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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에서 대한민국 건국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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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강

갑신정변에서 대한민국 건국까지

- 대의 민주주의 공화국 탄생의 역사적 기원 -

제1주. 갑신정변의 역사적 의의 제2주. 갑오경장에 대한 오해와 이해 제3주. 독립협회 개혁운동의 획기적 의의 제4주.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도자들의 건국 청사진과 대한민국 헌법 제5주. 종합 토론

강 연 : 유 영 익

(한동대학교 T. H. Elema 석좌교수)

사 회 : 허 동 현 (경희대학교 교수)

토 론 : 홍 선 표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위원) 토 론 : 김 기 승 (순천향대학교 교수)

토 론 : 오 영 섭 (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 연구교수)

이 책자에 서술된 내용 또는 자료는 필자의 동의 없이 활용하거나 인용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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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머리말 ……… 5

II. 갑오경장 전개의 정치적 배경 ……… 6

Ⅲ. 갑오경장 개관 ……… 13

Ⅳ. 갑오경장 추진세력의 인적 배경 ……… 20

Ⅴ. 갑오경장 추진 세력의 개혁 조치 ……… 21

Ⅵ. 맺음말 ……… 26

Ⅶ. < 주 > ……… 28

Ⅷ. < 부록> ……… 30

제9 강

갑신정변에서 대한민국 건국까지

- 대의 민주주의 공화국 탄생의 역사적 기원 -

제2주_ 갑오경장에 대한 오해와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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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강 갑신정변에서 대한민국 건국까지

갑오경장에 대한 오해와 이해

유 영 익 (

한동대학교 T. H. Elema 석좌교수

)

I. 머리말

1894년, 갑오년은 동학농민봉기 · 갑오경장 · 청일전쟁과 같은 굵 직한 역사적 사건이 동시에 일어난 해였다. 동학농민봉기는 우리 민족의 역사상 규모가 가장 크고 격렬했던 민란이었고 청일전쟁은 동아시아 최 초의 근대적 전쟁이었으며, 갑오경장은 조선 시대 최대 규모의 제도 개 혁운동이었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1894년이야말로 한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다사다난했던 해로서 1945년의 해방(광복)만큼 획기적인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이 강의에서는 동학농민봉기와 청일전쟁의 와중에 주한 일본공사 관의 지원 아래 시작된 갑오경장이 도대체 어떠한 성격의 개혁운동이었 는지를 따져보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갑오경장은 일본이 주도한 타율적 인 개혁운동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 운동의 진행 과정을 면밀하게 살 펴보면 갑오경장은 시종일관 타율적으로 추진된 개혁운동은 아니었다.

적어도 반 이상 한국인이 주도권을 쥐고 자율적으로 추진한 개혁운동이 었다. 갑오경장의 진행 과정에서 한국인의 능동적 역할을 재조명하는 일 은 매우 중요한데, 결국 이 운동에 참여한 조선인 추진 세력이 1884년 갑신정변의 정신을 이어받고 1897~1898년의 독립협회 운동에 일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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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 5제9 갑신정변에서 대한민국 건국까지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고 나아가 이 운동이 1948년의 대한민국 건국과 역사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발표자는 우선 갑오경장이 추진된 정치적 배경을 개관한 다음 조 선인 개화파 관료들이 자율적으로 추진한 개혁의 사례로 갑오경장 초반 에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에서 의결한 의정안(議定案)과 갑오경장 중반 에 내무대신 박영효(朴泳孝)가 추진한 개혁조치 등을 살펴본 다음, 마지 막으로 이 같은 미완의 자율적 개혁운동이 갑신정변과 독립협회 운동에 어떻게 연관되는지, 그리고 그것이 결국 한국의 민주주의 발달에 어떻게 이바지했는지를 논해보고자 한다.

II. 갑오경장 전개의 정치적 배경

갑오경장(甲午更張: 1894/7/27~1896/2/11)1)은 청일전쟁 중 일본의 대한(對韓)정책과 밀접히 연관되어 추진된 개혁운동이었다. 따라서 갑오경장 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배경인 청일전쟁의 발발 경위와 전쟁 발발 뒤 변화한 일본 정부의 대한정책을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청일전쟁(1894~1895)은 한반도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청국과 일본 간 에 벌어진 전쟁으로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중국 중심 세계질서(Sino-centric world order)’에 종지부를 찍고 신흥 일본을 이 지역의 패자로 부상시킨 역사적 사건이었다. 또한, 이 전쟁은 당시 동아시아에서 이권 확대를 노리고 있던 영국과 러시아 등 열강의 영토 분할 경쟁을 부추긴 결과도 낳았다. 이로써 조선은 뿌리 깊은 청국의 종주권에서 벗어났지만, 전쟁 전후 일본군에 국토를 강점당한 처지에 놓여 임진왜란 이래 최악의 수모와 수난을 당했다.

1894년 4월에 전라도 무장(茂長)에서 동학농민군의 봉기가 일어나자 조선 정부는 5월 7일 홍계훈(洪啓薰)을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로 임명해 농민군을 진압하도록 조처했다. 그런데 장성에서 정부군을 격파한 농민군은 파죽지세로 북진해 31일 전주를 함락했다. 6월 2일 전주 함락을 보고받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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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주_ 갑오경장에 대한 오해와 이해

정부는 자력으로써 농민군을 진압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나머지 임오군란 때의 전례에 따라 청의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 위 안스카이(袁世凱)에게 원병을 요청했다. 파병 요청을 받은 청의 북양대신(北洋 大臣) 리훙장(李鴻章)은 6월 6일 톈진조약(1885)을 근거로 일본에 파병 사실 을 통고하는 한편 청군 2천800명을 충남 아산으로 급파했다.

6월 2일, 서울 주재 일본 임시대리공사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는 본국 정부에 ‘조선의 청국 파병 요청’을 보고했다. 때마침 중의원에서 내각 탄핵안이 가결되어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려있던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이 보고를 구실로 각의(閣議)를 열어 중의원을 해산하고, “일본공사관과 거류 민을 보호한다”는 구실 아래 제5사단의 혼성여단(混成旅團)의 조선 파병을 결정했다. 이때 일본 정부는 조선의 독립을 공고히 하고 ‘내정 개혁’을 도모한다 는 명분을 내세워 한반도에 대군을 파병하면서 실제로는 대청(對淸)전쟁을 도발하려 했다. 이러한 일본 정부의 계획에 따라 6월 6일 참모본부 내에 대본영 (大本營)이 설치됨과 동시에 혼성여단의 선발대가 일본을 떠나, 9일 인천에 상륙한 다음 곧바로 서울로 진군했다. 그 뒤 6월 하순까지 8천여 명에 달하는 일본군이 서울과 인천에 집결했다.

일본의 기습적 군사행동에 당황한 조선 정부는 일본군의 즉각적인 철병 을 요구했다. 더욱이 6월 11일에 정부군과 동학농민군 사이에 전주화약(全州 和約)이 맺어졌기 때문에 외국군의 개입 구실도 사라진 상태였다. 따라서 육전대(陸戰隊)와 함께 급거 서울로 돌아온 주한 일본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 鳥圭介)와 위안스카이는 세 차례에 걸친 회담 끝에 양국 군의 공동 철수에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애당초 철군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 일본 정부는 청과의 개전 구실을 만들고자 청국에 공동 철병을 제의하는 대신 조선의 내정을 공동으로 개혁하자는 엉뚱한 제안을 했다. 일본 정부가 예상한 대로 청국이 이 안을 거부하자 일본은 청국에 ‘제1차 절교서(絶交書)’를 보냄과 동시에 독자적인 조선 내정 개혁을 결정했다. 이 사이에 리훙장의 조정의뢰에 따라 러시아와 미국이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했지만, 일본 정부는 이를 무시하고 7월 중순 청국에 ‘제2차 절교서’를 보내는 한편, 영국과 영일신조약(英日新條 約)을 체결하면서 개전을 서둘렀다. 본국 정부의 개전 의지를 확인한 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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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 5제9 갑신정변에서 대한민국 건국까지

공사는 조선 정부에 조선이―아산에 상륙한 청군이 주장하는 바 대로―청국의

‘속방(屬邦)’인지 아닌 지를 분명히 밝힐 것을 요구하는 시한부 최후통첩을 발송한 뒤, 조선 측의 회답을 접수하기도 전인 7월 23일 새벽 5시에 경복궁을 무력으로 불법 점령했다. 같은 날 오전 11시에 일본공사관은 흥선대원군(興宣 大院君)을 감언이설로 유혹해 입궐시켜 그로 하여금 섭정직을 맡도록 조치하고 이어서 27일에 김홍집(金弘集) 중심의 친일 괴뢰정권을 수립했다.2)

청일전쟁은 사실상 7월 23일 일본군의 경복궁 침공으로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경복궁을 점령한 뒤 곧 서울과 수원에 배치된 조선 관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이어서 아산만 근처에 집결한 청군을 향해 진격했다. 청일 간의 본격적인 전투는 7월 25일 일본 해군이 풍도(豊島) 앞바다에서 청의 해군 함대를 공격함으로써 개시되었다. 이 해전에서 청국 군함과 청의 증원군을 태운 영국 수송선 가오룽(高陞) 호가 일본 해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침몰했다.

