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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判書公 2世孫 蓮窩公 李末孫] 贈通政大夫工曹參議蓮窩慶州李公墓 碣銘(증통정대부공조참의연와경주이공묘갈명) 幷序(병서) 목차

-宗裔孫(종예손) 鍾醇(종순) 謹撰(근찬)

【계대(系代)】 ②판서공(判書公) 이양직(李良直) → 1世孫 ①연천현감공(漣川縣監 公) 사강(思剛) → 2世孫 ②연와공(蓮窩公) 말손(末孫)

湖南之淳昌郡赤城面槐亭里金壯洞鰲山上峰枕卯原而若堂封築者 莊陵節臣慶州李公 諱末孫號蓮窩衣履之藏也歲將半千尙闕表阡諸後孫恨之將刑石而衛隧道責余而爲銘余 非其人辭之久而其請益勤乃按其譜而叙之我李皆以羅初及梁部大人諱謁平爲始祖世仍 貴顯爲東方甲乙之族至麗初有諱金書戶部郎中娶敬順王女爲配屢傳諱申佑兵部侍郎又 傳九世諱忠堯兵部尙書生諱之秀金紫光祿大夫月城君於公六代祖也生諱揆高麗忠肅王 忠惠王兩朝歷評理, 右代言, 密直副使, 大護軍, 參理, 內侍郎中忠惠王室配享高祖元 林判司僕寺事曾祖蔓實同知事至吏曹判書祖良直文科典翰陞禮曹判書考諱思剛文科大 司成錄扈駕功臣妣坡平尹氏希彧女 世宗甲辰生公幼而岐嶷學問節義得於天賦也筮仕宣 敎郎濟用監主簿後贈通政大夫工曹參議甞與伯公季孫友于篤摯有如楊播家世日月征邁 若將大展無何 莊陵之禍起矣兄弟携手落南伯氏則庄點于湖西之禮山吾可面孝林里李氏 則轉到湖南順天黃田之鄕而居焉杜門謝世不復仕進篤守東岡歸來亭申公末舟亦同時南 下密邇相從唱酬詩歌而悲之曰落盡山花鴨水西狂歌浩放到芳堤關涯千里無窮恨付着東 風杜宇啼其爲詩也悽惋慷慨眞露出性情雖云短爛集句詠之賞之可以盡公之平日詩之感 人者不以世遠而有間也宜其有咳唾之爲世柯則者而其於杞宋之無徵何哉配南原梁氏進 士崇福其考也墓在禮山葛林而失傳今設壇于公墓左一男有慶朝奉大夫奉常寺奉事有三 子長舞年繕工監役贈左承旨次益年將仕郎次湯年順陵參奉曾玄以下多出文人節士今湖 嶺之世居者洽滿數百戶克昌門戶積之于躬發於後承者非也耶來請文者在洹在英始終主 事者在炫在漢在熙也銘曰卓卓蓮窩義同生死端廟可忘二君不事一身不顧萬鍾可謝鰲山 峰上英靈是妥於萬斯千不簪香火

西紀一九八七年丁卯寒食節

●[판서공 2세손 연와공 이말손] 증통정대부공조참의연와경주이공묘갈 명(贈通政大夫工曹參議蓮窩慶州李公墓碣銘) 병서(幷序) 역문(譯文)

-종예손(宗裔孫) 종순(鍾醇) 근찬(謹撰)

호남(湖南)의 순창군(淳昌郡) 적성면(赤城面) 괴정리(槐亭里) 금장동(金壯洞) 오산(鰲山) 상 봉(上峰)에 묘좌(卯坐)로 쓰인 묘는 장릉(莊陵) 절신(節臣) 경주이공(慶州李公) 휘 말손(末 孫) 연와공(蓮窩公)의 유택이라. 5백여 년이 지나도록 비석을 못 세웠더니 후손들이 한이 되어 장차 수갈 경영할새. 나에게 비명(碑銘)을 요구하니 내가 적임이 아니라고 사양할수록

그 청이 더욱 간절하여 이에 그 족보(族譜)를 근거로 아래와 같이 쓰니 우리 이씨(李氏)는 다 신라초(新羅初) 급량부(及梁部) 대인 휘 알평(謁平)을 시조로 하여 문인 달사가 이어나서 동방(東方) 갑족(甲族)이 되었다.

고려초(高麗初)에 들어와 휘 금서(金書)가 호부낭중(戶部郎中)이니 경순왕(敬順王) 따님으 로 배위(配位)를 삼았고 여러 대(代)를 지나 휘 신우(申佑)는 병부시랑(兵部侍郎)이고 9대를 지낸 휘 충요(忠堯)는 병부상서(兵部尙書)요, 휘 지수(之秀)를 생(生)하니 금자광록대부월성 군(金紫光祿大夫月城君)이시니 공에 6대조가 된다.

