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시 글

N/A
N/A
Protected

Academic year: 2022

Share "시 글"

Copied!
128
0
0

로드 중.... (전체 텍스트 보기)

전체 글

(1)

문예촌 문학선․163

시 랍시고 끄적거리는 놈 이 쓴 글

유 대 형 시집

(2)
(3)
(4)

4

ꠛ책머리에ꠛ

나는 시인이 아니다

시인의 조건을 논하기 전에 먼저 축구를 예로 들어 보자. 축구인 이라 하면 축구선수나 감독, 코치 등을 축구인 이라 말할 수 있겠다. 다시 정리를 한다면 축 구가 생계에 필요한 자금의 주 수입원인 사람을 축구 인 이라 할 수 있겠고 또 하나는 하루 일과의 대부분 을 축구와 관계된 일로 보내는 사람을 축구인 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동네 조기축구회에 가입하여 매일 아 침 축구를 한다 하여도 그는 축구인은 아닌 것이다.

시인도 마찬가지라 생각된다.

그 사람의 주 수입이 시 혹은 시와 관계된 글이나 행동으로써 생긴다면 그 사람은 당연히 시인인 것이고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하루의 대부분을 시와 관계된 일, 예컨대 시 창작을 위한 사색이나 여행, 독서, 사 람과의 만남 등으로 보낸다면 그는 시인이라 불리는 데 손색이 없다 하겠다.

반대로 이러한 조건에 해당되지 않는다면 그는 시인

(5)

이라 불릴 수 없는 것이다. 유명문학단체에 가입이 됐 다 해서 시인이 될 수 없고 유명출판사로 등단을 하였 다 해서 시인이라 불릴 수 없는 것이다. 한 때 위의 조건에 부합하여 시인이었던 사람이라도 현재 그 조건 을 충족치 못하고 있다면 그는 시인이 아닌 것이다.

다른 장르의 글들이 쓰여진 만큼의 내용을 전하는 것이라면, 시는 쓰여진 글 보다 더 많은 내용과 감정 을 전달해야 하는 것이기에 그만큼 어렵고 힘든 작업 이기도 하지만, 아주 짧은 글로 이루어진 것이 시이기 때문에 흉내 내기도 그만큼 쉬운 것이 시이다.

다시 말해 누구라도 마음만 먹는다면 시인으로 행세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요즘엔 대부분의 출판사들이 돈 몇 푼 집어주면 등단시켜주는 세상이다 보니 시인되기 가 운전면허 따기보다 쉬운 게 사실이다.

나는 자칭 타칭 시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을 세 가지 부류로 나누고 싶다.

첫째는 정말 위의 조건에 부합하는 명실상부한 시인

(6)

6

셋째는 노력은 조금도 안하며 적당히 시 흉내만 내 고 시인으로 행세하려는 짝퉁시인이다.

첫 번째 조건에 해당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시인이 아니므로 그 누구도 시인이라 칭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나는 시인이 아니다.

시인이 아니어도 시를 쓴다

축구인이 아니어도 축구를 하듯이 시인이 아니라 해 서 시를 쓰지 말라는 법은 없다. 시인이 아니어도 시 를 쓸 수 있는 것이고 때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좋은 시가 나올 수도 있다. 단지 시인이라 불릴 수 없을 뿐 누구라도 시를 공부하고 시창작의 재미에 빠져들 수 있는 것이다.

시 쓰는 게 좋아서 쓰다보니 꽤 많은 숨결이 쌓였

(7)

다. 그냥 없애버리긴 아깝고 책으로 만들긴 해야겠는 데 시인이 아니니 유명 출판사를 기웃거릴 일도 없겠 고, 격려사 몇 줄 써주실 선생님들이 안 계신 것도 아 니지만 그 역시 그분들에게 누가 될 뿐이란 생각에 동 네 인쇄소에서 자비로 몇 부 인쇄해서 벗들에게나 나 누어 주고 싶다.

“너 죽으면 내가 비석을 세워주마, 그 비석에는 ‘시 랍시고 끄적거리다 되진 놈’이라고 쓸 거다” 언젠가 가 까운 친구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죽어서 매 장되기를 원하지 않고 비석을 세울 일은 더더욱 없을 터이니 차라리 책을 낸다면 제목으로 쓰고 싶다. 아직 죽지 않았으니 「되진 놈」이라 쓸 수는 없고 「시랍시고 끄적거리는 놈이 쓴 글」이면 적당하겠다.

(8)

ꋫ차례………

책머리에 ꀅ4

1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 랏다 

눈꽃 ꀅ15 할미꽃 ꀅ16 고사목 ꀅ17 길 ꀅ18 낮달 ꀅ19 담쟁이 ꀅ20 마지막 잎새 ꀅ21 만추 ꀅ22 백매(白梅) ꀅ23 찔레꽃 ꀅ24 코스모스 ꀅ25 파도는 ꀅ26 향수 ꀅ29

Love Letter Ⅱ ꀅ30

(9)

ꋫ차례………

2

 우러라 우러라 새여

자고 닐어 우러라 새여

그 밤에 눈이 왔습니다 ꀅ33 실혼인[失魂人], 신혼인[新婚人] ꀅ34 감옥 ꀅ35

관성 ꀅ36 궁금증 ꀅ37 번뇌 ꀅ38

꽃 피는 골목 ․ 1 ꀅ40 꽃 피는 골목 ․ 2 ꀅ43 꿈의 다비식 ꀅ46 누이 이야기 ꀅ47 너 아니? ꀅ48

내가 알콜중독자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 ․ 1 ꀅ50

(10)

ꋫ차례………

비, 밤, 가로등 ꀅ58 뻐꾸기 ꀅ59 산다는 것 ꀅ60 상사(相思) ꀅ61 선문답 ꀅ62 아내 ꀅ63 시어(詩語)들 ꀅ64 양귀비 ꀅ66 어머니 ꀅ67 어떤 이는 ꀅ68

어른들을 위한 동시 (봄) ꀅ70 어른들을 위한 동시 (가을) ꀅ72 진주조개 ꀅ74

이브의 유혹 ꀅ76 이사 가던 날 ꀅ77 장승처럼, 장승처럼 ꀅ78 조화였으면 ꀅ79

진검승부 ꀅ80 한 개비의 무게 ꀅ81 차라리 ꀅ82

폐허 ꀅ84 허파꽈리 ꀅ86 이래서 좋다 ꀅ87

(11)

ꋫ차례………

3

 이화우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단풍 ꀅ91 로그인 ꀅ92 거울 ꀅ94 목련 ꀅ95 망각 ꀅ96

(12)

ꋫ차례………

4

 그이는

自序 ꀅ107 그이는 ․ 1 ꀅ108 그이는 ․ 2 ꀅ109 그이는 ․ 3 ꀅ110 그이는 ․ 4 ꀅ111 그이는 ․ 5 ꀅ112 그이는 ․ 6 ꀅ113 그이는 ․ 7 ꀅ114 그이는 ․ 8 ꀅ115 그이는 ․ 9 ꀅ116 그이는 ․ 10 ꀅ117 그이는 ․ 11 ꀅ118 그이는 ․ 12 ꀅ119 그이는 ․ 13 ꀅ120 그이는 ․ 14 ꀅ121 그이는 ․ 15 ꀅ122 그이는 ․ 16 ꀅ123 그이는 ․ 17 ꀅ124

(13)

!

제1부

!

