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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이씨 월성군파 기, 행장, 묘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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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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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慶州李氏 月城君派 記, 行狀, 墓碑銘)

▣시조(始祖) 표암공(瓢巖公) 이알평(李謁平) ··· 2

▣중시조(中始祖) 소판공(蘇判公) 이거명(李居明) ··· 2

▣월성군(月城君) 이지수(李之秀) ··· 2

▣정렬공(貞烈公) 이규(李揆) ··· 2

▣재신공(宰臣公) 이진(李縉) ··· 3

▣화헌공(花軒公) 이만실(李蔓實) ··· 3

▣계천군(鷄川君) 이종직(李從直) 계(系) ··· 32

▣판서공(判書公) 이양직(李良直) 계(系) ··· 71

▣대사헌공(大司憲公) 이승직(李繩直) ··· 194

▣판관공(判官公) 이불민(李不敏) ··· 203

▣충민공(忠愍公) 이명민(李命敏) ··· 206

▣금호공(琴湖公) 이시민(李時敏) ··· 218

▣충순위공(忠順衛公) 이숭준(李崇準) ··· 229

▣용재공(慵齋公) 이종준(李宗準) ··· 247

▣용재공(慵齋公) 이종준(李宗準) 계(系) ··· 292

▣눌재공(訥齋公) 이홍준(李弘準) ··· 445

▣훈도공(訓導公) 이공준(李公準) ··· 459

*《경주이씨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

와 《정민록(鼎珉錄)》 등을 참조해 서 원문과 번역문을 수록했습니다.

*내용에 오류가 있을 수 있으므로

⎙편집(編輯)은 2020년 11월.

용재공(慵齋公) 이종준(李宗準)의 16世孫 이제민(李濟珉)

*다음카페:

http://cafe.daum.net/yongjaegong

✍일러두기

(2)

문서의 처음 월성군 계천군系 판서공系 대사헌공 판관공 충민공 금호공 충순위공 용재공 용재공系 눌재공 훈도공

▣시조(始祖) 표암공(瓢巖公) 이알평(李謁平) ··· 4

□표암단소상향축문(瓢巖壇所常享祝文) ··· 4

□始祖遺墟瓢巖碑(시조유허표암비) -後孫(후손) 敬一(경일) 撰(찬)··· 4

●시조유허표암비(始祖遺墟瓢巖碑) 역문(譯文) ··· 5

□碑閣重修記(비각중수기) -後孫(후손) 裕元(유원) 撰(찬)··· 6

●비각중수기(碑閣重修記) 역문(譯文) ··· 7

□追遠齋記(추원재기) -完山(완산) 李震幸(이진행) 撰(찬), 後孫(후손) 文炯(문형) 記(기)··· 8

●추원재기(追遠齋記) 역문(譯文) ··· 8

▣중시조(中始祖) 소판공(蘇判公) 이거명(李居明) ··· 9

□蘇判公祀壇碑(소판공사단비) -蘇判公(소판공) 38세손 熙雨(희우) 謹述(근술)··· 9

●소판공사단비(蘇判公祀壇碑) 역문(譯文) ··· 10

▣월성군(月城君) 이지수(李之秀) ··· 13

□忠賢祠上樑文(충현사상량문) -仁同(인동) 張建德(장건덕) 謹撰(근찬), 大司憲公(대사헌공) 17대손 東鎬(동호) 謹書(근서)··· 13

●충현사상량문(忠賢祠上樑文) 역문(譯文) ··· 14

□津陽書院奉安告由文(진양서원봉안고유문) ··· 15

□津陽書院常香祝文(진양서원상향축문) ··· 16

●진양서원상향축문(津陽書院常香祝文) 역문(譯文) ··· 16

□金紫光祿大夫月城君祭壇碑銘(금자광록대부월성군제단비명) 并序(병서) 二十一世 (21세) -宗裔(종예) 鍾醇(종순) 撰(찬)··· 16

●금자광록대부월성군제단비명(金紫光祿大夫月城君祭壇碑銘) 병서(并序) 역문(譯文) · 18

▣정렬공(貞烈公) 이규(李揆) ··· 21

□先祖貞烈公事績(선조정렬공사적) -21세손 東鎬(동호) 泣血謹編(읍혈근편)··· 21

●선조정렬공사적(先祖貞烈公事績) 역문(譯文) ··· 22

(3)

□貞烈公諱揆行狀(정렬공휘규행장) -宗裔孫(종예손) 鍾醇(종순) 謹撰(근찬)··· 22

●정렬공휘규행장(貞烈公諱揆行狀) 역문(譯文) ··· 25

▣재신공(宰臣公) 이진(李縉) ··· 28

□高麗宰臣紫金魚袋慶州李公祀壇碑銘(고려재신자금어대경주이공사단비명) 并序(병 서) -宗裔孫(종예손) 鍾醇(종순) 謹撰(근찬)··· 28

●고려재신자금어대경주이공사단비명(高麗宰臣紫金魚袋慶州李公祀壇碑銘) 병서(并序) 역문(譯文) ··· 29

▣화헌공(花軒公) 이만실(李蔓實) ··· 30

□吏曹判書花軒公誌狀(이조판서화헌공지장) -6세손 惟精(유정) 識(지)··· 30

●이조판서화헌공지장(吏曹判書花軒公誌狀) 역문(譯文) ··· 30

문서의 처음 월성군 계천군系 판서공系 대사헌공 판관공 충민공 금호공 충순위공 용재공 용재공系 눌재공 훈도공

(4)

문서의 처음 월성군 계천군系 판서공系 대사헌공 판관공 충민공 금호공 충순위공 용재공 용재공系 눌재공 훈도공

▣시조(始祖) 표암공(瓢巖公) 이알평(李謁平)

문서의 처음 목차

□표암단소상향축문(瓢巖壇所常享祝文)

목차

維丘降靈誕膺天祥 恊贊羅祊君長于 梁鼎彝鏤勳億禩 流芳禮倣不遷牲 石載彰維玆 下丁精禋是 將子姓蠲體肆薦羶薌於 皇皇祖庶右洋洋

□始祖遺墟瓢巖碑(시조유허표암비)

목차

-後孫(후손) 鰲恩君(오은군) 敬一(경일) 撰(찬)

謹按慶州李氏舊譜에 曰始祖의 諱는 謁平이며 初降辰韓之瓢巖峰이라하니 初降云 者는 降生之謂歟인저 詩曰維嶽降神하야 生甫及申이라하고 蘇子瞻이 以爲申呂- 自 嶽降이라하니 古今所傳을 不可誣也로다

盖崧高靈淑之氣- 鍾精毓英하야 篤生哲人은 理之所必然者而獨東京誌所載에 六部 大人이 皆從天而降云者요 異焉이라

神人이 降于太白山檀木下而爲檀君과 與蘿井剖卵하야 遂爲佐命功臣等說이 自昔沿 襲이나 而齊東之言으로 疑信이 固難定이라 惟此瓢巖一區之爲及梁大人之遺墟而爲我 李根本之地則明矣니

自始祖以來로 積德累仁하고 慶流雲仍하야 羅麗之間에 簪組蟬聯하야 名碩相望하 고 逮于我朝하야 枝達派分하야 子孫千億에 廼公廼卿하고 世濟厥美하야

二千年之間에 赫舃爲吾東望族者- 惟及梁公之餘蔭이 是庇是庥耳라 金鰲之麓이 何 處是我始祖의 衣履之藏而年代渺茫하고 文獻無徵하야 遂失其傳하니 在今後孫之追遠 而想慕者는 獨瓢巖在耳라

歲丁未에 後孫集星之守永陽也에 鐫刻于巖上하야 標識之러니 慶之諸孫이 以爲此

(5)

不足表揚遺跡이라하야

廼伐石爲穹碑하야 將樹於巖下할새 宗人堯臣甫- 來徵記文於敬一이어늘 余- 以爲 此事를 不謀於衆이면 似有甲乙之論이나 而其爲不忘本則亦或一義리라 旣樹之後에 永世衞護하야

俾旡旣樹之後永世衞護旡俾童敲而角勵則顧非在慶諸人之責乎아 遂爲之書하노라

*1987년 대종보(大宗譜)

●시조유허표암비(始祖遺墟瓢巖碑) 역문(譯文)

목차

-후손 오은군(鰲恩君) 경일(敬一) 찬(撰)

삼가 살피건데 경주이씨(慶州李氏)의 구보(舊譜)에 이르기를 ‘시조(始祖)의 휘는 알평(謁 平)이며 진한(辰韓)의 표암봉(瓢巖峰) 아래에서 처음 내려왔다’하였으니 처음 내려왔다 함은 탄생을 말한 것이다. 시경(詩經)으로 이르되, ‘산악(山嶽)이 신(神)을 내리어 보(甫) 및 신 (申)을 탄생하였다’하였고 소자첨(蘇子瞻)이 ‘신(申)과 여(呂)가 산악(山嶽)으로부터 내려왔 다’고 하였으니 고금(古今)에 전설을 믿지 않을 수 없다.

대저 산이 높고 맑은 기운이 정(精)을 모으고 영(英)을 길러 철인(哲人)을 출생(出生)함은 이치에 필연적인 것으로서 동경지(東京誌)에만 기재하기를 ‘육부대인(六部大人)이 다 하늘로 쫓아 강생(降生)하였다’고 한 것과는 다르다. 신인(神人)이 태백산(太白山) 박달나무 아래에 내리어 단군(檀君)이 되었다느니 또 나정부(羅井部)의 알에서 나와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 었다느니 등등의 말은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설로서 떠도는 말과 같아서 의심해야 할지 믿 어야 할지 결정하기 어려우나 오직 표암일구(飄巖一區)만은 급량대인(及梁大人)의 유허(遺 墟)로 우리 이씨(李氏)의 근본지(根本地)가 되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

시조(始祖) 이래로 덕(德)을 쌓고 인(仁)을 쌓아서 경사가 자손(子孫)에게 내리어 신라(新 羅)와 고려(高麗)의 사이에 높은 관직이 이어왔고 명망이 훌륭한 분이 서로 바라볼 정도였 다. 아조(我朝, 조선朝鮮)에 미치어 나뭇가지처럼 뻗고 물줄기처럼 나뉘어 자손(子孫)이 천 (千)·억(億)으로 불어났고 공(公)도 되고 경(卿)도 되어 대대로 아름다운 업적을 이루어 이천 년(二千年) 사이에 혁혁(赫赫)하여 우리 동방에 유명한 집안이 된 것은 오직 급량공(及梁公) 의 음덕이 감싸주고 덮어준 것이다.

