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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해 지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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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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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석 사 학 위 작 품

수 해 지 역

- A F l o o d A r e a -

국 민 대 학 교 문 예 창 작 대 학 원

수 필 전 공

2 0 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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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 사 학 위 작 품

수 해 지 역

- A F l o o d A r e a -

국 민 대 학 교 문 예 창 작 대 학 원

수 필 전 공

2 0 0 1

(3)

수 해 지 역

지 도 교 수 손 필 영

이 작 품 을 석 사 학 위 청 구 작 품 으 로 제 출 함

2 0 0 1년 8 월

국 민 대 학 교 문 예 창 작 대 학 원

수 필 전 공

2 0 0 1

(4)

신 광 숙 의

석 사 학 위 청 구 작 품 을 인 준 함

2 0 0 1년 8 월

심 사 위 원 장

심 사 위 원

심 사 위 원

국 민 대 학 교 문 예 창 작 대 학 원

(5)

목 차

작품요약 2

1. 수해지역 3

2. 혼자 크는 아이들 11

3. 준이 17

4. 슬픈 인연 22

5. 다시 그 섬에 27

6. 새로운 만남 32

7. 피지를 꿈꾸며 38

8. 터 43

9. 암자로 오르는 길 47

10. 외딴집 5 1

11. 조약돌 57

12. 노랑머리 6 1

13. 내일 67

14. 어머니 이제는 7 1

15. 독립시대 75

Abst r a ct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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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 품 요 약

작품<수해지역> 은 우리가 살고있는 지역에서 3년간 수해를 당하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사람들에 의한 상처로 어 려움이 더욱 가중되어 고통을 겪기도 하지만 또 힘을 내어 살아가는 이유는 마음 따뜻한 이웃의 도움 때문이기도 하였다. 또한 교사인 남 편이 학교와 아파트의 침수로 삼 년 동안 애쓰던 과정을 보고 그 느 낀 바를 작품화하였다.

<준이> , <혼자 크는 아이들> , <슬픈 인연> , < 다시 그 섬에> , <새로 운 만남>등의 작품은 교직생활을 하면서 만나는 평범하지 않은 아이들 과 교사들과의 특별한 만남의 이야기로 그들의 아픔과 그 안의 보람, 기쁨 등을 표현한 작품들이다.

< 피지를 꿈꾸며> , < 노랑머리> , < 내일> , <독립시대> 는 우리 가족이 살아오면서 힘들었지만 서로 보아주고 참아주며 살아온 그래서 그리움 으로 추억하는 이야기가 담겨있다.

< 터> , < 암자로 오르는 길> 은 여행하면서 생각하고 느낀 정서를 표 현하였으며 그 여행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게되는 소중한 시간임을 깨 닫게 되는 과정을 담았다.

< 외딴집> , < 어머니 이제는> < 조약돌> 에서는 어린 시절의 기억과 어려웠던 시절의 희망, 연세 있으신 어머니에 대한 안타까움, 세월과 함께 너그러워지는 가족과의 사랑을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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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해 지 역

집중호우로 인하여 문산 시내로 들어오는 통일로가 끊어졌다. 연수 받고 서울서 오는데, 시골길로 도느라 세시간이 넘게 걸렸다. 터미널 도 잠겨버려 임시 주차장이 된 곳에서 집에를 오려면 한참을 걸어와 야 했다. 그 길가의 저지대 단독주택가는 지붕꼭대기까지 물에 잠겨 버리는 수해를 두 번이나 겪었다.

그런데 물이 빠져나간 그곳을 지나쳐오기가 쉽지 않았다. 집집마다 내놓은 쓰레기가 산을 이루며 썩어서 악취가 코를 찌르고, 집집마다 집기나 살림을 내놓고 씻고 있거나, 먼지만 풀썩거리는 기반이 약해 진 집이나 건물을 허물고 있는데,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쓰고 있는 사 람들의 지친 모습을 보기가 안쓰러워서였다.

그곳을 지나 아파트의 15층까지 걸어서 올라갔다. 식품을 살만한 가 게도 모두 잠겨 서울에서 시장 본 물건을 잔뜩 들고 힘겹게 올라가니 모처럼 학교에 갔다 온 작은아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신혼인 수학선 생님이 허술한 집에 전세 들어 있었는데. 지붕까지 물에 잠겨 어렵게 장만한 살림들이 둥둥 떠가는 것을 보면서도 속수무책이었다고 한다.

물이 빠지고 집이 다 무너져 갈곳이 없어져버린 사모님은 병이 나고 선생님은 대책이 없어 너무 허탈해 하신다고 하였다.

조금 있다 들어온 큰딸 역시 물에 잠겨버린 잘 알고 지내는 선생님 댁에 일해주러 갔다 왔는데, 집이 온통 오물냄새로 가득 차있고 가재 도구는 모두 물에 잠겨 못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 선생님 댁은 벌써 두 번째, 일에 지친 사모님 보기가 너무 민망할 정도였는데 다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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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들이 오셔서 돕고 계셨다며 처참했던 수해의 광경과 집이 잠겨 버린 친구들의 딱한 사정, 함께 가서 일해주고 온 친구들의 봉사활동 등 저희들 나름대로 수해를 보며 생각하는 바를 이야기하였다.

어릴 때 살던 고향사람들은 자연이 주는 만큼 받고, 없으면 없는 대 로 순응하며 살았다. 동네 안에 저수지가 있어 큰 가뭄이나 홍수의 어려움을 모르고 주어지는 혜택에 고마움을 느끼며 그 안에서 부지런 히 노력하였다. 그래서 자연재해의 어려움을 별로 경험해 본적이 없 이 자랐다.

성장하여 고향을 떠나 파주에 20년 넘게 살면서 홍수나 가뭄도 모 르고 공기와 교통도 좋아서 아주 살기 좋은 곳이라 생각했었다. 통일 되었을 때를 생각하면 우리나라의 배꼽 부분에 해당하는 중요한 지리 적 위치에 산다고 자부심을 느끼며, 집안 식구들이 너무 멀고 접경 지역이라 위험하다며 고향 근처로 와서 살라고 아무리 권해도 이곳이 좋다고 자랑하며 살았었다.

그러나 그러한 자부심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 어 디냐고 물어서 문산 이라고 대답하면 모두 불쌍한 눈으로 바라보는 곳이 되어 버렸다. 상습수해지역, 구제역, 말라리아 발생지역, 접경지 역, 아이들에겐 농어촌 지역학생, 하다 못해 헌혈을 자주 하던 큰 딸 아이는 말라리아 발생지역 주민이라고 거부당하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그래도 이곳에서 계속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까지 해보게 되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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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96년도부터 시작하여 파주지역에 삼 년 계속 된 집중호우로 인한 수해. 오 ! 그 어려움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해 야할까.

평범한 장마비가 내리는 듯 시작하여, 조금 빗줄기가 굵다는 생각이 들더니, 좀 오래 오는 편이라며 걱정들을 하는데, 갑자기 온 지역이 술렁술렁 해지며 대책 없이 단 10여분만에 문산 시내가 물바다로 변 해 버렸다.

몇 채의 고층 아파트만 섬처럼 떠있는 새빨간 바다. 졸지에 가재도 구, 가게 상품, 사무실 중요 서류 등 아무 것도 건지지 못하고 목숨들 만 피했던 문산 지역주민들.

가게와 집이 다 잠겨서 경제적 손실은 물론이고 거쳐할 곳이 없어 졌으며, 집집마다 중요한 물건과 사무실의 서류들, 은행 장부 등의 소 실로 각 기관마다 업무가 마비되고 후유증이 오래갔다. 우리 아파트 에 같이 사시던 한 선생님께선 낮은 지역에 세워둔 차를 빼내려 나갔 다 갑자기 들이닥친 물에 휩쓸려 기름 물을 뒤집어쓰고 구사일생으로 구조되기도 하였다.

마침 방학이 시작이던 때라 집에 있던 남편은 재난구조 요원의 보 트를 얻어 타고 아파트를 빠져나가 높은 지역에 있던 초등학교의 재 해대책 본부로 가서 교통정리, 학교 안에 이재민 받는 일, 드나드는 사람들을 안내를 하며 재해 수습에 뛰어 들었다. 일을 하다보니 이 지역에서 한 30여 년 만에 겪는 재해라며, 일관된 체계가 안 잡혀 우 왕좌왕하고 손이 필요한 곳이 어디인지 우선 순위가 없어 사람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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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게 한다고 했다. 또한 매스컴에서는 지역주민들보다 더 떠들며 이재민의 마음을 산란하게 만들었다.