(14)
(15)

눈꽃

영롱해 뵌다 말하지 마오 아름다울 손 또한 상관없소

왼 겨울 쓸쓸했다오 그것뿐이라오

하얗게 핀 건 얼음이 아니라 밤새 가슴을 투영하던 은하수라오

내 그렇듯이 겨울엔

모두가 외로울 뿐이라오

헐벗음, 기다림, 한 두해리오 만 새록새록 더하는 그리움을 은하수 흐르는 저 별들에 하소연하며 토한 한숨이 잎으로… 꽃으로…

(16)

16

할미꽃

부엉이 밤새 울면 누이가 무서울낀데 그쟈 앞동산 솔밭에 사는 울 누이 무서울낀데 그쟈

뒤척이다 달려간 새벽 묫등에 누이는 햇살 벤 채 늦잠에 들고 할맨 곰방대 꼬다릴 털고 있다.

(17)

고사목

차마 잊지 못한 기억을 붙안고 서 있네만 그것도 못할 짓만은 아니라네

우쭐우쭐 자라는 자네들이나

시나브로 사위어가는 나나 별반 다를 게 있겠는가 많은 것을 잃어갈수록 단순․명백해진다는 사실을 눈 틔우고 꽃 피울 때야 어찌 알았겠는가

외로움이 죽음을 더 아쉽게는 하지만 온갖 애벌레들이 유년의 추억을 갉아먹어도 또 다른 소중한 꿈이 자란다 생각하면 조금도 아프거나 슬프지 않다네

삶이란 욕심이었던 게야 아집이었던 게야

딱따구리가 가슴을 파헤쳐도 뿌리 성한 날 까지 서서 이렇게 윤회를 보다가

(18)

18

꼬불꼬불 이어진 산자락 길 햇살 나른한 산자락 길 비둘기 구구대는 산자락 길

아지랑이 위로 바람도 자는데 어디서 왔나 이쁜 가시내 풍경소리 등 너머 강종강종 뛰어 간다

(19)

낮달

물은 굽이쳐 아래로 흐르는데

이리저리 이즈러지며 거슬러 오르려는 낮달

갈라지고 찢어져도 동화 속 목걸이인양 매달리려 애쓴다

납처럼 무거운 몸 고단한 유영에도 체념할 줄 모른다

구름도 가는데 벌써 저만치 가는데

(20)

20

담쟁이

꽃필 때 함께 피고 같은 송이 키웠지만 아무도…

포도라 부르지 않습니다

사랑해서 안은 것 아닙니다

뼈대 없는 몸, 마음까지 휘둘릴까봐 무심한 바위에

꿈을 실었을 뿐입니다

풍성히 포도를 맺던 은혜의 시간에서 덤불가 돌짝밭으로 밀려난 삶이지만 그것도

숙명이려니 감내합니다

부끄러워 붉힌 것 아닙니다 삭막한 바위틈에 몸부림쳐도 최선을 다해 살아온 열정이 붉게 타는 것입니다

(21)

마지막 잎새

흐느껴 떨리는 가지 끝에 야윈 미소

눈 시리도록 쓰리던 옛 상처엔 얼룩진 눈물 자욱

몸부림쳐 몸부림쳐 틀어져버린 벌레 먹은 잎 하나

볼 부비며 소곤대던 옆 동무들 다 보내고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는 타버린 가슴

어메 젖같이 달던 이슬도 서리되어 옥죄인다

매양 내일 내일하며 미뤄온 준비할 것도 없는 길 미련도 아쉬움도 없으련만

(22)

22

만추

꽃비로 잉태한 씨앗들 살뜰히 곱게 길러 마침내 해산한 들녘이 신열을 달래고 있다

감일랑 까치 주고 수수알 참새 주고

*세마치장단의 농부에게도 아낌없이 선물하고

둔덕에 서있는 옥수숫대 논바닥의 볏단이며

서리 맞아 주저앉은 호박잎 태반들이 지켜 섯는 어미의 들녘

*세마치 ; 대장간에서 쇠를 불릴 때, 세 사람이 돌려가며 치는 큰 망치질

(23)

백매

(白梅)

섣달 중순에 너를 방에 들여

조석으로 물주며 애를 태웠더니 정월 초하루

문갑 위로 탐스런 눈이 내린다

겨자씨 같이 쬐끄만 눈이 밤에만 몰래 자랐는가 어느새 망울진 떨기 떨기가 눈썹 셀까 잠도 못 잔 섣달그믐에 무더기무더기 꿈을 펼친다

(24)

24

찔레꽃

제 몸의 가시가 두려워 선뜻 스치는 바람에도 몸서리를 치지만 양지를 향한 꿈만은 버린 적이 없다

밑둥치에 또아리를 튼 뱀이 충만한 독의 사정을 위해 혀를 날름대던 그 밤마저 좀더 짙은 향 피워 내 존재를 확인해야 했다

하얗게 떨며 파리한 입술 외쳐보아도 나는 가시나무일 뿐이지만

떨어져도 시들지 않는 꽃잎은 자존심 하나로 세월을 참아낸 내 꿈의 조각들이다

(25)

코스모스

가을엔 그이 수채화로 온다

빨간, 하얀, 분홍의 개성들이 낯가림 없이

흐드러지게 다투어 피어

어울려 얼싸안아 온몸으로 인사하는 꿈결 같은 수채화로 온다

가을엔 그이 별무리로 온다

새벽이슬 따라나선 고향 동구 밖

흐드러지게 다투어 피어

(26)

26

파도는

수평선 너머 하늘과 연한 어느 곳에

미처 숨지 못한 조그만 섬 하나 서성이고 있을 게다 그 섬엔 섬과, 등대와, 등대를 지키는 할배와, 애비 없는 손녀와

그리 살고 있을 게다

먼~~ 먼~~ 길을

또 다른 파도와 어깨동무하고 넘실대며 뭍으로 뭍으로 달려왔을 게다

꼭 그리해야만 할 이유는 없었지만 파도는 뭍이 가까워 올수록

그 섬과, 그 등대와, 그 할배와 또 그 손녀의 이야기로 점점 더 설레었을 게다

멀리 지평선이 보였을 게다

파도는 일렁이는 가슴을 애써 달래며 가까워지는 바위와 모래밭의 발자국과 엎드려 장난질치는 아이들을 보며

드디어 하얀 포말로 속삭이기 시작했을 게다

(27)

그 섬과 그 섬의 이야기와

또 다른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많은 이야기들을…

제 이야기에 취한 파도는 갈수록 흥이 났을 테고 속삭임은 점점 더 커져서 마침내

외침이 되고 절규가 되고 흐느낌이 되고…

모래밭에, 바위에, 물보라로 흩어지는 순간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도 오래도록 설레이며

지평선을 배회했을 게다

밀려오는 많은 파도만큼

전해 오는 이야기도 달랐을 게다

아무도 모르는 작은 무인도에서 벌어지는 가마우지들의 사랑이야기며

저 깊은 바다 속 조개 무리며 불가사리들의 삶, 저녁이면 삼키었다가

(28)

28

세상의 누구에게라도 가리지 않고 이야기했을 게다 바위든 섬이든 갈매기든 조그만 목선과 그곳에 탄 어부 이든…

모두가 귀 기울여 듣고 함께 즐거워했을 게다 오직 그들만이 침묵했을 뿐

바벨탑 이후

*바벨탑 : 옛날에 사람들이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하늘에 닿도록 탑을 쌓기 시작했답니다.

이에 하나님이 서로의 언어를 다르게 하여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신 고로 그들이 탑 쌓기를 그치고 흩어졌답니다.

그 탑 이름이 바벨탑입니다.

