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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소 협력과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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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슨은 세계에서 중요한 국가와 지역으로 미국, 서유럽, 소련, 중국, 일본을 꼽았다.

그는 서유럽 방위에서 미국의 역할 축소, 소련과는 공존공영, 더는 고립될 수 없는 중 국과 경쟁해야 했고, 맹방인 일본의 성장을 고려한 새로운 세계전략이 필요하다고 생 각했다.1) 그는 유럽, 소련, 중국, 일본이 조심스럽게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서로가 맞물리는 균형이 현실적이라고 본 것이다.2) 이념적 양극에 기반한 냉전체제에 서 국제정치적으로는 다극적인 현실이 등장하고 있었다.

키신저는 냉전의 군사적, 정치적, 이념적 대결이 미국 외교의 경직성을 초래했다고 보았다. 미국이 소련과 투쟁을 위해 추진한 봉쇄정책은 대소 협상 기회를 스스로 버리 는 행위이고, 안정적인 국제질서 수립을 방해했다고 여겼다. 그는 많은 신생국의 등장 으로 유럽 중심의 국제정치는 활력을 잃고 있었고, 중국과 소련이라는 공산주의 강대 국과 강고한 적대관계 유지는 국제사회의 불안정성을 가중시키고 있다고 생각했다.3) 국제질서의 불안정성이 증대된 상황에서는 강대국 간‘질서에 대한 합의된 개념’(an agreed concept of order)이 필요했다.4) 물론 이 합의라는 것은 강대국 중심으로 새로 운 합의된 질서를 만드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키신저는 1973년 8월 2일 International Platform Association 연설에서 전후의 세계역 사는 위기관리를 통해 끊임없이 평화를 추구했고, 이것이 모두에게 이익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 중국과 관계 개선 그리고 유럽, 일본의 관계 변화를 통해 이들 주요국의 국제체제에 완전한 참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5) 냉전의 양극보다

1) “91. Memorandum for the President’s File by the President’s Special Assistant(Safire), June 29, 1971, Department of State, FRUS, Foundations of Foreign Policy, 1969~1972(Washington D.C.: United States Government Printing Office, 2003), p. 322.

2) 제임스 E. 도거티·로버트 L. 팔츠그라프 지음, 이수형 옮김, 미국외교정책사, 354~355쪽.

3) 헨리 A. 키신저 지음, 이춘근 옮김, 핵무기와 외교정책(서울: 청아출판사, 1980), 12~13쪽.

4) Henry A. Kissinger, “Central Issues of American Foreign Policy.” Henry A. Kissinger, American Foreign Policy, Expanded Edition(New York: W.W. Norton & Company, 1974), pp. 57~58.

5) Henry A. Kissinger, American Foreign Policy, Expanded Edition(New York: W. W. Norton &Company,

는 냉전의 다극화를 추진하고 이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미국의 국가이익에 도움 이 된다는 생각이었다. 다극화의 추진은 기존의 반공 이념에 기반한 강한 적들에 대한 끝없는 봉쇄가 아닌 이들과 대화를 통해 공동의 이해관계를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냉 전기 새로운 형태의 강대국 중심의 균형적인 질서 창출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아래의 내용은 1972년 2월 9일 닉슨이 의회에 제출한 대외정책 연례보고에 있는 닉 슨 행정부 대외정책의 기본 계획인데, 앞서 살펴본 닉슨과 키신저가 생각하는 것들을 잘 반영하고 있다.6)

- 세계문제에서 미국의 주도적 역할은 필수 불가결함

- 전후 양극체제의 종말은 새롭고 지속적인 평화구조를 창출을 위한 기회를 제공 - 많은 나라가 그 타당성을 수용할 때 그 구조는 구축될 수 있음

- 동맹은 변함없지만, 그 수단은 세계의 변화에 맞게 조정되어야 하고 동맹국은 더 큰 책임을 져야 함

- 적국은 변치 않을 것이지만, 현실적으로 그들의 생각을 인정하고 다룰 준비를 해야 함 - 이에 필요한 것은 상호 자제와 갈등보다는 협상을 통해 갈등하는 이익을 수용하려는 의지임 - 합의 그 자체가 끝이 아님. 모든 국가가 보존하고자 하는 안정적인 평화구조에 이바지할 때