금오산(金鰲山) 어느 기슭이 우리 시조의 묘소인가? 연대(年代)가 아득하고 문헌(文獻)이 고징할 수가 없으므로 드디어 실전(失傳)되고 말았으니 지금에 있어서 후손(後孫)이 추원(追 遠)하여 사모할 데는 유독 표암(瓢巖)이 있을 뿐이다. 정조(正祖) 11년 정미(丁未, 1788)에

(6)

후손(後孫) 집성(集星)이 영양군수(永陽郡守)로 있을 때 표암(瓢巖) 위에다 깊이 새기어 기 록했는데 경주(慶州)의 모든 후손(後孫)들이 이르기를 ‘이것으로는 유적(遺跡)을 표양할 수 가 없다’하여 이에 돌을 다듬어 큰 비석을 표암(瓢巖) 아래에 세우려 하자 일가(一家) 사람 요신(堯臣)이 찾아와서 경일(敬一)에게 기문(記文)을 지으라 하니 내가 말하기를, “이 일은 많은 사람에게 상의하지 않았으니 갑(甲)·을(乙)의 의논이 있을 것이나 그 근본을 잊지 않음 이 되는 것에는 또한 한가지 의의가 있다 하겠다. 이미 세운 후에도 긴 세상에 보호하여 아이들이 두드리고 짐승이 떠받지 않게 함은 경주(慶州)에 사는 모든 족인(族人)의 책임이 아니겠는가. 드디어 기문(記文)을 쓰다.”

大匡輔國崇祿大夫 原任左議政 鰲恩君 敬一은 글을 지었고, -대광보국숭록대부 원임좌의정 오은군 경일

正憲大夫刑曹判書 經筵 春秋館 五衛都摠府摠管 集斗는 삼가 쓰다.

-정헌대부형조판서 경연 춘추관 오위도총부총관 집두

□碑閣重修記(비각중수기)

목차

-後孫(후손) 裕元(유원) 撰(찬)

慶州邑治之東月城未五里에 有山巖巖하야 背石而特立者는 曰瓢巖이니 我李氏鼻祖 謁平의 肇降處也라

按三韓史乘하면 有神人이 降于瓢巖下하야 翊赫居世爲王하야 賜姓李氏하여 得壽 二百歲하고 後姓이 蕃衍하야 羅麗以降으로 簪組蟬聯하야 遂爲大家하니 山非高而不 敢不仰也며 巖雖古而不敢不敬也라

純祖丙寅에 族祖相國敬一과 宗丈尙書集斗兩公이 伐石謨竪하야 記述事跡하고 架 椽薝하야 以庇風雨려니 丙午에 先君子文貞公이 巡到玆邑이라가 拜舊址하고 重修碑 閣하며 讌宗族하야 聞風會者- 甚衆하니 寔報本追遠之意也라

噫라 嶠南은 今之鄒魯也라 山得正氣하야 磅礡淸淑하고 絃誦之聲이 家家尙聞而月 城이 爲吾家鄕하니 奚特海南千里之謂也리요

先儒- 曰子孫之多- 雖至千滿人이라도 而莫非一本이라하니 原厥始而返諸本則千萬 年이 一日也요 千萬人이 亦一身也니 然則碑閣之奉이 非玄元立廟之比라 惟我諸宗은

(7)

謹守焉하여 其勿替之니라

*1987년 대종보(大宗譜)

●비각중수기(碑閣重修記) 역문(譯文)

목차

-후손 귤산(橘山) 유원(裕元) 찬(撰)

경주읍(慶州邑) 동쪽으로 월성(月城)에서 5리(五里)가 못되는 지점에 산이 높고 높아 돌을 등지고 우뚝하게 서 있는 것이 바로 표암(瓢巖)이니 우리 이씨(李氏)의 시조(始祖)이신 알평 (謁平)이 처음 강생(降生)한 곳이다.

삼한사승(三韓史乘)을 살펴보면 신인(神人)이 표암(瓢巖) 아래에 내려와 혁거세(赫居世)를 도와 왕을 삼고 이(李)로 사성(賜姓)되며 이백세(二百歲)의 수(壽)를 누리고 후손(後孫)이 번 창하여 신라(新羅)와 고려(高麗)를 지내오면서 벼슬이 이어지어 드디어 대가(大家)가 되었으 니 산이 높지 않으나 감히 우러러보지 않을 수가 없으며 바위는 비록 오래되었으나 감히 공경하지 않을 수가 없다.

순조병인년(純祖丙寅年, 1806)에 족조(族祖) 정승인 경일(敬一)과 종장(宗丈) 판서(判書)인 집두(集斗) 양공(兩公)이 비석(碑石)을 세워 사적을 기록하고 비각(碑閣)을 지어 풍우(風雨) 를 방비하였다.

병오년(丙午年, 현종12 1846)에 우리 선친(先親) 문정공(文貞公)께서 이 고을에 순행하시 었다가 옛터를 찾아 첨배하고 비각(碑閣)을 중수하고 종족들과 연회를 베풀자 소문을 듣고 모인 자가 심히 많았으니 이것이 바로 보본추원(報本追遠)하는 뜻이라 하겠다.

아! 영남(嶺南)은 지금의 추로(鄒魯)1)의 고을이다.

산은 정기(正氣)를 얻어 방박(磅礡)하고 청숙(淸淑)하며, 현송(絃誦)2)의 소리가 집집마다 들리는데 월성(月城)이 우리 집의 고향이 되었으니 어찌 바다의 남쪽 천리(千里)라고 이르 겠는가.

선유(先儒)가 이르기를 ‘자손(子孫)이 많아서 비록 천만(千萬) 명에 이르러도 한 근본이 아님이 없으니 그 처음을 생각하여 근본으로 돌아간다면 천만년(千萬年)이라도 1일(一日)과 같고 천만(千萬) 명이라도 또한 일신(一身)과 같으니 그러한즉 비각(碑閣)을 받드는 것이 현

1) 추로(鄒魯)의 나라: 학문(學問)을 좋아하고 순후한 풍속(風俗)이 있는 곳을 말함. 추(鄒)는 맹자(孟 子)가 태어난 곳이고 노(魯)는 공자(孔子)가 태어난 곳이다.

2) 현송(絃誦)의 소리: 거문고 타고 글 외우는 소리로 선비들이 학문함을 말한다.

(8)

원입묘(玄元立廟)3)에 비할 것이 아니다. 오직 우리 제종(諸宗)들은 삼가 수호하고 깨끗이 간직하여 쇠체(衰替)하지 말을 지어다.’

□追遠齋記(추원재기)

목차

-完山(완산) 李震幸(이진행) 撰(찬) -後孫(후손) 文炯(문형) 記(기)

龍城之西三十里山川鍾氣蜿蟺屈曲若龍之蟠然而秀起者峨嵋山也其下有一齋巍然特 立者是我先祖追遠齋也以追遠爲齋號實愼終追遠之意也夫人之情雖孝於其父者多矣移 其孝於先世者鮮矣何故子代孫傳世代漸遠杳然而怱忘者也空然口稱追遠而常爲虛矣是 故經營一齋而追遠爲號而票而記之其爲齋也惟珍乙之良䂓公輸之摶墨蘇越秦功獿堊獻 巧棟宇三間門戶重重輪囷磊落不儉不侈眞追慕羮墻之室也然述夫精瓊米而爲粢盛兮奠 蘋藻而爲薦神道翳其備降兮裸鬯鬱而要之盡肅恭乎上下兮步距踖而敬謹惟香烟之濃厚 兮觀雲霞之浮動嗚呼美哉仰吾門之大嗚兮期今名於遠楊願期齋之永固兮同天地無量惟 雲仍之係係承承兮如日月之輝光受天祿而無極兮垂惠澤旅遠遠休哉以短辭拙筆敢盡愚 衷乙亥十月甲子後孫文炯記

●추원재기(追遠齋記) 역문(譯文)

목차

-완산(完山) 이진행(李震幸) 찬(撰) -후손(後孫) 문형(文炯) 기(記)

용성(龍城)의 서쪽 삼십리(三十里)에 산천(山川)의 모인 기운이 꿈틀거리며 굴곡(屈曲)을 이루어 용(龍)이 서린 것처럼 빼어나 일어난 것은 아미산(峨嵋山)이오. 그 아래에 한 재실 (齋室)이 있어 외연(巍然, 山이 높이 있는 모양) 소상히 특출(特出)하게 서 있는 것은 이 우 리 선조(先祖)의 추원재(追遠齋)인 것이다.

추원(追遠)으로써 재실(齋室)의 이름으로 삼은 것은 실상 맞춤을 삼가고 먼 조상(祖上)을 추원(追遠)한다는 뜻이다. 무릇 사람의 정(情)이 비록 그 아버지에게 효(孝) 하는 사람은 많 으나 그 효(孝)를 선세(先世)에 옮길 자(者)가 적은 것은 어찌 된 연고(緣故)인고, 아들이 대 신(代身)하고 손자로 전(傳)하여 세대(世代)가 점점(漸漸) 멀어져서 묘연(杳然)히 총(怱)하게 잊는 자가 있는가 하면 공연(空然)히 입으로 먼 것을 추모(追慕)한다고 일컫지만 떳떳이 빈 것이 됨이라.

이런 고(故)로 한 재실(齋室)을 경영(經營, 규모規模을 정定하고 기초基礎를 세워 일해나 3) 현원입묘(玄元立廟): 당(唐)나라때 노자(老子)를 시조(始祖)로 추존하여 사당을 지어 받들었음.

