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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tructure of Seongjeong-gak as Council Hall in Chang-deok Palace Since 1777 (King Jeong-jo's First Year of Reig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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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1598-1142 (Print) / ISSN 2383-9066 (Online) https://doi.org/10.7738/JAH.2020.29.6.113

1777년(정조 1) 이후 창덕궁 성정각의 편전(便殿) 구조

The Structure of Seongjeong-gak as Council Hall in Chang-deok Palace Since 1777 (King Jeong-jo’s First Year of Reign)

이 종 서*1) Lee, Jong-Seo

(울산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Abstract

The king of Joseon Dynasty Jeong-jo commanded the renovation of Seongjeong-gak, once a study for crown prince, to serve as Pyeonjeon(便殿), a main office for kings. The renovated building strictly separated the routes designated for the king and the other officers, respectively. The interior space consisted of Youngnae, reserved for the king and his senior aides, and Youngwae, for lower ranking officers. Youngnae(楹內) and Youngwae(楹 外) corresponded to the two blocks (the space between two columns) on the east and west side, respectively.

Such structure of Pyeonjeon was heavily transformed over several occasions beginning from the late nineteenth century. Youngwae was subdivided into separate spaces, and the routes for the king and the officers became indistinguishable.

주제어 : 성정각, 편전, 영내(楹內)․영외(楹外), 동선(動線)

Keywords : Seongjeong-gak, Pyeonjeon(便殿), Youngnae, Youngwae, route

1. 서 론

1-1. 연구 목표

조선후기에 국왕이 공식적으로 정무를 보는 건물을

‘편전(便殿)’이라고 하였다. 이른 시기에는 창덕궁의 선 정전, 창경궁의 문정전, 경희궁의 자정전이 편전이었 다. 이 중에 선정전이 남아 있어 편전의 건축적 특징 을 이곳에서 거행한 정치의례와 결부하여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1) 그런데 선정전 등의 공식 편전은 점차 빈전(殯殿)이나 혼전(魂殿)으로 쓰이고, 창덕궁의 희정

* Corresponding Author : [email protected]

필자는 2019년에서 2020년에 걸친 창덕궁 성정각 수리보수 기간에 발주처인 창덕궁관리사무소의 허락을 얻어 수차 성정각을 방문하여 구조재와 수장재를 관찰하고 촬영하였다. 본고에 제시된 사진자료는 모두 필자가 촬영한 것이고, 분석도 필자가 직접 수행하였다. 다만, 목재의 질, 제재방법, 제작기법, 결구방식 등에 대해서는 목수로서 이번 성정각 수리 공사의 현장 대리인을 맡은 김지원 소장에게 자 문하였다.

1) 조재모, 「조선시대 궁궐의 편전 건축형식」, 『건축역사연구』, 12-4, 2003 참조

당, 창경궁의 숭문당, 경희궁의 흥정당이 편전 역할을 하였다.2) 이 중 현재의 희정당은 1917년의 화재로 불 타 없어진 터에 경복궁의 강녕전을 옮긴 것이고, 숭문 당은 1830년(순조 30)에 불탄 뒤 재건한 것으로 건축 구조나 공간 구획이 화재 이전과 일치하는지 알 수 없 다. 화재 후에 국왕이 이곳에서 정무를 본 기록도 확 인되지 않는다. 흥정당은 일제시기에 일본 사찰 건물 로 옮겼다가 사라졌다. 그러므로 선정전 등을 대신하 여 편전으로 쓰인 건물의 정치의례와 관계된 건축적 특징은 파악하기 어렵다.

그런데 창덕궁 성정각은 1777년부터 1811년까지 34 년간 편전 역할을 하였다. 정조는 경희궁에서 창덕궁 으로 거처를 옮기기로 결정하고 성정각을 수리하였다.

정조는 1777년 6월 8일에 처음으로 성정각에서 신하를 접견하였다.3) 이후 성정각을 상시적인 정무처로 사용

2) 윤정현, 「조선시대 원묘제 정비와 편전의 혼전 및 빈전 설치」,

『한국건축역사학회춘계학술발표대회논문집』, 2000;

신지혜, 「조선조 숙종대 혼전조성과 그 특징에 관한 연구-창경궁 문정전을 중심으로」, 『건축역사연구』, 19-3,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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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승정원일기』의 정조 재위 시 기록에서 ‘성 정각에 납시다[御誠正閣]’를 검색하면 무려 7,121회가 확인된다. 정조 때에는 성정각이 편전이었다.4)

국왕 정조 순조 헌종 고종

성정각에

납시다[御誠正閣] 7121 1548 54 174 희정당에

납시다[御熙政堂] 727 2674 1397 327

재위년수 25 35 16 45

표 1. 『승정원일기』 중 ‘어성정각(御誠正閣)’과 ‘어희정당(御 熙政堂)’의 출현 회수 비교

반면에 ‘희정당에 납시다[御熙政堂]’는 727회에 불과 하다.5) 정조는 성정각에서 대부분의 정무를 보았음을 알 수 있다. 정무의 성격을 보아도 상참(常參)·경연(經 筵)·차대(次對)·윤대(輪對) 등 편전에서 행하는 공식적 인 정무를 포괄한다. 그러므로 정조가 성정각을 수리 한 것은 편전으로 이용하기 위함이었으며, 성정각은 국왕의 정무에 적합한 구조와 시설을 갖추었음을 알 수 있다.

성정각은 정조 이후에도 국왕의 정무처로 쓰였다.

순조는 1811년(순조 11년)까지 성정각을 편전으로 사 용하다가 희정당으로 옮겼다. 이후의 국왕들은 희정당 에서 대부분의 정무를 보았으나 헌종과 고종은 성정각 에서도 정무를 보았다. 그때까지 국왕 정무에 적합한 구조와 시설을 유지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정각의 건축 구조를 분석하면 조선후기 국왕 정무처의 건축구조를 파악하고, 동선(動線)․좌향 (坐向) 좌차(座次) 등 정치의례와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성정각은 대한제국기와 일제시기 를 거치면서 심하게 변형되었다. 국왕의 정무처로 기 능할 수 없게 되었을 뿐더러 그 사실조차 잊혀지고, 일제시기에 한시적으로 쓰인 ‘내의원’ 기능이 강조되었 다. 따라서 성정각의 현재 구조에서 변형된 부분을 파 악하여 정무처로 쓰인 시기의 원형 구조를 도출하는 작업을 선행할 필요가 있다.

3) 『일성록』, 정조 1년 6월 8일(임인)

4) 『승정원일기』를 보면 1784년(정조 8) 1월 9일에 정조는 다음날 초계문신의 친시를 치를 장소를 ‘편전’으로 지정하였다. 그리고 1월 10일에 성정각에서 친시를 치렀다. 이와 동일한 관계는 1784년 3월 7일과 3월 10일의 기사에서도 확인되어, 당시 성정각을 ‘편전’으로 칭했음이 확인된다.

5)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승정원일기”를 검색하였다.

http://sjw.history.go.kr/m/index.do;jsessionid=75A2D48EB8DB81E16 4C1AE7C5B388788

1-2 연구 방법

성정각을 대상으로 한 연구는 많지 않다. 최근 초창 때의 건축 구조와 시간의 흐름에 따른 구조 변화를 다 룬 연구가 있으나 실증이 충분치 못하였다.6)

성정각은 17세기 전중반에 창건하여 1665년(현종 6) 에 원자(숙종)를 교육하는 강학청으로 사용한 건물로 추정된다.7) 그러나 1777년(정조 1)에 대규모로 수리하 였으므로 현재의 구조가 수리 이전과 같은지는 알 수 없다. 또한 1777년 이후에는 성정각의 수리 이력을 알 려주는 기록이 확인되지 않으며, 1800년대 전반부터 1900년대 초반에 작성된 시각자료를 통하여 근대기에 현재와 같은 구조로 변형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2019년부터 2020년에 걸쳐 성정각을 수리 보 수하는 과정에서 벽체의 수장재와 바닥 구들을 철거하 자 1777년 수리 직후의 원형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결구 흔적들이 발견되었다. 새롭게 드러난 이들 흔적을 기 존에 알려진 시각자료 및 문헌기록과 결합하여 분석하 면 정조 이후 장기간 국왕의 정무처로 사용되었던 구 조를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먼저 성정각을 독립적으로 표현 한 회화와 도면을 분석하여 각 자료를 제작할 시점의 모습과 구조를 파악할 것이다. 사실과 다르게 표현한 부분이 성정각에 대한 옳지 않은 판단을 유도할 수 있 기에, 시각 자료의 사실성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작 업을 병행할 것이다.