만 이 합의는 항구적인 중요성이 있음

- 따라서 동맹국뿐만 아니라 적들과 협력해 모든 국가가 지분을 갖고 있고 공헌하는 평화의 구조를 향해 나아가야 함(강조는 필자)7)

닉슨 행정부의 대외정책 방향은 동맹국과 관계 조정뿐만 아니라 적대국과 협력해서 각자의 지분을 갖고서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평화구조를 달성하는 것에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대외정책 목표로서 안정적인 평화구조는 실질적으로 모든 국가가 동등하게 참 여하는 것을 상정하지 않았다. 강대국의 이익, 그 가운데서도 미국의 이익이 안정되게 보장되는 평화로운 질서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고 이를 위해서 강대국 간 절제와 협상 이 필요했다. 닉슨 행정부는 열강들 사이의 예측 가능한 이익 추구를 위한 안정적인 세계정치 질서를 구상했기 때문에 미국과 중국, 소련과 관계 개선은 필수였다.8) 물론

1974), p. 185.

6) 키신저에 따르면 닉슨이 몇 차례 의회에 제출한 대외정책 연례보고서는 닉슨과 키신저의 주도로 작 성되었다. 이 보고서는 닉슨 행정부 대외정책의 지침 역할을 하였다. 헨리 키신저 지음, 이현주 옮 긴, 헨리 키신저의 세계질서, 341쪽.

7) “Third Annual Report to the Congress on United States Foreign Policy.” Feb. 9, 1972, https://www.

presidency.ucsb.edu/documents/third-annual-report-the-congress-united-states-foreign-policy(검색일:

2018.11.14.).

8) Marc Trachtenberg, “The Structure of Great Power Politics, 1963-1975.” Melvin P. Leffler and Odd

키신저의 소련, 중국과 관계 개선에 과도한 집중은 세계의 다른 긴급한 문제들을 무시 하거나 열강 관계를 벗어나는 문제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 부작용이 있었으나9) 세계 적인 차원의 긴장 완화에 이바지한 측면이 있는 것은 분명한 듯 보인다. 냉전기 다극 화에 입각한 새로운 냉전질서는 이전의 절대적 파괴, 절대적 승리, 절대적 평화에 입 각한 대결적 냉전정책보다 상대적으로 더 좋은 것은 분명하다. 냉전기 다극화 추진은 닉슨과 키신저의 이상이라고 할 수 있으나 달리 보면 그 즉각적인 기대효과는 냉전체 제를 보다 안정되게 관리하는 데 있었다.10)

새로운 형태의 냉전질서 모습에서 미·소 관계는 어느 나라, 지역보다 중요했다. 소 련과 관계 확대는 냉전질서 변화의 핵심이었다. 미국의 대소 관계 발전은 키신저-도브 리닌 채널이 중심이었다. 이 채널을 중심으로 미·소는 지구상의 많은 쟁점을 두고 대 화와 협상을 진행했고 때로는 갈등하기도 했다. 이러한 쟁점 가운데 초기 미·소 관계 개선의 큰 영향을 준 건 전략무기제한협정(Strategic Arms Limitation Talks, 이하 SALT) 회담이었고, 그 외에 베를린 문제, 중동지역, 중국 문제, 베트남 문제, 양국 경제교류 등 역시 주요한 쟁점이었다. 여기서는 SALT 회담과 베트남 문제를 중심으로 미·소 관계 발전을 간략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SALT 회담은 단순히 미국과 소련 간의 군비제한 협 상의 성격이 아니었다. 닉슨과 키신저의 입장에서 이는 안정적인 냉전질서를 만들기 위 한 핵심 조치였다. 이 회담은 공포를 완화하고 적대적 대결보다는 적과의 대화로 진입 하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정치적 수단이었다. 1960년대 후반 존슨 행정부부터 모색된 미·소의 SALT 회담은 닉슨 집권기에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이 회담을 기회로 삼아 미 국과 소련은 관계개선과 경제교류 증대를 목표로 향해 나아갔다.