(29)

향수

뻥 뚫린 길이 정복자처럼 쓸고 간 자리

가랑잎 날리듯 흩어진 기억들이 서성이는 길섶에서 조각조각 유년의 추억을 짜깁기 한다

허리 잘린 뱀처럼 똬리를 튼 논둑길

불타버린 고목 밑에선 아직도 땡비가 허깨비처럼 달 려들고

반쯤 묻힌 채 자맥질하는 징검다리엔 옥이 고무신이 맴을 돈다

손바닥만큼 작아져 보이는 운동장가 그네에 앉아 올려다보는 하늘엔 전나무가 손 사래질을 하고 그물 없는 골대 아래선 기마전이 한창인데 무궁화 꽃봉오리 뚝뚝 떨구는 언덕 위 낡은 교실에서 풍금소리 흘러나온다 제비새끼처럼 재재거린다

- 이름도 빛나리라 우리 매곡교~~~ -

(30)

30

Love Letter Ⅱ

그대 지금 무엇 하시나요 밤은 점점 새벽으로 달리고 창밖에는 차가운 싸락눈 내리는데 그대 지금 무엇 하시나요

눈 속에 당신 모습 보일 듯도 한데 천공엔 당신 얼굴 달처럼 그리운데 차가운 싸락눈은 소리도 없어요 그대 지금 무엇 하시나요

당신과 나 벤치에 앉아 마냥 이 눈 맞아… 이 눈 맞아 한 쌍의 눈사람 되고 싶은데 그렇게 그냥 정지하고 싶은데 그대 지금 무엇 하시나요

그냥 주무시나요

(31)

                                    !

제2부

!

(32)
(33)

그 밤에 눈이 왔습니다

그 밤에 눈이 왔습니다

눈이 오는 그 밤에는

아무도 보는 이가 없었습니다

아무도 보는 이가 없는 그 밤에 눈은 내리고 내리고 내리고 그렇게 쌓였습니다

세상이 변해도 아무도 몰랐습니다 아무리 아파도

아무도 몰랐듯이

(34)

34

실혼인

[失魂人]

, 신혼인

[新婚人]

면사무소 앞 버스 정류장엔 특별한 승객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는데요

남루하기는 하지만 고운한복에 흰 고무신, 흰 장갑 을 끼고 자그마한 여행가방을 든 그 여인은, 버스가 올 때마다 자라목 빠지도록 버스 안을 기웃거리는 모 습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이 역력해 보였는데요

하루 이틀도 아니고 며칠씩이나 같은 모습으로 눈길 을 잡아 끌기에 옆 친구에게 물어봤지요

“어 그 여자? 일년에 한 두 번씩 그래

어떤 놈이 데리고 놀다 차버렸다는데 벌써 이십년 동안이나 저러고 기다리는 거야 보게 신혼여행 갈 준 비가 딱 돼있지 않아? 낭군님만 오시면 바로 떠날 텐 데 빌어먹을 낭군님이 어느 하세월에 나타나겠나? 그 나저나 오늘은 날도 안궂은데 웬일이지?”

20년을 첫날밤으로 살아온 여인의 얼굴에서는 신혼 의 단꿈이 담뿍 묻어나오는 것이었습니다

(35)

감옥

뿌리치려해도 떨어지지 않는 거머리 같은

아킬레스건 밟고 선 그림자 같은

깨뜨리려 해도 보이지 않는 허깨비 같은

관습

형식

위선

나의 형기는 몇 년일까

(36)

36

관성

눈 덮인 언덕길 나는 차를 몰아갑니다

구르는 눈덩이처럼 몸집만 불리며 달립니다

숨 가쁜 인생 내리막길 저 끝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브레이크를 밟는다면 바삐 몰아온 인생의 관성이

나를 저 벼랑 끝으로 밀어버릴 것을 알기에

돌아보고 싶은 그 무엇도 뒤로한 채 나는 가속 페달을 밟습니다

지금은 내리막길입니다

(37)

궁금증

쌍 초상이 났다

양달 말 김영감 삼년 자리보전에 똥수발 오줌수발 마다않던 과부며느리, 양 음달 효부 났다 사람마다 칭 찬이 구구하던 터였다 도지사 표창이면 시멘트 이백포 대는 떼다 논 당상이라 떠벌이던 신이장 주둥아리 질 에 마가 낀 게다 용하다 소문난 아랫재 신녀가 꿈을 꿨다나 계시를 받았다나 벼락바위 위 풍신굿 한번이면 김영감 병이 씻은 듯 낳는다 했던 것이다 돼지 머리에 술동이는 문제가 아니라고 수완을 자랑하며 신이장이 부추겼던 것이다

과부며느리가 떨어져 죽었는지 어쨌는지는 모를 일 이지만 신기하게도 김영감은 한날 한시에 죽었고 동네 엔 소문만 맴돌았다 차가운 시신은 용담소에서 건져 올린 듯, 붉은색 용부적을 움켜쥐고 있었다

(38)

38

번뇌

항상 곁에 계신 당신이온데 내겐 왜 그리 멀기만 하오신지

꿈에서라도 느끼고 싶어 길지 않은 밤

잠 청해봅니다

얼른 잠이 들어야 될 텐데…

생각만 꼬리를 물고 밤은 짧기만 합니다

행여 옅은 잠 들어도

당신은 언제나 신비한 미소뿐 잡을 수도 느낄 수도 없습니다

길지 않은 밤

당신은 주무시지도 아니 하나요 몰래 살금살금 다가가도 당신과의 거리는 영원합니다

(39)

오늘밤도 행여 주무시려나 잠 청하다

이 밤 하얗게 새려나봅니다

(40)

40

꽃 피는 골목

1, (remember)

정희, 그녀의 이름은 정희였다

눈감고도 찾아 갈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한 언덕길을 달려가며 정희는 되뇌인다

“사탕 많이 먹으면 이빨 썩는다는데…”

베니다를 덧대어 늘린 가게 벽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영화 포스터가,

어두운 불빛아래 살아서 그녀를 섬뜩케 한다

깨진 유리를 꽃 모양의 종이로 오려붙인 가게 문은 덜컹거리기만 할 뿐

정희의 힘으로 열기는 언제나 힘들었다

볼이 메어지게 큰 눈깔사탕을 입에 문 채 계단을 내 려가는 정희의 뇌리엔,

며칠 전 가게할머니와 그 며느리가 그녀의 뒷꼭지를 측은하게 바라보며 하던 말이 떠올랐다

“이간지 박간지도 확실치 않다며…”

정희, 정희면 됐지 이가 박가가 뭐에 필요한지 정희 에겐 관심 밖이었다

(41)

이끼 낀 계단을 폴짝폴짝 뛰어내려 다리 밑에 쪼그 려 앉은 정희는,

무심히 흐르는 냇물을 바라보며 입안의 알사탕을 한 번 굴린다

술 먹었을 경우 아니면 업으려하는 엄마와 달리, 이젠 다 커서 업혀 다니기엔 창피하다고 생각하는 정희였다

낯선 아저씨들이 찾아올 때,

그래서 정희가 눈깔사탕을 사먹으러 가게로 가야만 할 때를 빼곤

엄마는 정희를 옆에서 떼어놓으려 하지 않는다고 정 희는 생각한다

개울엔 연탄재가 빠져있고 그 구멍 속으로 송사리들 이 제집인양 드나들고 있다

(42)

42

놀라 제집 속으로 숨는 송사리들을 보며 정희는 알 사탕을 와삭 깨물어 먹는다

“깨물어 먹은걸 엄마는 모를 거야”

정희는 애써 자위하며 손을 털고 일어섰다 밤 별들이 우르르 쏟아질 것만 같다 골목은 언제나 제 자리였다

(43)

꽃 피는 골목

2, (feel)

정희, 그녀의 이름은 정희였다

정희의 부축을 받으며 택시에서 내리는 미연에겐, 오늘따라 어머니 이름이 낯설게 느껴진다

“애 낳는 것과 다를 게 없는 것이다. 당분간 나돌아 다니지 말고 몸조리해야 한다”

