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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학교 BK21+ 글로컬 역사문화 전문인력 사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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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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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 인문 도시의 탄생

장 문 석(영남대 역사학과) I. 피렌체, 인문주의의 고향 피렌체(Firenze)는 한때 유럽인들이 늘 가보고 싶고, 또 가야만 했던 선망의 도시였다. 그 랜드 투어의 시절 혹은 20세기 전반까지 영국의 상류층은 자신의 부와 교양, 여유를 입증하 기 위해 필수적으로 방문해야 할 곳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중요한 방문지가 바로 ‘플 로렌스(Florence)’, 즉 피렌체였다. 사실, 어떤 점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고 할 수 있 다. 이 작은 도시가 지구 곳곳의 사람들을 자석처럼 끌어당기고 있는 것이다. 피렌체의 어 떤 면이 그런 자력을 발산했을까? 피렌체는 원래 고대 로마 식민시로 시작되었다. 특히 카 이사르(Caesar)의 제대병들을 위해 마련된 정착지로서 발전했다. 피렌체라는 이름의 유래는 정확치는 않지만 ‘흐른다’는 뜻의 ‘Fluentia’를 어원으로 했다가(아마도 피렌체를 관통하는 아르노 강을 뜻하는 것일 터이다), 나중에 ‘꽃피다’라는 뜻의 ‘Florentia(Flowering)’로 변형 된 듯하다. 이런 어원의 변화를 아는지 모르는지 어쨌든 오늘날 피렌체는 ‘꽃의 도시’로 통 한다. 피렌체의 황금기는 물론 르네상스 시대였다. 피렌체는 르네상스라는 왕관에 박힌 보석이 었다. 가장 위대한 학자들과 예술가들이 피렌체에서 솜씨를 뽐냈고, 피렌체 시민들은 장인 들의 작품을 늘 가까이에서 대할 수 있었다. 로마에서 발에 채이는 것이 유물들이었다면, 피렌체에서는 손에 닿는 것마다 작품들이었던 것이다. 전하는 말로는, 한 피렌체 사람은 임 종 시에 입을 맞출 십자가가 마음에 들지 않다고 하여 더 아름다운 십자가로 교체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그만큼 평균적인 피렌체 사람도 본능적인 감식안을 지니고 있을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는 말일 테다. 그러나 피렌체의 화려한 르네상스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저변을 흐르는 인문주 의(humanism) 정신을 포착해야 한다. 피렌체의 르네상스 예술은 인문주의가 시각적으로 표 현된 것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인문주의란 무엇인가? 여기서도 어원으로부터 시작해보자. 인 문주의의 어원은 고대 라틴어의 ‘후마니타스(humanitas)’이다. 키케로(Cicero)에 따르면, 후마 니타스란 인간성을 도야하고 세련되게 만드는 글과 예술의 힘을 말한다. 이런 후마니타스의 전통은 중세 대학의 ‘교양 교육(liberal arts)’의 전통으로 이어졌다. 전공 과정으로 진입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이수해야 할 교양 과목(문법, 수사, 논리, 천문, 기하, 산수, 음악)의 존재는, 전문가가 되기 이전에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철학을 암시하고 있다. 이는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의 중요한 가치인 ‘교육(paideia)’을 떠올리게 하는데, 이 ‘교육’의 이상은 전문가들의 견해를 판단할 수 있는 일반 시민의 교양과 지혜를 가리킨다. 예컨대 ‘교육’의 이상은 목수가 되려면 목공 장인에게 배우면 되지만, 좋은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시민들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포함한다. 바로 이런 후마니타스와 교양 교육이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전통을 이루고 있고, 다시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전통은 현대의 인문학(humanities)으로 계승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인문주의를 어떻게 요약할 수 있을까? 첫째, 무엇보다 인문주의는 고전 연구를 뜻한다. 