이어 성정각에서 정무를 본 사례를 『승정원일기』

에서 추출하여, 내부의 영역 구분, 국왕과 신하의 동 선, 좌차(座次) 등을 확인할 것이다. 『승정원일기』는 국왕이 정무를 본 장소와 참석 인원을 빠짐없이 기록 하였고, 참석인의 등급별 자리 배치도 자주 확인되므 로, 이를 통하여 정무처로 사용된 성정각의 평면과 동 선, 구분되는 영역의 칸수를 추정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번 수리 과정에서 드러난 결구 흔적을 통하여 1777년 수리 직후의 원형 구조를 파악할 것이

6) 이종서,「창덕궁 성정각의 건축 시기와 건축 구조」, 『건축역사 연구』, 28-2, 2019

이종서는 희우루(보춘정)를 성정각 창건 때부터 단층부와 결합되었 다고 보고 성정각을 조선전기의 침루형(寢樓型) 건축으로 보았다.

정조가 희우루를 ‘새로 지었다고[新建]’거나 ‘보춘정을 수개(修改)한 것이다’라고 한 것을 사실이 아니거나 과장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숙종대의 「궁궐지」에 ‘보춘정(報春亭)’이 확인되므로(한국 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文 K2-4362)), 창건 때에는 희우루와 단 층부가 결합된 구조가 아니었거나, 현재의 희우루 부분이 중층이 아 니었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동궐도」에서 서쪽 제1칸에 퇴칸을 그린 것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고 보칸 전체를 통합된 실내로 추 정하였으나, 본 연구에서 퇴칸이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7) 이종서, 위의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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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성정각 기둥이나 귀틀 등에 남아 있는 결구 흔적 을 분석하면, 현존 수장재가 1777년 이래 유지되어 온 것인지, 기존의 수장재를 철거하고 현존 수장재로 교 체한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방법을 사 용하여 1777년 이후 일제시기에 이르는 변화를 확인하 고 고종 때까지 유지된 성정각의 편전 구조를 도출할 것이다.

2. 성정각을 표현한 회화와 도면 분석

2-1. 『왕세자입학도첩』 「수하도」 (1817, 국립 고궁박물관 소장)

1817년(순조 17) 작 『왕세자입학도첩』중 「수하 도」는 성정각을 주 의례현장으로 표현하였다. 세자가 축하를 받는 건물이 성정각임을 알려주는 명시적인 표 현은 없다. 그러나 창경궁에 있던 동궁의 중심 건물인 시민당은 불탄 뒤 중건하지 않았고, 정조가 세자를 위 해 지은 중희당과 비교하면 건물의 규모가 작고 옆에 층루를 그려 놓았다. 또한 월대에 오르는 돌계단이,

「동궐도」에 세 개를 그린 중희당과 달리 두 개여서

「수하도」의 건물은 성정각으로 볼 수 있다.

그림 1. 『왕세자입학도첩』에 표현된 성정각

그런데 「수하도」에 별동으로 그려진 단층부의 입 면을 보면 동쪽 제1칸은 퇴칸, 하부 머름과 상부 쌍창, 쌍창 주위의 사벽(沙壁)을 그린 반면, 다른 칸들은 벽 이나 창호를 생략하고 내부의 의례 현장을 표현하였 다. 이로부터 서쪽 첫 칸은 전면에 머름과 쌍창을 갖 춘 방으로 판단할 수 있지만, 다른 칸들은 내부가 방 인지 청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다만, 중앙부를 넓은 단 칸으로 처리하고, 의례의 중심 공간으로 그렸다는 점

에서, 이 그림 외에 다른 정보가 없다면, 동쪽 한 칸이 방이고 나머지는 청(마루)이었다고 여기기 쉽다. 그러 나 세자의 위치가 현재의 동쪽 제2칸에 해당하고 현재 동쪽 제2칸 전면과 배면 벽에 쌍창이 있는 것을 고려 하면(그림 9), 「수하도」를 그릴 당시에 동쪽 제2칸 역시 방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내부의 의례 현장 을 표현하고자 그림에서 벽과 창을 생략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림 2. 본고의 성정각 칸 구분과 주초 표시

의궤나 도병(圖屛) 등 궁중 의례를 표현한 조선후기 회화자료에서는 의례가 행해지는 공간은 창호와 벽을 생략하고 건물의 모습을 왜곡하였다. 1784년(정조 8)의

「문효세자책례계병」에서는 「동궐도」에 총 9칸으로 나타나는 중희당을 3칸으로 그렸다. 의례현장을 효율 적으로 표현하기 위함임을 알 수 있다. 의례를 거행하 는 중앙부는 창호를 생략한 반면 좌우 부분은 전면 분 합을 그려 내부가 보이지 않게 하였다. 이 그림만으로 는 중앙부가 청인지 방인지 알 수 없다. 다만, 보편적 인 건축 구조와 의례 관행을 고려하여 청으로 추정할 수 있고, 「동궐도」에서 중앙부를 청, 좌 우를 방으로 그린 것에 근거하여 청으로 판단할 수 있다.

그림 3. 「갑인춘친정도」(좌)와 「문효세자책례계병」(우)

한편, 1734년(영조 10)의 「갑인춘친정도」에서는 5 칸인 희정당을 3칸으로 그리면서 모든 칸의 창호를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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략하였다. 그 결과 그림에서 희정당 내부의 방(온돌)과 청(마루) 구분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이처럼 의례 공간 의 칸 구획과 내부 구획의 건축적 성격을 사실대로 표 현하지 않은 것이 조선시대 의궤 그림의 특징이다. 그 러므로 『왕세자입학도첩』의 「수하도」에서 동쪽에 방 한 칸을 표현했어도 이것이 성정각에 방이 한 칸 뿐이었음을 알려주는 근거는 되지 못한다.

현재 성정각 단층부는 동쪽 두 칸이 온돌방이다. 온 돌방의 각 칸 전면에는 규모가 동일한 쌍창을 설치하 였고, 청과 접한 동쪽 제2칸의 배면에는 영쌍창을 설 치하였다(그림 9). 『왕세자입학도첩』에 근거하여 동 쪽 제2칸이 청(마루)이었다고 보려면, 현재의 전면 쌍 창과 배면 영쌍창은 『왕세자입학도첩』을 제작한 1817년 이후에 설치한 것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동 쪽 제2칸 후벽 기둥 상부에 분합문이나 분합창을 설치 했던 흔적이 남아 있어야 한다.

그림 4. 동쪽 제2칸 영쌍창 상인방과 기둥의 결구 현황(상) 및 동쪽 제1칸 기둥의 영쌍창 결구 흔적(하)

이번 수리 과정에서 영쌍창 문얼굴을 둘러싼 사벽 (沙壁)을 제거하자 벽에 가려져 있던 기둥 부위가 문 얼굴 인방을 결구한 부분과 함께 드러났다. 기둥에서 기존의 영쌍창 외에 다른 수장재를 결구했던 장부구멍 흔적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현재 전체가 벽

인 제1칸 배면 두 기둥에서 제2칸의 영쌍창 문얼굴과 기둥이 결구된 것과 같은 높이와 같은 지점에 있는 동 일한 크기의 쌍장부구멍이 확인되었다(그림 4). 벽체 하부의 머름에서는 영쌍창의 중간설주(영)를 끼웠던 홈까지 확인되었다. 동쪽 제2칸 후벽에 현존 영쌍창 외에 다른 창호를 설치한 적이 없고, 제1칸 후벽에 동 일한 규모의 영쌍창을 설치했음은 분명해 보인다. 그 러므로 동쪽 두 칸은 1777년 이래 지금까지 온돌방으 로 유지되어 왔다고 판단할 수 있다.

「수하도」에서 유용한 것은 좌차(座次) 좌향(坐向) 과 동선이다. 의례를 표현하려는 목적에서 그린 만큼 왕세자와 신하의 자리와 좌향, 왕세자와 신하들의 출 입 동선은 사실을 반영할 가능성이 크다. 그림에서 축 하를 받는 왕세자는 동쪽에서 서향하고 왕세자 앞의 신하들은 남향 북향으로 열을 지어 앉았으며, 끝 칸의 신하들은 왕세자를 바라보고 동향하였다. 이와 같은 좌차와 좌향은 국왕이 정무를 볼 때에도 다르지 않았 을 것으로 짐작된다.8) 또한 「수하도」에는 성정각 전 면 월대로 오르는 동 서 돌계단을 그려 놓았다. 돌계 단의 이와 같은 배치는 현재의 성정각과 같다. 왕세자 의 자리 배치를 고려하면 동쪽 돌계단은 왕세자 전용 이고, 국왕이 출입할 때에도 이 동선을 지났음을 짐작 할 수 있다.