1970년 10월 22일 닉슨, 키신저, 로저스, 그로미코(Andrei Andreevich Gromyko, 소련 외무상)과 도브리닌이 한 자리에서 만났다. 이들은 세계질서가 미·소 관계에 크게 좌 우되고 있고, 양국 간 교류 확대가 필요함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 만남에서 닉슨은 미·소 양자 무역과 대화를 증가시키고 군사력 부담을 완화하는 것이 서로에게 이익임 을 강조했다. 이에 대해 그로미코 역시 미국이 추진하는 평화의 방향이 소련의 이해를 존중한다면 미·소 관계는 향상될 것이라고 말했다.11) 미국의 소련에 대한 유화적인

Arne Westad, The Cambridge History of the Cold War, Vol. 2(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0), p. 497.

9) John Lewis Gaddis, Strategies of Containment, p. 336.

10) Mario Del Pero, The Eccentric Realist: Henry Kissinger and the Shaping of American Foreign Policy(New York: Cornell University Press, 2010), p. 9.

11) “77. Memorandum of Conversation.” Oct. 22, 1970, Department of State, FRUS, Foundations of Foreign Policy, 1969~1972, pp. 270~273.

태도는 다음날 유엔에서 행한 닉슨의 연설에도 언급되었다. 닉슨은 연설에서 미국은 소련과 많은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양자 간에는 핵대결 회피, 군비축소, 무역 증 대 등에 공동의 이해가 있음을 밝혔다. 특히 연설에서 그는 SALT 회담을 통해 대결의 시대에서 협상의 시대로 나아가는 것이 미국이 원하는 바임을 밝혔다.12)

우선 미국과 소련은 1971년 5월 탄도미사일 요격체계 조약(Anti Ballistic Missile Treaty, 이하 ABM)에 합의했다. ABM 요구는 소련 측에 의한 것이었는데, 당시 미국은 방어용보다는 공격용 미사일을 제한하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 미국은 탄도미사일 방어 발사대의 수를 양측이 200개로 제한할 것을 요구함으로써 상호 전략적 방어능력을 하 락시키고 동시에 상호확증파괴 능력을 강화해 서로 간에 전쟁 억지를 강화하는 방향으 로 협상에 임했다.13) 이러한 방어체계와 더불어 공격용 무기인 ICBM과 SLBM에 대한 협상도 시작됐다. 소련과 미국은 각자 보유하고 있던 ICBM(소련: 1,619개, 미국: 1,054 개), SLBM(소련: 740개, 미국: 656개)의 숫자를 동결하되 동결된 수 안에서 질적 개량은 허용한다고 합의했다.14)

키신저는 NSC 회의에서 1960년대 중반까지는 전략적 균형에 있어 특별한 변화는 없 었으나 현재 소련의 전략적 무기 능력은 매우 강해졌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소련, 중 국과 협상이 자칫 서유럽과 일본에게 힘의 균형에 변화를 초래할 거라는 의구심, 곧 가령 일본의 경우 매우 불안해하고 있고 재무장을 추진하려 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 에 따라 소련과 협상하고 군사적 부담을 줄일 수 있다는 희망을 주면서 동시에 소련에 대해서는 신뢰성 있는 군사태세를 유지할 것을 주문했다.15)

1972년 5월 미·소는 ABM 합의에서 방어능력 하락에 대한 합의와 ICBM, SLBM에서 공격 능력을 동결시키는 전략무기감축협정(SALT)에 정식 서명함으로써 냉전기 미·소 의 군비경쟁을 완화하는 첫 결실을 거두었다. 미국이 소련과 SALT에 합의했다는 것은 과거와 같이 봉쇄와 경쟁을 통해서 비싸게 경쟁을 하는 것에서 데탕트를 통해 싼값에 경쟁하는 공간을 열었다는 것을 말하며, 이는 미·소 모두에게 이득이었다. 레어드는 SALT가 맺어지자 미 의회 상원외교위원회에서 “극동과 중동에서 군사원조 삭감을 협 상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16)라고 말했다. 하지만 주변국에게 이것이 이득인지는

12) “78. Address by President Nixon to the United Nations General Assembly.” Oct. 23, 1970, Department of State, FRUS, Foundations of Foreign Policy, 1969~1972, p. 276.