기관에서의 사고 뒤처리가 너무 미숙하여 주민들을 이중 삼중으로 괴롭혔다. 치안유지가 안되어 물 빠진 빈 가게의 값진 물건이 없어진 다든지 이재민은 정신 없이 집이나 가게의 물건을 정리하느라 바쁜데 직접피해를 입지 않은 사람들이 구호 물품은 다 타가서 일 끝내고 가 보면 필요한 물건이 하나도 없다든지 하는 일도 많았다. 수재 의연금 이 이재민에게 제때 지급이 안 되어 사람들의 인심이 흉흉해지고 자 연 재해이기보다는 모 건설회사의 댐 건설 시험용으로 만든 연천 댐 이 잘못되어 그렇다는 등 끊임없이 떠도는 각종 유언비어와 사람들 사이에 생기는 불신과 피해의식이 그중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물리적인 복구는 시간이 지나면 해결이 되고, 물이 휩쓸고 간 집들 은 쉽게 무너지고 허물어지며 다시 지을 수 있는데, 사람들 사이에 생긴 깊은 불신의 벽은 너무 단단해져서 수해의 아픔보다 더한 상처 를 주며 사람들에게 깊고 오랜 회한을 남기는 것 같았다.

그러나 또 한 편에서는 그런 아픈 상처를 치유해주고, 다시 희망을 갖고 살게 해주는 힘 역시 사람들에게서 나왔다. 그것은 전국 각지에 서 찾아와 진심으로 도와주는 낯모르는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의 정성 이었다. 그 뙤약볕아래 소방차에서 물길어다 가재도구를 씻어주고 가 는 이름 모를 여학생들, 가족단위 봉사, 종교단체의 헌신, 적십자 여 성 봉사대의 하루 수 천명씩의 식사준비 등이었다.

우리 아파트만 하여도 지하 3층의 드넓은 공간에 단 10분만에 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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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워진 물은 소방서의 대형 양수기 10여대로 밤낮을 가리고 않고 퍼 내도 줄어들 줄을 몰랐다. 아무리 퍼내도 안 되자 나중에는 수자원공 사에서 나온 사람들이 수중 보에서 쓰는 장비를 가지고 왔다. 그 장 비를 설치하려면 지하 주차장의 카 리프트에 걸려 직접 내려가야 하 는데, 가스와 벙커C유가 가득 찬 지하 작업은 목숨을 내걸고 해야 하 는 일이었다. 아파트 주민과 그 사람들이 지하로 내려가는데 캄캄하 여 아무 것도 안 보이고 지하에 전기가 흐르고있어 감전될까 두려우 며 자칫 한발만 잘못 디뎌도 그대로 사고를 당하는 어려운 일이었다.

초 긴장된 상태로 내려가 무사히 기계를 설치하고 나와 그 사람들의 기술과 장비로 이틀만에 나머지 물은 빠졌으나 드넓은 지하에 가득 차있던 끈적이는 벙커C유를 퍼내는 일은 주민들의 힘만으로는 일년 이 가도 어려울듯하였다. 남편은 매일 옷에 기름이 범벅이 되어 탈진 상태로 들어왔다. 씻을 물이나 세탁한 옷도 없고 먹을 것도 제대로 해 먹을 수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15층을 걸어서 오르내리며 온 방학 을 지하 작업 복구에 매달렸다.

지하에 전기는 끊어지지 않은데다 기름과 가스는 가득 차고 누전이 된다든지 담배 불 하나만 잘못 관리해도 폭발하여 온 아파트 주민이 목숨을 잃을 상황이었다. 주민들과 봉사자들, 많은 군인들이 수 백 개 의 마대자루에 벙커C유를 담아냈으며, 하루 이 백 여명이 넘는 그들 에게 밥 해 먹인 아주머니들의 값진 땀방울 등, 역시 사람들의 따스 한 온정이 아니었으면 정말 다시 정붙여 살기 어려울 뻔하였다.

그런데 그 수해는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다음해에는 문산을 비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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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일천에 있는 남편의 학교를 물에 잠겨버렸다. 물이 드는 순간에 그 학구에 살던 교사는 경험 있는 남편의 전화를 받고 리 사무실로 가서 대피 방송하고, 고 지대의 중학교로 가서 숙직교사를 깨워 이재민 받 을 준비시켰다. 그리고 학교물건을 건지러 들어오는데 벌써 둑이 무 너져 시내가 잠기고 강물 같은 학교 운동장을 헤엄쳐 들어와 중요한 학적서류를 건져내기도 하였다. 남편은 이번에는 학교에서 복구 작업 을 하는데. 가정집하고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일이 많았다. 그러면서 각종 기관에서 나온 사람들에게 시달리고, 이곳 저곳에서 많은 간섭 을 받으며 고생을 했다. 개학을 준비하기 위하여 밤낮이 따로 없이 온 방학을 그렇게 보냈다.

그런데 그 다음해에 문산이 또 물에 잠기게 되었다.

이번엔 남편이 문산 학교로 전근 와서 근무하고 있었기에 아파트와 학교가 다 수해를 입었다. 물이 들기 직전 학교가 걱정되어 집을 나 간 남편과는 연락이 안되고 아파트는 또 물 속에 고립되어 오갈 수 없는 이산가족이 되어버렸다.

첫해는 이틀만에 아파트 2층까지 찼던 물이 빠져 밖에 나다닐 수 는 있었는데 이번에는 물 빠지는 속도가 훨씬 느려서 바깥과의 모든 연락이 오랫동안 두절되었다. 수해방지 대책을 세운다고 물 흐르는 길을 모두 막아버려 물이 빠져나갈 곳이 없어져서 피해가 훨씬 심각 하여 인재가 더 크다며 사람들은 흥분하였다. 남편은 연수원에 교감 연수를 받던 중이었는데 연수원도 못 가고 학교에서 수해 대책에 골 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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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파트는 주상복합이라 6층까지는 상가이고 15층까지가 주거 지였다. 하루는 낮인데도 굴속 같이 캄캄한 미로 같은 상가를 지나 바깥과 연락 할 수 있는 제일 가까운 2층 베란다까지 내려가 보니 남편이 그 아래 와서 헤매고 있다가 나를 발견하고 소리를 질렀다.

아파트와 멀리 역전사이에 줄을 매어서 스티로폴 배를 타고 급한 일 이 있는 사람은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자기의 짐을 가지고 나와 달 라기에 우리도 대충 짐을 꾸려서 큰애의 집이 있는 성남으로 피난을 가기로 하였다. 나 역시 국립중앙 도서관에서 사서 연수를 받던 중 못 나가고 갇혀 있던 참이었다. 고2였던 작은아이는 언제 학교에서 등교하라고 할지 모른다고 안 나가겠다고 하여 그 아이만 남겨두고 큰애와 나는 나오게 되었다. 남편이 물이 빠지면 들어가 보겠다고 하 여 그 말만 믿고 나왔는데, 그 이틀 뒤까지 물이 안 빠져 나중에는 아파트의 거의 모든 주민이 빠져나가 그 큰 건물에 저 혼자 있음이 너무 두렵고 외로웠다고 하였다. 아파트를 탈출할 때 우리가 스티로 폴에 일명 빠떼루 자세로 엎드리면 역전에서 사람들이 줄을 잡아당겨 줘서 빠져나갔다. 나가서 잠시 피해있던 사람들도 물이 빠지면 돌아 와 복구 작업에 매달리며 다시 살 힘을 모았다.

수해지역. 그래도 고향을 지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문산은 큰 아픔을 딛고 그 터전 위에서 발전하고 있다.

우리 가족 역시 어렵게 세 번의 수해를 겪었으면서도 아직도 문산 에 살고 있다.

수해 때문에 걱정이 많았던 친척들이, 계속되는 물난리 때문에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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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어려운 곳 같으니 제발 문산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사하라고 야단 이었다. 그러나 사람은 망각할 수 있기에 다시 살 힘을 얻어 사는 것 이 아닌가 한다. 아무리 고통스러웠던 일들도 시간이 지나면 아픔은 퇴색하여 엷어지고 상처에 새살이 돋아 살아지듯이 수해의 아픔도 마 찬가지로 점차 잊혀져가고, 그래도 정든 곳이라 이사할 생각은 없어 져 버린다. 정말 물난리를 두 번 겪으며 다른 지역으로 이사 나간 사 람들이 한 두 집이 아니었다. 문산의 지방 경제력도 상당히 약화되고 사람들이 많이 각박해 졌으며 사람사이의 믿음도 많이 줄어들어 수해 보다 더 큰 상처가 여전히 남아있긴 하지만 말이다.

쉽게 돌아설 줄 모르는 성격은 모자란 대로, 불편한 대로, 자연에 순응하며, 고마워하며 살던 고향 사람들의 가르침이 몸에 배어 있어 서가 아닌가 한다 제2의 고향이 되어 버린 문산, 그러나 사람들은 올 겨울에 눈이 특히 많아서 여름에 또 물난리를 만날까 걱정이 태산이 다. 아직도 여전히 이곳저곳에서 공사하며 수해방지 대책을 세우고는 있지만 제발 올 여름 별 일없이 지나갔으면 하고 온 주민은 진심으로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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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 자 크 는 아 이 들

지친 하루, 잠깐 누워있던 저녁잠결에 전화를 받는다.

