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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미술의 한 단면으로서의 이두식의 회화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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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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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투고일_2014.10.10. 심사기간_2014.11.01-24. 게재확정일_2014.12.09. 한국현대미술의 한 단면으로서의 이두식의 회화세계 The paintings of Lee Dooshik as a cross-section of Korean contemporary Art 임두빈, 단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Im, Doo Bin_Dankook University Graduate School of Culture and Arts. 차례. 1. 머리말 2. 생애 (1947년~2013년) 3. 전기 (1970년대 초~1987년) 4. 후기 (1988년~2013년) 5. 맺음말 참고문헌. 기초조형학연구 Vol.15 No.6. 551.

(2) 한국현대미술의 한 단면으로서의 이두식의 회화세계 The paintings of Lee Dooshik as a cross-section of Korean contemporary Art 임두빈, 단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Im, Doo Bin_Dankook University Graduate School of Culture and Arts. 요약. 이두식(李斗植)의 회화세계(繪畵世界)를 살펴보는 것은 한국현대미술의 한 단면을 살펴보는 것과도 같다. 본고 는 현상학적 방법으로 이두식의 회화세계를 살펴보았다. 이두식은 1947년 경북 영주에서 태어나 1970년대 초. 중심어. 에 화가로 출발한 이후, 2013년 사망 시까지 끊임없이 그림을 그린 다작(多作)의 화가였다. 그의 회화세계는 시기. 이두식. 별로 전기(前期)와 후기(後期)로 크게 대별 된다. 전기는 1970년대 초부터 1987년까지이고, 후기는 1988년부. 한국현대미술. 터 2013년까지이다. 1970년대는 화면에 다양한 이미지들을 가득 등장시키는 다소 ‘설명적인 초현실주의’ 작업. 초현실주의적. 을 했던 기간이고, 1980년대(정확히 말하면 1987년까지)는 화면에 빈 공간을 많이 남기고 이미지를 절제해서. 표현주의적 추상화. 등장시킨 ‘함축적 초현실주의’ 작업을 한 기간이다. 후기(後期)는 이두식이 종래의 작업 방향을 크게 바꿔 그린 1988년부터 2013년 세상을 떠날 때 까지 지속되었던 ‘표현주의적 추상’의 시기이다. 이 시기 안에서도 1988년 에서 1997년까지는 ‘표현주의적 추상화’임에도 화면에 인물이나 사물의 이미지가 부분적으로 등장했던 기간이 고, 1998년에서 2013년까지는 화면에 어떠한 구체적 대상의 이미지도 등장하지 않는 완전한 표현주의적 추상 의 기간으로 변화를 살펴 볼 수가 있다. 이두식의 초현실주의적 화풍은 서구(西歐)의 초현실주의와도 다른 것 이 었고, 그의 표현주의적 추상화도 서구의 그것과는 다른 개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1998년 에서 2013년 세상을 떠날 때 까지 그의 회화 작업이 일정한 형식적 패턴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은 상당한 아쉬움으로 남는다.. ABSTRACT. To examine the painting of Lee Dooshik is much like looking at a cross-section of Korean contemporary art. This article has taken a phenomenological look at the painting of Lee. keyword. Dooshik. Lee Dooshik was born in 1947 in Yeongju, Gyeongbuk, and from the time he started. Lee Dooshik. painting in the early 1970's until his death in 2013 he was a ceaselessly prolific painter. His Korean Contemporary paintings may be generally classified into early and later works. His early works are from 1970 Art to 1987, and his later works are from 1988 to 2013. The 1970's was somewhat of a “detailed surrealism. surrealism” period where he filled the paper with various images, while the 1980's (until 1987. expressionist. to be exact) was a period of “implicative surrealism” where much of the space in his paintings. abstraction. was left empty and images were moderate. In his later period, Lee Dooshik's paintings took a turn from his conventional works, and 1988 to his death in 2013 was continuously his “expressionist abstraction” period. Within this period of “expressionist abstractionism,” from 1988 to 1997 the images of figures or objects appeared in fragments, and 1998 to 2013 may be seen as the period where images of a definite subject do not appear and there is a shift into pure expressionist abstraction. Lee Dooshik's surrealist style is different from that of Western art, and his expressionist abstractionism also has a personality that differs from that of the West. Still, it is regrettable that his paintings from 1998 until his death in 2013 could not break free from the restraint of fixed formal patterns.. 552.

(3) 1. 머리말 화가 이두식이 작년( 2013년 2월 23일 )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 그의 나이 66세였다. 그는 생전에 왕성한 작품 활동으로 한국 현대화단에 무시 못 할 흔적을 남긴 사람이다. 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두식의 작품 활동은 출발 당시 한국화단의 지배적인 회화 경향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70년대 한국화단은 서구의 미니멀아트에서 영향을 받은 미니멀적 단색주의(單色主義) 회화가 주류. 를 이루며 화단을 이끌고 있었다. 이 당시 많은 화가들은 집단 최면이라도 걸린 듯이 너도나도 ‘미니. 멀적 단색주의’ 회화에 빠져들고 있던 시기였다. 그런데 그는 그러한 경향과 전혀 다른 초현실주의적 (超現實主義的) 형상성이 있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 현대미술이 그 출발서부터 서구 현대미술의 영향 하에 있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이상할 정도로 다른 여러 현대미술 경향 에 비해 초현실주의 미술양식을 구사하는 화가는 매우 희소했었다. 그리고 그것마저도 초현실주의 사상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다분히 외적 형상성이 준 감각적 공감에서 비 롯된 것이었다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초현실주의적 양식을 구사하는 화가가 극소수 존 재했었다는 사실은 의미 있는 현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두식이 초현실주의를 어떻게 접근하고 이해했는지는 본론에서 자세히 살펴 볼 생각이다. 그는 80년대 중엽에 들어서면서 자신의 초현실주 의적 화풍에 조용한 변화를 주게 된다. 한국 화단에서 80년대는 소위 사회참여적 미술이 거세게 대 두하며 화단을 휩쓸고 있을 때였다. 이두식은 이러한 환경에도 휩쓸리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독자 적인 양식을 구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88년에 또 한 차례 큰 변화를 보이게 되는데, 이것이 그 의 표현주의적 추상 양식의 ‘축제’ 시리즈 작품들이다. 이후 그는 이러한 양식의 회화를 죽을 때까. 지 그렸다. 이제까지 이두식의 회화세계에 대한 글은 개인전 서문이나 언론매체의 시평 등으로 존 재해 왔지만, 정작 객관적인 관점에서 본 그의 회화세계에 대한 연구논문은 전무한 상태이다. 그가 세상을 떠나 없는 지금, 이제는 그의 회화세계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담은 연구논문이 나와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그런 필요에서 본 논문을 쓰게 되었다. 우선 그의 생애를 개관하고, 작품 활동을 중요한 변화가 있었던 전기(1970년대 초~1987년)와 후기(1988년~2013년)로 나누어 연구해 볼까 한다. 우리는 이러한 연구를 통해 한국 현대 화가들이 공통으로 처 했던 문제와 그 대응 방식의 한 양상을 살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2. 생애 (生涯 1947년~2013년) 이두식은 1947년 경북 영주에서 사진관을 하던 이중강씨와 그의 아내 선경윤씨의 3남2녀 중 막내 로 태어났다. 영주는 주위에 200m~300m정도 되는 구릉형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곳이다. 이러 한 환경은 모나지 않고 매사를 순리대로 풀어나간 원만한 그의 성격 형성에 일정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1) 1970년대 이전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에서 화가가 되겠다고 하면, 거의 대부분 집안의 완강 한 반대를 경험하기 마련인데 이두식은 아니었다. 그는 화가로 나가려다 뜻을 이루지 못한 아버지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매년 아버지와 함께 서울에서 열리는 국전을 관람하며 화가로서의 꿈을 키워 나갈 수 있었다. 이두식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당시 시골은 지금 보다 몇 배나. 살기 어려웠다. 먹고 살기도 힘든데 자식에게 국전을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서울로 올라가는 부모 는 거의 없었고 학교에서도 단체관람 행사를 마련한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그림 감상 은 시골사람들에겐 사치였다, 그런 때 영주 소백 산골의 초등학생이었던 내가 아버지와 국전을 보러. 다녔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2) 화가 이두식이 어린 시절 매년 국전을 보며 느 꼈던 감동과 영향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게 해준다. 이런 주위의 좋은 환경이 그를 일찍이 화가 로 나갈 결심을 하게 해주었고 보이지 않게 미적 안목을 키워 주었을 것이다. 이두식은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내가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것, 이것으로 인해 이미 나는 운명적으로 그림을. 그리도록 결정지어 졌다는 생각도 든다.”3) 그의 아버지 이중강은 그에게 공원의 정자를 그려오라는. 1) 필자가 생전에 가끔 만나면서 느낀 이두식의 성품이 그랬다. 그는 사람이나 작품이나 사물을 귀천의 구별을 지어 차별하는 것을 좋 아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2) 이두식, 『고릴라 로마역에 서다』, 정음, 2005, p.32 3) 앞의 책, p.33 기초조형학연구 Vol.15 No.6. 553.