그녀는 정희라는 이름보다는 집에서나 밖에서나 조 여사가 더 익숙한 호칭이다

정희는 다른 건 몰라도 돈을 버는 데만큼은 귀재였 다고 미연은 기억한다

소심할 뿐인 부친과 달리 정희는 그 당시도 적지 않 았던 남편의 재산을 무섭게 불려나갔다

땅장사든, 집장사든, 사채놀이든,

그녀의 손이 미치는 것은 모두 몇 갑절의 재산으로 되돌아왔고, 그만큼 항상 바빴다

(44)

44

비록 이름뿐이긴 해도 남편을 사장으로,

하나뿐인 딸 미연을 명문대출신의 규수로 만드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지금은 아닐지 몰라도 세월이 흘러봐라 그땐 에미에 게 고맙다고 할 게다”

미연도 내심 어머니의 말이 틀리지만은 않다고 느껴 지기도 한다

다만 이리 가슴이 쓰린 것은 비단 아이를 떼었다는 모성만은 아닐 것이다

“네가 손에 물 한번 대 봤냐? 사람은 제각기 신분에 맞는 상대가 있는 법이다.”

어머니의 설득이 단지 미연만을 위함은 아니라는 것 을 미연도 안다

당당한 교육자집안의 사돈이 되고 싶은 어머니 속내 를 모를 리 없는 미연이지만,

미연 자신도 이런 선택을 한 건 자신이 아니고 어머 니의 피라고 자위를 한다

골목엔 빌딩 높이만큼이나 깊은 어둠이 내려앉는다

(45)

아무도 모르게

굳이 택시를 타고 집으로 오는 미연의 머리에, 한 잔의 술에 담아 건네던 그의 말이 떠오른다

“아주 비싼흥정을 했구나”

(46)

46

꿈의 다비식

나이 쉰이 가까워오면 차일피일 미루었던 꿈을 재단해야만 한다 막다른 길에 서서

미룰 수 있다는 것도 행복이다 간직하고 있는 것

품고 사는 것만으로도 좋았던 것들을 접든지 펴든지

나이는 강요한다

순간의 행운에 운명을 걸어야하는

*러시안 룰렛 게임을

*러시안 룰렛 게임 : 제정 러시아 때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죽 음의 게임으로 총알이 한두 개 들어있는 권총을 머 리에 대고 번갈아 가며 방아쇠를 당기는 게임이다.

(47)

누이 이야기

제 손으로 운전하다

남편도 아들도 하늘로 보내고 살아 있다는 그 아픔조차 감춘 채 살아가는 표정이 없는 내 누이

어머니 없는 어린 딸 여러 오라버니들 틈에 들풀처럼 몰래 자라 표정을 잃어버린 내 사촌누이

서투른 위로가 상처 될까봐 그냥 계면쩍게 웃는 내게도 별 뜻 없는 인사 건네며 역시 쓴웃음 짓는…

(48)

48

너 아니?

너 아니?

등 뒤에서 리듬에 맞춰 네가 노래 부르며

연꽃 봉오리 같은 젖가슴이 내 등에 스치울 때마다 나는 엄마 품에 잠든 아기마냥

오래 전 태중에서의 포근함으로 젖어들었던걸

너 아니?

취한 듯 꿈꾸는 네 맑은 눈동자는

아지랑이가 보드라운 미소로 헤실 대고 살진 암소가 게으른 눈으로 되새김질하는 고향언덕으로 나를 보내 기도 하며, 모험의 길을 떠나는 오즈의 마법사처럼 환 상의 세계로 나를 보내기도 하지

저 산과 무심한 구름이 노니는 하늘까지도 품은 채 고요한 호수처럼, 내 가슴 깊은 곳에 감추어진 꿈으로 단숨에 나를 보내고 마는 영혼의 플랫홈인 것을

넌 아니?

네 입에서는 봄바람보다 싱그럽고, 사과즙보다 풋풋

(49)

하며, 아카시아 향보다 더 달콤한 향내가 나는 것을 내 두 손에 안긴 네 작은 몸뚱이엔 징기스칸도 무릎 꿇게 할 힘이 있으며 플라톤도 경배할 지혜가 있으며 나이팅게일도 입맞출 사랑이 있음을 넌 아니?

네 가슴속에 이 세상을 끌어안고도 남을 어머니가 있음을 아니

어젯밤 노래방에서 이만 원 주고 한 시간을 즐긴 나 는 수지 맞았지만

너는 너의 가치를 알기는 하니?

네 귀한 몸은

그것보다 비교할 수조차 없이 고결한 영혼을 담는 그릇이란 걸

너 아니?

(50)

50

내가 알콜중독자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1

몸도 못 가누는데 갈지자로 걷는데 마음은 이리 차분할까?

딸꾹질은 나는데

이리 흔들리며 찾는 내가 안 보이는데 잃어버린 내가

강시처럼 날 감시할까?

자고 싶은데 엎어져 자고 싶은데 내가 자면 누가 우니 내가 자면 누가 우니

멀리 저 멀리라 생각되는 자리에 내 이성을 묻었는데

끝없이 떠오르는 꿈마저 타성에 깃든 기생충일 줄이야

(51)

내가 알콜중독자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2

한 잔 술에 주소 찾고 두 잔 술로 번지 찾고 세 잔 술이 방문을 연다

어찌하랴

그곳에 내 있음이여

(52)

52

내가 알콜중독자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3

사랑 고프라고 교회 가는데 사랑은 안고프고

주님만 고파온다

시 고프라고 술 먹는데 시는 안고프고

술만 고파온다

(53)

동상이몽

시는 쓴 사람과

읽는 이의 생각이 같지 않다

시인은

순대국집 과부이야기를 하건만 독자는 늘

푸줏간 이 서방으로 듣는다

가끔 우연히도 그들이

어스름 가로등 아래서 설왕설래(舌往舌來) 할라치면 절창이라 일컫기도 한다

(54)

54

모델

사람들은 저랑 사진 찍는 걸 좋아합니다 라면이나 휴지 등을 잔뜩 쌓아놓고 그 앞에서 저와 함께 사진을 찍지요

자애로운 미소를 얼굴 가득 담은 채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포옹하려고 노력을 합니다

어제는 아주 높으신 분이 오셨더랬어요 그분은 라면이나 휴지보다

더 좋은걸 더 많이 쌓아놓고 사진을 찍으셨지요 저도 우쭐해서 으쓱 어깨를 올리고

폼나게 사진을 찍었어요

그런데 사진을 찍고 나면 모두 서둘러 가버리십니다

“그럼 바빠서 전 이만…”

하긴 나와 같은 장애인들을 찾아다니며 사진 찍는 일에 좀 바쁘시겠어요?