이어서 29일에 벌어진 성환(成歡) 전투에서 일본 육군은 아산에 상륙한 청군을 쉽사리 격파할 수 있었다. 해상과 육상 전투에서 일본군이 승리를 거두자 일본 정부는 8월 1일 청에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하고, 청국 역시 같은 날 대일 선전포고를 했다.

일본 정부는 열강의 간섭을 피하고자 가능한 한 빨리 승리를 쟁취하려 했다. 일본 육군은 9월 15~16일간에 평양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청군 1만 4천 명을 격멸하고, 해군은 9월 17일 황해 전투에서 청국 함대를 격침함으로써 제해권을 장악했다. 이렇게 평양과 황해에서 대승을 거둔 일본군은 곧바로 중국 본토 공격을 서둘렀다. 10월 하순 한반도에 상륙한 일본군 제1군은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로 진격했고, 제2군은 랴오둥반도(遼東半島)에 상륙해 11월 하순 뤼순과 다롄을 점령한 다음 1895년 2월 2일 산둥반도 웨이하이웨이 (威海衛)에 자리한 북양함대(北洋艦隊) 기지를 공격했다. 그 뒤 전세가 계속 불리해지자 청은 일본이 요구한 대로 리훙장을 전권 대신으로 임명해 시모노세 키(下關) 강화회담에 나섰다. 3월 20일부터 시모노세키에서 열린 이토 히로부 미와 리훙장 간의 강화회의는 3월 24일 리훙장 저격 사건이 일어나는 바람에 한때 중단되었다. 그러나 전쟁의 추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영국 ․ 러시아

․ 프랑스 ․ 독일 ․ 미국 등 열강의 간섭을 우려한 일본은 결국 4월 17일 통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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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주_ 갑오경장에 대한 오해와 이해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이라 부르는 청일 강화조약에 서명했다.

11조로 이뤄진 시모노세키조약문 가운데 조선 관련 조항은 아래의 두 가지이다.

제1조: 청국은 조선국이 완전무결한 독립자주국임을 확인한다.

따라서 이 독립자주에 손해가 될 청국에 대한 조선의 공헌(貢獻)과 전례(典例) 등은 앞으로 완전히 폐지한다.

제2조: 청국은 랴오둥반도와 타이완, 펑후(澎湖) 열도를 일본에 할양한다.

위의 제1조로 중국이 전통적으로 조선에 행사해왔던 종주권이 폐지됨으 로써 조선은 중국에서 완전히 독립했다. 물론 이것은 청일전쟁이 조선에 가져 온 망외(望外)의 성과였다. 그러나 아래에서 밝히는 바와 같이, 시모노세키조약 은 조선이 청국의 보호막에서 에서 벗어나 일본의 보호국이 되는 과정일 뿐이었 다.

시모노세키조약이 성립된 지 6일이 지난 1895년 4월 23일 러시아와 프랑스, 독일 세 나라는 일본 정부에 랴오둥반도를 청국에 반환하라는 이른바 삼국간섭(三國干涉)에 나섰다. 이 세 나라의 군사력, 특히 러시아에 대항할 실력이 없던 일본은 부득불 5월 4일 삼국간섭에 굴복해 랴오둥반도를 환부(還 付)하고 그 대신 청으로부터 배상금 3천만 냥을 추가로 받기로 했다. 삼국간섭 을 계기로 일본 지도자들은 러시아를 가상 적국으로 삼고 러일전쟁에 대비한 군비 확장에 착수했다.

청일전쟁은 주로 청일 간의 군사적 대결이었지만, 한반도 내에서 일본군 과 동학농민군 간의 치열한 전투를 수반한 전쟁이기도 했다. 1894년 10월 중순부터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전봉준(全琫準), 김개남(金開南), 손화중(孫和 中), 손병희(孫秉熙) 등의 지휘하에 궐기한 ‘10만’ 명의 동학 ‘의려(義旅)’(의병) 는 조선을 강점한 일본군을 몰아내고자 11월 7일 논산에 집결, 서울로 진공을 시작했고 이로써 조일전쟁(朝日戰爭)이 일어났다. 동학 의병의 항일 군사활동 은 당시 랴오둥반도와 산둥반도에서 전쟁을 벌이던 일본군의 후방을 교란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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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 5제9 갑신정변에서 대한민국 건국까지

중대한 군사적 위협이었다.

일본 정부는 10월 말에―오토리 공사의 후임으로―서울에 도착한 이노우 에 가오루(井上馨)공사에게 동학 의병 진압작전을 총지휘하도록 했다. 그 결과 일본에서 특파된 약 2천 명의 ‘동학당정토군(東學黨征討軍)’이 조선 정부 가 발족한 양호순무영(兩湖巡撫營)의 군대 약 3천200명의 지원을 받아 11월 9일부터 본격적인 동학군 토벌작전을 전개했다. (이 토벌 작전을 개시하기 전 10월 8일에 조선 정부의 총리대신 김홍집, 외부대신 김윤식, 탁지대신 어윤중 등 세 명은 일본 공사관을 찾아가 이노우에 공사에게 일본군으로 동학농 민군을 진압해달라고 부탁했다.)3) 우수한 무기로 잘 훈련된 일본군과 조선 관군의 조직적인 공세에 직면한 동학 의병은 11월 18일과 19일에 치른 목천 세성산 전투와 12월 4일부터 7일까지 치른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완패했다.

이 두 전투로 ‘수천 명’의 동학 의병이 희생당하고 12월 24일,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등 동학 의병장들이 체포됨으로써 조일전쟁은 일단락되었다.4) 이노우 에 공사 지휘하에 치러진 동학 의병 토벌작전이야말로 일본이 청일전쟁 중에 한반도에서 벌인 ‘선전포고 없는 전쟁’이었다.

청일전쟁 중에 일본 정부가 조선에서 달성하려 했던 목적은 러시아의 남하에 대처하는 데 필요한 철도와 군용 전신망 등 전략 시설을 확보하고, 각종 경제적 이권을 획득하며, 나아가 조선을 영국 지배하의 이집트와 같은 형태를 띤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일본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 (陸奧宗光)는 7월 23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한 다음 서울 주재 일본 영사 우치다 사다즈치(內田定槌)가 제창한 일본의 조선 보호국화 안을 수용해 그 안을 8월 17일 내각 회의에 올렸고 일본 내각은 네 가지 선택안 가운데 “조선을 명의상 독립국으로 공인하되 일본 제국이 직간접으로 영원 혹은 장기간 그 독립을 보익(保翼), 부지(扶持)해 타(他)의 모(侮)를 막아내는 노(勞)를 취한다”

는 안, 즉 조선을 장기간 일본의 보호국으로 붙들어둔다는 정책을 ‘잠정적으로’

채택했다.5)

본국 정부의 이러한 정략적 결정에 따라 서울에 있는 오토리 공사는 조선 정부에 자신이 이미 7월 10일 조선 정부에 제시한 바 있는 ‘내정개혁방안 강목(內政改革方案綱目)’6)에 따라 내정을 개혁하도록 권고하는 한편,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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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주_ 갑오경장에 대한 오해와 이해

20일에는 경부(京釜), 경인(京仁) 철도 부설권과 군용 전신선 관할권 등을 일본에 양도하는 내용의 ‘조일잠정합동조관(朝日暫定合同條款)’을 김홍집 정 부와 체결했다. 그리고 26일에는 전쟁 중 조선이 일본의 동맹국으로서 일본군 의 진퇴와 그 식량 준비 등 편의를 제공한다는 내용의 ‘조일맹약(朝日盟約)’을 체결했다. 이어서 8월 15일과 26일에는 군국기무처를 통해 일본인 고문관과 군사교관을 조선 정부 내에 배치하는 데 동의한다는 내용의 약속을 받아냈다.