(4) 과제를 내주기도 할 정도로 아들의 그림 공부에 적극적이었다.4) 이런 집안의 성원 속에서 이두식은 고등학교를 서울예고에 들어가게 되었다. 서울예고에서 그는 교 사 백문기로부터 소묘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고, 이 영향은 훗날 화가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지속 적으로 그에게 소묘작업을 하게 했다. 특히 그가 화가로 첫 출발을 했던 1970년대 초현실주의적 작 품의 소묘적 처리는 수업기의 영향이 절대적 이었다고 여겨진다. 당시 서울예고에 있었던 김창열 선 생으로 부터는 “손재주에 휩쓸리지 말아야 한다....재주를 앞세우지 마라. 재주는 눌러야 한 단계 높. 은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재주 있는 그림보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게 좋은 그림이다. 깊이가 있어야. 해. 표피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5) 는 충고를 자주 들었다. 이런 충고는 이두식이 당시 고등학생의 나 이였음에도 그림에 대해 많은 점을 생각하게 해주었을 것이다. 서울예고를 졸업한 후 그는 그토록 열망하던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 진학하게 되었다.6) 당시 홍익 대학교 회화과에는 유영국, 권옥연, 김훈, 임완규, 김창억, 박서보, 하종현교수등 한국 현대미술의 중추적 화가들이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이두식이 현대미술의 새로운 사조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들 회화과 교수진의 영향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두식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 고 있다. “나는 그분들의 어깨너머로 앵포르멜의 제작과정과 추상미술에 대한 토론을 들으면서 현 대미술을 어렴풋하게나마 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젊은 내가 현대미술을 지향하게 된 동기였 습니다.”7). 20대 나이의 이두식이 홍익대학교를 다녔던 60년대 후반은 앵포르멜 외에 개념미술이나 행위미술, 팝아트, 미니멀아트 등의 다양한 현대미술 사조가 한국미술계에 밀려와 미술학도들에게 충격과 혼 란을 주었을 때였다. 이런 다양한 현대미술 경향의 유입은 진지한 미학적, 역사적 고찰이 결여된 상 태에서 피상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더욱 충격과 혼란이 컷을 것이다. 이두식도 이러한 상황 속 에서 이것저것 새로운 실험을 해보았지만 심리적으로 혼란스럽고 갈등만 심할 뿐이었다. 8) 더욱이 그가 대학 3학년 때는 집안 형편이 매우 좋지 않게 되어 그를 더욱 어렵게 했다. 이 와중에서도 그 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입선을 했고 1968년에는 신인예술상 공모전에서 장려상, 그리고 신상전 에서 대상을 수상하면서 절망 속에서 일어설 수 있는 큰 힘을 얻게 되었다.9) 대학 졸업 후, 그는 ROTC장교로 임관하여 군 복무를 했다. 제대 후엔 홍익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했 고 회화과 조교생활을 했다. 이 시기에 그는 비로소 자신이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하는지를 깨닫게 되 었다. 이두식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회화과 조교생활을 하면서, 차분히 다시 시작한. 다는 각오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때가 1970년대 초인데, 이 시기에 나는 비로소 나만의 회화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깨닫고 재출발을 했던 셈입니다.(이두식 인터뷰)”10). 1970년대에 들어서서 이두식은 비로소 화가로서 본격적인 첫출발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생활은 무척 어려워서 1973년부터 그는 소위 ‘이발소그림’이라 불리는 수출화를 그려 가족 의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면서도 그는 퇴근 후, 밤에는 자신의 그림도 그렸다. 외국 바이어의 주문에 따라 끊임없이 그려내야 했던 이발소그림을 그는 5년 동안이나 그렸다. 이 경험이 그에게 부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로인해 그는 대상을 빠르게 포착하는 순발력과 화면구도를 빨리 잡는 힘을 기를 수가 있었다.11) 화가로서 첫 출발을 했던 1970년대 초에 그는 초현실주의적 화풍의 그림을 그렸다. 그룹전에 이런 그림을 여러 차례 선보이면서 이두식은 그 개성적인 화법으로 주목을 받고, 처음으로 1976년에 명 동화랑의 초대를 받아 개인전을 열게 되었다. 처음 연 개인전 이었는데도 작품이 모두 팔리는 성과 를 거두었다. 한국 현대미술에 있어 이 시기는 서양의 미니멀 아트에서 영향을 받은 미니멀적 단색. 4) 앞의 책, p.33 참고 5) 앞의 책, p.64 6) 이두식外, 『이두식TEXT』, 홍익대학교현대미술관펴냄, 2013, p.44 참고 7) 앞의 책, p.45 8) 앞의 책, p.46 참고 9) 앞의 책, p.45 참고 10) “이두식과의 대화”, 홍익대학교 현대미술관 제2관 세미나실에서 이두식과 서영희의 인터뷰(2013년1월28일), 홍익대학교 현대미 술관 자료에서 발췌 11) 이두식外, 『이두식TEXT』, 홍익대학교현대미술관펴냄, 2013, pp.37-39 참고 554.

