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근대 미술에 나타난 여성상 연구
전체 글
(2) 일본 근대 미술에 나타난 여성상 연구 A Study on Woman Image in Japanese Modern Art 조인호, 한국교원대학교 미술교육과 Cho, In Ho_Dept. of Art Education, Korea National University of Education. 요약.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후 근대국민국가로 변화한 일본은 국민 모두를 지배하여야 했고, 인구의 반에 해당하는 여성에 대한 가치관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었다. 국가는 여성을 국가정체성 형성을 위한 도구로, ‘현모양. 중심어. 처’라는 국가발전에 유용한 에너지원으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스스로를 ‘신여성’이라 칭한 이들은 이에 반. 일본근대미술. 대하며 스스로 여성의 정체성을 형성하고자 하였고, ‘모던 걸’이라 불린 여성들은 전통적인 관습으로부터 벗어나. 여성상. 자유롭고자 하였다. 미술은 이러한 시대상을 반영하듯, 여성에 얽힌 상반된 가치관을 표상하였다. 제도권에서 이. 현모양처. 루어진 순수 미술은 여성을 소재로 한 ‘신화화’와 ‘역사화’를 통하여 국가정체성형성에 이바지 하였으며, 국가적. 신여성. 권위를 갖는 관전을 매개로 ‘현모양처’의 이미지를 보급하였다. 새로운 매체인 잡지와 사진은 여성들의 생각을 대. 모던 걸. 중에게 알리는 효과적인 매체로 자리 잡으며 ‘신여성’을 대중에게 알렸다. 그리고 인쇄물을 위주로 한 대중미술은 근대의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인 자율적이고 능동적인 ‘모던 걸’의 생활과 내면의식을 표현함으로써 예술의 한 장 르로 자리 잡았다. 본 논문은 근대 일본에서 여성의 역할과 위상이 어떻게 정립되었는지 살펴보고, 미술이 이를 어떻게 표상하고 있는지 작품을 통하여 분석하였다. 이 과정에서 여성 정체성 형성의 타자성과 주체성이 드러났 으며, 국가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제도권 미술과 비제도권 예술인 대중미술이 표상하는 여성상이 대비되었다. 제 국주의 국가였던 일본은 한국에 큰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근대일본의 여성상을 살펴보는 것은 일본의 영향 하에 있었던 근대한국의 여성상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ABSTRACT. After Meiji Restoration in 1868, it became critical to reestablish values on women in order for the government to control the nation while women represent half the population. The Japanese. keyword. government tried to instrumentalized women in order to establish the national identity by. Japanese modern art. developing the notion of women as “wise mother and good wife” which could be effectively. woman image. utilized. However, women who identified themselves as “new woman” disagreed with this idea.. wise mother good wife They endeavored to set up the identity of woman in their own ways while “modern girls” tried new woman to be free by breaking down the tradition and being independent. Japanese art reflected these modern girl. conflicting notions of women as if representing the image of the era. Institutional art tried to make contribution to establishing national identity by creating art pieces, which ‘mythologize’ and ‘historicize’ the notion of woman as “wise mother and good wife.” New media such as periodicals and photographs became effective tools to convey ideas of “new woman” to the public. Representing lives and inner consciousness of women who were independent and active based upon new culture in modern era, popular art became one of the art genres. In this study, I explored how roles and status of Japanese women were developed in modern era and analyzed how art represented those. In this process, selfness and otherness of establishing woman identification were disclosed by comparing woman images represented in institutional art controlled by the government and those reflected in non-institutional art such as popular art. Imperial Japan influenced Korea in many aspects. Thus, exploring women image of modern Japan would be beneficial for understanding women image of modern Korea.. 664.
(3) 1. 서론 1.1. 연구의 배경 및 목적 1868년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후 일본은 본격적으로 근대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부국강병 (富國强兵)과 식산흥업(殖産興業)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국가의 주도하에 사회체제와 가치관을 변 화시켜 나아갔다. 이 시기 일본은 제도화된 국민국가체제를 형성함과 동시에 식민지를 가진 제국으 로 변모하는 시기였다.1) 국민국가 형성을 위해서 국민의 형성은 필수적인 과정이다. 근대 이전 일본에서는 여성이 아버지, 남편, 아들을 따르는 삼종지도(三從之道)를 주창하는 유교도덕의 확고한 전통의 계승과 봉건사회 신분제도의 억압으로 여성은 일가(一家)의 가장에게 종속되고 정치적으로 무력한 존재였다.2) 따라 서 여성을 어떻게 통제하고 그 에너지를 이용할 것인지에 관한 과제가 국가에게 있다는 사실이 표 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국민 모두를 직접 지배하는 근대국가의 기능을 원활하게하기 위 해서는 반드시 국민의 절반에 해당하는 여성을 국책에 따라 통제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여성에 대한 가치관의 변화는 근대국가의 새로운 과제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필요성에 의해 여성의 역 할과 위상이 국가에 의해 재편성 되었고, 여성은 근대일본의 국민으로 편입되게 되었다. 국가·국토·애국이라는 관념이 모(母)=여성=모국의 상징으로,3) 여성의 모성(母性)은 국가정체성 형 성에 활용되었다. 계몽사상가들과 지식인들은 국가건설에 있어서 여성의 역할을 깨닫고 여성교육 을 매우 중요시 했다. 교육, 사상 등 여러 방면에서 활약을 펼쳤던 계몽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福 澤諭吉)는 건강한 신체와 정신을 겸비하고 유순한 성격과 가정을 잘 보살피는 능력을 갖춘 여성, 즉 ‘현모양처’의 배양이 이상적인 여성교육이라 생각하였다. 초대 문부대신을 지낸 모리 아리노리(森有. 禮)가 제시한 여성교육의 목적 역시, 여성을 ‘현모’와 ‘양처’로 만드는 것이었고, 1890년 반포된 ‘교육. 칙어(敎育敕語)’ 이후 현모양처는 국가가 제시한 여성의 표준모델이 되었다.4). 메이지 시기에는 서양의 여성해방운동 물결에 영향을 받은 선구적인 여성해방 운동가들이 등장했 다. 히라츠카 라이쵸(平塚らいてう)로 대표되는 이들은 1911년 <세이토(青鞜)>를 출간, 자신들을 ‘신. 여성’이라 일컬으며 일본 여성의 각성을 불러일으켰고, 이후 여성의 참정권운동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5) 다른 한편으로 메이지 말기–다이쇼-쇼와 초기의 물질적 풍요로움과 낭만적인 사회분위기 에서 관습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욕망을 거리낌 없이 표출한 ‘모던 걸’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주로. 하층 계급의 여성들로 새로운 문화공간인 카페의 여종업원, 백화점 점원 등으로 일하면서 관념적, 이성적 자유보다는 물질적, 본능적인 자유를 추구하였다. 근대 일본에서 미술은 1880년대까지는 경제전략으로 1890년대 이래로는 문화전략으로 활용되었 고,6) 국가적인 프로젝트로 인식되어 제도들이 정비되었다. 또 이 시기부터 미술이 서양화, 일본화 등의 상대적인 개념으로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국가사상이나 국민의식을 함양하는 역사화 나 신화화가 많이 제작되었다.7) 작품 속에서 여성은 국가정체성 형성을 위한 주요 소재로 다루어졌 으며,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시기에는 국민을 생산하고 남성을 재생하는 존재로 부각되었다. 1907년 문부성의 주관으로 탄생한 관전(官展)-문부성미술전람회는 엘리트 제도권 미술로 위상을 정립하 였으며, 화가들은 이를 통하여 헤게모니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관전에 출품된 미술품은 국가가 보 증하는 미술이라는 권위의 틀 안에서, 그 당시 국가가 지향하는 이념이나 국민도덕을 전파하고 보 급하는 매체로서 기능하였다.8) 따라서 관전에 출품된 작품을 비롯한 엘리트 제도권 미술작품을 통. 1) 가네코 사치코 (이은주 옮김), 「‘신여성’의 출현과 그 궤적」, 『동아시아의 국민국가 형성과 젠더 : 여성표상을 중심으로』, 소명출판, 2009, p.82 2) 이성례, 「일본 근대 메이지기 인쇄 미술에 나타난 현모양처 이미지」, 한국근대미술사학 제21집, 2010, p.70 3) 와카쿠와 미도리 (건국대학교 대학원 일본문화·언어학과 옮김), 『황후의 초상 - 쇼켄황태후의 표상과 여성의 국민화』, 소명출판, 2007, pp.466-476 4) 츠위화 (김현정 옮김), 『일본여성』, 시그마북스, 2008, pp.92-93 5) 츠위화, 위의 책, p.123 6) 사토 도신 (연구공간 수유+너머‘일본 근대와 젠더 세미나팀’ 옮김), 「‘일본미술’이라는 제도」『근대 지知의 성립』, 소명출판, 2011, pp.80-81 7) 이케다 시노부‧김혜신 (김연숙 옮김), 「식민지 ‘조선’과 제국 ‘일본’의 여성표상」, 『확장하는 모더니티』, 소명출판, 2007, p.247 8) 이케다 시노부-김혜신, 위의 책, p.247 기초조형학연구 Vol.15 No.6. 665.
