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키신저의 남북한 종전 구상
1971년 10월 키신저의 2차 방중에는 중국과 닉슨의 방중 일정 협의와 더불어 공동성 명 초안 작성 부분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키신저의 2차 방중 기간 중반 이후 미·중은 공동성명 초안을 작성하기 위해 논의를 진행했다. 이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초안을 수정했고, 이 과정에서 한반도 관련 문구 역시 변화했다. 여기에서는 미 국 측 자료를 중심으로 미국이 공동성명 초안을 준비했던 내용, 중국과 논의과정에서 한반도에 관한 문구의 수정과정을 살펴봄으로써 저우언라이의 평화협정 주장에 대해 미국식 한반도 ‘평화안’의 변화과정을 살펴보겠다.
닉슨 행정부는 키신저의 2차 방중을 앞두고 중국 측에 제시할 공동성명 초안을 마련 해 놓았다. 성명 초안은 닉슨 대통령의 방중 문제, 미·중 관계의 전반적인 원칙, 세계 정세에 대한 전반적인 관점, 미·중 관계 발전의 구체적인 절차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 다. 이 내용을 중심으로 키신저 팀은 아래 <표 8>과 같이 같은 구조의 ‘짧은 초안’
과 ‘긴 초안’ 두 가지의 공동성명 안을 준비했다.
출처: “Draft Joint Communique(Short).” Undated; “Draft Joint Communique(Long)” Undated, Folder Title: POLO Ⅱ Briefing Book Issue and Statements HAK PRC Visit, October 1971(partⅠ), For the President’s Files-China/Vietnam Negotiations, Box 1034, NSC Files, NPL.
짧은 초안(Short) 긴 초안(Long)
Ÿ 방문
Ÿ 양국관계의 전반적 원칙들 Ÿ 세계정세에 대한 전반적 관점 (대만문제)
Ÿ 양자관계
Ÿ 방문
Ÿ 양국관계의 전반적 원칙들 Ÿ 세계정세에 대한 전반적 관점
(대만, 인도차이나, 한반도, 남아시아 문제)
Ÿ 양자관계
<표 8> 미국이 준비한 미·중 공동성명의 두 가지 초안
위 두 초안의 내용 대부분은 유사하지만, 쟁점 지역에 관한 서술에서 차이가 있었다.
‘짧은 초안’은 인도차이나, 한반도, 남아시아 문제를 생략한 데 반해 ‘긴 초안’은 이 사항들에 대한 미국의 구체적인 입장을 포함하고 있다. 이에 관해 최근 연구를 보 면, 미국이 준비한 초안에는 미·중 사이에 합의 가능한 사안들만 있고 주변국에 관한 내용은 없었다는 견해가 있다.99) 하지만 이는 ‘짧은 초안’만을 살펴보았기 때문이다.
‘짧은 초안’ 내 ‘세계정세에 대한 전반적인 관점’ 부분은 대만의 지위 문제와 주 대만 미군 철수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다루고 있고, ‘방문’이나 ‘양자관계의 전반 적 원칙들’, ‘양자관계’의 부분은 일반적인 용어로 작성되었다.100) ‘짧은 초안’만 을 놓고 보면 미국은 중국과 대화에서 대만 문제와 미·중 양국관계 문제만 집중하고 싶다는 의중을 읽을 수 있다. 이에 반해, ‘긴 초안’에는 대만 문제뿐만 아니라 인도 차이나, 한반도, 남아시아 문제에 관해 미국의 입장이 따로 정리되어 있다.