(5) 주의 회화 경향이 화단을 지배하고 있을 때였다. 이런 시기에 지배적인 경향과는 전혀 다른 초현실 적 경향의 그림을 그렸다는 것은 이두식의 개성적 작가의식이 얼마나 강한 것이었는가를 말없이 드 러내고 있다. 그는 후에 모교인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 교수로 들어가서 미술행정가로서도 활발히 활동하며 정년퇴임 할 때까지 끊임없이 작업에 매진하여 자기세계를 심화시켜 온 사람이다. 1970년 대에 이두식이 그렸던 초현실주의적 화풍은 조금씩 변모되어 1980년대의 함축적이고 상징적인 작 품들을 낳게 되었고, 1988년에는 자신의 그림에 큰 변화를 주어 표현주의적 추상화를 그리게 되는 데, 이 새로운 양식을 그는 죽을 때까지 확산 시키고 심화 시켰다. 그는 2013년 2월 정년퇴임 개인 전을 홍익대학교 현대미술관에서 연 상태에서 새벽에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3. 전기(前期 1970년대 초~1987년) 이두식이 화가로서 첫 출발을 했던 때는 1970년대 초반 이었다. 당시 20대 중반의 나이였던 그는 초 현실주의적 화풍을 구사하며 본격적으로 화단에 발을 내디뎠다. 어떤 이는 그 이전 시기인 학창시 절의 앵포르멜적 그림과 기하학적 색면추상화가 있었던 실험기를 첫 출발로 보기도 하는데, 필자 는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시기는 혼돈의 연습기이지 결코 화가로서의 본격적인 출발 시기는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두식은 작년 1월에 서영희와의 인터뷰에서 이때를 다음과 같이 회고한. 바 있다. “홍대를 다니고 졸업할 즈음의 미술계는 이런저런 미술사조들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어서 무척 혼란했던 시기였습니다....뭔가를 좀 시도해 보면, 어디선가 본 듯한 것이 되어버리고, 다시 잔 뜩 긴장해서 시도해 보면 여전히 뭐가 뭔지 잘 모르는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젊은 나이의 미술학 생들이 다 겪는 과정이었겠지만, 유독 내게는 혼돈스럽고 갈등도 심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손재주. 많다고 자만하고....건방졌던 일들이 후회가 된 시절이었습니다.”12) 이두식이 겪었던 이와 같은 학창 시절의 혼돈과 갈등의 시기를 작가로서의 첫 출발기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시기는 어디까지나 자기세계가 형성되기 전의 수업기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이두식이 본격적으로 화가로서 첫 출발을 했던 시기는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온 후, 1970년대 초에 초현실주의적인 그림을 그리기 시 작했을 때라고 말할 수 있다. 이두식도 스스로 말하기를 “화가로서의 나의 첫 출발점은 초현실주의. 였다.”13)라고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이두식이 화가로서 본격적인 첫 발걸음을 옮길 때, 왜 극사실적인 초현실주의 양식을 선택했는가는 어느 정도 그의 말에서 유추해 볼 수가 있다. 그는 학창시절부터 사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소묘. 력이 남달리 탁월했던 사람이다. 그는 인터뷰에서 “처음부터 소묘에 대해서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가진 것은 소묘력 하나뿐이라고 말했을 정도이니까요.....그래서....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손으로 그리는 소묘를 가지고 극사실 회화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림의 주제를 초현실주의로 해석 하기로 했습니다.”14) 라고 말한바 있다. 이두식은 소묘력이 탁월 했던 데다가 현대미술을 하고자 했 기에 현대미술의 중요한 사조의 하나였던 초현실주의적 회화를 선택했던 것이다. 더욱이 초현실주 의 미술에는 극사실적인 표현 경향도 있어 그러한 점이 묘사력이 뛰어났던 이두식에게 극사실적 초 현실주의로 향하게 한 계기가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두식이 초현실주의의 이념과 역사적 위상 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는가는 알 수가 없다. 그에 대해 언급한 게 없기 때문이다. 많은 한국의 화가들이 서양의 현대미술을 받아들이면서 대부분 그 이념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없이 감각적이고 피상적인 차원에서만 접근한 면이 없지 않은데, 이두식이 초현실주의 정신에 대해 언급한 기록이 전 혀 없는 것을 보면 이두식 에게도 그런 면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니면 이두식은 지적인 측면에서 초현실주의에 접근했던 것이 아니라, 타고난 본능적 기질 면에서 초현실주의와의 친근성 을 느끼고 초현실주의에 접근했던 것이 아닐까?. 초현실주의(Surréalisme)는 프랑스에서 20세기 초에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에 의해 주창 된 혁명적인 예술사조이다. “앙드레 브르통은 이성과 논리라고 하는 종래의 합리적 세계 이해의 허. 12) “이두식과의 대화”, 홍익대학교 현대미술관 제2관 세미나실에서 이두식과 서영희의 인터뷰(2013년1월28일), 홍익대학교 현대미 술관 자료에서 발췌 13) 이두식, 『고릴라 로마역에 서다』, 정음, 2005, p.187 14) “이두식과의 대화”, 홍익대학교 현대미술관 제2관 세미나실에서 이두식과 서영희의 인터뷰(2013년1월28일), 홍익대학교 현대미 술관 자료에서 발췌 기초조형학연구 Vol.15 No.6. 555.

(6) 구성(虛構性)을 직시하고, 이성과 논리의 울타리 넘어 무한한 넓이로 존재하는 신비(神秘)와 불가 사의(不可思議), 무의식(無意識)의 세계를 깊은 경탄의 눈으로 주목했다. 그리고 종래의 서구 학문 이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그 세계를 최초로 학문 연구대상으로 받아들인 프로이트(S.Freud)의 정신. 분석학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15) 앙드레 브르통은 초현실주의 선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 리는 아직도 논리의 지배 하에서 살고 있다...(중략)...아직도 유행되고 있는 저 절대적 합리주의는 우 리의 경험에 밀접하게 의존하고 있는 사실만을 취급하기를 허락한다...(중략)...경험 자체가 이제 한 계를 설정하고 있다는 것을 부언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경험은 새장 속에서 빙빙 돌고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 밖으로 나오기란 점점 더 어려워지는 셈이다...(중략)...문명의 체제하에서, 또 진보라는 구 실 아래서, 인간은 미신이라거나 망상과 같은 일체의 것을 정신세계로부터 추방하기에 이르렀고, 또 한 실용에 적합하지 않은 일체의 진리탐구의 양식을 추방하고 만 것이다. 그런데 최근 지적세계의 일면(이것은 내 생각엔 단연코 제일 중요한 면이라고 생각되지만 별로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지 못 했다.)이 햇빛을 보게 된 것은 표면상 우연 같지만, 이 점에 있어서는 프로이트의 발견에 감사해야 한다. 이 발견을 신념으로 삼고 마침내 일련의 견해가 피력된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 탐구자들은 이 견해 덕분으로 더 이상 현실을 참고할 것 없이 단지 그가 탐구한 것만을 앞으로 밀고 나가면 될 것 이다.”16). 초현실주의는 프로이트(S. Freud)의 정신분석학에서 영향을 받고, 무의식 세계(無意識 世界), 불가 사의(不可思議)한 세계를 표현할 것을 주장하면서 상상력의 해방을 부르짖었던 20세기 최대의 혁 명적 예술사조 였다. 이들은 이를 위해 꿈이나 심리의 자동기술법을 통해 무의식의 세계, 불가사의 한 세계를 표현 하고자 했다. 초현실주의는 단지 예술에서의 혁명적 변화만을 의도했던 것이 아니 라, 소위 이성과 합리적 사유만을 중요시한 낡은 유럽정신 전체의 혁명적 변화를 꾀 했었다. 이렇게 초현실주의가 지향한 논리적, 합리적 사유의 부정과 무한한 상상력의 예찬이, 이두식의 기 질이 지닌 논리에 대한 거부감과 상상력에의 본능적 신뢰와 상당히 유사한 바가 있었기에, 이두식 이 작가생활 초기에 초현실주의적 작업을 시작했던 것이 아닌가한다. 17) 이두식이 화가로서 첫 출발을 했던 초현실주의적 경향의 작품들은 종이에 연필로 그린 기이한 극사 실적인 그림이었다. 현실과 상상이 기묘하게 혼재하는 그의 작품들은 미니멀적 단색주의 회화가 지 배하던 1970년대의 한국화단에 신선하고 개성적인 작업으로 눈길을 끌었다. 1972년에 그가 그린 작품 <생의 기원(그림 1)>을 한 점 보자.. <그림 1> 이두식, 생의기원, 80.3x100cm, 종이에 연필, 1972. 15) 임두빈, 「초현실주의-존재의 전체상을 향한 신비와 무의식에의 탐험」, 『미술광장』, 1994년9월호, pp.32-39 16) André Breton, 초현실주의 제1차 선언, 1924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外, 『다다/쉬르레알리즘 宣言』, 송재영 역, 문학과 지성사, 1987, pp.117-118 ) 17) 이두식, 『고릴라 로마역에 서다』, 정음, 2005 참고 556.