(4) 하여 국가가 주도한 여성관을 미술이 어떻게 표상하고 있는지 잘 확인할 수 있다.. 1884년에 창간된 여성을 위한 잡지 <죠가쿠잣시(女学雜誌)>와 1911년 여성에 의해 만들어진 잡지. <세이토>는 여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새로운 매체로 각광 받았다. ‘신여성’들은 잡지의 표지화나 사 진 이미지 등을 통하여 스스로 여성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고자 하였다. 다이 쇼 시대는 경제수준이 향상되면서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낭만적인 사회 분위기였다. 이른바 ‘다이. 쇼 낭만’이라 불리는 이 시대에는 인쇄기술의 혁신으로 복제기술이 발달하고, 일반시민들의 경제수 준이 향상되면서 시민중심 문화가 성립되어 대중예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대중예술은 대부 분 판화, 포스터, 사진 등의 그래픽아트인데, 일반대중의 생활 속으로 침투하여 일반인의 마음을 사 로잡았다. 그것들은 비록 마이너 아트로 인식되어 사회적 지위는 낮았지만, 관습이나 전통에 얽매 이지 않고 독자적 표현을 추구함으로써 예술의 한 장으로 시민권을 획득했다. 이러한 대중예술을 대표하는 작가로 다케히사 유메지(竹久夢二)가 있다. 그는 에도시대의 우키요에 취미, 서구 아르누 보 양식, 모더니즘 등을 종합적으로 흡수하고 있는 멀티 아티스트로 고유의 세련미와 서정성, 자유 로움, 담박한 스타일로 ‘모던 걸’과 당시의 시대성을 솔직하고 과감하게 표현하였다.9) 더불어 광고와 포스터 등은 발달하는 자본주의 상황에서 모던 걸의 이미지를 통하여 대중들의 소비심리를 부추 겼다. 본 연구는 근대 일본에서 여성의 역할과 위상이 어떻게 정립되었는지 살펴보고, 미술이 이를 어떻 게 표상하고 있는지 작품을 통하여 분석하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여성에 대한 정체성 형성의 타자 성과 주체성이 드러날 것이다. 더불어 국가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제도권 미술과 비제도권 예술인 대 중미술이 표상하는 여성상이 대비되어 질 것이다. 1.2. 선행연구 분석. 선행연구로 이케다 시노부(池田忍)·김혜신의「식민지 ‘조선’과 제국 ‘일본’의 여성표상」 과 이성례의. 가 있다.「식민지 ‘조선’과 제국 ‘일본’의 「일본 근대 메이지기 인쇄 미술에 나타난 현모양처 이미지」. 여성표상」 은 관전과 잡지에 나타나는 여성의 신체를 모더니즘적인 관점에서 분석하고 있다. 관전에 서 주로 다루고 있는 작품들은 서양화 ‘누드’작품들로 서양으로부터 근대회화가 이식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여성의 신체에 대해 분석하고 있으며, 여성잡지에 나타난 모가/신여성을 통하여 남성의 시각에서 타자화된 여성의 신체를 분석하고 있다.「일본 근대 메이지기 인쇄 미술에 나타난 현모양. 처 이미지」 는 국가 주도하에 형성된 여성상에 초점을 맞추어 목판인쇄, 석판인쇄, 사진 등에 나타 나는 ‘현모양처’ 이미지를 분석하고 있다.. 본 연구가 제도권과 비제도권 미술에 나타난 여성의 젠더적인 측면을 다루고 있다는 측면에서 위 두 논문과 유사성이 있다. 그러나 본 연구에서는 근대 일본에서 여성의 정체성이 국가라는 타자성 과 여성자신이라는 주체성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파악하였다. 그리고 타자성에 의해 형성된 여성의 정체성은 국가의 지지를 받은 제도권 미술의 일본화를 중심으로, 주체성에 의해 형성된 여성의 정 체성은 대중을 지지기반으로 하는 매스미디어 및 대중미술을 통하여 분석하였다. 이를 통하여 작 품제작의 주체 또는 작품 향유의 지지기반에 따라 미술이 표상하는 바가 달라짐을 대비시키고자 한 점에서 위 두 논문과 차이가 있다.. 2. 근대 일본에서 여성의 역할과 위상 2.1. 타자성으로 규정된 여성. 1868년 메이지 유신이래 일본은 근대 국가로 급격한 변모를 한다. 메이지정부는 ‘선진 국민’을 창출 하기 위하여 서구 각국의 국민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여성이 중요하게 부각되었 고, 여성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하는 방안이 강구되었다.10) 이는 여성에 대한 순수한 관심이 아니라, 국가의 목적에 부합하는 역할과 도구적인 관점에서 규정된 여성성이었다.. 9) 이중희, 『일본 근현대 미술사』, 예경, 2010, pp.253-256 10) 이성례, 앞의 논문, p.70 666.
(5) 2.1.1. 국가가 제시한 여성-현모양처 메이지 시대 이전 일본 여성의 지위는 극히 낮았다. 여성은 시부모님을 보시고 남편에게 복종하는 집안에서 가장 낮은 존재였다. 심지어 본인이 낳은 자녀교육에 관여할 수 있는 권한조차 없었다. 결 국 근대 이전의 여성은 뿌리 깊이 박힌 전통 도덕의 굴레 안에서 이용당하는 존재였고, 사회는 여성 들에게 양처(良妻)로서의 역할만을 강요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들어온 서양 사상은 여성들에게 양처 뿐 아니라 현모(賢母)로서의 기준을 제시하 게 되었다. 일본 정부는 국민국가 형성을 위해 국민의 양적, 질적 증가를 위해 낙태금지, 인구증가, 육아 장려 등 여러 정책을 펼쳤다. 또한 서구에서 국민을 근대화시키는 수단으로 모성이 이용됐던 사실에 주목하여, 국민교육의 진보와 어머니 교육과의 상관성에 관심을 기울였다.11) 이에 여성들은 좋은 아내뿐만 아니라 현명한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부여받게 되었다.. 계몽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권학편(勸學篇)』 에서 인류평등과 지식의 중요성을 역설 하였고,『여대학평론(女大學評論)』 과『신여성대학(新女性大學)』 에서 건강한 신체와 정신을 겸비하. 고 유순한 성격과 가정을 잘 보살피는 능력을 갖춘 ‘현모양처’의 배양이 여성교육의 이상이라고 주. 장하였다.12) 처음으로 여성교육의 목표를 ‘현모양처’로 결정한 사람은 초대 문부대신을 지냈던 모리. 아리노리였다. 그는 1887년 교육상황을 시찰하며 교육이 국가 부강의 근본이며, 교육의 근본은 여 성교육이라고 강조하였다. 아이들의 첫 번째 교육자는 여성이며, 여성교육의 성패는 국가의 안위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고 했다.13) 이후 현모양처 사상은 계속 발전되어 나갔다. 1890년 천황의 칙유 형식으로 반포된 ‘교육칙어(敎育勅語)’에서 유학을 교육의 근간으로 규정하고, 여성에게 순종과 온. 유를 종용하였다. 국가는 이러한 현모양처 정책을 통하여 여성에게 다음과 같은 국민적 의무를 부여하였다. 첫째, 국 가는 여성의 출산능력을 가장 중시하여 국민을 생산하는 모체(母體)로서 여성을 확보하려고 했다. 둘째, 여성에게 남성을 대신하여 가정을 운영할 수 있을 만한 능력과 자각을 요구하였다. 더불어 평 안하고 안락한 가정환경을 조성하여 남성의 노동력 재생을 돕도록 하였다. 셋째, 아이를 충성스럽 고 선량한 국민으로 양육하는 것을 기본의무로 부여하였다. 이를 위해 여성은 그저 무지한 모체가 아니라 국가에 대해 알고 국가에 공헌하는 남자를 교육할 수 있을 만큼의 지식과 교양을 지녀야만 했다.14) 이상에서 근대 일본이 여성과 여성교육에 관심을 가진 것은 국민으로서의 역할-여성이 국민을 생 산하고, 우수한 국민을 재생산하며, 남성의 생산력을 재생하거나 생산력을 높이기 위한 것에 있었 음을 알 수 있다. 남성=사회, 여성=가정이라는 논리구조 하에서 여성에게는 자녀를 낳고 양육하면 서 가사를 돌보고 남편을 내조하는 역할이 주어졌다. 이러한 목적에 가장 부합하는 여성상으로 현 모양처를 제시한 것이다. 결국 여성은 재편된 유교도덕 하에서 전통적인 양처로서의 희생을 강요당 함과 동시에 현모로서의 역할을 부여받고, 가정이라는 울타리에 갇히게 되었다. 2.1.2. 여성과 관련된 정부의 시책 근대 일본의 시책은 문명국으로서의 근대화된 일본의 모습을 표방했다. 그러나 여성과 관련된 시책 에 있어서는 전통과 관습사이에서 이중성을 표출했다. 1872년 노예제도로 국제적 공격을 받은 페 루는 일본에도 이와 같은 노예매매가 있음을 창녀관련 문서 등을 제시하며 반론하였다. 같은 해 일 본정부는 이를 국제적 굴욕으로 판단하고 창기해방, 이른바 ‘우마(牛馬)’해방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1873년 12월 12일 토쿄부(東京府)는 술자리나 연회를 위해 돈을 내고 방을 빌리는 ‘가시자시키(貸 座敷)’를 명목으로 매춘제도를 부활시켰다. 단 국제적으로 지탄받는 일이 없도록 그것이 창기자신. 들의 ‘자유의지’임을 출원한다는 조건으로 영업허가증을 발급하였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고용주와 본인과의 근대적인 계약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노예매매의 지속이었다. 결과 적으로 국제사회의 윤리에 저촉되지 않는 척 가장하면서 성적 노예로서의 매춘제도를 유지했던 것 11) 이성례, 앞의 논문, p.71 12) 츠위화, 앞의 책, pp.92-93 13) 츠위화, 앞의 책, p.93 14) 와카쿠와 미도리, 앞의 책, pp.81-84 기초조형학연구 Vol.15 No.6. 667.