2-2. 「동궐도」의 성정각(1830년 경, 고려대학교 박물관 동아대학교 박물관)

성정각은 『왕세자입학도첩』에 이어 1830년경에 제 작한 「동궐도」에서 확인된다. 「동궐도」는 궁궐을 사실대로 표현하고자 제작했다는 점에서, 여기에 표현 된 성정각은 『왕세자입학도첩』에 비해 당시의 실제 모습에 가깝다고 추정할 수 있다.

「동궐도」의 성정각은 화원(畫員)의 시점을 동남쪽 상부에 두어 희우루 동측면과 남측면이 잘 나타나고, 단층부는 서쪽 제1 제2칸 전체와 여기에 이어진 동쪽 제2칸의 일부만 확인된다. 단층부 서쪽 두 칸은 고주 열에 분합문을 그려 내부가 청(마루)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일부만 보이는 옆 칸(동쪽 제2칸)의 창호도 세 살분합으로 그려 내부가 청인 것처럼 표현하였다. 그 러나 이 칸 배면에 현존 영쌍창 외에 다른 창호를 설 치한 적이 없다는 점에서, 이 분합문을 퇴칸과 실내

8) 국왕의 지위를 ‘남면지위(南面之位)’라고 표현하듯 국왕은 북벽을 등지고 남향하여 앉는 것이 정식이었다. 그러나 성정각에서 국왕은 동벽을 등지고 서향했다고 추정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상 세히 서술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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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고려대 소장 「동궐도」의 성정각

사이에 설치한 것으로 그린 것이라면, 동쪽 제2칸의 세살분합 표현은 사실과 다르다고 판단할 수 있다.

성정각에는 국왕 정무처로서의 권위를 반영하는 시 설이 표현되어 있다. 지붕에 취두를 올렸고, 전면에는 월대를 두고 박석을 깔았다. 후면에도 박석을 깔았다.

후면에도 박석을 깐 것은 국왕이 서북쪽의 희정당 대 조전 영역에서 성정각 배면으로 진입하는 경우가 많았 기 때문으로 짐작된다.9)

월대에 오르는 계단은 『왕세자입학도첩』과 동일하 게 동 서 두 곳에 그렸다. 나아가 서쪽 제1칸과 제2칸 퇴칸 전면에 난간을 갖춘 통로를 그렸다. 따라서 동쪽 돌계단에서 서쪽 제2칸 통로로 이어지는 동선과, 서쪽 돌계단에서 서쪽 제1칸 통로로 이어지는 두 개의 동선 이 도출된다. 이렇듯 구분되는 두 개의 동선은 국왕과 신하의 위상 차이를 표현하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국왕은 동쪽 계단을 올라 성정각 단층부의 서쪽 제2칸 으로 진입하고, 신하들은 서쪽 계단을 올라 서쪽 제1 칸으로 진입한 것이다.

2-3. 「동궐도형」의 성정각(1907년 경, 장서각 규 장각)

9) 동아대 소장본에는 전면 월대 위와 후면 마당의 박석을 표현하 지 않았다. 그런데 고려대본과 동아대본에서 중희당 일곽을 비교하 면 고려대본은 중희당 전면 기단 위에 방전을 깔고, 부속 건물인 승 화루 전면에 방전과 박석을 깐 것으로 그렸다. 반면에 동아대본에서 는 중희당 기단 위는 바닥 소재를 표현하지 않고, 취병을 기준으로 나뉘는 승화루 전면에만 방전과 박석을 그렸다. 권위를 표현하는 의 미가 있는 방전과 박석을 본 건물인 중희당 전면에는 깔지 않고, 부 속 건물 전면에만 깔았다고 보기는 어려우므로, 기단이나 월대에 깐 소재는 고려대본에서 더욱 충실하게 표현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따 라서 필자는 고려대본에서 확인되는 성정각 전면과 후면의 박석 표 현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동궐도」에 이어 1907년 경 작성했다고 추정되는

「동궐도형」에서 성정각이 확인된다. 「동궐도형」은 평면 구획을 도시하고 칸살과 각 구획의 방 청 퇴 구 분을 표기하였다. 그런데 성정각의 평면이 장서각소장 본과 규장각소장본에서 각기 다르게 나타난다.

그림 6. 장서각 소장(상)과 규장각 소장(하)의 「동궐도형」

장서각본은 서쪽 제1칸을 제외한 나머지 칸에만 퇴 칸을 표현하였다. 간가도는 보편적으로 퇴칸을 표현한 다는 점에서 장서각본에 근거하면 서쪽 제1칸은 퇴칸 을 내부 공간으로 통합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그런 데 규장각본은 동쪽 아궁이칸에서 서쪽 제2칸에 이르 기까지 퇴가 없는 통합된 칸으로 그리고, 서쪽 제1칸 만 두 칸으로 나누었다. 아궁이칸에서 서쪽 제2칸에 이르는 전면에 연한 묵선을 그렸지만 퇴를 표현한 것 인지 분명치 않고, ‘퇴(退)’ 표기도 없다. 규장각본은 작성자가 전면과 배면 평주를 기준으로 칸을 나누되, 서쪽 제1칸은 서측면 중앙의 평주를 기준으로 두 칸으 로 나누어 그렸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서쪽 제1칸 전면에 퇴가 없었다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이렇듯 장서각본과 규장각본이 다르다는 점에서

「동궐도형」은 퇴의 유무, 칸의 통합과 분할 등을 판 단하는 자료로 이용하기 어렵다. 「동궐도형」을 통하 여 알 수 있는 것은 1907년경까지 서쪽 제1칸 바닥이 마루였다는 점이다. 현재 서쪽 제1칸은 퇴칸을 실내로 통합하였고, 바닥에 구들을 시설하였다. 구들은 「동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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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형」 작성 이후에 설치했음을 알 수 있다.

3. 『승정원일기』의 ‘영내(楹內)’와 ‘영외(楹外)’

구분

성정각은 1777년(정조 1)에 수리한 이후 정조의 재 위 기간 전체와 1811년(순조 11)까지 국왕의 상시적인 정무처가 되었다. 이후 희정당이 편전이 되었지만 헌 종과 고종도 때때로 성정각에서 정무를 보았다.

국왕이 성정각에서 행한 정치의례를 염두에 두고 1830년경에 작성된 「동궐도」와 현재의 성정각을 비 교하면, 평면 구획과 동선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동 궐도」에서는 서쪽 제1칸 전퇴에 통로 난간을 표현하 였다. 따라서 ‘서쪽 돌계단-서쪽 제1칸 퇴-서쪽 제1칸 분합문-실내’로 이어지는 동선이 성립한다.

그러나 현재 성정각은 서쪽 제1칸의 퇴칸을 실내로 통합하고, 통로 난간이 있던 부분을 머름과 쌍창으로 차단한 상태이다. 남쪽에서 성정각 실내로 진입하는 부분은 서쪽 제2칸의 퇴와 분합문이 유일하게 되었다.

20세기 초까지 성정각은 국왕과 신하의 동선을 구분한 반면, 현재의 성정각은 구분하지 않는 것이다.

이렇듯 「동궐도」에서 국왕과 신하의 동선이 달랐 다는 점에서 내부도 국왕 위주의 위상이 높은 구획과 이보다 위상이 낮은 구획으로 구분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구획별 위상 차이는 『승정원일기』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승정원일기』에서는 성정각 내부를

‘영내(楹內)’와 ‘영외(楹外)’로 구분하였다.