그 리스어와 라틴어로 된 고전 문헌들을 발굴하고 강독하며 주해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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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주의자들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가 키케로 문집을 발굴하면서 시작되었다는 말도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고전 연구를 통해서 학문 연 구가 사실적이고 객관적이며 공정해야 한다는 원칙이 확립되었다. 그 점을 잘 보여주는 것이 로렌초 발라(Lorenzo Valla)의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증장(Constantine’s Donation)’ 연구 이다. 그는 이 연구를 통해 기증장이 가짜라는 것을 밝혀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로렌초 발 라의 후원자인 나폴리 왕이 당시 교황과 대립하고 있었다는 정치적 맥락이 아니다. 중요한 것 은 발라의 연구가 단지 문법적 지식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문헌이 속한 역사적 맥락 에 대한 이해와 문헌학적 지식이 결합됨으로써 성과를 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요컨대 텍스트 (text)의 이해는 콘텍스트(context) 바깥에서 이뤄질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텍스트와 콘텍스 트의 결합, 엄밀한 문헌학적 연구와 역사학적 감각의 결합이야말로 인문주의 연구의 정수를 잘 드러내고 있다. 이에 대해 르네상스적 만능인이었던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는 이렇게 노래했다. “진리의 여신 알레테이아(Aletheia)는 시간의 신 크로노스(Chronos)의 딸 일지니.” 둘째, 인문주의의 특징은 인간과 자연을 테마화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그 이전 시대 까지만 하더라도 인간과 자연은 신의 피조물로서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존재라기보다는 신의 영광을 빛내는 존재로서만 의미를 지녔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에 인간과 자연은 이제 그 자 체로 의미 있는 존재로서 간주되기 시작했다. 인간의 내면적 감정이 진솔하게 표출되고 인간 육체의 아름다움이 있는 그대로 표현되며 자연의 경이로움이 예찬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인 문주의자들은 사적인 연애 감정을 스스럼없이 드러내고 자연의 아름다움에 마음껏 도취했 다. 특히 인문주의자들은 유연하고 탄력적인 사고와 인간적이고 현세적인 기준을 옹호했다. 가령 사기꾼 잔니 스키키(Gianni Schicchi)를 미워할 수 없는 사람으로 묘사한 단테(Dante Alighieri)는 그런 점에서 인문주의적 사고의 한 단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럼에도 내가 수도사에 대해 말한 것은 모두 사실이다!”라고 외친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 역 시 인문주의의 현실적이고 비판적인 경향을 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제 중세 기독교적인 선악의 도덕적 이분법은 약화되었고, 인간의 다양성과 복잡성이 새롭게 조명되었다. 천국과 지옥 사이에서 새로이 탄생한 연옥은 그런 점에서 르네상스적 인간상의 변화를 징후적으로 보여준다. 셋째, 인문주의는 인간과 자연만이 아니라 사회와 정치도 테마화했다. 일찍이 살루타티 (Coluccio Salutati)는 인간의 두 가지 삶, 즉 실천적이고 활동적인 삶을 말하는 ‘비타 악티바 (Vita Activa)’와 관조적이고 명상적인 삶을 말하는 ‘비타 콘템플라티바(Vita Contemplativa)’ 중에서 어떤 것이 더 우월하냐는 유명한 논제를 제시했다. 이 논제에 대해 많은 인문주의자들 은 ‘비타 악티바’의 우월성을 확신했다. 그들은 다락방의 철학자보다는 광장의 사상가가 되기 를 바랐던 것이다. 비록 르네상스 말기 신플라톤주의의 유행으로 그런 ‘앙가주망’의 정신은 위 축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르네상스 시기 내내 인문주의자들은 강한 사회 참여 정신과 정치 에 대한 욕망을 표출했다.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가 대표적이다. 그는 절치부심 정 치적 복귀를 노리면서 쓴 자신의 책 『군주론』을 메디치 일가의 유력자에게 헌정했을 정도로 강한 참여적 열망으로 들끓었던 인물이었다. 그의 정치사상 자체가 그런 참여 정신의 바이블 이라고 할 만하다. 