전 그분들을 사랑합니다

(55)

민달팽이

그리 쉬워 보이던가 껍질 벗는 일

수 만 년 생각하고 수 천 년을 연습했네

내겐 그게 전부였거든

(56)

56

밤하늘 밝히는 저 별들은 한 생을 그리움에 살아

죽기까지 그리고도 남은 눈동자 하늘에 걸어 놓은 것이란다 많은 사람들의

많은 그리움이

저리 모여 밤하늘 밝히고 있단다

내 죽으면 저 많은 별들 중 무슨 별이 되어 어느 곳 밝히려나

훗날 한 여인

밤하늘 별 올려다보며 참 낯익은 눈동자 보았다 할게다

(57)

별님께 보낸 편지

저 하늘엔 하늘이 있듯 그곳에도 우주가 있다

그곳에도 마을이 있고 시내가 있고 눈물도 있다 하늘에는 그리운 님 계시고 그곳에는 별님이 사신다

하늘의 주소는 [그리운 님께]이고

그곳의 주소는 [별님 골뱅이 쩜 씨오 쩜 케이 알]이다

그리운 님은 추억으로 답신을 주셨고 별님은 늘 [받은편지함]으로 답신을 주신다

추억이 다할 즈음 [받은편지함]도 비었다

그곳에도 유성이 있나보다

(58)

58

비, 밤, 가로등

플라타너스 옆 가로등 밑으로 뿌옇게 비가 내린다

우산은 저만치 구르고 한 사내 기대섰다

플라타너스 잎에는 네온 불이 반짝이고

늙은 작부의 추파인양 진득하게 젖어드는 비

취한 걸까

손에 든 담배 다 타도록 연신 주억거린다

영혼마저 잠식하려는 듯 비는 추근대며 감겨오는데

알 수 없는 노래 흥얼거리며 사내 기대 서있다

(59)

뻐꾸기

몰래 숨어 기다렸지 주인이 집을 비운 둥지 남의 알 옆에

한 개의 알 낳았더랬어

알이 부화되고 새끼가 자랄 때 마치 놀러 온 이웃인 듯 태연히 하루 종일 울어댔더랬지 뻐 뻐꾹 뻐꾹

영특한 내 새끼는 형제들 다 밀어내 죽이고 잘도 자라더군

언제부턴지

따라 배우기 시작했어 내 노래를

뻐 뻐꾹 뻐꾹

(60)

60

산다는 것

오포면 추자리 산 36-1번지 반듯이 개발해 놓은 땅 한가운데 절벽 하나 서 있다

아득히 높은 곳에 곡예 하듯 올라선 무덤 하나

밀려오는 어지럼증에 그만 눈을 감는다

사방을 절벽으로 깎아놓아 올라갈 길 없는 저 무덤

포크레인이 다듬어 올린 기적의 탑과 후손의 염원으로 빚은 연꽃좌대 위에서 이승과 저승사이를 망각의 강처럼 흐르는 업보…업보…

(61)

상사

(相思)

어느 날은

욕을 했습니다 <그래 못된 년 잘 가라 언놈에게 붙어서 잘 먹고 잘살다 너도 한번 채여서 되져버려라>

부모님도

원망해 보았지요 <이놈의 원판불변의 법칙은 깨지지도 않나 지지리도 못나게 낳으려면 낳기는 왜 낳누>

자신을

탓하기도 했습니다 <그러게 적당히 거리를 뒀어야지 미친놈처럼 폭 빠져서 염병을 떨더니 에라 이 등신아>

그러나…

(62)

62

선문답

가시려나요 네. 네.

당신의 주인은 무엇인가요 마음이 머무는 곳, 몸도 머물지요

가시려나요 네. 네.

아름다움, 젊음, 그리고 당신의 자유조차 동냥질하며 가지는 마시어요

가시려나요 네. 네.

오시는 걸음보다 잰걸음 옮기시니

되짚어 오마시는 약속, 설움이어요

(63)

아내

얼마나 많은 윤회의 인연이 당신을 내게 보냈으리

억겹의 세월을 그리고 기다려 우리 만났거늘

큰자식 하나 더 기르듯 평생에 근심만 지우는구려

꽃 같은 모습에 시집와 궁핍한 살림에 한닢 끝없는 방종에 한닢 자식 뒤치다꺼리 한닢

꽃잎 다 지고 대궁만 남은 당신

큰소리쳐 윽박질러도

(64)

64

시어

(詩語)

어린 동심엔 꿈을 주지만 어른에겐 출세일 뿐이다

사랑

나 어린 소녀들의 가슴에 박혀 무던히도 많은 아픔을 줄 뿐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거래의 화폐이다

그 많은 상상과 희망들이 오직 일곱 마리 돼지로 귀결된다

소녀

이름조차 영계로 바뀌어 버렸다

이별

더 이상 이용 가치가 없는

(65)

거래의 종료를 의미한다

시대에 따라 언어는 변한다 나 또한 변한다

이젠 더 잃을 것도 없다

(66)

66

양귀비

일생을 사랑밖에 몰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 피우고 팠다

가장 얇고 가장 가벼이 되어 하루를 사랑하고 팠다

윤리도 도덕도 나는 모른다 님 가까이 할 수 있다면 한번만 가까이 할 수 있다면 그리움 앙금이 독으로 쌓이도록 수치심마저 잃어버렸다

비옥한 토양도 싫다 옮겨 심기운다면 차라리

말라 죽으련다 피멍으로 울던 가슴 내 그리움의 상처처럼

(67)

어머니

물 말아 남기거나

비벼놓은 음식을 더 좋아하셨다

울며 보채는 아들 업고 삼․십․리

화두채 고개 넘어 당거리쯤 접어들 때면

가뿐 기적소리가 도드람산 솔개처럼 달려들곤 했다

아들이 먹는지 마는지도 모른 채

구워대기 바쁘게 고기를 드시는 그 자리에 내 어머닌 계시지 않았다

(68)

68

어떤 이는

어떤 이는

제 몸뚱이 다 닳아 버릴 때까지도

파도에 뒤채며 잠 못 이루는 소라 껍질처럼 진한 아픔을 내게 주었다

나도 소라를 닮아간다

어떤 이는

사윈 몸 마른 눈물 너머로 초롱한 눈망울은 남아있어 밤마다 동구 밖 밝히는 저 별처럼 아련한 그리움을 내게 주었다 별을 닮아간다

어떤 이는

파랗게 멍이 들도록 자신을 학대해

마치 그것을 위해 태어난 듯 언덕에 부딪는 파도처럼 격렬한 증오를 내게 주었다

파도를 닮아간다

(69)

어떤 이는

말라버린 채 끝도 없이 가라앉아 다시는 세상 밖 내다보지 않으려 하는 저 우물처럼

깊은 절망을 내게 주었다 우물을 닮아간다

어떤 이는

여윈 몸 한쪽 다리로 가눈 채 문득 허공을 떠올리는 해오라비처럼 마르지 않는 슬픔을 내게 주었다 해오라비를 닮아간다

나는 감사한다 어떤 이에게 나는 매일 내 가슴의 즙을 짜서

시고, 달고, 맵고, 쓰고, 짠 五味의 글을 써

(70)

70

어른들을 위한 동시 (봄)

따스한 봄입니다

아파트 옆 자투리땅에 할머니가 밭을 일굽니다 호미로 땅을 파고 돌을 고르고 씨앗을 뿌립니다

‘어서 어서 싹을 틔우렴

세우(細雨)로 너희의 탄생을 축하해 줄게’

구름이 축복을 보냅니다

‘아파트 그늘 때문에 햇살 가기가 쉽지 않겠는걸’

해님은 걱정입니다

‘흥 흙으로 덮는다고 못찾아 낼까봐 어림없지’

까치는 감나무가지를 위 아래로 오르내리며 내일의 식탁을 자축합니다

‘아파트 옆이라 농약도 치지 않을 거야

저기에다 알을 낳으면 내 아가들이 잘 자라겠지’

나비도 할머니 등 뒤를 맴돌다 갑니다

(71)

어느새 땅거미가 몰려오고 어둠이 내려앉습니다

할머니는 호미와 바구니를 챙겨들고 말없이 돌아갑 니다

뿌려진 씨앗은 이제 씨앗이 아닙니다

(72)

72

어른들을 위한 동시 (가을)

[동양당]

중앙통 시장입구에 있는 보석상의 대형 쇼윈도 앞에는 몇 분의 할머니가 쪼그리고 앉아계셨다

동부 세 묶음, 솔잎 한 움큼, 토란 한 바가지, 호박 잎 한단…

소녀시절 소꿉놀이처럼 야채를 펼쳐놓고 손으로 열심히 토란을 까신다

“할머니 토란을 까면 돈을 더 받나요?”