(7) 화면에는 인체의 형상과 풍경과 새와 기호들과 수수께끼의 형상들이 다양하게 등장하고 있다. 이들 은 서로 결합되거나 상호 침투하면서 변형되어 기묘한 이미지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 그림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화면 오른쪽 맨 위에 그려진 산과 구름이 낀 하늘이 전개되는 풍경이다. 산은 바다인지 땅인지 구분이 안가는 애매한 평면 위에 솟아 있는데, 이 한 조각의 풍경은 또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면 변형되어 마치 화면 위에 붙여놓은 부정형한 파라핀 덩어리나 무채색의 플라스틱 덩어리처럼 입체적으로 돌 출되어 보인다. 이 덩어리의 왼쪽 가장자리 일부분에서 검정 색면(色面)이 뻗어 나와 마치 찌그러진 뿔 나팔의 실루엣인양 놓여있고, 그 아래에는 변형된 사람의 두상을 연상케 하는 모양이 이어지고 있다. 화면 왼쪽 공간에는 작은 크기의 무엇인지 모를 미지의 형태들이 다양한 모양으로 아련한 추 억속의 이미지의 파편들처럼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이미지의 파편들 속에 놀라서 입을 벌린 형태 의 동그란 가면도 그려져 있고, 알 같은 형상을 두 손가락으로 쥐고 있는 사람 손 모양도 그려져 있 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대지의 지층구조 같기도 하고 확대한 피부의 단면구조 같기도 한 형상이 가 로로 크게 배치되어 있다. 이 형상 밑에 난데없이 그려진 왼쪽 발의 모양도 그 갑작스런 등장으로 눈길을 끈다. 화면의 한 가운데에 그려진 둥근 형태는 작고 다양한 수수께끼의 물상들을 안에 지닌 채, 날개를 접고 내려앉은듯한 살찐 새의 모양을 보여 주고 있다. 한 조각의 풍경이면서 파라핀 덩 어리 같기도 한 형상 아래에는 그에 이어서 정밀하게 그린 새머리 모양이 등장하고, 새머리 모양 옆 에 약간의 간격을 두고 눈이 얼굴 가득 크게 그려진 기이한 사람이 등장한다. 작게 그려진 이 기이 한 사람은 몸의 윤곽선이 화면 아래로 이어져 내려오면서 그보다 큰 사람의 하반신으로 연결되고 있다. 화면의 맨 오른쪽에도 뛰어가고 있는 듯한 사람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하반신의 모양만 분 명할 뿐 상반신이 수수께끼의 다양한 이미지들로 연결되어 이루어져 기이한 느낌을 증폭 시키고 있 다. 하나의 이미지가 또 다른 이미지를 낳으며 다중이미지를 발생시키거나, 무생물과 생물의 이미 지가 하나로 연결되고, 수수께끼의 기호들이 난무하며, 식물과 사람의 이미지들이 특이하게 섞이어 연결되는 이두식의 이 작품에서 우리는 초현실주의의 데페이즈망(Dépaysement)과 편집광적 비평 방법(Paranoia Critical method)과 같은 화법적 특징들을 발견한다. 1970년대에 그는 <생의 기원>이란 제목으로 앞에서 설명한 그림과 같은 종류의 화면 가득 다양한 이미지들이 등장하는 작품들을 집중적으로 그렸다. 그는 이러한 화법적 특징들을 서구(西歐)의 초 현실주의 화가들과는 또 다른 개성으로 전개시키고자 했다. 이 당시 이두식이 그린 초현실주의적 작품들은 서구의 초현실주의 화가인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나 ‘에른스트(Max Ernst)’, ‘앙 드레 마송(André Masson)’, ‘오스카 도밍게즈(Oscar Dominguez)’, ‘마그리트(Réne Magritte)’, ‘미. 로(Joan Miro)’등과도 전혀 다른 개성의 작품이었다. 이것을 보면 이두식의 초현실주의 회화가 단 순히 감각적이고 피상적인 차원에서만 이루어 졌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는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초현실주의 화법을 구사했던 것이다. 이두식은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자신의 초현실주의적 화풍에 조용한 변화를 준다. 화면 가득 등 장했던 사물의 다양한 이미지들은 상당 부분 정리되어 사라지고, 공간에 여백을 두고 사물의 이미 지가 배치되는 것이다. 그리고 서서히 종이에 연필로만 그렸던 기존의 매체에 변화를 주어 수채물 감으로 다양한 색채 효과를 주고 있다. 물론 이 시기에도 간간이 종이에 연필로 그린 작품이 제작 되기도 했다. 대체로 이 시기의 그림에는 화면에 여백 공간이 시원하게 주어지고, 화면 중앙이나 한 부분에 특정한 인체의 부분을 연상케 하는 형상들이나 알 수 없는 수수께끼의 형상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매우 자주 꽃이나 식물의 이미지들이 함께 등장하기도 한다. 이 시기에 수채물감은 물을 풍 부하게 머금고 종이에 자연스런 번짐 효과를 내며 칠해지는데, 이와 같은 물감의 번짐 효과는 사전 계획 없이 이두식의 즉흥적 발상에 따라 그때그때 종이에 칠해지며 나타나는 것이다. 이두식은 이 렇게 즉흥적으로 색칠한데에서 나타나는 우연적인 물감의 번진 흔적을 보고, 그것이 연상하게 하 는 이미지를 자연스럽게 따라가면서 거기에 다양한 형상을 그려 넣어 작품을 완성한다. 그는 자신 의 이러한 작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종이는 허망하기 짝이 없다. 바라볼 때마다 그. 허망함이 투명해져간다. 너무나 투명하기 때문에 나는 그 허망한 여백에 그림을 그리게 되는 것인 지도 모른다. 나의 작품은 종이에 물감을 바르는 것으로 시작된다. 물감의 얼룩과 얼룩에서 이미지 가 떠오르는 것이다......물감을 발라놓고 보면 그 말라가는 시간의 과정 속에서 온갖 이미지들이 떠 기초조형학연구 Vol.15 No.6. 557.