이로써 전쟁 초반에 일본은 조선을 일본의 사실상의 보호국으로 만드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법적 조치를 확보했다. 그렇지만 일본은 열강(특히 러시아)의 간섭과 조선인의 반발을 우려한 나머지 당분간 이들 조약의 즉각적인 실천을 강요하거나 내정 개혁을 강박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7월 27일에 성립된 김홍집 정권의 친일 개화파 관료들은 27일에 군국기무처라는 개혁 추진 기구를 세워놓 고 비교적 자율적으로 내정 개혁을 추진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9월 중순의 평양 대첩을 계기로 일본의 태도는 일변했다. 즉, 일본 정부는 조선의 내정에 적극 간섭하기로 하고 10월 15일에 이 일을 실천할 인물로서 메이지유신의 원훈(元勳)이자 현 내무대신이며 일본내 굴지의 조선 통(朝鮮通)인 이노우에를 조선 주재 특명전권공사로 선발해 서울에 파견했다.

이노우에 공사는 조선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삼는 정책 목표를 달성하고자 동학 의병의 항일 봉기를 부추긴 것으로 밝혀진 대원군을 11월 21에 권좌에서 축출하고7) 그 대신 고종과 민왕후(민비)를 우대하면서 김홍집과 박영효(朴泳 孝)의 연립내각을 새로이 조성하고, 조선 정부에 42명의 일본인 고문관 및 고문보좌관들을 배치한 다음 조선왕국의 기간(基幹) 제도들을 일본식으로 개혁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는 조선 정부와 일본 간에 체결된 ‘잠정합동조관’

과 ‘조일맹약’을 신(新) 조약인 ‘일한조약’과 ‘대일본국 대조선국 동맹비밀조약’

으로 대체하려 했다. 이러한 목적을 원만히 달성하고자 그는 조선 정부에 500만 엔의 차관을 제공하겠다고 공언했다.

10월 27일 서울에 부임한 이노우에 공사는 조선 정부에 500만 엔의 차관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조선의 ‘보장(寶藏)’인 전라, 경상, 충청 등 세 도의 지세(地稅)를 담보로 설정함으로써 조선의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재정권뿐 만 아니라 일부 행정권까지 장악하고자 했다. 이로써 조선을 영국 치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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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 5제9 갑신정변에서 대한민국 건국까지

이집트와 같은 보호국으로 만들 심산이었다. 그러나 그가 주선한 차관은 1895 년 2월 하순 일본 정부가 300만 엔으로 감액해 액수가 줄었을 뿐만 아니라 차관 제공이 지체되고 차관 공여 조건이 너무나 가혹했기 때문에 박영효 같은 조선의 ‘독립주의적’ 개혁가들의 반발을 초래하는 역효과를 불러왔다.8)

더구나 이노우에 공사가 추진하던 조선 보호국화 계획은 청일 간 강화회 담의 분위기가 무르익어가는 1895년 2월 중순부터 좌절되기 시작했다. 이때부 터 러시아가 일본 정부에 조선의 독립을 존중하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무쓰 외상은 2월 27일 러시아 정부에 조선의 독립을 명실공히 보장할 것을 약속했다.

이로써 그때까지 일본 정부가 추구하던 조선 보호국화 정책은 흔들리기 시작했 다. 이러한 상황은 5월 4일 일본 정부가 삼국간섭에 굴복하여 랴우둥반도를 환부한 뒤에 더욱 굳어졌다. 6월 4일 열린 내각회의에서 일본 정부 최고 지도자 들은 조선 문제를 놓고 아래와 같은 결의를 채택했다.

“우리의 대한정략은(對韓政略)은 그 독립을 인정하고 청국의 속 방임을 주장하는 설(說)을 배제하여 결국 그 독립의 실(實)을 거두는 데 있었다. 아(我) 전첩(戰捷)의 결과 청국으로 하여금 조선이 완전 독립국임을 인식시켰다. 그런데 로국(露國)은 우리에게 조선이 명 실공히 독립국임을 인정하라고 요구해왔다. 이에 우리는 종래의 정략에 근거하여 여러 차례 선언한 사실이 있으므로, 장래의 대한정 략은 될수록 간섭을 그치고 조선으로 하여금 자립(自立)케 하는 방침을 취하기로 결의한다. 고로 타동(他動)의 방침을 택하기로 결의한다. 이 결의의 결과 동국(同國)의 철도(鐵道), 전신(電信)의 건(件)은 강박적으로 실행치 않기를 기(期)한다.”9)

말하자면, 일본 정부는 6월 4일을 기해 한국의 내정 개혁에 간섭하지 않고 이권 획득 노력도 중지하기로 한 것이다. 이 정책에 따라 일본 정부는 8월 17일 주한 공사를 경질하고 이노우에의 후임으로 예비역 육군 중장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를 선임했다. 서울에 부임한 미우라 공사는 장차 일본이 러시아 와 일전을 벌일 때를 대비해 장기적 안목의 예비 조치로 ‘러시아를 끌어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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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주_ 갑오경장에 대한 오해와 이해

진행

단계 지속 기간 추진 주체 배후 세력 개혁 조치

1단계

1894. 7. 27

~12. 17 (143일)

김홍집 내각 (군국기무처)

대원군 / 오토리 공사

-군국기무처 의안 210건 (장정안 20건; 의정안 190건)

2단계 이노우에 -홍범 14조

일본을 막는다’는 인아거일(引俄拒日) 책을 추구하던 조선의 민왕후를 시해할 구체적 계획을 세운 다음 드디어 1895년 10월 8일 일본군 수비대, 순사, 장사 등을 동원, 대원군을 앞세우고 경복궁에 난입해 왕비를 시해하는 만고(萬 古)에 유례없는 만행을 저질렀다.

민왕후 시해사건을 계기로 조선인의 반일 감정이 고조되고 열강의 비난 이 거세게 일자 일본 정부는 곤경에 빠졌다. 이때 친일적인 김홍집 내각은 10월 10일 기만적인 왕비폐위조칙(王妃廢位詔勅)을 발포하고 12월 30일에 단발령(斷髮令)을 선포, 강행함으로써 곳곳에서 반일(反日) 의병운동을 촉발 시켰다. 이를 호기로 삼아 고종은 1896년 2월 11일 자신의 왕궁을 버리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이른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했다. 이로써 조선의 친일 정권은 삽시간에 무너지고 그동안 진행되었던 갑오경장은 완전히 중단되었다.

III. 갑오경장 개관

갑오경장은 동학농민봉기와 청일전쟁을 배경으로 조선의 친일개화파 관료들이 1894년 7월 27일부터 1896년 2월 11일까지 추진했던 제도 개혁운 동이다. 이 개혁운동은 아래와 같이 6단계를 거쳐 진행되었다.

갑오경장 진행단계, 내각 변동 및 주요 개혁문건10)

(13)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 5제9 갑신정변에서 대한민국 건국까지

1894. 12.

17

~ 1895. 5. 21

(156일)

김홍집 - 박영효

내각

공사 / 일본고문관들

-훈련대 발족 -궁내부 관제 -내각 관제 -중추원 관제

-외부/법부/학부/농상공 부/탁지 부/군부/경무 청 관제

-재판소 구성법

-외교관(급)영사관 관제 -관세사(管稅司)(급) 징세서(徵稅署)관제

3단계

1895. 5. 31

~7. 6 (36일)

박정양 - 박영효

내각

일본고문관들

-독립경일(獨立慶日) 제 정

-지방제도 개혁 -한성사범학교 관제 -외국어학교 관제 -훈련대 사관학교 관제

4단계

1895. 7. 6

~8. 23 (48일)

박정양 - 유길준

내각

고종 / 명성왕후

-시위대(侍衛隊) 신설령 -국내 우체 규칙 -사환조례(社還條例)

5단계

1895. 8. 24

~10. 8 (45일)

김홍집 - 박정양

내각

고종 / 명성왕후

-성균관 관제 -소학교령

-한성사범학교 규칙

6단계

1895. 10. 8

~ 1896. 2. 11

(126일)

김홍집 - 유길준

내각

고종 / 고무라 공사

-칭제운동, 건원.