(6) 이다.15) 1882년 새로운 형법이 공포되어 일부다처제에서 일부일부제(一夫一婦)로 변환하였다. 그러나 첩 (妾)이라는 문자가 법률상에서 사라졌을 뿐 그 존재는 사실상 남았으며, 서자제도 또한 보존되었다.. 그리고 1888년 ‘황실전범(皇室典範)’이 천황의 복수시비제(複數侍妃制)를 온존시킨 데서도 일부일 처제로의 전환이 표면상으로만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1898년 민법은 ‘호주가족제’를. 제정하여 아버지는 몇 가지 예외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유롭게 사생자를 인정하고 서자로 삼을 수 있게 되었다.16). ‘국민국가형성’을 표방한 일본이지만 여전히 공적인 자리에 나가는 것은 남성으로 제한하였다. ‘부부. 동권론(夫婦同權論)’을 저술한 쓰다 마미치(津田眞道)도 사적생활의 부부동권은 인정하지만, 공적 세계에서의 여성동권 주장에는 난색을 표했다.17) 1880년에 집회조례가 포고되어 여성의 정치집회. 조직과 참가가 제한되었고, 1888년에는 여성에게 공민권을 주지 않기로 결정한 시제정촌제(市制町 村制)가 제정되었다. 1889년에는 대일본제국헌법, 중의원의원 선거법, 귀족원의원 선거법이 일제히 제정되어 포고되었는데 여기에서도 여성에게는 선거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물론 피선거권은 애초부 터 없었다. 1890년에는 입헌정치가 확립되었지만, 여성의 정치활동을 전면적으로 금지하는 집회 및 정사법(政社法)이 연이어 공포되었다. 이는 국정이 남성의 것이고 여성의 배제가 국가적 제도로 확 립되었음을 의미한다.18) 2.2. 여성의 자아인식. 영국 후기 빅토리아(1883~1890) 시대에 ‘new woman’ 열풍의 영향으로 여성들은 자아를 인식하 고, 스스로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하고자 하였다. 일본에서는 1910년대 초와 1920년대 후반 에 ‘신여성’과 ‘모던 걸’로 이분화 되어 나타난다. 신여성은 페미니즘 운동을 전개시킨 집단을 가리키 는 것이었다면, 모던 걸은 서구식 외모를 꾸미고 경제적 독립과 성적 자유를 구가한 여성들을 가리 키는 상징이었다.19) 2.2.1. 남녀동권과 여성단체 결성. 기시다 준코(崖田俊子)는 일본의 여성 최초로 남녀동권을 주장한 논문「동포자매에게 고한다(同. 胞姉妹に告く)」 를 1884년 5월부터 신문 <자유의 등불(自由の燈)>에 실었다. 또한 여성참정권에 대. 해서 영국의 운동을 말하고, ‘서양 여러 나라에서도 여성참정권의 진리가 승리하는 것은 거울을 보. 는 것과 같다’라고 말하였다. 1885년 이와키 젠지(巖木善治)를 중심으로 창간된 <죠가쿠잣시>는 시. 민적 남녀동등권론을 보급시켰고, 넓게는 외국여성의 일반문제까지 다루었다. 1885년에 발간된 잡. 지에 실린 논문「미국 여성의 직업」 에서는, 남녀동등권의 실현을 위해 여자의 경제적 독립이 필요. 하다고 밝히고, 그를 위해서는 첫 번째로 ‘부모의 재산을 그의 딸에게도 나누어 주어야한다’ 즉, 시 민적인 분할상속제를, 두 번째 ‘딸에게 상응하는 일을 가르치며, 아들에게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 나. 의 직업을 가져야한다’는 직업의 필요성 피력하였다.20). 1886년 야지마 가지코(矢島楫子)가 ‘기독교부인교풍회(基督敎婦人矯風會)’를 창설하여 일부일처제. 의 청원운동을 한 것21)을 시작으로 많은 부인단체가 결성되었다. 특히 1920년대에는 ‘일본부인참정. 권협회’, ‘부인연맹’, ‘전관서부인연합회’, ‘부인시정연구회’, ‘혁신클럽 부인부’ 등이 만들어졌다. 그 중 두 세 단체는 1923년 2월에 참정동맹을 만들어 제 46회 의회에서 부인참정권을 건의안으로 제출하였지 만 실패하였다.22) 여성의 참정권은 1945년 새로운 헌법이 재정될 때까지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11년 근대 일본 사회에서는 처음으로 여성지식인들만으로 구성되어 <세이토>라는 여성문예 잡지 15) 와카쿠와 미도리, 앞의 책, pp.33-35 16) 이노우에키요시 (성해준·감영희 옮김), 『일본여성사(하)』, 어문학사, 2004, pp.73-74 17) 이은주, 「근대 초기 일본의 여성 형성에 관한 연구」, 일본어문학 제38호, 2008, p.249 18) 와카쿠와 미도리, 앞의 책, pp.85-86 19) 김수진, 『신여성, 근대의 과잉』, 소명출판, 2009, p.414 20) 이노우에키요시, 위의 책, pp.110-122 참조 21) 가네코 사치코, 위의 책, p.106 22) 이노우에 키요시, 앞의 책, pp.167-168 668.