“선생님, 저 송이에요”

“아이구 송이야 어떻게 전화를 다 했니, 학교에 잘 다니지? 할머니 도 안녕하시고? ”

“네 선생님 잘 지내시죠? 선생님, 너무나 보고싶어요”

“선생님도 그렇단다. 너희들이 정말 보고 싶단다, 다른 아이들도 모두 잘 지내고 있지? 미안하다 너희들을 두고 갑자기 떠나와서. 송 이야, 공부 열심히 하고 할머니 말씀 잘 들어라, 언제나 그렇게 하고 있지? ”

“네 선생님, 잘하고 있어요. 안녕히 계셔요. 건강하셔요.”

“그래, 선생님 걱정말고, 정말 씩씩하게 잘 지내야 한다.”

전화를 끊고 나니 가슴이 아파 눈물이 핑 돈다.

다시 울리는 전화 벨소리

“내가 누군지 알아?”

“모르겠는데요”

“나 송이 할머니여, 우리 송이 지금 울고 있어, 선생님 목소리 들 으니 너무 아픈 것 같다고 보고 싶고 걱정된다고”

“세상에 아이가 제 걱정을 하다니 괜찮다고 해주세요. 새 학교라 조금 힘들어서 피곤할 뿐이라고요, 송이나 할머니가 걱정이지요”

“우리야 무슨. 한번 봐요 선생님, 정말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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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러세요, 안녕히 계셔요”

먼저 있던 학교에서 담임했던 아이와 할머니의 전화다.

엄마 없이 할머니 손에 크는 아이, 그러나 송이는 행복한 편이다.

알뜰하게 보살펴주시는 할머니라도 계시니까. 송이와 전화를 끊고 나 니 잊고 지냈던 아이들이 생각난다.

혼자 크던 그 아이들.

서른 명 정도의 아이들 중에 부모가 아주 없거나 편부나 편모 밑에 서 크는 아이들이 열 명이 넘었다. 그 아이들은 학교에 오면 나에게 서 엄마의 모습을 찾으려고 했고 한없이 말을 시켰다. 받아주지 않아 도 어리광을 부리며 조금만 서운하게 해도 토라지고 마음 상해하며 저희들에게 마음 쓸 것을 끊임없이 요구하였다.

시설수용아 두 명과 엄마 없이 아버지하고만 살고 있는 아이들과 부모의 이혼으로 낯선 할머니에게 맡겨져 살고 있는 아이, 그 아이들 은 지금 어떻게 지낼까 정말 궁금하였다.

지난 해 여름, 전화 통화도 안되며 소식도 없이 학교에 계속 나오지 않는 문수를 찾으러 나섰다. 역시 엄마 없이 아버지와 살고 있는 같 은 처지의 원지를 데리고 문수네 집을 찾아 이 골목 저 골목 어렵게 물어가며 찾아간 집은 사람이 살지 않는 듯 고요하기만 하였다.

아무도 안 계시냐고 소리쳐도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돌아서 나오려는데 희미하게 T V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원지가

선생님 맞아요, 문수네 방이어요, 누가 있는 것도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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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으로 통한 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하니 방문이 슬그머니 열리며 기운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문수가 나오고 있었다.

문수야, 집에 있었니? 그런데 왜 전화도 안 받고, 아이들이 찾아가 면 집에도 없었던 거야?

오늘은 아파서 하루종일 누워 전화도 못 받고 있었어요, 다른 날은 여기저기 돌아 다녔어요"

“왜 학교를 안 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데?”

“아이들이 놀려서요”

더 이상은 말을 시켜볼 수가 없었다.

방안을 둘러보니 어질러질 대로 어질러져 이부자리도 그냥 펴있고, 방안의 냉장고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부엌엔 물기도 없이 마른 설 거지 그릇만 수북하였다. 새벽에 일나가시는 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으니 그 살림이 오죽하랴 싶었다.

원지는 그사이에

“방이 이게 뭐냐?”

하고 혀를 끌끌 차며 문수네 방을 치워주고 있었다. 이제 초등학교 2학년이 저도 아버지와 살면서, 저한테는 언니라도 있어서 좀 처지가 났다고 생각이 들었는지 문수를 가여워하는 것 같아 기특한 생각이 들었다. 둘을 학교에 데리고 와서 먹을 것을 먹이고 학교에서 하는 무료 컴퓨터 교육을 받으러 들여보냈다. 문수에게는 결석하지 않아야 하루 한 끼라도 제대로 된 급식이라도 먹을 수 있다고 타일렀다.

그리고는 아이들의 집안 사정을 속속들이 알지 못하여 문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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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씩 방치된 상태로 그냥 두게 되는 일이 있어 스스로를 자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난해 근무하던 학교는 아주 특수한 지역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옛 날에 아주 유명한 미군부대 기지촌이 있어서 학교도 크고 지역경제도 활성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미군부대가 철수하고 내국인을 상대로 하 는 기지촌만 남자 경제는 한없이 침체되어 갔다. 불법영업으로 인하 여 한번씩 경찰이 출동하면 줄줄이 감옥으로 끌려가고, 주민들의 성 정은 거칠고 날카로웠다. 교육적 배려가 아주 열악하여 지역 환경의 영향으로 학교 어린이들의 정서도 황폐화되어 어른 못지 않게 거칠었 다. 별로 보고 배울 것이 없고 기대하는 바가 없는 어린이들의 대부 분은, 학습된 무력감으로 인하여 자기 기대감이 떨어졌다. 학습의욕은 아주 저조하며 희망이 없는 나날을 보내는 어린이들이 많았다.

거기에 평화원이라는 아동 수용시설까지 있어, 두 번의 IMF사태로 부모들한테 버림받은 아이들이 무더기로 늘어나 학교로 전학 오는 바 람에 한 반에 적게는 두 명, 많게는 서 너 명씩이나 되는 반도 있었 다. 그 어린이들은 세상과 어른, 특히 저희를 버린 부모를 원망하며, 저희끼리 패거리를 지어 싸우거나, 교사들의 지갑이 수시로 털리고 교실에서 도난 사건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곤 했다.

학교의 전통이 그러하기 때문에 아이들의 수는 점점 줄어들고, 전보 를 희망하는 교사도 적었다. 그러다 교사들이 한번 대폭으로 이동하 여 외지에서 들어온 젊은 교사들로 보강이 되고, 제도권 안의 대안교 육을 실시하는 연구학교가 되면서 학교의 분위기가 점차 달라지기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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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하였다. 우선은 교사들이 의욕을 가지고 어린이들을 사랑으로 지도 하며 학교의 시설도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영화관이나 도서실 등을 잘 꾸며주었다. 학부형들과도 유대를 강화하여 학교분위기를 바꾸어 희 망이 있는 즐거운 학교 만들기에 노력하였다.

우리 반 어린이들도 예외는 아니어 반 수 정도가 마음을 써주어야 하는 아이들이었다.

어린 시절의 아픈 상실감은 다시는 회복되기 어려워 성장하면서도 계속영향을 받을 것이었다. 그래서 때로는 친구처럼 엄마처럼 이야기 를 들어주어 어린이들의 맺힌 마음을 풀어주려고 노력하였다. 어머니 아버지의 이혼 이야기를 하며 헤어진 언니와 함께 살고 싶다고 이야 기하는 승민이와 같이 울고, 매일 학교에 와서 저희들의 이야기를 한 없이 하던, 그런 아이들을 두고 떠나와서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학교 선생님들이 노력하여 학교가 어느 정도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새로운 의욕을 불어넣어 주면서, 희망을 갖고 미래를 기대하며 자라 도록 도와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선생님들이 언제까지나 함께 하 지 못하고, 선생님들의 필요에 의해서, 또 정해진 규정대로 근무연한 이 다 되면 이동하게 된다.

결국은 그 어린 나이에 혼자 클 수밖에 없는 아이들.

새로 옮긴 학교에서 또 바쁜 일과에 시달리며 잊고 지낼 때가 많 지만, 오늘처럼 생각나게 하는 일이 있으면 늘 말시키던 문수, 원지.

승민이와 저희를 버린 부모 원망이 크던 평화원의 태욱이와 헌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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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매일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 정말 궁금하다. 다른 반으로 간 평 화원 아동 태연이와 이슬이는 매일 집에 가기 전 한번씩 와서 안아보 아야 하고, 방학에는 집에를 못 가고 울곤 했었다. 모든 어른이, 사회 가 학교가 책임져 주지 못하는 부분, 그 빈 가슴을 채워줄 사랑이 부 족함을 생각하며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지금 피곤에 겨운 이 시 간 마음마저 무거워 간절히 생각나지만 ‘혼자 크는 너희들에게 아무 힘이 되어 주지 못하여 정말 미안하다, 애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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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우리 반 준이가 나에게 성질을 많이 부렸다.

친구들을 괴롭혀서 혼을 냈더니 막 때리고 대들었다.

준이 어머니께서 준이가 아이들을 괴롭힌 이야기를 벌써 듣고 오셔 서 걱정을 태산같이 하신다. 준이가 아이들한테 따돌림받고 놀림감이 될까봐 걱정하였지, 준이가 아이들을 괴롭히는 것은 생각도 못했었다 고 하였다.

눈물이 글썽하여 돌아가는 준이와 어머니를 보면서 입학하던 날 생 각이 난다.