13) 이근욱, 냉전 (서울: 서강대학교, 2012), 90쪽; 제임스 E. 도거티·로버트 L. 팔츠그라프 지음, 이수 형 옮김, 미국외교정책사, 360~361쪽.

14) 제임스 E. 도거티·로버트 L. 팔츠그라프 지음, 이수형 옮김, 미국외교정책사, 362쪽.

15) “96. Memorandum of Conversation.” Aug. 13, 1971, Department of State, FRUS, Foundations of Foreign Policy, 1969~1972, pp. 331~333.

불분명했다. 전략무기 제한의 상한선이 높고 다른 핵보유국들이 이 협정의 정신을 따 를지는 미지수였다.

하지만 미국과 소련이 항상 협조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건 아니다. 가령 베트남전을 두고서는 협조와 갈등이 발생하고 있다. 베트남 문제의 경우 1964년 통킹만 사건 때만 하더라도 소련은 베트남전에 개입하는 것을 꺼렸다. 하지만 미국이 북베트남을 폭격하 자 소련은 북베트남을 지원함으로써 베트남전에 본격 개입했다. 소련의 북베트남에 대 한 지원은 미국과 대결의 차원에서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지원의 성격도 있었지만, 중·소 분쟁도 영향을 주었다. 소련은 아시아에서 중국보다 유리한 지위를 차지하기 위 해 북베트남으로부터 정치적 지지를 얻기 위한 측면도 있었다. 하지만 소련의 북베트남 에 대한 통제는 강하지 못했고 소련으로서는 그렇게 이득이 되질 않았다. 한편 미국에 게 베트남전은 소련과 미국의 대립이 베트남전쟁을 종결하기는커녕 계속 유지하는 상 황을 만들어 냄으로써 미국의 상황을 어렵게 하는 요소였다. 미·소 둘 다 사활적 이익 이 아닌 곳에서 대립은 서로에게 이득이 아니었기 때문에 양국은 베트남전을 두고 서 로 협력노선을 유지하기도 했다.17)

베트남전을 둘러싼 소련과 미국의 협조체제는 비록 불안정했지만, 계속 이어졌다.

1972년 1월 21일 키신저는 도브리닌을 만났다. 이 만남에서 그는 2월 닉슨의 중국 방 문을 앞두고 북베트남이 만일 남베트남에 대해 공세를 실시한다면 미국은 이에 대해 강력한 대응을 할 것이고, 이는 미·소 관계에도 영향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베트남 문제가 사라진다면 미·소의 다른 모든 분야에서 빠른 진척이 있을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소련이 북베트남을 설득할 것을 조용히 요청했다. 이에 대해 도브리닌은 소련은 북베트남의 공세에 어떠한 이해관계가 없고, 베트남전쟁이 끝나야 한다고 원론 적으로 대답했다.18)

하지만 북베트남은 미·소 정상회담으로 앞둔 1972년 3월 30일 춘계 대공세를 시작 했다. 사건 3일 전 브레즈네프(Leonid Brezhnev)는 닉슨에게 미·소 정상회담이 중요함 을 언급하며, 미국의 북베트남에 대한 계속된 폭격이 상황을 어렵게 한다고 말했다.19) 그런데 3일 후인 30일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대공세를 시작한 것이다. 북베트남의 대

16) “레어드 상원서 증언, 미-소, 군원감축 협상 가능.” 경향신문 1972년 6월 22일 3면.

17) 김정배, “베트남전쟁과 미소관계, 그리고 냉전체제,” 미국사연구 제42집(2015), 233~260쪽.

18) “39. Memorandum of Conversation.” Jan. 21, 1972, Department of State, FRUS, Soviet Union, October 1971-May 1972(Washington D.C.: United States Government Printing Office, 2006), p. 128.

19) “72. Note From Soviet General Secretary Brezhnev to President Nixon.” March 27, 1972, Department of State, FRUS, Soviet Union, October 1971-May 1972, p. 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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