그의 정치사상을 한 마디로 요약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는 다양한 저술들을 통해, 또한 덕(virtù)과 운(fortuna), 필요 혹은 필연(necessità) 등의 개념들을 통 해 인간이 운명의 변덕에 휘둘리면서도 자신의 운명에 맞서 싸우는 존재임을 역설하고 있었 다. 그런 점에서 마키아벨리 사상의 ‘정치성(politicità)’은 정치의 탈도덕화를 속류적인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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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표현한 마키아벨리즘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운명의 개척자가 될 가능성을 탐구했다는 사실 자체에 있다고 하겠다. 지금까지 거론된 인문주의자들, 그러니까 단테와 페트라르카, 보카치오, 살루타티, 마키아벨 리 등에서 어떤 공통점을 찾을 수 있는가? 무엇보다 그들은 모두 피렌체 사람들이었던 것이 다. 그러므로 피렌체는 조금의 과장도 섞지 않고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산실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말하자면, 피렌체는 모든 인문주의자들의 고향이자 그 자체 인문주의의 도시였던 것이 다. II. 피렌체 인문주의의 조건 피렌체에서는 1282년에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처음에는 대시민(popolo grasso)들로 이루어 진 7개 대(大)아르테(arte maggiore)가 추첨을 통해 돌아가며 시정을 지배했다. 그러나 당시 인구의 20% 정도만 아르테에 소속되어있었다는 점에서 피렌체의 통치 형태는 고대 민주주의 와는 달랐다. 그러다가 1289년에 농노제가 폐지되었고, 소(小)아르테(arte minore)에 속한 소 시민(popolo minuto)들도 시정에 참여할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당시 ‘시민(popolo)’은 말하 자면 귀족 계급과 하층 계급 사이의 중간 계급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내부적으로는 상층 중 간 계급과 하층 중간 계급으로 나뉘어 갈등과 협력을 통해 피렌체 도시 공화국을 이끌고 나간 것이었다. 그런 가운데 1378년에는 하층 계급 중에서 양털 가공 노동자들인 촘피(ciompi)의 반란이 일어나 한때 극심한 혼란이 야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반란은 곧 진압되고 혼란은 수습 되었다. 그 후 피렌체는 모직업과 금융업이 크게 발달하면서 성공가도를 질주했는데, 14세기 경 피렌체는 인구 10만―당시 파리 8만, 런던 4만―에 문자를 배우는 학동 1만, 산수를 배우 는 학동 1천, 교회 100개, 병원 30개를 자랑했다. 말하자면, 피렌체는 14-15세기 유럽의 메트 로폴리스였던 셈이다.

피렌체의 역사에서 전환점은 1434년에 코시모 데 메디치(Cosimo de’ Medici)가 ‘정의의 기수(Gonfaloniere di Giustizia)’라는 최고 관직에 선출되어 피렌체의 실권을 차지한 일이다. 이로써 ‘메디치 시대’가 시작되었다. 메디치 가문의 지도자들은 공화정을 존중하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가문의 전제 정치를 실시했다. 코시모의 손자인 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e’ Medici)의 시대는 그야말로 피렌체 르네상스의 절정기였다. 미켈란젤로를 발굴한 이도 로렌초 였다. 로렌초는 재능 있는 예술가들과 문인들을 자신의 궁정에 초청하여 그들의 후원하며 피렌체 르네상스를 주도했다. 그럼으로써 그는 “위대한 로렌초(Lorenzo il Magnifico)”로 기 억되었다. 그러나 1492년 로렌초 대공의 사망으로 피렌체 르네상스는 황혼녘으로 저물기 시작했다. 도시 공화국 피렌체의 정치는 역동적이고 심지어 혼란스러웠다. 당시는 도시(comune)와 도 시, 가문(consorteria)과 가문 사이의 격렬한 투쟁으로 점철되었다. ‘메디치 시대’에도 메디치 가문과 다른 가문들 사이의 암투가 치열했다. 특히 파치 가문(Pazzi)과의 투쟁은 끔찍한 유혈 사태까지 불러왔다. 1478년 파치 가문의 주요 인사들이 개입된, 로렌초 메디치를 암살하려는 음모가 있었다. 로렌초는 목숨을 건졌으나, 그의 동생 줄리아노가 희생되었다. 로렌초는 피의 복수에 나서 정적들을 잔인하게 제거했다. 르네상스의 우아하고 기품 있는 문화 뒤에는 근대 국가를 준비하는 르네상스 도시 국가들 내부의 냉혹한 정치 투쟁과 사회 갈등이 벌어지고 있 었던 것이다. 우리는 흔히 르네상스를 가능하게 한 것이 르네상스 지배자들의 후원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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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 생각은 물론 잘못된 것이 아니다. 