀다

(

劉長卿謂季蘭爲女中詩豪

)”

17)에서 비롯된 것이다

.

이 별칭은 李冶와 그 시의 풍격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形氣旣雄

, "

詩意亦蕩

"”

과도 유사한 맥락을 형성한다

.

18) 한편

失行 婦人

와는 다소 다른 해학적 색채를 가지고 있다

.

(3) 李冶의 詩才에 대한 부정적 인식

李冶의 말년에 대해서는 󰡔中興間氣集󰡕의

不以遲暮

,

亦一俊嫗

.”

와 󰡔唐才子傳󰡕의 玄宗의 부름으로 입궁하 여 한 달여 머물다가 귀향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

19)20) 그런데 이보다 앞서 唐末 사람 趙元一이 편찬한 것으

15) 󰡔太平廣記󰡕, 273, 婦人四, 李秀蘭.

16) 우리 한의학에서는 산증이라고도 하며 고환이나 음낭이 비대해지는 병이라고 하는데 남성 생식기 관련 질환을 통칭하는 말 로도 쓰인다. 한의학대사전 편찬위원회, 󰡔한의학대사전󰡕, 도서출판 정담, 2001, ‘네이버 지식백과재인용.

17) 이 말은 宋末 計有功, 󰡔唐詩紀事󰡕 卷78에서 가장 먼저 보인다.

18) ‘의 본래 의미는 고슴도치[豪猪]를 의미하는데 이것이 걸출한 재능을 가진 사람[具有傑出才能人]’, ‘기백이나 위세가 크다 [氣魄大, 聲勢大]’로 인신되었다. 부정적으로는 의미로는 법을 따르지 않고 제멋대로 구는 사람[橫行不法的人]’이라는 의미도 있다(谷衍奎 編, 󰡔漢字原流字典󰡕, 北京: 華夏出版社, 2003, 796). 이에 따르면 詩豪는 李冶의 걸출한 시적 재능을 이름과 동시에 에 내포된 放縱不羈의 거침없는 표현과 풍격도 함께 함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李冶와 劉長卿이 서로 희롱하는 일화 등도 詩豪의 별명에 부합한다.

19) 󰡔唐才子傳󰡕 卷2, “천보 년간에 현종이 그 시재를 듣고 궁궐로 불러들여 궁중에서 한 달여를 머물게 하고 매우 넉넉하게 후 사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였다(天寶間, 玄宗聞其詩才, 詔赴闕, 留宫中月餘, 優賜甚厚, 遣歸故山).”

20) 「恩命追入留别廣陵故人」이 위작이 아니라면 시의 내용상 李冶는 이미 중년을 넘긴 것으로 보인다. 입궁 시기에 대해서는

(7)

로 알려진 󰡔奉天錄󰡕 卷

1

에는 李冶의 노년과 사망에 대한 또 다른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

21)

당시 풍류 넘치는 여인 이계란이 있었는데 주차에게 올린 시가 반역의 표현이 많아서 기록하지 않 았다. 황제가 다시 서울을 다스리게 되자 계란을 소환하여 그 죄를 묻기를 “너는 어찌하여 엄거천을 배 우지 않았느냐?”라고 하였다. (엄거천의) 시에서 말하기를 “손에 예기를 들고서 공연히 눈물만 흘리니, 마음은 명군을 생각하면서도 감히 말하지 못하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이계란을 쳐죽이도록 명하였 다(時有風情女子李季蘭, 上泚詩, 言多悖逆, 故闕而不錄. 皇帝再克京師, 召季蘭而責之, 曰: “汝何不學嚴 巨川?”有詩云: “手持禮器空垂淚, 心憶明君不敢言.” 遂令扑殺之).

󰡔唐才子傳󰡕에서도 李冶가 입궁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李冶의 「恩命追入留别廣陵故人」은 입궁설의 가 장 유력한 근거이다

.

22)그러나 󰡔薛濤李冶詩集󰡕처럼 이 시가 李冶의 작품이 아니라는 의견도 있어 입궁과 위 사망설의 정확한 진위를 가리기는 어렵다

.

23) 다만 󰡔中興間氣集󰡕에는 이 시가 수록되지 않았지만 唐末에서 五代 後蜀 사이 사람 韋縠가 편찬한 󰡔才調集󰡕 卷

10

에 수록된

9

수 중에는 포함되어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 최 소한 입궁설이 唐代 말기에 이미 존재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

24) 󰡔奉天錄󰡕의 기록에 이에 따르면 李冶는 朱 泚에게 獻詩한 일로 德宗에게 반역죄로 처형당했다

.

陳文華는 이에 대하여

한 시대의 재능있는 여성이 이처 럼 봉건 통치 집단 사이의 권력 투쟁의 희생양이 되었다니 실로 애석하다

!”

25)라며 당시 李冶를 희생시킨 정 치 집단을 비판하였다

.

그러나 사실상 󰡔奉天錄󰡕에서는 李冶가 詩才로 명성을 떨쳤으나 선비에게 요구되는 忠節을 지키지 않아 스스로 재앙을 초래하였다는 관점으로 서술되어 있다

.