(8) 오르기 시작하고 나는 그것을 포착하는 것이다. 꽃무늬나 인체의 덩어리, 미끌미끌한 내장기관, 짐 승의 자궁, 맨드라미꽃과 같은 여성기, 장미의 스펙타클, 모래시계를 닮은 배꼽, 아침이슬을 머금은 백합, 히야신스의 유방, 이름 모를 거조의 알, 가시수풀, 등등 그 수많은 형상 속에서 가장 강력하게 남는 것이 그림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잠재의식의 표출로서 나는 아직 이만한 방법을 딴 곳에서 찾 아보지 못했다.”18) 1980년대의 이두식 그림이 그가 70년대에 그렸던 초현실주의 양식에서 조금 변. 화하긴 했지만, 여전히 초현실주의 회화가 추구하는 무의식, 잠재의식의 표출이라고 하는 큰 연장 선 상에서 전개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는 말이라고 하겠다. 평론가 이일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 언뜻 보기에 그의 화면에 서식하고 있는 얼룩, 그것이 어울려 이루어지는 이를테면. ‘양성’의 이미지들은 거의 자연발생적이거나 우발적으로 태어난 것처럼 보인다. 또 실제로 그의 작화 방법은 의도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그림의 이니셔티브를 거의 전적으로 ‘우연’에 넘겨주고 있는 것으 로 보인다. 흰 켄트지 위에다 수채물감을 그대로 얼룩지게 하고 번지게 하는 것으로 그림을 시작하 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림이 그려지게 하는 것이다.....처음에는 그 냥 얼룩지고 번지는 물감에 의해 만들어지는 정체불명의 이미지에서 화가의 연상 작용이 작동하며 또 그의 연상은 번식 하듯이 또 다른 환상을 낳게 한다. 그리고 화가의 손은 그 연상을 쫓아 그것 을 하나의 독립된 이미지로 정착시키는 것이다.”19). <그림 2>와 <그림3 >은 이두식이 이 시기에 그린 그림이다. <그림 2>는 1985년에 종이에 수채물감과 연필로 그린 작품인데, 붓으로 물을 흠뻑 머금은 물감을 화면 군데군데 찍어 얼룩을 낸 후, 그 얼룩 의 번진 흔적을 따라 연상되는 모호한 이미지들을 정교하게 그려 넣은 작품이다. 이 그림에선 꽃의 이미지와 바탕의 희미한 네모 흔적만 분명한 의식적 고려 하에 그려진 것이고, 다른 이미지들은 얼 룩의 흔적이 촉발 시키는 무의식적 연상반응을 따라 그려진 것들이다.. <그림 2> 이두식, 생의기원, 45.5x53cm, 종이에 수채와 연필, 1985. <그림 3> 역시 종이에 연필과 수채물감으로 그린 것이다. 1987년작 인데 물감을 엷게 여러 번 겹쳐 지게 칠한 후, 그 겹쳐지고 번진 물감의 자연스런 흔적을 이용하여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그린 그림 이다. 화면 아래쪽에 마치 완만한 언덕처럼 그려진 회색의 물감 흔적위로는, 털 같기도 하고 새싹 같 기도 한 녹색의 짧은 선들이 군데군데 나있고 한가운데에 곡식 이삭의 실루엣을 음각을 한 것처 럼 그려놓았다. 그 위 공간에는 다양한 모양의 얼룩을 이용하여 배꼽이나 가슴, 주름진 종이와 눈 을 하나 그려 놓았다. 얼룩은 마치 얇은 석고 벽이 뚫려서 생긴 것 같은 입체적 두께감을 가지고 그 려져서, 그 속에 등장하는 모호한 사물의 이미지와 함께 비현실적인 정조를 고조 시키고 있다. 화면 왼쪽 공간에 위에서 아래 방향으로 난데없이 등장하는 작은 3개의 구멍과, 그 옆에 정교하게 그려 18) 이두식, 「작가의 자작수상」, 『공간』, 1980.9, p.70 19) 이일, 「자연과 상상의 판타지아」, 『이일미술비평일지』,미진사, 1998, pp.112-113 558.

(9) 진 곡식의 이삭과 작은 녹색 씨앗들도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허무는 회화적 장치가 되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이두식 회화시기의 전기(前期) 안에서도 1970년대의 작품들과 1980년대 (1980~1987)의 작품들은 그 경향상의 공통점 안에서도 확실히 차이를 보인다. 1970년대의 작품들 이 초현실주의적 방법에 더욱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면, 1980년대(1980~1987)의 작품들은 대체 로 초현실주의적 화법으로부터 보다 자유로운 편이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여전히 잠재의식을 표출 하기 위한 즉흥적이고 자동기술법적이며 우연적인 효과가 작품 속에 살아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1970년대와 1980년부터 1987년까지의 80년대 회화를 하나의 시기로 묶어서 설명하는 것이 타당 하다고 본다.. <그림 3>이두식, 생의기원, 45.5x53cm, 종이에 수채와 연필, 1987. 한국의 현대미술에서 1970년대는 서구의 미니멀아트에서 영향을 받은 ‘미니멀적 단색주의’ 회화가 화단을 지배했다면, 1980년대는 현실참여적인 형상미술이 당시의 사회 정치 상황과 맞물려 화단을 휩쓸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이두식은 화단의 유행하는 경향에 휩쓸리지 않고 묵묵히 자기의 길을 가고 있었다.. 4. 후기(後期 1988년~2013년) 이두식은 1988년경에 이제까지 그려왔던 그림에 완전히 새로운 변화를 주고자 했다. 이번 변화는 그 어떤 때보다도 파격적인 것이었다. 예전과 같은 극사실적이며 초현실적 묘사는 사라지고, 화면이 강렬한 원색이 난무하는 표현주의적이고 추상적인 양식으로 변모했다. 42세부터 사망 시까지 그가 지속적으로 연구해 온 ‘표현주의적 추상’의 시기로 들어선 것이다. 그는 표현주의적 추상 작업을 하 면서 서구와 다른 자신의 그림이 무엇인가를 많이 생각하고 연구했다. 다음은 그에 대한 이두식의 말이다.. “1988년 처음 발표하는 표현주의적 추상화에 원색을 과감하게 썼다. 그러나 그냥 쓴 것이 아니라 색의 배색과 대비에 나만의 조화, 나만의 스타일을 찾기 위해 많은 연습을 거쳤다. 어떤 부분은 그 강렬한 원색이 더 강렬하게 보이도록 유도하기 위해 주변을 가라앉혔다. 색이 튀어나오듯이 보이는 나의 새로운 그림을 보고 관객들은 우리 민족의 근원적 정서를 공감해 주었다. 나는 <축제>, <혼례. >, <수탉>등 오방색과 조화를 이루는 작품으로 삶의 환희와 밝은 면을 표현했다.”20) 이두식이 작품 속에 강렬한 원색을 쓰게 된 것은 어린 시절 그가 보았던 상여의 색채와 울긋불긋한 만장행렬의 감동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평소 우리 민족을 흰색을 선호하는 백의민족이라고 부르 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21) 특히 1970년대 미니멀적 단색주의 회화작가들이 흰색 위주 로 색채를 쓰면서 흰색이야말로 한국인을 대표하는 전통적인 선호색이라고 공공연히 주장할 때, 그 20) 이두식, 『고릴라 로마역에 서다』, 2005, p.102 21) 앞의 책, pp.100-101 참고 기초조형학연구 Vol.15 No.6. 559.