피렌체의 로렌초 메디치뿐만 아니라 밀라노의 루도비코 스포르차(Ludovico Sforza)와 우르비노(Urbino)의 페데리고 다 몬테펠트로(Federigo da Montefeltro), 만토바(Mantova)의 이사벨라 데스테(Isabella d’Este) 등이 없었다면 르네상스 가 가능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이들 르네상스 지배자들은 자신의 권력을 화 려하게 포장하고 대중의 복종을 이끌어내기 위해 문예 부흥을 정치적 수단으로 삼았다. 스포 르차나 몬테펠트로처럼 용병대장 출신들은 자신들의 비천한 기원을 표백하기 위해 문예 보호 에 힘쓰기도 했다. 부르크하르트(Jacob Burckhardt)의 말대로, 르네상스 지배자들에게는 자 신이 찬탈한 국가야말로 최고의 걸작이었고, 이를 치장하기 위해 고상한 학문과 화려한 예술 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르네상스 지배자들의 후원만으로 르네상스가 가능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필 요조건이었을지는 몰라도 충분조건은 아니었다. 오히려 피렌체 르네상스를 가능하게 한 피렌 체 시민사회의 활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당시에 국가와 정치에 대한 시민사회의 자율 성을 얼마만큼 말할 수 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공화주의적 도시 국가의 시민적 자유는 르네상스 인문주의가 발전할 수 있는 중요한 토양이었다. 오늘날 일군의 역사가들과 정치학자들은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에서 발전한 공화주의적 자유의 개념에 주목한다. 특히 페 팃(Philip Pettit)에 따르면, 공화주의적 자유는 곧 비지배(non-domination)로서의 자유를 뜻 한다. 즉 전통적인 자유주의에서 자유가 구속이나 간섭의 부재를 뜻한다면, 공화주의에서 자 유는 타인의 자의적 지배로부터의 자유를 뜻한다. 따라서 자의적 지배를 제한하기 위해서는 법적 구속이나 간섭이 필요할 수 있다. 아니, 공공의 목적을 위한 법적 구속이나 간섭은 자유 의 침해가 아니라 오히려 자유의 보루라는 것이다. 이로부터 공화주의적 법치의 이념이 나온 다. 여기에 공공의 자유를 보장하는 정치제도와 생활양식에 대한 사랑, 즉 공화국에 대한 사 랑으로서 애국심(patriotism)이 덧붙여진다. 페팃 등의 공화주의 이론가들은 바로 이 비지배 자유와 법치주의, 애국심 등으로 이루어진 공화주의가 마키아벨리에 의해 영감에 넘치는 방식 으로 이론화되었다고 본다. 나아가 이들은 공화주의의 기원을 고대 로마 공화정으로 소급한다. 기원전 509년 왕을 내쫓 고 공화정을 수립한 브루투스(Brutus)의 다음과 같은 말이 로마 공화정의 이념을 웅변하고 있 다. “앞으로 로마에서는 누구도 왕이 되지 못할 것이다. 누구도 로마인들의 자유를 침해하지 목할 것이다.” 이 말에서는 왕의 존재가 자유의 침해와 동일시되고 있다. 공화정은 곧 왕(폭 군)이 없는 체제인 것이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리비우스(Livius)는 공화정 수립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왕을 내쫓은 후 로마인들이 다시 찾은 자유는 무엇보다 법을 사람보 다 강하게 만든 데 있다.” 이 진술에는 페팃이 말한 비지배 자유와 법치주의의 이념이 고스란 히 녹아있다. 살루스티우스(Sallustius)도 비슷한 말을 했다. “로마인들이 자유로운 것은 그들 이 자신들의 법 이외에 어느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법적 개입과 자유의 상관관계는 다음과 같은 키케로의 말에서 간결하게 요약된다. “우리 모두는 자유롭기 위해 법에 복종한다.” 적어도 마키아벨리에게 피렌체는 로마 공화정의 축소판이었다. 물론 로마 공화정과 마찬가 지로 근대 피렌체도 정치 투쟁과 사회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그런 투쟁 과 갈등이 오히려 자유의 확대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갈등론적 사회관을 피력한 것이다. 물론 귀차르디니(Francesco Guicciardini)는 그런 마키아벨리의 입 장을 겨냥하여 “치료법이 좋다고 질병을 칭찬하는 격”이라고 비꼬기도 했다. 그러나 마키아벨 리는 공화국의 본질이 자유에 있음을 확신했고, 공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공화국에 대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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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역설했다. 