26) 이 일화를 근거로

不以遲暮

,

玄宗 天寶(742~756)이라는 설과 代宗 大曆(766~779)라는 설이 있다. 그런데 󰡔中興間氣集󰡕에 수록된 시들이 756~779 년 사이의 것들이고 이때 그녀는 한참 詩名을 날리던 시기였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742~756년 입궁설은 시기적으로 다소 이르다. 李冶가 朱泚에 의해 다시 궁으로 불려가 獻詩하도록 압박을 받은 시기가 李冶가 처음 장안으로 초청을 받은 지 30 여 년이나 지난 후라고 보는 것도 무리가 있다. 따라서 朱泚가 長安을 점령하고 국호를 漢으로 바꿔 황제를 참칭한 것이 783년의 일이므로 李冶의 첫 입궁 시기도 이때에서 멀지 않은 대략 大曆(766~779) 말기로 보는 것이 적당할 것으로 보 인다.

21) 󰡔奉天錄󰡕은 朱泚의 반란으로 德宗이 피난을 떠났던 奉天 시기의 일을 기록한 현존하는 유일한 서적으로 당시 조정과 신하 들의 일화뿐 아니라 사회의 풍속이나 제도 등을 기록하고 있어 사료로서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중 에는 사실과 다른 일이나 귀신과 관련된 괴담도 섞여 있어 그 기록들이 사실이라고 신뢰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책은 유 일하게 李冶의 사망과 관련된 일화를 수록하였기 때문에 이후 논자들에게 인용되었다.

22) “별 재주 없이 시름시름 앓는 우둔한 몸이건만, 헛된 이름이 구중 궁월에 닿을 줄은 몰랐네. 관을 털어 백발 위에 얹는 것이

우세스럽고, 거울을 닦아 여윈 얼굴 매만짐이 부끄럽네. 마음은 북궐로 달리며 향기론 풀을 따라가고, 눈으로 남산을 좇으며 옛 봉우리를 바라보네, 계수나무는 재야의 나그네를 머무르게 하지 못하나니, 모래톱 갈매기는 포구를 나서며 기약 없는 재 회를 말하노라(無才多病分龍鍾, 不料虚名逹九重. 仰愧彈冠上華髮, 多慙拂鏡理衰容. 馳心北闕隨芳草, 極目南山望舊峰. 桂樹 不能留野客, 沙鷗出浦謾相逢).”

23) 󰡔欽定四库全书󰡕, 集部八, 󰡔薛濤李冶詩集󰡕, 「提要」, “冶集盡詩十四首. 然其中「恩命追入留别唐陵故人」一首. 詳其詞意, 不類 冶作.”

24) 韋縠의 󰡔才調集󰡕 卷10에는 「從蕭叔子聴彈琴賦得三峽流泉歌」·「送韓揆之江西」·「相思怨」·「感興」·「恩命追入留别廣陵故 人」·「八至」·「送閻二十六赴剡縣」·「寄朱放」·「得閻伯鈞書」 총 9수가 수록되어있다.

25) 陳文華는 󰡔四庫全書提要辯證󰡕의 夫朱泚之亂, 帝且不能守社稷, 委其臣妾以去, 今季蘭以一女子, 屈於凶威, 指斥本朝, 蓋非得 , 德宗不諒其情, 輒令撲殺 封建帝王之凶惡, 於此可見.”의 봉건 제왕의 횡포라는 견해에 동감하면서 一代才女, 就這樣成了 封建統治集團閒權力鬥爭的犧牲品,實在令人痛惜!”라고 하였다. 陳文華, 앞의 책, 2007, 3.

26) 󰡔奉天錄󰡕 卷1에는 위에서 인용한 단락 바로 뒤에 朱泚를 죽여 신하로서의 절개를 지키려다 도리어 살해당한 殷秀實이 죽어

(8)

亦一俊嫗

.”

만년의 失節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녀도 뛰어난 여인이라고 할 수 있다

라는 비판적 시각이 내포된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

27)

이상과 같이 李冶는

失行婦

로 예견되고 기록되었으며 평가되었다

.

그녀는 시적 재능을 타고났으나 四德 을 실천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선비들에게 요구되는 百行에는 전혀 미치지 못한 인물로 그려졌다

.

그녀는 자 유분방하였으나 경박하였고 이 때문에 비극적인 노년을 맞이했다는 것이 오랜 시간을 거쳐 만들어진 李冶의 이미지였다

.

Ⅲ. 李冶 詩에 대한 평가

李冶의 人品과 詩品을 연관시킨 비평인

詩意亦蕩

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 “

失行婦人

로 인식된 李冶 의 작품은 어떻게 그 심미적 가치를 인정받았을 수 있었을까

?

본 장에서는 李冶의 시를 통해 이 질문에 실마 리를 찾아보도록 하겠다

.