(9)

감)하여 조상(祖上)을 추모(追慕)한다고 이름하여 표(票)하여 기록(記錄)하니 그 재실(齋室) 을 지음에 오직 진을(珍乙)의 좋은 규모(規模)와 공수자(公輸子)의 단묵(摶墨)과 소월(蘇越) 의 공(功)을 진효(秦效)함과 노악(獿堊)의 공교함을 드려 동우(棟宇)가 삼간(三間)에 문호(門 戶)가 거듭 있도다.

윤균(輪囷, 높고 큰 모양. 위아래나 좌우로 꺾기고 굽은 모양)하고 뇌락(磊落, 마음이 활 달하여 조그마한 일에는 구애받지 않는 모양)하여 검소한 것도 아니며 사치(奢侈)한 것도 아니어서 참으로 추모(追慕)하고 갱장(羮墻, 국을 먹을 때에는 얼굴이 국 속에 어른거리고 앉아 있을 때는 담에 얼굴이 나타남을 이름)하는 집이라. 그러나 술(述)하노니.

경미(瓊未)를 정(精)하게 쓸어서 자성(粢盛, 제사밥. 나라의 대제大祭에 쓰는 태직泰稷)을 함이여! 빈조(蘋藻, 해초海草. 물 위에 떠도는 풀과 물속에 잠겨있는 풀)를 드려 올리는 도 다. 신(神)의 도(道)가 그 갖추어 하강(下降)함이여! 울창주(鬱鬯酒, 제사祭祀에 쓰이는 술에 넣어 빚는 향초香草)를 부어 구(求)하였도다. 엄숙(嚴肅)하고 공손(恭遜)하여 상하(上下)에 다함이여! 걸음을 축적(踧踖)하여 공경하고 삼갔도다. 오직 향연(香烟, 향香치우는 연기煙 氣)의 농원(濃原)함이여! 운하(雲霞)의 계동(溪動)함을 보리다. 아! 아름답도다. 우리의 문 (門)이 크게 울림을 우러름이여! 착한 이름이 멀리 날림을 기약했도다. 이 재실(齋室)의 기 리 견고(堅固)함을 원(願)함이여! 천지(天地)의 무량(無量)함과 같도다.

오직 운잉(雲仍, 운손雲孫과 잉손仍孫. 먼 자손子孫을 일컬음)의 계계승승(係係承承)함이 여! 일월(日月)의 빛나는 빛과 같도다.

천록(天祿)을 받아서 다함이 없음이여! 혜택(惠澤)을 멀고 먼데 드리웠도다. 아름답고 아 름답도다. 단사(短辭)와 졸필(拙筆)로써 감(敢)히 어리석은 충정(衷情)을 다할 수 있으리오.

을해시월갑자(乙亥十月甲子)에 후손(後孫) 문형(文炯)은 기(記)하노라.

▣중시조(中始祖) 소판공(蘇判公) 이거명(李居明)

문서의 처음 목차

【계대(系代)】 시조(始祖) 표암공(瓢巖公) 이알평(李謁平) → 원대손(遠代孫) 중시 조(中始祖) 소판공(蘇判公) 거명(居明)

□蘇判公祀壇碑(소판공사단비)

목차

-蘇判公(소판공) 三十八世孫(38세손) 熙雨(희우) 謹述(근술)

公仕新羅官至蘇判按新羅官制蘇判迎判達官名蘇判惟眞骨受之眞骨王族也竊惟吾始 祖立赫居世贊鴻功受鐵券則于其子孫宜爲世祿之家與國咸休子子孫孫名必不沒 於國史 家乘之筆而有高麗牧隱李公去古末遠撰益齋墓誌只曰始祖赫居世佐命大臣李某而己至

(10)

於其後蘇判以下而歷서之蘇判以上豈知而故闕之也想於新羅之末公私 兵火之餘一代典 記灰燼殆盡而李氏之譜隨而亡失之故也嗟夫惟我始祖德盛功高世篤貞忠鷄林之李甲於 三韓而中失其系無籍可徵曷勝惜哉或者以公爲始祖之子夫始 祖爲赫居世功臣而太守公 爲新羅之季自羅而麗相去幾千載始祖以下太守上豈但二世而己乎其不合事情而無足信 也明矣

□소판공사단비(蘇判公祀壇碑) 역문(譯文)

목차

-소판공(蘇判公) 38세손 희우(熙雨) 근술(謹述)

고래(古來)로 조상(祖上)의 묘(墓)를 실전(失傳)하면 망묘설단(望墓設壇)하여 향사(享祀)를 받드니 이는 후손(後孫)들이 추원보본(追遠報本)하려는 지극(至極)한 효심(孝心)의 발로(發 露)이도다.

소판공(蘇判公)의 휘(諱)는 거명(居明)이요, 관(貫)은 경주(慶州)이며 시조(始祖)이신 표암 공(瓢巖公) 휘알평(諱謁平)의 원대손(遠代孫)으로 관(貫)은 소판(蘇判)이시다.

표암공(瓢巖公)이 옛 조선(朝鮮)의 유민(遺民)으로 진한(辰韓)의 표암봉(瓢巖峰)에 강림(降 臨)하시어 알천양산촌장(閼川楊山村長)으로 사로육촌(斯盧六村)의 수장(首長)을 맡아 화백회 의(和白會議)를 창시(創始)하시고 기원전오십칠년(紀元前五十七年)에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신라(新羅)의 초대왕(初代王)으로 추대(推戴)하신 개국원훈(開國元勳)으로 유리왕구년(儒理王 九年)에 장성이씨(腸姓李氏)하고 태종무열왕삼년(太宗武烈王三年)에 추봉(追封) 은열왕(恩烈 王)하여 대대(代代)로 진골(眞骨)이 되어 구백여년(九百餘年)을 이어오며 규조(圭組)가 부절 (不絶)하였으나 세구년심(世久年深)하고 병화(兵火)로 문헌(文獻)이 무징(無徵)하여 시조(始 祖)로부터 소판공(蘇判公)에 이르기까지 계대(繼代)를 잃었으나 목은이색선생(牧隱李穡先生) 이 익재공(益齋公)의 묘지명(墓誌銘)을 찬(撰)하면서 시조이후(始祖以後)는 궐(厥)하고 소판 공(蘇判公)을 원대손(遠代孫)으로 기일세(起一世)하여 계대(繼代)를 기록(記錄)하니 중시조 (中始祖)로 숭중(崇重)하는 소이(所以)이다.

소판공(蘇判公)은 신라말(新羅末)에 세전(世傳)되는 가업(家業)을 승습(承襲)하여 관위(官 位)가 소판(蘇判)에 이르니 신라관제(新羅官制)에 소판(蘇判)은 왕족(王族)인 진골(眞骨)만이 받을 수 있으며 관계(官階)는 삼품(三品)이다.

우리 경주이씨(慶州李氏)는 중시조이후(中始祖以後)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을 이어오며 천년여세월(千年餘歲月)동안 수(數)만은 위인(偉人)들이 계셨으니 문하시중공(門下侍中公) 휘총섬(諱寵暹) 성암공휘인정(誠菴公諱仁挺) 문효공국당(文孝公菊堂) 휘천(諱蒨) 문충공익재

(11)

휘제현(文忠公益齋諱齊賢) 계림부원군공휘규(鷄林府院君公諱揆) 석탄공휘존오(石灘公諱存 吾)는 고려사(高麗史)에 기록(記錄)되었으며 영의정백사공휘항복(領議政白沙公諱恒福) 임란 공신충무공휘수일(壬亂功臣忠武公諱守一) 영의정운곡공휘광좌(領議政雲谷公諱光佐) 영의정 오천공휘종성(領議政梧川公諱宗城) 영의정귤산공휘유원(領議政橘山公諱裕元)은 조선왕조실 록(朝鮮王朝實錄)에 기록(記錄)되어 역사(歷史)에 빛나며 조선조(朝鮮朝)에 문과급제(文科及 第)가 174인이요. 무과급제(武科及第) 13인이며 상신(相臣)은 9인이고 공신(功臣)은 12인이 요. 문형(文衡)은 5인이며 청백리(淸白吏)는 53인이 녹선(錄選)되어 삼한갑족(三韓甲族)이요, 국중명벌(國中名閥)로 회자(膾炙)되었다.

근세(近世)에는 독립지사(獨立志士)인 박재공휘상설(搏齋公諱相卨) 독립지사(獨立志士)인 우당공(友堂公) 휘회영(諱會榮) 대한민국초대부통령선재공휘시영(大韓民國初代副統領省齋公 諱始榮) 삼성(三星)그룹회장호암공휘병철(會長湖巖公諱秉喆) 제십칠대대통령(第十七代大統 領)을 역임(歷任)한 청계공명박(淸溪公明搏)은 우리 경주이씨(慶州李氏)의 명예(名譽)를 빛낸 위인(偉人)으로 청사(淸史)에 빛나리라 이외(以外)에도 거향석학(巨鄕碩學)이 기라성(綺羅星) 같이 많으나 기록(記錄)하지 못한다.

우리 경주이씨(慶州李氏)는 이씨(李氏)의 시원(始原)이며 명문(名門)의 표상(表象)으로 전 국각지(全國各地)에 산거(散居)하며 3백여 만명의 종세(宗勢)를 자랑하니 본종(本宗)은 평리 성암공파(評理誠菴公派) 익재공파(益齋公派) 국당공파(菊堂公派) 부정공파(副正公派) 상서공 파(尙書公派) 사인공파(舍人公派) 판전공파(判典公派) 석탄공파(石灘公派) 교감공파(校勘公 派) 월성군파(月城君派)로 분파(分派)하여 화벌(華閥)을 자랑하는 동방(東方)의 거족(巨族)이 며 분적종(分籍宗)은 합천(陜川) 재령(載寧) 원주(原州) 장수(長水) 아산(牙山) 우계(羽溪) 진 주(晋州) 차성이씨(車城李氏)이다.

