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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 딴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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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차이는 나겠지만, 어느 때부터 기억을 할 수 있고, 얼마나 할 수 있는지가 늘 궁금하였다. 그래서 가장 오래된 기억이라고 생각 되는 것을 잊어버릴까봐 늘 되새겨 보고는 했었다.

어린 시절엔 그게 무슨 기억일까 궁금하기도 했던 희미한 장면 하 나, 나는 어머니 등에 업혀 있었고 그 등에서 보았던 옛날 역전의 모 습이 나의 가장 오래된 원초적인 기억이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누구와 나누어 볼 수도 없었고 남이 웃을 것만 같아 혼자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커서 어머니에게 듣기로는 내가 아기 일 적에 어머 니께서 나를 업고 다니시며 장사를 했다고 하셨다. 철에 따라 참기름 이나 옷감을 이고 다니며 그 때는 주로 기차를 이용하여 이 고장 저 고장을 다녔다고 하셨다.

그럼 희미한 그 장면이 정말 나의 아기적의 기억인가? 하면서도 늘 반신반의하였는데 이번 겨울방학 대학원에서 연수를 받는 중, 한 교수님께서 강의 시간에 어린 시절의 많은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하 시며, 7개월 정도의 아기 때 모든 식구들이 둘러앉아 당신의 재롱을 보며 웃는데 힘이 들어도 참고 아버지의 부축에 무릎을 흔들며 재롱 부렸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강의를 듣는 선생님들은 모두 에이 하면 서 믿지 않으려 하였지만 나는 그 이야기가 내심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나는 우리 나이로 한 두 살까지 어머니가 업고 다니셨다니까 그 기억도 맞는가보다. 더구나 나는 어머니가 아기 때 늘 업고 다니셔서 다리가 곧지 않고 약간 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그 이후의 많은 기억은 모두 사실일 터였다.

특수아 교육을 받으면서도 특수아들은 장기 기억은 잘하지만 단기 기억은 아주 어렵다는 강의도 들었는데 그럼 나는 특수아 수준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가까운 일들은 기억해야 할 것들마저 까마득히 잊어서 스스로를 당황하게 하는 적이 많은데, 초등학교 때 의 친구들을 만나면 내가 그 시절의 일들을 많이 기억하고 있는데 대 하여 많이 놀라고 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식구들과 이야기를 할 때 내가 무언지 잘 모르는 기억들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면 나보다 다섯 살, 열 살이 위였던 언니들과 어머니께서 증언을 해주셨던 일들이 많 았다.

그리고 가장 잊을 수 없는 유년기 숲 속 외딴집의 기억.

내가 태어나기 전 시내에 살던 우리 식구는 6.25가 터지자 멀리 피 난도 못 가고 어머니가 장사하시어 번 돈으로 마련한 우리 논이 가까 운 산자락의 외딴집으로 피난을 하셨단다. 6. 25는 끝났지만 시내의 집은 폭격을 맞아 갈곳이 없어졌다고 하였다. 나와 동생들도 그 외딴 집에 살 때 태어났으며 아랫동네에 새로 집을 짓고 이사하기 전까지 그 외딴집에 눌러 살게 되었다. 내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아랫집 으로 이사했으니 아기 때부터 일곱 살 전까지의 기억이 그 외딴집을 배경으로 살아 있는 셈이었다.

마음껏 뛰어다니던 그 산자락의 끝의 논과 밭, 풍부하고 깨끗한 저 수지와 주변에 피어나던 꽃 잔치. 그 저수지의 물을 담고 흐르던 큰 냇물에 어른들 따라가 멱 감던 일들과 산자락 끝에 솟아나던 여름이 면 어름처럼 차갑던 옹달샘. 언제나 신선한 향기로 가득하던 숲 속의 기억은 내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풍경화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나는 혼자 있는 것에 익숙하고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며 전혀 심심한 줄을 모르는데, 어머니가 동생업고 일보러 나가 시면 어린 시절부터 산자락의 외딴집에서 혼자 집 보며 놀던 훈련이 되어서 인가보다. 그러기에 초임교사 시절 산골학교에서 삼 년씩이나 근무할 때 늘 혼자 학교를 지키곤 하면서도 그 주체하기 어렵다는 젊 음을 산과 마주하며 전혀 지루해 하지 않고 지내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 어릴 때는 하루종일 혼자 외딴집에 있는 것이 싫어서, 점 심시간에 준비물을 가지러 온 언니를 못 가게 하려고 울고 보채며 따라가려고 했다.

언니가 목이 마르니 샘에 가서 물만 마시고 와서 너를 데리고 학 교에 가마

하여 기다리고 있는데 언니가 안 와서 샘에 가보니 언니는 온데 간 데 없어지고, 어린 마음에 표현할 길 없던 배신감을 느끼며 울었던 생각을 잊을 수가 없다.