(7) 를 만들었다. 하라츠카 라이쵸를 중심으로 한 <세이토>의 여성들은 새로운 교육을 받은 지식인 계. 층으로 스스로를 ‘신여성’이라 칭하였다. 그녀들은 남성 중심적인 관습과 사상을 타파하고 여성의 자아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라이쵸가 세이토의 창간호에「원래 여성은 태양이었다」 를 발표하면서부. 터 신여성론, 정조론, 낙태논쟁, 모성보호론 등 여성에 대한 담론을 세상에 꺼냈고, 뜨거운 논쟁으 로 여성에 대한 가치관을 재구축하였다.23) 2.2.2. 관습으로부터의 자유추구 1923년의 관동 대지진은 도쿄를 황폐화시키고 게이샤가 바탕이 된 오락의 몰락을 가속화시켰다. 그 러나 이 대참사는 도시를 서구식 건물과 자동차로 가득 찬 현대적인 대도시로 바꾸는 추진력이 되 었다. 사람들은 이상적인 서구식 생활장비를 마련할 생각을 하기 시작했고, 영화와 재즈, 댄스 등을. 오락의 수단으로 점점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새로운 문화공간으로서의 ‘카페’이다. 1911년 카페 프렝탕, 카페 라이온, 카페 파우리스타가 생긴24) 이후 1933년에 오사카에는 37,000개 의 카페가 영업하고, 1936년까지 여자종업원의 수는 112,000명에 달했다.25) 카페 여자종업원들 중 상당수는 가난한 농촌 지방 출신이었고 거의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녀들은 경제적 자립을 위하여 스스로 생계를 꾸렸고, 그녀들의 수입은 고객들 사이에서의 인기가 반영되었다. 그녀들의 수입은 고 객을 유혹할 수 있는 능력과 고객에 대한 서비스에 달렸다. 그녀들은 에로티시즘을 파는 육체노동자 였지만 매춘부는 아니었다.26) 그녀들은 ‘모던 걸’이라 불리었으며 전통적인 유교적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웠다. 최신 서구 패션의 소비자였으며 자유로웠고 사교적이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그. 시대가 존중하는 문화적 관습을 무시하고,27) ‘정치에 무관심하고 공격적일 정도로 자율적’이며 ‘적극. 적인 호색가’였다.28) 그녀들은 도시의 발달과 경제적 풍요로 생겨난 새로운 직업군인 카페의 여급이. 나 백화점 여점원 등에 종사하는 노동자 계층이었다. 그녀들은 풍요롭고 낭만적인 사회분위기 속에 서 쾌활하고 능동적이었으며, 전통적인 도덕의 굴레로부터 자유를 추구했다. 감정적, 개인적, 무의식 적인 측면에서 관습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욕망을 거리낌 없이 표출하였다.29). 3. 미술로 표상된 여성상 2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사회에서 여성의 역할과 가치관 및 정체성은 변화 했다. 미술의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재현되어온 여성의 모습은 당대의 사회의 요구, 남성들의 여성 관, 여성에 대한 담론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이미지이다.30) 이에 변화한 근대 일본 여성을 미술이 어 떻게 표상하였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3.1. 국책(國策)에 부응한 여성상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화의 길을 가게 된 일본은 미술을 국가정체성 형성과 국민 통합의. 수단으로 사용하였다.31) 1907년 “미술의 표준을 보여주기”32)위해 설립한 문부성 미술전람회(이하. 23) 세이토사 (한일근대여성문학회 옮김), 『세이토:일본 최초의 여성문예잡지』, 2007, p.3 24) 이노우에 마리코, 「근대 일본 카페 여자종업원의 시선과 ‘모던 걸’의 자아성립」, 미술사연구 제 14호, 2000, pp.232-233 25) Miriam Silverberg, 「日本の女給はブル-スを唄った」, 『ジェンダ-の日本史』, 2 東京:東京大學出版, 1995, p.587, 이노우에 마리 코, 위 논문, p.235에서 재인용. 26) Silverberg, 위의 논문, p.589, 이노우에 마리코, 위 논문, p.235에서 재인용. 27) Silverberg, 위의 논문, p.246, 이노우에 마리코, 위 논문, p.236에서 재인용. 28) Silverberg, 위의 논문, pp.240-241, 이노우에 마리코, 위 논문, p.236에서 재인용. 29) 모던 걸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지만 크게 두 가지 입장으로 나누어진다. 첫 번째는 본 연구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자유의지로 바라보는 입장이다. 두 번째는 자본의 재배치로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한 여성들이 타자성에 의해 포획된 자유를 누릴 뿐이라고 바 라보는 입장이다. 두 관점은 여성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모두 타당성을 지닌다. 어느 한쪽에 편향된 입장으로 모던 걸을 해석하는 것은 과도한 환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 주의를 요한다. 본 논문은 타자성과 자율성의 이분법적인 구조로 논지를 전개하기에 전자 의 입장에서 모던 걸을 규정하였다. 이후 작품의 분석에서도 이와 같은 입장에서 작품들을 해석하고자 한다. 30) 박영택, 「한국 전통미술과 근대미술 속에 반영된 여성 이미지」, 시민인문학 제20호, 2011, p.198 31) 김혜신, 「근대일본과 일본미술」, 서양미술사학회 11호, 1999, pp.188-189 32) 마키노 노부아키, 「美術獎勵の方針」, 『日本美術』97호, 1907년 3월, 고지마 카오루, 「근대 일본에서 관전의 역할과 주요 작품분 석」, 『미술사논단』 13호, 2001, p.15에서 재인용. 기초조형학연구 Vol.15 No.6. 669.
(8) 문전으로 약칭함)는 제도권 엘리트 미술의 중핵으로 기능하며, 국가가 보증하는 미술이라는 권위 를 갖게 되었다. 문전과 뒤를 이은 제국미술원 전람회(이하 제전으로 약칭함)33)에 출품된 작품들은 관전의 설립취지에 부합하며, 국가가 지향하는 이념이나 국민도덕을 전파하고 보급하는 매체로서 기능하였다.34) 이 절에서는 관전에 출품된 작품들을 위주로 미술이 국가가 제시하고 있는 여성상을 어떻게 표상하고 있는지 살펴보겠다. 아울러 관전이 설립되기 이전인 1890년부터 1906년까지 국가 정체성 형성기에 제작된 작품들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3.1.1. 국가 정체성을 담은 여성상 메이지 정부는 정통성 있는 왕조로서 국가정체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에서 가장 오 래된 신화와 전설을 기록한 역사서인『고사기(古事記)』 와『일본서기(日本書紀)』 를 바탕으로 국가의 기원(起源)을 설정하였다. 이 문헌에 따르면 기원전 660년 일본의 제1대 천황인 진무(神武)천황이 국가를 세우고 즉위하였다. 후대 사람들은 이 날을 일본의 “건국기념일”로 정하였고, 이를 기념함으. 로써 2000년이 넘는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한 것이었다. 건국기념일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다방면에 서 노력을 기울였으며, 미술에 있어서는 역사적 사실을 통해 새로운 그림주제가 창출되었다.35). <그림 1> 하라다 나오지로(原田直次郞), . <그림 2> 하루코황후 초상과 기룡관음 부분. “기용관음(騎龍觀音)”, 1890 . 하라다 나오지로(原田直次郞)의 “기룡관음(騎龍觀音)” <그림 1>은 진구황후가 용을 타고 신라를 정벌하러 가는 것을 연상 시킨다. 국토를 배경으로 거친 바다를 향해 서 있는 관음상은 마치 영국 의 빅토리아 여왕처럼36) 해변에서 바람과 맞서며 일본국가의 수호와 대외 진출, 해외 제패를 상징했 다고 할 수 있다. 하라다 나오지로는 이 그림을 통해 서구의 성모상에 필적하는 일본국가의 수호여 신을 창출하고자 하였다. 이는 여성상에 추상적 관념을 표상시키는 서구의 작화법(作畵法)을 도입 한 것이다. 국가·국토·애국이라는 관념이 모(母)=여성=모국의 상징으로 계급과 사상의 대립을 넘어 국민을 하나의 끈으로 연결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성모 마리아의 도상을 빌려 관음의상을 입히고 쇼켄황태후의 얼굴 <그림 2>을 그려 넣었다. 황후의 모성으로 국민들이 따뜻한 사랑을 받는 느낌까 지 창출하고 있다.37). 아오키 시게루(靑木繁)의 “오나무치노미코토(大穴牟知命)” <그림 3>는 고사기(古事記)의 내용을 그 린 것이다.38) 이 그림은 중앙의 남자-오나무치노미코토(おおなむちのみこと)가 형제들의 음모로 뜨 겁게 달구어진 돌을 만지고 죽자, 그의 어머니가 하느님에게 소원을 빌었고, 하느님이 이를 가엽게 여겨서 좌우의 여인-기사가이히메(きさがいひめ)와 우무기히메(うむぎひめ)를 보내어 소생시킨다는 내용이다. 왼쪽의 여인 기사가이히메는 피조개39)를 빻아 가루로 내고, 오른쪽의 여인 우무기히메 33) 문부성미술전람회 : 1907년~1918년, 제국미술원전람회 : 1919년~1935년까지 운영되었으며, 이후 신제전, 신문전, 전후에는 일 본미술전람회로 이어졌다. 관전에 대해서는 이중희와 마키노 노부아키의 앞 논문을 참조하기 바람. 34) 이케다 시노부‧김혜신, 앞의 책, p.247 35) 사토도신佐藤道信, 「‘일본미술’이라는 제도」, 『근대 지知의 성립』, 소명출판, 2011, p.96 36) 로마어로 승리의 여신이라는 뜻을 지님, 그리스에서는 니케. 빅토리아 여왕은 최강의 해군, 발달한 공업력 등을 바탕으로 영국 식 민지의 황금시대를 가지고 온 여왕. 37) 와카쿠와 미도리, 앞의 책, pp.466-476 38) 日本アート·センタ-, 『新潮日本美術文庫32 - 靑木 繁』, 新潮社, 1997, 페이지없음, no. 18 참조 39) 사람의 피와 같은 수액을 가지고 있는 붉은 색의 조개 670.