-왕비폐위조칙(王妃廢位 詔勅)

-단발령 -육군편제강령 -무관학교 관제 -향회(鄕會) 규칙 -상무회의소 규례 -기국채의(起國債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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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주_ 갑오경장에 대한 오해와 이해

갑오경장은 주로 제1, 2, 3 및 6단계에서 추진되었다. 제1단계에서는 총리대신 김홍집, 학무대신 박정양, 외무대신 김윤식, 탁지대신 어윤중, 내무협 판 이준용, 외부협판 김가진, 탁지협판 안경수, 군무협판 조희연, 법무협판 김학우, 경무사 이윤용, 한성부윤 권재형 등 21명의 이른바 ‘갑오파(甲午派)’로 구성된 초정부적 입법기구인 국군기무처(軍國機務處)에서 7월 27일부터 10 월 29일까지 20건의 장정안(章程案)과 190건의 의정안(議定案)을 심의, 통과, 공포했다. 그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것은 경장초반(7월 30일과 8월 2일 및 3일)에 군국기무처 회의에서 채택한 아래의 의정안들이다.

(1) 지금부터 국내외의 모든 문서에는 개국기년(開國紀年)을 사 용할 것.

(2) 청국과의 약조를 개정하고 열국에 특명전권공사를 다시 파견 할 것.

(3) 문벌(門閥)과 양반과 상민(常民)의 등급을 타파하고 귀천에 불구하고 인재를 뽑아 등용할 것.

(4) 문무존비의 차별을 폐지하고, 다만 품계에 따라 상견의(相見 儀)를 규정할 것.

(5) 죄인 자신 외의 일체 연좌율(緣坐律)을 폐할 것.

(6). 적처(嫡妻)와 다른 처(妻)에 모두 무자(無子)할 경우에 양자 (養子)를 허용할 것.

(7) 남녀의 조혼을 엄금해 남자는 20세, 여자는 16세에 이르러 비로소 결혼을 허락할 것.

(8) 과부의 재혼은 귀천을 막론하고 그 자유에 맡길 것.

(9) 공사노비법(公私奴婢法)은 일체 혁파하고 인신(人身)의 판매 는 금할 것.

(10) 비록 평민이라도 이국편민(利國便民)할 수 있는 의견이 있으 면 군국기무처에 상서토록 하여 회의에 올릴 것.

(11) 역인(驛人), 창우(倡優), 피공(皮工) 등에 모두 면천(免賤)을 허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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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과문(科文)으로써 관리를 뽑는 것은 왕조의 정제(定制)이지 만 허문(虛文)으로써 실재(實才)를 거두기란 어렵기에 과거제도(‘科 擧之法’)를 상감께 아뢰어 변통한 한 후 따로 선거조례(選擧條例)를 만들 것.

이들 의정안은 일본 공사 오토리가 7월 10일 노인정 회담에서 제시했던

‘내정개혁방안강목’과 무관하다. 따라서 이 조항들은 7월 23일 쿠데타 이후 집권한 조선인 개혁가들이 스스로 소망했던 개혁 구상을 문서화 한 것임이 틀림없다. 말하자면, 조선 개화파 관료들의 대표적인 자율적 개혁 조치로 손꼽을 수 있다.

제2단계에서는 다른 어느 기간보다도 더 많은 개혁 문건이 산출되었다.

이 무렵 승전국 일본의 공사 이노우에는 일본에서 총 42명의 고문관(顧問官)과 고문보좌관을 초청해 조선의 중앙정부에 배치하고 개혁 추진 자금으로 300만 엔의 차관을 도입해 착실하게 개혁 실적을 올리려 했다. 따라서 이 시기가 타율적 성격의 갑오경장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점이었다. 이 당시 공포된 개혁 관련 문건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것은 1895년 1월 7일 고종이 종묘(宗廟)에 서고(誓告)한 다음 공포한 ‘홍범(洪範) 14조’이다. 이 문건은 내무대신 박영효 가 그의 부하인 내무협판 유길준(兪吉濬)과 함께―이노우에 공사가 1894년 11월 20일과 21일 양일간에 걸쳐 국왕 고종에게 구두로 제안했던 ‘20개조 개혁안’을 참고해서―작성한 문건임에 틀림없다.11)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청국에 의부(依附)하는 생각을 끊어버리고 자주독립(自主獨 立)의 기초를 세운다.

(2) 왕실(王室) 전범(典範)을 제정하여 대위(大位) 계승(繼承)과 종척(宗戚)의 분의(分義)를 밝힌다.

(3) 대군주(大君主)는 정전(正殿)에 나아가 정사(政事)를 보되 친히 각 대신(大臣)에게 물어 재결(裁決)하고 후빈(后嬪).종척(宗戚) 은 간예(干預)를 불허한다.

(4) 왕실 사무와 국정 사무는 곧 분리하여 서로 혼합됨이 없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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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주_ 갑오경장에 대한 오해와 이해

(5) 의정부와 각 아문(衙門)의 직무, 권한을 명확히 제정한다.

(6) 인민의 세(稅)는 법령(法令)에 따라 율(率)을 정하되 멋대로 명목을 붙이거나 함부로 징수해서는 안 된다.

(7) 조세의 과징과 경비의 지출은 모두 탁지아문(度支衙門)에서 담당한다.

(8) 왕실 경비를 솔선 절감(節減)하여 각 아문과 지방관청의 모범 이 되도록 한다.

(9) 왕실 경비와 각 관부(官府)의 비용은 1년 예산을 정하여 재정 의 기초를 확립한다.

(10) 지방관제(地方官制)를 속히 개정해 지방관리의 직권을 제한 조절한다.

(11) 국중의 총준자제(聰俊子弟)를 널리 파견하여 외국의 학술과 기예를 전습한다.

(12) 장관을 교육하고 징병법(徵兵法)을 정하여 군제(軍制)의 기초를 확정한다.

(13) 민법과 형법을 엄명(嚴明)하게 제정하여 감금과 징벌을 남용 치 못하게 하고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전한다.

(14) 사람을 쓰되 문벌에 구애받지 말고 선비를 구하되 두루 조야(朝野)에 인재등용의 길을 넓힌다.

이 단계에서 김홍집-박영효 연립내각은 1895년 1월 11일 국내부(宮內 府)와 중추원(中樞院)을 본격적으로 발족시킴과 동시에 근대적 내각(內閣)제 도를 확립하는 개혁을 단행했다. 그 결과 조선의 중앙정부 체제는 1885년에 일본이 채택한 내각제와 유사하게 바뀌었다. 이 개혁을 통해 내각이 국가 정책의 입안과 집행 기구로 확립되고 왕실 업무는 궁내부가 맡아서 관장하도록 제도화되었다. 새로 창설된 중추원은 1894년 이전 정부의 고위 관직을 맡았던 보수파 관료들을 명예스럽게 은퇴시키고자 고안된 실권 없는 자문기관이었다.

1895년 4월 19일에 공포된 내각관제(칙령 제38호)에 따르면, 내각은 총리대신과 7부(외부, 내부, 탁지부, 군부, 법부, 학부, 농상공부)의 대신(大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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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을 포함해 총 8명의 각료로 구성된다.

그리고 내각에는 (1) 법률과 칙령안, (2) 세입 세출의 예산 및 결산, (3) 내외 국채에 관한 사항, (4) 국제조약과 기타 중요한 국제 조건, (5) 각 부간 주관 권한의 쟁의 신민의 상소 등 가운데 ‘특별히 대군주폐하(大君主陛下) 께서 하부(下付)하시는 건’, (6) 예산 외의 지출, (7) 칙(勅), 주임관(奏任官)의 임면과 진퇴, (8) 구규(舊規)의 존폐, 변경과 관청의 폐치, 분합, (9) 조세제도의 개혁, (10) 관유(官有) 토지, 삼림, 옥우(屋宇), 선박 등의 관리와 처분 등의 안건을 다루는 권한이 부여되었다. 말하자면, 내각은 조선 정부의 가장 강력한 정책입안기구이자 집행기관이 되었고 국왕의 권한은 크게 위축되었다. 요컨대, 갑오경장을 통해 조선의 국왕은 전제군주제하에서 마음껏 누렸던 인사권, 재정권, 군사권 등을 거의 다 박탈당하고 입헌군주제하의 ‘군림(君臨)하되 통치하지 않는’ 여느 군주와 같이 ‘홍범 14조’라는 일종의 헌법―조선의 마그나 칼타(Magna Carta)?―을 준수하며 궁내부에서 조달하는 일정한 봉급을 받으 면서 생활하는 ‘유급 자동인형’(salaried automaton)12)으로 격하되었다.