①상께서 성정각에 납시어 주강(晝講)하시는 데 입시할 때에 특진관 채제공, 동지사 정민시, 참찬관 남주로, 시 독관 이유경, 검토관 서유성, 가주서 조흥진, 기사관 서 용보 김재찬, 종신 안창군 이경, 무신 부호군 백동의, 대사헌 서유경, 헌납 유맹량이 차례대로 나와 엎드리기 를 마쳤다.…상께서 “도헌(都憲)과 유신은 잠시 ‘영외’로 물러가서 상의한 뒤에 나아와서 아뢰라.”라고 말씀하셨 다. 이유경 등이 ‘영외’로 나가 상의한 뒤에 나아와서 엎드렸다.10)

②상께서 성정각에 납시었다. 동부승지가 입시할 때에 동부승지 황승원, 가주서 신대구, 기주관 김봉현, 기사 관 이곤수가 차례로 나가 엎드렸다. 상께서는 ‘영내’에 앉아 ‘영호(楹戶)’를 닫고 8로의 도신(道臣)·수신(帥臣) 및 부백(府伯)의 장계를 ‘영외(楹外)’에서 읽으라고 명령하셨 다.11)

10) 『승정원일기』, 1458책(탈초본 80책), 정조 4년 2월 13일(임술) 11) 『승정원일기』, 1530책(탈초본 83책), 정조 7년 4월 11일(신미)

기록 ①은 1780년(정조 4) 2월 13일에 성정각에서 행한 경연(經筵)을 표현한 것이다. 경연에는 국왕을 포 함하여 특진관 채제공 등 13명이 참여하였다. 토론 중 에 신하들 간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자 정조는 “잠시

‘영외’로 물러나 상의한 뒤에 아뢰라.”고 하였다. 경연 은 성정각의 ‘영내’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기 록 ②는 1783년 7월 4일 오후 6시경[酉時]에 시작하여 밤 10시[二鼓]를 넘기며 진행한 정무를 표현한 것이다.

정조는 ‘영내’에 앉아 ‘영호(楹戶)’를 닫고 신하들에게

‘영외’에서 지방관의 장계를 읽게 하였다.

이 두 사례는 성정각 내부를 국왕과 시종신이 앉는

‘영내’와 이보다 권위가 낮은 ‘영외’로 구분했음을 알려 준다. ‘영내’와 ‘영외’ 사이에는 ‘영호(楹戶)’가 있어 차 단할 수 있었다.

그런데 위 기록에 쓰인 ‘영내’와 ‘영외’는 국왕이 북 벽을 등지고 남쪽을 바라보도록 평면 구획과 입면 가 구(架構)를 일치시킨 구조를 전제한 용어가 아니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국왕의 ‘남면’을 상정하면 ‘영(楹)’

은 국왕의 동선이 놓이는 중앙칸(어칸)의 전면 고주에 해당한다. 이 영은 행례와 좌차의 기준이 된다. 영의 북쪽은 ‘영내’로서 위상이 높고, 남쪽은 ‘영외’로서 위 상이 낮다. 17세기에 편전으로 지은 창덕궁 선정전과 창경궁 문정전, 경희궁 선정전은 어칸 북벽에 어좌를 설치하고 ‘영’을 기준으로 남쪽의 영외와 북쪽의 영내 를 구분하여 평면과 가구가 일치한다.12)

그러나 18세기 이후에 국왕의 상시적인 정무처 역할 을 하게 된 건물들에서는 국왕의 방위상 ‘남면’과 구조 재인 ‘영’을 기준으로 하는 평면 구획이 지켜지지 않았 다. 창덕궁 희정당과 경희궁 흥정당은 각기 선정전과 자정전을 대신하여 국왕의 편전 역할을 한 곳이다. 그 런데 이곳에서 정무를 보는 모습을 그린 그림에서는 어좌를 동쪽 칸에 서향으로 설치한 것이 확인된다.

희정당에서 행한 정기 관리 심사(도목정)를 기념하 여 1734년(영조 10)에 그린 「갑인춘친정도」에는 영 조의 어좌가 희정당 동벽에 놓여 있다(그림 3). 1691년 (숙종 17)에 경희궁 흥정당에서 행한 도목정을 기념하 여 작성한 「숙종신미친정계병」에도 숙종의 어좌가 흥정당 동쪽 칸에 있다.

“癸卯四月十一日酉時 上御誠正閣 同副承旨入侍時 同副承旨黃昇源 假注書申大龜 記注官金鳳顯 記事官李崑秀 以次進伏訖 上坐楹內 閉 楹戶 命讀八路道臣帥臣及府伯狀啓於楹外(중략)夜已二鼓”

12) 조재모, 「조선시대 궁궐의 편전 건축형식」, 『건축역사연구』, 12-4, 200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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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 「숙종신미친정계병」중 ‘흥정당친정도’(상)와 ‘흥정당 선온도’(하)의 어좌 위치

이러한 사례를 보면 조선후기에 국왕들은 희정당 등 의 후기 편전에서 정무를 행할 때에 ‘남면’이나 ‘영내 영외’의 고전적 의미에 얽매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정기적으로 관리를 심사하는 도목정은 중요한 정치행 위로 국왕권을 상징하는 의례의 성격이 강하였고, 그 렇기에 그림으로 그려 기념하였다. 이 도목정에서 국

왕이 방위상 ‘서면’한 것은 절대 방위가 아니라 국왕의 어좌에 기준한 상대 방위를 적용하였음을 알려준다.

나아가 성정각은 건물의 칸 구획과 바닥 설비, 계단 과 통로 배치 등의 측면에서 어좌를 동쪽 제1칸에 설 치하는 것이 합리적인 구조이다. 성정각은 동쪽 제1 제2칸이 구들을 시설한 방이고, 서쪽 제1 제2칸이 우 물마루를 시설한 청이었다. 이렇듯 두 칸 씩 구획한 평면에서는 중앙의 ‘어칸’을 설정할 수 없으므로 가구 와 평면이 일치하는 남북축의 ‘영내 영외’를 구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계단과 통로가 각기 두 곳 뿐이어서 신하의 동선을 국왕 좌우로 나누는 것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성정각에서 ‘영내’와 ‘영외’는 건물의 구조와 일 치하는 것이 아니라 정무의례에 필요한 공간의 위상차 를 표현하는 의미로 쓰였다고 볼 수 있다. 동쪽의 두 칸 방을 위상이 높은 ‘영내’로, 서쪽의 두 칸 청을 위 상이 낮은 ‘영외’로 설정한 것이다. ‘영내’와 ‘영외’의 이와 같은 설정은 각 공간이 수용한 인원수를 통해서 도 확인된다.

앞서 살핀 기록(①)에서 국왕 정조를 포함하여 13인 ‘영내’에 앉았다. 국왕은 일월오봉병과 어좌(御座) 등 권위에 부합하는 여유 공간을 확보했을 것이며, 단 층부 도리칸이 2.5m 정도이고, 실내의 보칸이 3.9m 정 도이므로 단칸은 국왕을 포함한 13인이 앉기에 협소하 다. 영내는 2칸 이상의 규모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렇다면 현재의 동쪽방 두 칸을 ‘영내’로 볼 수 있다.

국왕이 동쪽에 서향으로 앉고 측근 신하는 국왕 좌우 에 남 북으로 줄지어 앉았을 것이다. 『승정원일기』

의 다른 기록과 『왕세자입학도첩』의 좌차를 참고하 면, 일회성으로 대면하는 지방관이나 의관(醫官) 등은 서쪽의 청에 해당하는 ‘영외’에 동향하여 줄지어 앉았 을 것이다.

그리고 여름철인 1848년(헌종 14) 6월 26일에 ‘영내’

에 국왕을 포함하여 6인이 앉고 ‘영외’에 22인이 앉았 다.13) 겨울철인 1849년 1월 10일에는 ‘영내’에 국왕을 포함하여 23인이 앉고, ‘영외’에 의관 4인이 앉았다.14) 성정각의 실내 규모를 고려하면, 이들 사례는 각기 ‘영 내’와 ‘영외’에 수용 가능한 최대 인원을 알려준다고 볼 수 있다. 성정각 단층부 4칸 중에서 영내와 영외가 두 칸씩이었으며 각 영역은 20여명까지 수용할 수 있 었다. 동쪽 두 칸은 정치의례의 측면에서 ‘영내’이고 건축적 측면에서는 지금처럼 방(온돌)이었다. 서쪽 두

13) 『승정원일기』, 2474책(탈초본 121책), 헌종 14년 6월 26일(무진) 14) 『승정원일기』, 2481책(탈초본 121책), 헌종 15년 1월 10일(기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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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8. 성정각의 ‘영내․영외’ 구분 및 국왕과 신하의 동선과 좌차

그림 9. 동쪽 제2칸(좌)의 전면과 배면 창호 및 동쪽 제1 칸(우)의 전면 창호와 배면 벽체

칸은 정치의례의 측면에서 ‘영외’이고, 건축적 측면에 서는 「동궐도」에 표현된 것처럼 통합된 청(마루)이 었다.

4. 성정각 단층부의 건축 구조 분석

4-1. ‘영내(楹內)’ 부분의 창호 구조

『승정원일기』의 성정각 관련 기록에서는 단층부 실내를 ‘영내’와 ‘영외’로 구분하였다. ‘영내’와 ‘영외’는 각기 두 칸 규모로 동쪽이 ‘영내’, 서쪽이 ‘영외’에 해 당한다. 현재 상부에 우물반자를 시설한 동쪽 제1 제2 칸 온돌방이 ‘영내’이고, 서쪽 제1 제2칸이 ‘영외’였다.

