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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 월정사 거쳐 명개리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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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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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잃고, 길을 물을 때가 있다. 나는 어디로 가기 위해 어디에서 출발했고, 지금 어디까지 와 있고, 어디를 향 해 가고 있는가? 알 수 없어서 내가 내게 물어도 해답은 없다. 왜냐하면 아직도 내가 가야 할 그 길이 어떤 길인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다양한 길과 방법을 통해 나의 진리에 이르렀 다. 내가 다리 하나만으로 먼 곳을 내려다볼 수 있는 높 이에까지 이른 것은 아니다. …… 나는 길을 물어가며 길을 찾으려 시도했다. 시도와 물음, 그것이 나의 모든 행로였다. …… 이것이 이제는 나의 길이다. 너희들의

길은 어디 있는가? 나는 내게 ‘길’을 묻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답했다. 모두가 가야 할 단 하나의 길은 존재하 지 않는다고!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도 써지지 않았다.”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 ‘중력의 영에 대하여’에 실린 글처럼 아직도 그 길은 끝을 보여 주지 않고, 어디가 끝인지 모르게 이어져 있으며, 어쩌 면 그 길의 끝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길에서 길을 찾기 위해 떠난 오대산 행은 여행일까 아 니면 일상으로부터 잠시 떠나는 일종의 탈출일까? “그 러나 진정한 여행자는 떠나기 위해서 떠나는 사람이다”

ㅣ 우리 옛길 걷기 ㅣ24

신정일 | 문화사학자, 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 이사장, 「새로 쓰는 택리지」 저자(hwang-sj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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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보들레르가 말한 것처럼 그냥 떠나는 사람일까?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이런저런 생각의 나래를 펼치 다가 월정사에 도착한 것은 아침 햇살이 환하게 내려 비 추는 7시 30분경이었다.

「삼국유사」에는 조계종 제4교구의 본사인 월정사의 창건유래가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중국 오대산(청량산)에서 문수보 살을 친히 보았으나 범계(梵戒)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 다. 어느 날 노승이 찾아와 범계를 가르쳐주고, 또 불사 리를 주면서 “신라 하서부(河西府)에 1만 문수(文殊)가

있으니 그곳에 봉안하라” 하므로 귀국하여 봉안할 곳을 찾는 중에 이곳을 보니 중국의 오대산과 비슷하므로 오 대산이라 이름 짓고 탑을 세워 가지고 온 불사리를 봉 안하였다고 한다. 또한 민지(閔漬)가 쓴 「봉안사리 개건 사암 제일조사 전기(奉安舍利開建寺庵第一祖師傳記)」에 인용한 「대산본기(臺山本記)」에는 이때 그가 머물던 곳 이 바로 현재의 월정사 터이며, 자장은 훗날 다시 8척 (尺)의 방(房)을 짓고 7일 동안 머물렀다고도 전하고 있 는 것으로 미루어 이 절은 643년 자장율사가 건립했다 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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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보살이 머무는 성스러운 땅으로 받들어지는 이 절은 한국전쟁 당시 깡그리 불타버려 역사의 흔적이 거 의 남지 않았다.

월정사에는 적광전 앞 중앙에 서 있는 팔각 구층석탑 (국보 제48호)과 그 탑 앞에 두 손을 모아 쥐고 공양하 는 자세로 무릎을 꿇고 있는 석조보살좌상(보물 제139 호)뿐이다.

적광전 앞 석탑은 자장율사가 건립하였다고 전해오 지만, 고려 양식의 팔각 구층석탑을 방형 중심의 삼층

또는 오층이 대부분이었던 신라시대의 석탑으로 보기에 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고 고려 말기에 세운 것으로 추 정된다.

자장율사가 월정사를 세웠다는 「월정사 중건 사적비」

(이휘진, 1752년)의 기록에도 불구하고 고려시대의 탑 으로 추정하는 이유는 고려시대에 와서야 다각다층석탑 이 보편적으로 제작되었으며, 하층 기단에 안상(眼象) 과 연화문이 조각되어 있고, 상층기단과 굄돌이 있기 때문이다.

만주를 비롯한 북쪽지방뿐 아니라 묘향산 보현사에 팔 각 십삼층석탑이 있고, 여러 곳에 팔각다형탑이 있는 것 을 보면 고구려 양식을 계승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 도 있으며, 탑의 양식으로 보아 탑을 세웠던 때를 아무 리 올려 잡아도 10세기 이전까지는 거슬러 올라가지 않 을 것 같다.