하루는 어머니가 장에 가시고 두 살 아래 동생을 보고 있는데 동생 이 엄마를 찾으며 울기에 동생을 업고 엄마 마중을 나가야겠다고 생 각했다. 한 다섯 살 아이가 세살 동생을 업으려니 갖은 애를 다 써도

잘 업어지지가 않았다. 한참을 둘이 진땀을 빼고 간신히 업어서 막 나서려는데 어머니께서 문을 열고 들어오시어 그 허탈하고 실망했던 감정이 생각난다.

어머니가 장에 갔다 오실 때 막 뛰어 내려가 마중하면 어머니께서 어디 아프니? 왜 그렇게 숨이 가쁘니?

하고 염려를 하시어 그 뒤로 어머니의 관심을 받고 싶으면 숨가쁜 소리를 일부러 내며 혼자 버려진 느낌의 방어기제로 사용하던 일도 가끔 있었다.

어느 날은 혼자 집을 보다 아버지가 쥐를 잡으려고 놓은 네모지고 하얀, 껌처럼 생긴 쥐약을 껌 인줄 알고 먹어 어머니를 놀래 키고, 어 머니가 너무 놀라는 것을 보고 겁이 나서 작은언니가 줘서 먹었다고 핑계를 대어 어머니는 혼비백산하여 학교로 달려가셨다. 마침 친구에 게 맞아서 울고 있던 언니를 죽어 가는 줄 알고 들쳐업고 나오다 언 니는 쥐약을 먹은 것이 아님을 알고 다시 오신 어머니께서 그제야 나 에게 마루 끝에서 이것저것 토하는 것을 먹이셨던 일 등이 장면까지 생생하다.

한번은 큰언니가 아는 할머니를 따라 산에 가서 버섯을 따와 식구 가 먹었는데 독버섯이어 온 식구가 모두 토하며 죽을 뻔한 일, 그래 서 그 뒤로 한참을 우리 식구는 버섯 반찬을 안 먹은 일도 있었다,

그리고 이상한 아픔의 체험이 한가지 있었다. 방에 누워있는 내 몸 이 뒤틀리는 듯하고 몽롱하여 꿈과 같은 상태가 계속되며, 입술은 말 라서 아프고 안으로 말리는 듯한 이상한 병을 앓고 있었다. 침을 맞

아도, 약을 써도 안되고 그 때 병원도 흔치 않은 어두운 시절이라 별 방법을 못 찾고 어머니가 안타까워하고 계시다 이웃 동네에 점쟁이 할머니를 어머니께서 찾아가니 벌써 어머니를 보자마자

아이 살리러 왔어? 가봐

하며 집에 오시더니 아버지께서 쥐구멍을 막는다고 장작으로 거꾸 로 막아 막아놓은 것을 찾아내며 옛날 말로 동티 났다는 거였다. 그 래서 그 할머니의 동티 를 푸는 비방을 하고 나서 살아난 이상한 병 을 내가 앓았다는 거였다.

내 위로 언니와 오빠를 한 명씩 잃은 것을 보면 어머니의 정성이 나 대처가 늦었으면 지금 이렇게 살아 있기도 힘들었겠구나 하는 생 각까지 들었다.

다섯 살 아래 막내 여동생이 태어나던 날 자다 말고 일어나 신기한 듯 잠도 안자고 동생과 함께 아기를 들여다보던 일과 내 첫 공포의 대상 털보의 기억은 생각하면 웃음까지 자아내게 하였다.

아랫마을에 새로 지은 집으로 이사하기 위하여 안방을 새로 이사올 사람들에게 비워주고 건넌방에 잠시 살 때, 이사온 집 아들의 얼굴에 큰 검은 점이 있었고 그 점에 털이 나 있어 내가 털보라고 놀렸다.

나보다 한 두 살 많은 그 아이가 때리려고 쫓아와서 도망 다니던 논 둑 길과 밭둑 길의 숨가쁨이, 사람에 대한 최초의 무서움의 기억이었 다.

마루의 기둥에 큰 띠로 줄을 그네처럼 매어 언니들이 그네 태워 주 던 일, 마루에 앉아 어머니나 아버지 오시기 기다리다 아버지의 등짐

안에서 나오던 새로운 물건이나 군것질 거리에 좋아했던 일 등, 그 숲 속 외딴집과 관련된 모든 일들이 아련한 기억 속에 살아 있어 내 삶의 바탕 그림이 되어주고 있다.

언젠가는 글로 써보아야지 생각하고, 그림으로 그려보게 해주며, 그 래서 세월이 가도 정말 잊고 싶지 않은 소중한 장면들이 있다는 것에 행복해 한다. 다른 사람들한테도 그런 잊고 싶지 않은 외딴집이 한 채씩 있을까? 지금은 사라져 버렸을 그 외딴집을 멀고 희미한 기억의 창고에서 추억으로만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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