1. “蕩”에 나타난 李冶 시에 대한 인식과 수용

明末 胡震亨 전까지 李冶에 대한 詩話들은 󰡔中興間氣集󰡕을 그대로 인용하거나 약간의 변형만 가한 것이 전부였으므로

詩意亦蕩

의 인식과 평가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 “

은 본래는 물 이름이었는데 이것이 후 에

그릇을 물로 씻어내다

라는 의미의

의 간자로 쓰이게 되었으며

요동치다

[

搖動

]’·‘

소탕하다

[

掃蕩

]’·‘

얽 매임 없이 방탕하다

[

放縱不羈

]’

라는 뜻으로 확대되었다

.

28)高仲武는 이

詩意

를 묘사하는 평어로 사용 하였다

.

詩意란 사전상의 의미로

시의 생각과 정서

”·“

시의 내용과 의경

”·“

시 속 미적 감동을 주는 의경

”·

작시의 방법

등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

29)

을 시의 정서

[

詩情

]

에 대입하면 요동치는 시인의 정서이며 창 작 과정 중의 구상과 표현에 대입한다면 막힘없이 흘러나오는 詩想의 전개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

또 시 의 언어적 표현에 대입한다면 마치 물로 흉금을 씻어내어 흘러나오는 듯한 막힘없이 유창한 표현으로도 해석 할 수 있다

.

그런데

이 인물이나 시를 비평하는 말로 쓰일 때에는 긍정과 부정의 이중적 가치 판단도 포 함하기 때문에 해석에 어려움이 있다

.

수용자가 李冶와 그 시를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보는가에 따라

에 대한 해석도 차이가 발생한다

. “

은 긍정적인 의미로는

浩蕩

으로 해석될 수 있으나 부정적인 의미로는

淫蕩

放蕩

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

서도 충신으로 칭송됨을 기록하고 있다. 李冶와 殷秀實을 변절자와 절개를 지킨 충신으로 대비시킨 것이므로 陳文華의 견해 와는 상반된다.

27) 何文煥(), 김규선(), 󰡔歷代詩話󰡕, 소명출판, 2013, 403. 28) 谷衍奎 編, 󰡔漢字原流字典󰡕, 北京, 華夏出版社, 429.

29) 漢語大詞典編輯委員會 編纂, 󰡔漢語大詞典󰡕, 上海: 漢語大詞典出版社, 2002, 6570.

(9)

陳文華는 高仲武가 말한

이라는 비평을

남권 사회의 도덕적인 기준에 따라

자로 질책한 것

이라면서

내용상의 음탕함

감정상의 분방함

으로 해석하였다

.

30)그렇다면 이 음탕함과 분방함 무엇을 말하 는 것일까

?

李冶의 시의 주요한 주제는 그녀의 시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相思

”,

곧 이성에 대한 그리움이며

󰡔全唐詩󰡕에 수록된 그녀의

19

수의 시 중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

그리움의 대상은 閻士和처럼 연인관계로 보 이는 인물도 있고 아래 「寄朱放」의 朱放처럼 친구와 연인 사이의 인물도 있다

.

31)「相思怨」

·

「感興」

·

「偶居」

·

「明月夜留别」은 모두 애끓는 그리움의 노래이다

. “

남들은 바다가 깊다고 하지만

,

서로를 향한 그리움에 반도 못되리

(

人道海水深

,

不抵相思半

).”(

「相思怨」

)

옥 베개는 오래도록 흐르는 눈물만 알뿐이오

,

은 등불은 하 릴없이 잠들지 못한 시간만 비추노라

(

玉枕只知長下淚

,

銀燈空照不眠時

).”(

「感興」

)·“

떠난 사람 말이 없고 달 도 말이 없지만

,

밝은 달에겐 빛이 있고 사람에겐 정이 있어라

.

이별 후 그리운 사람의 정은 마치 달빛처럼

,

구름 사이로 물 위에서 층층 성곽까지 비추듯 넓게 퍼져 있네

(

離人無語月無聲

,

明月有光人有情

.

别後相思人 似月

,

雲間水上到層城

).”(

「明月夜留别」

)

와 같이 이성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

이 와 같은 감정의 솔직한 표출은 樂府民歌 속 남편을 그리워하는 아낙네의 노래라면 인간의 성정에서 비롯된 지극한 思婦의 정으로 평가되지만 출가한 여도사인 李冶의 경우는 비난의 이유가 될 수 있었다

.

寄朱放 주방에게 부침

望水試登山, 물을 보고자 산에 올라보나니 山髙湖又濶. 산은 높고 호수는 넓기만 하네. 相思無曉夕, 그리움은 아침과 저녁이 없고 相望經年月. 기다림은 한 해와 달을 넘기네. 鬱鬱山木榮, 울울히 산 위 나무가 우거지고 綿綿野花發. 면면히 들판의 꽃이 피어나네. 别後無限情, 이별 뒤에도 한없던 이네 정을 相逢一時說. 다시 만나면 단번에 털어 놓으리라.

鍾惺은 󰡔名媛詩歸󰡕 卷

11

에서 위 시를

으로 해석하였다

.

32)

30) “高氏在肯定季蘭詩歌成就的同時, 又按男權社會之道德標準以字責之. 高氏所謂之”, 即可理解為内容淫蕩, 也可理解為感 情狂放.” 陳文華, 󰡔夢爲蝴蝶也尋花 – 李冶, 薛濤, 魚玄機詩注評󰡕, 上海: 上海古籍出版社, 2007, 4.