오호(嗚呼)라 소판공(蘇判公)의 후손(後孫)들이 번창(繁昌)하여 향화(香火)가 무궁(無窮)할 것이로되 수백년(數百年)의 세월(歲月)이 흘러 생졸(生卒)과 덕업(德業)과 배위(配位)마져 민 멸(泯滅)되고 분묘(墳墓)마져 실전(失傳)되어 향사(享祀)도 받들지 못하니 후손(後孫)들의 비 통(悲痛)함이 하늘에 이르렀도다.

거금(距今) 150여 년 전인 1880년에 판전공파(判典公派)의 양천문중(良川門中)에서 향계 (鄕契)로 자금(資金)을 마련하고 지역유림(地域儒林)과 더불어 35세의 원영공(源榮公)이 주 간(主幹)하여 경주부역내(慶州府域內)였던 지금의 울산시(蔚山市) 울주군(蔚州郡) 청량면(靑 良面) 동천리(東川里) 양천(良天)마을 후원(後園)에 옛적 준례(準例)에 따라 흙을 쌓아 묘단 (墓壇)을 만들고 양호단(良湖壇)이라 명명(命名)하였으니 차(此)는 양호정사(良湖精舍)에 기 인(起因)함이요, 궁벽(窮壁)한 양천문중(良川門中)의 효사(孝祀)는 종족사(宗族事)의 미담(美 談)으로 순풍(順風)처럼 전국(全國)에 알려져 추원보본(追遠報本)의 귀감(龜鑑)으로 칭송(稱 頌)되었으며 전국(全國)에서 유일하니 매년 9월초 정일(丁日)에 향사(享祀)해오다 유구한 세

(12)

월 속에 묘단(墓壇)이 황폐(荒廢)해지니 1988년 무진(戊辰)에 판전공파대종회장규태공(判典 公派大宗會長圭泰公)과 도유사재우공(都有司載雨公)의 주간(主幹)으로 개사초(改沙草)하고 사단비(祀壇碑)와 신삼문(神三文)을 세우고 곡장(曲牆)을 둘러 단역(壇域)을 정화(淨化)하고 향사일(享祀日)을 9월 하정일(下丁日)로 변경(變頃)하였다.

이후 2005년부터 양호단소정비사업(良湖壇所整備事業)이 추진(推進)되어 장구(長久)한 논 의(論議)를 거쳐 을미년(乙未年)에 소판공(蘇判公)의 묘단(墓壇)을 웅장(雄壯)하게 조성(造成) 하고 사단비(祀壇碑)를 건립(建立)하며 석등(石燈)과 문인석(文人石)을 갖추어 성역화(聖域 化)하였다.

신라관제(新羅官制)에 소판(蘇判)은 진골수지(眞骨受之)라 하였으니 진골(眞骨)은 귀족(貴 族)이라 금차(今次)의 성역화(聖域化)로 소판공(蘇判公)의 단소(壇所)가 법도(法度)에 맞게 갖추어졌으니 아름답도다.

우리 종친(宗親)들이 조상(祖上)의 은덕(恩德)을 기리며 향사(享祀)를 봉행(奉行)하는데 감 회(感懐) 또한 새로우며 비로소 적년(積年)의 염원(念願)이 완성(完成)되니 일모(一毛)의 유 감(遺憾)도 없도다.

금차(今次)의 위선사(爲先事)에 중시조(中始祖)의 38세손으로 중앙화수회필우회장(中央花 樹會弼雨會長)과 중앙화수회덕우고문(中央花樹會德雨顧問)이 거금(巨金)을 표성(表誠)하여 성역화(聖域化)의 초석(礎石)을 놓는 위선사(爲先事)의 모범(模範)을 보이셨으며 판전공파대 종회장규백(判典公派大宗會長圭栢)과 사무처장상로(事務處長相魯)가 대소사(大小事)를 주간 (主幹)하여 대역사(大役事)에 불후지공(不朽之功)하였다.

명(銘)에 쓰노니

忠孝名閥 詩禮傅常 祖宗積善 後孫繁昌 (충효명벌 시례부상 조종적선 후손번창)

惟公德行 士林景仰 聖諱貞石 庸示無彊 (유공덕행 사림경앙 성휘정석 용시무강)

檀記四三四八年乙未 九月晩秋日 蘇判公三十八世孫 熙雨 謹述 (단기4348년을미 9월만추일 소판공38세손 희우 근술)

(13)

문서의 처음 월성군 계천군系 판서공系 대사헌공 판관공 충민공 금호공 충순위공 용재공 용재공系 눌재공 훈도공

▣월성군(月城君) 이지수(李之秀)

문서의 처음 목차

【계대(系代)】 병부시랑공(兵部侍郎公) 이신우(李申佑) → 1世孫 ①천호장공(千戶 將公) 작량(作良) → 2世孫 ①사간공(司諫公) 선경(善景) → 3世孫 ②검교대장공(檢 校大將公) 방렬(方烈) → 4世孫 국자진사공(國子進士公) 황승(黃升) → 5世孫 ②사 성공(司成公) 극량(克良) → 6世孫 ②국자진사공(國子進士公) 창규(昌規) → 7世孫 국자진사공(國子進士公) 분(賁) → 8世孫 ②문렬공(文烈公) 충요(忠堯) → 9世孫 ① 월성군(月城君) 지수(之秀)

□忠賢祠上樑文(충현사상량문)

목차

–仁同(인동) 張建德(장건덕) 謹撰(근찬)

–大司憲公(대사헌공) 十七代孫(17대손) 東鎬(동호) 謹書(근서)

忠賢祠成造之下曰伏以忠臣不事二君墟里傳高蹈之蹟公論留待百世廟宮虔崇報之儀 奚從雲裔見牆之誠實追多士依壘之頌舊山增彩繄惟堂洞奥區吾道重光實爲東津佳處思 肯搆而肯堂緬惟歲月滋九費載營而載度屬玆風和氣節溪山雲物宛帶近千載遺芬詩禮風 猷儼見累十世門戶天慳地秘幾經風月之等閒聲感氣求故八君子之康濟月城君之祠宮區 就平島國之外圃初開托晩契於五友同人佳興擅長物於四時古道益章氈鋪石面醉可臥醒 可吟鑑開江心夏宜雨冬宜雪斯江山留播馥之區功役待特而作遂堂宇爲牗學之所經始不 日以成草樹灌芬之鄕遽覩宮墻之肅肅鳥獸呌吟之處變爲絃誦之洋洋飛躍依舊自在敢忘 悟道之功逝流至今不停莫休窮遠之力玆當擧樑之際敢效陳領之儀

兒郞偉抛樑東玉女高峯朝日紅縱有浮雲那得蔽太陽元照覆盆中 兒郞偉抛樑南半島海邊靑且藍自是球琳淸以許夜中孤月照深潭 兒郞偉抛樑西溪山秀色揷天齊奇巖恠石遺芬在高躅依如野隱題 兒郞偉抛樑北壯士山峯望不極采采幽芳只自怡肯隨排李媚春色 兒郞偉抛樑上山頭松相叅天長丘壑爲捿抛棟樑空令千載起邀想 兒郞偉抛樑下俯視城塵隔小野咫尺林間風景殊俗緣不到襟懷灑

伏願上樑之後儒運復興仰家邦必達之運士趨與競讀朝野論通之書顯孝思而移忠宜軆 事實見得羹墻百世保守長春

丁卯淸明節

(14)

仁同 張建德 謹撰

大司憲公 十七代孫 東鎬 謹書

●충현사상량문(忠賢祠上樑文) 역문(譯文)

목차

-인동(仁同) 장건덕(張建德) 근찬(謹撰)

-대사헌공(大司憲公) 17대손 동호(東鎬) 근서(謹書)

충현사(忠賢祠) 성조(成造, 상량上樑을 말함)의 아래에 이르기를 엎드려 생각건대 충신(忠 臣)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았으니 유허(遺墟)의 마을에는 고도(高蹈, 높은 발자국)의 사적 (事蹟)이 전해오고, 공론(公論)은 백세(百世)를 기다리었으니 묘궁(廟宮)에 높이 보답하는 의 전(儀典)을 정성껏 받들었네. 어찌 자손이 궁장(宮牆)을 보는 정성뿐이겠는가. 실상 많은 선 비의 보루(堡壘, 담을 치어 두르고 영혼을 모시는 곳)에 의지하는 칭송(稱頌)을 따랐네. 옛 산에는 광채를 더하였으니 오직 당동(堂洞)의 아늑한 지구(地區)요. 우리 도(道)가 거듭 빛 이 났으니 실상 동진(東津)의 아름다운 곳이지. 긍구긍당(肯搆肯堂, 조상이 이룩한 일을 자 손이 잘 이어오는 것)을 생각한 제가 오직 세월이 오래인데, 경영하여 시작하매 풍화(風和) 의 가절(佳節)을 당하였네, 계산(溪山)에 구름 경치는 완연히 천년(千年)에 가까운 끼친 향 기 띠었고, 시례(詩禮)의 풍속은 엄연히 여러 10대의 문호(門戶)를 보았네. 하늘이 아끼고 땅이 감추었으니 몇 번이나 풍월(風月)의 등한(等閒)함을 지냈었나, 소리로 느끼고 기운으로 구하매 짐짓 군자(君子)의 강제(康濟, 평안하고 구제하여 줌)에 들어갔구려.

월성군(月城君, 이지수李之秀)의 사우(祠宇)가 이미 성취되었으니, 반도국(平島國, 우리나 라가 동해東海가에 있으므로 칭함)에 선비의 장소 처음 열리었네. 만년 벗 오우(五友, 무엇 을 지적함인지 미상 함)에 의탁하였으니 같은 사람의 아름다운 흥취요. 무궁한 경물 4시에 밝히었으니 옛 도(道)는 더욱 문채(文彩) 있네. 털방석 돌 위에 펴고 취하면 가히 눌만하고 깨이면 가히 읊조리고 밝은 거울 강물에 열리었는데 여름에는 비도 오고 겨울에는 눈도 쌓 이었네. 이 강산에 향기를 뿌릴 지구(地區) 유지하였으니 공역(公役)은 시기를 기다리어 시 장하고, 당우(堂宇)를 이루어 학문을 깨우칠 곳 삼으라며 경시(經始)한 체 날이 안되어 준공 되었네. 풀과 나무 향기를 풍기는 시골에 갑자기 궁장(宮墻)이 숙숙(肅肅. 위엄이 있는 모 양) 함을 보았고, 새와 짐승 지저귀고 우는 곳이 변하여 현송(絃誦, 거문고 타고 시를 외움) 의 소리 양양(洋洋, 밝고 시원한 모양)이 들리었네. 새는 날고 고기는 뛰는 것이 옛날을 의 지하여 있으니 감히 도(道)를 깨우친 공로(功勞)를 있을쏜가. 흘러가는 물은 지금도 정지하 지 않았으니 원천을 탐구하는 힘 쉬지 마오. 이번 들보 올리는 시기를 당하여 감히 송축(頌 祝)의 의식을 보이노라.