부모님이나 아이들 모두 너무나 설레는 마음으로 한껏 멋을 내고 입학식에 참석하고 있었다. 모두 한 줄로 서 있는 사이에 어머니와 함께 손을 잡고 서 있던 아이, 보통 일 학년 입학하면 어머니와 떨어 지지 않으려는 어린이들이 많아서 그런 줄 알고 어머니와 손을 떼어 놓았다. 그러다 놀라고 불안해하는 눈빛을 보면서 아 ! 그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서 있게 하였다.

나중에 들으니 그 때 준이가 받은 충격이 일주일은 갔다고 한다.

그 뒤로도 준이는 공부시간마다 어머니가 복도에 서 계셔야 했고 잠시만 안보이면 어머니를 찾으며 울었다.

어머니의 고통이 얼마나 심하랴 싶어, 우선 준이가 학교에서 나와 친구들과 친해지고 심리적으로 안정을 찾은 다음에 어머니와 헤어져 있는 훈련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래서 준이가 가장 관심 있어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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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을 알아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차 그림도 보여주고 그려보라 고 하면서 차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보니까 흥미 있어 했다. 준이는 의외로 차의 종류에 대하여 많이 알고 있으며 제가 잘 알고 있는 것 에 대하여 이야기를 시키자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였다. 처음엔 다른 어린이들이 하는 학습지의 그림에 색칠을 해보라고 하니까 색칠을 할 수 없으니 자기 손등을 후벼파서 피를 내고 있었다. 그래서 준이가 할 수 없는 것은 다시는 안 시키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도 차에 관 한 것은 좋아하여 빈 종이 하나 가득 여러 가지 차를 그려 놓고 나에 게 설명해주고 있었다. 물론 차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준이는 열심히 레카차도 앰뷸런스나 트럭도 나름대로의 모양을 잡아가며 그 리고 있었다.

아이의 그림을 보고 행복해하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칭찬해주니 아 주 좋아하였다. 불안해하던 태도가 줄어들며 점차 학교생활이 안정되 어, 이제는 어머니가 집에 가셔도 괜찮고 울지 않게 되었다.

간혹 운동장에 나가면 다른 어린이들이 찰흙공작을 하고 있을 때 준이랑 손잡고 서서 운동장에 보이는 여러 가지 차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아직 공사중인 학교의 여러 공사 차량, 트럭, 쓰레기 치우는 차, 운동장 바깥의 교회, 그 앞을 지나가는 차에 대하여 준이는 끊임 없이 질문하고 나는 대답해주고 하였다.

준이는 글씨를 쓰고 글을 읽고 수를 셈하는 학습은 전혀 이루어지 지 않았다. 그러나 노래도하고 발음은 어눌하지만 이야기도하며, 특히 차에 대하여 아는 것이 많은 준이가 똑똑하다고 우리 반 어린이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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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 생각해주며 인정하고 받아주었다.

그러나 서서히 교실분위기와 받아주는 친구들 선생님과 익숙해지자, 제가 할 수 있는 학습도구를 가져와도 지구력이 없는 준이는, 가만히 앉아 학습을 하지 못하고 걸상을 가지고 장난을 치거나, 이상한 소리 를 내고 계속 돌아다녔다. 그러면서 아이들 책가방을 뒤지고 물건을 빼앗고, 친구들을 마구 때리고 할퀴며 점점 무법자로 변해가고 있었 다. 간혹 엄한 표정을 지으며 나무라면 선생님 미워 ! 가 소리지르며 막무가내였다. 그럼 선생님 간다며 회의실에 올라갔더니 교실에서 선 생님이 보고 싶다고 마구 운다며 아이들이 벌떼처럼 회의실로 뛰어 올라오고 난리였다. 회의가 끝나고 교실이 엉망이겠구나 생각하며 내 려오니 의외로 평온하였다. 살펴보니 여자 어린이들이 체구가 작은 준이를 무릎에 앉히고 놀아주며 달래고 있었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우리 반 아이들 아무도 준이를 미워하거나 싫 어하지 않고 예뻐하는 것이었다. 준이가 이상한 소리를 계속 내고 돌 아다니며 교실을 어지럽히고 있으면 준이가 너무 심심한가봐, 우리들 은 이것저것 하는데 준이는 아무 것도 못하니 너무 힘들 꺼야 하면 서 이해를 하는 것이었다.

또 준이는 뭐든 조금만 먹으면 잘 토하였다. 처음 준이가 교실바닥 에 마구 토해놓았을 때 아이들은 코를 싸쥐고 더럽다며 소리를 지르 고 도망치곤 하였다. 나는 아이들을 모두 제자리에 세워놓고 준이를 닦이고 토사 물을 치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누구라도 토하고 오줌 도 싸고 할 수 있는데 그때마다 너희들이 소리지르고 도망갈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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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아이들은 잘못했다고 다시는 그렇지 않겠다고 약속하여, 일곱 해 밖에 살지 않은 어린 친구들을 어찌 믿을 수 있으랴 만은 우리 반 어린이들은 왠지 그 말도 잘 지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친구가 토했을 때, 곤란한 일을 겪고 있을 때 어떻게 할거냐고 물으 니 짝이나 가까이 있는 친구가 도와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정 말 어느 쉬는 시간, 준이가 늘 코를 흘리고 있어 수시로 닦아주는데, 나보다 먼저 일 학년밖에 안된 남자 어린이가 코를 닦아주는 것이 아 닌가, 그 뒤로도 한결같은 모습을 보면서 아이들에게 한없이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준이가 우리 교실에 있음으로 해서 물론 우리 반 어린이들이 불편 하고 어려움을 겪는 부분도 많이 있다. 그러나 그보다 소중한 사랑이 나 배려, 이해를 배우고 그 불편을 뛰어넘는 기쁨을 우리 어린이들은 맛보고 있는 것이다.

준이에게 무엇을 시켜서 잘하면 저희들이 잘해서 칭찬들은 것보다 더 기뻐서 야단이다. 짝하고 게임을 할 때 내가 준이하고 짝이 되어 해주면 너무나 준이를 부러워한다. 그 어렵고 모든 것이 힘든 준이가 뭐든 조금이라도 잘하는 모습을 보면 아이들이 그렇게 행복해 하는 것을, 준이의 천진한 웃음을 보면 모두 그렇게 좋아한다는 것을 준이 는, 준이 어머니는 알까?

우리 어린이들은 준이에게 무한한 배려와 사랑을 주고 대신 참으로 소중한 인내하는 법을 배운다. 어느 땐 눈물겹도록 우리 어린이들이 기특하다. 준이가 와서 마구 심술 부려도 같이 때리고 싸우지 않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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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는 모습을 보고, 전혀 남을 배려 할 줄 모르고 나만 최고로 여기며 극도로 이기적인 세대인 우리 어린이들이 보여 주는 인내심에 너무나 큰 고마움을 느낀다.

또한 교실에 오시는 어머니들은 어떠한가. 처음엔 내 아이에게만 관 심과 칭찬을, 배려와 최고임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점점 시간이 흐르 며 내 아이가 평범하고, 집중력이 없음에, 사회성도 부족하고, 발표력 이 저조함에,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싸우는데 실망하는 모습 을 보이곤 하였다. 그러나 준이와 준이 어머니를 보면서 다른 어머니 들의 표정도 점점 밝아지고 내 아이에게만, 하던 욕심이 많이 사라지 고 청소 등의 학급 일에 서로 돕고 협동하였다. 그 모습을 보면서 빛 과 그늘이 함께 존재하며 서로의 존재를 빛나게 해주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준이 어머니는 처음 눈 쌓이고 춥기만 하며 아는 사람도 하나 없는 낯선 이 고장으로 이사를 오면서, 후회도 많이 하고 우울증에 걸려 고생이 많았다고 하였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기 전에는 밤잠을 못 자 고 고민하셨으나 막상 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반 아이들의 배려와 학부모들의 이해심에 너무나 다행으로 고맙게 생각하며 걱정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고 하였다.

가끔씩 오늘처럼 준이가 무언가 마땅치 않아 성질을 부리고 우리 를 힘겹게 할 때가 있지만, 그래도 준이와 아이들이 함께 행복할 수 있고, 함께 성장해 가며, 늘 그렇게 한결 같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 까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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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 픈 인 연

온갖 초록의 싱그러움이 가득한 대학 교정을 아주 느릿느릿 걸었다.

한 여름, 그리고 방학, 옆에는 큰절이 있는 시골의 산 속에 위치한 대학. 혼자 잠자고 혼자 식당에 가서 밥 먹으며, 말을 잃고 사는, 절 에서 시간마다 울리는 종소리만이 유일한 가슴에 와 닿는 소리인, 아 주 특별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한가로워 보이는 몸짓 안의 마음은 들끓고 있다. 지금 이 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래도 괜찮은 건가? 나뿐만 이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모인 저 많은 사람들 모두가 말이다. 하는 생각이 가 득하여 아주 혼란하였다.

여름, 겨울 방학 두 번에 걸쳐서 거의 삼 백 시간 가까이 대학의 기 숙사에 들어와 초 중등 교사들이 연수를 받았다. 중등 선생님들은 자 신들의 전공교과가 언제 폐강될 지 몰라 부전공 자격증을 따려는 것 이고, 초등교사들은 자격연수 성적이 교감 승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 을 하여 연수 성적을 올리려는 목적을 갖고 연수를 받고 있었다.