바로 이 공화국과 시민적 자유야말로 피렌체 르네상스의 토양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한편으로 지배자들은 정치적 정당성을 위해 학문과 예술을 보호했고, 다른 한편으로 시 민들은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자유를 표현하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그리고 도시 공화국의 경 제적 번영으로 그런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제한적이나마 시장이 형성되었고, 예술가들은 그 시장에서 부와 명성을 움켜쥘 기회를 발견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도시 공화국의 자유는 보카 치오나 마키아벨리와 같은 비판적 지성과 미켈란젤로나 다빈치와 같은 창조적 감성이 숨 쉴 수 있는 공기였다. III. 피렌체 예술, 인문주의의 표현 피렌체의 도시 공화국과 공화주의적 인문주의는 위대한 예술로 시각화되었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은 피렌체 공화국의 수호신과도 같은 존재로 여전히 피렌체에 우뚝 서 있다. 그런가 하면 우피치 박물관에는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는 위대한 걸작들이 현란할 정도로 전시되어 있다. 그런 걸작들이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도시에서 그처럼 대량으로 생산되었다는 것이 믿 기지 않을 정도이다. 그런 점에서 피렌체는 단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보석이라고 재차 표현 할 수 있다. 피렌체를 중심으로 발전한 르네상스 미술의 특징에 대해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자연주의 혹은 사실주의의 충동, 그러니까 사물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려는 열정이 돋보인다. 예컨대 조토(Giotto, Ambrogiotto di Bondone)의 그림은 (물론 현대 관객의 시각에서는 그 렇지 않지만) 당대의 관객들에게 “실물과 똑같다”라는 새로운 경험을 안겨 주었다. 인물들의 살아 있는 표정과 옷의 주름 등이 너무도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경탄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그것은 곧 과거와의 단절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와 동시에 그런 자연주의 혹은 사실주의 는 바야흐로 분출되는 시민사회의 활력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제 막 탄생한 시민사회 는 주위의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하는 왕성한 호기심과 소화력을 자랑했던 것이다. 또한 피렌체 미술은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를 통해 합리주의적 충동을 드러내기도 했 다. 이를 자연주의 혹은 사실주의를 잇는 두 번째 단계로 볼 수 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 나, 필경 합리주의는 르네상스 예술의 중요한 특징을 이루고 있었다. 예컨대 통일성과 비례의 원칙이 적용되어 그림이 ‘과학적’으로 그려졌고, 전체와 부분이 통합되어 내적 논리성이 강조 되었다.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은 그런 르네상스 합리주의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서 아름 다움의 보편적 표준을 제공했다. 즉 통일성과 비례의 원칙, 전체와 부분의 통일성, 내적 논리 성 등은 우리가 어떤 작품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게 되는 미적 조건들이기도 한 것이다. 과 연 합리주의는 제 궤도에 들어선 자본주의적 발전과 시민사회의 안정성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정규성과 안정성의 단계를 지나 보수화의 단계로 들어가면 후기 미켈란젤로와 라파 엘로 등이 대표하는 고전주의에 이르게 된다. 부르주아의 ‘귀족화’를 떠올리게 하는 고전주의 는 단조롭고 품위 있는 색을 사용하면서 조화로움과 우아함의 미를 추구하는 예술적 발전의 정점이다. 그러나 고전주의는 단명했고, 르네상스 말기에는 마니에리스모(manierismo) 혹은 매너리즘(mannerism)이라는 새로운 조류가 등장했다. 의도적인 왜곡과 과장을 통해 기괴하고 음울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마니에리스모는 근대 초기의 초현실주의라고 일컬을 정도로 형식과 세계의 긴장을 잘 보여준다. 