兒郞偉抛樑東玉女高峯朝日紅縱有浮雲那得蔽太陽元照覆盆中 아리랑 들보를 동쪽에 올리니,

옥녀(玉女)의 높은 봉우리에 아침 햇살 밝았네.

(15)

비록 뜬구름 있으나 어찌 가리라,

태양은 원래에 엄친 항아리 밑까지 비추었지.

兒郞偉抛樑南半島海邊靑且藍自是球琳淸以許夜中孤月照深潭 아리랑 들보를 남쪽에 올리니,

반도(半島)의 바닷가에 푸르고 또 푸르렀네.

이러한 구림(球琳, 아름다운 구슬 재능이 특출한 사람을 칭함)이 있어서 맑기가 이와 같 으니,

가운데 밤 외로운 달빛이 깊은 연못에 비추었구려.

兒郞偉抛樑西溪山秀色揷天齊奇巖恠石遺芬在高躅依如野隱題 아리랑 들보를 서쪽에 올리니,

계산(溪山)에 빼어난 빛이 하늘과 가지런하고, 기이하고 괴이한 암석에 남긴 분방(芬芳)이 있으니, 높은 발자국 의의하여 초야에 숨은 표제와 같으네.

兒郞偉抛樑北壯士山峯望不極采采幽芳只自怡肯隨排李媚春色 아리랑 들보를 북쪽에 올리니,

장사산(壯士山) 봉우리 바라다보매 궁극하지 않았네, 그윽한 향기 캐고 캐어 다만 흡족할 뿐인데,

즐겨 복숭아꽃·오얏꽃 따라 봄빛에 아당할 것이오.

兒郞偉抛樑上山頭松相叅天長丘壑爲捿抛棟樑空令千載起邀想 아리랑 들보를 위쪽에 올리니,

산머리에 송백(松柏)은 하늘에 닿도록 장양되어, 구학(丘壑, 산과 구렁)에 서식하고 있다.

兒郞偉抛樑下俯視城塵隔小野咫尺林間風景殊俗緣不到襟懷灑

伏願上樑之後儒運復興仰家邦必達之運士趨與競讀朝野論通之書顯孝思而移忠宜軆事實見得 羹墻百世保守長春

□津陽書院奉安告由文(진양서원봉안고유문)

목차

伏惟先生令資圭璋德量崇厚禀賦毅剛制行甚嚴日用平常惟孝與友應事伉莊有確其守 冠扶倫綱山河間氣昌朝令望蜚英楓宸金紫思光巨厦棟樑爲國賢相世代推遷典刑微范數

(16)

間丹靑妥靈卓床春秋佳節慕功羹牆孱裔流落連滯南鄕矧玆扶安杖屢攸尋山川如昨精爽 重臨經始廟字畢役于令愛揀吉日敢告揚虎二嗣三賢並肆其筳陳氏古事亦有例世一堂祔 食來世無替血氣相感岡有幽顯脫脫天欹玆裸薦以貞烈公宰臣公鶴川君公判書公大司憲 公配尙饗

□津陽書院常香祝文(진양서원상향축문)

목차

三重大匡,金紫光祿大夫,月城君李先生,仗以勳封,于君業垂于後,遺風百代,薄 俗歸厚,謹以 醴齊,粢盛庶品,式陳明薦,以貞烈公,宰臣公,鶴山君公,判書公,

大司憲公配 尙饗。

●진양서원상향축문(津陽書院常香祝文) 역문(譯文)

목차

삼중대광(三重大匡)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월성군이선생(月城君李先生, 이지수李之 秀) 공훈(功勳)으로 봉군(封君)이 되었다. 군자의 업적이 후세에 이르니 백대(百代)에 전해지 는 유풍(遺風)을 야박한 풍속(風俗)은 두텁게 돌아간다.

삼가 예제(醴齊)와 자성(粢盛)과 서품(庶品)을 진설하여 올리오니, 정렬공(貞烈公, 이규李 揆), 재신공(宰臣公, 이진李縉), 학산군공(鶴山君公), 판서공(判書公, 이양직李良直), 대사헌 공(大司憲公, 이승직李繩直) 배(配) 흠향(歆饗)하소서.

□金紫光祿大夫月城君祭壇碑銘(금자광록대부월성군제단비명) 并序(병 서) 二十一世(21세)

목차

-宗裔(종예) 鍾醇(종순) 撰(찬)

勝朝之末에 有以盛德弘猷요 身致大官하고 食采郡邑하야 輝煌當時하며 芬芳百世 하야 後孫이 熾昌하야 蔚爲我李氏大派之祖者는 乃金紫光祿大夫三重大匡尙書左僕 射月城君乎인저

公의 諱는 之秀니 慶州之李는 皆以羅代六部村長諱謁平으로 爲鼻祖하야 世仍貴顯 하다 中世祖諱居明은 官이 蘇判이요 生諱金現하니 兵部令이요 生諱金書하니 始仕 麗朝하고 娶新羅敬順王女하야 爲配하다 傳之屢世하야 諱申佑는 兵部侍郎이요 又傳 八世하야 兵部尙書諱忠堯는 即公의 고야라 妣는 原州李氏니 貞茂의 女라

(17)

公이 有二子하니 長은 揆니 忠惠王朝에 官至四宰하고 諡는 貞烈이요 次는 縉이 니 宰臣이라 揆는 生元林하니 判司僕寺事요 縉은 生乙休允聃하니 司議署令이라

元林의 子는 蔓實이니 太宗朝에 登文科하야 吏曹判書요 延實은 縣監이니 自此로 籫纓奕閥과 學問節義-繼世不絶하니 特學其顯要而記之하면 蔓實之長子從直은 贈判 書封鷄川君이요 二子良直은 文科司諫院으로 至禮判하고 三子繩直은 文科慶尙道觀 察使로 至大司憲하여 以淸白으로 見重於世하다

從直이 有二子하니 吉祥은 爲縣監하야 以善政으로 聞하고 陽生은 世祖朝에 以敵 愾功으로 封鷄城君하고 吉祥之五世孫은 弘震이니 光海時에 隱于三角山中하야 不出 一步地하고 仁祖改玉에 以潛底舊諠로 累徵不起하야 因有處士稱하다 陽生의 子는 泰岳이니 戶曹判書로 封鷄善君하고 鷄善君의 子 橚은 正憲大夫知中樞鷄興君이요

良直의 子는 思剛이니 文科大司成이요 錄扈駕功하고 其弟臻剛은 府使라 思剛이 有二子하니 季孫은 文科執義니 見 端宗遜位하고 與弟末孫으로 聯棣落南하야 一則 庄點于湖西之禮山花山下하고 二則湖南之南原하야 作詩以誓之하고 不復仕進하다 季 孫之六世孫檍이 南漢之役에 白衣從軍하야 力戰死之하나 肅宗壬午에 命旌閭하다

繩直은 五子니 不敏은 判官이요 命敏은 贈戶曹參判이요 諡는 忠愍公이니 莊陵朝 에 配食士壇하고 勿敏은 主簿요 靡敏이요 時敏은 號琴湖니 才華絶異하야 世稱神童 하고 慷慨有氣節이러니 自 光陵之受命으로 南下永嘉之琴溪村하니 金梅月堂이 題琴 湖高士하고 琴湖-有四子하니 崇準은 忠順衛요 宗準은 號慵齋니 選入湖堂하고 學問 이 鳴世러니 以金佔畢齋門人으로 被成年禍하고 次는 弘準이니 號訥齋요 成均進士 니 亦有學行하고 自撰誌文하야 爲世絶贊하여 兄弟-共享栢麓祠하니 世稱雙珠러라 公準은 訓導이니 鳴呼라

公이 以勝朝藎臣으로 職在一品하고 榮名이 滿朝野하여 及至孫曾하야 乃公乃卿이 指不勝屈하니 宣乎國史家牃之可與天壤으로 傳之無弊而一自麗革으로 文獻之蕩佚者 -十居八九하니 可勝言哉아 雖然이나 閱世累百에 雲仍之布濩八域者-其數不億하니 德厚流光에 此可以㮣公矣라 事蹟之不傳이 於公에 文何加損焉이리요 諸後孫이 以其 追遠報本之無所展誠으로 爲恨하야 亟圖設壇而享之하고 請其牲石之銘於不侫曰今世 에 苦無秉筆하니 自爲同宗則幸無恝也하라

窃念公之世-玄遠하야 並與其生卒及配-俱無所據하니 難乎其爲銘矣라 然이나 公之 位-非不顯矣며 公之時-非不陵矣則立朝行治-必有彬彬可觀이나 而其於杞宋에 何哉 아 壇在於後孫楸鄕 安東郡琴溪面仕望里 坐之原하고 來請其銘者는 成鎬在英龍濬이 요 始終幹事者는 寅燮東鎬台永甫也라

系以銘曰

(18)

猗月城君은 勝國藎臣이라 立朝事君하니 文質이 彬彬이라 位至一品하고 德孚萬人 이라 食采封君하니 禮遇並臻이라 德流後昆하니 無竆千春이라 源深派長하니 文武縉 神이라 世垂玄遠하니 文獻이 無因이라 生卒墓域이 一何沒湮고 雲孫不億에 感慕益 新이라 築壇享之하니 周爰咨詢이라 置田置齋하니 齋宿明禋이라 我述銘辭하야 刻之 貞珉하노라

丙寅 十一月 上潮

*1987년 대종보(大宗譜)

●금자광록대부월성군제단비명(金紫光祿大夫月城君祭壇碑銘) 병서(并 序) 역문(譯文)

목차

-종예(宗裔) 종순(鍾醇) 찬(撰)

고려(高麗)의 말기에 이르러 성대한 덕과 훌륭한 도량으로 큰 벼슬에 오르고 군읍(郡邑) 에 봉군(封君)되어 당시에 빛이 나고 백세(百世)까지 방명(芳名)을 남기었으며, 그 후손도 번창하여 우리 이씨 대파(李氏 大派)의 조상이 된 분이 있으니,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 夫) 삼중대광(三重大匡) 상서좌복사(尙書左僕射) 월성군(月城君)이다.