(9) 는 자신의 젖을 짜서 피조개 가루에 갠다. 이것을 오나무치노미코토의 몸에 발라 생명을 소생시킨 다. 자식을 잃은 간절한 어머니의 마음이 하늘에 닿아 여성으로 하여금 생명을 소생시킨 것이다. 피 조개는 생명을 탄생시키는 여성 성기의 은유이고, 유방과 모유는 생명을 기르는 여성성의 상징이다. 이러한 여성성의 상징이 생명의 재생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04년에 러일전쟁이 일어 났고 1905년에 이 작품이 제작되었음을 고려한다면, 전쟁 상황에서 여성의 역할이 상처 입은 남성 을 재생시키는 것임을 고사기를 통하여 은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림 3> 아오키 시게루(靑木繁), . <그림 4> 도모토 인쇼(堂本印象), “가리테이모(訶梨帝母)”,. “오나무치노미코토(大穴牟知命)”, 1905 . 1922- 4회 제전. 도모토인쇼(堂本印象)의 “가리테이모(訶梨帝母)” <그림 4>는 귀자모신(鬼子母神)의 3면화이다. 가 리테이모는 귀자모신의 다른 이름으로 1만이나 되는 자식을 두고도 항상 남의 어린애를 잡아먹어 서 사람들이 부처님에게 호소하였다. 부처님이 그의 막내인 빈가라(嬪伽羅)를 감추어 버렸고, 그는 7일 동안 찾았으나 찾지 못하고 비탄에 빠져 슬피 울었다. 이때 자식을 잃은 다른 부모의 슬픔에 대 한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다시는 어린애를 잡아먹지 않을 것을 맹세하고 불교에 귀의하여 해산(解 産)과 양육의 신(神)이 되었다. 도모토 인쇼는 귀자모신을 성모상에 비견하여 동양의 여불을 이미 지화하였고, 히라다 나오지로가 시도한 바와 같이 서양에 필적할 수 있는 동양을 만들려 애썼다. 이 작품에 표현된 여성의 모습은 아이를 따뜻하게 품고 젖을 먹이는 모성이 강조되어 있다. 이 또한 생산과 양육이라는 현모양처의 역할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3.1.2. 교양을 갖춘 여성상. 에도시대의 ‘여자에게 학문은 필요 없다’는 봉건사상이 계속해서 팽배해 있는 사회적인 인식 상황. 에서 계몽사상가 나카무라 마사나오(中村正直)는 “남녀의 교양이라는 것은 동등해야 한다.”40)고 주 장하였다. 그는 남성과 여성을 떠나 교양의 강화가 국력을 신장하고 국가의 위상을 높이는 바탕이 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여성에게도 초등교육의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나 남녀의 동등함은 교양적인 측면에서의 동등함이지 사회적인 역량을 발휘하는 전문지식에 있어서의 동등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어서 남녀 별반제도가 시행되었다. 여자고등교육에서도 ‘현모양처’에 적합한 교양교육이 실시되. 었다. 더불어 여성의 학력은 소속과 계층을 표시하기 위한 가치로 간주되어 혼인시장에서 효과를 발휘하였다.41) 메이지 말기에서 다이쇼기에 걸쳐 학교교육의 확대로 여성들의 문해력은 확대 보급 되었고, 여성의 독서 또는 교육에 대한 사회인식도 긍정적으로 변화해 갔다.. <그림 5> 후지시마 다케지(藤島武二) , “지반납. <그림 6> 나카무라 다이자부로(中村大三郞), “피아노(ピア. 량(池畔納凉)”, 1898. ノ)”, 1925-7회 제전. 40) 中村正直, 「善良ナ母ヲ造ル說」, 『明六雜誌』第33号, 1875, 이은주, 앞의 논문, p.5에서 재인용. 41) 기무라 료코 (이은주 옮김), 『주부의 탄생』, 소명출판, 2013, pp.25-26 기초조형학연구 Vol.15 No.6. 671.
(10) 청일전쟁과 러일 전쟁 이후 군수물자 생산 등으로 경기가 살아나자 메이지 말기부터 도쿄를 중심 으로 지식인 계층 사이에 낭만적인 분위기가 확산되어 갔다. 후지시마 다케지(藤島武二)는 미술에 있어서 이러한 낭만적인 분위기의 감수성을 표현한 대표적인 화가이다.42) “지반납량(池畔納凉)” <그. 림 5>에서는 청일전쟁의 승리가 가져다준 여유로움이 낭만적인 분위기로 묻어난다. 비약하는 국력 을 상징하듯 공원과 벤치라는 근대화된 공간에서 여성이 독서를 하는 근대화된 생활상을 보여주고 있다. 여성들은 연못가의 청량감을 만끽하며 독서와 부채질을 하며 서로 교감함으로써 심신을 긍정 적인 에너지로 채우고 있다. 이는 교양인, 문화인으로서 근대화된 일본의 여성상을 보여주고 있다. 나카무라 다이자부로(中村大三郞)43)는 초기에 전통적인 여성상을 그렸지만, 1926년 제7회 제전에. 44) “피아노(ピアノ)” <그림 6> 출품을 계기로 우아하며 품격이 있는 근대 여성 미인화로 전환하였다.. “피아노”에 주인공 여성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서구에서 수입된 것들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올림머 리에 금으로 된 머리 장식에 강렬한 빨간색 기모노를 입고 있는 여성은 육중한 그랜드 피아노를 비 롯한 서구적인 문물에 압도되는 느낌이 없다. 서구문물과 여성은 서로 대등한 관계에 있으며, 복잡 한 악보를 보고 피아노의 페달을 밟으며 연주하는 모습에서 서구 문물을 향유하는 근대 여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악보는 교육을 받지 않고서는 해독할 수 없고 그랜드 피아노는 상류층이 아니면 가 질 수 없는 물건이다. 이 그림을 통하여 근대적 교육을 받은 상류층 여성이 음악을 통하여 교양을 함양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음악을 통해 교양을 함양하는 모습은 요시오카 겐지(吉岡堅二)의 “짧은 휴식(小憩)” <그림 7>에서 도 볼 수 있다. 배경의 구름만큼이나 높은 건물의 테라스에서 세 명의 여성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왼쪽의 여성은 안락의자에 슬리퍼를 신고 악보를 펴서 보고 있으며, 중앙의 원피스를 입은 여인은 기타를 들고 있다. 전면의 식탁에도 서구적인 기물들을 보여줌으로써 물질적으로 풍부하며 낭만적 인 분위기에서 여유로우며 교양 있는 여성들의 짧은 휴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림 7> 요시오카 겐지(吉岡堅二), “짧은 휴식(小憩)”, 1932-14회 제전. 앞에서 살펴본 작품들에 나타난 여성은 모두 여가를 활용하여 교양을 쌓음으로써 긍정적인 에너지 를 채우고 있는 모습이다. 주로 전통적인 몸단장을 하고 서구적인 방법으로 여가생활을 즐기고 있 다. 이는 여성의 역할을 재편된 유교적 전통의 범주로 한정하면서, 새로 받아들인 근대 문화를 교양 에 투영한 것이다. 변화‧발전하는 사회, 즉 근대=서구=문명이라는 논리구조를 여성의 교양으로 확장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미술의 표준을 보여주기 위해 설립한 관전은 국가를 지지기반으로 국가가 보증하는 ‘미술’이라는 권 위의 틀 안에서, 그 당시 국가가 지향하는 이념이나 국민도덕을 전파하고 보급하는 매체로서 기능 하였다.45) 따라서 관전에서 심사를 거쳐 입선된 여성주제의 작품들은 미술의 표준이자 여성의 표준 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국가라는 타자성에 의해 규정된 여성상은 대내적으로 여성의 표준 42) 이중희, 앞의 책, pp.89-91 43) 1918년 제12회 문전文展에서 처음 입선을 한 후, 1920년 제2회 제전과 제4회 제전에서 특선이 되는 등 관전계(官展系) 전람회를 중심으로 활약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 편저, 『일본미술』, 예맥출판사, 2005, p.24 44) 국립중앙박물관 편저, 위의 책, p.10 45) 이케다 시노부‧김혜신, 앞의 책, p.247 672.