31) 閻士和의 자는 伯均으로 中唐 유명시인 李嘉祐의 內弟라는 설이 있다. 「送閻二十六赴剡縣」·「得閻伯均書」에 그 이름이 등 장한다.

32) 鍾惺은 明代 竟陵派의 대표로 당시 擬古主義 문풍을 반대하고 性靈강조했다. 竟陵派는 公安派의 性靈說의 영향을 받았는 데 성령설은 嚴羽의 󰡔滄浪詩話󰡕를 이론의 바탕으로 삼았다. 이 서적이 명말 출판업계에 만연하였던 유명인의 이름을 사칭 하여 상업적 목적으로 만들어진 책이라는 의혹이 󰡔四庫全書叢目提要󰡕에서도 제기되고 있다. 明末에는 경제적 번영으로 오 락을 위한 문학에 대한 수요가 늘면서 출판업이 부흥하였고 이러한 분위기에 따라 그간 소외되었던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발굴하여 총집으로 출판하는 것이 유행했다고 한다. 󰡔名媛詩歸󰡕는 󰡔中興間氣集󰡕의 내용 중 士有百行, 女唯四德, 季蘭則不 .”이라는 부정적인 평가는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인용하였으며 󰡔玉堂詩話󰡕 속 유년기 일화와 劉長卿과의 농담·“女中詩 도 모두 인용하였다. 「感興」·「得閻伯鈞書」를 제외한 李冶 시 14수를 수록하고 있다.

(10)

다른 사람들은 단지 탕[蕩]함만 알고 그 쌓아둠[蓄]은 알지 못한다. 쌓아둠이 깊으므로 蕩하지 않으 려 하여도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무릇 부녀 중 정이 무거운 사람은 다소 완곡하게 애두르는데 즉 ‘蕩’ 자는 그 특징을 정확하게 표현한 것이다(탕자도 그와 같은 이치다)(他人只知其蕩, 而不知其蓄. 所蓄旣 深, 欲其不蕩, 不可得也. 凡婦人情重者, 稍多宛轉, 則蕩字中之也).

그는

과 대비시켜 정서의 축척

[

]

이 씻어냄

[

]

의 원인이 되었다고 해석하고 있다

.

鍾惺은 또

한꺼번에 털어놨으나 그 속에 원망하고 나무라는 뜻이 있는 듯하다

.

정서가 예민하였기에 염발할 수 있었고 신속한 기가 족히 그것을 보조할 수 있었다

.”

33)라며

을 시인의 타고난 情과 氣와 연관시켜 평론하였다

.

이것은

淫蕩

과는 거리가 먼 가슴 속에 쌓인 무거운 정서가 표출되어 시가 된 것이며 그렇게 표현된 시가 가지고 있는 풍격을

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

그리고 이

은 근본이 없는 방종함이 아닌 시인으로서의 민감한 감수성과 예술가적 기질이 뒷받침된 것이라고 하였다

.

偶居 둘이 살리라

心遠浮雲知不還, 마음이 멀어져 뜬구름처럼 돌아올 줄 모르는데 心雲併在有無間. 마음이나 구름이나 있는 듯 없는 듯한 사이에 있네. 狂風何事相揺蕩, 거센 바람은 어인 일로 휘몰아쳐서

吹向南山復北山. 남산으로 다시 북산으로 불어대는가.

이 시는 떠난 임을 그리워하며 함께 짝지어 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노래한 것이다

.

李冶는 떠난 이의 마음을 뜬구름으로 비유하였는데 거센 바람

[

狂風

]

으로 은유한 세속적인 욕망이 임의 마음을 요동치게 하여 돌아오지 못한다고 노래하고 있다

.

陳文華는 이 시를 高仲武가 말한

에 가장 부합하는 시로 보았다

.

34) 李冶는 탈속한 여도사임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욕망에 갈등하였으며 그것을 시로 표현하였다

.

李冶가 남긴 시 속에서 그녀는 이성을 그리워하고 원망하며 재회를 갈망한다

.

이러한 혼인 관계가 아닌 이성에 대한 갈망을 형식미의 극치라 할 수 있는 律詩로 그려낸 여성 시인은 많지 않았다

.

이는 전통적인 여성관이나 禮敎의 관 점에서는 일탈적 행위였다

.

高仲武 이후로 역대 문인들이 李冶의 시를

으로 품평한 것에는 이같이 예교 의 질서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詩心과 이를 꾸밈없는 유창한 언어로 표현해낸 솜씨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포 함되어 있다

.

그러나 여기에는 일반 남성 문인들이 준수하는 윤리관과 詩觀에서 벗어났다는 비판적인 인식도 일부 내포되어 있다는 것도 살펴볼 수 있었다

.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李冶의 시는 인물 품평과는 별개로

五 言之佳境

으로 평가받을 수 있었다

.

33) 󰡔名媛詩歸󰡕 卷11, 唐三, “一氣說來, 中心如刺. 情敏故能艶發, 迅氣足以副之.”