공(公)의 휘는 지수(之秀)이니 경주이씨(慶州李氏)는 모두 신라(新羅) 때에 육부촌장(六部 村長) 휘 알평(謁平)으로 시조(始祖)를 삼아 대대로 귀하게 되고 현달(顯達)하였다.

중세조(中世祖)의 휘는 거명(居明)이요, 벼슬은 소판(蘇判)이다. 휘 금현(金現)을 낳으니 병부령(兵部令)이요, 휘는 금서(金書)를 낳으니 비로소 고려(高麗)조정에 벼슬하고 신라 경 순왕(新羅 敬順王)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배위(配位)를 삼았다.

여러 대를 내려와 휘 신우(申佑)는 병부시랑(兵部侍郞)이요, 8세를 내려와 병부상서(兵部 尙書) 휘 충요(忠堯)는 공의 아버지이고 어머니는 원주이씨(原州李氏) 정무(貞茂)의 따님이 다.

공이 2자를 두었으니 맏이 규(揆)는 충혜왕(忠惠王) 조정에서 벼슬이 사재(四宰)에 이르고 시호는 정렬(貞烈)이요, 다음 진(縉)은 재신(宰臣)이다. 규(揆)는 원림(元林)을 낳았으니 사복 시판사(司僕寺判事)요, 진(縉)은 윤담(允聃)을 낳았으니, 사의서령(司議署令)이다.

원림(元林)의 아들 만실(蔓實)은 태종조(太宗朝)에 문과(文科)로 이조판서(吏曹判書)이고, 연실(延實)은 현감(縣監)이다. 이때부터 혁혁한 문벌과 학문 절의가 대대로 계승하여 끊기지 않았으니 특별히 그 현달한 자를 들어서 기록하자면 만실(蔓實)의 맏자제 종직(從直)은 증 직이 판서(判書)로 계천군(鷄川君)을 봉하고 둘째자제 양직(良直)은 문과(文科)로 사간원(司

(19)

諫院)을 지나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이르고 셋째 자제 승직(繩直)은 문과(文科)로 경상도(慶 尙道) 관찰사(觀察使) 대사헌(大司憲)에 이르고 청백(淸白)으로 세상에서 추중을 받았다.

종직(從直)은 2자를 두었는데 길상(吉祥)은 현감(縣監)이 되어 선정(善政)으로 알려졌고 양생(陽生)은 세조조(世祖朝)에서 적개(敵愾, 역적을 물리침)의 공로로 계성군(鷄城君)을 봉 하고 길상(吉祥)의 5세손 홍진(弘震)은 광해(光海) 때를 당하여 삼각산중(三角山中)에 은거 하여 한 걸음도 나오지 않았는데 인조(仁祖)가 반정하매 잠저(潛底, 임금이 되기 전)의 옛 정의로 여러 번 불렀으나, 일어나지 않으므로 처사(處士)의 칭호를 받았고 양생(陽生)의 자 제 태악(泰岳)은 호조판서(戶曹判西)로 계선군(鷄善君)을 봉했으며, 계선군(鷄善君)의 자제 숙(橚)은 정헌대부(正憲大夫) 지중추(知中樞) 계흥군(鷄興君)이다.

양직(良直)의 자제 사강(思剛)은 문과로 대사성(大司成)인데, 호가(扈駕, 왕을 모시고 도망 감)한 공로에 책록되었고, 그 아우 진강(臻剛)은 부사(府使)이다.

사강(思剛)이 2자를 두었는데 계손(季孫)은 문과 집의(執義)인데 단종(端宗)이 왕위(王位) 에 쫓겨남을 보고 아우 말손(末孫)으로 더불어 같이 낙남(落南)했는데 형은 호서(湖西) 예산 (禮山)의 화산(花山) 아래에 터를 잡고 아우는 호남(湖南) 남원(南原)에 정착하여 시(詩)를 지어 맹세하고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계손(季孫)의 6세손 억(檍)이 남한산성(南漢山城)의 전쟁에 백의(白衣, 벼슬하지 않은 선 비)로 군사를 따라 힘껏 싸우다가 죽었으므로 숙종(肅宗) 임오(壬午, 1642)년에 정문(旌門) 을 명했다.

승직(繩直)은 5자를 두었으니 불민(不敏)은 판관(判官)이요, 명민(命敏)은 증직이 호조참판 (戶曹參判)이며, 시호는 충민공(忠敏公)으로 장릉(莊陵, 단종端宗의 릉陵)조에 사단(士壇)에 배향되었고 물민(勿敏)은 주부(主簿)요, 미민(靡敏)이요, 시민(時敏)은 호가 금호(琴湖)인데 재주가 특이하여 세상에서 신동(神童)으로 칭하고 강개(慷慨, 의기심이 우뚝함)하여 기절(氣 節)이 있었는데 광릉(光陵, 세조世祖의 릉陵)이 왕위에 오르매 영가(永嘉, 안동安東)의 금계 촌(琴溪村)으로 내려가서 김매월당(金梅月堂, 이름은 시습時習)이 금호고사(琴湖高士)라는 액자를 써주었다.

금호공(琴湖公)이 4자를 두었으니 숭준(崇準)은 충순위(忠順衛)요, 종준(宗準)은 호가 용재 (慵齋)인데 호당(湖堂, 나라에서 여가를 주어 글 읽는 곳)에 뽑혔고, 학문이 세상에 울리었 는데 김점필재(金佔畢齋, 이름은 종직宗直)의 문인으로 무오(戊午, 1498)년 사화(士禍)를 당 했다.

다음은 홍준(弘準)이요, 호가 눌재(訥齋)인데 성균진사(成均進士)로 또한 학행이 있었고, 자기의 묘지문(墓誌文)을 지어 세상에서 일컫게 되었고 형제(兄弟)가 같이 백록사(栢麓祠)에 배향되어 세상에서 쌍주(雙珠)라 칭하였다.

다음은 공준(公準)이니 훈도(訓導)라.

(20)

아! 공이 고려조(高麗朝)에 세록(世祿)의 신하로 벼슬이 일품(一品)에 이르러 영광된 이름 이 조야(朝野)에 가득하였고 손자와 증손에 이르러 공경(公卿)을 지낸 분이 손가락을 굽혀 셀 수 없이 많았다.

마땅히 국사(國史)와 가첩(家牒)에 기재하여 천지(天地)로 더불어 같이 전할 것인데 고려 (高麗)가 망함으로부터 문헌(文獻)이 유실된 자가 十에서 八·九분이나 되니 차마 말할 수가 있으리오, 그러나 수백 년을 내려오면서 자손이 팔도(八道)에 분포하여 사는 자가 그 숫자 를 세지 못하겠으니 덕이 두려우매 유파(流派)가 더욱 빛이 나므로 여기에서 공을 헤아릴 수가 있다.

사적이 전하지 못한 것이 공에게 무슨 가손(加損)이 있겠는가?

여러 후손들이 추모하고 보답하는 정성을 펼 곳이 없으므로 한을 삼아 급히 설단(設壇)하 고 제사 지낼 것을 도모하여 비석의 명문(銘文)을 나에게 청하면서 이르기를, 『지금 세상에 병필가(秉筆家, 남의 글을 짓는 큰 문학가文學家)가 없으니, 자네가 동종간(同宗間)이 되었 음, 즉 행여나 모른 체하지 마오』한다.

저기 생각건대, 공의 세대가 요원하여 생졸(生卒)의 연도와 배위까지도 모두 근거 삼을 바가 없으니 명문(銘文)을 쓰기가 어렵도다. 그러나 공의 지위가 현달하지 않음도 아니며 공의 시대가 융성하지 않음도 아닌즉 조정에 나가서 행한 사적이 반드시 훌륭하여 볼만함 이 있을 것인데 그 문헌(文獻)의 증거가 없으니 어찌할까, 단소(壇所)는 후손(後孫)이 거주 하는 고장 안동군(安東郡) 금계면(琴溪面) 사망리(仕望里) 좌(坐)에 있고, 나를 찾아와 명문 (銘文)을 청하는 자는 성호(成鎬)·재영(在英)·용준(龍濬)이요 처음부터 끝까지 일을 주선하는 자는 인호(寅鎬)·동호(東鎬)·태영(台永) 보(甫, 아무개)이다.

명(銘)으로 이어서 이르기를,

아! 월성군(月城君)이여 고려(高麗)의 세신(世臣)이네, 조정에 나가 임금을 섬기니 문채(文 彩)와 덕을 갖추었다.

벼슬은 일품에 이르고, 명망은 모든 사람에게 흡족하였네, 땅을 주어 월성군(月城君)에 봉하니 경례와 대우가 아울러 지극했구나, 음덕이 후손에게 흘렀으니, 천년(千年)에 무궁하 리라.

원천이 깊고 유파(流派)가 길으니 문관(文官) · 무관(武官) 그리고 유현(儒賢)이 배출하였 네, 세대가 요원하므로 문헌(文獻)의 징빙이 없네, 생졸년도(生卒年度)와 묘소(墓所)조차 어 찌하여 모두 인몰 되었던가? 자손이 번창하니 느끼는 생각 더욱 새로웠고, 단을 모아 제향 을 올리니 여러 의사 일치되었네.

위토와 제실을 마련하고 재게하며 제사 올리었네, 내가 명(銘)을 지어 좋은 비석에 새기 노라.