제3단계는 일본 정부가 삼국간섭에 굴복해 조선에서의 일본의 영향력이 실추된 것을 계기로 ‘독립주의자’ 박영효가, 갑신정변에 참여했다가 미국으로 망명한 서광범. 서재필 등 이른바 ‘갑신파’ 인물들과 주미 공사관에서 근무하거 나 유학한 경력이 있는 박정양, 이완용, 유길준, 윤치호 등 이른바 ‘친미파’(혹칭

‘정동파’) 인사들을 대거 내각에 영입한 다음 일본에 의지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개혁을 추진했던 시기였다. 이때야 말로 조선의 개화파 관료들이 갑오경장 전 기간에서 가장 자주적으로 개혁을 시도했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내무대신 박영효는 자기보다 연상이며 온화한 성품을 지닌 박정양을 총리대신으로 모셔 놓고 우선 지방행정 제도를 개혁하여 자신의 지지자들을 관찰사와 군수로 임명함으로써 전국적으로 자기의 권력 기반을 굳히는 한편 김홍집 내각에서 꾸준히 군무대신직을 유지해왔던 조희연(趙羲淵)을 자기의 심복인 이주회(李 周會)로 갈아치워 훈련대(訓練隊)를 장악함으로써 사실상의 ‘세도(世道)’로 부상하고 있었다. 그런 차에 6월 27일, 박영효는 삼국간섭 후 적극적으로 친러 정책을 펴면서 실추된 왕권의 만회를 노리던 고종과 민왕후의 견제 위협을 감지하고 그들의 행동을 감시, 통제하고자 훈련대를 궁성에 투입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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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주_ 갑오경장에 대한 오해와 이해

이를 허락하지 않은 왕실에서 7월 6일 밤, 박영효와 서광범을 제외한 전.현직 고관들을 불러모아 궁정회의를 열고 박영효에게 “국왕을 폐위시키고 왕비를 시해 혹은 폐서(廢庶)하려 했다”는 ‘불궤음도(不軌陰圖)’의 혐의를 뒤집어씌워 체포를 결정했다.13) 이에 박영효는 일본 공사관의 도움을 받아 7월 7일 일본으 로 탈출함으로써 다시금 망명길에 올랐다. (박영효는 10월에 미국으로 건너가 서재필을 만나 자기 대신 조국에 돌아가 개혁사업을 펼치라고 설득한 결과 1895년 12월에 서재필이 고국에 귀환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제3단계의 개혁운동은 36일 만에 막을 내렸다. 이 기간에 교육개혁에 관심이 많았던 총리대신 박정양은 학무대신 이완용과 협력해 한성사범학교 관제, 외국어학교 관제, 법관양성소 관제 등을 제정, 발포하면서 교육 개혁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제6단계의 김홍집-유길준 내각은 1895년 10월 민왕후시해사건이 발생 하기 직전에 구성되었는데, 갑오경장 초창기에 군국기무처를 장악했던 바로 그 세력이 핵심을 이루는 내각이었다. 이들은 민왕후가 10월 8일에 일본인에게 시해된 것을 뻔히 알면서도 10월 10일에 왕비폐위조칙을 발포하고 12월 1일에 가서야 뒤늦게 왕비 승하를 발표하는 등 일본인의 만행을 감싸주는 위장 조치들을 취함으로써 고종과 국민의 반감을 샀다. 설상가상으로 이들은 12월 30일에 단발령을 발포하고 이를 강행함으로써 일반 국민으로부터 더욱 거센 반발을 사, 을미의병(乙未義兵)을 불러일으켰고, 1896년 2월 11일 고종 이 아관파천을 단행하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자멸하고 말았다. 이 기간에 김홍집-유길준 내각은 1896년부터 건원(建元)을 하고 태양력(太陽曆)을 채택 하며, 악명 높은 훈련대를 폐지하고 육군편제강령을 통해 시위대(侍衛隊)와 진위대(鎭衛隊)를 신설하는 등 여러 가지 개혁을 단행했는데 이러한 조치들은 모두 자율적으로 추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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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갑오경장 추진세력의 인적 배경

갑오경장을 담당했던 개화파 관료들은 대체로 개항 이래 꾸준히 조선의 개화운동에 참여했던 인사들로서 갑오경장 기간 일본의 침략정책에 순응하면 서 ‘존망지추(存亡之秋)’에 처한 조국을 위기에서 구출하고 부국강병을 달성하 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던 ‘애국적 부역자들(patriotic collaborators)’

이었다. 그들은 개항 후 1880년대 초반에 외교사절단원 혹은 유학생으로 일본과 미국에 체재하면서 세계정세를 익히고 메이지유신으로 ‘문명 개화’한 일본과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꽃피운 미국의 문화를 심도 있게 살펴본 끝에 조선의 자주독립과 부국강병 달성에 필요한 개혁 방안을 고안하고 이를 실천에 옮김으로써 조선 왕조를 중흥(中興)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들 가운데에는 과거 (科擧)를 치르지 않고 환로(宦路)에 오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회적으로 신분이 낮은 중인(中人)이나 양반 서자(庶子)들이 많았고 또 기독교에 개종한 인사도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근대적 가치관을 바탕으로 전통적인 신분제도를 타파함으로써 능력본위의 평등사회를 이룩하려고 노력했다.

갑오경장을 추진했던 조선 정부의 개화파 관료들―통칭 ‘갑오개화파’―는 크게 세 그룹으로 분류할 수 있다.

(1). 갑오파 (온건개화파) :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조희연, 유길준 등 군국기무처 핵심 멤버들. 이들은 철저한 현실주의자들로서 갑오 경장기간 꾸준히, 적극적으로 일본공사관과 협력했다. 따라서 갑오 경장 중 가장 세력이 강했다.

(2). 갑신파 (급진개화파) :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윤치호 등 갑신정변에 참여했거나 김옥균 등과 친분이 두터웠던 인물들. 이들 은 대체로 이상주의자들로서 그 가운데 영수격인 박영효는 조선을 보호국화 하려는 일본공사 이노우에와 가끔 의견 대립을 했고 일본공 사관의 요구에 순종하는 김홍집을 멸시하는 태도를 나타냈기 때문에 서울 외교가(外交街)에서 ‘독립주의자’ 혹은 ‘충심의 애국자(patriot at heart)'14)로 소문이 나 있었다. (*서재필은 임명되었으나 부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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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주_ 갑오경장에 대한 오해와 이해

지 않았다.)

(3) 친미파 (중립개화파) : 박정양, 이완용, 이채연 등 주미 공사관 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인물들. 이들은 갑오파와 갑신파의 중간에 개재(介在)하여 기회주의적으로 운신하되 모나는 행동을 삼갔기 때문에 왕실 및 외국 공사들과 순탄한 관계를 유지했다. 갑오경장 중에 이들은 주로 교육 분야에서 돋보이는 개혁을 성취하고 있었다.

<부록 1>과 <부록 2> 참조

V. 갑오경장 추진 세력의 개혁 조치

갑오경장을 주도한 갑오개화파 관료들이 ‘자율적으로’ 추진한 주요 개혁 조치는 아래와 같다.

1. 독립정신 함양을 위한 조치

갑오개화파 관료들은 조선인의 애국심과 민족 자존심을 고양하려 했다.