후기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과 ‘론다니니의 피에타’ 등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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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 긴장을 드러내는 작품들이다. 아닌 게 아니라 1494년 프랑스의 샤를 8세가 거대한 대포를 앞세워 이탈리아를 침공한 이래 이탈리아 도시 공화국들은 외국 지배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었 다. 과연 마니에리스모는 한 이탈리아 역사가의 표현을 빌리면 이탈리아가 “역사의 주인공에 서 무대장치로 전락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이탈리아인들의 위기의식과 데카당스를 반영한 것 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상의 간단한 요약을 되새김해보면, 피렌체를 중심으로 한 르네상스 미술은 다양한 실험적 시도들을 통해 일련의 혁신을 추구해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런 혁신들을 통해 피렌체 르네상스 는 현대적 예술의 개념을 확립했다. 여러 사람이 수공업적 협동 작업을 통해 작품을 만드는 ‘기예(arte)’는 이제 고독한 예술가의 투혼이 발휘되는 정신적 과정으로서의 ‘예술(art)’이 된 것이다. 그리하여 집단은 개인이 되고, 장인은 예술가가 되었다. 이렇듯 ‘예술을 위한 예술’이 라는 현대 예술의 개념은 미켈란젤로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림은 손 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그린다.” 이로부터 예술가의 자의식이 고양되고 그 지위와 보수가 높아졌다. 피렌체 르네상스가 우리에게 준 또 하나의 선물은 ‘천재(genius)’의 개념이다. 피렌체는 수많은 천재들을 낳고 길렀다. 모든 분야에서 최고의 재능을 자랑한 만능인들인 미켈란젤로 와 다빈치가 피렌체 출신―다빈치는 피렌체 인근 빈치(Vinci) 출신―이었고, 알베르티는 제 노바에서 태어났지만 실은 피렌체의 저명한 가문 출신이었다. 이들은 문자 그대로 ‘보편적 인간(uomo universale)’이었다. 완전성과 탁월함에 대한 열망이 그들을 움직였다. 만토바 출 신으로 우르비노에서 활동한 카스틸리오네(Baldassare Castiglione)는 그런 피렌체적 천재 성을 고찰했다. 즉 온갖 에너지를 쏟아 부어 힘든 일을 끝마쳐놓고서도 그저 어렵지 않았다 는 듯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태도를 ‘스프레차투라(sprezzatura)’로 부르고, 이를 천재의 조건으로 삼은 것이었다.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들이 천재이기 때문에 쉽게 해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그릇된 생각이다. 그들도 고통과 싸워가며 성취해낸 것이 다. 카스틸리오네의 고찰을 입증하는 것은 피렌체의 천재 미켈란젤로였다. 시스티나 예배당 의 천정화 ‘천지창조’를 그린 그의 고난과 투혼을 상상해보라. 천재성은 저절로 발휘된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스프레차투라는 노력하는 자가 곧 천재라는 진부하지만 특출한 명제를 재확인해준다. IV. 피렌체 인문주의와 혁신 피렌체의 인문주의와 그 시각적 표현으로서 예술은 혁신적 사유와 스타일을 통해 놀라운 성 취를 이뤄냈다. 그런 혁신의 본질은 인간과 세계를 보는 눈 자체를 일신했다는 데 있다. 예컨 대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은 기독교적 죄의식에서 해방되어 인간의 육체에 깃든 아름다 움을 새로 볼 수 있게 했다. 또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도덕에서 해방된 정치의 자율성을 다른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주었다. 물론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의 짧은 종교 개 혁 시절에 다시금 보티첼리가 죄의식에 사로잡혔고, 마키아벨리가 기독교의 종교성을 재차 호 소했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자신들이 바꾸어놓은 시선을 원래대로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런 시선의 혁명을 대표하는 것들 중에는 피렌체의 랜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Santa Maria del Fiore) 성당을 꼽을 수 있다. 이 위풍당당한 성당은 이웃 도시 시에 나(Siena)와의 경쟁의 산물로서, 그 거대한 돔이 마치 풍선처럼 사뿐히 얹혀 있는 것 같은 놀 라운 스펙터클을 보여준다. 