(21)

병인(丙寅) 1986年 11月 상순

▣정렬공(貞烈公) 이규(李揆)

문서의 처음 목차

【계대(系代)】 ①월성군(月城君) 이지수(李之秀) → 1世孫 ①정렬공(貞烈公) 규(揆)

□先祖貞烈公事績(선조정렬공사적)

목차

-二十一世孫(21세손) 東鎬(동호) 泣血謹編(읍혈근편)

府君 諱는 揆이고 月城君派 派祖 諱 之秀府君의 二男中 長男이며 金貞의 外孫으 로 高麗 二十五代 忠烈王 때 大護軍을 거쳐 一三二四年(二十七代 忠肅王 十一)에 右代言(右承旨: 正三品 堂上官)으로 이듬해(一三二五年) 忠肅王의 第三妃 曺國長公 主(元의 魏王阿木歌의 딸)가 죽자 告訃使로서 元나라에 갔다. 一三二七年 密直副使 (樞密副使: 正三品)로서 앞서 元나라에 五年동안 抑留되었던 忠肅王을 爲하여 王位 를 노리던 瀋陽王暠(忠烈王의 孫子)의 무리가 元나라에 忠肅王을 誣告하는 등 갖은 惡略을 智謀로써 물리쳐 王의 禍를 모면케 하는 등 忠誠을 다한 勳績으로 二等功 臣이 되고 이듬해 一三二八年에 元나라에 가서 改元(年號改稱)을 祝賀했다. 一三三 0年(二十八代 忠惠王 卽位) 門下評理(僉議參理, 僉議平理: 正二品)에 昇進, 一三三 二年 忠肅王이 復位한 후는 忠惠王의 襲位를 爲해 盡忠한 誠意에 보람이 있어 一 三三九年에 忠惠王이 復位하였다. 一三四六年(二十九代 忠穆王 二)에 忠惠王 廟庭 에 配享. 諡號는 貞烈.

傍先祖 文忠公 益齋先生과 並擧로 忠烈·忠宣·忠肅·忠惠王등 四代를 걸쳐 五十餘 年間 紀元 以來 國內外 政勢가 極度로 混亂할 때 竭力 盡忠한 赫赫한 功績이 枚擧 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을 것이라 推想되오나 後裔로 五世孫人 忠愍公 諱 命敏 傍 祖는 一四五四年 端宗 癸酉靖難에 아들 三兄第와 四父子가 被禍되고, 六世孫인 慵 齋 諱 宗準 府君은 一四九八年(燕山君 四) 戊午史禍에 被禍되는 등 兩大 史禍로 因하여 子孫들이 救命圖生의 一策으로 所藏을 蕩失하였으니 府君의 生卒拜位墓所 등은 全然 찾아볼 길이 없고, 다만 高麗史烈傳에 依한 略史를 考證으로 그 功績을 略述할 뿐이니 참으로 痛惜하고 痛感하여 措辞가 錯雜하니 後世 秉筆之任을 期待 巳矣라.

一九八八年 戊辰 孟夏에 二十一世孫 東鎬 泣血謹編

(22)

●선조정렬공사적(先祖貞烈公事績) 역문(譯文)

목차

-21세손 동호(東鎬) 읍혈근편(泣血謹編)

부군(府君) 휘는 규(揆)이고 월성군파(月城君派) 파조(派祖) 휘 지수부군(之秀府君)의 2남 중 장남이며 김정(金貞)의 외손으로 고려(高麗) 25대 충렬왕(忠烈王) 때 대호군(大護軍)을 거쳐 1324년(27대 충숙왕忠肅王 11)에 우대언(右代言, 우승지右承旨: 정3품正三品 당상관 堂上官)으로 이듬해(1325년) 충혜왕(忠肅王)의 제3 비(妃) 조국장공주(曺國長公主, 원元의 위왕아목가魏王阿木歌의 딸)가 죽자 고부사(告訃使)로서 원(元)나라에 갔다.

1327년 밀직부사(密直副使, 추밀부사樞密副使: 정3품正三品)로서 앞서 원(元)나라에 5년 동안 억류(抑留)되었던 충숙왕(忠肅王)을 위하여 왕위(王位)를 노리던 심양왕 고(瀋陽王暠, 충렬왕忠烈王의 손자孫子)의 무리가 원(元)나라에 충숙왕(忠肅王)을 무고(誣告)하는 등 갖은 오약(惡略)을 지모(智謀)로써 물리쳐 왕(王)의 화(禍)를 모면케 하는 등 충성을 다한 훈적(勳 績)으로 이등공신(二等功臣)이 되고 이듬해 1328년에 원나라에 가서 개원(改元, 연호개칭年 號改稱)을 축하했다. 1330년(28대 충혜왕忠惠王 즉위) 문하평리(門下評理, 첨의참리僉議參 理, 첨의평리僉議平理: 정2품正二品)에 승진, 1332년 충숙왕(忠肅王)이 복위한 후는 충혜왕 (忠惠王)의 습위(襲位)를 위해 진충(盡忠)한 성의에 보람이 있어 1339년에 충혜왕(忠惠王)이 복위하였다. 1346년(29대 忠穆王 2)에 충혜왕(忠惠王) 묘정(廟庭)에 배향(配享). 시호(諡號) 는 정렬(貞烈).

방선조(傍先祖) 문충공(文忠公) 익재선생(益齋先生)과 병거(並擧)로 충렬(忠烈)·충선(忠宣)·

충숙(忠肅)·충혜왕(忠惠王) 등 4대를 걸쳐 56여 년간 기원(紀元) 이래 국내외 정세가 극도로 혼란할 때 갈력(竭力) 진충(盡忠)한 혁혁(赫赫)한 공적(功績)이 매거(枚擧)하기 어려울 정도 로 많을 것이라 추상(推想)되오나 후예(後裔)로 5세손인 충민공(忠愍公) 휘 명민(命敏) 방조 (傍祖)는 1454년 단종(端宗) 계유정난(癸酉靖難)에 아들 3형제와 4부자(父子)가 피화(被禍) 되고, 6세손인 용재(慵齋) 휘 종준(宗準) 부군(府君)은 1498년(燕山君 4) 무오사화(戊午史 禍)에 피화(被禍)되는 등 양대 사화(史禍)로 인하여 자손들이 구명도생(救命圖生)의 일책(一 策)으로 소장(所藏)을 탕실(蕩失)하였으니 부군(府君)의 생졸배위묘소(生卒拜位墓所) 등은 전 연(全然) 찾아볼 길이 없고, 다만 고려사열전(高麗史烈傳)에 의한 약사(略史)를 고증(考證)으 로 그 공적(功績)을 약술(略述)할 뿐이니 참으로 통석(痛惜)하고 통감(痛感)하여 조사(措辞) 가 착잡(錯雜)하니 후세(後世) 병필지임(秉筆之任)을 기대사의(期待巳矣)라.

1988년 무진(戊辰) 맹하(孟夏)에 21세손 동호(東鎬) 읍혈근편(泣血謹編)

□貞烈公諱揆行狀(정렬공휘규행장)

목차

-宗裔孫(종예손) 鍾醇(종순) 謹撰(근찬)

(23)

삼가 慶州李氏의 世譜를 안찰해 보면 貞烈公 諱 揆는 우리 李氏의 起世祖(一世) 蘇判公으로부터 二十二世에 記載되었는데 「四宰諡貞烈」이라는 五字 이외에는 生·

卒의 年·月·日이며 其他 墓所·配位와 立朝 行職 등의 事蹟은 하나도 찾아볼 길이 없고 다만 公의 後孫 金石文字를 考察하면 先系를 叙述할 때에 公은 本朝에 들어 와서 右參贊이라고 여러 곳에 나타나 있고 다른 文獻의 參考資料는 없었다. 그런데 요즈음 慶州李氏 中央花樹會에서 大宗譜를 編纂함에 있어서 文献을 收輯하기 위하 여 高麗史 影印本을 閱覽하여 본즉 公의 事蹟이 八·九처에 나왔는데 「官職으로는 評理·右代言·密直副使 二等功臣·參理·內侍郎中을 歷任하고 忠惠王室에 配享되어」

있은즉, 高麗朝에 重臣이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고 더욱이 益齋 文忠公 諱 齊賢으 로 並擧하여 記錄된 것도 三, 四次인데 益齋는 恭愍王室에 配享되었으니 益齋와 同時이면서도 若干 先輩가 아닌가 한다.

貞烈公부터 지금까지 年代는 약 六百七十年이 지냈다. 그 中間에 歷史와 時代는 여러 번 變遷되어 公이 돌아가신 지 四十年을 지나서 高麗가 망하고 李朝가 登國 하여 五百年을 經過하면서 高麗의 歷史는 秘密保藏되었다. 그러므로 누구나가 家傳 의 史乘이 아니면 도저히高麗年代에 事實을 參考할 수가 없으므로 모든 姓氏가 系 統과 事蹟을 잃은 것이 十常八九이다. 더구나 李朝가 또 망하고 倭政이 侵入하매 歷史와 人類는 거의 抹殺되고 말았다. 救死不贍이니 奚暇에 治禮義哉리요 하는 格 이다. 近來에 와서 모든 國民이 祖上을 찾는다. 뿌리를 찾는다고 하여 예전 歷史도 보고 譜牒도 閱覽하여 系統 및 事蹟을 是正하여 家門이 늘어가고 있다. 더구나 高 麗史와 李朝王室錄이 世上에 나돌고 있다. 그러면 高麗史乘을 考察하여 公의 事蹟 을 엮어 보려 하매 曠世之感을 금할 길 없다.

公의 諱는 揆인데 高麗忠肅王 十一年 甲子(一三二四)年부터 公을 처음 실었는데 여기에도 益齋와 並擧되었으니 二月 丁亥에 大護軍張公 允이 元으로부터 批目(임 금의 人事發令目錄)을 가지고 돌아왔는데 「李齊賢으로 密直司使를 삼았다」라고 했 으며 同年 四月 丁丑에 비가 내렸다. 戊寅에 金仁沇으로 知申事를 삼고 慶斯萬·李 揆로 右代言을 삼았다.