그 앞에 석조보살좌상이 있다. 팔각 구층석탑 앞에 있는 보살좌상은 웃고 있는 듯이 보이는데 마멸이 심해 보살좌상인지 동자상인지조차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이 보살상은 법화경에 나오는 ‘약왕(藥王)보살상’이라고 하는 견해가 있으나 그 명칭에 대해서는 단정하기 어렵 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자장율사가 팔각 구층석탑을 조 성할 때 함께 세웠다고 하나, 탑과 함께 고려 초기의 작 품으로 추정된다.

월정사라는 이름의 연원은 한국불교연구원이 발행한

「월정사」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사승(寺僧)의 말에 의하면 오대산 동대에 해당하는 만월산 아래 세운 수정암이 훗날 월정사가 되었을 것이다. 월정사의 ‘월 (月)’과 만월산의 ‘월(月)’을 연관시킨 이러한 견해는 주 목할 만하다. 그러나 「동국여지승람」의 ‘강릉불우(佛宇)’

조에는 월정사와 수정암이 별개의 사찰로 기록되어 있 어 사승의 이 같은 이야기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이 월정사 사명(寺名)의 유래를 밝힐 수 있는 자료가 있는 것도 아니다. 아무래도 사승의 얘기대로 만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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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산의 ‘월(月)’과 수정암의 ‘정(精)’을 관련지어 보는 것 은 흥미로운 일이라고 생각된다.”

정추는 그의 시에서 “자장(慈藏)이 지은 옛 절에 문수 보살이 있으니 탑 위에 천년 동안 새가 날지 못한다. 금 전(金殿)은 문 닫았고 향연이 싸늘한데, 늙은 중은 동냥 하러 어디로 갔나”라고 노래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 옛 절이 사라지고 산뜻한 새 절을 바라보는 팔각 구층석탑만이 외롭게 가을 햇살에 빛나 고 있다.

모든 사람의 삶이 가고 오거늘 하물며 사람이 만든 집 이나 석물들이나 무엇이 그리 다르겠는가. “만물은 가고 온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히 돌아간다”라는 말이 있 지 않은가. 가고 오는 것, 그것을 진리라고 여기자고 생 각하며 상원사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일제시대에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딸린 회사가 있었다 고 해서 회사거리라는 이름을 지닌 거리를 지나면 길은 포근포근한 흙길이다.

어쩌다 자동차 한 대씩 지나지만, 그냥 봐 줄 수 있는 길가에 가을이면 노랗고 하얀 물봉선 꽃이 피어나고 재 수가 좋은 날엔 머루나 다래를 따먹을 수도 있는 길, 나 는 이 길을 사랑하고 또 사랑한다. 오대천을 흐르는 시 냇물은 저마다 다른 소리로 길손들의 마음을 어지럽히 상원사 적멸보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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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온 산이 불타듯 타오르는 단풍진 산길을 따라가다 보면 아홉 구비가 있다는 구곡동에 이른다.

거기서도 상원사까지는 제법 멀고, 아직도 멀었는가 싶으면 나타나는 절이 상원사로 조선 제7대 임금인 세 조에 얽힌 일화가 있다.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임금의 자리에 오른 세조가 괴질에 걸려 병을 고치기 위해 월정사를 참배하고 상원 사로 올라가던 길이었다. 물이 맑은 계곡에서 세조는 몸 에 난 종기를 따르던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멀리 떨어져서 몸을 씻고 있는데, 가까운 숲 속에서 놀고 있 는 동자승 하나가 있었다. 세조는 그 아이를 불러서 등 을 밀어달라고 부탁한 뒤에 “어디 가서 임금의 몸을 씻 어주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라고 말하자 그 아이 또한

“임금께서도 어디 가서 문수보살을 직접 보았다는 말 을 하지 마시오”라고 대답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 다. 깜짝 놀란 세조가 두리번거리며 찾았지만 문수보살 의 모습은커녕 아무것도 보이지를 않았다. 그런데 이상 한 것은 그토록 오랫동안 괴롭히던 종기가 씻은 듯이 나 아 있는 것이다. 감격에 겨운 세조는 기억을 더듬어 화 공에게 동자로 나타난 문수보살의 모습을 그리도록 하 였고, 그 그림을 표본으로 나무에 새겨 만들었다는 ‘문 수동자 상’(국보 제221호)을 상원사의 법당인 청량선원

에 모셨다. 다음해에 상원사를 다시 찾은 세조는 다시 한 번 고양이로 인해 이적을 경험하고 그 인연으로 이 절을 크게 중창했다.

현재의 건물은 1947년에 금강산에 자리 잡고 있 는 마하연의 건물을 본 따 지은 것이지만, 이름 높은 범 종이나 석등은 그때 조성된 것들이다.