연수 프로그램을 개설한 대학 당국의 지도교수님도 교사들의 그러 한 현실적인 욕구를 알고 있으며, 그럼에도 상담 연수를 받다 보면 교사들의 폐쇄적인 마음의 문이 열리고 자신도 모르게 상담과정에 몰 입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기를 희망한다고 하셨다.

그러나 전국 각지에서 백 명이 넘게 응시한 시험에 통과한 삼 십 명이, 모두 이 연수 점수만이 승진의 모든 것이라 생각하고 거의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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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걸다시피 공부하는데 마음의 문이 쉽게 열릴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사람 하나 하나가 모두 경쟁자인 살벌한 전쟁터와 같음 에 모두 스스로 기가 질려 하였다.

경기도 포천에 위치한 대학이면서 경기도 사람은 불과 몇 명, 이대 학원의 상담심리 대학원 재학중인 교사가 시험에 떨어졌으니, 연수 과정에 들어오는 것 자체가 힘든 관문이었다. 제주도만 빼고 각지에 서 모인 사람들, 삼십명중 여교사는 네 명, 나이 적지 않은 내가 경력 으로 끝에서 네 번 째, 그리고 나보다 십 년쯤 경력이 많은 분들부터 차례로 있었기에 여러 가지가 퍽 어렵고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늘 조용히 하루 하루를 보냈다. 그래도 뭐라는 사람이 없어 너무 좋았다. 그 동안 우리 직업이 말을 많이 하며 사는 교사 아닌가.

그런데 꼭 필요한 말 이외에는 별말 없이도 몇 날 며칠이고 살수 있 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몇 명의 성격 활발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와 같이 그렇게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나 겉보 기의 평화와 달리 모두 마음속은 지옥이란 것을 또 다 알고 있었다 모두 같은 목적으로 온 사람들이어서 서로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며, 모두 힘겨움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여 서로 모르는 체 하며 지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학교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었기에 자부심이 강하여 더 서로의 마음을 열지 못하고 힘겨운 시간만 보내 다 여름방학의 연수가 지나갔다. 리포트 제출과 발표, 시험 등의 연수 성적에 자신 있는 사람이 없어 모두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마음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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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모두 다시 볼 수 있을까 의문을 갖고 겨울에 다시 보자고 서 로 격려하며 헤어졌다.

2학기의 힘겨운 시간을 각자의 학교에서 보낸 후 겨울방학이 되어 가보니 삼십 명 전원이 모두 출석하였다. 그리곤 성적을 올리기 위하 여 집 가까운 단 네 명을 빼고는 여름방학보다 훨씬 많은 숫자가 기 숙사에 들었다.

2학기를 학교에서 보내며 이제 겨울에 가면 마음의 문을 좀 더 열 고 사람들과도 즐겁게 지내다 오리라 결심하고 갔다. 모두 반가워하 고 훨씬 친숙해 지긴 하였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엔 혹시 낮았을 여름 방학 연수의 성적을 겨울에 보충하리라 결심해서 인지 더욱 치열한 감이 들었다.

올 겨울은 40년 50년만이라는 기록 갱신을 하면서 폭설이 많이 내 렸다. 부산에서 온 사람, 광주, 목포에서 온 사람 등, 겨울이 되어도 눈 한 번 제대로 못 본 남 쪽 지방 선생님들은 처음엔 경기도 포천 산골의 겨울 정취에 취하며 흥겨워하였다. 그러나 한 주씩 시간이 더 해가고 계속 집에도 못 가며, 나이 드신 분들이 시험공부에만 시달리 자 점점 숨이 막히는 것 같다며 눈도 지겹다고들 하셨다.

연수가 중반기 이후로 접어들며 사람들이 지쳐가기 시작하였고, 지 도 교수님은 혹시 병이라도 나는 분이 계실까 마음쓰셨다. 그러면서 집단 상담을 강의하시며 여러 가지 마음의 문을 열고 서로 친숙해지 며 나 자신을 드러내는 프로그램을 많이 진행하셨다.

자신의 마음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시간에 거의 모든 사람이 형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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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나 어서 빨리 이 곳을 벗어나고 싶어하는 마음들이 절실하였고 그 마음에 모두 공감하였다. 집단 상담의 각기 다른 주제 선정에서 세대간의 갈등, 자아실현을 위하여 등 다양한 가운데 한 조에서 50대 의 정체성에 대하여 발표를 하였다. 몇 명을 제외한 그곳에 모인 사 람들 대부분이 50대였으며, 학교에서 중추적이고 가정에서 자녀들을 대학에 보내고 아니면 출가시킬 시기이고 사회적으로 중심적 역할을 해야하는 시기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모두 승진이 안된, 직전 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곳에서의 연수 성적 이 승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모두가 똑같은 사정이라 상대적으 로 평가하기 때문에 서로가 경쟁자인 슬픈 인연의 만남 들이었다.

경제적으로는 지금이 가정에서 돈이 가장 많이 필요하고, 승진을 해 야 남들에게 특히 가족에게 떳떳하며 그래야 사회에서 대접받는, 이 미 시기를 놓쳐버린 50대 후반 선생님들의 여러 가지 경험담은 슬픈 현실을 많이 깨닫게 해 주었다. 일단 이야기가 시작되자 모두 같은 처지이기 때문에 이심전심으로 마음이 통하여 그 동안 말못하고 쌓였 던 이야기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누 구보다 서운한 것은 제 때 승진하지 못한 아버지를 자식들이 부끄럽 게 생각하고 아내가 무능한 남편으로 생각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 러면서 이렇게 노력하고 애를 써도 결국 승진이 안 된다면? 하는 생 각이 들면 너무 불안하여 잠도 안 오고 삶의 의욕도 없어지며, 부부 생활에서도 남자로서의 자신감을 잃어간다는 아픈 이야기들을, 또 가 까운 사람들한테 할 수 없었던 말못하던 고민들을 모두 같은 입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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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서로에게 부담 없이 털어놓으며 한을 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 또한 사실 식구들을 희생시키며 와 있었고, 연수 성적에 많은 영 향을 받기 때문에 엄청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나보다 열살 가까이 연장이신 그 분들의 고통을 듣고 보면서 나는 아직 괜찮구나, 참 다행인 편이구나 스스로 생각하며 마음을 다스리고 위안하였다.

여러 선생님들의 사연 중엔 다 된 듯 하다가도 갑자기 바뀐 제도 때문에 희생당하고, 관리자의 판단 잘못으로 밀리고, 후배들한테 밀려 나기도 했다며, 꼭 사람의 의지대로만 안 되는 사연이 거기에 많이 있었다. 나중에는 서로의 아픔을 나누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마음 터 놓고 지내게 되었다. 시험 후에는 술도 마시고, 끝없이 사설이 이어지 는 진도 아리랑을 수시로 부르며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진한 유대감을 함께 나누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헤어질 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그리고 한번 헤어지면 평생 다시 만나기 어려운 인연으로 여러 지역 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서로를 안타깝게 하였다. 여름 겨울 일년을 같은 고통 속에서 함께 보냈으나 연수가 끝나고 아무런 기약도 없이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노래를 부르며 아쉬움 속에 헤어 졌다. 모두 힘든 짐을 진 사람이 나 하나는 아니라는 사실에 위안을 삼으며, 그저 서로가 좋은 결과를 맺어 뜻하는 바를 이루기를 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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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시 그 섬 에

여름 방학이 끝나기 며칠 전 갑자기 서해의 백령도 부근의 대청도 라는 섬에 가자는 제안을 받았다. 그 때까지 비행기를 타고 갔던 제 주도를 빼놓고 한 번도 배타고 멀리 떠나는 섬에를 가 본적이 없어 마음이 설레었다.

남편이 잘 아는 교감 선생님께서 그 섬에 근무하고 계신데 나오기 전에 한번 가보자는 이야기였다. 모두 처음 어울리는 네 가족이 함께 가며 우리 집과 민수네 집은 아이들도 함께였고 두 가족은 아이들이 커서 부부만 가는 모임이 되었다.

모두 학교 일로 바쁘고 방학이 없는 교육청 장학사로 계시고 하여 3박 4일의 빠듯한 날짜를 잡아 떠나는 여행이었다. 나흘동안 먹을 것 은 각자 준비하고 잠자리만 학교 숙직실과 사택을 이용해야 하기 때 문에 준비는 많았지만 마음은 너무 즐거웠다.

드디어 처음으로 인천의 연안부두에 가서 페리호를 타고 4시간을 망망 대해로 나가는 데 보통 때는 겁이 없는 편이었는데도 걱정이 앞 섰다. 이렇게 날렵한 배를 타고 가다 풍랑이라도 만난다면 배는 힘없 이 뒤집힐 테고 물에 겁 많은 남편은 의지할 사람이 못되고 이제 초 등학생 밖에 안된 우리 둘째 정은이는 어쩌나 하여, 내 눈은 구명조 끼와 정은이에게 내내 못 박혀 있었다.