그것은 피렌체 인문주의와 예술의 혁신적 잠재성을 고스란히 드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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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다. 피렌체의 반(反)고딕주의를 대표하는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의 돔 건축의 설계자인 브 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는 원래 조각가였다. 그는 피렌체 산 조반니 예배당의 청동 문 제작자를 뽑는 경연 대회에서 기베르티(Lorenzo Ghiberti)와 맞붙었다. 이 경연과 관련해 서는 여러 버전의 설들이 있지만, 어쨌든 브루넬레스키는 고배를 마셨다. 패배한(혹은 자진 사 퇴한) 브루넬레스키는 쓰라린 마음을 안고 피렌체를 떠나 로마로 갔다. 거기서 조각 대신 건 축을 공부했다. 고대 로마 건축을 10여 년 간 연구했다. 그 연구의 결과가 피렌체의 산타 마 리아 델 피오레 성당이었다. 성당의 거대한 돔은 바로 고대 로마, 나아가 이슬람 건축에 대한 그의 관심과 지식이 없었다면 실현될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브루넬레스키의 위대한 혁신은, 혁신 일반에 대한 어떤 직관적 통찰을 우리에게 제 시하고 있다. 즉 혁신은 마주침(encounter)의 결과라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의 마주침, 거기 와 여기의 마주침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는 ‘타자들’과의 마주침이 혁신을 가능하게 한다. 타자들은 실은 오래 전부터 우리 주변에 있어온 것이기도 하다. 이미 있어온 것들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때, 그리고 그 있어온 것들의 시간과 공간을 이동시킬 때 혁신 은 시작된다. 브루넬레스키는 오래 전부터 있어온 것들을 고대에서 현재로, 로마에서 피렌체 로 그 시간과 공간을 옮겨놓음으로써 위대한 혁신을 일궈냈다. 그렇다면 혁신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유에서 유를 창조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찍이 브루노 (Giordano Bruno)가 노래했듯이,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는 법”이다. 그렇듯 모든 것은 이미 이 우주 속에 존재한다. 지금, 여기에 있지 않지만 다른 시간과 공간 속에 이미 존재해 온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야말로 혁신의 출발이다. 그러기 위해 당장 역사를 둘러보라. 역사는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보고(寶庫)이자 타자성들의 집적체이다. 우리는 지나간 다른 곳 에 존재한 것들을 발굴하여 오늘의 우리 곁에 옮겨놓음으로써 새로움을 창조하는 혁신을 수행 할 수 있다. 그런 혁신의 사례는 현대에도 많다. 가령 20세기 초 자동차의 대량 생산을 가능하게 한 포 드(Henry Ford)의 조립 라인(assembly line)의 아이디어는, 실은 시카고와 신시내티 등지의 도축장에서 얻은 것이었다. 이미 도축장에서는 작업자가 움직이지 않고 작업 대상(도축된 고 기)을 이동시킴으로써 연속적으로 공정이 진행됨에 따라 도축된 고기를 부위별로 해체하여 포 장까지 완성한 것이다. 이는 가히 해체 라인(disassembly line)이라고 할 만하다. 포드는 이 해체라인을 자동차 생산에 역순으로 적용해 조립 라인을 완성한 것이다. 즉 조립 라인의 선례 는 이미 도축장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포드는 무에서 유가 아니라 유에서 유를 창조 한 셈이다. 그런가 하면 포드의 경쟁자인 GM의 슬론(Alfred Sloan)도 이른바 유연한 대량 생산 (flexible mass production)의 개념을 적용하여 시장과 소비자의 기호 변화에 민첩하게 반응 하는 새로운 시스템을 완성했다. 그는 “모든 호주머니 사정과 사용 목적에 맞는 자동차”의 생 산을 내걸고 시장을 분할하여 다양한 종류의 자동차 생산을 추구했다. 특히 슬론은 마케팅의 중요성에 눈을 떠 공격적 마케팅 전략을 구사했다. 그 중에는 자동차의 할부판매제도 있었는 데, 이는 당시에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할부의 개념은 이미 회계학과 다른 분야의 마 케팅에 이미 적용되고 있었다는 점에서 슬론의 창안물이 결코 아니었다. 슬론 역시 무에서 유 가 아니라 유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다. 즉 할부의 개념을 자동차의 판매에 적용했을 따름인 것이다. 20세기 초 자동차 산업은 혁신에 대해 많은 것들을 알려준다. 