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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보행도시로 가는 굽은 골목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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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행도시로 가는 굽은 골목길

오성훈|건축도시공간연구소 녹색도시연구센터장

걷고 싶지 않은 사회

누구나 어린 시절에 동경하던 만화 또는 영화 주인공이 있을 텐데, 어찌 된 영문 인지 인류를 구원하는 영웅들은 도통 걸어다니지 않았다.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동화 속의 알라딘도 마법의 양탄자를 타고, 손오공은 구름(!)을 타며, 우주소년 아톰은 발에 로켓을 달고 날아다니고, 서부영화 속의 클린트 이스트우드도 큼직 한 멋진 말을 타고 석양을 향해 달려간다. 최근에 나오는 영웅들도 대부분 최대 한 멋을 부린 전용자동차나 전용기는 기본이고, 가난한 스파이더맨도 최소한 거 미줄은 타고 다닌다. 이 정도 이동성은 갖추어야 대단한 일을 하는 것이다. 땅바 닥을 터덜터덜 걸어다녀서는 이른바 대단치 않은 사람이라는 인식을 우리는 어려 서부터 잘 학습해온 것 같다. 우리 주변에서 걷는 일로 방송에 오르내리는 경우는 관심의 대상이 된 명사(名士)가 어린 시절 20리 길을 걸어다니면서 지각을 한 번 도 하지 않았다거나 하는 내용이 고작이다.

노르웨이에서 어느 저명한 국립대 교수와 저녁을 같이 하고 집에 가려는데 비 가 방울방울 날렸다. 이분은 저녁도 토스트 한 쪽을 비닐봉지에 싸 와서 굳이 커 피 한 잔만 시켜서 드신 찰나인데, 집이 같은 방향이니 같이 걷자고 한다. 한 시 간은 걸릴 거리인데 우산도 없이. 때마침 감기로 몸이 좋지 않아 걷기는 힘들다 고 하니 그러면 전차를 타자고 한다. 아주 오랜만에 전차를 탄다고 하면서. 걸어 도 될 만한 거리인지는 거리에만 좌우되지 않는다. 걷기 좋은 도시공간이 마련되 어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텐데, 어쨌든 그 교수는 걷기에 이골이 난 사람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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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울 것이다.

걷기가 건강에 좋다, 나쁘다, 걷기가 힘들 다, 힘들지 않다, 이런 이야기를 하기 전에 걷는 일 자체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있다면 걷는 것 외에 대안이 별로 없는 이들에게도 영향을 주겠 지만, 차량 소유자들의 차량이용 행태에 있어서 도 큰 영향을 줄 것이다. 걷기보다는 될수록 차 를 타고 이동하기를 희망하고, 그렇게 할 수 있 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은, 더 많아지고 넓어진 차도에 차들이 가득 들어서서 교통이 꽉 막혀 있 는 이 시점에도 계속 많아지고 있다. 이렇게 걷 는 일이 하찮고 힘든 일이고, 능력이 있으면 무 언가 탈것을, 그것도 큰 탈것을 소유하고 이용하 는 것이 그럴싸한 일이라는 인식을 오랫동안 함 께 익혀온 나라에서 갑자기 올레길이 유행하고, 보행환경에 관련된 법률·정책들이 수립되고 시 행되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18세기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에는 인간의 정주지가 보행속도를 기반으로 구성되어 있었 다. 인간의 근육의 움직임으로 이동하는 속도와 범위를 기반으로 마을과 시장이 구성되고, 그에 따라 영토를 관리하고 이용하는 단위가 정해졌 다고 보아야 한다(Soderstrom. 2008. p26). 하 지만 증기기관이 발명된 이후부터는 도시공간의 범위가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산업혁명 이후 더 많은 자원과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넓은 공 간을 축소시키는 빠른 교통수단이 중요해졌다.

철도와 선박, 자동차를 중심으로 한 교통수단의 발전과 그에 따른 공간의 편제에 있어서 인간의 육체를 기반으로 한 느릿한 이동은 배려의 대상

이 아니었다. 빠른 물류 중심이어야 하는 도시에 서 보행자가 설 곳은 그다지 많지 않았던 것이 다. 그런 척박한 도시공간이 걸어다니는 사람들 을 위한 곳으로 변모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다.