육지와 너무 멀리 떨어진 섬이었으나 무사히 도착하여 학교에 여장 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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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되자 동네 사람들이 섬사람들과 유대관계가 좋으셨던 교감 선생님과 그 친구들을 대접한다고 학교로 올라왔다. 한가로운 섬의 저녁 어스름에 동네 사람들과 족구, 배구를 하고 학 꽁치라는 것을 구워 먹으며 새로운 만남을 만들어 갔다.

동네의 꼬마들도 섬에 새로운 사람들이 나타나자 모두 학교로 모여 들었다. 그리고는 중학생과 초등학생이던 우리 집 여자아이 둘과 민 수네 남자아이 둘과 함께 어울려 놀기 시작하였다. 처음엔 둘 다 중2 학년 사춘기인 우리 첫째 예은이와 민수가 내외를 하여 서먹하더니 시간이 지나며 터놓고 어울려, 동네 아이들과 함께 무엇이 그리 재미 있는지 밤새 시끄럽게 놀고 있었다.

이튿날부터 우리는 섬을 한군데씩 돌아보기 시작하였다. 섬의 지도 가 바뀔 정도로 중국에서 날아오는 황사가 많이 쌓여 있고, 섬의 곳 곳이 지뢰밭이라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으며, 백령도와 심청이 빠졌 다는 인당수나 민요에 나오는 장산 곳 마루가 멀지 않다는 소리도 들 었다. 깨끗한 바다와 함께 어루러 지는 섬의 아름다운 곳곳의 경치는 점점 사람들이 많이 찾는 섬으로 만들고 있다고 하였다.

다시 저녁이 되면 바다로 생업에 나갔던 동네 사람들도 돌아와 우 리 가족들과 어울려 학교에서 놀던지 밤 바닷가로 나가고, 이제는 부 인들까지 합세하여 닭죽이나 소라도 한 솥씩 삶아오며 함께 먹고 어 울렸다.

그런 중에 날이 가고 내일쯤 우리가 간다는 날이 되자 동네사람들 이 그 아쉬움에 불법행위를 하였다. 동네에서 한참을 떨어진 바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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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들을 데리고 갔는데 그곳은 전복 양식어장이었다. 그 전복 은 동네 공동 양식어장으로 개인적으로 전복을 채취하면 안 되는 것 이었다. 그 섬의 유지들이 대부분 이었지만 다른 어민들이 알면 안 되는 일 인데 동네에 들어가면 모두 함구하기로 하고 전복을 따주는 것이었다. 비싼 전복을 평소에도 별로 먹어 본적이 없었는데, 그 날은 바다 속에서 직접 따오는 전복을 원 없이 먹어보고 또 그렇게 맛있다 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귀한 전복을 아낌없이 주는 것을 보고 또 바닷 물에 들어가 모처럼 아이들처럼 놀며, 주어진 지금 이 시간이 너무 값진 것 같아서 그 섬사람들에 대한 한없이 고마운 마음을 표현할 길 이 없었다. 아이들은 또 어떤가 동네 아이들은 언제나 그 애가 그 애 였는데 뭍에서 온 새로운 누나 형들을 하루종일 쫓아다니며 함께 놀 며 따랐다. 나중에 우리 아이들이 가면 어쩔까 걱정될 정도로 좋아하 고 따르며 눈만 뜨면 학교로 올라와 어울려 노는 것이었다.

우리가 출발하기로 한 날, 그러나 우리는 섬에 갇혀버렸다. 폭풍 주 의보가 발령되어 배가 떠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동네 사람들도 모두 생업을 포기하고 잘됐다며 학교에 올라와 족구나 배구를 하고 놀며 체력을 길렀다. 그러나 섬에 갇힌 우리 일행은 초조하기 이를 데 없 었다. 준비해온 먹거리도 다 떨어졌고, 교육청에서 주관하는 교사 연 수의 책임 장학사와 인솔 교사가 모두 이곳에 있으니 교육청 일정에 차질이 생길 판이었다 만약에 며칠 더 발이 묶인다면 어찌될까 하는 생각, 혹시 무리해서 나가다 잘못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 뭍에 살 때 몰랐던 문제들이 많은 섬 생활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섬 주민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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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 것이랑 다 대줄 테니까 며칠이고 폭풍 해제 될 때까지 있으라고 위로해주었다.

그런데 폭풍주의보를 만나 겁이 나면서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사나 가만히 섬 주민들의 사는 모습을 보니 아주 현실적인 것 같았다. 언 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바다를 생업으로 하여 살다보니 그 주어진 시 간을 철저히 즐기며 원 없이 살고자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돈도 잘 쓰고 놀 때도 확실하며 모든 일에 주저하거나 내일을 기약하고 사는 것 같지 않았다. 우리 일행의 초대로 부부 동반하여 저녁 먹고 노래 방에서 노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그리곤 우리같이 다시 오기 어려 운 사람들과도 격의 없이 어울리며 정을 주고 있었다.

다행이 바다의 풍랑이 바로 가라앉아 이튿날은 배가 떠날 수 있었 다. 닷새동안 함께 한 정으로 같이 어울렸던 주민들이 부둣가로 나와 배웅하며 쉽게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아쉬워하였다. 우리를 초대하신 교감 선생님은 학교 지킬 교사가 바다 사정으로 들어오지 못하자 같 이 나올 수가 없었다. 서운해하는 사람들과 교감 선생님을 외롭게 혼 자 두고 나오는 우리 마음도 편치는 않았다. 우리 아이들을 내내 따 라 다니며 놀던 우체국 차석 집 아이가 돌아설 줄을 모르고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결국은 울먹였다.

주민들은 우리에게 대청도의 특산물이라며 그때 처음 보았던 까나 리 액젓을 한 통씩 선물로 주었다. 김치를 담가도 국 끓이며 간을 하 여도 아주 맛이 있었다. 그 독특한 맛과 사람들의 인정을 못 잊어 그 후로 젓국은 언제나 까나리 액젓만을 쓰게되어 그 섬의 추억은 입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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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생활의 한 곁에 오래 남았다.

이제 우리가 다시 모여서 그 섬에 가기는 어려울 테고, 그들도 그 인심 그대로 남아있지는 않겠지만, 그 때 보여준 인정과 갖가지 새로 웠던 맛, 곳곳의 아름다운 경치와 청정한 바다의 풍경은 오래 남아 결코 잊지 못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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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로 운 만 남

새내기 교사로 부임하신 1학년 4반 선생님 취임식을 끝내고 교실로 들어오니 아이들이 자리가 없어 여기저기 모여있었다.

“선생님, 우리 자리가 없어요”

“그래, 너희들 책상을 빼내서 그렇단다, 오늘 새 선생님이 오셨기 때문에 지금부터 새 반으로 나눌 테니까, 모두 이쪽으로 나와 앉아서 이름 부르는 대로 서 있어요”

45명의 어린이 중 13명만 남고 아이들이 모두 새로운 반으로 뿔뿔 이 흩어져 갔다.

진작부터 분반되리라 예고하고 충분히 설명했기 때문에 처음엔 담 담하게 헤어졌다.

새로 우리 반이 된 어린이들을 확인하고 출석을 부르고 자리를 새 로 정해주었다.

입학한지 이제 두 달이 채 안된 1학년. 다른 반으로 간 어린이들이 나 새로 우리 반으로 온 어린이들이나 처음 입학하던 때처럼 긴장되 고 불안한 얼굴이다. 그런 어린이들을 데리고 하필 그날 급식이 처음 시작되는 날이라 급식 실에 자리 알아보고 어떻게 배식을 받는 지 연 습하러 갔다.

연습을 끝내고 교실로 들어오려는데 우리 반의 준이가 막무가내로 밥을 내놓으라고 운다.

“준아, 아직 밥이 안됐으니까 이따가 밥 다 되면 와서 먹자, 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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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서 공부하다 오자, 응 저기 봐 지금 준비하고 있잖아?”

“싫어, 나 밥 먹을 꺼야, 지금 줘, 나 배고파”

“준이야, 교실 갔다 오자, 선생님 말씀 들어”

준이를 잘 보살펴주는 윤지가 와서 같이 달래도 소용없이 마구 운 다.

하는 수 없이 울고 있는 준이를 안고 교실로 들어온다.

교실에 와서도 계속 소리지르며 밥 달라고 울고 있는 준이를 달래 며 아이들을 돌아보니 아이들 얼굴이 말이 아니다. 새로 우리 반이 된 어린이들은 처음 보는 준이의 행동 때문에도 더욱 불안한 얼굴이 다.

거기에 더하여 새로 짝을 정해주고 자리에 아이들을 앉혔더니, 준이 가 울면서 돌아다니다 아이들을 마구 때리고 잡아당기고 있었다.

깜짝 놀라 쫓아가 보니 새로 우리 반이 되어 앉아 있는 어린이들한 테 가라며 심술을 부리고 있었다.