34) 陳文華는 이 시에 대하여 여도사 李冶의 재능과 마음의 동요가 마치 매이지 않은 뜬구름 같았다. 高仲武가 말한 詩意가 蕩하다는 것이 혹시 이를 가리키는 것은 아닌가(身爲女道士的李冶才會心旌搖蕩, 如不羈之浮雲. 高仲武說她詩意亦簜”, 或指此?)”라고 의 의미 추측하였다. 陳文華, 앞의 책, 2007, 9.

(11)

2. 中唐 詩의 변화와 李冶의 詩

陳文華는 감정의

狂放不羈

의 측면에서 본다면 李冶의 작품은 大曆의 시풍이 아니라 貞元 시풍에 가깝다 고 주장한다

.

35) 이러한 주장은 李肇가 󰡔唐國史補󰡕 卷下에서

대력의 시풍은

를 숭상하였고

,

정원의 시풍 은

을 숭상하였다

(

大曆之風尙浮

,

貞元之風尙蕩

,

元和之風尙怪也

).”

라는 견해에 근거한 것이다

.

36)37) 高仲 武의

이라는 평가만으로 본다면 李冶의 시는 貞元의 시풍에 속하기 때문에 이는

大曆正音

이라는 胡震 亨의 평가와는 일치하지 않는다

.

이러한 불일치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

이 두 평가 중 李冶의 시의 실질 을 더욱 잘 반영하는 것은 무엇일까

?

여기서 주목할 점은

大曆正音

이라는 평가는 주로 李冶의 「寄校書七兄」

과 함께 언급된다는 점이다

.

「寄校書七兄」은 󰡔中興間氣集󰡕에서부터 李冶 시의 대표작으로 언급되었다

.

高仲 武는 이 시의 함련을 예시한 뒤 이것을

오언시의 아름다운 경지

(

五言之佳境

)”

라고 평가하였는데 그가 수록 한

6

수 중

5

수가 오언율시인 것을 보면 이 말에

五言

이 중요한 전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寄校書七兄 교서 칠형에게 부침38) 無事烏程縣, 별일 없는 오정현에서 蹉跎嵗月餘. 몇 년 세월이 흘렀네. 不知芸閣吏, 모르겠소 운각에 계신 나리 寂寞竟何如. 적막함은 어떠하신지.

遠水浮仙棹, 먼 물 위엔 신선의 배가 떠가고 寒星伴使車. 찬 별은 사신의 수레를 따르리. 因過大雷岸, 대뢰 기슭을 지나가시거든 莫忘幾行書. 몇 줄 서신 잊지 마소서.

明代 萬曆 사람 胡震亨은 󰡔唐音癸籤󰡕에서는 이 시를

이 노래는 大曆 시기 正音 중 하나이다

(

一歌幷曆正 音

),”

라고 평가했다

.

39)40)

大曆正音

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으나 뒤이어 서술 한

설도는 절구를 잘 지었으며

雌聲

(

유약한 소리

)’

이 없었다

(

薛工絶句

,

無雌聲

).”

어현기는 음탕하고 시

35) 陳文華, “이로써 호씨(호진형)의 설을 본다면 소위 大曆正音이란 풍격과 격률에만 착안한 것으로 李冶 시 전체의 특성을 개괄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감정의 거침없는 분방함의 측면에 말한다면 李冶의 작품은 실제 尙蕩한 정원의 시풍에 이미 가깝다(以此觀胡氏之說, 所謂大曆正音”, 恐還只是著眼於風調格律, 並不完全概括季蘭詩之特點-從感情之狂放不羈而言, 季蘭 之作實已接近尚蕩之貞元詩風了).” 陳文華, 앞의 책, 2007, 4.

36) 󰡔四庫全書󰡕, 李肇, 󰡔唐國史補󰡕 卷下, 「敍時文所尙」, “大抵天寶之風尙黨, 大曆之風尙浮, 貞元之風尙蕩, 元和之風尙怪也.”

37) 大曆은 唐 代宗 제위 말기 766~779년이고 貞元은 德宗 785~805년이다. 38) 판본에 따라 「送韓校書」라고 하기도 한다.

39) 明 胡震亨, 󰡔唐音癸籤󰡕, 巻八, 評彙四.

40) 胡震亨은 錢起와 劉長卿이 칠언율시에 다소 유창함을 추가하였고 대력십재자는 中唐體를 완비하였다고 말한다(󰡔唐音癸籤󰡕,

10: “钱刘稍加流畅降为中唐又一变也. 大厯十才子中唐体备, 又一变也.”). 그는 또한 大曆의 문인들은 開元·天寶 시기 시

의 낡은 수식을 경시하고 이를 바로잡으려 하였다고 보았다(󰡔唐音癸籤󰡕, 7: “詳大厯諸家風尚, 大抵厭薄開天舊藻, 矯入省 淨一塗.”).

(12)

체도 화려하고 유약하다

(

魚最淫蕩

,

詩體亦靡弱

).”

로 미루어 이것이 시체와 풍격을 평가한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41)

李冶의 시 중에는 五言律詩가

7

수로 가장 많고 七言絶句가

3

,

七言律詩가

2

수 있다

.