월성군(月城君)이 휘 규(揆)를 생하니 고려(高麗) 충숙왕(忠肅王)·충혜왕(忠惠王) 양조(兩 朝)에 평리(評理), 우대언(右代言), 밀직부사(密直副使), 대호군(大護軍), 참리(參理), 내시낭 중(內侍郎中)을 지내고 충혜왕(忠惠王) 사당에 배향(配享)하다.

고조부 원림(元林)은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요, 중조부 만실(蔓實)은 이조판서(吏曹判書) 를 지내셨고 조부 양직(良直)은 문과(文科)에 올라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지냈으며 고의 휘 는 사강(思剛)이니 문과(文科)에 대사성(大司成)으로 호가공신(扈駕功臣)에 뽑혔다.

배는 파평윤씨(坡平尹氏) 희욱(希彧)의 따님이니 세종(世宗) 갑진(甲辰)에 공을 생(生)하시 다. 공이 어려서부터 모양이 특이하시고 학문과 절의(節義)는 하늘이 내심이라 벼슬길에 올 라 선교랑(宣敎郎) 제용감주부(濟用監主簿)를 지낸 후 뒷날 통정대부공조참의(通政大夫工曹 參議) 벼슬을 증직(贈職) 받았다.

일찍부터 백씨(伯氏) 계손공(季孫公)으로 더불어 우애가 깊고 돈독하여 사마가(司馬家)를 본받았고 세월이 흐르매 장차 크게 쓰일 재목일러니 장릉(莊陵)의 화(禍)가 일어나니 형제 분이 손을 잡고 화를 피하여 남쪽으로 내려와서 백씨(伯氏)는 호서(湖西)의 예산(禮山) 오가 면(吾可面) 효림리(孝林里)에 자리를 잡고 살면서 두문불출(杜門不出)하고 벼슬을 사양하며 고향을 지키니 귀래정(歸來亭) 신공말주(申公末舟)도 한때에 남하(南下)해서 가까이 상종(相 從)하면서 시(詩)로 화답하고 슬퍼하니 시(詩)에 이르되 꽃은 떨어져 물에 뜨니 호연(浩然) 한 기운으로 노래하며 냇가에 이르렀네. 관애천리(關涯千里) 무궁한 한(恨)을 동풍(東風)에 우는 두견새 소리에 부치리라 했으니 그 시의 뜻이 처량하고 강개하니 천성을 들어냄이라.

비록 짤막한 절구(絶句)나 읊고 또 생각하면 공의 평일 지내던 심정을 알 지라. 글로 사 람을 감동시키는 힘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으니 어찌 많은 유적이 필요하리오. 배는 남원양씨(南原梁氏)니 진사(進士) 숭복(崇福)의 따님이라. 묘소는 실전(失傳)하고 예산(禮山) 갈림리(葛林里) 공의 묘소 좌측에 설단(設壇)하고 제사를 받는다. 아들 유경(有慶)은 조봉대 부봉상사봉사(朝奉大夫奉常寺奉事)요, 유자(有子) 삼인(三人)에 장(長)은 순년(舞年)이니 선 공감역(繕工監役)으로 증좌승지(贈左承旨)요. 다음은 익년(益年)이니 장사랑(將仕郎)이요. 다 음은 탕년(湯年)이니 순릉참봉(順陵參奉)이라.

증손(曾孫) 현손(玄孫) 아래는 문필인사와 절의인(節義人)이 많이 났고 영남(嶺南) 호남(湖 南)에 대(代)로 사는 자손이 수백 호라. 문호(門戶)를 빛내고 창성(昌盛)하니 적덕(積德)을 많이 하여 후세 자손에 발복(發福)하는 것이 아닐까. 나에게 와서 글을 청한 사람은 재원

(在洹)·재영(在英)이요. 이번 알에 시종(始終) 일을 주관한 사람은 재현(在炫)·재한(在漢)·재 희(在熙)라.

명(銘)에 가로되, 높고 높은 연와공(蓮窩公)은 의리로 생사를 함께 하다. 단종(端宗) 임금 을 있을쏜가. 두 임금을 섬기지 않았네. 한 몸을 돌아보지 않으니 만종록(萬鍾錄)도 사양했 네. 오산봉(鰲山峰) 위에 혼령이 편히 계시니 천년만년에 향화(香火)가 끊이지 않으리라.

서기 1987년 한식절

□[判書公 5世孫 華南公 李汝格] 泗川縣監贈兵曹參判慶州李公墓表(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