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길 걷기 36
내변산 길 따라 내소사 가는 길
아름드리 전나무 숲길 에서 만난 풍경
신정일 | 문화사학자, 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 이사장, 「새로 쓰는 택리지」 저자([email protected])
국내에 내외설악, 내외금강, 내외속리처럼 내외(內外)라는 이름 붙은 곳이 여러 곳 있다. 대개 명산에 그런 이름이 많다. 그 중 한 곳이 바로 내외변산이다.
변산은 바깥에다가 산을 세우고 안을 비운 형국이다. 그래서 해 안선을 따라 98km에 이르는 코스를 바깥변산이라고 하고, 수많 은 사찰과 암자가 있어 한때는 사찰과 암자만을 상대로 여는 중장 이 섰던 곳을 안변산으로 부르기도 한다.
내변산으로 들어가는 길은 여러 갈래다. 변산에서 지서리를 지 나 중계리 사자동에 이르는 길이 그 하나고, 구암리 고인돌이 있 는 하서면 석상리에서 우술재를 지나 사자동에 이르는 길도 있다.
736번 군도를 따라 우술재를 넘으면 상서면 청림리에 이른다. 길 좌측으로 흐르는 하천이 백천내다. 청림사(靑林寺)라는 절이 있어서 청림이라고 하였던 이곳 청림사 터에서 발견된 고려시대 동종이 보 물 제277호로 지정되어 현재 내소사에 보관되어 있다. 고려시대 동 종은 내소사 동종으로 불린다. 청림리 건너편에 있는 산이 노적봉이 고, 노적봉 건너편에 있는 산이 덕성봉(德聖峯)으로 옛날에 산삼 밭 이 있었다고 한다. 아래쪽에 있는 산이 천총봉(千摠峯)으로 내외변 산의 가운데 있는 산이다. 그 아래에는 부안다목적댐이 들어선 부안 호가 펼쳐져 있다.
상서면 청림리에서 변산면 중계리 사자동에 이르는 길은 부안 호를 따라가는 길이다. 이곳 사자동에서 직소폭포(直沼瀑布)를 지 나 관음봉 아래로 해서 내소사로 가는 길은 산책하는 것처럼 넘을 수 있는 최상의 도보답사 코스다.
매표소를 지나면 길은 평탄해지고 금세 실상사(實相寺) 터에 닿 는다. 실상사는 신문왕 9년(689) 초의선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세 종대왕의 둘째 형인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원당(願堂)이 되어 궁 궐의 재물로 중수한 절이지만, 한국전쟁 때 화재로 모두 불타버리 고 주춧돌만 남은 것을 다시 세웠다. 3기의 석조부도와 허튼 돌로 막 싼 기단만 남아 있는 절터에는 이름 모를 뭇 새들의 울음소리 속에 붉은 단풍잎들이 우수수 떨어지고 있었다. 늦가을 햇살에 온 몸을 드러낸 저 금당 터에 내소사 대웅전이나 개암사 대웅전 같은 날아갈 듯한 절집이 세워져 있었을 것이다. 또한 내소사에 소재해
변산에서 가장 규모 가 큰 직소폭포
있는 연재루는 1924년 실상사에서 옮겨갔다고 한다.
한편, 이곳 실상사에서 월명암으로 가는 고개를 ‘남옛등’이라고 부른다. 조선 후기에 문신이자 을사오적 중의 한 사람인 이완용(李完用)이 전라도 관찰사로 재직할 때 남여를 타고 월명암까지 가는데 고개가 가팔라 힘들어 했기 때문에 남옛등 또는 남여등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길을 재촉하자 어느 사이에 보이지 않던 호수가 하나 나타나고 그 물결이 찰 랑거리는 바로 뒤쪽으로 길이 나있다. 잔잔한 물결 너머의 산들은 붉게 타오르 고 산행객들이 쉴 새 없이 오고간다.
한참을 올라가자 발아래 보이는 곳이 봉래구곡이다. 옥녀담 남쪽에 있는 여 울인 봉래구곡은 직소폭포에서 흘러온 맑은 물이 반석 위로 흘러 바윗돌에 소 용돌이쳐 여러 굽이를 이룬 곳이다. 옥녀봉, 선인봉, 쌍선봉 등의 봉우리들에 휩싸여 2km를 흐르고 있다. 반석의 곳곳에 사람들이 새겨 놓은 글자가 있어 예로부터 사람들이 풍류를 즐기던 곳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봉래구곡 옆 바위 위에는 돌탑이 있는데, 이곳에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기도를 드 렸다고 한다.