“더 받기도 하구 심심하기도 하구”

“장날마다 오시나요?”

“올 때도 있고 빼먹을 때도 있어”

“그래 얼마나 벌어가세요?”

“못 벌어, 이만 원 벌 때도 있고… 지난 장엔 만원 밖에 못했어

만 원 해서 밥 사먹고 간신히 차비해 갖고 갔지”

“여기서 장사하게 해요?”

(73)

“못하게 하지, 아침에도 안 옮기면 모두 걷어간다 그러더니 잠잠하구먼”

“이거 팔아서 어디에 쓰세요?”

“이 사람아 돈이 없지 쓸 데가 왜 없어 전기요금도 내고, 부주도 하고, 추석에 손자들 오면 용돈도 줘야 지”

“저 동부 두 묶음만 주세요”

“사러온 거 아닌 것 같은데 안사도 돼

그래도 이맘때가 젤 호시절이여 그저 산에 가도 돈, 들에 가도 돈, 돈 천지라니까”

실촌읍 부항리에 사신다는 이명길 할머니

할머니의 슬하(膝下)엔 소꿉 놀이적 꿈이 여물어 가 고 있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74)

74

진주조개

그것은 견딜 수 없는 아픔이었지 가슴속 가장 내밀한 곳에 박힌 이물질 몸부림치면 칠수록 점점 더 안으로 파고드는 절망과 고통의 덩어리

이젠 많이 익숙해 졌어 절망할수록, 고통스러울수록 설움의 눈물로 가슴을 흐르는 포용의 체액

한 겹 한 겹 감싸고 감싸

동그랗게 내단을 만들어

이제는

내 몸의 일부인 듯 오히려 자연스러운걸

먼 훗날

내가 사라진다해도

(75)

절망과 고통으로 잉태한 내 설움의 내단은 오색영롱한 진주로 남아 영원히 빛날 거야

(76)

76

이브의 유혹

[오빠 화끈하게 다 보여줄게]

메일함에 들어있는 도발적인 스팸메일

악성 프로그램이 들어있을텐데…

심한 바이러스로 자료를 다 날려버릴지도 몰라 봐야 별것도 없더구먼

[삭제]와 [열기] 사이에서

마우스커서는 오늘도 흔들리고 있다

수컷에게 주어진 금단의 열매

(77)

이사 가던 날

새 아파트로 이사 가는 아내, 치맛단이 풀풀 날고 32평이란 아이디가 생긴 아들, 노래가 콧등에 걸렸네요 보신탕집으로 이사할 검둥이도 따라 뛰는데

뒤꼍 살구나무만 심드렁하니 내려다봅니다

삼대(三代)를 이어온 낡은 집에선 끝없이 추억을 쏟 아내는데

저만치 구르는 찌그러진 양은주전자 앗, 아버지~~~

(78)

78

장승처럼, 장승처럼

그래 모른단 말이지 네가 한 일 네가 저지른 일 시침 뚝 떼고

동구 밖 장승처럼

일견 웃고 일견 부라리고…

그래 모른단 말이지 정녕 모른단 말이지

(79)

조화였으면

향이 없어도 좋다

벌나비의 방문 없음 비록 아프지만 서럽게 서럽게 지고 싶진 않다

산들산들 애무하는 바람, 밤새워 두레질한 이슬 없어도 보아주는 이 없는 밤에 비명도 없이 그렇게

홀로 시들고 싶지 않다

철사로 등뼈를 잇고 청테잎 종이꽃일지언정

조그만 씨앗 머리에 인 채 누렇게 바래 가는 삶을 희망이라 말할 순 없었다

(80)

80

진검승부

술을 먹는다는 것은 참으로 무섭고 위험한 일이다

중세시대엔

장갑을 벗어 던져서 결투를 신청했다는데 요즘은

“술 한 잔 합시다” 한다

승자는

여유와 너그러움으로 미소를 짓지만 패자는

분노와 좌절 속에 오열하며 부축되어 간다

마음을 수색 당한 데 대하여 복수를 다짐하며…

(81)

한 개비의 무게

잠 못 드는 밤 벽에 등 기대고 담배연기 깊게 마신다

후우~ 내뿜는 연기에 토해져 나오는

뿌연 회한, 음울한 편린들

무리져 흩어지는 연기처럼 허망한 삶

불투명한 미래 부끄러운 과거

또 다시 피워 물어 다 토할 수 있을까

이 껍데기엔 또

(82)

82

차라리

슬프거든 네 마음에

사랑이 찾아온 줄 알라

눈물이 나거든 네 가슴에

그리움이 싹튼 줄 알라

아프거든

네 몸에 신열이 나고 입술이 달뜨거든 채워도 채워도 스미어 버리는

열사의 사막이 또아리를 틀거든

굳게 지키리라 맹세했던 네 마음의 성문이 가차 없 이 무너져 내린 그 자리에서

이제는 부러진 빗장을 풀고 울자, 서럽게 울자, 갓난 아이처럼 그냥 울자

슬픔을 채색한 미소, 증오를 가린 친절, 저주를 포장

(83)

한 어설픈 관심

어려서부터 배우고 익힌 지식이라 명명된 위선을 이 제는 거두고

지혜롭게 하고픈 말을 하자 사랑한다고

좋아한다고 그립다고

그리고 바보라 불리우자 차라리

(84)

84

폐허

이제 우리의 하루는 가고, 땅거미가 장마철 물 닫듯 이 소리도 없이 달려들고 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나 와 달리 서편을 향해 합장하고 선 네 모습, 얼굴은 황 금빛으로 물들고 감긴 눈은 오히려 붉게 타는 노을을 조명하고 있다 우리가 만들려던 신천지는 이것이 아니 었거늘 밟고 선 땅은 무너진 돌담과 깨진 기와만 나뒹 구는 조락한 뜰로 바뀌고 말았다

애초에 우리 두 손을 잡고 이곳에 터를 일굼의 꿈과 너무나 판이한 이 결과를, 너와 나 모두 황망하고 이 제는 지쳤음이여, 아직 너와 나 두 손을 잡고 있거늘 열심히 사랑하고 열심히 일구고 있거늘 대체 무엇이 우리를 석양의 뜰로, 임종의 그루터기로 이끌어 내었 더란 말이냐

(85)

이제 서편에 걸린 채 뒷산의 파도에 자맥질하는 저 태양이 어둠의 밤으로 익사하고 나면 우리의 존재도 애초에 없었던 공허 그 무의 세계로 가겠지만 그리고 우리의 이 조악한 뜰에 아무 미련도 없겠지만 다시는 네 없음에, 다시는 네 손이 내게 쥐어있지 않을 것임 에, 다시는 함께 할 아무 것도 없음에 도시 나의 온몸 과 마음 바닥은 흔들려 떨고 있는데 헤어나지 못할, 그리고 죽음보다 못할 것으로 이어질 삶의 예감이 이 리도 가슴을 쥐어짜는 불안으로 다가오는데

(86)

86

허파꽈리

당신이 내게 키스하신 적은 없지만

그래서 가슴속에 숨결 불어넣은 적도 없지만 당신의 말씀 한 마디, 눈빛 한 조각이 내 폐부에 방 하나 만든 것은 사실이지요

숨 막히는 이 세상이지만 아득한 세상이지만

당신들이 만들어준 방 하나 하나로 인해 나는 호흡할 수 있답니다

그 방 하나 하나마다에 새겨진 당신의 미소가

당신의 배려가 당신의 짓궂음이 그리고

당신의 사랑이 나를 살맛나게 합니다

살아있는 동안 간절히 당신의 가슴속에도

내 방 하나 만들고 싶습니다

(87)

이래서 좋다

밤새 빗방울이 창을 두드리는 날은 님이 없어 좋다

벗이 없어 좋다

홀로 잔을 기울이는 고적함이 달다

감미로운 음악에 취하고 잔에 비친 눈동자에 취하고 그리움에 취할 수 있어 좋다

찾아가지 않아 좋고 찾아올 이 없어 좋다

잔을 벗 삼고

창을 두드리는 비의 이야기 그 너머 떠오르는 얼굴들

(88)

                                  

(89)

                                    !