그들은 갑오경장 초기에 조선의 국호를 ‘대조선국’이라고 칭하다가 1895년 10월에 이르러서는 ‘대조선제국(大朝鮮帝國)’이라 부르고, 조선의 국왕을 ‘대 조선 국왕’이라 칭하다가 ‘대조선황제(大朝鮮皇帝)’로 격상시켜 부르기로 결의 했다. 또한, 시모노세키조약의 성립을 계기로 독립경일(獨立慶日, 6월 6일)과

‘개국기원절(開國紀元節)’을 제정, 경축하고, 태극기의 사용을 장려했다. 1895 년 12월 30일에는 그다음 해부터 독자 연호인 건양(建陽)을 사용하기로 결의했 다. 그들은 또 1895년 2월 초 내각회의에서 송파에 있는 청제(淸帝) 공덕비를 묻어버리고 서대문 밖에 있는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모화관(慕華館)의 명칭 을 바꾸어 그 용도를 달리할 것을 의논한 바도 있다. 1895년 1월 30일 이후 정부가 공포한 칙령, 법령, 관제 등 주요 공문서와 관보에 국한문 혼용과 순 한글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갑오개화파는 또한 본국사(本國史)의 교육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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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한 민족주의 사상 고취에 열의를 보였다. 이러한 일련의 민족주의적 국위선 양 노력은 1897년에 창립된 독립협회가 추진한 사업들의 선구로서 특기할 만하다.

2. 자주 외교의 전개

갑오개화파 관료들은 원래 반청(反淸) 독립사상이 강한 세력이었다. 따라 서 그들은 집권하자마자 외무아문(外務衙門, 나중에는 外部)을 신설해 근대적 인 자주 외교를 펼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우선 1882년 이래 조선이 청국과 맺은 각종 불평등조약을 파기하고 청국 연호(年號)의 사용을 중지하며, ‘보호청 상규칙(保護淸商規則)’을 제정, 발포해 청국 상인이 한동안 조선에서 누렸던 모든 특권을 박탈했다. 이와 동시에 그동안 청의 방해로 중단되었던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등 유럽 체약국(締約國)들에의 파사(派使)를 재개하기로 결의했다.

3. 지방행정제도의 개혁과 초보적인 민주적 지방자치제 실현

앞에서 살핀 대로, 갑오개화파는 민왕후를 정치권에서 배제하고 고종을 일본의 메이지 천황과 같이 개혁 정치의 상징으로 이용하면서 자기들이 장악한 내각에 권력을 집중시키는 데 주력했다. 이것은 전통적인 절대군주제를 지양하 고 내각 중심의 입헌군주제를 수립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내각중심 통치 체제는 1885년에 일본이 채택한 체제를 본뜬 것으로서, 일찍이 갑신정변 당시 홍영식(洪英植)이 그의 ‘국정이혁안안(國政釐革案)’ 제1조에서 제시했던 정치개혁 방안이기도 하다.

갑오개화파는 일본 공사관의 반대에도 1895년 6월 종래의 도(道)・부 (府)・군(郡)・현(縣) 등의 대소 행정구역을 통폐합해 23부(府) 337군(郡) 체제로 일원화하는 개혁을 단행했다. 이때 발포된 조칙(詔勅)을 보면, 그들은 종래 조선의 지방제도는 행정 단위인 군과 현 등의 크기가 고르지 않고 불필요한 지방관원이 많아 그들의 가렴주구가 심하며, 나아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간의 의사소통이 원활치 못한 폐단을 고치고자 개혁을 단행했음을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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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정치, 행정제도의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갑오개화파 관료 들은 한국의 민주주의 발달사에서 특기할 만한 두 개의 정치 개혁을 시도했다.

첫째, 1894년 10월 9일의 군국기무처 회의에서, 회의원들은 군국기무처 의 장정(章程)을 바꾸어 군국기무처를 입법과 자문 역할을 담당한 의회(議會) 혹은 의사부(議事府)로 규정할 것을 의결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군국기무처를

‘정부(政府)’ 또는 ‘행정부(行政府)’에 병행, 대치하는 기관으로 만들려고 했 다.15) 이것은 나중에 독립협회에서 추진했던 의회설립안(議會設立案)을 선행 하는 조치로서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이 안은 열흘 후에, 아마도 일본 공사의 반대 때문에, 보류되고 말았다.

둘째, 갑오개화파는 1895년 12월 12일에 <향회조규(鄕會條規))>와 <향 약판무규정(鄕約辦務規程)>을 발포함으로써 초보적인 민주적 지방자치제를 시행하고자 했다. <향회조규>에 의하면, 향회는 이회(里會), 면회(面會), 군회 (郡會)의 3급으로 구성되며, 각 향회의 회원은 존위(尊位), 집강(執綱), 군수(郡 守) 등 관리, 속리와 각급 단위 구역에서 공거(公擧)한 자로 충원하되, 각급 향회에서는 교육, 호적과 지적, 위생, 사창, 도로 교량, 신산 흥업, 등등에 관한 사항을 ‘공의(公議)’하도록 규정했다. <향약판무규정>에서는, 종래 존위 (尊位)와 집강(執綱)을 관(官)에서 차정(差定)하던 예(例)를 폐지하고 그 대신 매년 정월에 ‘해리인(該里人)이 회의해 반상(班常)을 구(拘)치 물(勿)하고 권선 (圈選)한 뒤 본 면(面).군(郡)에 보고하도록’ 규정했다.16)

이같은 향회와 향약 규정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지방행정조직을 시의에 맞게 변통, 활용하려 했던 개혁 기도이다. 이(里)와 면(面)이라는 최하급 행정 단위에서 지방민이 반상(班常)에 구애받지 않고 ‘권선(圈選)’이라는 선거절차 를 통해 자신들의 대표자를 뽑고 그 대표자들이 지방행정에 관련된 사안을

‘공의’하도록 한 것은 민주주의적인 지방자치제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큰 의의가 있다. 말하자면, 갑오개화파는 풀뿌리 민주주의를 시도 하고 있었다.

4. 대규모 차관도입을 통한 경제발전 추진

갑오개화파는 나라의 재정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며 근대적인 상공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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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성함으로써 조선의 경제를 급속히 발전시키려 했다. 그들은 국가의 재무행정 을 탁지부 산하로 일원화하는 한편 은본위제와 금납제의 실시, 도량형의 통일 등 각종 조치를 통해 근대적인 재정체계를 확립하려 했다. 농상공부를 신설하 고 그 산하에 근대적 산업 육성에 필요한 기관들을 설립함으로써 정부 주도로 상공업을 진흥코자 했다. 육이전(六矣廛)과 같은 특권 상인의 조직을 혁파하고 그 대신 상무회의소를 설립함으로써 민간의 기업의욕을 고양하려 했다.

갑오개화파의 경제발전 계획 중에 가장 돋보이는 것은 대규모 외채(外債) 를 도입해 이로써 근대적인 상공업을 일으킨다는 경제 발전계획이었다. 1895 년 3월에 갑오개화파 정부는 일본은행으로부터 300만 엔의 차관을 도입한 바 있다. 이 차관은 조선 왕국이 그때까지 외국에서 빌린 국채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의 것이었다. 갑오개화파는 1896년 1월에 이르러 주한 일본공사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에게 500만 엔의 새로운 차관을 신청했다. 이때 조선 정부 에서 고무라 공사에게 제출한 ‘기국채의(起國債議)’에 의하면, 그들은 이 차관 을 재정 정리를 포함한 각종 개혁의 추진 경비와 민간산업 진흥 자금으로 활용할 계획이었다. 그들은 이 돈으로써 경인철도를 건설. 운영하는 것 이외에, (1) 왕실 재정의 정리, (2) 징세법의 개량, (3) 새로운 세원(稅源)의 발굴, (4) 민간 상공업의 진흥 등 여러 가지 세입(歲入) 증대 방책을 마련함으로써 1898년까지 차관의 원금과 이자를 상환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차관이 실현되면 1898년 이후 조선은 “더는 국채가 필요 없이 독력(獨力)으로 세계(歲計) 유지가 가능한 독립자리(獨立自理)의 역(域)’에 도달할 것”이라고 했다.17) 이것이 과연 믿을 수 있는 얘기인지는 차치하고, 이 구상은 한국 역사상 가장 대담한, 외자도입(外資導入)을 통한 장기 경제발전 계획으로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구상은 그 원형이 홍영식 의 ‘국정이혁안’에 나타나 있었다.

5. 근대적 교육기관의 설립과 외국 유학 / 영어 교육 장려

갑오개화파 관료 가운데에는 일본과 미국 등에서 근무하거나 유학한 경력이 있는 인물이 많았다. 그들은 근대적인 합리주의와 실용주의 문화를 숭상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기독교에 개종했거나 기독교를 받아드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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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주_ 갑오경장에 대한 오해와 이해

민중의 교화 도구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인사들도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갑오경장을 추진하면서 유교 중심의 과문(科文) 위주 교육을 지양하고 그 대신 합리성과 실용성 위주의 근대적 교육제도를 수립함으로써 ‘편민이국(便 民利國)’과 ‘부국강병’을 달성하고자 했다. 그들은 국문, 본국사, 만국역사, 지리, 외국어(특히 영어), 작문법, 물리, 화학, 체조 등을 가르치는 신식 학교들 을 많이 설립함으로써 애국심이 강하고 국제적인 안목을 갖춘 실용, 합리주의 적인 인재들을 양산하려 했다.