(11) 이 되었고, 대외적으로 근대화된 일본의 모습을 홍보하는 이미지가 되었다. 3.2. 자아를 발현하는 여성상 여성들의 학교교육이 확대되면서 문해력이 보급되었다. 새로운 라이프스타일로 매스미디어의 구독 습관이 보급됨과 동시에 앞서가는 남성을 뒤쫓아 가는 것 같은 형태로 여성독자층이 형성되었다. 이미 메이지시대에 매스미디어업계에서는 새로운 소비자로서 여성독자를 의식하는 움직임이 나타 나기 시작했다. 다이쇼 시대 이후에는 여성 취향의 비교적 값싼 출판물이 대량으로 보급되어 여성 들의 주요 정보원으로 자리 잡게 된다.46) 매스미디어는 더 이상 남성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여성도 소비자로 인식되었다. 매스미디어는 대중이라는 불특정 다수의 독자를 지지기반으로 성립된다. 따 라서 독자층의 요구에 맞는 새로운 정보나 흥밋거리를 제공할 때 필자와 독자, 생산과 소비의 관계 가 성립된다. 신여성은 인테리층 페미니스트로서 여성의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국가의 정책에 반대하고, 여성의 자아발견과 재능의 발굴을 중시하였으며, 남성의 성적 방종을 정치적 의제로 만들었다. 신여성은 매스미디어의 생산자가 되어 그들의 이념과 운동의 내용을 대중들에게 제공하였다. 이에 반해 모던 걸은 매스미디어의 관심대상이나 대중예술의 주인공이 되었다. 모던 걸은 소비사회의 대표적 이미 지로 표상되었고 자유로운 존재로 재현되었다.47) 이 절에서는 잡지, 광고, 사진, 포스터 등의 매스미 디어에 나타난 여성상을 통하여 신여성과 모던 걸이 어떻게 표상되고 있는지 분석하고자 한다. 3.2.1. 여성성과 여성의 권리를 표현한 여성상. 신여성은 영국의 ‘new woman’ 열풍이 후기 빅토리아(1883~1890) 시대의 문화풍경을 장식한 이 래 유럽 각국으로 퍼져나갔고, 20세기 초 약 20~30년 동안 유럽 이외의 거의 모든 국가에서 나타. 났다. 신여성은 중등교육이나 고등교육을 받은 초기 세대들로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가치 와 태도를 추구하는 존재로 등장하였고, 일본에서는 <세이토>의 동호인들과 그 이념에 공감하는 여 성들을 일컬었다.48) 히라츠카 라이쵸를 대표로 하는 이들은 서구로부터 유입된 계몽사상과 자유민 권운동에 자극을 받아 페미니즘으로 발전시켜 나아갔다. 새로운 교육을 받은 지식계층의 여성들은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세이토>같은 잡지를 발간하여 여성과 얽혀있는 부조리한 사회상을 고발하 면서 여성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그림 8> 나가누마 지에코(長沼知惠子), “세이토 창간호 표지”, 1911. 잡지의 표지화는 잡지의 개성과 메시지를 선언한다. 그것은 잡지의 지향점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하 고 사람들의 주목을 끌게 만드는 목적을 안고 있다. 잡지의 표지는 리얼리티보다는 이념을 나타내 는 목적을 가진다.49) <그림 8>은 여성 운동가이자 화가인 나가누마 지에코(長沼知惠子)가 그린 1911 년 <세이토> 창간호 표지그림이다. 길게 땋은 머리카락을 등에 늘어뜨리고, 얼굴의 측면을 보인 여. 46) 기무라 료코, 앞의 책, pp.64-65 47) 김수진, 앞의 책, pp.433-436 48) 김수진, 앞의 책, pp.397-415 49) 김수진, 앞의 책, p.178 기초조형학연구 Vol.15 No.6. 673.
(12) 자의 입상으로, 꽤 장식적인 레이아웃이면서 ‘신여성’의 잡지에 어울리는 기품과 격조를 감돌게 하. 고 있다.50) 히라츠카 라이쵸가 “원래 여성은 태양이었다. 진정한 인간이었다. 지금, 여성은 달이다. 타 인에 의해 살아가고 타인의 빛에 의해 빛나는 병자와 같은 창백한 얼굴의 달이다. 우리 모두를 은 폐시켜버린 우리의 태양을 이제는 되찾아야 한다. ‘숨겨진 우리의 태양을, 숨어 있는 천재를 발현하 자.’”51)고 한 말이 표지그림에서 느껴지는 듯하다. 라이쵸는 여성이 갖고 있는 ‘천재성’과 ‘모성’의 중. 요성을 강조하였는데, 천재성과 모성이 그리스 여신상에 투영되어 있는 듯하다. <세이토>는 1913년 4월 문부성이 현모양처주의에 배반된다고 하여 단속을 결정하였고, 곧이어 내. 무성이 ‘안녕질서를 해친다’는 이유로 2월호와 4월호를 발매 금지시켰다. 이후 우여곡절을 겪다가 1916년 폐간되었다.52) <세이토>가 폐간된 이후 라이쵸는 1919년에 이치카와 후사에(市川房技)와 함. 께 ‘치안경찰법 제5조 수정(여성 정치 활동의 해금)’하는 성과를 거두었고, 1920년에는 ‘신부인협회’ 를 발족하고 여성동맹을 창간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1922년에 ‘치안경찰법 제5조 2항(여자들에 의 한 정치적 연설회 금지)’ 개정이라는 성과를 거둔다.53) 이후 신여성들은 1923년 2월에 참정동맹을. 결성하여 제 46회 의회에서 부인참정권을 건의안으로 제출하기도 하고 부인 참정권 획득을 위한 연 설회를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그림 9> 일본경제신문사(日本経經濟新聞社写 す), 신부인협회 설립 당시의 사진, 1920년. <그림 10> 1923년 제국의회에 참정권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가지고 가는 여성들의 사진. 근대에 사진은 사실의 기록이자 현장의 보고로서 ‘보도’의 기능을 충실히 이행했다. <그림 9>는 신 부인협회 설립 당시의 사진으로 앞줄 중앙에 있는 인물이 라이쵸이고 뒷열 좌측이 이치카와 후사 에이다. 그녀들의 모습과 함께 그녀들을 증명이라도 하듯 1920년 일본경제신문에 보도되었다. <그 림 10>은 1923년 ‘참정동맹’의 여성들이 제국의회에 부인참정권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하러 가 는 사진이다. 리더들로 보이는 여성이 양장에 구두를 신고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앞장을 서고 전 통의상의 여성들이 조금은 소극적인 표정으로 뒤따르는 모습이 보인다. 여성들의 손에는 감당하기 어려워 보일정도로 많은 양의 문서들이 있는데, 여성들의 간절함과 비장함의 무게로 다가온다. 뿐만 아니라 방대한 양의 문서들은 여성들이 습득한 지식으로 다가온다. 이렇듯 사진은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전해주며 자율적인 여성상을 표상하고 있다. 3.2.2. 소비사회와 대중예술의 주인공으로 표상된 여성상 1910년대부터 30년대에 걸쳐서 대중미술 장르가 화려하게 꽃피었는데, 메이지 말기-다이쇼 시대쇼와 초기에 해당된다. 이중희는 이 시기에 대중예술이 만개할 수 있었던 이유로 첫째, 인쇄기술의 혁신으로 복제기술의 발달한 점. 둘째, 사진이나 영화와 같은 영상 미디어가 범람하여 새로운 볼거 리 문화가 형성되고 그로 인하여 기존표현 수단에 영향을 미치게 된 점. 셋째, 일반시민들의 경제수 준 향상으로 시민중심 문화가 성립되고 있었음을 들고 있다.54) 여기에 다이쇼 데모크라시라 불리는 자유주의적‧민주주의적 풍조가 융성하였음을 더할 수 있다. 대중미술의 대부분은 판화, 포스터, 광. 50) 세이토사, 앞의 책, p.6 51) 세이토사, 앞의 책, p.42 52) 김수진, 앞의 책, pp.417-418 53) 요네다 사요코(米田佐代子)‧이시자키 쇼오코(石崎昇子), 「<청탑> 이후의 새로운 여자들-히라츠카 라이초우와 ‘신부인협회’의 운동 을 중심으로」, 『신여성』, 청년사, 2003, p.283 54) 이중희, 앞의 책, pp.253 674.