제3부

!

(90)
(91)

단풍

다 못한 그리움을 저리 붉게 채웠을까

그리움도 부끄러워 붉히면 떨어질까

바라던 노을마저도 하냥 붉게 물든다

(92)

92

로그인

Ⅰ 일상의 장막너머

감추인 비밀의 문

현실과 유리된 또

하나의 나를 향해

오늘도

“열려라 참깨”

조심스레 외친다

Ⅱ 사이버 그 광활한

신비의 사막 어느 곳에

40인의

(93)

도적이 숨긴 은밀한 보물창고

스미듯 선계로 가버린 남루해진 내 모습

(94)

94

거울

거울아 너는 모든 사물을 옳게 비춰

하나도 거짓됨이 없다고 알았거늘

고얀 놈 왼손잡이로 뒤바뀌어 버렸다

네 진정 모든 것을 반대로 만들진대

내 마음 생각마저 바꿔질 수 있다면

끈질긴 마음의 번뇌도 네 뜻대로 비추렴

(95)

목련

겨우내 꾸었던 꿈

저리 크게 벙그는가

살갑던 눈을 닮아 희게도 벙그는가

흰 구름 한 폭 떼어다 이고 섰는 저 목련화

(96)

96

망각

두렵고 무섭기로

잊어짐보다 더하리요

먹어도 먹지 못하고 누워도 자지 못하며 머리 속이 하얗게 탈색된 채 죽음만을 일렁이던 형극의 세월들이

한 조각

쓴웃음으로 남아 허허로이 웃는다

(97)

바람, 바람끼 (춘,하,추,동)

안으로 닫아 건 채 잠자는 생명들을 어떤 감언이설로 달래고 꾀었기에 따사한 아지랑이에 풀어헤친 옷고름

뽀오얀 안개 속에 은밀한 포옹하고 때론 광풍폭우 격랑의 정사 나눠 푸르른 대지는 오직 애무 먹고 자랐다

갈수록 매몰차고 차가워진 그 숨결 모멸감에 시들고 가슴은 타 들어가 빨갛게 상기된 마음 눈물 젖어 지샌다

아픔도 그리움도 한잎 두잎 체념한 채 다시금 묻어버리고 빗장으로 가로막아 천지를 얼리고 마는 바람만의 바람끼

(98)

98

무지개

비 개인 산 허리에 칠보교각 놓였으니

천상의 일월선녀 찾아옴직 하건만

정갈한

어느 산천 있어 귀인들을 뫼시리

깊은 산 계곡마다 선녀탕 남아있고

넓은 강 구비마다 등룡소 여전한데

공해로 찌들은 하늘 무지갠들 쉬이볼까

(99)

금강송

(金剛松)

하늘을 닮고 싶은 꿈이 있었던 게다 서리 맞고 상해도 버릴 수 없는 염원이 마침내 하늘 빛깔로 물들었던 걸게다

꿈으로 오는 그 누구라도 동무하고 싶었던 게다 아스라이 내뻗고 허우대는 손짓에

때로는 학도, 구름도 쉬어 가는 걸게다

오직 위로만 향하던 끝없는 그리움이 나이를 잊었던 게다 어지럼도 몰랐던 게다 아득한 절벽 위 하늘을 끌어안은 *금강송

*금강송(forma erecta)

태백산맥줄기를 타고 금강산에서 울진, 봉화를 거쳐 영덕, 청송 일부에 걸쳐 자라며 꼬불꼬불 일반 소나무와 달리 줄기가 곧바르 고 마디가 길고 껍질이 유별나게 붉다.

(100)

100

님의 침묵

(萬海 한용운 님을 기루며…)

겨레를 기루어온 님 이 밤 사 또 못 잊어 발자취 더듬어 홀연히 뵈옵건만

한사코 듣고 싶은 말 침묵으로 답주시네

님께서 남겨주신 주옥같은 글들이 지금도 살아 계셔 가슴속에 담김은 삶으로 실천해 보인 나라사랑 겨레사랑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을 한평생 기루어 주신 님 사랑 그 정성이 내 가슴 등불 되어 앞길 밝혀 주신다

* 너른고을문학 회원들과 萬海기념관을 방문하고 님을 기루어 이 글을 올립니다.

( )부분은 님의 시집 중 「군말」에 나온 말을 빌려 썼습니다.

(101)

이슬

귀촉도 울음소리 이 밤도 하 슬퍼서

온 누리 초목마다 소리 죽여 울더니

동산에 해 떠오르자 계면쩍게 웃는다

(102)

102

이화

하늘 가른 가지마다 무리 진 흰 꽃송이 미리내 시냇가에 살포시 앉았으니 달빛에 빛난 그 모습 꽃일런가 별일런가

연녹색 꽃받침에 하얀 너울 치장하고 자줏빛 연지곤지 고운 얼굴 가다듬어 사립문 기대어 선채 기다리는 해가 짧다

행여나 님 오시나 이리 기웃 저리 기웃 담 넘어 늘어진 어린 밤색 잎새에도 간밤에 머금은 이슬 눈물 되어 반짝인다

잘금잘금 내딛은 발 동구 밖에 늘어서도 기다린 님 아니 오고 첫 닭이 홰를 치니 가녀린 한숨에 날린 꽃잎마다 눈 내리듯

(103)

정염

(情炎)

진종일 내린 비에 온 땅이 더위 식혀

삼복 중 무더위도 잠시 쉬어 가건만

무시로 불타는 가슴 무엇으로 식힐까

물먹어 식지 않고 술 먹어도 소용없어

점점 더 불타 올라 하얗게 재가 되니

(104)
(105)

                                    !

제4부

!

 

(106)
(107)

自序

[나]는 1인칭이고, [너]는 2인칭이며, [그]는 3인 칭이다. [그이]라는 단어의 뜻은 3인칭의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대명사이지만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는 여인이 남편을 지칭하거나 남편이 아니더라도 사랑하는 사람 을 칭할 때 [그이]라 표현한다.

[그이는], 혹은 [우리그이는]으로 시작되는 여인의 이야기는 대부분 [그이]를 흉보는 형식의 이야기이지 만, 자세히 들어보면 실상은 [그이]를 자랑하는 이야기 이며, [그이]에 대한 한없는 기대와 사랑이 깃들어있음 을 어렵지 않게 간파할 수 있는 것이다.

[그이]란 단어 속에는 한 남자에 대한 여인의 지고 지순한 사랑이 고스란히 녹아들어있다.

[그이]가 몇 인칭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사랑칭]이라 답할 것이다.