우리나라에서 보행환경이라는 단어가 등장한 지 10년도 훨씬 넘은 지금, 길바닥에서 울긋불 긋한 색이 들어간 포장이나 보행자 전용도로, 보 기 좋은 가로시설물들이 곳곳에 들어서는 것을 이제는 도시 여러 곳에서 자주 만나게 된다. 많 은 도시의 중심상업가로가 이른바 보행친화적으 로 가꾸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보행친화적 인 공간에서 그다지 걷고 싶지 않다던가, 보행친 화적인 공간을 한번 경험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 력을 해야 하는 경험이 적지 않은 것은 무엇 때 문일까? 그리고 그런 가운데 우리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은 무엇일까?

체험의 연속성이 중요하다

고든 쿨렌은 근대의 메마른 도시에서 되찾아야 하 는 중요한 요소로, 연속적인 시각적 체험을 중요

주: 증기기관은 인간의 근육에 의해 작동하는 보행능력을 기반으로 한 공간구조를 완전히 바꾸는 데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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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하며, 중세도시의 연속적이며 변화하는 시각적 경험의 연속 체를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Cullen.

1961. p17).

여기서 한 가지 중 요한 것은 시각적 경 험의 주체는 사람, 걸 어다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한때 유행처 럼 지자체에서 도입 하였던 도시 경관 관 련사업의 내용을 보 면, 특히 주요 차량 진입로 주변의 교량

디자인을 개선하거나 도로변에 가로시설물을 설치하여 도시의 특정 이미지를 구현 하고자 하는 시도가 많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사업의 장점과 단점을 논의하기 이전 에 중요한 것은 걸어다니는 사람의 관점보다 차량을 탄 사람의 관점을 중요하게 생 각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러한 시각의 문제는 차량을 탄 사람에게는 1, 2분에 불 과한 시간 동안 스쳐 지나가는 경관임에도 그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 걸어다니는 사람에게 그 경관적 장치들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에 대해 충분히 고려하지 않 는다는 점이다.

고든 쿨렌은 시각적인 경험의 연속체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강조하였지만, 우 리는 사실 인간의 공간적 경험을 시각에 국한할 필요가 없다. 조금 더 확장해본다 면, 우리는 공간에서의 경험의 연속체를 어떻게 확보할지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

왜 연속체인가? 좋은 경험, 신기한 경험을 강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왜 연속체 를 이야기하는가? 우리가 하나의 도시에서 원하는 경험이 온갖 간난신고를 겪고 기가 막히도록 좋은 하나의 장면을 경험한 이후 다시 우울하고 지루한 여정을 거 쳐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추석 귀향길에 비유할 수 있을 법하다. 10시간이 넘게 차 안에서 녹초가 되도록 버티고, 때로는 화장실도 제대로 가지 못한 채 고역을 치르다가, 고향에 도착해서 잠시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다시

<그림 2> 보행자의 이동에 따라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시각적 경험

출처: Cullen.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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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체력과 정신력을 소모하며 귀경을 하는 길은 그만큼 우리에게 소중하기는 하지만, 일상 속에서 바라마지 않는 공간 체험은 아닐 것이다.

하나의 장면을 위해 영화를 보지는 않는다.

우리의 감동은 일련의 연속적인 장면이 연결되 어 큰 그림을 구성하고, 그 총체적인 합으로 나 타난다. 우리의 공간 체험이 정교하게 준비된 하 나의 멋진 장면을 위해, 그저 그렇고 음울하고 지루한 체험의 시간을 참아야 하는 식이라면(마 치 대입을 기다리는 고3 수험생처럼) 이는 우리 가 원하는 삶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름다운 건축물, 고풍스러운 식당, 훌륭한 음악당이 공간 속의 섬 또는 점으로 존재하고, 그 섬과 점을 잇 기 위해서는 차량 속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 야 하는 도시는 이미 좋은 도시공간으로 보기 어 렵다. 구슬이 서 말이어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 담은 여기에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함께 식사하 러 가기 위해 차를 타고, 다시 차를 마시기 위해 서 차를 타고, 산책을 하기 위해 공원을 가러 다 시 차를 타야 하는 도시는 도시가 아니라 섬들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연결되어 있더라도 보행자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가로환경이라면 보행자들은 차량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배를 타 야만 이동할 수 있는 섬처럼 도시의 각종 시설들 은 부유하게 될 것이고, 차를 타고 이동하는 사 람들을 위해 주차장으로 그 사이를 채우며 보행 자를 더욱 감소시킬 것이다. 시설의 밀도가 커질 수록 주차장은 더욱 커지고, 그 시설은 더욱 섬 처럼 되어갈 것이다. 이러한 섬들의 사이공간은 죽은 공간, 로저 트랜식이 말하는 잃어버린 공간 이 된다(Trancik. 1986. p3).