직소폭포는 변산에서 가장 규모가 큰 폭포다. 높이는 약 20m이며 깎아지른 절벽에서 물이 곧바로 떨어지는데 그 모양이 흰 비단을 똑바로 드리운 듯하다.
직소폭포 밑에 있는 소는 실상용추라고 부른다. 물이 맑고 깊어서 파란 빛을
●직소폭포
● 선녀탕
●자연보호헌장탑 기점
● 재백이고개
● 내소사 매표소 재백이재 기점
관음봉
새봉 기점
벌통봉 내소사 청련암
직소보
띠고 있는 이 소에서 날이 가물면 부안 원님이 정성껏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그 방법이 특이한데 산돼지를 그대로 잡아 물속에 넣었다고 한다. 이 소에서 넘친 물줄기가 다시 바위 사이를 흘러 제2, 3 의 폭포를 이루고 옥녀담(玉女潭)이 된다.
쉼 없이 떨어지는 한줄기 폭포. 김수영 시인은 폭포를 두고 이렇게 노래했다.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 시정할 수 없는 물결이 /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 다는 의미도 없이 /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 고매한 정신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김수영의
‘폭포’ 중)
폭포 아래로 내려가 가만히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떨어지는 폭포수 소리가 가슴속으로 파고들고 나뭇잎이 한 잎, 두 잎 물 위에 떨어졌다. 문득 바람이 우수수 불었다. 빗자루로 쓸어대는 것처럼 물살 들이 어딘가를 향해 우르르 밀려가고 밀려오는 그 풍경을 뒤로 하고 다시 길에 나선다.
직소폭포 위 내변산은 찬연하다 못해 황홀하다. 멀리 의상봉을 비롯한 변산의 봉우리들이 나를 향 해 달려오고, 다시 산길에 접어드는데, 흐르는 시냇물 소리가 가슴속으로 촉촉이 스며든다.
직소폭포를 지나면 길은 평탄해진다. 마치 그 옛날 이곳쯤에도 사람들이 화전을 일구고 살았을 법 하다. 형형색색 나뭇잎들이 붉게 물들어 있고, 길 아랫자락을 흐르는 물소리는 단아하다. 어쩌다 만나 는 등산객들이 서로 만났다 헤어지고, 부는 바람결에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호남의 5대 명산으로 불리는 변산은 능가산, 영주산, 봉래산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려왔다. 「신
내소사 전경
증동국여지승람」에 변산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보안현에 있다. 지금 현과의 거리는 서쪽으로 25리 인데 능가산으로도 불리고, 영주산으로도 불린다. 즉 변산(卞山)이라고도 하는데, 말이 돌아다니다가 변(卞)으로 되었다고 한다. 변한(卞韓)의 이름을 얻은 것이 이 때문이라 하나 그런지 아닌지 알지 못한 다. 봉우리들이 백여 리를 빙 둘러 높고 큰 산이 첩첩이 쌓이고 바위와 골짜기 깊숙하며 궁실과 배의 재목은 모두 여기서 얻어갔다. 전하는 말에는 호랑이와 표범들이 사람을 보면 곧 피하였으므로 밤길 이 막히지 않았다 한다.”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능가산 가인봉으로 가는 길을 택한다. 가인봉에서 내소사(來蘇寺)로 이어지 는 길은 오르막과 내리막의 연속이기도 하지만 제법 가파르고 길이 험하므로 조심해야 한다. 길은 아 래로 이어지고 곧바로 전나무 숲이 울창한 내소사의 초입에 이른다. 이런 나무 숲길을 걸을 땐 한 꺼 풀 한 꺼풀 입었던 옷들을 벗을 일이다. 삼림욕이 아니라도 잣 향기 같은, 솔잎 향내 같은 냄새에 온몸 을 내맡겨볼 일이다.