忠肅王 十二年 乙丑(一三二五) 十月 丁酉에 公主가 龍山行宮에서 薨하였다. 丙午 에 右代言 李揆를 元에 보내어 公主의 喪事를 告하였다. 庚午에 李齊賢으로 推誠 亮節功臣 政堂文學을 삼았다.

忠肅王 十四年 丁卯 冬 十一月 戊子에 敎하기를 「寡人이 元에 있는지 五年에 婪 臣이 國祚를 옮기려고 꾀하는데 侍從한 신하들이 節을 다하여 輔佐하기를 終始 한 마음으로 하였으니 그 功을 가히 釆錄할 만하도다」 하고 僉議政丞 尹碩 등을 一等 功臣을 삼고 密直副使 李揆 등으로 二等功臣을 삼고 土田과 藏獲(奴婢)을 주고 父 母 妻子에게도 爵을 賜하되 差等있게 하였다.

(24)

忠肅王 十五年 戊辰 六月 戊申에 密直副使 李揆를 元에 보내어 改元을 賀하였 다. 여기서는 公 혼자서 간 것이다.

忠肅王 十六年 己巳(一三二九) 十月에 忠肅王이 傳位할 것을 元에 奏請하여 十七 年 庚午 朔에 元帝가 典瑞院使 阿魯委 등을 보내어 忠惠王에게 傳位를 承認하였 다. 이해 四月 庚寅에 金深으로 都僉議中贊을 삼고, 任子松·元忠·全彦으로 贊成事 를 삼고, 李凌幹·李揆로 僉議參理를 삼고, 李齊賢으로 政堂文學을 삼고, 全英甫·韓 渥(公과 함께 忠惠王室에 配享되었음)으로 三司使를 삼았다. 여기서도 益齋를 並擧 하는데 公을 먼저 들었다.

忠惠王 二年 壬申 二月 이후는 忠肅王의 後元年에 入함. 忠肅王이 忠惠王에게 傳位한지 二年 만에 忠肅王이 다시 復位하였는데 忠肅王 後 五年에 帝가 王을 보 내어 還國케 하고 八年 乙卯(一三三九) 三月 癸未에 忠肅王이 薨하였다. 忠肅王이 항상 王을 撥皮라 부르고 待遇함이 恩惠가 적게 하였으나 襲位할 것을 遺命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行省左右司가 中書省에게 傳達하고 王도 또한 前評理 李揆 等을 보 내어 襲位할 것을 要求하였으나 伯顔이 太師가 되어 中止시키고 奏치 아니하였으 며 또 말하기를 「王燾(忠肅王)는 本是 好人이 아니오, 또 病이 있으니 마땅히 죽을 것이다. 撥皮(忠惠王)는 비록 嫡長이나 또한 반드시 다시 王을 삼을 것이 아니며 오 직 暠가 王이 됨직하다」 하니 李揆 等이 百計로 請하였으나 뜻을 얻지 못하였다.

夏 四月 丙戌에 大護軍 韓不花가 元으로부터 돌아와 李揆의 말을 傳하되, 「丞相의 固執이 처음과 같으매, 다른 省의 官員이 비록 申覆코자 하나 진실로 可히 因하여 빌려(假)서 말을 할 거리가 없으니 本國의 耆老들이 上疏하여 陳請함이 있으면, 거 의 可히 因하여 도모할 수가 있을 것이라」 하였다.

金周鼎의 高麗史 列傳에 貞烈公의 事蹟이 記載되어 있으므로 여기에 옮기어 쓴 다. 金周鼎은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深이다. 深이 元에 있으면서 賂物을 탐하는 權 漢功 等의 罪狀을 갖추어 大護軍 李揆와 護軍 金彦·金賞·崔智甫·申彦卿 等 數百人 으로 더불어 署名케 하여 徽政院에 올린 사실이 있었는데 그 후에 元太后가 權漢 功 等을 釋放하고 深 等을 杖流하매 揆·彦·賞·之甫·彦卿이 다 도망하여 隱避하거늘 王이 命하여 彦卿의 父 良과 揆의 外祖 金貞을 巡軍에 가두고 모두 그 家産을 籍 沒하였다는 句節이 있으니 이는 가장 重要한 大目이다. 公은 外祖라 하면 即 月城 君의 配位다. 여태껏 六七百年 來에 失傳하였던 할머니를 찾게 된 것이니 多幸한 가?

忠穆王 二年 丙戌(一三四六) 夏四月 己酉朔에 大行王(昇遐한 忠惠王)의 直影을 景靈殿에 奉安하였다. 五月 乙酉에 祔祭하고 政丞 韓渥 參理 李揆로서 配享하였다.

그 후에 鷄林府院君 文忠公 李齊賢은 恭愍王室에 配享되었는 즉, 公보다 二十年을 더 살으신 듯하다.

(25)

이것은 高麗史에서 公의 立朝한 事蹟의 大略이다. 그러나 生年이 記載되지 않았 고 卒年도 十七年이라 했는데 어느 十七年인가 알 수 없다. 王室에 配享된 年條가 忠穆王 二年 丙戌이고 보면 元至正 七年 丁亥가 十七年으로 誤錄이 된듯하다. 至 今에 와서 公의 享實이 이와 같이 大書特筆로 世上에 頒布될 줄이야 누구인들 生 覺이나 多少 遺憾스러움은 公의 學問이며 居家·處世·待人 等 모든 課程의 後世에 法規가 될만함이 하나도 傳하여지지 못한 것이다. 公의 後孫 等이 이 事蹟이 發見 되매 다 같이 기쁨을 감추지 못하여 나에게 行狀을 적으라 委託하므로 누차 사양했 으나 지극히 懇請하매 부득이 筆을 들게 된 것이다. 이 歷史를 보고서 한가지 期必 코 改正할 것은 公의 系譜에 所關된 것이다. 그러므로 月城君(公의 先考) 派의 世 系辨을 後欄에 添付하여 慶州李氏 諸宗親에게 通告하오니 後日에 是正되기를 懇切 히 바라는 바이다.

종예손(宗裔孫) 종순(鍾醇) 근찬(謹撰)

●정렬공휘규행장(貞烈公諱揆行狀) 역문(譯文)

목차

-종예손(宗裔孫) 종순(鍾醇) 근찬(謹撰)

삼가 경주이씨(慶州李氏)의 세보(世譜)를 안찰해 보면 정렬공(貞烈公) 휘(諱) 규(揆)는 우 리 이씨(李氏)의 기세조(起世祖, 1世) 소판공(蘇判公)으로부터 22세에 기재(記載)되었는데

‘사재시정렬(四宰諡貞烈)’이라는 5자(五字) 이외에는 생(生)·졸(卒)의 년(年)·월(月)·일(日)이며 기타(其他) 묘소(墓所)·배위(配位)와 입조(立朝) 행직(行職) 등의 사적(事蹟)은 하나도 찾아볼 길이 없고 다만 공(公)의 후손(後孫) 금석문자(金石文字)를 고찰(考察)하면 선계(先系)를 서 술(叙述)할 때에 공(公)은 본조(本朝)에 들어와서 우참찬(右參贊)이라고 여러 곳에 나타나 있고 다른 문헌(文獻)의 참고자료(參考資料)는 없었다. 그런데 요즈음 경주이씨(慶州李氏) 중앙화수회(中央花樹會)에서 대종보(大宗譜)를 편찬(編纂)하면서 문헌(文献)을 수집(收輯)하 기 위하여 고려사(高麗史) 영인본(影印本)을 열람(閱覽)하여 본즉, 공(公)의 사적(事蹟)이 8·9처에 나왔는데 ‘관직(官職)으로는 평리(評理)·우대언(右代言)·밀직부사(密直副使)·이등공신 (二等功臣)·참리(參理)·내시랑중(內侍郎中)을 역임(歷任)하고 충혜왕실(忠惠王室)에 배향(配 享)되어’ 있은즉, 고려조(高麗朝)에 중신(重臣)이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고, 더욱이 익재(益 齋) 문충공(文忠公) 휘(諱) 제현(齊賢)으로 병거(並擧)하여 기록(記錄)된 것도 3·4차(次)인데 익재(益齋)는 공민왕실(恭愍王室)에 배향(配享)되었으니 익재(益齋)와 동시(同時)이면서도 약 간(若干) 선배(先輩)가 아닌가 한다.

정렬공(貞烈公)부터 지금까지 연대(年代)는 약 670년이 지났다. 그 중간에 역사(歷史)와 시대는 여러 번 변천(變遷)되어 공이 돌아가신 지 40년을 지나서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등 국(登國)하여 500년을 경과(經過) 하면서 고려의 역사는 비밀보장(秘密保藏)되었다. 그러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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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원에서는 공개채용 서류접수와 관련하여 귀하의 개인정보를 아래와 같이 수집·이용하고자 합니다. 수집된 개인정보는 채용업무

멘토링 과정에서는 많은 어려움이 발생하기 때문에 초지일관 자신 감과참을성을 가지고 끈질기게 멘토링에 참여하는 것이 필요하다. 계획된 멘토링에 진지하고 헌신적으로

은 玆에 我朝鮮의 獨立國임과 朝鮮人의 自主民임을 宣言하노라 此로써 世界萬邦 에 告하야 人類平等의 大義를 克明하며 此로써 子孫萬代에 誥하야 民族自存의

→ 4世孫 금역당공(琴易堂公) 복창(復昌) → 5世孫 ②통정공(通政公) 의달(義達) → 6世孫 ④춘식(春植) → 7世孫 ▢ 系子 예석(禮錫) → 8世孫 삼우(三友) → 9世孫 ①효권 (孝權)

*단어 사이의 공통성과

癸酉五年平壤後朝鮮衛滿地方數千里傳至孫右渠漢人亡命滋多所諭側耳好聽然曾

宿 과 居士比丘와 男子尼姑의 階差 莫論고 過去佛敎의 殷鑑을 見며 未來佛 敎의 秦鏡을 照야 個個丈夫的 智行을 圓圓正正히 하야 世界海上에 吾佛敎의

(Taekwondo, Weight Lifting Players) (90 min × 6 days/week) Warm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