‘영내’가 1777년 이래 두 칸 규모의 방이었음은 창호 양식에서도 확인된다. ‘영내’ 각 칸의 전면에는 같은 규모와 구조의 쌍창을 머름 위에 설치하였다. 쌍창 좌 우와 상부는 사벽으로 막았다. 창덕궁과 창경궁에서 머름과 쌍창, 사벽으로 구성된 벽 수장은 대부분 온돌 방의 외벽에 해당한다.

한편, 제1칸 배면은 머름 상부 전체를 사벽(沙壁)으 로 마감하여 창호가 없는 반면, 제2칸 배면에 영쌍창 을 설치하였다(그림 9). 이번 수리 공사 과정에서 제2 칸 배면 기둥에 현재의 영쌍창 외에 다른 창호나 부재 를 결구한 흔적이 없는 것을 확인하였다. 나아가 제1 칸 배면 기둥에 제2칸과 동일한 크기와 양식의 영쌍창 을 설치한 흔적을 확인하였다(그림 4). 그러므로 동쪽 제2칸 배면에 있는 영쌍창을 동쪽 제1칸 배면에도 설 치하면 정조가 수리하여 편전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1777년의 모습이 된다. 그리고 방과 청의 경계, 즉 ‘영 내’와 ‘영외’의 경계 부분에는 보칸 전체를 가로지르는 분합문얼굴이 남아 있다. 부재의 질이 좋고 정교하게 쌍사와 모접이를 베풀었다. 이 분합문얼굴은 정조 때

‘영호(楹戶)’로 불린, ‘영내’와 ‘영외’를 구획했던 문얼굴 에 해당한다. 이렇듯 동쪽 제1칸과 제2칸의 현존 창호 나 문얼굴은 ‘영내’로 불렸던 1777년 이래의 구조를 대 부분 간직하고 있다. 철거한 창호도 원형에 가깝게 복 원할 수 있다.

그림 10. 중간문얼굴의 문선 결구흔적과 청능화지 도배흔적

다만, 현재 제1칸과 제2칸 사이 보 아래의 문얼굴 (그림 10)은 성정각을 정무처로 사용하지 않게 된 이 후에 설치했을 가능성이 크다. 하방을 철거하여 상방 과 문선만 남아 있는 이 문얼굴은 구조가 특이하다.

북쪽 문선에서 남쪽으로 90cm 지점에 별도의 문선을 설치하여 여닫이문을 달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여닫 이문을 달았던 중간 문선은 다락문의 설주와 마주하고 있다. 이 문선 흔적으로부터 전면 벽까지 이어지는 문 얼굴 상방에는 미닫이문을 설치했던 홈이 남아 있다.

그런데 이와 동일한 구조의 문얼굴과 문 배치가 1864년에 창건한 운현궁 노락당에서 확인된다(그림 11). 노락당에서도 여닫이문과 미닫이문으로 구성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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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얼굴을 두 칸 규모의 방 중간에 설치하였다. 여닫이 문과 미닫이문의 경계에는 직각으로 별도의 미닫이 장 지(障子)를 설치하여 여닫이문은 통로칸의 문이 되고, 미닫이문은 전면 방문이 되게 하였다. 미닫이문을 닫 으면 각 칸이 별도의 방이 된다. 미닫이문을 닫아 놓 은 상태에서는 안쪽방 측면의 미닫이 장지문과 통로의 여닫이문을 이용하여 바깥방으로 출입할 수 있다.

그림 11. 노락당의 여닫이문과 미닫이문을 이용한 공간분할

이와 같은 시설은 안쪽방의 내밀성을 강화하는 효과 가 있으므로, 사적인 휴식과 침식 등 주거 기능에 유 의한 구조라고 볼 수 있다. 여닫이문과 미닫이문으로 구성된 문얼굴은 성정각에서도 같은 역할을 했을 것으 로 짐작된다.

그러므로 성정각 동쪽방 중간에 설치되어 있는 문얼 굴은 국왕이 신료의 보좌를 받으며 정무를 보는 ‘영내’

의 시설로는 적절치 않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 문얼 굴은 청과 방 사이의 분합문얼굴과 비교하여 치목 정 도도 거칠다. 쌍사를 새기지 않았으며 단청의 농도도 연하다. 이를 보면 방 중간의 문얼굴은 청과 방 사이 의 분합문얼굴(영호)과 제작 시기가 다르며, 성정각이 국왕 정무공간으로서의 기능을 잃은 뒤에 설치했을 가 능성이 크다.

나아가 이번 수리 과정에서 문얼굴 상부에 가려져 있던 수장재가 청능화지로 도배된 상태로 일부 노출되 었다(그림 10). 조선에서 청능화지는 중국 사신의 숙

소, 중국 황제 칙서 보관함 내면, 종묘의 영녕전 등 권 위가 매우 높은 공간이나 기물에 적용하였다.15) 그러 므로 문얼굴 상부의 청능화지 도배 흔적은 국왕이 정 무를 본, 도리칸 두 칸 규모의 ‘영내’가 통칸이었음을 알려준다. ‘영내’의 위상에 부합하도록 천장에 청능화 지로 도배했다가 현존 문얼굴을 설치함으로써 상부 수 장재에 도배 흔적이 남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16) 러므로 동쪽 제1칸 배면에 제2칸 배면에 있는 것과 동 일한 영쌍창을 설치하고, 방 중간의 문얼굴을 철거하 면 국왕을 포함하여 23명까지 앉았던 ‘영내’의 구조가 된다고 판단할 수 있다.

4-2. ‘영외(楹外)’ 부분의 창호와 천정 구조

‘영내’가 1777년 수리 직후의 구조를 대부분 유지하 고 있는 반면, 영외는 수차의 변화를 겪으면서 평면 구획과 시설이 크게 달라졌다. 다만, 이번 수리 과정에 서 현재 청(마루)인 서쪽 제2칸이 1777년 수리 직후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서쪽 제2칸(청) 전 면과 배면의 분합문얼굴을 해체한 결과 현존 수장재 외에 다른 부재를 결구했던 흔적이 전혀 나타나지 않 았다. 이는 서쪽 제2칸 전면과 배면의 구조가 1777년 수리 이후에 변형되지 않았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제2 칸 수장재의 구조와 결구 방식을 표준으로 삼아 서쪽 제1칸의 변형 정도와 변형 내용을 파악하고 원형을 도 출할 수 있다.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서쪽 제2칸의 분합문얼굴은 상인방과 문선을 연귀맞춤 기법으로 제작했으며, 이 부재를 결구하기 위해 기둥에 특이한 형태의 홈을 팠 다. 통장부구멍 아래에 좁고 긴 홈이 붙어 있는 형태 이다(그림 12 우). 분합문얼굴 하부의 문지방은 기둥에 쌍장부로 결구하였다(그림 12 중). 따라서 서쪽 제1칸 기둥 상부와 하부에서 동일한 형태의 결구 홈이 확인 되면 1777년 수리 직후의 원형으로 판단할 수 있다.

반면, 제작 기법이나 홈의 형태가 다르면 후대의 변형 으로 판단할 수 있다.

현재 서쪽 제1칸은 통로 난간이 있던 부분을 머름과

15)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홈페이지의 ‘원문자료검색’에서

‘청능화(靑菱花)’를 검색한 결과이다.

16) 현존 반자틀은 칸별로 조립하였으며, 두 반자틀 사이에는 수장 재를 설치하여 경계를 나누었다. 칸마다 반자틀을 독립적으로 조립 한 것을 보면, 방을 단칸에서 두 칸으로 확장했거나, 기존 문얼굴을 철거하여 통칸으로 사용하다가 현존 문얼굴을 다시 설치했을 가능 성도 있다. 그러나 문얼굴 상부의 청능화지 도배 흔적과 『승정원일 기』 기록을 고려하면, 1777년 수리한 이후 정무처로 사용할 시기에 는 두 칸 규모의 통칸으로 유지되었다고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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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2. 서쪽 제2칸 문얼굴(우)과 기둥하부 문지방 결구홈(중) 및 기둥상부 연귀맞춤 수장재와 기둥 결구도(우) 쌍창, 사벽(沙壁)으로 막아 퇴칸을 내부와 통합하였다.

「동궐도형」에서는 ‘청(마루)’으로 표현했지만, 지금은 통칸의 온돌방이다. 또한 서쪽 제1칸과 제2칸 사이에 사벽을 설치하여 현재의 청과 분리하였다.