大曆의 시인들은 五言詩를 즐겨 지었으며 그 중 五言律詩의 비중이 높았다

.

淸代 󰡔薛濤李冶詩集󰡕의 提要에서는 「寄校書七兄」

을 포함하여 「送韓揆之江西」와 「送閻二十六赴剡縣」를 추가로 언급하며

대력 십자 속에 놓는다면 구별해 낼 수 없다

.

그 풍격은 설도를 한참 뛰어넘으니 시편이 적다고 그것을 버릴 수는 없다

라고 평가하였다

.

42) 추가 로 언급된 「送韓揆之江西」와 「送閻二十六赴剡縣」도 모두 오언율시이며 당시 李冶가 교우하였던 문인들과 주 고받은 송별시이다

.

강서로 가는 한규를 전송하며(送韓揆之江西)

서로 바라보며 버들가지를 가리키고, 이별의 한에 머뭇거리며 안절부절. 만 리 밖을 흐르는 강서의 물 위, 외로운 쪽배는 어디로 돌아가나. 분성은 물결이 닿지 않으니, 하구로부터의 편지 응당 드물어지 리. 오직 형양의 기러기만이, 해마다 오가며 날으리라(相看指楊柳, 别恨轉依依. 萬里江西水, 孤舟何處 歸. 湓城潮不到, 夏口信應稀. 唯有衡陽雁, 年年來去飛).

염가 스물여섯째가 섬현으로 가는 것을 전송하며(送閻二十六赴剡縣)

강물은 閶門 밖으로 흘러나가니, 외로운 배는 날마다 서쪽으로 가네. 이별의 정이 봄풀처럼 사방에 돋아, 무성히 우거지지 않은 곳 없네. 소첩의 꿈은 오원을 지나는데, 임은 어느덧 섬계에 이르셨네. 돌 아와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길잃은 원랑일랑 배우지 마소서(流水閶門外, 孤舟日復西. 離情遍芳草, 無處 不萋萋. 妾夢經呉苑, 君行到剡溪. 歸来重相訪, 莫學阮郎迷).

閻二十六

은 李冶의 연인으로 추정되는 閻士和이다

.

43) 주지하듯이 大曆十才子뿐 아니라 중국 문인들은 때때로 󰡔國風󰡕과 樂府民歌의 思婦와 怨婦를 빌려 친구 사이 이별의 슬픔이나 그리움

,

우정을 표현하였고 때 로는 임금에 대한 원망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

이 때문에 溫柔敦厚한 심미적 거리를 잘 유지한 情詩나 閨怨詩 를 배척하지 않았다

.

李冶의 시 속에 나타나는 임이 떠난 산과 강

,

호수의 적막한 공간과 그 위로 떠가는 배 는 中唐 특히 大曆 시인들이 따랐던 王維와 孟浩然의 山水詩와 같은

淸空閑雅

한 의경을 가지고 있다

.

胡應 麟의 󰡔詩藪󰡕 內篇 卷

4

에서 李冶의 시를

그윽하고 한적하며 평화롭고 자적함은 맹호연도 넘어설 수 없다

(

幽 閑和適

,

孟浩然莫能過

).”

라고 말한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의경을 높이 평가한 말이다

.

高仲武는 󰡔中興間氣集

·

序󰡕에서 至德에서 大曆 사이의 유독 五言詩를 위주로 수록하였다고 밝혔다

.

44) 수 41) 明 胡震亨, 󰡔唐音癸籤󰡕, 巻八, 評彙四, “李冶魚𤣥機薛濤, 女德正同. 遠水浮仙棹, 寒星伴使車聽琴一歌並大曆正音. 薛工

絶句, 無雌聲, 自壽者相. 魚最淫蕩, 詩體亦靡弱.”

42) 紀昀, 󰡔欽定四庫全書󰡕, 集部八, 󰡔薛濤李冶詩集󰡕, 淸 紀昀, 󰡔薛濤李冶詩集󰡕, “冶詩以五言擅長, 如「寄校書七兄」詩「送韓揆之江 西」詩, 「送閻二十六赴剡縣」詩置之大曆十子之中, 不復可辨, 其風格又遠在濤上, 亦未可以篇什之少棄之矣).” 󰡔四庫全書總目提 要󰡕 卷186에도 같은 내용이 있다.

43) 李冶의 「염백균의 편지를 받고(得閻伯均書)」이라는 시도 있는데 그리움과 원망의 정서로 미루어 일반적으로 李冶와 연인관 계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13)

록된 五言詩는 주로 오언율시에 편중되어있다

.

이는 그가 이 기간을 대표할 만한 시풍을 五言律詩로 판단했 다는 것을 의미한다

.

이 중에는 大曆十才子의 시도 포함되어 있는데 錢起

(12

李嘉祐

(8

韓翃

(7

郎士元

(12

崔峒

(9

) 5

명의

48

수의 시를 수록하였다

.

45) 내용에 있어서는 贈行

·

紀事

·

應酬 등 현실적 사교의 용도나 생활 속 경험을 소재로 한 작품을 주로 수록하였다

.