‘아, 준이는 이해가 안 되는구나, 저한테 잘해주던 우리 반 어린이 들이 없어지고 새로 낯선 아이들이 앉아 있으니 저렇구나’

아이들한테 준이는 너희들과 같지 않은 아이들이라고 이야기를 해 주며 오늘 너희들이 낯설어서 그러니 준이를 참아주어야 하겠다고 이 해를 시켰다.

준이는 한참을 교실을 휘 졌고 다니고 우리 반이었던 어린이들은 말리고 하는 중에 잠시 울음을 그치더니

“선생님 애들 어디 갔어요? 애들 왜 안 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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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데 처음엔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들었다.

“선생님 애들 왜 안 와요?”

‘아, 준이가 우리 반 아이들을 찾는구나, 그래 네가 오늘 얼마나 힘든지 알겠구나, 보통 아이들도 처음 학교 생활의 적응이 힘들어하 여, 이제 조금 적응되어 가는데 분반한다고 어머니들이 잠을 못 자고 걱정했다는데 네가 오죽하겠니.’

갑자기 준이가 너무 가여워졌다. 그런데 준이가 이제는 나한테까지 달라 들어 때리고 할퀴고 발로 차며 울고 책상 위에 있던 물건도 모 두 집어던지며 왜 그렇게 내 말을 안 들어, 왜 나한테 바보라고 하는 거야 하면서 멀쩡한 소리를 하였다. 가만히 아이의 모습을 보니 어디 서 제가 그 동안 당했던 서러움을 그대로 풀어내는 것 같았다. 한동 안 갖은 행패를 다 부리던 준이는 이제 머리가 아파요 하면서 땀을 뻘뻘 흘리며 울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힘든 과정을 그렇게 네가 표현하는구나 하면서 한편으로 다른 아이들이 너무 걱정스러웠다.

머리가 아픈 것은 준이 뿐만 아니라 나도 어지럽기까지 하였고 아 이들을 보니 아이들도 모두 마찬가지 인 것 같았다.

오늘은 수업 시간 오전 하루가 너무 벅차고 길었다.

공부가 끝날 즈음 아이들이 이 반 저 반을 돌아다닌다. 제가 있던 반이 궁금하여 그러는 것 같았다. 새 반으로 가고 싶다던 정훈이가 와서 준이의 손을 잡고 ‘준이는 좋겠다’하고는 가버린다. 청소하던 어머니들이랑 모두 웃었다.‘그래 준이는 좋겠다. 반이 바뀌지 않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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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준이가 오늘 하루 얼마나 힘들었는지 어떻게 알겠니.’

우리 반의 무법자이며 왕초인 준이가 한번 발작을 시작하여 아이 들을 때리고 할퀴면 당하는 어린이들은 우선 준이를 꼼짝 못하게 잡 거나 피하거나 하는 행동요령을 지도하여 알고 있다. 힘이 약한 여자 어린이들이 준이에게 잡히거나 눌리면, 나를 부르거나 내가 없을 때 는 윤지를 부른다. 준이가 유일하게 말듣는 어린이는 윤지라는 여자 어린이이다. 집에서도 함께 왕래하며 놀아주는 윤지가 가서 준이야 그러지 말고 놔줘 하면서 살살 달래면 풀어주기도 한다. 어느 때는 준이가 윤지에게도 심술을 부려 물건을 빼앗거나 괴롭힌다. 윤지는 얼굴이 빨개지도록 힘들어도 참는다. 내가 가서 간신히 말려야만 놓 아준다. 집에서 무남 독녀 외동딸로 곱게 자라는 아이가 저럴 수 있 나 싶어 너무 고맙다.

그러한 준이에게 적응되기까지 우리 어린이들은 처음에 많이 겁먹 고 힘이 들어 하였다. 입학하여 처음에 한 반이었던 어린이들이 같은 과정을 거치며 간신히 적응하여 준이를 이해하며, 준이도 학교 입학 의 어려운 관문을 통과하여 안정이 되어 잘 지내는 가 하였다. 그 정 을 잊지 못하고 준이가 아이들을 찾았나 싶어 힘들게 했어도 기특하 기만 하다.

그러나 그날 하루 처음 우리 반으로 온 어린이들이 얼마나 놀라고, 분반의 과정을 이해 못하는 준이는 얼마나 충격이 컸으며, 나는 또 반 아이들과 준이를 함께 달래느라 얼마나 진땀을 흘렸는지 모른다.

특수 학급이 있어 통합교육이 이루어지면 학습은 준이의 수준에 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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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특수 학급에서 맡고 생활은 일반 학급에서 적응하여 어려움이 덜 할텐데 특수학급이 없는 우리 학교에선 하루종일 교사와 아이들이 수 업에 방해를 받고 고생하게 된다. 지금은 어떻게든 준이가 어리니까 아이들과 교사의 보살핌 안에 지내지만 이 아이가 커가면서 어떻게 변할지는 나도 모르겠고 사실 걱정이 된다. 그러나 그 아이와 함께 살면서 늘 지켜보는 가족의 고통은 어떠할까, 선진국에서처럼 장애아 를 잘 돌보고 수용하며 충분히 교육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현실에서, 또 교육시키자면 경제적으로 상당한 부담을 해야 하 기 때문에 여건이 마련되지 않은 사람들은 그것도 어렵고 결국 사람 들의 외면과 따가운 시선에 절망하다 극단적인 방법까지 생각하는 부 모들을 간혹 뉴스나 신문에서도 보게되는 것이다.

오늘 준이가 우리 반이 된 예진이 옆에 가서 앉으며 붙잡자 새로 전학 와서 준이에게 그렇게 당했던 옆에 있던 상아가 괜찮아 그건 준이가 너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야, 나도 처음에는 놀랐는데 걱정하 지 않아도 돼 너도 놀랐지? 하면서 달래고 있었다. 또 준이가 교실을 돌아다니다 얌전하여 생전 말이 없는 유진이에게 다가가는 것을 보고 가만히 지켜보았다. 준이가 옆으로 다가가니 처음엔 걱정스런 얼굴을 하다가 먼저 손을 내밀어 준이의 손을 잡았다. 준이가 마주 손을 잡 으니까‘우리 뻔데기 하자’하며 뻔데기, 뻔데기, 뻔, 뻔, 데기, 데기 하면서 게임을 시작하자 아이들이 모두 재미있어하며 웃고, 얌전한 유진이가 준이에게 대처하는 방법을 보면서 나도 감탄하였다.

아이들은 교사가 조금만 이끌어 주면 훨씬 더 융통성 있게 창의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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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방법으로 나름대로 대처하는 것을 보면서 어른들이 먼저 아이들에 게 다가가는 방법만 보여주면 어렵지 않게 일반인과 장애아가 어울려 살수 있을 텐데 생각해 보게 되었다.

어린이들에게 새로운 만남이란 이렇게 어려운 것이겠지만, 우리 반 의 어린이들이 준이에게 적응하고 이해하며, 나아가 함께 돌보고 데 리고 놀아주는 것을 보며 한없이 고맙고 흐뭇한 한 마음이 들었다.

늘 그렇게 소중한 삶을 함께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 우리였으면 또 사 회의 시각도 그리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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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지 를 꿈 꾸 며

나를 제외한 우리식구는 자주 무모한 꿈을 꾼다.

올 방학에는 온 식구가 해외로 배낭 여행을 다녀오겠다. 시험이 끝 났으니까 가자. 이번 방학은 바빴으니, 다음 방학에는 꼭 가자. 그리 곤 언제나 꿈으로 끝나 버리곤 했다. 난 크게 마음에 없었기 때문에 기대할 것도 실망 할 것도 없이 식구들이 마음먹고 다음으로 미루고 다시 다짐하고 하는 것을 그냥 구경만 하였다.

그런데 얼마 전 대학 휴학중인 딸이 졸업학년 선배들을 따라 태평 양의 섬 괌으로 해외 졸업여행을 다녀왔다. 재학생들과 학술 답사 여 행을 준비하더니, 어는 날 갑자기 한자리 비어버린 졸업생의 자리가 있으니 같이 가자고 선배가 부른다며 졸업여행을 다녀오겠단다. 기회 만 있으면 어디든 보내고 싶어 적극적으로 찬성하여 보내주었다.

1학년 여름방학엔 일본으로 보름간 떠나는 배낭 여행을 보내주었는 데 알고 보니 남자 선배 두 명과 우리 아이만 떠난, 그것도 고물 티 코를 직접 일본까지 몰고 가서 차안이나 텐트에서 자는 아주 척박한 여행이었다. 나중에 알게된 남편에게 엄청 혼났지만 나는 그렇게 떠 날 수 있고 잘 견디고 온 딸이 무척 대견하기만 했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큰 걱정 없이 보냈고 그 4박5일 동안 새로운 풍물 에 접하며 너무나 한가로운 아주 평화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왔다고 자랑이 대단하였다. 문명하고는 거리가 멀고, 돈 있어 간 학생들이 아 니기 때문에 심심한 시간을 어떻게 보내나 걱정했는데 막상 그 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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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움이 하나도 심심하지 않고 좋았다는 이야기가 꿈결같이 들렸다.