상원사 답사를 마치고 오대산 답사길에 오른다. 요사 채를 지나 적멸보궁으로 오르는 길은 이보다 더 아름다 운 길을 찾을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아름답다.

여정은 중대사라고 부르는 사자암에 이른다. 조선 정종 2년에 이 태조의 명으로 창건했고, 그 뒤 없어진 것을 1893년에 다시 세웠다가 없어진 것을 다시 세웠다. 오 대산 신앙의 중심이 되는 중대의 사자암에 가면 선사가 이곳으로 올 때 짚고 와서 꽂아 놓은 지팡이가 살아서 해마다 잎을 틔운다는 단풍나무를 볼 수 있다는데 어디 에 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나뭇잎이 휘늘어지고 바람에 흔들거리는 길은 잘 닦 인 산책로처럼 정갈하다. 푸르게 솟은 전나무와 울창한 산들 사이로 아침 안개가 피어오르니 발길은 소풍 나가 는 어린 아이처럼 가볍다.

능선에 올라서니 바람이 매섭다. 한껏 퍼진 햇살이 적멸보궁에 내려앉고, 부는 바람에 누군가의 정성으로 매달려 있는 연등들이 흔들린다.

적멸보궁은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지고 온 석가 모니의 정골 사리, 곧 머리뼈 사리를 모신 곳으로서 오 대산 신앙을 한 데 모으는 구심점으로 나라 안에 석가모 니의 사리를 모신 다섯 보궁 중 한 곳이다.

적멸보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인데 어디쯤 에 석가모니의 머리뼈인 사리가 모셔져 있는지 알 길이 없으며 불상조차 놓여 있지 않다. 건물 뒤쪽 석단을 쌓 은 자리에는 50cm 정도 크기의 작은 탑이 새겨진 비석 이 서 있다. 이것은 진신사리가 있다는 ‘세존진신탑묘’

다. 신앙심이 깊은 불교신자들이 오대산(五帶山)이라면 상원사 고양이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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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적멸보궁에 서서 바라보면 동서 남북으로 적멸보궁을 에워싼 오대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 오대산을 두고

「택리지」를 지은 이중환은 다음과 같이 평했다.

“설악산의 남쪽에 있는 오대산은 흙산으로 바위와 골짜기들이 겹겹으 로 막혀져 있다. 가장 위에는 다섯 개 의 대가 있어 경치가 훌륭하고 대마다 암자가 하나씩 있다. 그중 한 곳인 중 대(中臺)에는 부처의 사리가 안치되어 있다. 상당부원군 한무외(韓無畏)가 이

곳에서 선도를 깨닫고 신선으로 화했는데, 연단할 복지 를 꼽으면서 ‘이 산이 제일이다’라고 하였다. 예로부터 이 산은 전란이 침입하지 않았으므로 국가에서는 산 아 래 월정사 옆에다가 사고를 지어 역조실록을 갈무리하 고 관리를 두어 지키게 하였다.”

예로부터 신령한 산으로 이름이 높은 오대산은 여러 기록에 의하면 신라의 두 왕자인 보천, 효명이 중대 비 로봉에서 1만 문수보살을 친견하였다고 한다. 오대산은 금강산, 지리산, 한라산과 더불어 나라 안에서 가장 신 령스러운 산으로 삼신산에 들었다. 옛 사람들은 이곳을

‘삼재가 들지 않는 명당 터’라고 여겼던 곳이고 ‘어떤 재 앙이 닥쳐도 안전한 땅’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불교의 성 지로 발전하게 된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오대산의 중심을 이루는 줄기인 비로봉 아래 용머 리에 해당하는 곳에 자리 잡은 적멸보궁 터는 조선 영 조 때 어사 박문수가 명당이라 감탄해 마지 않았던 터 다. 팔도를 관찰하다가 오대산에 올라온 박문수는 이곳 을 보고 “승도들이 좋은 기와집에서 일도 않고 남의 공 양만 편히 받아먹고 사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라고 했

다는 곳이다.

적멸보궁에서 1시간 30분쯤 올랐을까. 오대산의 주 봉 비로봉(1563.4m)이다. 홍천, 평창 일대의 산들이 한 눈에 들어오는 비로봉에서 상왕봉을 지나 북대암에 이 르는 길은 잘 닦여진 능선길이다. 북대사에서 홍천군 내 면 명개리로 이어진 길이 나라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임 도라고 얘기하면 과찬일까? 월정사에서 명개리까지 23km의 긴 거리를 잊어버리고 걸어본 사람은 알게 될 것이다. 아름다워서 애잔한 길, 그 길을 왜 그대로 남겨 두어야 하는지를.

명개리 가는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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