옥수수에 깜부기가 끼듯, 잃어버린 공간이 사 이사이에 잔뜩 끼어 있는 도시공간에서는 그 공 간들을 건너뛰기 위해서 우주복처럼 자동차가 필요하다. 잃어버린 공간이 물리적으로 존재하 지만 그 공간에서 우리는 아무런 체험도 기대하 지 않게 된다. 따라서 체험의 연속성을 확보하 기 위해서 우리는 자동차라는 우주복을 입고 잃 어버린 공간을 건너서 의미 있는 장소들의 섬으 로 건너다녀야 한다. 이 우주복은 비싸고 에너 지 소비가 심하며, 공간을 낭비하고, 지구를 데 우는 온실가스를 내보낸다. 어떤 이유로든 비싼 돈을 주고 구매한 자동차의 효용을 최대화하기 위해서는 내구연한 내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주 행거리를 유지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동 차의 운행에 적합한 도시공간이 필요하다. 이렇 게 번거로운 우주복, 즉 자동차를 널리 이용하

1) “언제나 교통문제를 구획화의 문제와 연결시켜야 한다. (중략) 개인의 시간, 삶을 잘 분리된 얇은 조각들로 잘라내 한 조각마다 수동적 소비 자가 되게끔 하고, 일, 문화, 소통, 기쁨, 필요의 충족, 개인적 삶 등이 다 같은 하나의 것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끔 한다.”(앙드

레 고르. 2008. p92 일부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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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소유하게 되면서 자동차 를 위한 주택, 사무실, 상업 공간 등의 공간구성이 이루 어지고 이로 인해 보행이라 는 간편한 이동수단은 매연 과 분진 속에 떠 있는 섬들 사이에서 더욱 불리한 여건 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조각난 도시의 길

잃어버린 공간이 잔뜩 섞여 있는 우리의 도시환경은 이 미 하나의 도시라고 보기 어 려운 상태가 되어버린다. 단 절되고 분절된 개별공간들 의 집합은 개별공간이 아무 리 아름답게 꾸며지더라도, 자동차를 위한 도로에 연결

된 끝없는 휴게소들의 연속체에 불과하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이 휴게소들이 철저하게 분화된 공간이며 내부지향적 인 공간이라는 점이다. 자동차는 고속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이동 중에 주변환경 과 충분한 상호작용을 하는 것을 막고 이동에 집중하게 만든다. 따라서 자동차 중심의 시설들은 주변환경과 어떻게 연결되어야 하는지 고민할 필요가 없고, 주 차장과 자동차의 진출입만 신경 쓰면 된다. 개별 시설의 내부공간 구성의 완결성 이 가장 중요하며, 주변의 환경에 미치는 효과는 상대적으로 별로 중요하지 않 고, 주변 가로환경의 질도 그다지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 인접한 가로에 대한 관 심과 배려가 없는 시설들이 즐비하게 들어선 공간은 이미 공공성을 상실한 조각 난 도시가 된다.

차량이 질주하는 굉음이 울리는 넓은 간선도로, 필로티로 만들어진 주차장이 인접한 텅 빈 보도, 자동차로 이용하기 편리한 건물 전면의 주차장 등이 가득한 도 시공간은 외부공간에서의 다양한 인간 활동을 담아내기 어렵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림 4>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의 일부 지역

주: 넓게 펼쳐진 주차장 위에서 고층건축물이 유동하고 있다.

<그림 5> 고속도로 휴게소의 모습

주: 자동차 중심 도시의 극단이 형상화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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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부지, 운동장, 음악당, 바닷가 등을 다시 차 를 타고 찾아간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곁에 두고 살아야 할 녹지나 공공공간을 자동차에게 양보 한 후, 일부러 에너지와 시간을 소비하며 찾아가 야만 하는 곳으로 대상화한 것이다. 대상화된 사 물은 우리의 인식에서 벗어나 다시 독자적인 영 향력을 우리에게 미치게 된다.

최근에 분양하는 아파트 단지는 녹지율이 높 고, 주차장을 지하화하고, 지상의 보행체계를 강 화하는 등의 매력적인 내용을 강조하고 있다. 어 떤 아파트에서는 심지어 어린이를 위한 풀장을 설치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파트 단지의 외부에 는 그렇게 매력적인 환경이 조성되어 있지 않다.