붉게 타오르는 단풍나무 뒤편의 내소사 전경은 아름답기 이를 데 없다. 천왕문을 들어서면 거대한 당산나무가 눈 안에 들어온다. 나이가 950년쯤 되었을 것이라는 이 나무는 할아버지 당산으로, 일주 문 바로 앞에 선 할머니 당산나무와 한 짝이라고 한다. 나라 안 수많은 절 중에서도 정월대보름에 금 줄이 쳐진 후 정월대보름 당산제가 열리는 절은 아마도 이곳 내소사뿐일 것이다. 광복 전만 해도 제물 을 차리고 독경을 하며 줄다리기를 한 후 그 줄을 이 당산나무에 걸어놓기도 했다고 전한다.
당산나무를 지나면 가인봉, 능가산 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싸인 내소사 경내에 범종각, 봉래루, 삼 층탑, 설선당, 대웅보전 등의 건물들과 요사채들이 그림처럼 서있다.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에 위치한 내소사는 백제 무왕 34년(633) 혜구두타가 소래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한 사찰이다. 창건 당시 ‘대 소래 사’와 ‘소 소래사’가 있었는데 지금의 내소사는 예전 ‘소 소래사’라고 한다. 그 뒤 1633년(인조 11)에 청 민선사가 중건하였고 1902년 관해가 중창한 뒤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소래사가 내소사로 언제부터 바 뀌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은데 고려 때 빼어난 시인 정지상(鄭知常)의 작품에 ‘제변산 소래사(題邊山 소 래사)’라는 시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정지상이 변산에 들른 시기만 해도 소래사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당나라의 소정방이 석포리에 상륙한 뒤 이 절을 찾아와 군중재를 시주하였기 때문에 내소사로 바뀌었다는 말은 근거 없는 전설이 맞을 듯싶다. 내소사는 선계사, 실상사, 청림사와 더불어 변산의 4대 명찰로 불렸지만, 전란 때 다른 절들은 모두 불타버리고 내소사만 남았다.
이 절에는 보물 제277호로 지정되어 있는 내소사 고려동종(高麗銅鐘)과 조선 인조 11년(1633)에 건 립되었다고 전해지는 대웅보전(大雄寶殿)이 있다. 자연석으로 쌓은 축대 위에 낮은 기단과 다듬지 않 은 주춧돌을 놓고 세운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의 단층 팔작지붕인 대웅보전은 조선 중기 이후에 유행 했던 다포계 건물이다. 대웅보전은 못을 하나도 쓰지 않고 나무토막들을 깎아 끼워 맞춘 건물로도 유 명하다. 내소사를 중창할 당시 대웅보전을 지은 목수는 3년 동안 나무를 목침덩이만 하게 토막 내어 다듬기만 했다고 한다. 사미승이 나무토막 한 개를 감추었고, 나무 깎기를 마친 목수가 나무를 헤아리
다 한 개가 모자라자 자신의 실력이 법당을 짓기에 부족하다며 법당 짓기를 포기하려고 했다. 사미승 이 나무토막을 내놓았지만 목수는 부정한 나무토막은 쓸 수 없다며 끝내 그 토막을 빼놓고 대웅보전 을 완성했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대웅보전 오른쪽 안 천장은 왼쪽에 비해 나무토막 한 개가 부족하다 고 한다.
내소사를 나와 일주문까지 600m에 이르는 아름드리 전나무 숲길을 걸어간다. 이 나무들이 불과 60~70년 전에 심어졌다고 하면 누가 믿기나 할까? 어린 나무들을 심으며 그 나무들이 목재가 되고, 열매를 맺을 걸 누가 떠올리기나 할까? 내소사 일주문에 접어들면 그러한 생각들은 저절로 바뀌게 될 것이다. “나는 내일 지구의 종말이 와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을 것이다”라는 스피노자의 말을 진 실로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훤칠한 대장부처럼 쭉쭉 뻗은 전나무 숲길에는 내장산 가을 단풍의 인파 에 밀려 이곳을 찾은 관광객들이 넘쳐나지만, 이곳 숲길은 상쾌하기만 하다.
“길은 한 걸음씩 걷다 보면 언젠가는 목적지에 도달하고, 언덕을 하나씩 오르다가 보면 언젠가는 산 에 오를 수 있다”라는 누군가의 말처럼 도착한 내소사 일주문. 서해바다로 이어지는 길로 다시 발걸음 을 옮긴다.
내소사 대웅보전 전나무 숲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