풍격에 있어서는

淸空閑雅

한 작품을 위 주로 하였으며 󰡔詩經󰡕의 風雅에 부합하는 작품을 위주로 수록하였다

.

46) 이것은 高仲武의 주관이 작용한 것 이지만 盛唐 이후 시단 상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

47)高仲武가 수록한 李冶의 「湖上臥病喜 陸鴻漸至」

·

「寄校書七兄」

·

「寄朱放」

·

「送韓揆之江西」

·

「道意寄崔侍郎」

·

「賦得三峽流泉歌」

6

수는

7

17

구로 지은 「賦得三峽流泉歌」을 제외하고 모두 五言律詩이며 증송을 목적으로 지어진 작품이다

.

李冶의 시 중 절반 이상이 이성을 향한 애절한 그리움을 노래한 작품들인데 이

6

수의 경우 「寄朱放」를 제외하면 高仲 武의 선시 기준인

淸空閑雅

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는 작품들이다

.

「湖上臥病喜陸鴻漸至」의 경우 작품 속에 서 謝靈運과 陶淵明을 언급하며 현실적 비애를 탈속의 지향으로 달래고자 하는 정서가 보이며

,

48) 「道意寄崔 侍郎」은

崔侍郞

이라는 인물에게 탈속의 도를 시로 전달한다

.

「賦得三峽流泉歌」는 「從蕭叔子聽彈琴賦得三峽 流泉歌」라고도 하는데

蕭叔子

가 연주하는 거문고 소리와 느낌을 네 구마다 轉韻을 해가며 생동감 있게 표현 하였다

.

49) 黃周星이 편찬한 󰡔唐詩快󰡕의

분칠한 듯한 습성이 없다

(

頗無脂粉習氣

)”

50)라는 평가에서도 볼 수 있듯이

부녀자와 관련된 일을 염려한 언어로 꾸미는 것

이 없는 작품으로 白居易의 「琵琶行」과 비교하여도 손색없는 작품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

51)

蔣寅은 安史의 난 이후부터 大曆 말까지의 시단의 변화를 당시 시인들의 時空에 대한 인식의 변화로 설명 한다

.

그는 盛唐의 시와 大曆의 시를 비교하여 공간은 外向에서 內向으로

,

시간은 역사에서 현실로

,

客體는 設想

(

상상

,

구상

)

에서 知覺으로 主體는 彼岸에서 此岸으로

,

심리상으로는 이상에서 철학의 상실로 옮겨왔다 고 파악한다

.

그는 특히 大曆 시인들의 창작 심리에 대하여

(

劉長卿

)

과 大曆 시인의 작품 중에는 모두 兼 濟의 자신감이나 희망은 없고 자아의 존재가 중심이 되어 개인의 구체적인 감정에서 출발하여 사적인 일시의 근심이나 즐거움을 음미하는 것이었다

.”

52)라고 지적한다

.

劉長卿을 비롯하여 李冶와 교류하고 시를 나누었 44) 󰡔中興間氣集·序󰡕, “起自至德元年首終於大歷末年, 作者數千選者二十六人, 五言詩一百四十首, 七言詩附之列為兩卷.”

45) 대력십재자에 속하는 인물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이론이 있으므로 본고에서는 대력십재자로 거론되는 사람들을 광범위하 게 포괄하여 지칭하였다.

46) 󰡔中興間氣集·序󰡕, “古之作者, 因事造端, 敷弘體要, 立義以全其制, 因文以寄其心, 著王政之興衰, 表國風之善否, 豈苟悦權右, 取媚薄俗哉? 今之所收, 殆革斯弊, 但使體格風雅, 理致清新, 觀者易心, 聽者竦耳, 則朝野通取, 格律兼收.”

47) 󰡔中興間氣集󰡕에는 盛唐 이후 시의 개혁을 선도한 杜甫의 律詩나 岑參과 高適의 시는 전혀 수록하지 않았다. 「序」에서 시인 의 작품은 그 마음을 근본으로 한다. 마음에 느끼는 바가 있으면 말로 형태가 생긴다. 말이 시의 법에 부합하게 되면 곧 풍아의 반열에 이른다(詩人之所作本諸心, 心有所感, 而形於言, 言合典謨, 則列於風雅乎).”에서 밝힌 바와 같이 風雅를 중요 한 선시 기준으로 삼았다고 했다. 蔣寅은 이에 대하여 高仲武가 󰡔離騷󰡕와 같은 怨刺보다는 󰡔國風󰡕의 比興을 통한 怨刺를 선시의 기준으로 삼은 것이라고 보았다. 蔣寅, 「從 󰡔河嶽英靈集󰡕到 󰡔中興間氣集󰡕」, 󰡔廣西師範大學學報(哲學社會科學版)󰡕, 4, 1988, 33.

48) “強勸陶家酒, 還吟謝客詩. 偶然成一醉, 此外更何之.”

49) 「三峽流川歌」는 晉 阮咸이 지은 琴曲歌辭 고악부 시제이다. 50) 黃周星, 󰡔唐詩快󰡕, 陳文華, 앞의 책, 9쪽 재인용.