(10) 는 그러한 주장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우리에게는 그 어느 민족보다도 강렬한 원색들 을 사용한 전통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라고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새롭게 시도하는 표현주의적 추상화에 우리의 고유색 오방색22) 을 과감하게 사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으로 그릴 때에도 붓은 모필을 썼는데, 특히 동양 붓인 황모 붓을 즐겨 사용했 다.23) 황모 붓은 표현효과가 다른 붓에 비해 보다 자유롭고 부드러우며 섬세한 특징이 있어, 화가의 심리상태를 보다 민감하게 반응하고 표출해 주는 장점이 있다. 이두식은 인터뷰에서 자신이 황모 붓을 사용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 있다, “나는 서양 붓과 동양 붓의 차이를 분명하게 터. 득하고 있습니다. 내 작품에서는 수용성 물감을 쓰기 때문에 서양 붓 보다는 동양 붓이 적당합니 다. 특히 수묵화적인 발묵법을 택하는데 있어서 동양 붓인 황모 붓은 아주 좋습니다. 황모 붓은 물 감을 머금은 상태에서 빠른 선을 그릴 수 있고, 번짐이나 얼룩을 표현하는데도 제격입니다. 서양 붓 이 단지 물감 칠 위주로 사용된다면, 동양 붓은 호흡에 따라 필선의 힘과 속도, 물기의 조절이 고루 가능 합니다. 그 장점을 살려서 나는 황모 붓으로 색과 선의 강약, 빠름과 느림, 긴장과 이완, 습기 와 건조를 구분하곤 합니다.”24) 황모 붓의 사용은 표현주의적 추상화를 그린 이두식의 표현 영역을. 보다 자유롭게 넓혀 주었을 것이다. 더욱이 이두식이 그림을 그리는 방식은 계획적이고 논리적인 게 아니라 직관적이며 감성적이고 즉흥적이기에, 화가의 심리상태가 촉발하는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 하는 황모 붓은 그의 작업에 잘 어울리는 붓이었을 것이다. 이두식의 표현주의적 추상화는 1990년대 중반 까지는 추상적 화면 속에 여체의 형상이나 사물의 이미지들이 자유롭게 변형되어 그려져 있곤 했다. 물론 전기(前期)의 초현실적 작품들처럼 극사실 적인 형태로 그려져 있는 것이 아니라, 거친 선묘와 강렬한 색채 속에 자유롭게 단순화된 대상의 이 미지들이 화면의 군데군데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두식이 그 당시 그린 작품들은 추상표현주의 화가 뒤뷔페(Jean Dubuffet)의 작품과도 다르고 포트리에(Jean Fautrier)의 작품과도 다른 것이었 다. 그는 자기 자신만의 개성이 살아있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고심하며 연구했다. 사실 오늘의 화가 들이 독창적인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열심히 생각해서 그려 놓았더니 나중에 알 고 보니 외국의 유명화가가 최근에 그린 그림과 유사하여 그가 그린 새로운 양식을 포기한 화가도 필자는 알고 있다.. <그림 4> 이두식, 누드, Acrylic on canvas, 45.5x53cm, 1991. 22) 五方色은 陰陽五行思想에 근거하는 방위 색채관에서 나온 것으로서, 중앙을 黃色, 동쪽을 靑色, 서쪽을 白色, 남쪽을 赤色, 북쪽을 黑色이라 하여, 전통적으로 이들 색채에 벽사수호적 힘이 있다고 보았다. 돌이나 명절에 아이에게 색동저고리를 입히는 풍습도 이 것에서 연유한다.(淮南子, 동아세계대백과사전, 두산백과 참조) 23) 이두식, 『고릴라 로마역에 서다』, 2005, p.220 참고 24) “이두식과의 대화”, 홍익대학교 현대미술관 제2관 세미나실에서 이두식과 서영희의 인터뷰(2013년1월28일), 홍익대학교 현대미 술관 자료에서 발췌 560.

(11) <그림 4>는 이두식이 1991년에 그린 작품이다. 마치 동양화의 수묵을 쓴 것과 같은 묘한 느낌을 받 는다. 아크릴물감에 물을 듬뿍 섞어 발묵 효과 같은 느낌을 낸 것이다. 당연히 서구의 추상표현주의 회화와 많이 다를 수밖에 없다. 화면은 굵고 거친 검정색의 선과 검정색에 물을 많이 섞어 마치 담 묵과 같은 투명한 느낌을 낸 부정형한 색면으로 채워져 있고, 화면 상반부 좌우에 과감하게 여백을 두었다. 얼굴도 팔도 생략된 변형된 여체가 그려져 있고, 그 옆 검은 색면 속에 여인의 얼굴이 희미 하게 보인다. 붉은색과 파란색과 노란색의 작은 흔적들이 화면에 생동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오광수는 이 시기 이두식의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자지러지는 색채의 열기 속에 녹아 흐르는 이미지, 서서히 녹아 흐르다 멈춘 어느 상태, 이미지의 파편들, 그것들은 토막 난 여체 의 관능적인 부위들, 또는 곤충과 식물의 은유적인 형상들이다. 모든 사물이, 모든 세계가 녹아 흘 러 일체가 되는 경지, 일러 범신(汎神)의 영역이다. 화려하지만 단순한 장식적 기능으로 빠지지 않 는 것도 이 같은 끊임없는 생성현상을 표현의 결구로 이끌어가기 때문일 것이다.”25). 이두식의 이 당시 그림은 마치 예전의 극사실적 형태묘사로부터 격렬하게 반발해 나오듯, 굵고 거칠 고 속도감 있는 부정형한 선묘와 강렬한 색채, 형태의 자유로운 변형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기 간에 그는 뉴욕의 제리 브뤼스터 화랑(Jerry Brewster Gallery)과 전속 계약을 맺고 미국 미술계에 도 정식으로 그의 작품을 선보이게 되었다. l997년경부터 이두식의 표현주의적 추상작품에 변화가 감지되는데, 이러한 변화는 표현주의적 추 상을 본격적으로 심화시키기 위한 필요한 과정으로 보여 진다. 형상성이 거의 사라진 표현주의적 색채 추상화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1988년부터 시작된 표현주의적 추상작품엔 앞에서 설명했 듯이 여체의 부분들이나 사물의 변형된 형상들이 알아볼 수 있게 그려져 있곤 했다. 그런데 1997년 경부터는 사물의 형상성이 거의 사라진 작품들이 그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대략 1997년에서 1998 년 까지는 형상성이 보이는 종래의 표현주의적 추상작품과 새롭게 형상을 거의 지운 표현주의적 추 상작품들이 공존하는 양상을 보인다. 그러다가 1998년 이후에는 화면에 어떠한 사물의 이미지도 찾을 수 없는 완전한 표현주의적 추상작품이 그려지게 되었다.. <그림 5> 이두식, 잔칫날, Acrylic on canvas, 72.7x60.6cm, 1998. <그림 5>는 이두식이 1998년에 그린 작품이다. 캔버스에 아크릴물감으로 그린 이 그림에는 구체적 인 사물을 연상케 하는 어떠한 사실적인 형상도 없다. 이두식은 그림을 그릴 때 미리 습작을 그려 본다든가, 또는 계획성 있게 밑그림을 그려놓고 그리는 법이 없다. 왜냐하면 그런 기존의 방법들은 그때그때 가슴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창조적 조형의 충동들을 생생하게 표출하는데 방해가 되기 때 문이다. 그는 그림을 그리기 전에 잠시 명상을 한 후, 빈 캔버스 앞에 선다. 명상은 그를 세속의 시간. 25) 오광수, 「이두식의 근작 1993」, 『이두식TEXT』, 홍익대학교 현대미술관 펴냄, 2013, pp.102-103 기초조형학연구 Vol.15 No.6. 561.