공공공간에 비해 선호도가 높은 사적공간은 외 부인에게 배타적으로 구획할 수밖에 없다. 일단 구획이 이루어지면 단지의 외부공간에 대한 관 심과 배려는 사라진다. 어차피 차를 타고 빠르게 지나가면 그만인 외부공간은 적절한 수준의 교 통흐름만 유지될 수 있다면 나머지는 그다지 관 심 가질 필요가 없게 된다. 특히 보행환경에 대 한 관심이야말로 고려대상이 되기 어려운데, 당 장 단지 외곽의 무미건조한 담장과 큰 단지에서 발생하는 교통량을 수용하기 위한 간선도로만 해도 일단 보행자를 위한 공간을 구성하기에는 어려운 조건이다.

공공공간에 대한 사람들의 무관심이 커져갈 수록, 사적공간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고, 단지 내부의 쾌적함(Amenity)이 증가할수 록 단지 외부와의 경계는 점점 높아지고 견고해 진다. 이는 필연적으로 도시공간의 분화, 상업 화와 연결된다. 결국 게이티드 커뮤니티(Gated Community)를 선택하는 것은 중산층 이상의 필연적인 귀결이 될 것이다. 공공성의 희생을 통 해 우리는 값비싼 공간을 소비하는 사람들의 견 고한 사적영역과 그러한 소비를 할 경제적 능력 이 없어 범죄가 수시로 발생하는 황량하고 느슨 한 사적영역으로의 분화를 경험하게 된다. 느슨 한 도시공간에 대한 공포와 그에 대한 적개심, 불신이 늘어나게 된다. 이를 마이크 데이비스는 요새도시(Fortress City)라 부른다.2)

우리가 원하는 도시가 과연 이러한 요새도시 인가? 서로에 대한, 그리고 공공에 대한 불신과 공포가 만연하고, 그에 대한 사적인 성곽 또는 방어장치를 겹겹이 두르고 사는 것이 과연 대안 이 될 수 있을까? 이런 측면에서 보행도시는 좀 더 간편하고 편리한 삶을 구현하는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수수하지만 정겹고 에너지 소비수준이 낮으며 환경에 미치는 영향이 적은 집에서 출발하여, 1톤이 넘는 차에 갖가지 유지 비용을 들이고 지구상에 얼마 남지 않은 화석연 료를 연소시켜 온실가스를 발생시키지 않으면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며 우 리가 원하는 일련의 장소들을 마음 놓고 경험하 고, 사람들을 만나고, 집에서 충족시킬 수 없는

2) “우리는 이제 정말로 풍족함이 갖추어진 요새화된 감옥과 범죄화된 가난한 이들에 대해 경찰이 전투를 벌이는 공포의 장소들로 거칠게 나누 어져 있는 요새도시에 살고 있다. (중략) 요새도시에 지어지는 건축물은 벙커와 같은 건축적 결과를 낳는다. 이는 적대적인, 또는 적대적이

라고 가정하는 외부환경에 대한 적대적인 건축물의 외관을 정당화한다.”(Davis. 1990.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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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들을 체험한 후 다시 가벼운 발걸음으로 가벼운 집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 은 아닐까? 우리는 우리의 신체를 떠나 더 많은 기계와 더 많은 에너지, 더 많은 노력을 들여 계층을 분리하고, 장소를 분화시키고 상업화시켜 더 많이 이동하면 서, 도시공간을 불신과 공포의 장소로 열화시킬 이유는 없다. 반만 년 동안 우리 나라의 역사에서 공공공간의 질서를 지켜오는 데 필요 없었던 수만 개의 CCTV 저편의 눈들이 우리가 알 수 없는 빈곤층이나 노숙자,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으로 부터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우리의 사생활을 감시의 눈 아래 기꺼 이 노출시키는 것이 우리가 희망하는 도시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돈만으로는 살 수 없는 것: 보행도시