(13) 고, 삽화 등인데 신변 예술로 일반대중의 생활 속으로 침투하여, 예술을 요구하는 일반인들의 마음 을 사로잡았다. 이를 대표하는 존재가 다케히사 유메지(竹久夢二)이다. 유메지는 주로 여성들을 그렸는데, 그의 여 성인물화는 ‘유메지식 미인화’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그는 일기에 “나는 너무나도 여성의 미를 잘 알. 고 있고, 여성을 너무나 사랑한다.”55)고 했으며, 자신의 그림에 대해 “나의 내면생활의 보고”였다고 말하듯이, 사생활을 바탕으로 여성의 심리를 예리하게 간파하고 있다.56) 그는 일상 속에서 여성들. 을 사랑으로 관찰하고, 여성들의 생활이면에 숨겨진 내면을 묘사하였다. 그는 1912년 첫 개인전 ‘유 메지작품전람회’가 대성공을 거두면서 대중의 인기를 얻었고, 시집과 엽서 생활용품, 패션잡화, 의. 류, 문구류 등으로 까지 영역을 확장하였다. 1914년에는 에도시대부터 오래된 점포가 많았던 니혼 바시(日本橋)에 미나토야에조시텐(港屋繪草紙店)을 개업한다.57) <그림 11>은 미나토야를 개점했을 때 만든 판화로 가게의 광고도 겸하고 있는 작품이다. 뿐만 아니라 그. 는 세노오 악보(セノオ楽譜)의 표지도 디자인했는데, “난등(蘭燈)” <그림 12>은 그가 처음으로 세노 오 악보에 장정한 작품이다.58) 유메지는 집안의 반대로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긴자(銀座)의 노점이나 요코하마(横浜)의 헌책방 등에서 직접 외국의 미술잡지, 화집 등을 구입해 서 자유롭게 미술공부를 했다. 그는 유럽의 아르 누보 형식에 영향을 받아, 그림의 구성이나 여성의 자세 등에 S자형태의 물결모양 곡선을 많이 사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림 속의 여인은 동양적인 모 습을 하고 있지만 서양적인 분위기가 있으며, 성적매력을 풍기는 경계가 미묘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 다. 그림속의 여인들은 보이지 않지만 눈물을 흘리고 있으며, 들리지 않지만 깊은 한숨을 쉬고 있 다. 이는 슬픔을 피하기 힘들었던 당시 여인들의 공감을 얻었다.59) 그리고 유메지 그림의 주인공들 이 입고 있는 패션은 당시의 젊은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림 11> 다케히사 유메지(竹久夢二), “미. <그림 12> 다케히사 유메지(竹久夢二). 나토야 에조시텐(港屋繪草紙店)”, 1914. “난등(蘭燈)”, 1917. 다이쇼 말기의 관동대지진과 쇼와 초기의 경제공황은 다이쇼 시대의 민주주의를 배경으로 한 인간 회복이나 휴머니즘을 노래하던 감정의 시대에서 벗어나게 했다. 그리고 현대화, 공업화를 기반으로 한 도시주의, 기계주의를 탄생케 한 이성의 시대로 변하게 만들었다. 이상과 동경의 대상이자 감성 투여의 대상으로 전설이나 역사 속에 존재하던 여성, 자연과 더불어 아름답게 미화되던 여성도 이 성과 현실에서 생각되었다. 관동대지진과 경제공항의 어려운 현실 속에서 여성들도 대거 경제활동 에 뛰어들면서 여성의 직업이 확장되고 그 수도 늘어났다. 여성도 경제적인 능력을 갖추고 소비의 주체로 부상해 갔다.. 55) 竹久夢二, 『夢二日記 1』, 筑摩書房, 1987, p.271, 김지연, 『다케히사 유메지와 일본 그리고 한국』, 인문사, 2013, p.186에서 재인용. 56) 이중희, 앞의 책, pp.254-255 57) 김지연, 앞의 책, p.51 58) 세노오 악보는 서양음악의 보급에 힘쓴 세노오 고요(妹尾幸陽)가 국내외의 명곡 1001곡을 모아 출판한 악보이다. 유메지는 1916 년부터 1927년까지 1년 동안 280점의 표지를 디자인하는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김지연, 앞의 책, pp.53-55 참조 59) 김지연, 앞의 책, pp.41-42 기초조형학연구 Vol.15 No.6. 675.
(14) <그림 13> 스기우라 히스이(衫浦非水), 미츠. <그림 14> 가케야마 고우요우(影山光洋), 긴. 코시(三越) 제22권 제11호 표지화, 1932. 자의 모가, 1931. 이러한 분위기에서 1924년에는 도쿄의 단발머리나 파마머리에 양장을 하고 하이힐에 빠른 걸음으 로 걸음을 걷는 여성들을 일컫는 말로 모던 걸이 생겨났다.60) 모던 걸을 나타내는 지표는 무엇보다 도 그들의 외모와 복식이었는데, 서구식 복장과 짧은 머리, 그리고 길고 곧은 다리로 주목받았다. 이러한 모던 걸의 이미지를 확산시킨 것은 광고였다. 시세이도(資生堂) 같은 화장품, 미츠코시(三 越) 백화점의 광고포스터에는 모자를 쓰고 보브식 머리에 양장치마를 입고 구두를 신은 여성들의 모습이 주요 소재로 등장하였다.61) 광고물은 모던 걸의 외양을 제시하면서 여성들의 소비욕구를 자 극 하였고, 여성들은 소비의 주체가 되어 물질을 탐닉하듯 이에 호응하였다.. 자본주의의 발전과 더불어 도시에서는 신종 서비스직에 종사하는 각종 ‘-걸’들이 생겨났다. 1920년 대는 스테이크 걸, 키스 걸, 메니큐어 걸, 마작 걸, 마네킹 걸 등 각종 걸의 전성시대가 되었고, 외형 적으로 아름답고 사치스러운 분위기가 점차 퇴폐적이고 불량스러운 경향을 띄면서 도시소비문화와 향락의 주역이 되었다. 그녀들은 여성해방이나 인권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욕망에 따라 행동하 였다.62) 감정적, 개인적, 무의식적인 측면에서 관습으로부터 벗어나고 자신의 욕망을 거리낌 없이 표 출하였다. 모던 걸의 성적 자유와 소비의 향락은 남성의 소비심리와 연결되었다. 남성의 전유물이라 여겨지는 술과 담배에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합치시키는 데서 그 정점을 보여 준다. 모던 걸이 남성 의 소비심리를 자극하는 대상이 되었지만 그녀들은 더 이상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여성들도 술과 담배를 소비하는 주체였으며 자유의지에 의해서 섹슈얼리티를 제공하고 그에 상응하는 대가 를 인정받았다. <그림 15>와 <그림 16>처럼 그녀들은 당당했으며 적극적이고 능동적이었다.. <그림 15> 1921년 카타마 와. <그림 16> 1930년대 Three cats 버지니아산 담배 광고 포스터. 인 포스터. 60) 모던 걸의 일본어 표기인 모단 가루(モダン が-ル)는 1924년 『여성』지 8월호에 기타자와 슈이치(北澤水一)가 실은 글 제목, 「모단 가루」에서 처음 등장했다. 이에 관해서는 서지영, 『경성의 모던걸』, 도서출판 여이연, 2013, pp.71-78 참조 61) 김수진, 앞의 책, pp.420-421 62) 서지영, 앞의 책, pp.71-76 676.