1894년 7월 30일에 군국기무처는 학무아문이라는 교육전관 부서를 신설하고 이 아문 주관하에 소학교, 중학교. 대학교 등 3단계의 일반 학교들과 외국어학교 등 특수 전문학교를 점차 개설한다는 원대한 교육개혁안을 의결했 다. 이러한 계획에 따라 초대 학부대신 박정양은 1894년 10월 15일을 기해 서울 교동에 사범학교와 소학교를 개설하고, 11월 5일과 11월 6일에는 주동(鑄 洞)에 일어학교, 그리고 전동(磚洞)에 영어학교를 각각 세웠다. 1895년에 5월 12일에 정부가 한성사범학교(漢城師範學校) 관제를 공표한 다음 교사 양성에 주력한 결과 11월 14일에 서울의 매동, 정동, 혜동, 제동 등에 네 곳에 소학교가 개설되었다, 정부는 사범학교의 졸업생이 배출되는 대로 1896 년에 지방의 22부에도 소학교를 세울 예정이었다. 이밖에 그 무렵에 법관양성 소 관제(1895. 4. 19), 외국어학교 관제(1895. 6. 2), 성균관관제(1895. 8.

21) 등이 제정, 공포되었다.

갑오개화파는 신식학교의 개설과 동시에 교과목(敎科目)의 개혁을 서둘 렀다, 1895년 9월 27일 학부대신 이완용의 명의로 발표된 ‘성균관경학과규칙’

에서는 경학과(經學科)에서 사서삼경 및 송원명사(宋元明史). 본국사. 작문 이외에 ‘시의에 의해’ 본국지지, 만국사. 만국지지, 산술도 가르치도록 규정했 다.

갑오개화파가 추진한 교육 개혁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것은 외국 유학의 장려와 영어 교육의 강조였다. 그들은 ‘홍법 14조’의 제11항, 즉 “국중(國中)의 총준자제(聰俊子弟) 널리 [외국에] 파견해 외국의 학술과 기예를 전습(傳習)한 다”에 따라 1895년에 5월에 도쿄에 있는 게이오의숙과 ‘유학생위탁계약’을 맺고 114명의 관비 유학생을 유학시켰다. 그들은 1896년에 다수의 육군 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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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 5제9 갑신정변에서 대한민국 건국까지

와 세무 관리를 일본에 파견해 현지 위탁교육을 받게 할 예정이었다. 갑오개화 파는 영어 교육의 활성화를 위해 1895년 2월 16일 미국인 감리교 선교사가 설립, 운영하는 배재학당과 위탁교육 계약을 맺고 200명의 관비 장학생을 이 학당에 입학시켰다. 이 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은 영어 이외에 지리, 수학 과학, 만국사, 고대사 및 정치학 등 과목을 택해 배우는 동시에 교내 예배당에서 매 주일 시행되는 예배행사에 참석해 기독교 교리에 접했을 것이다.18)

6. 능력본위 평등사회 지향의 개혁조치

갑오개화파 관료들 가운데에는 조선 왕조의 폐쇄적인 양반중심 사회질서 에 불만을 품은 중인과 서얼(庶孼)이 많았다. 그들은 집권하자마자 전통적인 신분제도와 문벌의 타파에 착수했다. 그 결과 사민동등지법(四民同等之法)을 확립해 인재등용의 문을 개방했다. 이러한 개혁 정책은 앞에서 살핀 대로 군국기무처에서 7월 30일과 8월 2, 3일에 의결한 몇 가지 ‘혁명적’ 의정안들에 반영되었다. 이들 의정안 이외에 내무대신 박영효는 ‘음죄(淫罪)를 범한 여(女) 를 관비(官婢)로 몰역(沒役)치 말 것’과 ‘남편의 처 폭행 금지’ 등 여권 보호에 관련된 훈시를 발포하기도 했다.

VI. 맺음말

이상의 논의를 통해 갑오경장은 완전히 타율적인 개혁운동은 아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생각한다. 청일전쟁을 도발한 일본은 1894년 8월부터 1895년 5월까지 조선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든다는 계획하에 조선의 기간(基 幹)제도들을 일본식으로 개혁하는 작업에 열을 올렸다. 그러나 1895년 5월 4일에 삼국간섭에 굴복한 다음 그 계획을 포기하고 조선의 내정개혁에 대한 간섭을 중지함으로써 조선인 개화파 관료들이 자율적으로 개혁을 추진하는 것을 방임했다. 갑오경장 중 개혁이 타율적으로 추진된 기간과 자율적으로 추진된 기간을 비교해 보면 거의 반씩이다. 따라서 갑오경장은 타율 반, 자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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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주_ 갑오경장에 대한 오해와 이해

반의 개혁운동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갑오경장 기간에 기안(起案)되거나 시행된 개혁 조치 가운데에는 조선인 개화파 관료들이 자율적으로 입안하고 추진한 것들이 꽤 많았다. 이 점으로 미루어 보아도 갑오경장은 적어도 반(半)은 조선인이 자율적으로 추진한 개혁운동이었다고 간주할 수 있다.

갑오경장기간에 추진된 개혁 조치들 가운데에는 갑신정변의 개혁 정신을 이어받은 것들과 1897년 이후 독립협회가 실현하고자 했던 개혁의 선구가 되는 것이 많았다. 이 점에서 갑오경장은 갑신정변의 전통을 이어받아 추진한 개혁운동이며 독립협회 운동의 선구를 이루는 고리라고 말할 수 있다.

갑오경장은 한국의 민주주의 발달에 여러 모로 크게 기여하였다. 갑오경 장 중 일부 개화파 관료들은 일종의 의회 설립운동을 시도했고 또 향회를 통해 민주주의적 지방자치제를 시행하려 했는데 이것들은 한국의 대의 민주주 의 발달사에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대목들이다. 그러나 이들 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갑오경장을 통해 (1)조선의 전통적 전제군주제가 입헌군주제로 바뀌면 서 상대적으로 신권(臣權), 즉 민권이 향상되었으며, (2)반상(班常) 등급의 폐지와 노비와 기타 천민의 면천(免賤)조치를 통해 사민평등(四民平等)의 사회 질서가 형성됨으로서 사회구성원 모두가 주인의식을 갖게 되었으며, (3)근대 적인 교육제도가 발달함으로써 많은 국민들이 서구의 문화, 특히 민주주의 사상에 접하고 이를 실현하는데 필요한 능력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갑오경장은 한국에서 대의 민주주의가 발달할 수 있는 정치적, 사회적, 교육적 기초를 닦아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

갑오경장은 한국인이 과거 천 년 이상 숭배했던 중국의 제도와 문물 을 버리고 그대신 승전국 일본의 제도와 문물을 국가발전의 모델로 삼아 추진한 최초의 근대화 운동이었다. 갑오경장을 계기로 우리 민족은 역사상 처음으로 대륙 문화권에서 이탈해 해양문화권으로 진입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갑오경장 은 문명사적으로 우리민족에게 획기적인 긍정적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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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 5제9 갑신정변에서 대한민국 건국까지

< 주 >

1. ‘갑오경장’이란 1894년에 개시된 대규모 제도개혁을 지칭하는 역사용어이 다. 협의(俠義)의 갑오경장은 1894년 7월 27일부터 그해 10월 29일까지 군국기무처 가 추진했던 제도개을 의미하며, 광의(廣義)의 갑오경장은 1894년 7월부터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을 기하여 조선의 친일정권이 붕괴될 때까지의 개혁운동을 의미한 다. 발표자가 이 글에서 다루는 갑오경장은 광의의 것이다.