세계적으로 그리 뒤처지지 않는 경제력을 갖추게 된 우리나라가 이제는 유럽의 어느 선진국 못지않은 보행환경을 과시할 만도 한데, 현실은 우리의 바람과는 다 소 차이가 있다. 보행환경에 대한 관심이나 예산도 예전 같지 않게 늘어났지만 보 행환경의 실질적인 개선, 나아가 보행도시의 실현을 위해서는 다소 다른 접근이 필요한 것 같다. 보행환경 개선 사업이 도로나 보도를 중심으로 많이 이루어져왔 고, 그 나름대로의 성과를 거두어왔지만 우리가 바라고 동경하는 좋은 보행환경 은 생각만큼 구현되지 않은 것 같다. 그렇다면 먼저 우리가 걸어다니면서 이른바 보행자로서 바라는 체험은 어떤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보행을 하면서 원하는 것은 생각보다 간결하다. 공간 속에서 즉각적 이고 연속적인 체험, 총체적인 환경을 원하고 나아가 호혜적인 교환과 경험을 선 호한다. 즉각적이고 연속적인 체험을 선호한다는 것은 자동차, 엘리베이터 등과 같은 기계장치를 통해 공간을 구분하여 움직이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다는 의미 다. 자동차나 엘리베이터 등을 이용하는 순간에는 공간에 대한 체험이 단절되고 왜곡되기 때문이다. 하나의 동물로서 인간이 자신의 신체를 일정한 상자 안에 집 어넣고 그 상자가 옮겨지도록 하는 체험은 육체적으로 쉽게 받아들여지기 어렵 다. 총체적인 환경에 대한 선호는 되도록 하나의 장소와 인접한 장소의 유기적인 연결을 통해 더 다양한 선택의 가능성을 확보하면서, 인식적으로 하나의 연결된 의미의 계를 형성하는 데 큰 의미가 있다. 괜찮은 레스토랑 하나를 원하기보다는 그 레스토랑 주변의 보도, 쓰레기통, 가로수, 차도, 인접한 가게 등의 도시환경 전체가 쾌적하고, 다양하고, 즐겁게 구성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렇게 총체적인 환경을 체험하면서 보행자는 하나의 장소, 하나의 점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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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은 상업적인 사적 공간에 한정되지 않은 도시 공간의 구성을 의미한다. 대규모 쇼핑몰이나 게 이티드 커뮤니티의 경우 아무리 매력적인 공간 을 체험한다고 해도 결국은 사적영역의 경계 안 으로 한정될 뿐이고, 그 외부에는 다시 메마른 공공공간이 남아 있을 것이다. 상업화된 사적공 간은 소비를 위한 곳이고, 호혜적인 교환이나 인 접장소로 사람들을 연결시켜주는 기능 등은 부 차적인 고려 대상도 못 된다.

도시공간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일상적으 로 만나야 하는 보행공간이 공공공간에 대한 체 험과 공공공간에 접하여 이용되는 사적인 공간 의 체험이 빈틈없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도록 공 간이 조성되고 시간적으로도 연속적인 체험을 보장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면 바람직한 보행환 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즉각성, 연속성, 호 혜성 등을 생각할 때 보행은 다시 우리 스스로 의 신체로 돌아가는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리고 우리의 근육의 움직임을 기반으로 이동하 면서 공간을 즉각적으로 향유하고, 하나의 장소 에서 인접한 장소로 연속적으로 이동하면서 소 비의 대상이 아닌, 호혜적인 체험이 이루어지는 장소들로 짜인 도시를 보행도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느끼고 이동하고 가 꾸고 나누는 도시를 DIY(Do It Yourself) 도시 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보행도시를 가꾸기 위해 보도의 시설물을 바 꾸는 것은 그 시작일 수는 있어도 전부가 될 수 는 없다. 공간을 나누고, 이용하는 과정에서 우 리가 무엇을 선호하는지 묻고, 사람들이 더 좋아

한들 자동차를 위한 도시가 제대로 작동할까? 해 외여행을 다니면서 우리가 부러워하는 다양하고 즐거운 체험이 가득한 도시는 자동차가 중심이 되어서는 만들기 어렵다. 그 속도와 덩치로 우리 의 도시공간을 지속적으로 왜곡하는 자동차의 덫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보행자를 중심으로 도시를 재편할 필요가 있다. 가로시설물이나 보 도포장을 아름답게 바꾸는 것도 좋지만 보행도 시는 좀 더 근원적인 질문을 우리에게 하고 있다.

우리가 도시에서 과연 어떠한 체험을 원하는지 먼저 숙고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앙드레 고르. 2008. 에콜로지카. 서울 : 생각의 나무.

오성훈·남궁지희. 2011. 보행도시: 좋은 보행환경을 위한 12가지 조 건. 경기 : AURI.

Cullen, Gordon. 1961. The Concise Townscape. New York : Reinhold Pub. Corp.

Davis, Mike. 1990. “Fortress Los Angeles: the Militarization of Urban Space”. Variations on a Theme Park. New York : Hill and Wang.

Soderstrom, Mary. 2008. Walkable City: From Haussmann’s Boulevards to Jane Jacobs’ Streets and Beyond. Montreal : Vehicule Press.

Trancik, Roger. 1986. Finding Lost Space: Theories of Urban Design.

New York : Van Nostrand Reinhold Company.

참조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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