그림 13. 서쪽 제1칸 근대기 제재목으로 제작한 쌍창문얼굴 의 결구 기법과 치목 상태

그런데 이번 수리 과정에서 서쪽 제1칸의 수장재가 대부분 근대기의 제재목임을 확인하였다. 톱날 흔적에 근거하면 측면과 배면의 창문얼굴, 벽체를 구성하는 벽선과 인방, 출입문얼굴이 모두 제재목이다. 부재의 결구 방식과 재목의 질도 서쪽 제2칸과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서쪽 제2칸의 문얼굴은 양질의 목재를 사용하 여 단면이 직각을 이루며, 연귀맞춤 기법으로 제작하 였다. 각 면에는 정교하게 쌍사를 새겼다. 그러나 서쪽 제1칸의 배면과 서측에 설치한 3개의 쌍창은 외부만 연귀맞춤이고 내부는 직각맞춤이다. 변재를 사용했을 뿐더러 심지어 직각을 이루지 못하고 수피를 벗긴 표 면이 노출되어 있는 부분도 있다. 쌍사도 새기지 않았

다(그림 13). 문얼굴 상방은 통장부로 결구하였다(그림 15). 중간 칸막이벽의 문과 벽선 인방 등도 직각맞춤 으로 제작하였다. 이렇듯 질 낮은 제재목으로 거칠게 치목하고, 직각맞춤기법으로 제작했다는 점에서 이들 수장재는 성정각이 국왕 정무처로서의 용도나 권위를 상실한 이후에 설치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서쪽 제1칸의 수장재 중에서 근대기의 제재목이 아 닌 것은 전면의 쌍창과 서측면의 머름뿐이다. 전면 창 호는 현재 쌍창이지만 문얼굴 상인방 중간에 중간설주 [영]를 끼웠던 제비초리맞춤 흔적이 있다. 그러나 하부 머름에는 중간설주를 끼웠던 홈이 없다. 이 창이 있는 부분은 본래 퇴칸의 난간과 통로였으므로 다른 곳에 있던 영쌍창을 옮겨와 중간설주를 제거하고 설치했음 을 알 수 있다. 동쪽 제1칸 배면의 영쌍창 설치 흔적 을 고려하면, 이 창은 동쪽 제1칸 배면에서 옮겨 왔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서쪽 제1칸에서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수 장재는 서측면의 머름뿐이다. 서측면은 오량가 팔작지 붕의 측면으로, 충량 하부에 평주를 세워 보칸을 두 칸으로 구획하였으므로, 고주를 세워 퇴칸을 구획할 수 없는 구조이다. 그런데 동쪽 고주와 마주보는 머름 부위에 머름동자를 설치하지 않고 두 개의 어미동자를 좌우로 배치하여 머름청판의 배치가 균일하지 않다(그 림 14 좌하). 어미동자와 수직선상의 창방과 도리에는 부재를 끼웠던 홈이 남아 있다. 이 홈과 마주보는 동 쪽 고주의 상부에는 연귀맞춤 기법으로 제작한 부재를 끼웠던 장부구멍과 그 위의 통장부구멍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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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4. 서쪽 제1칸 서측 하부(좌하)와 상부(좌상) 및 동측 하부(우하)와 상부(우상)의 분합문과 고창 설치 흔적

이들 장부구멍의 높이는 서쪽 제2칸 전면의 현존 분 합문얼굴과 분합문얼굴 상부의 고창문얼굴을 결구한 높이와 같다. 고주 하부에서는 서쪽 제2칸 배면에서 확인한 것과 구조와 크기가 같은 쌍장부구멍(그림 14 우하)이 드러났다. 분합문얼굴 하방을 결구한 홈이다.

그러므로 서쪽 제1칸 서측 머름은 퇴칸을 내부 공간 으로 통합하기 전에 설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오량 가 팔작지붕 측면에 고주와 일렬로 분합얼굴을 설치하 여 퇴칸을 구성했음도 알 수 있다. 나아가 서측면 머 름 상부 전체에 운두가 남아 있으며, 이 머름을 결구 한 기둥 상부에서는 연귀맞춤 기법으로 제작한 수장재 를 결구했던, 서쪽 제2칸에서 확인한 원형의 장부구멍 이 드러났다(그림 15). ‘영외’였던 시기에 서쪽 제1칸의 서측면은 현존 머름 위에 분합창을 설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번 수리 과정에서 서쪽 제1칸과 제2칸 사이 에 벽을 설치한 시점이 서양식 벽지를 궁궐 도배에 사 용한 근대기 이후임이 확인되었다. 현재 제1칸과 제2 칸 천장은 서까래가 드러나는 연등천장이다. 그런데 칸막이벽을 철거하자 벽 상부에서 여러 겹 바른 근대 기의 무늬가 있는 벽지가 노출되었다. 벽지는 칸막이 벽 상부, 보 하부에 공장제 못으로 고정한 반자틀 부

재에 붙어 있었다. 이 반자틀 부재는 제작 기법과 설 치 형태가 조잡하여 궁궐의 격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림 15. 서쪽 제1칸 측면 기둥의 결구홈

이 현존 부재와 함께 전체 반자틀을 이루었던 흔적 이 서쪽 제1 제2칸 장혀 하부의 소로와 동쪽 제2칸과 서쪽 제2칸 사이의 보 서쪽 측면에 남아 있다. 소로에 는 현존 반자틀과 같은 높이에 일정한 간격으로 못이 박혀 있거나 못 자국이 있다. 이 못도 근대기의 공장 제품이다. 동쪽 제2칸과 서쪽 제2칸 사이 보 서쪽 측 면의 보아지에는 반자틀 고정용으로 추측되는 못과 더 불어, 기둥쪽으로 약간 낮은 위치에 벽지로 추정되는 종이가 못에 붙어서 남아 있다. 못 옆의 기둥과 고창 틀에는 도배 흔적으로 여겨지는 종이가 같은 수평에 연결되어 남아 있다(그림 16).

이로부터 근대기에 서쪽 제1 2칸은 통칸으로서 천장 에 서양식 벽지로 도배했다가 이후에 현재의 칸막이벽 을 설치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반자틀을 구성했던 못이나 못 자국이 현재 퇴칸이거나 본래 퇴칸이었던 부분에는 없다. 이는 공 장제 못으로 반자틀을 고정하고, 서양식 벽지로 도배 를 하게 된 때에도 서쪽 제1칸과 제2칸을 분리하거나, 퇴칸을 실내로 통합하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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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6. 벽지와 함께 노출된 반자틀 부재(좌), 반자틀 고정 못(중), 못 자국 위치(우) 근대기에 공장제 못을 사용한 반자틀 설치와 근대

벽지를 사용한 도배가 이루어졌으며, 이후 서쪽 제1칸 과 제2칸 사이에 벽을 설치하고 제1칸 퇴를 실내로 통 합하면서 종이 반자를 철거함으로써 벽 위의 반자틀 부재만 남고, 나머지 반자틀 부재는 설치 흔적만 남게 된 것이다.

4-3. 퇴칸의 난간 구조와 주초의 홈

현재 성정각 단층부는 네 칸 중 세 칸에만 퇴가 있 고, 서쪽 제1칸에는 없다. 그러나 과거에는 네 칸 모두 퇴가 있었다. 그리고 「동궐도」에는 서쪽 두 칸에 통 로 난간을 그렸다. 따라서 「동궐도」 제작 시점 이후 현재까지 기둥과 마루귀틀을 교체하지 않았다면, 과거 에 설치했던 난간의 흔적이 남아 있어야 한다. 화원의 시점 때문에 「동궐도」에 그리지 못한 동쪽 두 칸도 기둥과 귀틀에 남아 있는 흔적을 통해 과거의 구조를 추정할 수 있다.

「동궐도」에 그려진 서쪽 제1칸과 제2칸 통로 난간 은 머름 중간을 잘라낸 것 같은 모습이다. 머름형 통 로 난간은 지금도 창덕궁 서향각, 부용정, 농수정 등 여러 건물에 남아 있다.17) 그러나 현재 이 두 칸의 기 둥과 귀틀에 남아 있는 결구 흔적에서는 「동궐도」와 다른 구조의 난간이 도출된다.