‘긴 초안’ 내 한반도 문제를 두고 미국이 중국과 합의하려 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한반도에서. 미국과 중국 양측은 최근 남북한이 양자 회담을 통한 한반도에서 긴장을 줄이려는 노력을 지지한다. 따라서 미국과 중국은 1953년 정전을 공식적으로 전쟁을 종결하는 협정 (replacing the 1953 armistice an agreement formally ending hostilities)으로 대체하기 위해 남북 한이 서로 수용 가능한 평화적 해결안에 도달하고 이해당사국과 협의하려는 한국 내 두 당사 국에 어떠한 지원도 제공할 준비를 한다(강조는 필자).101)
미국은 ‘긴 초안’에 남북한 종전안을 두고 중국과 합의를 하고 싶어 했다. 미국이 한반도에서 종전에 관한 사항을 삽입한 이유는 키신저의 1차 방중에서 저우언라이가 한반도에서 평화협정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이후 언론을 통해서도 이 문제가 꾸준히 거 론됐기 때문이다. 키신저의 2차 방중에서 중국은 이 문제를 다룰 것이 분명했기 때문 에 이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저우언라이 역시 평화협정의 방식에 관해 구체적인 내용을 말하지 않았지만, 그의 발언을 종합하면 큰 틀에서 주한미군 철수 이후 평화협정과 외세의 간섭 없는 남북한
99) 김남수·신욱희, “1972년 미·중 데탕트에서 ‘미일동맹 문제’ 처리의 의미와 한계,” 한국정치외교사논 총 제37권 1호(2015), 152쪽.
100) “Draft Joint Communique(Short).” Undated, Folder Title: POLO Ⅱ Briefing Book Issue and Statements HAK PRC Visit, October 1971(partⅠ), Box 1034, Series: For the President’s Files-China/Vietnam Negotiations, NSC Files, NPL.
101) “Draft Joint Communique(Long).” Undated, Folder Title: POLO Ⅱ Briefing Book Issue and Statements HAK PRC Visit, October 1971(partⅠ), Box 1034, Series: For the President’s Files-China/Vietnam Negotiations, NSC Files, NPL.
통일을 강조하고 있었다. 중국 측의 이러한 한반도 평화안에 대해 미국 역시 키신저의 2차 방중을 앞두고 자신이 구상하는 한반도 평화안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다만 미 국은 중국 측에게 한국에 관해 협상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인상을 주지는 않는 대신 무 난한 용어로 한반도 문제를 언급하되, “한국민들의 바람에 기반해서 한국 문제의 평 화적 해결을 바란다”는 수준의 문구를 공동성명에 넣는 것은 반대하지 않겠다는 사전 협상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102) 그런데 닉슨은 공동성명에 한반도에 관한 문구를 넣 는 것을 피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닉슨은 10월 14일 공동성명 초안을 검토하면서 키신저에게 인도차이나 문제는 이전보다 더욱 강경하게 나아가고, 일본 문제에 관해서 는 ‘미국이 있는 아시아’보다 ‘미국이 없는 아시아’가 더욱 위험하다는 점을 중국 이 알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고 미국은 아시아에서 계속 주둔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 고 한국에 관해서는 “구두로 해결”하라고 말했다.103) 미·중 관계 개선에서 한반도 문제로 걸림돌로 작용하는 것을 피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긴 초안’에 나타난 미국의 한반도 종전안은 1단계로 남북한이 한 축이 되어 한반 도의 긴장 상황을 줄이기 위해 종전을 위한 협상에 나서고, 2단계로 한반도 정전을 종전 협정으로 대체하기 위해 관련 당사국들과 협의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한반도 종전 방식 으로 남북한 양자와 주위 관련 당사국의 다자적인 협의로 끌어내는 혼합방식을 구상한 것이다. 키신저가 1차 방중에서 일본의 재무장화 또는 일본의 한반도 진입의 차원에서만 한반도 문제를 거론하려고 했던 것에 비하면, 매우 발전된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한반도 종전안은 저우언라이가 제기하는 평화협정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지 만, 한반도 냉전체제의 안정적 유지를 원하는 미국에게 이 안은 자신들이 평화협정의 대안으로 내세울 수 있는 최대 수준의 제안이었다. 물론 남북한 종전안 구상이 중국과 대화에서 나왔다는 것은 한반도 냉전질서를 강대국의 관계 아래에서 관리하겠다는 의 도가 깔린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다만 미국의 종전안은 정전협정의 주체인 북·미 가 아닌 남북한이 주도하는 종전이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북·미가 어떤 식으로든 발생 할지 모르는 군사적 대립 또는 충돌 상황을 통제하기는 어려웠다. 당시 한반도에서 군 사 문제의 기본은 북·미 문제이고 남·북한 군사 문제는 부차적이었다.