같이 간 선배들이 한결같이 더 머무르고 싶어했다며, 아이는 가끔 가 슴이 아파하곤 했는데 그곳에서는 한번도 통증을 못 느꼈다고 했다.

원주민 청년들과 비치볼 게임, 해먹을 타고 낮잠 자느라 해가 비켜 가는 줄 몰라 새카맣게 얼굴 태운 선배이야기, 차를 빌려 타고 서쪽 으로 가 바다에 지는 석양을 보느라 하염없이 넋을 잃고 있었다는 풍 경이 내 눈에도 보이는 듯 하였다. 해가 지면 부랴부랴 리조트로 돌 아와, 더워서 들어가지 못하는 방갈로를 바닷바람의 방패삼아 앉아, 밤새워 이야기를 하다 새벽이 되면 바닷가로 뛰쳐나가 바다에서 떠오 르는 태양을 보면서, 사진에서만 보던 그런 풍경 속에서 고스란히 그 림처럼 지내다 왔다고 하며, 속세를 떠난 무아의 경지를 아이들이 터 득하고 온 듯한 이야기를 끝없이 하였다.

오 년 전 해외 연수로 영국과 프랑스를 다녀온 적이 있었지만 이상 하게 별로 흥미롭지 못하여, 이 한번으로 끝나도 크게 서운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 후로는 해외여행에 대한 관심이 없어서, 식구들 이나 친척들, 각종모임에서 가자고 하여도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었 다.

그런데 그후 오랫동안 너무 숨가쁘게 자신을 몰아치며 여유 없이 살다보니 휴식의 시간, 모든 것을 잊고 지낼 수 있는 잠시의 시간이 라도 있었으면 하고 절실하게 바라게 되어 왠지 아이의 이야기가 너 무 솔깃하게 유혹적이었다.

그 후 딸이 바람을 넣어 우리 식구는 다시 결심하고 있었다. 한 오 년 동안 방학 한번도 없던 엄마가 이번에도 역시 그럴 것 같으니,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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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시간적 여유가 모처럼 있는 이 때, 엄마 빼놓고라도 가자고 공모 를 하며 장소를 물색하더니 괌보다는 좀 덜 문명적이고 상업적인 피 지가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피지라니, 그곳은 선교사로 가 있는 내 후배가 있는 곳 아닌가, 하 긴 우리 후배는 자기들이 있을 때 숙식 제공할 테니 식구가 함께 다 녀가라는 연락을 몇 번이나 했었다.

얼마전의 선교 통신에서도 둘째까지 대학 보냈으니 꼭 오라는 말과 함께, 피지의 내전이며, 경제적, 사회적인 어려움, 정치적 혼란에 대하 여도 자세히 전해주었다. 그렇게 상황이 어려운 나라에 가겠다고? 역 시 꿈들 꾸고 있구나 생각하였다.

대학교 때 문학 동아리 활동을 같이 하다 졸업으로 헤어진 후, 후배 를 다시 만난 것은 팔 구 년 전쯤이었다. 모태 신앙을 갖고 있던 후 배는 미팅에서 만난 사범대생 남편을 신앙으로 이끌어, 신학대학을 다시 나오게 하고 교회를 개척하며, 후배는 학교도 휴직하였고, 남편 마저 사표 내어, 경제적 형편 때문에 막 복직한 상태에서 만나게 되 었다.

한 일년정도 지나며 간신히 빚내어 집도 사고 아이들 교육도 시키 는가 하더니, 어느 날 어렵게 마련한 집이며 모든 것을 공중 분해 시 키고 맨몸으로 아이들까지 데리고 피지라는 섬으로 선교활동을 하러 떠난 다는 것이었다.

내 생활하고 너무 동떨어진 이야기라 뭐라 할 말은 없었지만 그이 들이 보통사람으로써는 어려운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는 있었 다. 조촐하게 송별회를 하고 삼 년 기한으로 떠났다. 그이들의 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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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비용은 고정된 월급이나 수입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후원금 만으로 유지되는 것으로 정말 그들은 어려운 생활을 각오하고 가는 길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가끔씩 후원금을 보내는 너무나 작 은 일 한가지였고 처음엔 고국의 소식도 자주 보내주다가 여러 가지 로 생활이 바빠지면서부터는 그도 잘 못하고 있었다. 그이들은 꾸준 히 선교 통신을 보내왔다. 선교활동의 성과뿐만 아니라 피지의 여러 가지 자연 환경이나 문화, 정치상황 등을 알려왔고 또 수없이 닥쳐오 는 어려움을 오로지 기도의 힘과 성실하고 일관된 선교활동으로 극복 한 이야기 등. 그래서 한번도 가보지 않은 나라가 그이들 덕분에 우 리식구에게는 친숙한 곳이 되어 언젠가 가 볼 수 있는 곳으로 생각할 정도였다.

그이들은 피지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선교 봉사를 더 공고히 하기 위한 교육을 더 받기 위하여 영국으로 연수받으러 갔던 이야기도 전 해주었다. 각 나라에서 온 여러 사람들이 함께 참여하는 그곳 생활 또한 아주 빈한한 상태로 유지되었다. 연수 비용은 오로지 봉사활동 으로 만 보상할 수 있어 어느 날은 하루 종일 감자껍질만 벗겼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자신들의 것은 다 버리고 남을 위해, 하느님의 소명 에 순종하며 사는 그들의 삶은 참으로 아름답게 보였다. 어느 땐 육 체적인 피로가 너무 심하여 병을 얻어 한국으로 수술을 받으러 나와 서 절망적인 순간을 맞기도 하였으나, 기적처럼 소생하여 다시 피지 로 떠나 맡은 임무에 충실한 그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는 그곳에 머무는 기간을 어려운 심사 과정을 거쳐 연장하여, 지금 8년째 머무 르고 있으며 여러 벌여놓은 일들을 무사히 마무리짓고 있는 듯 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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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우리 나라가 IMF를 겪게되자 후원금만으로 생활하던 그이들 생활 이 더욱 어려움을 겪었으며 더구나 초등학교 때 데려간 아이들이 커 서 대학을 들어가게 되고 그 등록금마련도 어려웠다고 했다. 큰애는 다행히 신학대학에 장학금을 받으며 다니고 지금은 둘째의 대학경비 문제로 기도를 부탁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 어려움 중에 그 동안 아 이들이 적응하지 못하여 겪었던 마음고생이 가장 큰 고통인 듯 하였 다.

너무 현실적으로 살고 있는 우리에게, 피지에서 날아오는 소식은 욕 심의 때를 벗겨 내주는 역할을 해주고, 또한 자신을 돌아보며 부끄러 움도 느끼게 한다. 그 반성의 시간을 위하여 우리 식구는 꼼꼼히 그 소식들을 읽고 잠시라도 정갈한 마음가짐을 갖게된다.

그리고 나도 이제는 그이들의 생활을 직접 보러 가고 싶어졌다. 괌 은 많이 가 보았고 섬이 너무 작아서 볼거리가 많지 않은데, 요즘 새 롭게 부각되고 있는 피지는 우리나라 여행객도 많고 구경할만한 곳도 아주 많다며 남편과 아이들은 적극적이었다. 후배 가족도 보고, 그이 들이 사는 곳은 도시의 문명에서 벗어나 더 낙후된 곳이라서 그들 생 활의 경건함과 욕심 없음, 현실의 잊음, 그리고는 가장 원하는 한가로 움을 위하여, 우리 큰애가 불어넣은 떠남의 유혹은 싶게 식지 않을 것 같아 다시 계획을 세운다. 올 여름 방학에 우리 가족 모두 피지로 배낭 여행을 가볼까, 또 꿈으로 끝날 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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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동안 시간은 정지되어 있었다.

이십 여명의 남녀노소가 한자세로 앉아서 각자의 상념에 젖어있고, 흐르는 것은 담배연기와 구름과 옅은 숲의 향내뿐.

거기가 신동엽의 무덤인지, 그가 무엇을 남기고 간 사람인지, 나중 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언제나 주변 한번 돌아보기 어려운 바 쁜 일상 안에서 빈 시간을 잠시나마 가질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행복이었을 테니까. 모두 저 마다 삶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 쉬고 있는 듯 문학 지망생들이었기에 가능한 진풍경을 앨범 속 사진처럼 추억의 갈피에 새겨 넣고, 내 나이보다 젊은 그가 말없이 누워있는 산을 내려왔다.

대학원에서 여러 번 문학답사 기행을 갔다. 그런데 이번엔 태어나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자란 공주와 그 이웃고장 부여를 가게되었다.

순수한 여행을 목적으로 몇 년만에 돌아보게 되니 무척 새로운 느낌 이 들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뒤늦게 2진으로 출발하여 공주답사는 생략하고 부 여를 향할 때 내 유년의 공주에서의 추억은 이미 차안으로 들어와 있 었다. 1진으로 출발한 문우들이 스쳐지나갔을 그 거리와 숲 길이, 옛 날에 내 눈길을 사로잡았을, 내 발길을 머물게 했을 그 자리가 아니 었을까 하고.

공주로 들어가는 금강다리를 건너며, 제일먼저 반겨주는 산성공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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