51) 胡曉明 等, 󰡔歷代女性詩詞󰡕, 上海: 上海世紀出版, 2018, 53.

52) “在他與大曆詩人的作品中,同樣都沒有兼濟的自信與願望, 只是以自我的存在為中心, 從個人的具體感受出發, 吟味一己一時的憂

(14)

던 문인들은 이와 같은 문풍과 심리상태를 공유하고 있었을 것이며 李冶도 이러한 문단의 변화에 영향을 받 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

다만 주의할 점은

대력십자 중에 놓는다면 구분해 낼 수 없을 것이다

(

置之大曆十 子之中

,

不復可辨

)”

라는 평가에서 말하는 大曆十子의 시란

대체로 권세가들에게 붙어 시를 벼슬과 이익 추구 의 수단으로 사용하려 하던

53) 작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

大曆十才子는 안사의 난 후 삶의 이상 과 목표를 상실한 중하층 문인계층에 속해있었다

.

그 시기 문인 중에는 杜甫처럼 당시 현실문제를 적극적으 로 시로 표현하는 시인들도 있었으나 산천과 개인 삶에 몰두하여 안식을 추구하고자 하였던 시인들이 상당수 였다

.

󰡔中興間氣集󰡕에 수록된 大曆十才子 작품들은 대부분이 送別詩나 교우 관계에서 증송을 목적으로 한 작품이거나 韓翃의 「題薦福寺衡嶽禪師房」

·

「題蘇許公林亭」

·

「題僧房」처럼 한적한 생활을 노래한 작품이다

.

그들은 五言을 잘 지었으며 七言律詩도 능했다

.

54) 李冶의 시와 비교된 대력십재자의 시는 이와 같은 中唐 이후 변화된 문인들의 시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

李冶의 시는 형식에 있어서는 五言律詩나 七言律詩에 편중되 었고 내용에 있어서 주로 사적인 생활과 감정을 표현하였다

.

역사보다는 현실에 집중하는 경향과 상상보다는 감각적이고 현실적인 묘사를 기법 등은 李冶 역시 大曆 시단에 속한 인물로서 시단의 변화를 반영하는 시를 지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

颜文武

·

魏中林은

貞元之風尙蕩

전통적인 규범에서 벗어난 자유분방함

(

恣肆放縱

)”

으로 해석하였다

.

貞元 시의 내용과 형식이 이렇게 변한 이유를 貞元 시기 사회 문화의 변화와 사회를 지배하는 사상의 변화로 설명하였다

.

55) 貞元 시기 德宗은 仙道에 심취하여 사치와 향락을 일삼았으며 당시 사회는 中唐 이전보다 儒 家의 지배력이 더 약해지고 道敎가 더욱 세속화되고 성행하였다

.

이렇게 사회를 지배하는 사상과 문화가 창 작 심리와 시의 내용과 형식에 영향을 미쳐 儒家의 전통적 詩觀에서 벗어난 시들이 나타났다

.

李冶의 시가 貞元 이전에 지어진 것이지만 내용과 풍격에 있어서 貞元의

尙蕩

에 부합하는 측면이 있는 것은 당시 이미 세속화된 도교에 입적하였던 여도사로서의 그녀의 신분상의 특성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

요컨대 大曆의 문인들과 시를 나누었던 李冶는 對偶를 중시하고 平仄과 韻을 다듬어 오언율시와 칠언율시 를 주로 지었다는 점에서는 大曆의 시풍에 부합하며 정통 유가적 사상과 시관에서 벗어났다는 점에서 貞元의

에 부합하는 측면도 있다

.

즉 大曆에서 貞元으로 전환되는 시기의 시풍의 변화가 李冶의 시에도 나타났 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 蔣寅, 「時空意識與大曆詩風的嬗變」, 󰡔文學遺産󰡕, 1990. 77. 53) 김학주, 󰡔중국문학사󰡕, 신아사, 2011, 225.

54) 胡震亨은 錢起와 劉長卿이 칠언율시에 다소 유창함을 추가하였고 大曆十才子는 中唐體를 완비하였다고 말한다(󰡔唐音癸籤󰡕, 10: “钱刘稍加流畅降为中唐又一变也. 大厯十才子中唐体备, 又一变也”) 그는 또한 大曆의 문인들은 開元·天寶 시기 시 의 낡은 수식을 경시하고 이를 바로잡으려 하였다고 보았다(󰡔唐音癸籤󰡕, 7: “詳大厯諸家風尚, 大抵厭薄開天舊藻, 矯入省 淨一塗.”).

55) “这里的恣肆放纵之意, 这种放纵非传统所能束缚, 往往是一个社会由盛而衰的过程中表现出的一些特征, 也往往是由

衰而思变的契機. 这样的社会心理和文化走向也导致了文风的变化, 一部分作家的创作已透露出了诗风转变的信息, 显示出诗 风即将大变的祈向.” 颜文武·魏中林, 「论贞元尚荡之风对唐代诗史的转关作用」, 󰡔内蒙古大学学报(哲学社会科学版)󰡕, 41: 3, 2009, 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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