(108)

108

그이는․1

낮술이 깨어가는 밤입니다 아내는 옆에서 코를 골고 갈수록 또렷해지는 밤입니다

불 끄고 누웠다 다시 켜 글 한 줄 쓰고

또 눕기를 밤새워

그이와 동침한 밤입니다

(109)

그이는․2

내 가슴 저편 기슭에

쬐끄만 불씨하나 심어놓은 그이

앞산 뒷산이 저리 붉게 타올라도 짐짓 모른 체

붉은 단풍 한닢 한닢의 사연을 귓등으로 맞는다

(110)

110

그이는․3

동짓달 바람이 서걱서걱 부는데

애꿎은 문고리 흔들지 말아요

그이는 휘영청 달빛뿐인걸

(111)

그이는․4

사나운 비바람에

잎새 지고

잎새 지고

아픈 기억 따라 그이가 오는데

나목(裸木)은 제 그림자가 섧다

(112)

112

그이는․5

샛노란 은행잎 하나하나에 걸터앉은 그이는

성긴 빗방울 따라 먼 길 가시려나 선뜻 바람이 불 때마다 입맞춤하신다

후두둑 후두둑

그리움도

오늘 지고 말거다

(113)

그이는․6

변덕맞은 그이는

설움으로 빚은 눈물이 가랑잎처럼 바삭하게 마르고

애증의 한파도 다 건너선 지금 갑자기 펑펑 목놓아 운다

이상도 하여라

차갑게 얼은 눈물이 이리 포근할까

(114)

114

그이는․7

나는 그이가

하늘로부터 오시는 것임을 안다

처음 그이의 입술을 맞이한 윗가지의 잎들부터

부끄럼에

빨갛게 홍조를 띄우는 것만 보아도 그것을 알 수 있다

(115)

그이는․8

자발없는 짓이지 아지랑이를 꾀어선

이른 봄 어느 들녘 종일 쏘다니다 오셨나

파랗게 입술 얼어버린 저 아지랑이 좀 보아

(116)

116

그이는․9

어둠의 끝 고요의 시간 숲속 모든 잎새들 머리 숙여 기도 할 때면

기척 없이 나타나

심연의 갈증까지 달래 주시곤

햇님 볼세라

또르르 굴러 사라지는 순수함의

그이

(117)

그이는․10

고요하기만 한 시골 적막감 더해 가는 비둘기 울음소리…

그래

휘황한 네온과 락음악 늪처럼 빠져드는

*롱플레잉 게임에 취한 그이의 가슴에서

새싹 움트는 소릴 듣기에는

봄은 아직 이른 게야

* 롱플레잉 게임 : 방금 한 게임의 내용을 저장하고 다음에는 (처음부터가 아니라) 저장된 내용 이후부터

(118)

118

그이는․11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리고 쓰린 그리움이 뉘겐 들 없으리

홀로 외로운 밤 인 양 비바람으로 몸부림치던 그이가 기대 잠든

담장 너머 목련이 꽃잎 다 떨군 목련이

처연히 웃고 섰다

(119)

그이는․12

꽃봉오리 부풀던 밤 손 보듬고 지샌 그일

꼭두각시 광대놀음 넋 나간 외도,

꽃잎 다 지도록 취해 있다가

녹음 시퍼런 저 숲 어디서 찾나 메아리만 살이 되어 박힌다

그리운 그이 야속한 그이

* [시인들의 반란, 너른고을 호박씨까기]

너른고을문학 퍼포먼스 공연을 마치고

(120)

120

그이는․13

비는

고기압과 저기압이 마주칠 때 내리는 거라고

너른고을문학모임 이종남 회장님이 친절히 설명을 해 주실지는 몰라도,

혹은 사람이 울어서 비가 내린다면 그 양이 얼마나 되겠느냐고

천수답 바라보는 허정분 시인님이 핀잔을 주신다 해 도

허구헌 날 내리는 비를 보아

그이가 나를 몹시 보고파 하시는 걸 느낄 수 있다

적어도 내겐 그렇다

(121)

그이는․14

이제 가을이 깊었습니다 산다는 것은 너무도 모질어서 많은 그리움의 시간들을

혹은 울며 혹은 잊은 척 딴청하며 그렇게 지내왔습니다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을 당신이듯 세월이 가도 잊혀질 리가 없는 당신께 이렇듯 고별의 글을 쓰는 것은 아직도 당신의 흉을 보기엔 당신의 사랑에 대한 내 확신이

자신감을 잃은 때문인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시려진 달처럼…

보이지 않는 떠날 채비가

내게도 필요한 가을임을 나는 압니다

곱게도 물들지 않고

(122)

122

그이는․15

당신의 음성 지극히 은밀함은 내 가슴이 더운 까닭입니다

별빛 저리 영롱해 보임도

두 눈 가득 고인 눈물에 인합니다

소슬 부는 가을바람이

사랑에 취한 나를 깨우지 못 합니다

귀또리 더불어 찬미하는 이 밤 사랑을 고백합니다

당신께

(123)

그이는․16

먼발치에서 딴청부리던 그이도 명절이 되면

한달음에 고향으로 달려가 귀로의 나를 채근하신다

고향어귀에 도달할 즈음 또다시 코흘리개 적 추억으로 달아나선 썰매 타며 나를 손짓하실 게다

늘 그랬듯이

(124)

124

그이는․17

어쩌란 말이냐

봄날 아지랑이처럼 하늘거리며 꿈결인 듯 일렁이는 네 모습만 보아도 가슴은 벌써 두방망이질을 치는데 초승달 같은 눈썹 찡긋거리며 호수 같은 눈동자로 눈웃음치면

어쩌란 말이냐

문득 눈빛만 스쳐도 전율하는 내 가슴에

두 손 턱에 괸 채 별무리같이 아득한 눈길을 들어 내 동공 저편 욕망까지 넘겨다보면

어쩌란 말이냐

환청인 듯 네 음성 귓가에 맴돌아 지난밤도 뜬눈으로 새운 내게 단내 몰칵 풍기는 붉은 입술로

“나 어떻게 해” 하고 속삭여 버리면

(125)

진실은 감춘 채 짓궂게도 사랑의 무게만 저울질 하려거든 차라리 날 죽여라

(126)
(127)

유대형 詩集

시 랍시고 끄적거리는 놈 이 쓴 글

━━━━━━━━━━━━━━━

2007년 2월 2일 초판인쇄 2007년 2월 8일 1쇄 발행 지은이 / 유대형

펴낸이 / 이경우 펴낸곳 / 도서출판 문예촌

(128)

참조

관련 문서

메모리 저장 중지(용량 초과) 내부 메모리에 용량이 초과되어 저장이 중지되었습니다.. 메모리 저장 중지(파일수 초과) 내부

눈과 화살 사이에는 무한개의 점이 있 으므로 눈은 그 무한개의 점의 위치를 하나하나 넘기면서 눈에 가까이 오는 화 살을 본다.. 아무리 화살이 눈에 접근한다 할지라도

action plan)에 따라 천식의 악화 시에만 고용량의 흡입스테 로이드 또는 경구용 스테로이드를 간헐적으로 투여해도 충 분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즉 경증 천식

이 때 보는 아래가 인장, 위는 압축이 되며 그 중간에 nn축은 인장도 압축 도 아닌 길이의 변화가 없는 곳이 있게 되는데 이면을 중립면이라 한다.. 이 중립면(中立面)상의

밤새 내린 비 때문에 놀이터에 나온 동네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으로 생각한 경찰은 그 발자국의 주인이 용의자(일명 거미아저씨)가 분명하 다고 판단, 그를 찾기

대학교수, 연구자, 현장 전문가 및 활동가, 중앙 및 지방 공무원, 농어촌 주민, 관련 학회, 전국농어촌지역군 수협의회 등 다양한 분들이 농어촌지역정책포럼에 참여하여

공동 번영과 세계 평화를 위해 힘을 모으고 있습니다..

본 연구는 독립변수로 영성 리더십을, 매개변수로서 일터영성과 직무열의, 그리고 결과변수로서 선제적 행동을 제시하고 각 변수들에 대한 기존 연구 들이 어떻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