(12) 으로부터 창작의 시간으로 인도하는 중요한 과정이다. 명상을 통해 세속의 온갖 잡념들을 머릿속에 서 지워버린 후, 깨끗한 상태로 붓을 드는 것이다. 그리고는 솟구쳐 오르는 창조적 충동에 몸을 맡 겨 빠른 속도로 그림을 그린다. 그가 즐겨 사용하는 아크릴물감은 유화와 같은 무거운 느낌도 낼 수 있고 물을 많이 섞으면 수묵화나 경쾌한 수채화와 같은 느낌도 낼 수 있는 비교적 표현의 폭이 넓은 수용성 물감이다. 그는 황모 붓에 아크릴물감을 묻혀 어떤 부분엔 유화 같이 칠하기도 하고, 어떤 부분엔 수묵화나 투명 수채화 같은 효과를 내기도 한다. 이 그림에서도 그런 효과들이 보인다.. 26) “발묵법의 효과와 유사한 농담효과도 나고 거침없는 필선과 자유분방한 운필로” 선과 색면과 여. 백의 구성효과를 극대화 시키고 있다. 화면은 좌우 양옆에 흰색의 여백을 두고 검정색과 진한 회색, 붉은색, 황색, 파란색, 녹색의 크고 작은 색면들이 자유롭게 다양한 모양으로 서로 겹쳐지기도 하 고 감싸거나 교차되기도 하면서, 강렬하고 화려한 기운으로 충만한 축제의 장을 형성하고 있다. 이 들 색면 위로 수수께끼의 기호 같은 형상들이 가늘거나 굵은 선으로 그어져 빛을 발하고 있다. 수 수께끼의 기호들은 이두식의 심리 깊은 곳에 잠재되어 있는 과거 경험의 흔적이거나 집단무의식(集 團無意識 Kollektives Unbewusstes)27)의 부유물이 반영된 흔적일 것이다. 붉은색이나 노란색이나 파란색이 어떻게 칠해 지는가는 그때그때 화가의 내면에서 움직이는 즉흥적 조형의 감흥에 따라 결 정되는 것이지 결코 사전 계획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 그림은 마치 수백 년 된 고목에 매달린 울긋불긋한 원색의 헝겊 같은 느낌을 주고 있는데, 그로 인해 샤머니즘적 주술성 같은 것도 느껴지고 있다. 이두식은 바로 한국의 전통이라고 하는 유구한 역사의 고목위에 한국인의 열정과 정신을 자신의 내적 체험과 결합시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이두식이 했던 말이나 그가 쓴 글을 보면, 그는 ‘한국성’이라는 것에 대해 그다지 고민하지 않은 것 같다.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있어야 한다”28)고 주장하면서도 굳이 회화적 표현양식에 있어서. 한국성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연구하기 위해 고민하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필자는 이두식의 이러한 태도가 그를 위해서는 다행스러운 것 이었다고 생각한다. 한때 많은 우리나라 화가들이 ‘한 국성’에 대해 지나치게 고민하고 생각한 탓에 오히려 그것이 창작의 자유로움을 제한하고 저해한 바 가 있었는데, 이두식은 그런 함정에 빠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사실 한국성이란 작품 속에 내재해 있 는 정신적인 요소인데 따라서 한국성의 회화적 표현이란 것도 매우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는 것인 데 그걸 어떻게 하나로 구체화시켜 정의할 수가 있단 말인가? 한국미술의 역사를 보더라도 우리 미 술은 시대에 따라 매우 다양한 모습을 보이며 한국의 정신세계를 표출해 왔다. 필자는 이러한 다양 함이 우리 미술의 내면세계와 그 표현영역을 풍요하게 해주었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작가 개개인이 남과 다른 독창적 표현을 위해 노력할 때,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한국성이 빛나는 것이 아닐까? 더 욱이 그렇게 해서 나온 독창적 표현이 세계인들까지 감동 시킨다면 거기에 세계성도 존재하는 것이 다. 이두식은 이에 대해 매우 소박하게 말한 바 있다. “한국적이라는 것은 그리 어려운 것도 대단한. 것도 아니다. 태어나서 자라고 작품하고 있는 감성대로, 서양의 앞선 듯 한 것에 지나치게 매료되지. 않고 자기 식으로 그리면 그게 한국적이다. 그게 잘 표현되면 세계적인 것이 된다.”29) 이 작품이 지 닌 묘한 향토적 분위기는 이두식의 그런 자연스런 감성과 생각 속에서 형성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 다. 한국의 현대미술을 냉정하게 예술적 독자성의 정도에 따라 3가지로 분류해 본다면, 첫째는 서구 현 대미술을 모방 추종한 경향의 작품들과, 둘째는 서구 현대미술에 영향을 받았지만 그것을 잘 소화 시켜 개성적으로 새롭게 작업한 작품들, 셋째는 독자적인 발상에 의한 작품들로 분류 할 수가 있다. 가장 많이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첫째> 경우의 작품들이고, <둘째>경우의 작품들은 비교적 소수 이다, <셋째>로 분류한 작품들은 극소수인데, 독자적인 발상에 의한 작품이라 하더라도 서구 현대미 술의 간접적인 영향이 없을 수는 없다. 한국현대미술에서 가치 있게 거론할 수 있는 작품들은 <둘 26) “이두식과의 대화”, 홍익대학교 현대미술관 제2관 세미나실에서 이두식과 서영희의 인터뷰 (2013년1월28일), 홍익대학교 현대미 술관 자료 27) 집단무의식(集團無意識): 인간이 원시동물조상과 인간조상을 거쳐 진화하면서 각 단계의 무의식이 없어지지 않고 심리의 가장 깊 은 곳에 쌓여서 형성된 무의식의 세계. (C.G. Jung, Über die Psychologie des Unbewussten, Rascher Paperback, Zurich, 1964 / J. Jacobi, The Psychology of C.G. Jung, Yale大學出版部,참고) 28) 이두식, 『고릴라 로마역에 서다』, 2005, p.231 29) 앞의 책, p.220 562.