키신저의 종전안이 저우언라외와 대화에서 드러난 이후 북한은 이에 호응한 듯한 태 도를 보였다. 1971년 12월 2일 김일성은 “정세가 좋게 발전하면 그것을 혁명에 유리
102) “Korea.” Oct. 12, 1971, p. 6. Folder Title: Briefing book for HAK's Oct. 1971 Trip POLO II(part
Ⅱ), Box 851, Series: For the President’s Files(Winston Lord)-china Trip/Vietnam, NSC Files, NPL.
103) Ibid., footnote 2 재인용.
하게 이용”하고, “남조선 혁명과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실현할 수 있는 보다 합 리적인 방안”을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104) 그리고 미·중 정상회담 약 1달 전인 1972년 1월 10일 김일성은 일본 요미우리신문 기자들과 진행한 인터뷰에서 ‘조선정전 협정’을 ‘남북 사이의 평화협정’으로 바꾼 후에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남북한의 무력을 감축할 것을 피력했다.105) 1972년 2월 27일 발표된 미·중 공동성명에서 미국 이 한반도에서의 긴장상태 완화와 대화 증대 추구를 지지한다고 하자 김일성 역시 남 북한 접촉을 지지한다는 닉슨의 말이 빈말이 아니길 바란다고 언급했다.106) 김일성 역 시 미국의 한반도 긴장완화 모색에 부분적으로 호응하여 전략적으로 대응하겠다는 의 지를 보였다.
문제는 주한미군 철수였다. 북한은 한국전쟁 이후 북한지역에서 중국군 철수가 보여 주듯 한반도에서 외국군대의 철수는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한국전쟁 당사 국들인 중국, 미국의 군사적, 정치적 약속이라고 보았다.107) 이러한 견지에서 보면 남 북한 종전을 통해 한반도에서 군사적 대립의 일부가 해소되더라도, 미군 철수를 반드 시 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키신저의 남북한 종전 모색은 남북한의 약속일 수 있다.
하지만 미군 철수는 한·미관계뿐만 아니라 북·미 간의 정치적 신뢰까지 연결된 문제 였다. 종전 이후 한반도에 평화질서가 구성되고 주한미군을 스스로 철수시킨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북·미 간의 군사대립을 해소하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신뢰였다. 미군의 완전 철수와 그 선행 조건들이 북한에 명확하게 전달되지 않는 상태에서 북한이 미국의 약속을 믿기는 어려웠다. 오히려 북한은 닉슨독트린에 의한 한국의 군비증강 현실을 보면서 미국의 의도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 역시 주한미군 철수 이후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에서 자신의 영향력과 이해관계를 유지를 위 한 뚜렷한 계산표가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주한미군 철수를 약속할 수는 없는 노릇이 었다.
키신저의 종전 구상은 북·미 데탕트가 배제되고, 불완전하게 추진되는 남북한 데탕
104) 김일성, “당간부 양성사업을 개선강화할 데 대하여(1971.12.2.),” 조선로동당출판사 편, 김일성 전 집 제48권, 29~30쪽,
105) 김일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당면한 정치, 경제 정책들과 몇 가지 국제문제에 대하여-일본
‘요미우리신문’ 기자들이 제기한 질문에 대한 대답(1972년 1월 10일),” 조선로동당출판사 편, 김일 성 저작집 27권, 46쪽. 참고로 김일성은 1957년 9월 제2기 최고인민회의 1차 회의에서 남북사이의 군비를 축소하고 정전협정 폐지를 주장한 바 있다.
106) 김일성, “미국 뉴욕타임스 기자들과 한 담화(1972년 5월 26일),” 조선로동당출판사 편, 김일성 저 작집 제27권(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84), 224쪽.
107) 김연철, 70년의 대화, 27-2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