난간틀을 기둥 및 귀틀과 결구하는 방식에 근거하 면, 창덕궁 창경궁의 현존 난간 양식은 두 가지로 구 분할 수 있다. 하나는 기둥에 쌍장부구멍을 파서 결구

17) 이종서, 「창덕궁 선정전의 의례 공간적 건축 구조」, 『건축역 사연구』, 29-2, 2020 참조

『화성성역의궤』의 방화수류정에 대한 기록을 보면 이와 같은 형 태의 난간을 ‘곡두머름[曲頭遠音]’으로 칭했을 가능성이 크다((재)역 사기술연구소, 『방화수류정 창호 원형고증 연구용역』, 수원시 화 성사업소, 2016 참조) 그러나 도설(圖說)이 없고, 용례가 극히 희소 하여 본고에서 ‘곡두머름’으로 칭하지는 않는다.

하는 머름이다. 중간을 끊어 통로를 내게 되면 머름형 통로 난간이 된다. 다른 하나는 창경궁 숭문당 등에서 확인되는 평난간으로 난간 엄지기둥 상부에 못을 박아 기둥과 연결한다. 따라서 머름형 난간일 경우 기둥에 쌍장부홈이 남고, 평난간일 경우 못 흔적이 남게 된다.

그림 17. 서쪽 제2칸(상)과 동쪽 제1칸 여모중방과 여모귀 틀의 장부촉 흔적

현재 서쪽 제2칸의 양 기둥에는 주초 상부에서 52cm 정도 높이에 쇠못 흔적이 남아 있다. 이는 난간 엄지기둥 상부에 못을 박아 기둥과 연결했음을 알려준 다. 여모귀틀과 여모귀틀과 접하는 4cm 정도 두께의 여모중방에 걸쳐 쌍장부구멍이 남아 있다(그림 17 상).

난간 엄지기둥 하부 촉이 쌍장부였음을 알려준다. 이 러한 구조와 결구 기법은 「동궐도」에 표현된 머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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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될 수 없다. 숭문당에 설치되어 있는 것과 동일한 평난간이 도출된다. 서쪽 제1칸은 마루귀틀을 제거했 으므로 엄지기둥 촉을 꽂았던 쌍장부홈은 남아 있지 않지만 양 기둥에는 제2칸과 동일한 높이에 쇠못 흔적 이 있다. 제2칸과 동일한 양식의 난간을 설치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성정각 제1칸과 제2칸에 모두 통로 난간이 있었지만, 「동궐도」의 머름형이 아니라 창경궁 숭문당의 난간과 같은 평난간이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림 18. 머름형 통로 난간(상, 창덕궁 서향각)과 통로 평 난간(하, 창경궁 숭문당)의 구조와 결구 방식

그런데 화원의 시점 때문에「동궐도」에 표현되지 못한 동쪽 제1칸에서 머름형 통로 난간 흔적이 확인된 다. 동쪽 제1칸과 제2칸 기둥에는 머름을 설치했던 쌍 장부구멍이 남아 있다. 쇠못 흔적은 없다. 동쪽 제2칸 에는 쌍장부구멍만 있고 여모중방에 장부촉 흔적이 없 어 칸 전체에 머름을 설치했음을 알 수 있다. 반면에 동쪽 제1칸 여모중방에는 수직부재의 촉을 끼웠던 통 장부구멍이 남아 있다(그림 17 하). 동쪽 제1 제2칸의 여모중방은 두께가 9cm 정도로 서쪽 제2칸에 설치한 것에 비해 두껍다. 그리고 동쪽 제1칸 여모중방의 수 직면에서 직각 방향으로 나무 쐐기를 박아 수직부재의 하부 촉과 물리게 하였다. 이와 같은 결구 방식은

1776년(정조 즉위)에 건축한 서향각의 머름형 통로 난 간과 일치한다. 따라서 「동궐도」에 성정각의 서쪽 제1 제2칸 난간으로 표현된 난간은 실제로는 동쪽 제1 칸에 설치되어 있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림 19. 동쪽 제2칸과 서쪽 제2칸 사이 주초 좌 우 홈과 목부재 결구 비교

이렇듯 성정각에는 구조가 다른 두 종류의 난간을 설치하였고, 여모중방의 두께도 다르다. 난간의 종류가 다르다는 점에서는 시기를 달리하여 설치했을 가능성 도 고려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기둥 하부의 주초를 보 면, 동시에 두 가지 난간 양식을 계획했고 이와 연동 하여 여모중방의 두께도 달라졌음이 확인된다.

초창 때에 주초 상부 목부재의 결구 양식이 동일했 고 이것이 주초의 구조에 영향을 주었다면, 이후 상부 목부재의 결구 양식이 달라져도 하부 주초는 처음 설 치한 대로 유지되어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 성정각 주초의 구조는 두 가지로 확인되며, 각기 상부 목부재의 결구방식과 연동된다. 성정각 주초에는 홈이 파여 있다. 하나는 너비 4cm 정도의 좁고 긴 홈으로 통기판을 끼웠다. 홈은 통기판을 끼우는 용도로 계획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구조의 주초는 머름형 난 간을 설치한 동쪽 제1칸과 제2칸에서 확인된다. 다른 하나는 가로와 세로 모두 9cm정도로서 전자와 비교하 여 넓이가 넓고 길이가 짧다. 이러한 구조의 주초는 숭문당에 있는 것과 같은 평난간을 설치했던 서쪽 제1 제2칸에서 확인된다. 주초 홈에는 여모중방을 올려놓 았다. 이 홈은 통기판과는 관련이 없고 여모중방을 올 려놓기 위해 계획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동쪽 제2칸과 서쪽 제2칸의 경계를 이루는 주초는 동측면과 서측면의 홈 구조가 다르다. 동측면 은 좁고 길고 서측면은 넓고 짧으며, 각기 상부 목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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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0. 동쪽 제1 제2칸 기둥의 하부 머름 결구 흔적과 상 부 인방 결구 흔적

재의 두께나 결구방식과 연동된다. 이는 이 주초를 설 치할 때 상부 목부재의 양식이나 결구 차이를 고려했 음을 알려준다. 그러므로 동쪽 제1 제2칸과 서쪽 제1 제2칸의 난간 양식과 여모중방의 두께가 다른 것은 설 치시기의 차이가 아니라 동시대의 양식 차이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동쪽 제1칸의 머름형 통로난간과 제2 칸의 머름 및 서쪽 제1 제2칸의 평난간은 같은 시점에 설치한 것이다. 그러므로 결구 방식이 다른 두 종류의 난간은 정조가 성정각을 수리하여 편전으로 사용한 1777년 이래 공존해 왔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렇듯 한 시점에 상이한 난간 양식을 계획한 것은 창호 설치 여부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숭문당에 있는 것과 같은 평난간은 상부에 창호를 설치할 수 없 는 구조이므로 이 양식의 난간을 계획할 때에 창호는 배제된다. 반면에 머름형 난간에는 상부에 분합창을 설치할 수 있다. 머름형 통로 난간일 경우 통로에 문 을 설치하고, 문 울거미를 머름 위의 창 울거미와 결 합하여 여닫는다. 머름형 통로 난간과 문 창 결합구조 는 서향각 등 창덕궁의 현존 건물들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므로 동쪽 제1 제2칸의 머름형 난간은 상부 분합 과 연동하여 계획했다고 볼 수 있다. 동쪽 제2칸은 머 름 상부에 전면 분합창을 설치했고, 머름형 통로 난간 을 설치한 동쪽 제1칸에는 문 창 결합구조를 적용했을 것이다.

현존 기둥에도 분합을 설치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동쪽 제1 제2칸 기둥 하부에는 머름을 끼웠던 쌍장부 구멍이 남아 있다. 이 쌍장부구멍의 상부에는 서쪽 제 2칸에서 1777년 수리시점의 원형구조임을 확인한, 연

귀맞춤 기법으로 제작한 수장재를 끼웠던 장부구멍 흔 적이 남아 있다. 다만, 동쪽 제2칸을 구성하는 두 기둥 면 중 서쪽의 홈이 통장부여서 전체가 통일되지는 않 는다. 그러나 4개 면 모두에 머름을 설치했던 흔적이 분명하므로 통장부 흔적은 후대에 문얼굴을 제거하는 과정에서의 변형 등의 가능성을 염두에 둘 수 있다.

머름 위에 분합을 설치한 것은 기둥 하부 쌍장부구 멍 수평이 다른 것에서도 확인된다. 동쪽 제1 제2칸 기둥의 머름을 결구했던 쌍장부구멍은 북쪽(실내) 홈 이 남쪽(실외)에 비해 최대 2cm가량 높다. 이는 머름 윗면이 수평이 아니라 턱이 져 있었음을 알려준다.