포드는 철저히 생산자 중심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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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사고했다. 그는 단지 빨리 마른다는 이유로 검은 색 도료만을 고집했고, 자동차의 할부판 매는 말도 되지 않는다고 여겼다. 반면, 슬론은 자동차 색상을 다변화했고, 할부판매를 도입하 여 시장을 확대했다. 그렇듯 생산자에서 소비자 중심으로 시각을 전환함으로써 자동차 산업의 미래를 뒤바꿔놓았다. 요컨대 생산적·도구적 인간(Homo Faber)에서 소비적 인간(Homo Consumus)으로 패러다임의 이동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소비적 인간에서 다른 어 떤 인간으로의 이동이 있을 것인가? 바로 이 지점이 오늘날 운위되고 있는 4차 산업 혁명과 인문학의 관계를 이해하는 핵심일 테다. 그리고 여기서 타자성과의 마주침과 그에 대한 성찰 (reflection)의 힘이 새삼 강조될 필요가 있다. 포드와 슬론의 경우만 봐도 그 점을 쉬이 알 수 있다. 포드의 조립 라인과 슬론의 할부판매제는 이미 타분야에 존재한 것들로서 그 우발적 마주침 속에서 탄생했다. 그러나 포드 외에도 실로 많은 사람들이 도축장을 보았을 것이고, 슬론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할부 제도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런 마주침을 자신의 문제로 성찰하는 것이다. 그런 성찰이 없었다면, 마주침은 아무 의미 없는 스쳐지나감에 불과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성찰이란 무엇인가? 성찰의 쉬운 정의는 일찍이 뉴턴(Isaac Newton)이 말했듯이, “그것을 곰곰이 생각하는 것”이다. 성찰은 검색이 아닌 사색을 요청하며, 사색을 위한 독서를 필요로 한다. 독서는 눈이 아니라 머리로 읽는 것이며, 이는 그림은 손이 아니라 머리로 그린 다는 미켈란젤로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나아가 성찰의 조금 어려운 정의는 ‘근본을 따져 묻는 것’이다. 성공의 비결이 아니라 성공 자체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다. 처세술이 아니라 인생 자체의 의미를 따져 묻는 것이 곧 성찰이다. 인문주의적 시각에서는 성공의 의미를 되 묻는 사람이 이미 승자이고, 인생의 의미를 따져 묻는 사람이 이미 현자이다. 일찍이 미켈 란젤로가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날 힘겹게 눈밭을 헤치고 어디론가 바삐 가고 있었다. 이 광 경을 본 한 추기경이 그에게 어디를 가느냐고 물었다. 이에 미켈란젤로가 대답했다. “배울 것이 있어 학교에 갑니다.” 바로 배움과 탐구에 대한 열망이야말로 거듭 강조하거니와 인문 주의의 핵심이었다. 미켈란젤로의 그런 열망이 15세기의 피렌체를 위대한 인문 도시로 탄생 시켰다. 그렇다면 21세기의 인문 도시들을 위해 그런 열망은 어떻게 조직되고 표현될 것인 가? [참고문헌] 듀건, 크리스토퍼, 『미완의 통일 이탈리아사』, 김정하 역 (개마고원, 2001). 뵐플린, 하인리히, 『르네상스의 미술』, 안인희 역 (휴머니스트, 2002). 부르크하르트, 야콥,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안인희 역 (푸른숲, 1999). 비롤리, 모리치오, 『공화주의』, 김경희·김동규 (인간사랑, 2006). 스키너, 퀜틴, 『마키아벨리의 네 얼굴: 군주론 너머 진짜 마키아벨리를 만나다』, 강정인· 김현아 (한겨레출판, 2010). 스탕달, 『스탕달의 이탈리아 미술 편력』, 강주헌 역 (이미고, 2002). 장문석, 『근대정신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민음사, 2011). 페팃, 필립, 『신공화주의: 비지배 자유와 공화주의 정부』, 곽준혁 역 (나남, 2012). 하우저, 아르놀트, 『개정판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2: 르네쌍스, 매너리즘, 바로끄』, 백낙 청·반성완 역 (창작과비평사, 2003). 후지사와 미치오, 『이야기 이탈리아사』, 임희선 역 (일빛,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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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cacci, Giuliano, History of the Italian People, tr. Anthony Paul (Harper & Row, 1971).

참조

관련 문서

[붙임 3] LINC 3.0 사업단 1차년도 참여학과 목록. 단과대학 연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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