(13) 째>와 <셋째> 경우의 작품들인데, 이두식의 회화작품들은 <둘째> 경우에 속한다고 분류할 수 있다.. <그림 6> 이두식, 잔칫날, Acrylic on canvas, 72.7x60.6cm, 2009. 이두식이 1998년 이후 사망할 때까지 보여준 표현주의적 추상 양식은 <그림 6>에서 보듯이 대부 분 비슷한 화면 구성을 보이며 그려졌다. 화면의 좌우에 작거나 큰 여백을 두고 화면을 위에서 아래 로 속도감 있게 불규칙한 선과 면과 점들을 칠해 나가는 방법이다. 대체로 붉은색과 녹색 면은 화 면의 중앙에 강렬하게 등장하는데(간혹 금색과 은색이 함께 칠해지기도 한다), 이들 색면의 일부는 부분부분 마치 깨진 색유리 조각들처럼 서로 섞이기도 하면서 주변에 칠해진 검정색 선이나 파란 색 면과 조화를 이루며 변화무쌍하게 배치되어 있다. 여백은 흰색으로 되어 있고, 간혹 화면 위쪽 좌우 여백은 흰색과 구별 지어 회색조로 칠해져 있는 경우도 있다. 이두식이 16년 동안 보여준 이와 같은 작품들은 거의 전부 유사한 패턴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사실 한국의 현대 미술가들이 대부 분 유사한 패턴의 그물에 갇혀 작업의 폭을 자유롭게 넓히지 못하고 10년 이상 유사한 작업을 반 복하는 것이 문제였는데, 이두식 역시 그러한 문제에서 예외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두 식의 작품이 후기에 보여주고 있는 유사한 패턴의 반복 문제가 그리 심한 것은 아니었다고 항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16년 이상 비슷한 작업을 해오면서 그의 작품에서 느꼈던 신선함도 빠르게 소멸해 버린 것이 사실이다. 현재 오랜 기간 현대미술을 해 온, 한국 중진 작가들의 작품이 상당수 그런 매너리즘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상한 상황을 당연 시 하게 된 데에는 비평의 책임도 적지 않다는 사실을 돌아보게 된다.. 5. 맺음말 이두식은 화가로서의 첫출발을 1970년대 초, 20대의 나이에 극사실적 초현실주의로 시작한 사람이 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에서 1970년대는 미니멀적 단색주의 회화가 화단의 주류를 이루며 전개되고 있을 때였다. 당시 유행하는 경향과 전혀 다른 화풍으로 첫출발을 한 이두식의 작품은 서구 초현실 주의 회화의 데페이즈망(Dépaysement)이나 편집광적 비평방법(Paranoia Critical method)을 사. 용하고 있으면서도 그들의 회화와는 차별화된 개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한국의 현대미술이 서구의 현대미술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것임은 주지의 사실인데, 이상하게 서구 현대미술의 여러 사 조 중에서도 초현실주의는 한국에서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하고 여전히 낯선 사조로 극소수 화가에 의해서만 전개되었을 뿐이다. 그 이유는 다른 현대미술 사조들이 조형적 형식상의 문제에 보다 깊 게 연관되어 있었던데 비해, 초현실주의는 무의식 세계의 탐색이라고 하는 심층심리학적 문제를 중 심과제로 함으로써 화가들이 수월하게 접근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런 점에서도 이 두식이 초기에 초현실주의 화풍을 구사했다는 사실은 의미 있는 행위였다고 생각한다. 이두식의 작품세계는 크게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다. 1970년대 초에서부터 1987년까지의 전기(前期)와 1988 기초조형학연구 Vol.15 No.6. 563.

(14) 년부터 2013년 사망 시까지의 후기(後期)이다. 전기는 초현실주의적 화풍을 구사했던 시기이고, 후 기는 표현주의적 추상 화풍을 구사했던 시기이다. 각 시기에서도 약간의 변화가 감지된다. 전기(前 期)안에서도 1970년대는 화면 전체를 다양한 이미지로 가득 채우는 설명적인 초현실주의를 구사했 던 기간이고, 1980년대(1980~1987)는 화면에 여백을 많이 살리면서 이미지를 절제한 함축적인 초 현실주의적 화풍을 구사했던 기간으로 볼 수가 있다. 표현주의적 추상 화풍을 구사한 후기(後期)에 서는 1988년에서 1996년까지 화면에 간간이 구체적인 사물의 이미지가 등장했던 기간과, 1997년부 터 2013년까지에 이르는 어떠한 사물의 이미지도 찾을 수 없는 완전한 추상을 구사했던 기간으로 그 변화를 살펴 볼 수가 있다. 이두식은 항상 남과 다른 개성적 화풍을 중요시한 화가였다. 전기와 후기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그의 의도대로 독특한 개성이 살아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한국적인 고유의 미감을 조금이라도 살리기 위해 황모 붓을 사용하면서 수묵화에서와 같은 물감의 번짐 효과 를 구사한 것과, 오방색을 살려 표현주의적 추상 회화를 그린 것 등은 현대회화 속에 한국적인 아름 다움을 넣기위한 구체적 방법의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후기에 그가 사망 시까지 16년 동안 거의 유사한 패턴의 작품 형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은 충분히 지적되어야 할 문제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는 한국 현대미술의 상당수가 노정하고 있는 공통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참고문헌 시공사편집부, 『이두식: 아르비방 시리즈 27』, 시공사, 1996.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外,『다다/쉬르레알리즘 宣言』, 송재영 역, 문학과 지성사, 1987 이두식, 『고릴라 로마역에 서다』, 정음, 2005 이두식, 『이두식』, 서문당, 2011 이두식外, 『이두식TEXT』, 홍익대학교 현대미술관 펴냄, 2013 “이두식과의 대화”, 홍익대학교 현대미술관 제2관 세미나실에서 이두식과 서영희의 인터뷰 (2013년1월28 일), 홍익대학교 현대미술관 자료 이일, 『이일미술비평일지』, 미진사, 1998 임두빈, 『(고흐보다 소중한) 우리 미술가33』, 가람기획, 2008 한국미술평론가협회, 『한국현대미술의 형성과 비평2』, 미진사, 1985 한국미술평론가협회, 『21세기 한국의 작가21인』, 재원, 2000. C.G. Jung, 『Über die Psychologie des Unbewussten』, Rascher Paperback, Zurich, 1964 Edward Lucie-Smith,『ART TODAY』, Phaidon, Oxford, 1977 김윤섭, 「이두식의 오방색, 환희에 찬 역동적 하모니」,『아트프라이스』, 2011년 10월호 김종근, 「생의 기원, 축제, 새로운 깃발을 내릴때까지」,『미술시대』, 2011년 9월호 미술세계편집부,「이태리 로마에서 벽화 그리는 이두식」,『미술세계』, 1996년 7월호 윤세영, 「한국인의 정서를 축제의 코드로 풀다」,『사진예술』, 2012년 7월호 이두식, 「우리민족의 색채감각」,『서울아트가이드』, 2004년 7월호」 이두식, 「작가의 자작수상」,『공간』, 1980년 9월호 임두빈, 「초현실주의-존재의 전체상을 향한 신비와 무의식에의 탐험」『미술광장』, 1994년 9월호 정나연, 「국경을 넘나드는 아티스트」, 『아트앤컬렉터』, 2010년 11월호 「국내파 화가로 뉴욕미술시장 수출1호를 기록하게될 서양화가 이두식」, 『경향신문』, 1991.05.22 「이두식 열두어살의 기억」, 『동아일보』, 1992.08.08 「화랑4곳서 대규모 개인전 여는 화가 이두식」,『동아일보』, 1993.11.25 「생명의 신비 담은 힘찬 화풍」, 『경향신문』, 1995.06.01 「이두식화백 모자이크벽화 로마 지하철역내 영구전시」, 『동아일보』, 1997.05.04 「인터뷰: 서양화가 이두식 “고유정서표현도 국제성 갖춰야”」, 『매일경제』, 1998.07.29 「중국 사로잡은 한국적 추상화-이두식교수 베이징 국립미술관서 개인전」, 『국민일보』, 2011.05.13 「원색의 향연-여백이 더 눈부시다」, 『헤럴드경제』, 2012.05.22. 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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