이번 수리 과정에서 머름 전체에 운두가 있는 것을 확인한 서쪽 제1칸 서측 머름의 쌍장부 결구 홈도 건 물 내부 쪽이 높다(그림 15). 1777년 이래의 원형으로 판단한 서쪽 제2칸 분합얼굴 하방 결구홈 역시 내부 쪽이 높다(그림 12 중). 이 높이 차이는 분합을 지탱하 는 운두로 인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동쪽 제1칸에는 머름형 통로 난간과 분합 문 창 결합을, 동 쪽 제2칸에는 머름 위에 전면 분합을 설치했다고 판단 할 수 있다. 동쪽 제1 제2칸은 국왕이 자리하는 ‘영내’

이므로 분합을 설치하여 외부의 시선을 차단한 반면,

‘영외’인 서쪽 제1 제2칸에는 숭문당에 있는 것과 동일 한 구조의 평난간을 두어 통로 기능에 충실하도록 계 획했다고 볼 수 있다.18)

5. 결론

성정각은 1777년(정조 1)에 수리하여 편전으로 사용 한 이래 19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국왕들의 정무처가

18) 퇴칸 전면 모든 기둥의 하부와 상부에 하방과 상방을 끼웠던 통장부구멍이 남아 있어 건물 정면 전체 칸에 분합문을 설치한 시 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쪽 제1 제2칸은 머름을 결구했던 기존 장부구멍과 중복되어 있어 머름을 철거하고 설치한 것이 확인된다 (그림 20 하). 장부 형태가 통장부인 것을 보면 문선과 상방을 반연 귀나 직각맞춤 기법으로 결구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번 수리 공사 에서 원형 수장재는, 고창문얼굴을 논외로 하면, 연귀맞춤 기법으로 제작하거나 쌍장부로 결구한 것을 확인하였고, 이후에 변형된 것은 직각맞춤 기법으로 제작하거나 통장부로 결구한 것을 확인하였다.

그러므로 시간 순서로 보면 서쪽 제1 제2칸의 숭문당형 난간과 동 쪽 제1 제2칸의 머름을 먼저 설치했고, 이후 이들 난간을 철거하고 전면분합을 설치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현재 이 통장부구멍은 나무 토막으로 메워놓았다. 그런데 본래 퇴칸이었다가 벽을 설치한 서쪽 제1칸에서도 이번 수리 과정에서 나무토막으로 메운 통장부구멍이 드러났다. 이 칸 측면과 배면에서 드러난 연귀맞춤기법과 결부된 원 형 장부구멍은 흙으로 메워져 있었다. 이는 서쪽 제1칸 퇴칸은 벽을 설치하여 실내로 통합하기에 앞서 일정기간 분합을 철거한 상태로 유지했음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모든 칸 전면 평주에 전면분합을 설 치한 시점은 평난간과 머름 설치 이후이고, 서쪽 제1칸 퇴칸을 실내 로 통합하기 이전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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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었다. 평면은 전면에 퇴를 두고 실내를 동쪽의 두 칸 방(온돌)과 서쪽의 두 칸 청(마루)으로 구획하였으 며, 이러한 구조는 20세기 초까지 유지되었다.

전면의 퇴칸은 동쪽 제1칸에 머름형 통로 난간을, 제2칸에는 칸 전체에 머름을 설치하였다. 머름 위에는 분합을 설치했고, 서쪽 제1 제2칸에는 창경궁 숭문당 에 있는 것과 같은 구조의 평난간을 설치하였다. 서쪽 제1 제2칸 난간 사이의 통로는 외부의 동 서 계단과 이어지며 국왕과 신하의 동선을 구분하였다.

실내 공간은 국왕과 시종신료가 앉는 ‘영내(楹內)’와 위상이 낮은 ‘영외(楹外)’로 구분하였다. ‘영내’는 동쪽 제1 제2칸에 해당하고 ‘영외’는 서쪽 제1 제2칸에 해당 하였다. ‘영내’는 우물반자를 설치한 온돌방으로 전면 에 쌍창을 설치하고 배면에는 영쌍창을 설치하였다.

‘영외’에 해당하는 서쪽 제1칸과 제2칸 중에서 제2칸은 지금까지 원형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현재 크게 변형 된 상태인 서쪽 제1칸은 전면과 배면 및 바닥 구조가 서쪽 제2칸과 동일하였다. 다만, 서측면은 고주를 설치 할 수 없는 구조적 제약으로 인하여 고주열의 창방과 도리에 분합문얼굴과 고창문얼굴을 끼워 넣어 퇴칸을 구획하였다. 분합문얼굴 하부는 서측면 머름 중간의 어미동자에 접하게 하였다. 서측면 머름 위에는 연귀 맞춤 기법으로 제작한 분합창문얼굴을 결구하였다.

현재의 성정각은 비록 근대기 이후 심하게 변형되었 지만, 장기간 국왕들이 정무를 보았던 건물 중 유일하 게 현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나아가 성정각에서 국왕의 자리는 절대 방위 로 ‘서면(西面)’이었다는 점에서 상대 방위를 적용한 국왕의 ‘남면’과, 입면 가구와 일치하지 않는 ‘영내 영 외’의 설정을 알려준다. 이는 구조재인 ‘영’을 기준으로

‘영내 영외’를 분리하고 국왕이 절대 방위에서 ‘남면’할 수 있었던, 선정전 등 앞 시기 편전과 구조가 다르다 는 점에서, 건축적으로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성정각에서 확인되는, 가구와 일치하지 않은 ‘영내 영외’의 설정 및 동서축으로 놓인 동선과 좌차는 앞 시기의 편전을 대체한 희정당 등에서도 이루어졌을 가 능성이 있으며, 본고에서는 그림 자료를 통해 일부 사 례를 확인하였다. 그러므로 본 연구는 향후 선정전 등 앞 시기 편전과 희정당 등 뒤 시기 편전을 비교하여 건축 구조의 차이를 정치 의례와 관련하여 확인하고, 정무처를 앞 시기의 편전에서 뒤 시기의 편전으로 옮 긴 이유를 밝히는 연구로 심화할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1.『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2. 『일성록(日省錄)』

3. 『왕세자입학도첩(王世子入學圖帖)』

4. 「동궐도(東闕圖)」

5. 「동궐도형(東闕圖形)」

6. 『궁궐지』(한국학중앙연구원, 청구기호 K2-4363) 7. 신지혜 「조선조 숙종대 혼전조성과 그 특징에 관한

연구-창경궁 문정전을 중심으로」『건축역사연구』

19-3, 2010

8. 윤정현, 「조선시대 원묘제 정비와 편전의 혼전 및 빈 설치」 『한국건축역사학회춘계학술발표대회논문 집』, 2000

9. 이종서,「창덕궁 성정각의 건축 시기와 건축 구조」

『건축역사연구』28-2, 2019

10. 이종서, 「창덕궁 선정전의 의례 공간적 건축 구조」

『건축역사연구』 29-2, 2020

11. 조재모 「조선시대 궁궐의 편전 건축형식」 『건축역 사연구』 12-4, 2003

접수(2020. 11. 09) 수정(1차: 2020. 12. 13) 게재확정(2020. 1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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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면 외부 (퇴칸 제거,

고주열)

배면 외부

서측면 내부

퇴칸 외부

그림 21. 국왕의 정무처 사용기 성정각 단층부의 입면 추정

수치

그림 5. 고려대 소장 「동궐도」의 성정각 사이에 설치한 것으로 그린 것이라면, 동쪽 제2칸의세살분합 표현은 사실과 다르다고 판단할 수 있다. 성정각에는 국왕 정무처로서의 권위를 반영하는 시 설이 표현되어 있다
그림 7. 「숙종신미친정계병」중 ‘흥정당친정도’(상)와 ‘흥정당 선온도’(하)의 어좌 위치 이러한 사례를 보면 조선후기에 국왕들은 희정당 등 의 후기 편전에서 정무를 행할 때에 ‘남면’이나 ‘영내 영외’의 고전적 의미에 얽매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림 8. 성정각의 ‘영내․영외’ 구분 및 국왕과 신하의 동선과 좌차 그림 9. 동쪽 제2칸(좌)의 전면과 배면 창호 및 동쪽 제1 칸(우)의 전면 창호와 배면 벽체 칸은 정치의례의 측면에서 ‘영외’이고, 건축적 측면에서는 「동궐도」에 표현된 것처럼 통합된 청(마루)이었다.4
그림 12. 서쪽 제2칸 문얼굴(우)과 기둥하부 문지방 결구홈(중) 및 기둥상부 연귀맞춤 수장재와 기둥 결구도(우) 쌍창, 사벽(沙壁)으로 막아 퇴칸을 내부와 통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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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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