2. 일본군의 경복궁 강점에 관해서는, 졸고 「갑오경장을 위요한 일본의 대한정 책」 , 『갑오경장연구』(일조각, 1990), 12-13쪽 참조. 대원군의 입궐과 김홍집 정권의 탄생에 관해서는 졸고 「대원군과 청일전쟁」, 『동학농민농민봉기와 갑오경 장』(일조각, 1998), 36-42쪽과 졸고, 「김홍집―개혁을 서둘다가 임금과 백성에게 배척당한 친일 정치가―」, 『한국사시민강좌』 31(2002), 110-111쪽 참조.

3. 졸고 「청일전쟁 중 일본의 조선보호국화 기도와 갑오..을미경장」, 『갑오 경장연구』, 40쪽 참조.

4. 위의 논문, 38-42쪽 참조.

5. 위의 논문, 27-28쪽 참조.

6. 오토리 공사가 제1차 노인정 회담에 제출한 이 문서는 ‘유길준 일파’의 도움을 받아 작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주진오, 「갑오경장의 새로운 이해」, 『역사 비평』 1994.가을호, 43쪽 참조.

7. 앞의 졸고(「청일전쟁 중 일본의 조선보호국화 기도...」), 43-45쪽.

8. 위의 졸고, 68-71쪽.

9. 위의 졸고, 80-81쪽.

10. 이 표는 졸고 「갑오개화파 관료의 집권경위, 배경 및 개혁구상」 『갑오경 장연구』, 189쪽에 제시된 <표 1>을 수정.보완한 것이다.

11. 졸고, 「박영효와 갑오경장」 『동학농민봉기과 갑오경장』, 100쪽.

12. Isabella B. Bishop, Korea and Her Neighbours (Seoul: Yonsei University Press, 1970: 초판, 1898), p. 261.

13. 앞의 논문, 89-90쪽 참조.

14. 위의 논문, 82쪽.

15. 군국기무처 회의원들이 군국기무처 장정을 바꾸어 군국기무처를 ‘의회’

내지 ‘의사부’로 만들어 의정부에서 독립시키기로 결의한 날짜(10월 9일)는 어윤중

(28)

제2주_ 갑오경장에 대한 오해와 이해

(魚允中)이 회의의 사회를 맡았던 날이었다. 그런데 어윤중은 이미 9월 1일에 국왕에 게 올린 사직소에서 군국기무처를 ‘의회’라고 칭하고 있었다. 졸고, 「갑오개화파 관료의 집권경위...」, 198쪽 참조.

16. 향회 수준에서 민주적 지방자치제를 실시하자는 안은 원래 8월 12일의 군국기무처회의에서 의결된 사안이었다. 그런데 ‘향회조규’와 ‘향약판부규정’이 유길 준(兪吉濬)이 내부대신 직을 맡고 있던 1895년 12월 18일에 발포된 점으로 미루어 향회 수준에서 민주적 지방자치제를 실시하자는 안은 유길준의 창안이라고 여겨진다.

17. 앞의 졸고, 209-212쪽. ‘기국채의’의 작성자는 그 당시 탁지부 대신이었던 어윤중이다.

18. Lak-Geon George Paik, The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s inKorea, 1832-1910 (Seoul: Yonsei University Press, 1907: 초판, 1929), pp. 451-452;

백낙준, 『한국개신교사』(연세대학교 출판부, 1973), 240-241쪽 참조.

(29)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 5제9 갑신정변에서 대한민국 건국까지

성명 내각

직책 연령

(만) 본

관 신분

(부관직)

등과 외유국 갑오년

이전의 관직 김홍집

(金弘集) 총리대신 52 경주 양반

(참판) 문과 일본ㆍ청

국 좌의정

김윤식

(金允植) 외무대신 59 청풍 양반 〃 청국 외아문 독판

어윤중

(魚允中) 탁지대신 46 함열 양반 〃 일본ㆍ청

국 선혜청 제조

박정양

(朴定陽) 학무대신 53 반남 양반

(목사) 〃 일본ㆍ미

국 주미 공사

김가진

(金嘉鎭) 외무협판 48 안동 서자

(예판) 〃 일본 주일

판사대신 안경수

(安駉壽)

탁지협판 ㆍ 경무사

41 죽산 서자 무 일본 전환국 방판

조희연

(趙羲淵) 군무협판 38 평양 서자 무과 일본ㆍ청

국 기기국 방판

유길준

(兪吉濬)

의정부도 헌ㆍ 내무협판

38 기계 양반 무 일본ㆍ미 국

통리기무아문 주사

김학우

(金鶴羽) 법무협판 32 김해 서자 〃

일본ㆍ청 국 ㆍ러시아

기기국ㆍ전환 국 위원 이윤용

(李允用) 경무사 40 우봉 서자

(판서) 〃 무 한성부 판윤

권재형

(權在衡)

한성부

부윤 39 안동 서자 〃 일본 주일 서리

판사대신

<부록 1>

군국기무처 주요 회의원의 배경

(30)

제2주_ 갑오경장에 대한 오해와 이해

ㆍ직책성명 나이 (만)

본관(신

분) 등과 외유 경력 갑오년 이전

최종관직 1885~1894 주요경력 박정양

(朴定陽) 총리대신

55 반남 (양반)

문과 (1886)

조사일본시찰단 조사 (1881), 주미 공사(1887~88)

내무부 독판

(1894) 호조판서

박영효 (朴泳孝) 내부대신

35 반남 (양반)

일본 수신사 (1882~83), 일본 및 미국 망명생

활 (1885~94)

광주유수 (1883)

일본ㆍ미국 망명생활

김윤식 (金允植) 외부대신

60 청풍 (양반)

문과 (1874)

청국 영선사 (1881~82)

독판교섭 통상사무 (1885~87)

면천군 유배 (1887~94)

어윤중 (魚允中) 탁지부대신

47 함열 (양반)

문과 (1871)

조사일본시찰단 조사 (1881), 청국방문

(1882)

선혜청 제조 영일현 유배 (1893~1894)

신기선 (申箕善) 군부대신

44 평산 (양반)

문과 (1876)

통리기무아문 주사(1882)

여도 유배 (1886~94)

이완용 (李完用) 학부대신

37 우봉 (양반)

문과 (1882)

주미 공사관 종사관 ㆍ

대리공사(1887~90)

교환서 총판 (1893)

공조참판

서광범 (徐光範) 법부대신

37 달성 (양반)

문과 (1880)

미국 보빙사 종사관 (1883~90)

승정원 가주서 (1882)

미국 망명생활 (1885~94)

김가진 (金嘉鎭) 농상공부대

49 안동 (양반)

문과 (1886)

주일 공사관 참찬관 ㆍ

판사대신(1887~91)

부호군(1893) 부호군 (1893)

유길준 (兪吉濬) 내부협판

39 기계 (양반)

일본 유학(1881~82) 미국 유학(1883~85)

통리교섭통상 사무아문 주사

(1883)

한성부 내 유배 (1886~92) 서재필

(徐載弼) 외부협판※

32 달성 (양반)

문과 (1879)

일본 유학(1883~84) 미국 유학(1886~92)

조련국 사관장 (1884)

미국망명ㆍ 유학ㆍ병원개 업(1885~95) 안경수 42 죽산 주일 공사관 통역관 전환국 방판· 전환국 방판

<부록 2>

1895년 6월 박정양ㆍ박영효 내각 각료들의 배경

(31)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 5제9 갑신정변에서 대한민국 건국까지

(安駉壽)

탁지부협판 (서자) (1887),

일본 방문(1888~92)

장위영 영관 (1893) 윤치호

(尹致昊) 학부협판

31 해평 (서손)

일본 유학(1881~83) 중국 유학(1885~88) 미국 유학(1888~93)

통리교섭통상 사무아문 주사

(1884)

상해 중서학원 교수 (1893~95) 이재정

(李在正) 법부협판

49 우계 진사 (1882)

전우국 주사

(1893) 전우국 주사

이채연 (李采淵) 농상공부협

35

주미 공사관 대리공 사

(1890~91)

전우국 방판 (1893)

참의교섭 통상사무 (1894)

이주회 (李周會) 군부협판

52 광주 경상좌수영

정령관(1894)

경상좌수영 정령관

권재형 (權在衡) 내각총서

40 안동 (서자)

주일 공사관 서리공 사

(1891~93)

통리교섭통상 사무아문 주사

(1885~91)

전우국 주사 (1891)

이윤용 (李允用)

경무사

42 우봉 (서자)

한성부 판윤 (1888)

대호군 (1894)

※ 당시 미국에 있던 서재필은 이 직책에 취임하지 않았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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