(15) 4. 맺음말 근대 일본미술은 국가에 의해 주도된 관전, 제전 중심의 제도권 미술과 대중의 문화욕구에 의해 형 성된 비제도권 미술로 구조화 되었다. 제도권 미술은 순수회화를 매체로 국가의 보호와 지원 하에 서, 국가가 지향한 여성상을 표상하였다. 이는 크게 두 가지 다른 양상으로 나타났음을 볼 수 있다. 첫째, 1890년부터 1900년까지 근대국가로서의 일본 정체성형성 시기에 여성의 모성성을 바탕에 깔 고 신화나 역사적인 사실을 모티브로 새로운 주제를 창출함으로써 국가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이바 지한 것이다. 둘째, 국가가 국민국가의 일원으로서 여성의 역할을 제시한 여성상인 현모양처의 이미 지이다. 국가는 여성의 모성을 긍정적인 에너지로 이용하기 위하여 자녀 교육에 필요한 정도의 교양 과 지식을 요구하였다. 이는 여가를 활용하여 교양을 쌓는 여성상으로 표현되었다. 이 두 양상은 국 가라는 타자성에 의해 규정된 여성상으로 제도권 미술에서 표상되었다. 비제도권 미술은 새로 생겨난 다양한 매체들을 활용하여 여성들을 표상하였다. 먼저 잡지와 사진. 은 새로운 정보전달의 기능을 수행하면서 ‘신여성’이 생각하는 여성의 정체성과 활동 및 운동을 대 중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였다. 다음으로 판화와 광고 포스터는 주로 관습에서 벗어나 물질적이고 본능적인 자유를 추구한 ‘모던 걸’의 이미지를 전파하였다. 매스미디어와 광고매체들은 불특정 다수 의 대중이라는 불안정한 지지기반 하에서 사회분위기와 대중의 욕구에 부응하는 이미지를 제공하 였다. 이는 전통의 속박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여성상으로 대중미술을 통해 표상되었다.. 본 논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근대 일본미술에서는 급변하는 정치‧사회‧문화적 배경 하에서 드러 난 다양한 여성의 면모와 당시 여성에 얽힌 상반된 가치관을 살펴 볼 수 있었다. 지지기반과 매체가 갖는 특성은 여성을 바라보는 가치관의 방향성과도 일치하였다. 국가라는 든든한 지지기반을 갖는 제도권 미술은 안정된 가이드라인 안에서 국가라는 타자성에 의해 규정된 여성상을 표상하였다. 대 중이라는 모호하고 불특정한 대상으로부터 지지를 이끌어 내어야 했던 대중미술과 대중매체는 사 회분위기를 민감하게 감지하면서 자율적이고 능동적인 여성들의 생각과 내면의식을 표상하였다. 이 처럼 근대 일본의 여성상은 국가=타자성=제도권미술, 여성=자율성=대중미술로 대비되었다. 제국주의 국가였던 일본은 한국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한국에서도 근대 이전에는 여성들에게 양 처로서의 역할만이 주어졌으나, 근대에 일본의 영향으로 현모양처가 표준 여성상으로 자리매김 하 게 된다. 1922년에 조선미술전람회가 열렸는데, 일본과 거의 동일한 전개양상을 띄면서 제도권 미 술로 자리매김 하였다. 1920년에 여성지 <신여자>가 창간되었고 나혜석, 윤심덕을 비롯한 신여성들 은 식민지 조선에서 여성에 대한 뜨거운 논쟁을 일으켰다. 그리고 1920년대 중반 이후에는 모던 걸 들이 경성 거리를 누비며 소비문화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등 근대 일본 미술에서 보이는 여성상의 양상과 중첩되는 점이 많다. 따라서 근대일본의 여성상을 살펴본 것은 일본의 영향 하에 있었던 근 대 한국의 여성상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해 본다. 참고문헌 국립중앙박물관 편저, 『일본미술』, 예맥출판사, 2005 김수진, 『신여성, 근대의 과잉』, 소명출판, 2009 김지연, 『다케히사 유메지와 일본 그리고 한국』, 인문사, 2013 김혜신, 「근대일본과 일본미술」, 서양미술사학회 제11호, 1999 박영택, 「한국 전통미술과 근대미술 속에 반영된 여성이미지」, 시인인문학 제20호, 2011 서지영, 『경성의 모던걸』, 도서출판 여이연, 2013 안민화, 「30년대 일본 멜로 드라마를 통해 본 모던 걸의 광휘와 소실」, 영상원 트랜스 아시아영상 문화 학회, 2006 이성례, 「일본 근대 메이지기 인쇄 미술에 나타난 현모양처 이미지」, 한국근대미술사학 제21집, 2010 이은주, 「근대 초기 일본의 여성 형성에 관한 연구」, 일본어문학 제38호, 2008. 이중희, 『일본근현대미술사』, 예경, 2010 장정우, 「근대 일본에서의 모성과 국가 : 平塚らいてう의 ‘母性論’을 중심으로」, 서강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 문, 2009 츠위화 (김현정 옮김), 『일본여성』, 시그마북스, 2008. 기초조형학연구 Vol.15 No.6. 677.
(16) 가네코 사치코 (이은주 옮김), 「‘신여성’의 출현과 그 궤적」, 『동아시아의 국민국가 형성과 젠더 : 여성표상을 중 심으로』, 소명출판, 2009 고지마 카오루, 「근대 일본에서 관전의 역할과 주요 작품분석」, 『미술사논단』 13호, 2001 기무라 료코 (이은주 옮김), 『주부의 탄생』, 소명출판, 2013 사토 도신 (연구공간 수유+너머‘일본 근대와 젠더 세미나팀’ 옮김), 「‘일본미술’이라는 제도」, 『근대 지知의 성 립』, 소명출판, 2011 세이토사 (한일근대여성문학회 옮김), 『세이토: 일본 최초의 여성문예잡지』, 어문학사, 2007 와카쿠와 미도리 (건국대학교 대학원 일본문화·언어학과 옮김), 『황후의 초상 - 쇼켄황태후의 표상과 여성의 국 민화』, 소명출판, 2007 요네다 사요코·이시자키 쇼오코, 「<청탑> 이후의 새로운 여자들-히라츠카 라이초우와 ‘신부인협회’의 운동을 중심으로」, 『신여성』, 청년사, 2003 유모토 코이치 (연구공간 수유+너머 동아시아 근대 세미나팀 옮김), 『일본 근대의 풍경』, 그린비, 2004 이노우에 마리코, 「근대 일본 카페 여자종업원의 시선과 ‘모던 걸’의 자아성립」, 미술사연구 제 14호, 2000 이노우에 키요시 (성해준, 감영희 옮김), 『일본여성사(하)』, 어문학사, 2004 이케다 시노부·김혜신 (김연숙 옮김), 「식민지 ‘조선’과 제국 ‘일본’의 여성표상」, 『확장하는 모더니티』, 소명출 판, 2007. 日本ア-ト·センタ-, 『新潮日本美術文庫32 - 靑木 繁』, 新潮社, 1997 http://rnavi.ndl.go.jp/kaleido/entry/jousetsu143.php http://www.plaza-f.or.jp/about/mumeoten/page2/page2.html. 678.
(17)
관련 문서
특히 간 절제술과 간이식을 맡고 있는 외과 왕희정 교수팀은 국내 최초로 혈액형이 다른 간이식을 성공한 데 이어 간이식 수술을 통해 혈우병과 간암을 동시 치
L360-1 Trade Commission Implementing Regulation (EU) No 1334/2014 of 16 December 2014 approving the active substance gamma-cyhalotrin, in accordance with Regulation
L333-9 Budget Decision of the European Parliament and of the Council of 22 October 2014 on the mobilisation of the European Globalisation Adjustment Fund, in accordance with
2014/07/09 [관세정책] EU 집행위, 위조품에 대한 세관간 합동단속(ERMIS)결과 발표 2014/07/11 [FTA정책] EU-일본 FTA 검토(review) 종료 및 제6차 협상 결과
Council Decision (EU) 2015/268 of 17 December 2014 on the signing, on behalf of the European Union, and provisional application of the Protocol to the Euro-
Employment, Social Policy, Health and Consumer Affairs Council 10.16 European Parliament, Political Meetings, Institutional affairs European Parliament
Funding Commission Delegated Regulation (EU) No 522/2014 of 11 March 2014 supplementing Regulation (EU) No 1301/2013 of the European Parliament and of the
Ø 한·중 FTA 농업분야 협상전략수립과 대응방안모색에 기여 Ø 중국의 식품소비와 중국 시장 진출에 대한 관심을 충족. 지금까지 축적된 중국 농업 관련 정보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